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Ⅱ.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2 - 가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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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가)
황제 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 대두와 확립
1. 이념 탄압의 잣대의 탄생, 공의회 (公議會, ecumenical councils)
교리와 의식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규정하기 위하여 '전체 교회'의 주교와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기독교의 종교 회의인데, '전체 교회'의 의미는 교파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의 경우 로마의 주교와 상통관계(full communion)가 있는 신자들을 일컫는다. 많은 교파들로부터 두루 받아들여지는 공의회는 처음 일곱 개다.
실상 첫 공의회라고 할 만한 것은 신약성서 사도행전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로, 유대교 전통을 강조하는 유대-기독교인(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기독교인(이방계 그리스도인)간의 논쟁이 벌어져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킬 것을 요구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그러나 이 공의회는 '공의회'라고 선언하고 모인 것이 아닌 까닭에 통상 공의회 횟수를 기록하는데서는 제외 되고 있다.
그 뒤 2세기, 3세기의 박해시대에도 지역별로 주교(감독)들이 모여서 사목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 혹은 regionale)라 하였고, 이러한 회의는 인근지역 교회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교리상의 일치를 보존하며 같은 신앙을 선포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하여 교회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차츰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가 확장되고 신학(神學)이 성립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설(異端設)이 생겨 교리논쟁이 심하게 되자 교회의 문제가 제국의 문제로 나타났고, 황제들은 국가의 평화와 교회의 안정을 바라면서 여러번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소집하였다.
제1차 공의회에서 제8차 공의회까지는 주로 황제가 소집하고, 황제의 보호 하에 제국의 동방지역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에페소스, 칼케돈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고대교회의 신학논쟁은 주로 동방에서 일어났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동방지역 주교들이 많이 참석했고, 서방지역에서는 소수의 주교들과 로마 교황의 대리들이 참석하는 정도였다.
공의회가 거듭되면서 이단설이 단죄되고 정통교리가 선포되었으나, 차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언어(그리스어 대 라틴어), 관습의 차이가 정치적인 여건과 결부되어 신앙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이를 드러냈으며 대립이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21번의 공의회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21번의 공의회는 연대순에 따라,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에페수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2차 니케아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제1차 라테란 공의회,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제1차 리옹 공의회, 제2차 리옹 공의회, 빈 공의회, 콘스탄츠 공의회, 피렌체 공의회, 제5차 라테란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공의회의 순서 매김은 기독교의 각 교파에 따라 달라서, 동방정교회에서는 최초의 7번의 공의회만을 인정하고 있고, 개신교에서는 도적들의 공의회라고 불릴만큼 파행적으로 운영된 에페수스 공의회를 제외한 칼케돈 공의회까지의 공의회를, 단성설 교회에서는 최초의 3번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서는 최초의 2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1) 첫 일곱 공의회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로부터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에 이르는 기간을 종종 "일곱 공의회 기간"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1.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25년)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영원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니케아 신경을 작성했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교파들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등) 이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공회에서는 최초의 교회분열인 동서교회 분열이전의 교리를 따르기 때문에, 니케아공의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오신조, 사도신조를 교회의 신조로 이해한다.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년): 니케아 신경을 개정했다.
에페소스 공의회 (431년):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안주의를 배격하였다.
칼케돈 공의회 (451년): 예수에게는 신성 밖에 없었다는 단성설을 배격하고,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사람이라는 칼케돈 신조를 작성하였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형태의 아리안주의, 네스토리안주의, 단성설을 정죄하였다.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년): 단의론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람과 신으로서의 뜻이 다 있었다고 정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 (692년): 트룰로 공의회. 제2·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관련된 교회법 102개조 공포. 동방교회는 찬성하였으나 로마 교황은 거부함.
제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성화상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을 부활시켰다. 많은 개신교 교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대신 성화상에 존경을 표하는 것을 정죄한 754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존중한다.
(2) 로마 가톨릭에서 받아들이는 추후 공의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70-880년) 포시우스 총주교 파문, 동서방 교회의 분열 야기.
제1차 라테란 공의회 (1123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 (113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1179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
제1차 리용 공의회 (1245년)
제2차 리용 공의회 (1274년)
비엔나 공의회 (1311-1312년)
콘스탄츠 공의회 (1418-1418년)
바젤-페레라-프로렌스 공의회 (1413-1445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 (1512-1517년)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70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년): 이 공의회에서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
2. 권력 독점의 시초, 동서 교회의 분열
4세기 로마 제국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자유를 얻은 이래 11세기까지 교회는 로마, 콘스타니노플,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의 5개 교회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성립,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과의 연계 등으로 약화된 4개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하나의 보편교회 공동체에서 로마교회가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동방의 시각과 로마 교황으로부터 4개 교회들이 이탈한 것으로 이해하는 서방의 시각이 오늘날까지도 대립하고 있다.
이후 로마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회로, 나머지 4개 교회는 정교회로 각자 분립되었다.
1) 동서 교회의 분열의 배경
(1) 수도원 운동
일찍이 동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 운동은 초기 중세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 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코꿰여졌던 바,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 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전도 사업이었던 것이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 활동과 수도원 운동이 전개되었다.
(2) 동로마 제국과 이탈리아
동서 로마가 분리되었지만,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유서 깊고 세련되며 반동방적(半東方的)인 동로마 제국과 북방의 새로운 세력(게르만족,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의 교황과 프랑크 왕국의 왕 및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확실하게 결단을 내려야만 했고, 그들의 결단은 이후 중세 유럽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옛 대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던 동로마 제국은 새로운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새로운 적은 이슬람 세력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들과 오랜 투쟁에 들어가야 했다.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3) 이슬람의 팽창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새로운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의 추종자들, 즉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곳 북아프리카 출신이다)와 동지중해를 기독교의 영역에서 빼앗아갔다. 리고 거의 동시대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 이슬람이 우상파괴령에 영향을 미쳤다면, 프랑크 왕국은 우상파괴령을 둘러썬 동서 교회의 대립에 서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이미 이란과 이슬람을 상대로 한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서로마 교회가 독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프랑크 왕국은 두 개의 새로운 서로마제국을 만들어냈다. 800년의 서로마제국과 96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립이다. 서로마교회는 프랑크 왕국 덕분에 동로마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새로운 서유럽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2)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온 3세, 우상파괴령
8세기 초 이슬람의 침략을 물리친 동로마 황제 레온 3세는 심각한 문제에 처했다. 하나는 성상 공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토지 소유에 의한 조세 수입의 격감이었다. 새로 개종한 이교도 지역일수록 우상 숭배는 심했다.
여기서 '성상'(이콘(icon))이라 함은 성인들을 그린 그림, 조각, 모자이크 등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문맹인 야만족들을 개종하는 데에 제법 짭짤한 효과가 있었지만, 기독교 자체보다는 오히려 지나치게 그 성상들을 공경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던 것이다. 성상 공경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황제 레온 3세는 이런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른 문제는 소토지 보유 자유농의 몰락과 대토지 겸병의 증대였다. 소규모 자영농은 제국군의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제국 정부로서는 그들의 몰락을 방치할 수 없었다. 대토지 소유자들 중에서도 레온 3세가 적대시한 것은 수도원과 교회가 소유한 대영지였다. 게다가 이 양자는 면제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 3세는 성상파괴령을 이용하여 토지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토지 개혁이 이뤄지면, 소규모 자영농이 증대하고, 조세 수입도 증대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726년에 첫 성상파괴령이 내려졌다.
이 파괴령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레온 3세의 성상파괴령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에게 도전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격분한 레온 3세는 라벤나 총독에게 그레고리오 2세의 체포를 명령했고,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은 황제의 명을 받아 그레고리오 2세를 체포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출동했다. 그러나 그들은 롬바르드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격분한 레온 3세는 남이탈리아와 일리리쿰에서의 교황의 권리를 모두 몰수하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넘겨주었다.
3) 프랑크 왕국과 피핀 3세 및 동서 교회의 분열
기독교를 신봉하였기에 교황에게 우호적이던 롬바르드족이었으나, 아이스툴프 왕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전체를 제패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 교회를 새로운 이탈리아의 중심 교구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성 베드로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 서방 세계의 기독교를 다스린다는 체면이 있던 로마 교황은 로마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롬바르드 왕국의 최고 성직자에 불과한 존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결국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이때 등장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751년,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 3세는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재가를 로마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 자카리아는 즉시 보호를 댓가로 그를 새로운 프랑크 왕국의 군주로서 인정하였다.
피핀은 752년에 로마를 위협하던 아이스툴프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중부 이탈리아와 라벤나를 차지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를 제국령으로 귀속시키라고 요구했으나, 피핀은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기가 롬바르드족과 싸운 것은 어디까지나 성 베드로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성 베드로에게, 즉 그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넘긴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이며, 그 중에 일부 남은 것이 오늘날 바티칸이다.
이로써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밀접하게 결합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부터 천주교회와 정교회로 기독교 세계는 1차 대분열을 하게 되었다.
3. 아시리아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열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나 칼케돈 공의회에서의 분열로 본질적인 것이 아닌 사소한 교의 논쟁이었다. 서로 다툰 테오토코스 논쟁이라고 하는 성모 마리아의 칭호를 둘러싼 논쟁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와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중 어느 쪽이 올바른 칭호인지 논의된 것이다.
4.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분열
두 교회의 합동에는 교리 문제보다는 전통에 관한 문제가 더 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두 교회의 대립은 성상(聖像)의 문제나 ‘필리오케 논쟁’이라고 하는 기본적 교리의 불일치에 있으며, 교황의 수위권이나 무류성에 관한 문제도 단순한 전통의 문제는 아니고 교리상의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십자군 문제나 동유럽 포교 등의 로마 가톨릭의 행동에 대한 반발도 있다.
최종적으로 갈라지게 된 역사적인 사건은 15세기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침략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서유럽의 정세와 여러가지 지역문제로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를 물리적으로 도와줄 여력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비극으로, 신앙적인 것보다는 정치적·감정적인 원인이 더 컸다는 것이다.
5. 교도권 (potestas magisterii)
로마 가톨릭에서 평신도를 가르쳐 이끌어주는 권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 권위는 신학자의 것이 아니고, 주교의 것이다. 예수는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이끌어줄 것을 약속하고 있지만, 이 인도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일에 대해 발언할 때 나타난다는 것이 로마 가톨릭에 의한 교도권 해석이다.
6. 에큐메니컬 운동, 교회 일치 운동
7. 교황청의 거짓된 사기행각,
교황권의 우위 증거을 위한 문서 조작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1) 피핀의 기증 (754)
프랑크 왕 피핀이 자기의 왕위를 교황 자카리아에게서 승인을 받고, 그 대상으로서 다음대의 교황 스테파노 2세가 롬바르드 국왕의 압박을 받아 구원을 요청해 온 데 대해서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상 한 것이다. 이것이 피핀의 기부이며, 이후 종래의 베드로 세습령에 부가해서 교황령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수년 후 가짜 이시도루스 문서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증’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2)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 , 750~850)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로마 황제의 칙령문서로 중세 유럽의 유명한 사기 문서로 간주된다. 이 조작된 칙령문서는 중세기간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대하여 교황청은 발라의 논증을 부정하고 발라의 책을 16세기 중반까지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면서 로마 도시와 서방 제국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기독교로 교화하고 세례를 베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황은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신성한 권력의 대표자로 교황이 세속의 황제를 결정하고 심지어 교체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이 문서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8세기 중엽으로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단신왕의 협상과정에서 나왔다.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을 만나 메로빙거 왕조를 대신해 피핀의 카롤링거 왕조를 새로운 왕조로 세웠고 그 댓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이 점령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아 교황에게 주었다. 그 영토는 이후 약 11세기 동안 지속된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교황권의 우위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 조작문서의 폭로,
(3) 수트리의 기증 (728)
728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가 롬바르드 왕 리우트프란드로부터 수트리를 매입한 협정을 말한다. 협정에 따라 수트리 시 전체와 라티움의 몇몇 구릉도시에 대한 소유권이 교황에게 넘어갔으며, 교황 연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에게 선물로 바쳐졌다.’ 역사상 이 일은 기존의 로마 공국을 넘어 교황의 영토를 넓힌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교황령의 역사적 토대가 되었다.
(가) 끝. (나)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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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B%A0%88%EC%98%A4_1%EC%84%B8교황 레오 1세(Sanctus Leo I Magnus)
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A%B7%B8%EB%A0%88%EA%B3%A0%EB%A6%AC%EC%98%A4_1%EC%84%B8교황 그레고리오 1세 (Sanctus Gregorius Mag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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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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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
고대 로마 (753~476 BC)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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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문명 (300~1533) | |||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3부.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편에서 계속 됩니다.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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