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6 - 2. 비잔틴 미술 - 1

草霧 2013. 4. 9. 12:29

 

 

 

중세 미술 6

 

로마 속의 기독교

 

2.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 1

    

A. 중세 미술의 황금기

종교성과 서술성을 동시에 지닌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 정교의 미술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2-13세기, 즉 중세 말의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익명성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만들어졌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인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성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이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색채로 포장된 화사한 궁전예술

비잔틴 미술(Byzantine art)4세기 경부터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비잔틴 제국의 예술품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용어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된 철학과 문학과 과학의 위대한 저작들을 지키고 베끼며 끊임없이 연구하여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비잔틴 예술은 헬레니즘, 고대 아시아, 사산조 페르시아 등 다양한 예술을 흡수발전시켜 나갔다.

 

 

비잔틴 예술의 특징은 강한 종교적 색채로, 그리스 정교의 정통 교리와 강령에 충실한 신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교 예술과 강력한 왕권의 결합은 비잔틴의 독특한 궁전 예술을 꽃피우게 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고대의 위대한 학문적, 예술적 성과는 오늘의 서양에 전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말기의 불안감이 신앙을 잉태하다

말기 로마의 상황은 불과 50여년(235284)동안 26명의 황제가 나타나는 등 혼란기로,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다.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라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선전예술과 우상 파괴를 낳는다

 

기원 후 5세기까지의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이라 하는데, 이 시기의 기독교 미술의 면모는 카타콤catacomb이라고 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인 지하묘지에서 볼 수가 있다. 삼류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을 것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그리스로마 벽화의 화법을 이어받아 그리고는 있으나 그 기법이 치졸하고 단순하다. 그 이유는 미술의 전반적인 수준 저하와 무엇보다도 기독교 미술이라는 것이 세련된 화법이나 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스러운 가시적 현실상을 표현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다. 성상파괴를 지지하는 세력과 그 반대 세력의 반목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성상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우회한다.

    

기독교 건축의 모태, 바실리카(basilica)라는 모델을 제시하다

기독교가 공인 후,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 했다.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회중을 수용하기 적합한 구조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하여 이런 용도에 적합한 건물인 로마에서 집회소로 쓰였던 바실리카basilica가 새로운 예배당의 모델이 되었다. 바실리카는 직사각형의 큰방과 이방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기둥들로 구분된 긴 복도로 이루어졌는데, 방의 맨 끝에는 애프스apse가 있어 여기에 집회 의장이나 재판관이 자리를 잡게 되어 있었다.

 

 

 

건물의 중심부를 이루는 직사각형의 큰방은 배를 뜻하는 동랑(胴廊,nave)이라고 하고, 동랑 좌우에 있는 동랑보다 낮은 천장을 지닌 긴 복도는 측랑(側廊,side-aisle)이라고 한다. 동랑의 양옆 벽면 상단부에는 아치형 창문을 촘촘히 뚫어놓아 자연광을 실내로 끌어들이게 했으며 지붕은 목재로 만들어졌다. 그 동안 수많은 수리와 변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초기의 바실리카는 없지만 이 건물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라테란의 성 요한(St. John in Lateran). 313년경 공사 시작.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도 불리며 바실리카 교회의 시작을 알린 건물이다. 일부 변형이 있긴 했지만 지어지던 당시의 검소한 모습이 남아있다. 라테란의 성 요한 교회의 앱스 부분 <출처 : Stefan Bauer at de.wikipedia>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중의 하나인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출처 : wikipdedia>

    

문맹자 교화을 위하여 중세 종교회화가 탄생했다

 

 

그 벽면들을 어떻게 장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에는 반대하였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상기시켜주고 성경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 그림은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하며, 많은 수의 문맹 신도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형상들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745년 동로마에서는 우상 파괴론자들의 주장이 득세하면서 교회에서 종교미술이 금지된다.

    

모자이크의 신성을 부여하다

 

 

풍부하고 심오한 색채를 발산하는 색유리와 돌의 입방체를 꼼꼼히 짜 맞춘 모자이크의 반짝이는 표면효과는 거대한 교회당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교회당의 내부를 신성한 기운으로 감싸 안아 들어오는 신자들의 종교적 심성을 고조시키는 효과적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모자이크화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된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했다. 그들이 사용한 원시미술의 단순한 형식은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으로, 이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되어지게 된 것이다.

 

1부 끝.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