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5 - 1.중세 초기 미술 -2

草霧 2013. 4. 3. 11:31

 

 

 

 

중세 미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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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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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미술 (early christian art)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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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연재물들은 중세미술사 보다, 중세문화사에 더 근접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술(예술)은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탄생·성장·소멸의 3단계 과정을 거칩니다. 지나치게, 서론이 길다고 불평하시는 분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고고씽? 닥치고 읽어,....

 

B. 초현세적 분위기의 초기 기독교 미술 (B.C 1C~A.D. 4C)

 

 

 

그리스·로마 미술은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으나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미술이었다. 지하묘굴의 프레스코 벽화로 대표되는 카타콤 미술은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의 미술로 초기 기독교 미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초기 교회 양식으로 로마의 바실리카를 모방한 바실리카 양식이 주된 흐름이 된다. 이 시기의 동유럽은 이른바 비잔틴 미술과 새로 유입된 게르만 족의 투박한 미술이 유행하였다.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어 지상에 나온 후에도 5세기경까지 계속하여 제작되었다.

초기 기독교 미술은 그 중에서도 주로 이탈리아나 지중해 서쪽 지역의 미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새로운 구세주에 대한 갈망, 불안감은 내세신앙과 부활 탄생

 

 

기원 1세기 초, 기독교가 생겨난 이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관용령이 공포(311)되기까지의 300년간 가까이 이 종교는 역대 황제에게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제정 말기에 퇴폐적 경향과 국정의 불안이 높아져, 이러한 가운데 정신적 구제를 찾는 기독교인들은 날로 증가해 갔다. 1세기에서 시작되어, 5세기경 동방에서 비잔틴 미술, 서방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미술의 시대가 출현하기까지, 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로 불린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탄생은 두 가지 이유에서 초기 기독교 자체의 성립보다 상당히 늦게 되었다. 그 첫째 이유는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신학자 사이에도 그의 옳고그름을 둘러싼 논쟁이 있어 종교미술로서의 발생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둘째 이유는 황제의 박해로 인해 공공연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의 세계를 사랑하는 고전세계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미술을 형성해 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도상학, 사실적 묘사보다 상징성 강조

기독교 미술은 도상적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고대 고전기의 우상 숭배적인 양식과 예술 언어를 받아들였다. 기독교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기의 미술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미의 이념이라든지 시각적 아름다움, 또는 기술적 완전성 따위보다도 상징적 의의 때문이었다. 이는 새로운 도상학의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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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미술은 설교를 위한 미술로 교리를 기독교 도상으로 간단하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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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 미술

 

 

초기 기독교 미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의 경우, 그 예를 카타콤에서 잘 볼 수 있다. 박해를 피한 그들은 지하묘실에 제실이나 예배실을 만들어 매일의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이 지하 제실을 카타콤베(Catacombae)라고 부른다. 로마 주변 특히 아피아 가도를 따라 만들어진 상 칼리투스, 도미틸라, 프레테스에 있는 것이나 로마 시내의 상 아그네제, 프리실라, 나폴리, 시라쿠사, 알렉산드리아, 귀족의 사저 지하실에 제실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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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의 강화(특별한 존재를 우상화)

 

 

 

카타콤 내부는 지하에 여러 층을 이루면서 종횡으로 뚫린 갱도를 파서 주위 벽면 곳곳에 사자를 모시는 감실을 배치하고, 여기저기 광장을 만들어 이곳을 그들이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다. 벽이나 천장은 벽화나 부조를 이용하여 장식하고 있다.

 

 

기독교의 상징주의에 입각하여 그림의 모티브가 신중하게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는 주로 수염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장의 둥근원은 '천국의 돔(Dome)'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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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양치기

하늘의 연회

불멸성을 상징하는 수탉

영혼을 의미하는 비둘기

희망을 상징하는 닻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그리스도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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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이야기의 로마석관 (3세기말, 로마)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 재앙을 알리라고 명하였으나 요나는 도망치려고 배를 탔지만 거센 풍랑이 있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요나를 물 속에 던져 하느님께 바쳤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가 살려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를 살려주며 니느웨로 가게 하였다.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따르자 하느님은 언덕에서 쉬고 있는 그의 자리를 아주까리 잎으로 시원하게 까지 해주었다. 믿음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주제는 몇몇 일화를 첨가하고 있다. 위 왼쪽에 새겨진 나자로의 부활,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모세 등등. 석관의 가장 오른쪽에 새겨진 낚시하는 장면은 영혼을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할 것이며, 그 위에 작은 크기로 새겨진 양치기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 즉 구원자의 모습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였던 로마의 역사 부조방식과 사뭇 다르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요동치는 큰 물고기 그리고 아주까리 그늘 밑의 요나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른 이야기들은 남는 공간에 하나씩 넣는 듯이 배치하였다. 화면 구성의 면에서 서로간의 균형엔 관심이 없으며 조각을 하는 방법에서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하다. 인물이나 사물을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세부를 깊게 선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는 것에 관심을 쏟은 듯하다. -이은기의 멀티서양미술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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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적 세속화

초기의 것은 폼페이의 벽화 등과도 공통점이 많은 헬레니즘 미술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주제는 신이나 복음서의 내용 자체가 아니고 허다한 상징을 통한 표현이 행하여졌다. 자기들의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가장 소박한 이유에서 생겨난 초기의 장식은 식물이나 신화의 세계를 묘사한 세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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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의 등장

예수의 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3세기경

예수를 형상 그리스 조각에서 모방

제우스. 아폴로. 그리스 소년. 철학자 등에서 도상을 인용

물고기 모양('우리의 구원자 예수 크리스트'가 그리스어의 단어 첫자를 모은 ikthus라는 단어가 물고기라는 뜻)

이러한 주제에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자 단순한 장식도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흔히 쓰인 상징적 도양으로서는 목자(나는 선한 목자로다, 요한복음 제10), 포도 무늬(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요한복음 제15), 어린 양(보라 신의 어린 양, 이사야서, 요한복음 제1) 등은 성서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 밖에 전원 풍경과 로마 신화에서 취재된 낙원의 그림 등은 기독교의 천국의 상상도로서 전용되었다. 이러한 목가적 표현은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불후를 나타내는 공작, 성령이나 죽은 자의 영을 천상으로 옮기는 사자로서의 비둘기, 부활을 의미하는 불사조 등이 기독교적 상징으로 자연주의적 표현에 의해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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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청년모습의 그리스도 (3세기, 로마,국립박물관)

  

알체스티를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주는 헤라클레스

(비아라티나의 카타콤 벽화, 4세기 후반, 로마)

 

라티나 길가의 카타콤에 그려진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도상이 기독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혼합적인 현상을 잘 보여준다. 감실 양쪽엔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그려지고, 한 가운데엔 헤라클레스가 알체스티를 그의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 주는 장면이 있다. 이교의 신화가 왜 기독교인들의 기도장소에 그려진 것일까?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 신화에 익숙했던 고대 말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헤라클레스가 노역의 하나로 저승사자 케르베루스를 잡으러 지옥에 내려갔을 때 그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서 죽음을 택한 알체스티를 다시 살려 역시 되살려낸 남편에게 데려다 주었다. 즉 죽음과 부활의 주제인 것다. 헤라클레스의 이 일화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다시 부활하였으며 만인의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상징하게 되었다. 더구나 헤라클레스는 원래 인간세계에 있었으나 수많은 고통을 감내한 후 영원히 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갔으니, 사후의 영생으로 보상되는 현세의 고통을 나타내는데 더 이상 좋은 비교가 없었을 것다. 카타콤의 화가와, 무덤의 주문자, 그리고 이를 보는 이들은 이렇게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를 섞어가며 고대 말의 종교를 형성된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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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4세기 전반, 사이프러스에 있는 네아 파포스의 바닥 모자익)

기언뜻 보면 성모자와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같지만 이는 헤르메스가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이다. 어린 디오니소스는 아기 예수같이 두광을 쓰고, 이를 안고 있는 이는 마리아 같지만 머리와 발목에 날개가 달려있는 헤르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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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 도상으로 발전,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기 시작

 

 

 

이러한 상징적 표현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PX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물고기(그리스어로 '신의 아들 예수, 구세주'의 두 문자를 조합하면 물고기의 의미가 된다는 데서 유래된다), 또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물(오란테), 신자의 상 등 신앙 자체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러한 것들은 선각이나 일종의 프레스코로써 표현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神的(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인간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형태) 사이에 일종의 類比(유비)관계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 미술이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람들의 감성에 다가가는 형태를 취하게 됐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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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기독교 도상(존엄한 지배자, Maestas Domini)

 

 

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이크(390, 로마), <존엄한 예수(Cristo in Maesta)>

<알체스티를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주는 헤라클레스>(4세기 후반, 로마,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브 벽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중 황제의 훈시부조(312-315, 로마)

양감은 없어지고 평면에 깊이 새기는 방식의 낮은 부조로 변하였으며, 주변의 인물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황제는 중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황제이지만 주변인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해 대상을 보이는 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각시키고자 하는 중요성에 따라 크기와 위치를 정하였던 것이다.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으로 황제에게 두광까지 씌워서 신성시하고 있다. 이제 황제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이며, 미술은 그렇게 믿도록 설득하는 매개체였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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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 기단부분(390, 대리석,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

위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황제와 대신은 소위 로얄 박스로 차별화하고, 황제는 한 가운데 제일 크게 위치해 있다. 사실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일률적이고, 따라서 개별화 시킬 수 없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로지 크기가 큰 황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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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와 엘리에제(비엔나 창세기 필사본 삽화.6세기경, 비엔나 도서관)

사물들은 실제 우리 앞에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특정 의미 전달을 위한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창세기 24장 중 레베카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제가 만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이 종을 시켜 자기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를 골라오게 하였다. 엘리에제는 낙타 열 마리와 함께 길을 떠나 나홀이라는 성에 다다랐다. 성에서 나와 물을 긷는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항아리 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다. 엘리에제는 레베카라고 하는 이 처녀를 이삭의 신부로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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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는 오른쪽 위에 그려진 나홀성에서 나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기둥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우물에 이르고 있다. 왼쪽에는 반나체로 그려진 샘의 님프가 자기 항아리에서 물을 샘으로 흘려 넣고 있고 물을 기른 레베카는 낙타 열 마리를 데리고 온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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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선 기둥들보다 사람을 크게 그린 것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실제의 공간감을 나타내는 데 큰 관심이 없음이 분명하며, 연속된 시간에 일어난 레베카의 두 장면을 같은 공간에 그리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에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형상들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나타낸 현실의 모습이기 보다 이야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2부 끝.  3에서 계속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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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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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A.D 500 - A.D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종교 개혁(1517)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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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이여! 구원하소서!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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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미술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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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