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5 - 1.중세 초기 미술 -1

草霧 2013. 4. 3. 11:27

 

 

 

중세 미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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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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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미술 (early christian art)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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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의 연재물들은 중세미술사 보다, 중세문화사에 더 근접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술(예술)은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탄생·성장·소멸의 3단계 과정을 거칩니다. 지나치게, 서론이 길다고 불평하시는 분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본격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고고씽? 닥치고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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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독교와 서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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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1 ~ 중세 미술 4편을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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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3.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_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오리엔탈

4. 기독교 만 존재 한다 _ 광기와 검열 그리고, 카니발

5.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_ 교황과 황제, 군주와의 충돌과 새로운 유럽의 시대

6.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_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7.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_ 이슬람과 문화의 이식 그리고 문화충격

8. 신이여! 구원하소서! _ 종교개혁자들

9.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_ 르네상스 개척자들, 과학혁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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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바뀌다.

철학, 역사, 문학, 과학과 예술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독자적으로 생성, 발전하지 않는다. 서로 연관을 갖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화를 한다. 연결고리는 신이다. 서양문명도 마찬가지다. 서양문명의 중심축은 기독교이며, 그 심연에는 기독교의 신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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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신학은 당대를 지배적으로 주도하는 문명과 대립하는 동시에 융합하면서 성장해왔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온갖 박해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고, 이웃 사상을 접목하면서 교리를 발전시켰다. 서기 313,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300년 가까이 탄압해오던 기독교를 공식 승인하는 사건이다. 이후 기독교는 1700년 가까이 종교의 입지를 다지며 서양문명에 스며들어 문화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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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문명의 두 기둥은 그리스 문명에서 유래한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에서 퍼져 나온 <헤브라이즘>이다. 두 문명은 서로 대립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각의 문명을 형성하는데 <밀라노 칙령>이후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에 서서히 밀려난다.

 

교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기독교가 이론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잡아가는 2세기에서 9세기 까지의 기독교 초기의 시기를 교부들의 시대라고 한다. 교부들이란 기독교의 이론가들로서 온갖 미신과 이단적인 주장에 반대하여 기독교를 지키는 신학자들을 가리킨다. 이 교부들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는 일관적인 교리를 구축하게 된다. 초기 교부들의 활동은 이집트 지역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중세의 출발과 스콜라 철학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의 존재 증명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활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최고의 존재이자 최고의 선인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아퀴나스에게는 신의 은총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타락 이전의 고결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야말로 신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최고의 행복이다.

 

민족 대이동과 유럽의 형성

서양의 중세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4세기 후반 흉노족이 아시아로부터 밀려오자 남하하여 게르만 제부족은 이른바 민족 대이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속속 로마제국 영내에 들어왔다. 이 혼란 가운데 서로마제국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 멸망하였다

 

북부에 진출한 프랑크족은 기독교, 아타나시우스파를 믿음으로 견실한 발전을 하여 서구의 안정세력이 되었다. 프랑크왕국의 역사가 어느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탁하여 서로마제국을 서유럽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 주고 게르만 문화와 로마문화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써 묶음으로써 새로운 유럽문화를 이룩할 바탕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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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교회는 동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거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상숭배문제로 동로마제국과 결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교회는 새로운 보호자를 찾고자 하였고 피향은 유명무실해진 왕으로부터 왕권을 빼앗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왕이 되어 카롤링왕조를 시작하였고 이때 피핀은 그 답례로 라벤나 지역을 헌납함으로써 오늘날 로마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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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그의 아들 찰스가 800년에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게 된 것은 양측의 제휴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찰스 이후 프랑크왕국은 다시 분열하게 되었고 이후 메르센 조약에 의해 중,,서 프랑크로 나뉘어져 오늘날의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3국의 기틀이 되었다. 여기에다 9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이슬람교도와 미쟈르인, 노르만족 즉 바이킹들의 침입이 있었다.

 

게르만족의 종사제

게르만족의 대이동 (4~6세기)

프랑크 왕국의 흥성은 원주지를 거점으로 삼아 확대,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안전지역에 거주, 피정복민의 문화와 쉽게 융합

클로비스의 메로빙 왕조(481-751)

찰스 마르텔의 이슬람교도 격퇴(732)

피핀의 카롤링 왕조(751-987)

726년 동로마 황제 Leo3세의 성상파괴령을 계기로 동로마 황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후원세력을 찾는 로마교회와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프랑크 왕국이 제휴, 피핀은 이탈리아 중부에 침입한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 라벤나 지역을 로마 교황에게 기증(754, 로마 교황령의 시초)

샤를마뉴(찰스대제)의 카롤링 르네상스 (800, 서로마 제국의 부활)

기독교가 로마카톨릭과 그리스 정교로 양분되는 분기점

프랑크왕국의 분열, 베르덩 조약(843), 메르센 조약(870)

이민족의 침입, 마자르, 이슬람, 노르만(바이킹)의 침입

봉건제 성립

봉건제의 주종제(군사적), 지방분권제(정치적), 장원제(경제적)

카놋사의 굴욕(1077)

서임권 투쟁과 보름스 협약(1122)

교황 이노센트 3세의 교황이 기독교 세계의 중심임을 선언, 교황권의 절정기(1198-1216)

라테란 종교회의(1215)

십자군 전쟁(1096-1291), 중세 안정기의 축적된 인적 물적 자원, 중세인의 열렬한 신앙심, 교회 지도자들의 동서교회의 통합 노력과 교세회력의 발전 주도 의지, 명예와 전리품 확보하려는 기사들의 욕구, 새로운 시장을 확보하려는 상인들의 입장

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점령과 비잔틴 제국(동로마) 황제의 구원 요청,

교황 우르반 2세가 클레르몽 종교회의(1095)에서 성지회복

1차 십자군 때(1096) 성지 예루살렘탈환-예루살렘 왕국건설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종결

중세사회의 붕괴 촉진 전쟁 주도한 교황의 권위 손상과 기독교에 대한 열정 위축, 기사계층의 몰락, 왕권 강화, 도시의 발전, 동방과의 교류, 교역활성화, 상공업 발전, 화폐경제의 발전, 장원제의 붕괴

중세 도시의 등장 (10세기 후반)

도시의 자치권 확립과 장원제 해체에 기여

길드(guild), 경제적 공동이익을 위한 배타적 단체, 길드체제의 제약

 

봉건제와 장원제가 탄생하다

유럽은 서로마제국 멸망의 4세년 말엽부터 10세기말까지 약 600여년 동안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무질서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요청된 것이 안전의 보장과 질서의 유지였다. 이에 무력을 가진자들이 대두하여 이들이 그 지역 치안을 유지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지배체제로서 서서히 자라난 것이 바로 중세 유럽의 봉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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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도는 무력을 가진자들이 사적인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군주와 봉신의 관계. 즉 군사적인 주종제를 만들었다. 이는 게르만의 종사제와 은대지제가 융합해서 나타난 것으로 형성된다. 따라서 주종제에 입각한 통치체제는 지방분권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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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제도로서 결합된 봉건제 지배층은 다 같이 전사인 동시에 토지 소유자였고 그들의 토지는 장원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장원에는 그 경작을 위한 농민들이 딸려 있었다. 농민들은 그 땅의 주인인 영주를 위하여 경작해 주었으며 그 대신 그 영주의 보호하에 생명을 으지하고 또 땅의 일부를 빌어 경작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주종제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 양자는 구조적인 연관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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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문화인의 임무는 하나다

중세기에 있어서 예술가들의 주요한 임무는 각종 시각형상으로서 종교적인 이야기들을 서술함으로써 기독교의 교리를 형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였다. 예술은 기독교 교회의 통치하에서 신()을 위해 복무하는 도구로 되였으며 후세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작품의 작자의 이름을 모른다. 기독교의 금욕의 전제하에서 그리스도만이 라체로 예술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라체적인 표현은 철저하게 배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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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기의 예술은 비잔틴예술, 로마식예술과 고딕식예술이라는 이 세 가지 단계로 나뉘기는 하지만 조각, 회화, 채색유리화 등은 모두 교회당의 건축을 장식하는데 리용되였다. 그래서 19세기의 프랑스의 저명한 랑만주의 작가 빅토르 유고는 중세기의 정신사는 대교회당의 돌들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설파했던 것이다

 

기독교 중심 문화로 세속적 문화 미약, 일상생활까지 지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스콜라 철학을 종합적으로 집대성, 중세의 대표적 철학,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관심

로마네스크 양식, 11-12세기, 둥근천장, 두터운 벽, 적은 창문, 어두운 내부

고딕 양식, 12세기, 뾰족한 천장, 얇은 벽, 큰 창문, 밝은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바로크양식, 17세기

로코코양식, 18세기 <!--[if !supportEmptyParas]--> <!--[endif]--> 

 

중세 말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 (13세기말-14세기 이후)

중세의 전성기인 11-13세기는 농업 기술혁신(마구개선, 삼포제, 축력이용의 변화로 소에서 말로), 생산력 증대, 인구증가 그러나 13세기 말에서 14세기부터 중세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감소, 노동력부족, 생산량 감소와 곡물가격 상승

인구감소에 따른 노동력 부족

사회적 혼란, 농민반란과 도시민의 반란

백년전쟁 발발(1337-1450), 왕권 강화, 민족개념 형성, 봉건제 붕괴

장원제의 쇠퇴, 14세기부터 쇠퇴

지대의 금납화, 봉건영주의 몰락

마그나카르타(대헌장, 1215), 국왕권에 대한 귀족의 권익 옹호

아비뇽유수(1309)와 교회의 분열(1309-1376), 국왕권과 교황권의 충돌,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프랑스왕 필립4세에 의해 아비뇽에 유폐, 이후 아비뇽과 로마에 각각 교황이 나타나 교회의 분열이 시작

백년전쟁(1337-1450),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왕위계승권과 경제적 이해관관계에 원인, 국민의식 형성, 봉건 기사 계층의 몰락, 왕권 강화

황금문서(금인칙서, Golden Bull, 1356), 신성로마제국 황제 Karl 4세가 반포, 대공위시대 이후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고자 시도한 제국법, 국왕을 7명의 선제후가 선출, 독일에서 영방국가 발전

스페인왕국(카스틸랴와 아라곤 통합, 1479)

흑사병

초기 자본주의적 요소, 선대제(putting-out system)와 신용체제(어음제도) 합리적 기업운영 방식 채택(복식부기) 중세 말기에 대두

 

 

교회의 쇠퇴 (13세기말 이후)

교황의 세속적인 정치 세력화 십자군 전쟁 실패 교회의 형식화

아비뇽 유수 (1309-1376)

 

 

교회 개혁운동(14세기 이후)

후스, 위클리프의 성서 속에 구원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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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는 초기 500년동안은 전쟁과 약탈, 혼란한 정치가 계속되는 일종의 암흑시기(Dark age)였다. 그리고 예술은 기독교 교리전달의 보조수단이라는 신() 중심의 인간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였으므로 예술에 있어서도 암흑시기였다. 중세는 초기미술과 로마네스크, 유비법 붕괴 이후의 고딕양식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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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미술 등 14세기까지 서양의 화가들은 대부분 예수나 성인의 일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종교화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금도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에는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를 이들 그림들이 중세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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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는 다른 여러 시대하고는 달리 이질적이고 특색있는 미술을 만들어 전개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의 미술이 모든 의미에 있어 기독교 미술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 있어서도 기독교 미술은 풍부한 전개를 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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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앙과 교리란 틀 안에 있으면서 신의 지배와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예술적 개성은 종교적 권위의 규범과 제약 아래서만 성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 집단적인 협동 제작이었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교리이며 또 민중의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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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도가 도덕적 설득력과 조직적인 포교활동

 

미술은 단지 문맹자들에게 신의 섭리와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생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들은 신()적이고, 영원하며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바꾸는 데 미술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미술가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 이므로 당연히 신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이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익명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뚜렷히 통일된 하나의 양식이 나타나지 않은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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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가 요구하는 미술의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에 표현 방식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중세를 () 중심의 인간관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자연현상을 신의 섭리나 메시지로 해석하고 평가했던 시기인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술은 미술작품이라는 그 자체의 목적을 갖기보다 신의 메시지나 기독교의 교리 전달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됐다.

 

 

 

교리서 속의 삽화나 교회 건축 및 그 안에 장식된 조각과 회화가 또 다른 하나의 복음서 역할을 했으며, 無學(무학) 文盲者(문맹자)들의 교화용으로 쓰인 것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한한 인간이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중세미술을 유지시켜 온 하나의 근간이었다.

 

1부 끝, 2부 계속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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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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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A.D 500 - A.D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종교 개혁(1517)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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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이여! 구원하소서!

새로운 세기는 우연히 왔다.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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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미술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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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