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6 - 2비잔틴 미술 - 2

草霧 2013. 4. 9. 12:48

 

 

 

중세 미술 6

 

로마 속의 기독교

 

2.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 2

 

 

B. 고대 미술에서 비잔틴 미술 참조하세요.

_ 로마 속의 기독교

 

   

고대 미술 7편을 참조 바랍니다.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1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2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동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로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6세기 이후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us(527-565)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숭배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의 반목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성상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우회한다.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7세기 이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잃어버렸고,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한때 재흥기가 있었다. 그 문화권에는 동지중해, 발칸반도, 러시아가 포함되었다. 제국 자체는 13세기에 계속되는 터키인의 침입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의해 약체화되고 붕괴되었다. 15세기 중엽 1453년에 오스만에 의해 멸망한다.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 337)의 비잔티움(Byzantium)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305월 제국의 수도를 경제적, 전략적 요충지인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지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나 이 수도 이전은 제국을 동, 서로마로의 분할을 초래하였으며 서로마 제국은 얼마가지 않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황제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 (그 후 밀라노 칙령)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역사상 그 어느 지배자도, 알렉산드로스도, 앨프레드도, 샤를마뉴도, 예카테리나도, 프리드리히도, 그레고리우스도, 콘스탄티누스만큼 대제라는 칭호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 영국의 역사가 존 노리치는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이렇게 콘스탄티누스를 높이 평가했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가 전통의 다신교 대신 기독교를 로마의 사실상의 국교로 정립하고, 전통의 로마 대신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세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누스는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새로운 로마를 세웠으며, 그 영향은 로마가 사라진 이후에도 서양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313년 밀라노 칙령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소집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또는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750~850)

 

  

성모 마리아에게 성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상도, H.W.브루워, 1891 () 성 베드로(Old St. Peter's) - 로마. 319-22년경.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형을 보여준다.

 

 

현재의 로마 교황청 전신 건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527~ 565)의 전성기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는 재임기간 중 확고한 동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켰다.

 

532년의 시민폭동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정일치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일 뿐만 아니라 이 택한 이 땅의 대리인이 되었다. 황제 치세인 527년에서 565년에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동로마 제국으로도 불리는 비잔티움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최대의 판도를 이룩했다. 그는 분열된 동서 교회를 통합시키고, 이탈리아 본토 회복과 지중해 세계의 통일로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다.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대제국의 꿈을 이루려 한 그는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았다.

  

 

535년 니카의 반란

테오도라 황후

아카키우스 분열(교회 분열, 484~519) “신이 하나이듯, 교회도 제국도 하나여야 한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와 그리스도 단성론의 문제

옛 로마 제국의 전성기 판도를 회복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재건한 아야소피아(소피아 대성당)

 

 

    

 

7세기에 페르시아의 침략

테오필로스 (Θεόφιλος, 829~842) 성상파괴와 테오도라(Θεοδώρα, 842~855)의 성상옹호

8,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의 반란

에이레네 황후의 787년 제2차 니카이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도록 정했다.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의 도움으로 이콘을 유지 결정이 났다.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포티오스 논쟁

마케도니아 황조와 제국의 최전성기

1054년 교회의 대분열

콤네노스 황조와 십자군(1090)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12세기의 부흥으로 모자이크화 부흥과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비잔티움의 가장 특징적 인본주의를 보인다.

1198년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약탈

1204년 라틴제국 건설과 망명정권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

 

 

2부 끝.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