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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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문화의 이식 그리고 문화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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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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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신 보다,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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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와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부 오리엔탈리즘”을 참조 바랍니다.
기독교 세계의 팽창운동, 광기와 공포의 불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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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은 10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유럽의 팽창운동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사회적 힘이 외부로 팽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루살렘 성지회복은 명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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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년 3월 어느 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습격당했다.
기독교 광신도들이 근처 교회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간 후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조개껍데기로 난도질했다.
그리고 토막 난 시체를 광장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철학자 히파티아,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철학과 더불어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최초의 여자 교수였다.
히파티아(31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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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을 보는 또 다른 시각, 신성모독과 침략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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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이집트와 영국, 프랑스의 전쟁에서, 1191년 영국 국왕과 프랑스 국왕이 모두 참여한 제3차 십자군에 비유다.
이에 반하여,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1918.1.15~1970.9.28)은 제3차 십자군을 물리친 살라딘에 비유됐다.
<!--[if !supportEmptyParas]--> 제2차 중동전쟁 <!--[endif]-->
십자군은 기독교인에게 승리의 표시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슬람 지역에서 십자군은 신성모독이나 유럽인 침략행위의 표시로 이해된다. 또한 이러한 침략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관용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세계가 영웅으로 받들고 있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 ~ 1193년 3월 4일)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을 10 차 십자군 (10 th Crusade) 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실 조지 W 부시 (George W. Bush) 대통령은 2001 년 9월 16일 백악관 연설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십자군에 비교하기도 했다.
이슬람권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서방 세계의 간섭을 십자군에 비유하며 이슬람 정서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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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세계의 부활은 우연이 필연이 된 결과물
유럽이 이슬람 학문을 수입한 것 역시 충돌의 과정에서 이뤄진 교류의 결과다. 지중해 상업의 부활이 눈앞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학문의 수입은 유럽이 다른 세계를 이해하고 그 장점을 취해 자신들의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류와 충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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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년 3월 어느 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거리에서 한 여성이 습격당했다. 기독교 광신도들이 근처 교회까지 그녀를 질질 끌고 간 후 그곳에서 옷을 벗기고 조개껍데기로 난도질했다. 그리고 토막 난 시체를 광장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이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철학자 히파티아, 고대 알렉산드리아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철학과 더불어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친 최초의 여자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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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안, 무슬림 그리고, 문화이식
유럽의 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로마입니다. 그런데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을 제외한 유럽에서 그리스-로마시대 문화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며 게르만족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 민족들의 전쟁터가 되면서 약탈당하고, 파괴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남아있던 유산은 서로마 제국에서 동로마제국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고대 문화를 서유럽 지역에서는 누릴 수가 없었고, 카톨릭은 카톨릭 이외의 종교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허허벌판에 기독교 “야훼”만이 신이고 진리이다. 나머지는 이단이고 배척의 대상이다.
교황의 지상명령이 발동한다.
제군들이여! 관용은 필요 없다. 모두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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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 멸망 후, 많은 비잔틴제국의 학자와 문헌이 서유럽지역으로 옮겨집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고 거부감이 적은 오늘날 이탈리아 지역으로 문화 대이동이 시작된다. 이는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이자 시작점이 되었다.
중세문화와 르네상스문화의 차이란 '종교'가 중심에 있느냐 '인간'이 중심에 있느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중세문화에서 모든 예술, 학문은 '신'을 표현하고, '신'을 모시는 '교회'의 통제와 그늘 아래에서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르네상스문화에서는 '신'과 '교회'는 인간은 속박하지 못하게 됩니다.
르네상스 문화에서는 인간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오로지 '신'을 표현했었습니다.
무엇을 하든 '신'을 통해서 표현되었던 시대가 중세라면, '신'을 벗어던지고 '인간'이 직접 앞으로 나서는 문화. 그것이 르네상스문화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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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유럽인이 종교중심의 유럽문화가 아닌 그리스-로마문화, 소아시아문화, 아랍문화, 이슬람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접한 이교도 문화는 신이 중심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이 중심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는 중세유럽문화에 대한 의문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르네상스 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향신료의 소비는 급상승한다. 따라서 향신료 무역이 크게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한 이윤을 독식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르네상스문화를 이끈 많은 작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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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부자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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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문화충격은 반동적 표현
3세기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생애를 보냈던 지역을 방문, 즉 성지 순례 여행을 해왔다. 또한, 이슬람의 통치자들이 종교적인 목적의 성지순례를 용인했다.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 전쟁의 격화로 위기의식이 고조된다. 이후, 성지 회복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며 유럽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얽혀서 무모한 십자군원정이 단행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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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로 발전했다. 십자군은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우호적이던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적 관계의 고리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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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십자군은 실패했으나,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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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수행한 후 귀환 중 독일에 포로로 잡히면서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난 것이 당시 플랜태저넷 왕조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의 필리프 2세 (필립 2세)는 많은 영토를 회득하고 카페 왕조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4세기 이후 100년 전쟁, 페스트의 창궐, 신항로의 발견 등으로 봉건제는 해체되고 절대 왕정이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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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약탈, 학살, 봉건 제도 붕괴,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흑사병,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서방에서 온 지식인들이나 혹은 상인들이 당시 절정에 이른 발달된 이슬람 문명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수학이나 화학, 그리고 고대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문명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 이슬람 문화권은 훨씬 앞서 있었다. 서유럽은 동방에서 대수학, 광학, 화학 (연금술 포함) 의 지식을 전파 받았다. 그리고 그 내용은 중세의 대학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르네상스와 이후의 과학혁명을 일으킨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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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혼돈기로 고대 문명의 지식의 상당부분을 잃었던 서유럽 문명은 이를 통해서 급속하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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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Algorism)과 이성(reason)
인도 - 아라비아 숫자와 계산법을 설명한 그의 저서가 12세기 경 서양에 전해지면서 서구 문명 역사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랍의 수학 지식은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의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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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로 쓰인 대수학 교재인 Al-Kitāb al-mukhtaṣar fī hīsāb al-ğabr wa’l-muqābala (복원과 대비의 계산)은 대략 서기 820년경 이슬람의 위대한 수학자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Muḥammad ibn Mūsā al-Khwārizmī) 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차 방정식과 이차 방정식, 그리고 제곱근 등에 대한 내용이 설명된 중세 수학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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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인도에서 아랍를 거쳐 유럽에 보급된 필산(筆算)을 뜻하며, 아랍의 수학자인 알콰리즈미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또한, 알고리즘은 수학용어와 컴퓨터 용어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수학용어로서 알고리즘은 잘 정의되고 명백한 규칙들의 집합 또는 유한 번의 단계 내에서 문제를 풀기 위한 과정이다. 예를 들면, 주어진 정확도에 맞도록 x의 코사인 값을 계산하기 위한 대수적인 과정도 알고리즘에 해당된다. 경험적 지식(heuristic)과 반대되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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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대 예술을 살펴보면,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미적 범주를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인상파 화가들이 눈에 포착된 일상의 아름다움 자체를 관객들에게 제공하였다면, 현대 예술은 오히려 우리의 사회 속에 내포된 한눈에 간파하기 힘든 숨어있는 진실을 끄집어내려고 시도한다. 조금 다른 시선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를 들어 우리에게 예술이란, 어쩌면 가상 이미지에 뒤덮혀 있는 현실을 들추는 것이며, 현실을 움직이는 일종의 규칙을 탐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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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기능은 이로서 변화한다. 예술은 사회에 새로움의 질을 가져다준다. 예술가들은 이제 작품의 창조자가 아니라, 예를 들어 프로그램을 위한 아이디어의 창조자다. 그의 지위도 변화한다. 저작권은 예술가와, 기술적 수단을 자신에게 제공한 사회조직 사이에서 분할된다. 예술가는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것이다. 그는 프로그래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고 예술로 이해할 수 있는 환경, 즉 감상자의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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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중동 지방과 유럽만 교류가 된 것이 아니라 몽골 제국 및 중국까지 교류가 넓어졌다. 몽골 제국과의 교류가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아무튼 서양 문명에 세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넓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 (Marco polo)의 동방 견문록도 이 결과로 나온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류는 서유럽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유럽인이 신항로를 개척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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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갈등과 지하드(jihad)
하지만 반대로 이슬람 문명권은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물론 십자군의 결과 이슬람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었다. 또 주요 이슬람 통치자들은 지하드(성전)을 구실로 정복 활동에 이용하였다. 하지만 십자군이 종교적 불관용성에서 후세에 미친 영향은 유대교 보다는 이슬람과 기독교간 갈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슬람교는 특히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악한 이교도라는 인식이 유럽인들 사이에 강조되었다. 중세 시대에 존재했던 탁발 수도승들은 이런 '사악한 이교도' 에 대한 선입견을 널리 퍼트리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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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슬람교도 1차 십자군의 마라트 알 누만 사건이 후 불경한 무리들은 야만적이고 무도하며 신의 없는 인간들로 그려지는데 가끔씩은 식인종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슬람권에서는 특히 19세기 유럽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과거의 불편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후 유럽 - 이슬람 문화권 역사에 계속되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갈등은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포그룸(Pogrom)과 홀로코스트(Holocaust)
특히 라이닝겐의 에미코는 유태인 탄압의 유명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포그룸 (Pogrom)은 유태인에 대한 폭력을 의미하는 단어로 주로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유래한 단어 이지만 넓게는 유태인에 대한 폭력 전체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후세에 포그룸이라고 불릴만한 유태인에 대한 폭력과 학살은 이 무렵 서유럽에서 더 성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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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를 새로운 악으로 규정하고 볼세비즘에 대한 십자군 (Crusade against Bolshevism) 을 주장했던 나치 치하 독일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 시기 독일은 볼세비즘을 또 다른 이교도 내지는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일 타도하는데 유럽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지금도 이들이 만든 수많은 선전 포스트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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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tolerance)와 앵똘레랑스(intolerance)
기본적으로 일신교를 정신세계의 근간으로 삼는 중세 기독교 사회는 고대의 로마 시대 같은 넓은 종교적 관용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 십자군 운동은 이단에 대한 불관용의 강도를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단에 의한 최초의 십자군인 알비주아 십자군이 13세기 초반에 탄생한다. 교황의 요청으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므로 십자군을 동원해 이단을 처벌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파문과 선교(Propaganda; missio)
이단판별과 아디아포라, 그리고 똘레랑스
독선과 마녀적 종교재판
이단과 신비주의 운동
독선적 이단판별과 압제적 종교재판 및 형벌
‘아디아포라(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 문제)’
꽁지스트와(Consistory)를 통한 이단판별과 똘레랑스
특히 베지에 학살 (The massacre of Beziers )은 역사의 오점이었다. 알비주아 십자군이 마무리 단계에 이를 때 교황청에서는 체계적으로 이단을 척결할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한다.
이른바 이단 심문관 (Inquisitor)의 도입이 그것이었는데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y IX)는 1230년대에 일련의 조치를 통해 향후 백년간 “마녀 사냥(Witch hunt)”으로 알려진,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고문하고 처형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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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끝. 2부에서 계속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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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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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supportEmptyParas]--> <!--[endif]--> 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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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종교 개혁(1517년) 르네상스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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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753~476 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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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476BC-1453) <!--[if !supportEmptyParas]--> <!--[endif]--> |
|||
아메리카 문명 (300~1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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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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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여! 구원하소서!” 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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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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