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6 - 2. 비잔틴 미술 - 6

草霧 2013. 4. 11. 11:45

 

 

 

 

중세 미술 6

 

로마 속의 기독교

 

2.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 6

 

 

E. 기독교과 이교도의 교합,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사원은 소아시아 출신인 두 사람의 그리스 건축가의 손으로 완성을 본 것이다. 대 돔으로 덮여져 있는 정방형의 본당을 중심으로 대 돔을 받치고 소 돔을 세 방향으로 배설하여 그 중압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서 바실리카 형식을 구성하고 있다. 이 공법은 가공할 때 돔의 중량을 역학적으로 분산·배분하는 훌륭한 역학계산을 근거로 성립되어 과학과 미의 결합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 형식의 특색은 오늘날의 건축에서 말하는 셸 구조와도 공통되며, 내관과 외관이 전적으로 일치하고, 모든 공간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에 있다. 단지 선()의 강조에 치우치기 쉬운 서방의 바실리카식에 대해서 돔바실리카식을 완성케 한 비잔틴 건축은 항상 기둥의 직선과 돔, 아치의 곡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이스탄불에 있는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

 

 

유스티니아누스1세가 즉위한지 6년째인 532,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커다란 폭동이 일어났다. 비잔츠 사의 자료에서 데모이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은 종종 커다란 정치적 행동을 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수도장관과 황제를 내모는 봉기로까지 발전했다.

 

532년 청조와 녹조가 소동으로 수도장관 관저를 불태웠고 황제의 일부, 하기아 소피아 성당, 하기아이레네 성당이 불에 탔다. 이것이 니타의 난이다. 폭동의 기세에 놀란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목숨을 부지하지 말고, 황제의 옷을 입은 채 영예로운 죽음을 택하라"고 황제에게 엄하게 말하는 황비의 말에 용기를 얻어 봉기의 진압에 성공했고 이 최대의 위기를 극복한 황제는 자신의 치세로 비잔틴제국 최대의 영화와 영토를 차지한 것이다. 난이 평정된 뒤, 곧바로 착수한 것이 불타버린 하기아소피아성당의 재건이었다.

 

비잔티움 제국 시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폭동 진압 후 바로 건립하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는 비잔틴교회양식을 대변한다.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중앙엔 거대한 도움을 얹고, 양쪽에 반원의 도움을 둘러쌓음으로써 전체가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의 스카이라인을 결정하였듯이 하기아 소피아는 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

 

 

터어키 지배 후 회교의 모스크로 쓰일 때 사방의 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이크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어있다. 마치 하늘 지붕 같은 거대한 도움은 금으로 도금되거나 반짝이는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대리석 벽과 기둥은 마치 레이스같이 잔무늬로 새겨져 있다. 내부에서의 성스러움이 중요시된 비잔틴의 돔은 실용성보다는 종교적 상징이 강조된 건축물로 이후의 종교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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