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6 - 2. 비잔틴 미술 - 4

草霧 2013. 4. 10. 11:21

 

 

 

중세 미술 6

 

로마 속의 기독교

 

2.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 4

 

 

D. 근대로의 교두보

콘스탄틴누스 대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거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1453년까지의 동방기독교사회의 미술이다.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옛이름 비잔티온에서유래된 말이다.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에 펼쳐진 중세 미술을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비잔틴 문화권은 유럽에서 아시아·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미술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비잔틴제국은 11세기동안 지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비잔틴예술은 제국이 멸망한뒤에도 러시아등 슬라브지역까지 영향력이 미쳤다.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최초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고대 말기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이미 동서 지중해 세계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볼 수 있는데, 동방 그리스도교 미술이 그 독특한 양식을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6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그 뒤에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이 끝난 때인 843년까지를 제1, 마케도니아왕조와 콤네누스왕조기인 912세기를 제2, 팔레올로구스 왕조기인 1315세기를 후기에 해당하는 제3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잔틴제국의 미술은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의 자연주의 양식과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고대 동방 미술의 엄격한 정신성에 뿌리를 내린 추상적 양식과의 융합에서 탄생하였다. 교회 건축, 모자이크나 프레스코기법에 의한 벽화, 납화 기법의 종교화이콘(icon), 채색사본삽화, 상아나 금은의 세공, 칠보 등의 공예품 분야에 화려한 중세 미술을 구축한 이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은 신학이론을 기초로 한 절대적인 신에 대한 찬미에 있다. 종교화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금도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에는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를 이들 그림들이 중세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다른 여러 시대하고는 달리 이질적이고 특색있는 미술을 만들어 전개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의 미술이 모든 의미에 있어 기독교 미술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 있어서도 기독교 미술은 풍부한 전개를 다하고 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앙과 교리란 틀 안에 있으면서 신의 지배와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예술적 개성은 종교적 권위의 규범과 제약 아래서만 성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 집단적인 협동 제작이었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교리이며 또 민중의 신앙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미술로서의 조건이 중세미술과 기타의 여러 성격을 대부분 규정짓는 것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도상학적 창조의 원천은 고대, 즉 비잔틴에서 그 표현적인 사실을 보게 되었다. 도상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봄으로써 정신을 집중시키고 초현실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창조성을 갖게 된다. 또한 그러한 힘이 형식을 갖추어 발전할 때 그것이 바로 예술로 승화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서양에 있어 상징적인 장식의 출현은 역사적으로 볼 때 성상숭배금지의 해지와 관련성을 갖는다. 서양에서 기독교는 콘스탄틴의 종교 자유 선포 이후 발전을 거듭해 왔으나, 그 선포가 콘스탄틴 황제의 독자적 실행이었으며 이후 황제들은 종교의 자유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신격화가 불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통치가 어렵게 되자 은연중 종교 박해를 지속해오고 있었다. 그 한가지 수단으로 시행된 성상금지령(726-843)은 모든 사람들의 생활의 기본 중심이었던 성당건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상금지령의 해지후 성당은 '문맹인을 위해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곳'이 되어야 했으며 눈으로 보고, 읽고, 알아볼 수 있도록 신의 말씀을 조각해야했다. 한편 비잔틴의 황금빛 dome 그림 속에 표현된 금관이나 보석, 그리고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통해 중세인들은 상징적인 장식을 이루어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철학적 바탕은 무엇이었는가? 상징적인 장식의 출현, 즉 중세 예술이 표면화될 수 있었던 데는 프로티누스(Plotinus, 204-270)의 철학이 큰 역할을 했다. 플라톤 철학과 신학의 대학자였던 그는 플라톤 철학과 종교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 신학을 태동케 하였으며 이후 신플라톤주의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프로티누스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은 모든 생명적인 존재의 1인자이며 이것은 그 자체 일체의 관념과 지식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빛을 보고, 희망을 갖고, 힘을 얻어서 살아가게 되는데, 이 세가지는 모두 1인자의 것이며 종교적으로 볼 때는 매우 추상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표면화시켜야 하는가, 또한 예언자와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의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게 된다. 그에 의하면 중심 광원에서 멀어질수록 그 빛은 점점 희미하게 되며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절대자-천사-정신-영혼-물질'로서 단계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 이 을 단순화하여 표현한 것이 바로 성당 정면의 tympanum에 종종 나타나는 부조이다.

 

즉 로마네스크 시기에 이미 나타나는 '최후의 심판'이나 '신의 영광' 등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3단계로 나뉘어 신의 세계와 천사·성인·성녀의 세계, 그리고 지상의 인간의 세계로 나뉜다. 이것은 바로 위의 프로티누스의 철학을 단순화한 것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본래 종교건축물은 박해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삶이라는 것이 원래 박해를 받게 되는 운명을 지니는 것이며, 따라서 종교인들에게는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임무가 부과되는데, 바로 종교건축은 이러한 견뎌냄을 위한 환경의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원형을 바로 catacomb에서 찾아 볼 수 있다. catacomb에서의 종교생활 형태는 'orant', 즉 자신을 완전히 신에게 맡기는 자세로서, 이것은 동시에 종교의 기본적 자세이기도 했다. catacomb에는 기호적인 상징성이 많이 등장하는 동시에, 신이 만들어낸 창조물을 찬미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칭송을 표현한 풍경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한편 catacomb의 기본 형태인 둥근 원의 지붕인 dome은 이후 건축의 구조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양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원형 중심의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원형은 완벽한 원리의 구현체로서 신의 세계를 암시하며, 완벽한 우주를 상징한다.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 성 피에트로 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룰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정으로 한정된 화면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중세 초기는 플라톤의 예술의 창조 이론에, 후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의 제작과 과정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이 전파될 당시 여러 사상가 중 플로티누스는 미에 관하여 플라톤과 다른 설명을 제시하고 예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미학사에 크게 공헌했다.

 

신과 예술가의 유비

플로티누스는 창조적 상상력을 인간의 자유의 형태로 보았다. 롱기누스는 상상력을 영감이라는 용어로 사용하여 같은 문제를 예술철학과 창조성의 문제에 집중하였다. 플라톤에게 신은 기술자이며 우주의 제작자였으며 인간은 소우주의 축소판이었다. 아리스토 텔레스의 경우는 우주는 영원하므로 예술가와 신의 유비는 큰 의미가 없다. 플라톤이 예술가를 모방자로 간주한 것과는 달리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는 예술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플로티노스에게 궁극적인 실재는 일자로서 내재성과 초월성을 갖는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의 예술과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미를 소유하고 자연의 결핍을 채우는 존재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학적 예술론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 신학의 결합에 기초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술철학은 외부적조건의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미적인 것을 의지의 자유와 연관시키는 예술의 완전한 자유에로 향한다. 플라톤이 인간이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이며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으며 자연의 질서를 고정된 법칙들 중 하나로 본 것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개입을 인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학이 예술에 대해 갖는 의미를 강조한다. 플로티누스보다 더 플라톤적인 면을 보이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은 시간의 영역으로 향한다."고 말하며 수적인 혹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예술에 관한 저작들에 들어있는 신학적인 전제들은 두 부분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추를 검토하고, 둘째는 미와 신의 의미를 비교한다. 신은 의지의 행위에 의해 세계를 창조하고 질료를 창조한다. 미의 부패는 추인데 신은 악이나 추에 대하여서는 책임이 없다. 또한 모든 아름다운 일상적인 것들은 그 아름다움을 신으로부터 얻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술을 바람과 연기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수학적 형태들의 미가 찬양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너머에 있는 최상의 미를 주목하며, 이러한 이데아(최상의 미)는 신의 창조성의 핵심이며 다른 미들은 이로서 의미를 갖는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지적 예술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삼위를 자연이성에 의해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의 정도에서 벗어난다고 주장한다. , 성서에는 이성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 많이 있다는 관점이다. 즉 신앙은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예술철학에서 신이 무로부터 우주를 창조하여 형상 또는 이데아가 신 안에 있다는 가설과 예술을 제작으로 보는 이론 사이의 이분법이 존재한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형상의 유사성이 제작자에게 들어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편을 택한다. , 신은 미를 만물에 나누어주며 예술가는 기술자라는 관점이다. 중세의 예술론 중 단테를 살펴보면 그는 여러곳에서 추상적인 토마스 철학을 예술가의 언어로 옮기고 있다.

 

중세 예술의 상징주의적 성격

중세의 상징주의는 미적 세계관을 표현한다. 첫째는 미에서 신의 손길을 발견하는 철학적 습관과 연관된 형이상학적 상징주의이며 둘째는 우주적 우의로서, 세계를 신의 예술작품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상징은 좀 더 철학적이고 대상의 의미가 불투명하며 독창적이고 우의는 대중적이고 관례화되었다. 예술을 자연과 동일한 견지에서 보고, 예술을 우의적 의미에 귀속시켜 예술 역시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예술적 우의는 중세 문화의 예술품들이 모두 자연의 대리물이라는 점으로 나타난다. 가장 엄격한 우의이론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결정화되는데, 그는 이러한 은유가 성서에 이익을 주는지와 성서가 하나이상의 의미를 갖는지에 대하여 물으며 좀더 합리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1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최초 황금시대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변방이었던 라벤나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을 성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 쌍의 모자이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547년경, 이탈리아의 라벤나, 성비탈레 성당) 에서 융성한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이루어진 화려한 유림모자이크의 현란함을 맛볼 수 있다. 신하와 성직자 및 시녀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은 새로운 인간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726년에 이르러서 황제의 성상금지령이 발단이 되어 약 1세기동안 비잔틴 회화와 모자이크의 발달은 중단되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즉위한지 6년째인 532,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다. 비잔츠 사의 자료에서 데모이(민중)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은 종종 커다란 정치적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수도장관과 황제를 내모는 봉기로까지 발전했다. 이와 같은 시위운동의 발단이 되는 곳은 히포드롬스(마차경기장)였다. 마차경기는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를 통해 익숙해진 경기로 경기롤 보러 온 군중은 조를 나눠 응원을 했으며 모인 군중은 조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요구와 불만을 그곳에서 황제에게 直訴할 수가 있었다. 마차경기장은 황제와 민중이 직접 마주 대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경기장의 단체 가운데 청조와 녹조는 차츰 경기장의 응원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지닌 당파로 성장해 갔다.

 

532년 청조와 녹조가 소동을 일으켜 수도장관은 그 주모자를 체포, 사형을 선고했고 경기장에서 시민은 그것을 취소하도록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조와 녹조는 한데 뭉쳐 니카(승리)를 외치며 수도장관 관저를 불태웠고 황제궁의 일부, 하기아 소피아 성당, 하기아이레네 성당이 불에 탔다. 이것이 니타의 난이다. 폭동의 기세에 놀란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목숨을 부지하지 말고, 황제의 옷을 입은 채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라"고 황제에게 엄하게 말하는 황비의 말에 용기를 얻어 봉기의 진압에 성공했고 이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황제는 자신의 治世로 비잔틴제국 최대의 영화와 영토를 차지한 것이다. 난이 평정된 뒤, 곧바로 착수한 것이 불타버린 하기아소피아성당의 재건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부터 성상파괴운동 종결까지인 이 시대의 대표적 기념 건축물로서는 먼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대성당을 들 수 있다. 바실리카형 교회에 돔을 올리는 그리스도교 건축의 꿈을 실현한 것인데, 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의 대부분이 9세기 이후의 것이다. 6세기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는 북이탈리아 라벤나의 여러 교회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그리스 테살로니카의 여러 교회, 시나이산의 하기아 카타리나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이집트의 사카라와 바위티의 수도원들의 프레스코 벽화 등이 제국 영토 내의 각지에 현존한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안티카교회의 프레스코 벽화도 이 시기 비잔틴 양식 회화의 귀중한 작품이다. 비잔틴 회화에서 제2의 중요한 장르인 이콘도 시나이산의 작품처럼 6세기의 것이있다. 이콘은 비잔틴 미술의 성자 숭배에 얽힌 독특한 형식의 종교화로서 그 뒤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왕조(912세기)

성상의 표현을 우상 숭배로서 금지하여 100여 년 동안 비잔틴제국을 뒤흔든 성상파괴운동이 종결된 뒤, 앞 시대의 미술을 재흡수하면서 진정한 비잔틴 양식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미술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성상을 긍정할때도 삼차원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에는완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환조적인 성상대신 이콘이 발달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8681057)에서 콤네누스왕조(10571185)에 걸친 시대이다. 건축에서는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에 돔을 올린 교회당이 910세기에 성립되었다. 비잔틴 교회 미술은 실로 신의 영광찬미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교회 및 벽화는 그리스의 다프니수도원 교회, 호시오스 루카스수도원 교회, 키오스섬의 네아모니수도원 교회 등에 보인다. 또 이 시대는 슬라브 제국의 그리스도교화에 따라 비잔틴 미술양식이 제국 주변으로 퍼진 시기로 마케도니아·세르비아·불가리아·러시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시칠리아섬에는 지금도 훌륭한 벽화가 있는 교회당들이 남아 있다. 이콘도 성상파괴운동 이후 특히 융성했다. 이 시기의 벽화·이콘·사본삽화에서도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인 자연주의적 양식과 추상적인 동방 양식 또는 민족적 지방 양식의 융합이라는 비잔틴 회화의 일관된 과제를 볼 수 있다.

 

2황금시대(850-1200)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에 나타난 정신화된 인간미의 이상과 휼륭하게 조화된 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책형(11C, 다프니 수도원)1기 황금시대의 모자이크에서 강조된 영원성과 신성에 고전미술의 인간성과 육체적 우아함이 덧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전주의의 심오한 일면은 인간적 감정의 고귀함에 있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이스 미술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억제되고 고귀한 인간적 고통의 표현이다. 이콘icon 즉 패널에 그려진 성화상은 제2황금시대에 수많이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성상파괴 논쟁 이전으로 소급된다.

    

3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

1204년 이후 57년 동안 계속된 제4차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거가 끝나자 비잔틴미술은 팔레올로구스왕조기(12611453)에 최후의 꽃을 피웠다. 정밀한 기법에 의한 부드럽고 우아한 정신이 감도는 이 시기의 벽화는 실로 중세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일대 종말을 알리는 아름다움을 가진다. 이미 터키인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 제국은 쇠약해지고, 문화의 중심도 점차 지방으로 분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미술이 마지막까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기아 소피아대성당과 코라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 벽화가 보여주고 있다. 1·2기의 장중하고 위대한 양식은 모습을 감추고, 조심스러우며 세련된 섬세한 감정 표현이 나타난다. 또 그리스의 미스트라, 소아시아의 트라브존(트레비존드),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지방 양식화된 이 시기의 여러 벽화가 남아 있다. 비잔틴 미술은 제국 멸망과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다. 아토스산을 비롯하여 각지의 수도원이 그리스정교와 함께 그 미술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성모자에서 보이는 미의 이념은 이전의 고전시대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데, 밀랍화 수법과 명암에 의한 모델링은 로마 초상화와의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모습의 묘사에서 천상적인 미의 이상과 조소적인 표현이 두드러 진다. 또한 기하학적 화면구성에서 연유하는 강한 인상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콘은 예술의 창의성보다는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는 것이었다. 옥좌의 성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후면의 광휘에서 우리는 당시의 작품이 강조했던 바를 알 수 있다.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를 위한 제실 및 내진과, 신도를 위한 신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 (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비잔틴 건축의 스타일은 그리이스식의 십자형의 정방형평면과 로마세계의 돔양식을 둘다 빌려 왔다. 그 결과는 돔으로 된 진흙, 벽돌조의 키로키티아 집들에 기묘하게 영향을 미쳤다. 콘스탄틴 대제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공인하여 그때 건축은 교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비잔틴 건축은 기독교를 실천하도록 새로운 자유를 북돋았을 때였다.

 

비잔틴 건축가들은 그들 스타일에 기본을 이루는 십자형의 상징에서 강한 건축형태를 발견하였다. 그리이스 십자형이라 命名된 이같은 형태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신앙생황을 할수 있도록 지붕이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며, 평면은 돔으로 덮힌 중앙에 집점이 고정되었고 초기 기독교의 길다란 본당과 회랑이 있는 순수한 바실리카 형태와 대조되었다.

 

스타일을 강조하기 위해 비잔틴 건축가는 사각형의 평면 위에 둥근 돔을 지탱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둥근 원통형 단면 위에 세워진 로마식돔은 비교적 해결이 용이했다. 시라아인은 사면을 팔면을 바꾸는 삼각슬햅을 구석에 놓아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고했으나 하단에서 삼각형 석재부분이 보인다는 것은 둥근형태와 조화되지 않았다. 달마티아의 스팔라토아에 있는 팔각 모슬리엄에서 로마인은 벽돌조 보울트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는 스퀸치라고 알려진 공법에 의해 3개의 벽돌조 아치는 삼각돌 까지 突出하여 그것을 덮어 감추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折衝的 해결에 불과했다. 마지막 아치의 면은둥근 형태와 여전히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펜덴티브(pendentives)라 불리는 볼록하게굽은구석사면의 밑동과 돔의 원형 밑동 사이와의 흐름을 이어주는 소피아 대성당이 건축됨으로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십자가의 구상을 추상하는 비잔틴건축가의 결정과 그들의 예술적 순수성의 연출은 그들의 강렬한 信念을 보여준 것이다.

 

돔 원통형, 그리스 십자형(Greek Cross)은 비잔틴 교회건축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높고 긴 돔 형탑과 사원하부의 사각형 몸체와의 결합된 효과는 비잔틴 교회를 강렬한 형태로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성소피아와 같은 거대한 성당이든 카프니카리아 같은 작은 교회이든 패턴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형태는 축제분위기와도 같이 복잡한 것이었다. 중앙 돔은, 돔의 호를 따라 놓여 있는 로마식 타일로 덮혀있으며 때때로 그 돔의 가장자리는 수평적이었고, 원통형이나 탑에서 눈썹처럼 창문의 아치모양 위로 곡선을 이뤘다. 종종 중앙 돔은 십자형 팔익부와 구석간 위에 다양한 높이로 서 있는 작은 돔의 그룹으로 둘러싸여 있다. 콘스탄티노풍에서 석재는 유용하지 못했다. 가장 유용한 재료로 - 벽돌용 진흙덩이, 콘크리트용 자갈이 가장 많이 쓰였고, 대리석과 기둥용 거석은 지중해변에 있는 채석장으로부터 수입을 해야했다. 한정된 재료를 사용하여 가능한 한 매우 풍부하게 장식을 했다. 두께가 1.5인치 쯤 되는 벽돌 타일과 돌블록 사이에 모르타르가 뚜껍게 바라졌다.

 

타일과 돌은 줄을 번갈아 놓였는데, 타일은 변칙적으로 배치되었으며 돌은 엄격한 규칙아래 놓였다. 내어 쌓기는 지붕밑에 조각용 프리즈로 사용되었고, 프리즈는 창옆과 아치 위에서 얇고 동근 벽됼 리브(rib)로 서 이어져 있다. 에테네의 스몰 메트로폴리스경우처럼 석재작품은 복잡한 형상과 형태로 조각되었다. 이런한 세부적인 것들이 융합되어 건축작품을 거대하고 장엄한 조각품으로 만들었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 묘당,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과 앞뜰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 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 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출처, 월산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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