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 알비 십자군 )

草霧 2013. 3. 19. 12:51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CRUSADE)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십자군 전쟁의 배경

     

십자군 전쟁의 원인

      

십자군전쟁의 시작

      

십자군 전쟁의 전개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군중 십자군 (1096)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리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3차 십자군원정(1189-92)

    

4차 십자군원정(1202-4)

5차 십자군원정(1217-21)

      

6차 십자군원정(1228-40)

  

7차 십자군원정(1248-52)

    

8, 9차 십지군 원정(1252-91)

      

알비 십자군 (Albigenses Crusades 알비파 십자군, 1209 29)

1209년에서 1229년까지 있었던 가톨릭교회의 십자군이다. 가톨릭교회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결성하였다.

 

프랑스의 카타리파 소탕 이외에도 프랑스 왕위 쟁탈전 및 아라곤 왕국의 영향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 결과 오시타니아 지역의 정치 관계 재편이 이루어졌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칙서를 반포하여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였다. 피에르 드 카스티니오를 사령관으로 하여 카타리파의 중심지인 랑그도크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량 학살되었다. 또한 도미니코회의 설립과 종교재판의 계기가 되었다.

 

1. 카타리파 (알비파) 확산 (1176)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교회는 언제나 이단에 대한 심판과 처벌을 해 왔으나, 12세기 이전까지 이단으로 규정된 교파는 극소수였다. 랑그도크의 카타리파는 대중적인 교파 운동 가운데 이단으로 규정된 최초의 집단이었다.

 

12세기 부터 남부 프랑스에 카타리파의 교세가 확장되었고 다른 지방으로 영향력이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카타리파가 형성된 기원은 아라곤 왕국이었으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던 랑그도크에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카타리파는 알비파라고도 불렸는데 1176년 알비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 지역은 많은 공국으로 나뉘어져 각 도시 별로 법체제가 달랐고,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십자군이 결성되기까지는 공정한 철학적 논쟁의 대상일 뿐이었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 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설교자를 통한 평화적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으나, 실패했다. 한편 카타리파의 지도자들은 지역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지역의 주교들조차 카타리파에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1204년 교황은 특사를 파견하여 주교 처벌, 1206년부터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을 파문하였다.

 

2. 레몽 6세의 파문과 교황특사 살해 (1207~8)

1207년 툴루즈의 레몽 6세가 파문되었다. 교황의 카타리파를 후원하는 귀족들 토벌 요청하였으나 프랑스의 왕 필리프 2세는 교황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1208년 레몽 백작은 교황특사 피에르 드 카스텔뇌를 만났으나, 격렬한 언쟁 끝에 특사를 살해하였다. 결국 특사에 대한 살인의 책임을 물어 랑그로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 출정을 요청하는 칙서를 선포한다. 칙서에서 십자군에게 이단의 근원인 랑그도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이 갈등 관계에 있던 남부 귀족들을 제거할 명분을 주었다.

 

3. 초기 랑그도크 지역 진압 (1209 1215)

1209년 십자군이 리옹에 집결하여 시작하였다. 툴루즈의 레몽은 카타리파 토벌에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로써 그의 파문은 철회되었다. 다시, 십자군은 레몽 로저 드 트랑카발의 영지였던 몽펠리에로 방향을 돌렸다. 레몽 로저는 툴루즈의 레몽 6세와 같이 십자군에 협조하기로 약속하였으나 회담을 취소하고 카르카손으로 달려가 방어 준비를 하였다. 7월 십자군은 성문을 부수고 베지에로 돌격하여 도시를 함락하였다. 베지에(Béziers)의 함락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후 여러 도시들은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4. 카타르손 공성전 (1209)

1209년 십자군이 카르카손에 당도하였고 도시를 포위하였다. 공성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레몽 로저는 협상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포로가 되었고, 815일 도시는 항복하였다. 시민들은 살해당하지는 않았으나 알몸으로 쫓겨났다. 카르카손이 함락되자 다른 도시들은 전투 없이 항복하였다.

    

 

 

5. 미네르바 공성전 (1210)

 

 

 

1209년 라스투르, 1210년 브람 점령, 미네르바 공성전 끝에 항복하였다. 카타리파에게는 가톨릭으로 개종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부분의 카타리파가 개종하였으나 끝내 거부한 140명은 화형에 처해졌다.

 

6. 툴루즈 공성전 (1211)

 

 

1211년 툴루즈의 레몽 6세는 다시 파문당하였으며 십자군은 툴루즈 공성전으로 함락되었다. 한편, 1213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 페테르 2세가 십자군에 합류하였으나 무레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1215년 랑그로크 지역이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7. 카타리파의 반란과 레몽의 반란 (1216 1225)

 

 

 

툴루즈가 함락되자 레몽 6세는 그의 아들 툴루즈의 레몽 7세와 함께 도주하였다. 그들은 지역 도시들의 반란들 주동하며 십자군과 대치하였고, 1218년에는 십자군 사령관 몽포르가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1216년 사망하고 사령관마저 잃게 된 십자군은 랑그도크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8.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직접 토벌과 간섭 (1229)

 

 

 

1222년 레몽 6세가 사망하자 툴루즈는 그의 아들 레몽 7세에게 계승되었다. 1223년에는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루이 8세가 즉위하였고, 랑그도크 지역에 대한 십자군을 직접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122511월 레몽 7세는 그의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파문되었다. 루이 8세는 12266월 십자군을 결성하여 랑그도크로 진격하였고 도시들이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있던 아비뇽은 공성전으로 저항하다가 항복하였다.

 

9. 여왕 블랑쉬와 레몽 7세의 평화협상 파리 조약 (1229)

 

 

122611월 루이 8세가 사망하자 루이 9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고, 루이 8세의 아내 카스티야의 블랑쉬가 십자군을 통솔하였다. 여왕 블랑쉬는 레몽 7세에게 툴루즈 백작의 지위를 계속 보장할 것을 약속하면서 항복과 십자군 참여를 권유하였다. 레몽 7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229년 프랑스 북부의 모에서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레몽 7세는 협정 직후 붙잡혀 구속되었다. 이로써 랑그도크 지역은 프랑스 국왕의 통치하에 있게 되었다.

 

10. 도미니코회와 종교재판 (1223 ~1255)

 

 

122911월 툴루즈에서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도미니코회에 종교재판의 권한을 일임하였다. 1233년 카타리파의 저항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랑그도크 전역에서 종교재판이 진행되었으며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11. 퀘리부 함락과 종결 (1245)

1240년 레몽 로저 드 트랜카발이 항복, 1244년 몽세귀르 함락, 1245년 카타리파의 마지막 요새인 퀘리부 함락되어 카타리파의 저항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255년 카타리파를 전멸시킴으로써 십자군의 군사 작전은 종료되었다. 그러나, 13, 14세기 대부분에 걸쳐 지속적인 활동을 펼친 끝에 성공하였다.

   

아리우스주의

마르키온주

종교재판(宗敎裁判) 또는 이단 심문(異端審問, Inquisitio)

알비(Albi)

툴루즈(Toulouse)

도미니코회의 카타리파 종교재판

오시타니아 지역의 정치 관계 재편

랑그도크 지역의 왕령화

교황 알렉산데르 3

교황 인노첸시오 3[Innocentius III, 1160~1216]

도미니쿠스 수도회 [Order of Dominicus]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1206년 에스파냐의 사제 성 도미니코에 의해 설립되어 1216년에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가를 받은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이다. 초창기에는 청빈을 중요시하여 탁발 수도사로서 생활했기 때문에 거지 수도회, 탁발 수도회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성 도미니쿠스 [Dominicus1170 1221]_ 로마 가톨릭의 수도자이자 도미니크회의 창설자이다. 도미니크는 기독교 사회에서 흔한 이름으로 하느님의 날을 뜻하는 도메니카(domenica), 즉 일요일이란 단어와 관련이 있다. 미술작품에서 도미니크는 도미니크회의 하얀 수사복에 검은 망토를 입고 있으며, 이마에는 별이 있고 손에는 백합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후대의 그림에는 그가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설립한 도미니크회의 명칭이 신의 개들을 의미하는 라틴어 도미니칸(Domini canes)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개가 입에 횃불을 물고 있기도 한다.

필리프 2(Philippe II, 1165 - 1223)

프랑스 왕국

성전 기사단

카타리파 랑그도크

아라곤 왕국 (Reino de Aragón)_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과의 결혼으로 에스파냐 통일국가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루이 8(Louis VIII le Lion, 1187 - 1226, 사자왕(le Lion))

블랑슈 여왕

루이 9(Louis IX, 1214 1270)는 프랑스의 군주 중에는 유일하게 성인(聖人)으로 추대된 왕, 성왕(聖王), 흔히 생 루이(saint Louis)로도 불린다.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레고리오 9(Gregorius PP. IX, 1227 - 1241)

피에르 드 카스타니오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 1208 ~ 1265) _ 영국 의회(하원)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피에르 드 카스티니오

페테르 2

카타리파 또는 알비파는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난 기독교 교파로, 이들의 교리는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1세기에 주로 랑그도크지역에 전파되었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교세를 확장

카르카손 (Carcassonne)

레몽 로저 드 트랑카발

페드로 2

카스티야의 블랑슈

레몽 6

레몽 7(1222~49 )

랑그도크 [Languedoc]

마니교 [Manichaeism]에서 영향(영지주의)

시몽 드 몽포르

기욤 9[Guillaume IX 1071 ~ 1127]

1119년 툴루즈 공의회

프로방스 지방의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