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Ⅳ, A. 신이여! 구원하소서!-1

草霧 2013. 3. 30. 12:44

 

 

 

중세 미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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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종교개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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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는 대중들, 파업에 동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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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이여!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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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

서양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준 사건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부패한 교회를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모든 기독교는 개신교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개혁교회 곧 장로교회 등)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구분되어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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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중세 유럽의 방황, 즉 정부의 혼란 · 대중 교육의 결여 · 전반적인 미신숭배가 정리되고, 계몽된 믿음의 삶이 열리게 되었다. 개혁자들의 정열적인 주장과 설득에 따라 교권주의가 도전 받고, 그 대신 만인제사장주의가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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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제사장주의란 사제에게나 교회 전통에 의존하지 않고, 세계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구속자이신 유일한 하나님과 그의 계시로 기록된 성경 말씀만을 의지하여 개개인이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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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성 어거스틴의 신학 재발견

 

종교개혁자들의 양심과 지성에 뿌리를 둔 교회개혁운동이었다.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자들은 옳지 못한 것을 보고 분노를 느끼는 단순한 정의감이 아닌, 로마 가톨릭 교회의 문제점들을 논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신학실력을 갖춘 지성인들이었다. 루터를 위시한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설파하고, 특히 성경적 원리와 이 원리를 정립한 사도 바울(The Apostle Paul, AD. 10?~67?)과 성 어거스틴(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430, Augustin)의 신학을 재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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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교리는 중세의 세계관 밑에서 포괄적 국가 종교로 군립한 로마 카톨릭에 대항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의 성속(成俗)의 이원론을 붕괴시켜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새로운 직업관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개혁이야말로 참으로 근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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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Πλάτων, bc 427~347)의 이원론의 해체

특히 중세 시대의 특징은 200년간의 전쟁인데 결국 챨스 대제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정신문화의 배경에서는 플라톤의 이원론으로 개인의 신앙 고백이나 지성, 사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인데 이것이 십자군 전쟁에서 깨어졌다.

 

로마 재정 말기 경제 문제와 프랑크족의 군사문제가 결합한 중세 봉건 문화 사회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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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Αριστοτέλης bc 384~322)의 이성주의 대두

15세기 도시인들이 사회구조에 꼭 교황이 필요하냐는 문제가 대두되어 사회구조가 와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율적인 이성주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때를 맞추어 스콜라 철학이 등장하는데 이성과 신앙의 반반으로 민족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교황의 권위가 있었지만, 후기로 오면서 왕권이 강화되어 절대왕조가 생기므로 민족주의로 로마교회 권위가 상실하였다. 더불어 교황의 분열로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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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 등장은 로마 교회의 보호막 구실을 했으나 말기에 윌리엄 오캅(William of Ockham, 1285 - 1349)”유명론보편 논쟁에 밀려 스콜라학의 벽을 뚫고 근대과학·근대사상의 길을 준비했다. 또한, 남방문예부흥은 예술로, 북방문예부흥은 학문적으로 고전을 공부하다보니 성경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사상과는 로마교회가 다름을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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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전 고대로 돌아가자로 이성주의 즉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에 아주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그것은 로마교회가 잘못됬다”(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 ~ 1536))는 말은 루터의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15세기 - 16세기에는 특히 성직자 타락과 농노의 반란, 종말론적 운동 출현,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갈망하게 되고 때마침 흑사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신앙에 대한 갈망이 더욱 종교개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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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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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적 국가주의(Nationalism)의 등장

A. 영국, 헨리8세 이혼소송과 성공회(Church of England,1534) 설립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1453~1485)으로 랭커스터 왕가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1485년 헨리 7(Henry VII, 1457 ~ 1509)가 튜터 왕조(Tudor dynasty1485~1603)를 확립했다. 헨리 8(Henry VIII, 1491~ 1547)는 아내 캐더린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로마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이혼을 청구하였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Karl V, 1500 - 1558)의 고모인 캐더린이 이혼에 대한 보복을 모면하고자, 이혼을 거부하였다.

 

그 뒤 그는 가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영국 국교회(國敎會)인 성공회를 설립하였다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크랜머 대주교 입회하에 캐더린(Catherine of Aragon, 1485 ~ 1536)과 이혼하고 앤블린(Anne Boleyn, 1501?- 1536)과 결혼했음을 공포했고, 1534년에는 정식으로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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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종결(1492)와 통일(1469) 그리고 1516년 카를 5세의 즉위

 

1469년 아라곤의 페르디난드 2(Fernando II de Aragón y V de Castilla "el Católico",1452 - 1516)와 카스틸의 이사벨라 1(Isabel I de Castilla, 1451 - 1504)가 결혼함으로써 스페인은 국가주의의 초석을 깔게 되었다. 이 후 스페인의 국가적 영광과 권력은 신성로마제국의 챨스 5세이기도 했던 챨스 1(1516-56) 치하에서, 또한 필립 2(Felipe II de Habsburgo, 1556-98)의 영도하에 획기적으로 신장되었다. 그리고 1516년 카를 5(Karl V, 1500 - 1558)의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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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신성로마제국의 정치 구조의 모순, 선제후 선거제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들

카를 4세가 발표한 금인칙서 (1356), 왕을 선출하는 선제후 및 왕을 선출하는 과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15세기까지 명칭 상 신성로마제국의 통치 영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황제는 세습제가 아닌 지역의 선제후들이 뽑는 선거제에 의해 선택되었다. 선제후들을 위시한 각 지역의 왕자들은 거의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했는데, 독일 연방에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생길 때는 제국 의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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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는 합스부르그(Habsburg)가 태생으로 당시의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부르군디, 알사스, 카스틸, 아라곤, 나폴리, 시실리와 스페인의 해외 식민지까지 차지한 대제국의 군주였다. 그는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형성을 도모하고자 했다. 또한, 프랑스와 전쟁(1521, 1527, 1535,1 542, 1551) 및 오토만 터키와 전쟁(1529~1538)으로 황제는 전장에 있었다. 국내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위임하였으나, 농민 전쟁(1526)이 일어났으며 루터의 슈말칼덴 동맹(1531)이 맺었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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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 카를 5세의 즉위 후, 루터와 같은 개혁주의자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포했지만 독일 제후들의 협력 없이는 루터를 처리할 수 없었다. 특히 선제후 프레드릭의 비호를 받고 있는 루터를 황제는 함부로 손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1521년부터 1530년까지 루터의 종교개혁이 유럽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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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가톨릭 개혁, 예수회(Societas Iesu, 1534) 창립

교회가 구원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임에 불구하고 교황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했고 타락에 박차를 가할 뿐이었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부는 독신으로 생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적으로 방탕해 음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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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교회 개혁을 기치로 교황 바오로 3(Paulus PP. III, 1534 1549)주도하였다.

 

3. 과도적 사회구조 변화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붕괴되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났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었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교황청이 세금과 지나친 사치는 루터가 개혁으로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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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화 (European Colonization of the Americas)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이후, 세계 무역이 가능해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부의 분배에 있어서 변화가 뒤따랐다. 자본주의적 질서의 융성과 함께 빈부격차 생겨났으며, 도시 내의 무산자 계층도 형성되었다. 부의 증대, 사치 생활, 도덕적 타락은 16세기 초반 도시 생활에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부유한 도시민과 가난한 노동자 사이에는 증오심이 심화되었다. 결국 경제의 불균형적 성장이 정치 위기를 조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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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르네상스 (Renaissance, 1350-1650)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스 · 로마(Greece · Roman) 시대의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몽골 제국의 서진과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신학자 오캄의 사상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확산되었다. 새로운 학문은 초대교회의 교의와 교부들의 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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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모든 근원으로 돌아가자”(Ad fontes)는 운동으로 발전함으로써, 문화의 전 영역건축, 그림, 조각, 문학, 철학, 종교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운동의 인본주의를 진작시킨 것이다. 인간들이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관심의 영역은 초자연에서 자연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북유럽 대학가는 인문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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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북유럽의 인문주의(Humanism) 성행과 성경 원전의 출현

르네상스로 말미암은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 신학자들의 저서와 성경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가속화하게 함으로써 결국 종교개혁의 사상적인 면을 제공하게 되었다.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 초기에 인문주의 집단으로부터 정신적인 지원을 받았다. 또한, 서책이 활자체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로 사회 비평의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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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기의 루터 추종자들인 인문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를 필두로 루터에게서 돌아섰다. 루터가 독일 남부의 농민 반란(1524-25)에 대해 무력 진압을 주장한 것, 인간의 합리적 정신보다 성경과 믿음 만으로의 주장, 그리고 <교회의 바벨론 유수, 1520> 등에서 로마 교회에 대한 과격한 공격에 대해 인문주의자들은 반발했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of Pomerania, 1485-1558)1523년 루터교회를 세웠고, 1537년에는 덴마크에 루터교회를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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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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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 우슈(1309-77), 로마 교황청과 아비뇽 교황청 간의 대분열(1378-1417)은 교황청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교황의 부패와 타락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교황 요한 22(Ioannes PP. XXII, 1316-1334)는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유명하였다.

 

교황 알렉산더 6(Alexander PP. VI,1492-1503)가 성직자의 축첩제도를 제도화하자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98)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자 이단으로 규정하고 처형시켰다.

 

교황 레오 10(Leo PP. X, 1513-1521)는 사냥과 오락을 즐기는 도박꾼이었다.

 

속죄권 판매 외에도 성직 판매가 성행되었다. 교구 담당 세금까지도 교황청이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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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콜라 신학의 붕괴와 유명론(nominalism) 발전

 

스콜라 신학의 붕괴도 종교개혁 이전의 중요한 종교현상이었다. 이 말은 중세시대의 사상적 지주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유명론 등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유명론(nominalism)은 로스켈리누스(Roscellinus)에서 시작하여 피터 아블라, 오캄 같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유명론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전체로서가 아니라 개체적이고 구체적인 통로를 거쳐 구원 문제를 설명하려 했다. 중세의 실재론은 전체적이고 보편적 교회인 카톨릭을 지지한다. 그러나 유명론을 따르면 존재 기반의 중심점이 카톨릭의 전체보다도 개체로써의 지교회로 옮겨진다. 더 나아가서는 만인제사장의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후기 스콜라 신학은 그 자체의 무리한 신학 체계와 지나친 교리의 복수화로 복음의 본질을 오도했다. 그것은 또한 형식적인 예전주의와 미신적인 신앙을 조작하여 성도들에게 가중된 죄책감을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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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독일 신비주의 운동 발생

 

중세 교회의 제도화와 교회 생활의 의식화에 따라 신앙생활의 활력을 찾으려는 신비주의적 경건운동이 벌어졌다. 이는 대중들을 탈교회화는 데 이바지하였다.

마이스터 엑하르트(Meister Echart, 1260~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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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건운동

 

전반적인 평신도들의 신앙은 물론 흑사병의 공포와 터키 이슬람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심의 증가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성지순례와, 성자숭배, 그리고 마리아 숭배가 열기를 띠었다. 새로운 기도문과 묵주(rosary) 사용도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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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끝, 2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