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미술Ⅲ, A.예루살렘을 사수하라 - 1부.십자군 전쟁(3차십자군 )

草霧 2013. 3. 18. 11:26

 

 

 

 

중세 미술 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부흥 그리고 문명충돌

 

.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A.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예루살렘을 사수하라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십자군 전쟁 ”, “2부 이슬람의 부흥”, “3부 문명충돌 로 기독교의 광기와 무슬림의 충돌을 통하여, 문명충돌과 미술의 진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참고로, “2. 이슬람의 부흥편은 본 저의 서양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오리엔탈리즘 편)을 참조하세요.

1. 십자군 전쟁

2. 이슬람의 부흥

3. 문명충돌

 

 

1. 십자군 전쟁 (CRUSADE)

 

   

 

십자군 전쟁 [crusade] (1095-1270)

1차 십자군원정(1096-1099)

2차 십자군원정(1147-1148)

3차 십자군원정(1189-1192)

4차 십자군원정(1202-1204)

5차 십자군원정(1217-1221)

6차 십자군원정(1228-1240)

7차 십자군원정(1248-1252)

8, 9차 십지군 원정(1252-1291) 

 

십자군 전쟁의 배경

 

십자군 전쟁의 원인

  

십자군 전쟁의 시작

 

십자군 전쟁의 전개

     

클레르몽 교회회의 (Council of Clermont, 1095)

레콩키스타 (Reconquista, 718-1492)

 

군중 십자군 (1096)

 

1차 십자군 원정 (1096-99)

니케아(1097) 도릴라이움(1097) 안티오키아(1097~1098)

마라트 안-누만(1098) 예루살렘(1099) 아스칼론(1099)

  

십자군 국가의 성립 (1098-1291)

  

예루살렘 왕국 (Kingdom of Jerusalem)

  

북쪽의 십자군 국가들

     아제르 상귀니스(1119) - 몽기사르(1177) - 이나브(1149) - 하틴(1187)

 

2차 십자군 원정 (1147-49)

라스본 공방전 (1147) - 다마스쿠스 공방전 (1148)

 

3차 십자군 원정 (1189-92)

    

 

아이유브조의 살라딘 발흥 (1169)

2차 십자군의 실패로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십자군을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는 1157년 산자르가 죽으면서 세력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에서 아이유브조가 발흥한다(1169).

 

아이유브조의 살라딘은 이집트의 파티마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지배한다(1171).

 

이로서 이집트는 정통이슬람으로 돌아선다. 이집트를 장악한 살라딘은 이슬람 세력을 통합시키면서 십자군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1174년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점령하였고, 1183년에는 알렙포(모술)를 점령으로 십자군 국가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리고 1186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1876. 살라딘은 예루살렘왕국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다.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1187)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왕국의 병력은 하틴전투에서 거의 전멸하고 다른 십자군 요새를 대부분 점령했다. 결국 살라딘은 손쉽게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시라아 내륙 지방을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의 공방전 (1187)

1차 십자군 시기에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함락된 이후(1099) 거의 1세기 만에 이슬람세력에게 탈환되었다. 하지만 거의 1세기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딘의 군대는 1099년 제1차 십자군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데 비해 살라딘의 군대는 학살과 약탈을 하지 않았다. 이는 살라딘의 군대와 제1차 십자군이 얼마나 다른 가를 보여준다. 살라딘의 군대는 군율이 제대로 선 정규군이었다. 그것이 예루살렘 점령 직후 군대 행동의 차이로 나타난 것이다

 

 

 

1187년 하틴 전투(Battle of Hattin) 패배와 국왕 루지냥의 기(Guy of Lusignan) 포로

동방정교회 유스프 바티트(Yusuf Batit)의 중개로 살라딘과 이벨린의 발리앙(Balian of Ibelin) 사이의 협상

주교 헤라클리우스(Patriarch Heraclius)와 시빌라 여왕(Queen Sibylla, 1160 1190)의 반대

예루살렘의 항복

이슬람 연대기 작가 이마드 아드딘 알이스파니(Imad ad-Din al-Isfahani)

2005년에 개봉된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예루살렘 재탈환 계획과 3차 십자군 소집 (1187)

 예루살렘 함락에 충격을 받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의 아우디타 트레멘디(Audita tremendi)는 제3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십자군 결성은 예루살렘 탈환을 계획하고, 결성된다.

 

3차 십자군은 애초에 영국왕 헨리 2세와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참가하기로 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바르바로사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 사망 (1190)

 

 

하지만 헨리 2세와 필리프는 내부 문제로 출발이 지연되었으며, 프리드리히 1세만이 1189년 단독으로 출발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던 발칸반도와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는 선택하였다. 그동안 십자군을 괴롭혔던 투르크의 기마 궁수보다 더 사거리가 긴 활을 이용하여 투르크의 군대를 쉽게 물리쳤으며, 루움 셀주크의 수도인 이코니움을 재빨리 점령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칼리카드누스 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비록 프리드리히 1세는 죽었지만 그의 군대는 무사히 안티오크에 도착한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차드 1세의 키프로스 왕국을 건설 (1192)

이후 헨리 2세의 뒤를 이은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가 1190년 여름에 중부 프랑스의 베즐레이에서 출발하였다. 두 왕은 시칠리아에서 겨우내 싸웠으며, 1191년 봄에 각기 메시나를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존엄왕 필리프가 바로 성지로 향한데 비해 리차드 1세는 키프로스에 들르게 된다. 그의 약혼녀를 태운 배를 포함한 몇 척이 태풍 때문에 키프로스로 떠내려간 것이다. 하지만 키프로스의 왕이 리차드 1세의 약혼녀를 포로로 삼으려 하였고, 리차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점령한 후(1191) 키프로스 왕국을 건설한 후 성지로 향한다(1192).

 

 

 

아크레 공방전 (1191)

 

 

드디어 제3차 십자군은 모두 집결하였고, 이슬람 세력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189년 여름에 기독교 군대는 아크레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1190년에 프리드리히 1세의 귀향하지 않은 병력이 합류하였고, 다시 1191년 초여름에 존엄왕 필리프와 리차드 1세가 차례로 도착하였다.

 

하지만 전쟁도중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 여전히 다투고 있었으며, 예루살렘 왕국 귀족들 사이에서도 리차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 세력으로 갈려서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때문에 효과적으로 아크레를 공략하지 못한다. 하지만 식량이 떨어진 아크레는 십자군에 항복한다. 그런데 아크레를 공략하는 과정에서 풍토병에 걸린 존엄왕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간다.

 

존엄왕 필리프와 리차드 1세 대립

유럽의 강국이라 할 수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젊은 왕들은 서로의 이익 때문에 대립한다. 게다가 십자군 내부에서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두고 둘로 나뉘었으며, 각각 리차드 1세와 필리프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사실 필리프가 처음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했을 때, 필리프는 십자군의 지도자로서 군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리차드 1세가 도착하면서 필리프의 입지는 매우 약화되었다. 권력 다툼에서도 불리해지자 필리프는 더 이상 예루살렘 왕국에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풍토병까지 걸리자 마음이 약해진 필리프는 퇴각을 결정하였다. 또한 필리프는 더 이상 십자군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유럽으로 빨리 돌아가 세력을 확장하기를 원하였다.

 

사실은 리처드 1세가 없는 틈에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를 탈환하고자 한 속셈이었다. 그래서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가자 리차드의 동생인 존을 사주하여 영국에서 존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으며, 리차드가 귀환할 때 곤경에 빠지도록 만든다. 반대로 리차드 1세는 십자군을 이끌어 살라딘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비록 예루살렘 탈환은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돌아와 왕권을 되찾고 유럽에서 필리프를 몰아세웠다. 
  

리처드의 십자군예루살렘 강화조약 체결(1192)과 휴전, 철수

  

 

하지만 리차드 1세는 그대로 남아서 십자군을 이끈다. 그리고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출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탈환하리라는 의지를 불태우던 때와 달리, 예루살렘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리차드 1세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지킬 경우 막대한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주력부대를 퇴각시킨 상태였다. 만약 리차드 1세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차드 1세는 병력을 남부 팔레스탄인의 아스칼론에 견고한 성채를 세우고, 살라딘과 화평을 맺었다.

 

 

리차드 1세는 화평 조건으로 5년 동안 유럽인의 성지순례를 허용한다,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를 막지 않을 것과 자파와 그 밖의 여러 해안 도시를 라틴 제후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리차드 1세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193년 살라딘이 사망하였고, 1199년 리차드 1세가 사망한다. 3차 십자군은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 내부의 분열과 리차드 1세의 생각 변화로 종결되었다.

 

 

 살라딘(1180년경),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다. 살라딘(1137-93)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이자 십자군 전쟁에 맞서 싸운 이슬람 군대의 지도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십자군에 대한 비협력과 십자군측의 키프로스 점령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측의 균열이 한층 더 심해졌다. 그리고 최악의 십자군으로 불리는 제4차 십자군이 12026월 출범한다. 4차 십자군이 최악의 십자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세력이 아닌 동로마를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으나,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의 파죽지세가 멈추었고, 해안지역의 도시들을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아콘을 탈환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 것으로 인해, 레반트 교역을 유지하여 이후 약 100년 넘게 라틴 기독교 세력은 해안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로마 교황은 각 국왕이 주체가 된 십자군에 실망하여 다시 제1차 십자군처럼 제후십자군을 원하게 되었다. 십자군 종료 후에도 아콘에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후에 튜튼 기사단의 기초가 되는 야전병원을 창설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이 전투에서 병을 얻게 되어, 3차 십자군 원정 1년후, 1193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하고, 그 후 아들들에 의한 후계자 쟁탈이 9년간 계속되었다. 아이유브 왕조는 동생 알아딜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아이유브 왕조 '이슬람의 옹호자'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Selahaddin Eyyubi, 1138? ~ 1193, 살라딘는 정의와 신념) _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8(Gregorius PP. VIII, 1187 - 1187)

잉글랜드 왕 사자심왕 리처드 1(Richard Lionheart I, 1157-1199) _ ‘사자심왕(獅子心王, Cœur de Lion, Richard 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이후 중세 기사 이야기의 전형적인 영웅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바르바롯사 프리드리히 1(Frederick Barbarossa I, 1122 1190) _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독일의 왕,이탈리아의 왕, 슈바벤 공, 로마의 왕, 부르군트의 왕, , 그의 붉은 수염이 유달리 특징적이었기 때문에 바르바로사로 불리었다. 프리드리히 전설, 1941년 독일의 소련침공 때 코드명은 바르바로사 작전이었다.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Philip Augustus II, 1165 - 1223) _ 프랑스 국왕으로서는 최초로 위대한 왕이라고 평가되어 존엄왕(Auguste)’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게로스 (1156 1204)

예루살렘의 왕 기 드 뤼지낭, 기 드 뤼지냥, 뤼지냥의 기, 예루살렘의 기 또는 키프로스의 기 (Guy de Lusignan, 11591194)은 프랑스 출신의 십자군 기사로 결혼을 통해 예루살렘의 군주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키프로스 왕국의 왕까지 되었다.

키프로스 총독 이사키우스 콤네누스

예루살렘 왕국 코라도 1(1140 1192)는 몬페라토의 코라도(Corrado del Monferrato), 혹은 예루살렘의 코라도 1(Conrad I of Jerusalem) _ 일명 코라도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무용은 이슬람측에서 알 말키슈의 이름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르노 드 샤티용(1125 1187) _ 안티오키아 공국

튜튼 기사단 (독일 기사단) _ 기사단의 문장은 하얀 바탕에 검은 십자가 모양이다. 이는 나중에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에서 군사적 상징으로 차용하였는데, 특히 나치는 독일 민족주의의 선전 소재로 기사단을 이용하였다.

하틴 전투(1187 예루살렘 왕국과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전투 )

성십자가 (True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