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2 - 라

草霧 2013. 3. 1. 00:00

 

 

 

 

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2 -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제권의 도전, 중세 교황권의 몰락기

 

 

 

1. 절대왕권의 부상

 

1) 절대왕정의 출발, 프랑스 카페왕조(Capetiens) 왕 필립 4(Philippe IV, 1285-1314)

 

 

서유럽에서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 까지 두 세기 걸쳐 집단 광기와도 같이 감행되었던 십자군전쟁은 8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이를 주도해온 교황권을 크게 손상시켰다, 원정을 통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과 새로운 문물의 유입, 종교를 탈피한 사상의 발전 등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 있던 서유럽 사회의 분열을 가져왔다. 각국의 왕 중심으로 이뤄진 독립적인 국가체계로의 이행은 중세시대의 해체를 알리고 있었다.

    

프랑스 카페왕조의 11대왕 필립 4세가 즉위한 시대는 루이 9세의 8차 십자군 원정을 끝으로 십자군전쟁이 끝날 즈음이었다. 바야흐로 종교의 힘이 탈진하고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요구받던 시절이었다. 이때 나타난 이가 필립 4세다. 훤칠한 키에 뛰어난 외모로 미남 왕이라 불린 필립 4세가 왕위를 계승한 때는 봉건제가 기반이던 시대.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국가 전체를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왕의 영지는 국토의 일부분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왕의 봉신인 공작이나 백작이 더 큰 영지를 가지고 왕보다도 강한 힘을 휘둘렀다. 이 시대에 즉위한 필립 4세는 왕권 강화에 힘을 쏟았다. 시기도 좋았다. 필립 4세가 즉위한 때는 십자군전쟁이 끝난 후여서 더 이상 종교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필립 4세는 이를 왕권 강화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십자군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약화됐다. 필립 4세는 삼부회의를 소집해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지지를 얻었다.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삼부회는 소수 특권층인 사제, 귀족, 도시 대표들의 모임이었다.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도 이들 삼부회가 주도했다. 필립 4세는 유태인과 롬바르디아인 등 외국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박해정책을 취해 빚을 갚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다음 차례는 성전기사단이었다. 성전기사단이란 11세기 말 십자군전쟁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기사들의 단체였다. 2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프랑스 루이 7세를 도와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파리시 교외의 광대한 부지를 기증받고 이곳에 서유럽의 거점을 세우게 됐다.

    

 

 

필립 4세는 부르주아지(bourgeoisie·자본가 계급) 내지는 소귀족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대거 등용해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필립 4세의 관료들은 대부분 로마법을 공부한 법률가들이었고 그들은 국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임명된 통치자라는 왕권신수설을 발전시켰다. 필립 4세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은 봉건적 장원제도가 붕괴되고 도시가 더욱 성장했으며 민족과 영토를 중심으로 한 절대왕권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나아갔다.

    

 

필리프 4세는 유럽 각지의 군주들과 외교를 통해 프랑스의 독립성을 확고히 했으며 아들들의 결혼과 영토전쟁으로 영지를 확장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일체제를 거의 갖추었다. 또한 그는 승려, 귀족, 도시 대표를 아우르는 삼부회를 창설하여 교회권을 눌렀으며, 이들이 왕권을 지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화에 공헌하게 하였다. 이 삼부회의 구성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도시 대표의 참가이다. 십자군전쟁 이후 도시세력의 성장은 중세 체제가 약화되었음을 의미했다. 왕이 이들 세력을 인정하고 정치 파트너로 삼은 것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첫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필리프 4세는 이와 더불어 기욤 드 노가레를 비롯한 부르주아지 내지는 소귀족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필리프 4세의 관료들은 대부분 로마법을 공부한 법률가들이었고 그들은 국왕이 신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임명된 통치자라는 왕권신수설을 발전시켰다. 바야흐로 교황권의 시대가 물러가고 절대왕권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필리프 4세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각국은 봉건적 장원제도가 붕괴하고 도시가 더욱 성장하였으며 민족과 영토를 중심으로 한 절대왕권의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로 나아갔다.

 

 

 

 

십자군전쟁 이후 즉위한 미남왕 (le Bel)

왕의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전쟁

교황과의 갈등과 삼부회소집

가톨릭을 장악한 아비뇽유수

주요 특권층이던 성전기사단 탄압

템플기사단의 이단 고소 사건

절대왕정으로 가는 첫발을 내딛다

교황과 무력충돌, 폐위   

 

 

2) 삼부회 (三部會, États généraux)

 

 

프랑스 세 신분(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으로서 중세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다. 1302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의 분쟁시 필요했던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가톨릭 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 삼부회의 시초가 되고 있다. 1614년 이후 175년이나 열리지 않았으며, 1789년 세금 징수 문제로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다시 소집되었다. 하지만 평민대표인 부르주아(3신분)들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을 주장하면서 삼부회는 사실상 해산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 의해 1302년 최초로 소집되었다. 삼부회의 소집대상은 성직자,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이라 불리던 도시 대표자들이었다. 삼부회의 주요 기능은 프랑스 국왕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였으며 이러한 동의는 조작이나 날조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의 각 지방에서도 지방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카페 왕조이래 프랑스 국왕은 지방 도시에 대한 특허장을 통해 지방의 독자적 법전과 관습을 인준해 왔다. 삼부회의 또 다른 기능은 교황과의 갈등에서 국내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무너지고 알비 십자군이 종결되자 교황의 영향력은 급속히 커졌으며 필리프 4세는 이러한 교황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삼부회를 통해 왕권을 지키려 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필요만큼이나 삼부회의 각 구성원들 역시 삼부회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했는데, 귀족과 성직자는 국왕의 요구에 동의하는 대신 자신들의 수입원이었던 농민들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기회를 얻고자 하였고 도시대표자들은 자신들이 바치는 조세의 댓가로 경제활동에 대한 특권을 얻고자 하였다.

 

 

프랑스의 삼부회는 많은 부분에서 왕의 필요에 의해 운영되었다. 새로 즉위한 국왕은 삼부회를 통해 즉위 선물을 받는 것을 권리로 여겼다. 1484년 삼부회는 샤를 8세의 즉위에 대해 300,000 리브르를 선물하였다. 그러나 삼부회의 구성원들은 점차 왕이 자신들의 동의를 얻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16세기 동안 소집된 삼부회는 새로운 왕이 권리로 여기던 '기쁜 즉위 선물'을 위한 것이었으나 1560- 1561년에 소집된 삼부회와 1576년 삼부회는 부분적으로 과세에 대한 동의를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프랑스가 절대 군주제로 변화된 후 삼부회의 기능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1614년 이후 1789년까지 개최되지 않았다. 1789년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의 부과를 위해 삼부회를 소집하였다. 결국 국가경제 파산이 되자 루이 16세는 면세 특권을 누리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귀족과 성직자는 이러한 과세안에 반발하였고 루이 16세는 새로운 세금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삼부회는 봉건적 특권의 축소와 폐지를 요구하는 제3신분과 귀족, 성직자의 대립에 의해 붕괴되었고, 이로부터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명사회(Assemblée des notables, 발루아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

 

테니스 코트의 서약(Tennis Court Oath, 1789620일 프랑스 대혁명 직전

 

 

3) 템플기사단 (성전 기사단) 탄압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 속칭 성전 기사단 또는 성전 수도회(Ordre du Temple 또는 Templiers)는 서방 교회 기사 수도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조직이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의 활약을 기초로 확보된 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를 떠났던 많은 유럽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1129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공인받게 되면서, 기사단은 유럽을 횡단하여 온 구호금을 통해 회원이 늘어나면서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성전 기사단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적인 복장인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하얀색 겉옷을 입었으며,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다. 기사단의 비() 전투원은 기독교 국가 전체에 걸쳐 큰 경제적 기반을 쌓아 올리는 데 일조하였다.

 

 금융업에 필요한 많은 금융 기술을 새로 만들거나 개정하였고 유럽과 성지를 가로질러 많은 요새를 건설하였다.

 

성전 기사단의 성공은 십자군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으며, 기사단에 큰 빚을 진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1307년 프랑스 내 기사단원의 대부분이 체포당한 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을 받은 다음 화형에 처해졌다.

 

 

 

1312년 필리프 왕으로부터의 계속된 압력에 클레멘스 교황은 결국 굴복하여 기사단에 해산령을 내렸다. 유럽의 주요한 경제단체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이후 많은 의견과 전설이 생겨났다.

 

 

 

창설과 초기 활동(1119년 말(또는 1120년 초))

거대 금융기관으로서의 발달

성지의 상실 (1291)

기사단의 괴멸 (1312) 와 종교재판(1307), 클레멘스 5

성전기사단의 규칙 _ 라틴 규칙(La Régle du Temple)

명예 회복 <Processus Contra Templarios(성전 기사단의 탄핵 과정)> (2008)

 

 

 

 

 

 

 

 

성 요한 기사단 (몰타 기사단, Sovrano Militare Ordine Ospedaliero di San Giovanni di Gerusalemme di Rodi e di Malta, 1080)

 

 

튜튼 기사단(독일 기사단)  

 

 

 

4) 1303, 교황 보니파시오 8( Bonifacius PP. VIII, 1294 - 1303) 노가레의 책동과 굴욕, 사망

 

 

 

 

 

교황 베네딕토 11(Bl. Benedictus PP. XI, 1303 1304)

 

 

교황 클레멘스 5( Clemens PP. V, 1305 ~ 1314) _ 성전 기사단 소송, 훗날 마녀 단속에도 고문 수단을 묵인하는 결과

 

교황 요한 22(Ioannes PP. XXII, 1316 1334)

 

교황 베네딕토 12(Benedictus PP. XII, 1334 1342) _ 아비뇽 교황청

 

 

 

 

5) 1309, 교황 아비뇽 [Avignon] 유폐 (1309~77)

1309~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 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 고대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를 본떠 교황의 바빌론유수라고도 한다.

 

13세기 말부터 세속 권력이 신장하자 프랑스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와 싸워 아나니 사건(1303)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6대인 우르바누스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였고, 그레고리우스 11세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역대의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 교황청 행정을 담당하였다.

    

 

 

6) 아비뇽 교황와 아비뇽 교황청 [Avignon papacy]

 

 

클레멘스 5, 요한 22, 베네딕도 12, 클레멘스 6, 인노첸시오 6, 우르바오 5, 그레고리오 11세 등이다. 이들은 아비뇽 유폐의 교황으로 불린다. 이때 프랑스 군주의 간섭, 교황권의 하락, 재정난 타개를 위한 부당한 금전 징수 등으로, 교황의 위신이 추락되고 교회의 위계 질서와 수위권이 부정되기도 하였다. 콘스턴스 협의회 에 소집, 1414 아비뇽 (Avignon)의 교황권의 마지막 흔적을 분해, 마침내 해결, 논쟁하고 1417 년 말에 대 분열을 가져 왔다.

 

 

교황 클레멘스 5(1305-1314)

 

교황 요한 22(1316-1334)

 

교황 베네딕토 12(1334-1342)

 

교황 클레멘스 6(1342-1352)

 

교황 인노첸시오 6(1352-1362)

 

교황 우르바노 5(1362-1370)

 

교황 그레고리오 11(1370-1378) 

 

7) 아비뇽 유수 (1309~77)

 

 

13세기 로마 가톨릭의 교황청의 자리가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른 시기를 말한다.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불렸다. 1303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이 있던 중에 아나니 사건(프랑스군이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한 사건)이 터져 이후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

    

 

프랑스인 추기경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하면서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에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하였으며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다. 아나니 사건 이후의 처리를 위해 비엔 공의회를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사이에,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아(1310~1313) 교황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계속 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의 영내가 아니라 교황의 봉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덧붙여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체재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성직 또는 사절의 지위에 임명되었지만, 교황청의 부패상과 교황이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종종 로마로의 귀환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아비뇽을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대략 70년 후인 1377,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 유수기는 종식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해에 선종하였으며,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등극하지만, 머지 않아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콘클라베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있는 서방 교회의 분열가 일어난다.

   

 

 

() .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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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3.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편에서 계속 됩니다.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