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6 - 2. 비잔틴 미술 - 3

草霧 2013. 4. 10. 11:18

 

 

 

중세 미술 6

 

로마 속의 기독교

 

2.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 3

 

 

 

C.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 (4~12C)

-도상(圖像)의 근원

비잔틴Byzantine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비잔틴 문화라 하면 1453년 터키에 멸망하기까지의 동로마제국 문화를 말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비잔틴이라는 지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이곳에 동로마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동서 문화를 절충한 기독교 미술로 동방미술과 서야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시킨것이다. 로마제국이 콘스타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후 서양 미술의 중심은 점차 동방으로 옮겨졌고 약 1천년에 걸쳐 서양과 동양 미술이 융합된 문화를 이루었다. 그 미술의 영향은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동유럽(특히 정교권) 문화의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다.

 

집중형 돔형식의 바실리카 (Basilica)

원래 고대 로마인들의 공공건물을 칭하는 데 사용한 라틴어로 대개 고대 로마 마을의 포룸에 있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바실리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크며 교황이 특별한 전례 의식을 거행하는 성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비잔틴 건축의 양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형식과 동방의 전통적인 팔각당(원당) 형식의 두 종류가 있다. 이것들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에서 집중형 돔형식으로 변화되고 돔 안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 등이 있다.

 

이콘 (icon)

성모 마리아나 아기 그리스도 또는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림을 성화, 조각을 성상이라 한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휴대 가능한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 즉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특히 황제의 선물로 사용되기 위해 디자인된 이콘들은 값비싼 금속과 애나멜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졌다.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화는 기원후 1세기에 처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8세기 동방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성화 문제에 대하여 우상숭배냐, 아니냐라는 신학논쟁이 벌였다. 이 문제는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게 아니므로, 성화 공경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현재 성화를 제작하는 기독교 종파로는 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이 있다.

 

빛을 표현한 장식미술, 모자이크(Mosaic)

기본적인 밑그림에다가 작은 조각들을 접착제를 바른 곳에다 하나씩 붙여 그림이나 모양을 나타내는 장식미술의 하나이다. , 도자기, 타일, 유리, 패각, 나무 등이 사용되며 건축물의 마루나 벽면, 혹은 공예품의 장식을 위해서 옛부터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모자이크의 주된 기법은 3가지가 있다. 직접 기법, 간접 기법, 그리고 이중 간접 기법이 그것이다.

 

비잔틴 미술의 주역은 모자이크였다. 로마의 모자이크는 돌조각으로 제작된 반면 비잔틴의 모자이크는 색유리를 불에 구워 만들었는데 거대한 채색효과를 낸다는 점과 멀리서 볼수록 효과적 이라는 점, 특히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를 지닌 비잔틴 모자이크의 색유리 파편은 빛을 반사하는 반사경 역할을 하여 보는 사람의 환상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신비적인 분위기는 서유럽 크리스트 미술(로마네스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필사본 성서의 세밀화 장식

비잔틴 미술에서 필사본 성서의 세밀화 장식은 건축과 함께 두드러지는 예술적 업적으로 꼽힌다. 암흑시대 수도사들은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교사, 예술가였는데 초기 채색사본들은 대개 이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작품의 주된 목적은 성서의 내용과 그 의미와 느낌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나 이외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의 우상파괴와 교회의 동서대분열

 

 

 

비잔틴에서는 726년 황제의 성상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성상 금지령은 그리스도와 성인, 성모마리아등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는 운동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의 벽화나 원본 조각상을 볼 수 없는 이유도 이 시기에 모두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의 근거는 '나 이외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성서의 기록인데, 이는 교리적으로는 성상 남용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교황 권한의 확장에 대한 왕권 회복 운동이었다.

 

한편 로마 교회에서는 게르만 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는데 성상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였다. 그후, 비잔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갈라져(1054),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한편 쇠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멸망하고 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로마문명의 유산을 흡수하고 기독교에 동화된다. 유럽의 중세문화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게르만족의 추상 장식문양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입었다.

 

성상 파괴 운동(聖像破壞運動)

 

 

8-9세기 동방 정교회에서 성화상(이콘) 공경이 금지되고 성상을 파괴한 운동이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을 양분시켜 내전을 초래하였으며 로마 교황청은 이를 비난하고 성상파괴논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청에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으며, 다른 요인들과 함께 결국 동서 로마교회의 분열, 즉 기독교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서로 갈라서는 최초의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1차 성상 파괴령(726)

730년 시리아 출신의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성상의 숭배를 금하는 칙령을(성상금지령)을 발하였다. 이에는 구약의 모세의 십계명에 열거되어 있는 "우상을 짓지 말라"가 근거로서 원용되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제국의 소 아시아 부분과 일부의 성직자, 지식인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국의 유럽 부분은 제국민들의 반발이 심하여 문화적, 정치적인 문제도 수반되어 제국을 2분시키는 대논쟁이 되었다. 제국의 유럽 부분에서는 반란도 일어났다. 이 대립은 원래 오리엔트 종교였던 기독교가 그리스화해 가는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726, 동로마 황제 레온 3, 우상파괴령을 발하다

레오 3세가 이 시기에 성상금지령을 발한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성상에 대한 공경이 부활한 후 성상파괴파의 저작 등은 이단 문서라는 이유로 파괴되었고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레온 3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탄압, 처형하였으나 논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서로마교회의 반발

한편 성상을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에 이용한 서로마 교회가 이 결정을 비난함과 동시에 그때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던 세금의 납부를 중지했고, 이로 인해 동서교회의 대립이 결정적으로 되었다. 서로마교회 입장에서는 게르만족에게 지금까지 포교 활동의 경험상 무언가를 보여주며 전도하지 않고서는 게르만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고, 그것이 성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의 반대는 단순히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래 기독교의 정통은 로마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발상지로서 오랫동안 중심지이기도 했다.

    

프랑크 왕국과 피핀 및 동서 교회의 분열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를 옮긴 후 비잔티움 제국은 게르만족에게 유린당한 로마보다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며, 그들의 보호를 자처하면서 로마를 게르만족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간섭하고 규제하고 있었다. 서로마교회는 이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특별한 명분과 실질적으로 자신들을 후원해줄 후원자가 없었다. 레오 3세의 성상파괴령은 그들에겐 명분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새로운 후원자는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린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새로운 후원자가 되었던 것이다.

 

결국 787년에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의 황후이자 비잔티움의 여제 이레네가 주재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성상공경의 정통성이 재확인되었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815년에도 다시 제2차 성상금지령이 발해져서 843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성상공경이라는 신앙전통이 부활하였다. 하지만 가장 큰 결과는 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 분리되는 최초의 분열로 두 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2차 성상파괴령(812)

812년 비잔티움 황제가 된 레오 5세는 다시 한번 상상파괴를 명한다. 이 때의 성상파괴는 레오 3세의 제1차 성상파괴령과는 달리 매우 현실적인 이유에서 일어났다. 제국에 모처럼만에 평화가 찾아오자 불만을 품은 전직군인들과 군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고 이들은 대체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이었다. 814년 레오는 성상을 옹호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로스를 불러 성상숭배의 근거가 없음을 말하며 그를 사실상 해임하고 성상파괴령을 발동하였다. 이로써 제국은 폭동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3부 끝.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