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5 - 1.중세 초기 미술 -3

草霧 2013. 4. 4. 11:04

 

 

 

 

중세 미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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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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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미술 (early christian art)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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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연재물들은 중세미술사 보다, 중세문화사에 더 근접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술(예술)은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탄생·성장·소멸의 3단계 과정을 거칩니다. 지나치게, 서론이 길다고 불평하시는 분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고고씽? 닥치고 읽어,....

 

C. 공인 후 기독교 미술, '승리 교회 시대'

 

 

건축에는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커다란 교회당이 나타난다. 이 건축들은 서유럽 교회당 건축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는 집회당과 신전과 사저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도상적 관념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주로 고대 고전기의 우상숭배적인 양식과 예술 언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기의 미술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미의 이념이라든지 시각적 아름다움, 또는 기술적 완전성 따위보다도 상징적 의의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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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그리스인들과 달리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이었으며, 순수미술작품보다 도로, 水路(수로), 시가지 장식과 같은 실용적 목적의 구조물을 많이 만들어냈다. 미술의 경우 그리스 미술의 대부분을 模作(모작)하거나 그대로 수용했다. 우리가 고대 문화를 일컬어 그리스·로마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로마는 대제국의 광대한 영토와 다양한 이민족의 통치를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인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330년경 새 수도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불림)을 건설하게 된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바실리카라는 교회당 건축 양식이 생겨났는데, 그것은 밖에서 祭式(제식)을 올리는 고대 신전과는 달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구조의 건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내부를 조각과 회화로 장식하면서 종교미술의 길이 열렸다.

 

 

새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정한 이후 로마는 100년도 되지 않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과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제국으로 분열된다. 그리고 서로마제국은 북쪽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476년 멸망했으며,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 멸망할 때까지 1000년을 지속하게 된다.

 

 

바실리카 식 교회당

5세기경부터 황 대규모의 교회 건립 시작

천상의 세계에 군림하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절대자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함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장소로 대도시에 건립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지상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은 사도 순교의 땅을 비롯하여 요소에 교회당을 건설하였다. 기독교 교회와 고전시대의 종교적 신전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단순히 신이 거처하는 집인 데 대해, 후자는 신의 주거인 동시에 신도가 그곳에 모여 예배상의 의식이나 집회를 행하는 장소였던 점에 있었다. 따라서 후자는 제실 이외에 보다 큰 공간이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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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가 채택한 교회 건축의 한 양식은 바실리카 식이었다. 고대에 거래소 · 재판소 등,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공공건물 형식과 유사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바실리카 식 회당의 기원은 근년에는 교도 박해가 적었던 오리엔트 지방에 있던 교회 건축과,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민가 양식이 구 바실리카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이다. 이 형식은 그 후 중세를 통해 교회 건축의 원형이 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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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평면도에서는 우선 교회당 전면에 넓은 아트리엄이 있고, 여기에는 성천분수가 있다. 다음 입구에는 참회자가 머무는 작은 방인 나르텍스가 있고 그 안쪽에 본당이 있게 된다. 당내는 입구에서 제단까지 잇닿은 좁고 긴 네이브를 사이에 두고 양측으로 일렬 또는 2열의 계단이 있고 그 사이에 줄지은 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제단 앞에는 승려가 의식을 행하기 위한 장소인 비머가 네이브와 직각으로 폭넓게 교차되어 있다. 비머는 후세, 특히 중세의 트랜세프트로 발전하여, 자형 플랜을 구성한다. 후기에는 비머 앞에 성가대석이 놓인다. 또한 제실의 후편은 반원형으로 튀어나오게 한 애프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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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고대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네이브가 아일보다 높고, 여기에 채광을 위한 높은 창이 있다. 기둥은 네이브의 주벽을 받치기 위해 창과 평행으로 세워졌으나 아치 구조가 발전됨에 따라 기둥 사이는 넓어진다. 지붕은 처음에는 목조의 박공 형태였으나 후에 석조의 아치 구조로 발전하였다. 애프스의 지붕 내부 및 제실과 네이브를 구분하는 아치형 부분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성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라테라노의 성 조반니

성 파울로 폴리 레 무라(폴리 레 무라는 성외란 뜻)

5세기 건립된 성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성 사비나 사원

성 클레멘테 사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312년 겨울에 일어난 마센티우스 전쟁에서는 전날 밤 꿈에 키로(Chi-Rho) 형태로 나타난 하느님으로부터 "이 기호로 정복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깃발에 이를 새겨 싸운 후 이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키로는 크리스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약자인 XP를 한 글자로 만든 기호로 P라고 쓰며 현재도 카톨릭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기독교는 공인과 함께 정치적으로 로마 제정과 밀접해졌으며, 로마말기의 불안정한 사회상황에서 빠른 기간에 국가 종교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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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신전은 원래 신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종교행사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미사는 예수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공회당인 바실리카형식을 빌어 교회를 설계하였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시대에 재판이나 상인들의 중개, 그 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각종 행사에 쓰던 평범한 장방형 건물이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구조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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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현재의 바티칸 언덕부분을 교회에 주며 베드로의 무덤을 보호케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곳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하고 베드로의 죽음을 기념하며 또 미사를 드려야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축되어 4세기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해 기본원형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1718은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평면도와 원래모습을 짐작케하는 그림입니다. 회랑(nave)과 측랑(aisle)은 로마 바실리카의 원형에서 빌어온 것으로 교회는 이 장방형 부분을 신자들이 앉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좁은 한쪽 끝을 둥글게 한 후진(apse)은 제단으로 사용하여 이곳은 성직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제한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은 후진과 익랑사이의 중앙에 놓이고 무덤 위는 닷집으로 덮어 장엄하게 하였다고 추측되며 팔을 벌린 듯이 좌우를 가로지르는 익랑의 폭을 넓게 하여 이 무덤을 찾는 많은 순례객들이 운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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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카를 T자로 변형시킨 것은 십자가의 상징을 도면화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두가 같은 형태는 아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그 후에도 발전하여 다음주에 살펴볼 로마네스크의 상징적인 평면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중정(artrium) 부분은 도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붕이 없는 옥외 공간으로 바실리카가 지어진지 약 50년 후에 증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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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년 경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자리엔 <베드로 대성당>과 거의 같은 규모, 같은 구조의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로마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로마 성곽 밖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fuori le mura)이라고 부르는 이 교회는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18세기 동판화가 피라네지의 에칭을 통해서나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20). 400년경의 한 기록은 "내부는 궁정 같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코린트식의 대리석 기둥과 창문사이는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고 당시의 웅장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은기의 멀티서양미술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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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양식

초기 기독교 시대의 또 다른 건축 방식으로 집중식이 있다. 로마 시대의 묘당·욕당·신전 등으로부터 발달하여, 주로 세례당의 건축양식으로 쓰였다. 기둥의 열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원당 또는 팔각당 형식이다. 또한, 소아시아는 돔 형식이 발전된 곳으로서 독특한 돔 건축이 있었다. 이것이 비잔틴 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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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 콘스탄차는 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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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

한편 당시 교회 건물의 구성 요소 중 특징적인 것으로서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건물의 외경과는 달리 그 찬란한 광채로서 신의 영적인 위엄을 환기시키는 장엄한 세계를 연출해냈다. 당시 교회 건축은 이탈리아의 강한 일광을 피하여 두꺼운 벽으로 덮여 있으나, 이러한 큰 벽면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모자이크였다.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폼페이나 엘코라노를 거쳐 발달된 모자이크화는 힘찬 선과 호화로움을 표현하는 점에, 새로이 세력을 넓혀가는 기독교 미술의 정신과 동방적인 취향에 적합한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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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작품에는 카타콤와 공통되는 헬레니즘 적 목가적, 또는 장식적 소박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으나, 4세기 말의 산타 푸덴치아나에는 12사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거리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를 눈앞에 그리는 장면이 있다. 또한 5세기 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서쪽에 신·구약 성서가 벽면에 도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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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권위 등장

예수의 모습도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표현

옥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표현

 

오히려 종래의 자연적 형체를 추구하는 사실적 방법을 벗어나 인상적·추상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형체의 간결과 강조를 통하여 교의 설명을 용이한 것으로 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모체가 된 동방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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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익(390년경, 로마, 산타푸르덴지아나)

후진부분의 모자익 벽화는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존엄한 예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머리엔 황금빛 두광을 둘러 성스러움을 상징한 예수는 주변의 사도들 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보석이 박힌 옥좌에 앉아있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에게 원로원 의원의 옷을 입히고 예수에겐 황제의 모습을 부여하는 발상은 기독교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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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385, 로마)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된 후 보수되었음. 지상에서의 황제의 개념을 천상의 예수에게 대치시키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인 로마의 교외엔 큰 교회가 지어졌다. 위 양쪽에 네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그려진 것으로 모아 이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는 심판자, 승리자, 지배자의 역할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데 승리의 아취는 바로 로마황제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개선을 기념한 소위 개선문의 개념이 교회건축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변의 다른 인물들보다 월등히 크고 엄격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도상을 우리는 '존엄한 지배자'라 부르는데 5세기에 시작된 이 개념과 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비잔틴의 판토크라토르나 로마네스크 시대의 예수도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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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회화나 건축에 비해 보수적인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등신대의 인물상이나 대형 예배당의 제작을 꺼렸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조각은 반모뉴멘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로마 조각의 공간의 깊숙함이나 당당한 규모가 없어지고 소규모의 형태와 레이스 같은 장식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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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란 대리석상(3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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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sisi.com/zbxe/?document_srl=572

http://blog.daum.net/mischool2/69

http://www.easyum.co.kr/bbs/view.php?id=art_board&no=17

http://soeast.com.ne.kr/art14/art14-7.htm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2f0aa

http://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_%EB%AF%B8%EC%88%A0

 

3부 끝. 4부에서 계속 담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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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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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A.D 500 - A.D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종교 개혁(1517)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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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이여! 구원하소서!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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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미술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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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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