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Ⅱ.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2 - 나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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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나)
개혁의 필요성, 중세 수도원 운동 (Monastry Movement)
1. 수도원의 탄생
수도원은 중세의 정신생활이나 문화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도원은 중세교회가 타락하고 속화했을 때, 이를 정화하고 개혁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중세 초기의 문화적 암흑기에 희미하게나마 문화의 등불을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중세 후반기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것도 수도원이었다.
로마제국 초기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확장해 갔으며, 4세기에는 크리스트교의 집단적인 개종현상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교세가 커지자 교회는 큰 재산의 소유자가 되었고, 이에 따라 세속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건한 열성적인 신자나 성직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초기교회의 이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기고, 그것이 수도원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낳게 하였다.
수도원생활은 먼저 동방에서 시작되었다. 3세기 말 聖 안토니(St. Anthony)는 북부 이집트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은 주변에 집을 지어 함께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역시 이집트의 파코미우스는 사막에서의 은둔생활이 너무나 고퉁스러워, 일정한 계율을 정하고 한 건물에서 금욕적인 공동생활을 하도록 하여 수도원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에서의 수도원제도의 확립자로는 일반적으로 4세기 소아시아출신의 그리스인 교부 성(聖) 바질(St. Basil the Great)을 꼽는다. 그는 노동과 자선과 공동생활을 토대로 한 수도원의 계율을 정하였고, 그 계율은 비잔틴제국내의 수도원의 표준적인 계율이 되었고, 현재도 그리이스정교 세계에서 통용되고있다.
동방적인 수도원과는 달리 별도로 독자적인 서방 수도원을 설립한 것은 이탈리아의 수도사인 누루시아의 성(聖) 베네딕트(St. Benedict of Nursia, 480-543)였다. 그는 젊었을 때 부터 금욕적인 이상에 끌려, 수도생활을 해오다가 6세기 초(520년 경)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위치한 몬테 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후 유럽 수도원의 모범이 된 이른바 베네딕트의 계율을 마련했다.
베네딕트의 계율은 금욕적이며 엄격한 규칙적인 공동생활을 규정하였다. 매일의 일과는 노동과 기도로 크게 나누어지고, 수도사는 매일 여러시간의 육체노동에 종사해야했고, 나머지 시간은 명상, 기도, 공동예배에 할당되었다.
문화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은 수도사의 필사작업으로서 후에 가서는 필사실이 따로 마련되기도 했다. 모든 수도원은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는 토지를 소유하고 자급자족하였다.
많은 수도원이 약탈당하고, 남은 수도원은 성직자들의 탐욕의 재물이 된다.
수도원 재산을 사유화 하였다.
베네딕트의 "규율"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게되었다.
진정한 수도 생활을 바라던 이들이 변화를 갈망한다.
2. 초기 수도원 운동
제국에 침입한 야만족들의 집단 개종과 더불어 중세 여명기에 형성된 수도원 운동의 부흥과 초기 선교였다. 이러한 속세의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다.
독신 생활과 금욕 및 금식을 예찬하는 데서 수도원 운동은 하나의 영적 유토피아 운동으로 부각되었고, 금욕으로 해결하였다. 이러한 영적 풍토 속에 기독교 수도원을 최초로 창설한 자는 250년 이집트의 아토니였다.
그 뒤 안토니의 은둔 수도원을 개혁한 사람이 파코미우스였다. 그는 수도원의 사회성과 기여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 외에도 시므온, 제롬 그리고 베네딕트가 초대 교회의 수도원 운동에 효시를 놓았다.
특히 중세 수도원 운동은 베네딕트에 의해 조직적인 수도원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수도원 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던 이집트 중심의 극단적인 금욕생활과는 달리 자신들의 구원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주력하였다.
베네딕트는 당시 대부분의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금욕주의나 초인간적인 훈련 방법을 배제하고, 지나친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도하며 일하라는 명제를 내걸고 노동과 명상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러한 중용의 입장은 취한 베네딕트 규율이 콜롬바누스에 의해 알려진 켈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동방 수도원들의 극단주의를 능가하였고, 로바르트족이 몬테가시노를 점령함으로 전 유럽에 퍼져 결국 중세 수도원의 맥을 이루어 수도원이 부흥하였다
3. 수도원의 발전
이 서구적 수도원은 카알대제 시대에 정치적 통일의 일환인 교화정책과 베네딕트의 교회개혁을 통해서 유럽에 확대, 보급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엽 샤를마뉴제국이 붕괴하고 사회의 질서가 문란해지자 사회의 봉건화에 따른 교회의 봉건화와 타락을 막을 수 없었다.
10세기 초 교황은 로마시의 귀족들의 붕당의 수령에 불과했고, 오토1세의 대관식 후로는 독일황제가 성직임명권을 장악하고,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로마귀족의 압력에 시달려야했다.
더우기 유럽전역에 걸쳐 교회전체가 노르만. 마쟈르 등의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교회와 성직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속제후의 보호를 구해야했다. 이러한 환경속은 교회의 세속화를 강화시키고, 성직자의 기강을 완전히 붕괴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것은 성직자의 혼인과 성직매매(Simony)의 성행에 단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교회의 봉건화에 따른 세속화와 성직자의 타락에 대한 개혁운동은 클루니(Cluny)수도원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클루니수도원은 910년에 아퀴테느 공 윌리암(William of Aquitaine)의 승인하에 설립되었다. 그 승인장에는 몇가지의 규율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봉건적 토지보유를 하지 않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신자들의 자유로운 회사로 간주하고, 봉건적 의무를 지지 않을 것이며, 둘째, 수도원장의 선거권은 수도사가 가지며, 셋째, 교황에 직속하고 고위성직자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며, 넷째, 태만과 나태를 추방하고, 필사와 노동과 공동예배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당 할 것 등이 명시되어 강렬한 개혁의지가 담겨있었다.
이러한 취지하에 설립된 클루니교단의 수도원수는 날로 증가하였고 이윽고 11세기 중엽이후 이러한 수도원 중심의 개혁운동은 교황영도하에 전유럽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최초의 개혁적 교황은 레오 9세(Leo IX, 1049-1054)로 많은 일을 했다. 그는 종교 회의로 하여금 성직자의 혼인과 성직자의 매매를 금하는 입법을 하게 하여 성직자의 정화작업을 추진시키고, 유럽 각지에서 저명한 개혁적인 고위성직자를 로마교회의 추기경단으로 구성케 했다.
1059년 로마에서의 종교회의는 교황선출에서 로마귀족의 붕당과 독일황제의 개입을 배제하고, 로마교회의 추기경에 의한 선출을 규정하였다. 이 규정에 의해 1061년에 알렉산더 2세가 선출되었다.
클루니 수도원 출신의 그레고리 7세(Gregory VII, 1073-1080)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서임권문제를 둘러싸고 하인리히 4세와 정면 충동하게 되었다. 1076년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에서의 굴복은 교황권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제권에 대한 교권의 승리를 맡반침한 것은 클루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교회개혁운동이 실질적 열매를 거둔 것이라 해도 줗겠다.
4. 성베네딕트 수도원(聖Benedictus Abbey)
529년경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가 로마 남동쪽 몬테카시노에 아폴로신전을 부수고 세운 수도원으로 몬테카시노수도원 (Monte Cassino Abbey)이라고 한다.
베네딕투스회의 모체로서 유럽 수도원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는데, 개인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동방의 수도원에 비해, 중용과 공동생활을 채택하여 539년에 수도계율(修道戒律), 즉 회칙을 초안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서유럽 수도원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자급자족경제에 연관된 노동윤리의 육성, 장원경제와 연결되는 사회경제상에 미친 영향, 고대문화의 교량역으로서 이 수도원이 수행한 역활은 다양하다.
6세기 말 랑고바르트족(族)에게 약탈당해 수사들은 로마로 피신했으며, 717년에 재건되었다가 884년에는 사라센의 침공으로, 1046년에는 노르만족의 침공으로 파괴된 것을 재건하여 11세기에 최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에는 수도원이 4개의 주교좌 관구와 2개의 공국, 1662개의 교회를 관할했다.
17세기 중반에는 수도원의 도서관에 교황과 황제·제후들이 기증한 1천 점 이상의 고문서와 800점이 넘는 14세기 이전의 사본들을 갖추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으로 이용되었다.
1866년에는 수도원 건물이 이탈리아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후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도 파괴되었으나 복구되었다.
한편, 베네딕도는 죽은 후에 누이와 함께 이곳에 묻혔으며, 그 후부터 많은 신자들이 방문하는 성지가 되었다. 수도원 입구를 지나 중앙으로 들어서면 '낙원의 로지아'가 나오고 수도원 현관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층계가있다. 이를 '브라만테스크'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의 위대한 건축가 브라만테의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다. 계단 바로앞에 수도원 창설자 성 베네딕도의 쌍둥이 여동생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상이 서있다.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 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소재지는 이탈리아 몬테카시노이다.
5. 수도원의 부패
중세 수도원 제도는 베네딕트에 의해서 기초가 잡힌 이래 경건과 학문, 그리고 선교와 사회봉사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수도원은 외부와 단절된 독립된 기관으로서 수도원이 점차 내부적으로 부패된 원인은 크게 볼 때, 금전과 권력에 관한 부분이었다.
중세는 교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총 전달수단이 성례전이었고, 중세제도에 의한 성찬의 의미는 죄를 사면해 주고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중세는 11세기 알렉산더 할레스의 이론에 따라 평신도에게는 빵만을 공급하는 일종성찬으로 바뀌어 갔고, 이러한 제도 변화는 평신도에게는 구원의 지연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말년이 되면 수도사 서약을 함과 동시에 사유재산을 수도원에 헌납함으로써 빵과 포도주를 같이 먹을 수 있는 이종성찬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수도원 측에서는 이것이 막대한 재산을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수도원들이 점점 많은 재산을 가진 독립기관으로 성장해 가자 수도원을 둘러싼 성직매매가 가능케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평신도 서임권 논쟁과도 긴밀한 연관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세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공식적으로 독신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상당히 많은 사례에 있어서 성적인 타락을 초래 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원을 개혁하고자 금욕주의적 수도원 운동이 일어난 것이 바로 클루니수도원이다.
6. 클뤼니의 수도원 개혁운동
중세기는 교황를 중심으로 한 정치싸움과 성직매매 등 교권이 극도로 타락하였다. 의식 있는 사람들은 이런 와중에 수도원의 삶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교황청의 세력에 맞서 싸움수 있는 적절한 세력은 수도원밖에는 없었다. 결국 8세기의 카로링커 왕조시에는 수도원 운동이 절정을 이루었으며, 이시기에 수도원은 엘리트 단체로 유럽 사회에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수도원은 중세 문화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유명한 교황들과 교수들이 극소에서 배출되었다. 교황청과 주교들이 귀족과 탐욕에 찬 성직자들에 의해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가 되었고, 수도원도 마찬가지 현상을 빚었다. 그리하여 수도원과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찾고자하는 개혁운동이 수도원내에서 일어났다. 그중 대표적인 개혁운동이 클루니와 시터 수도원 개혁이다. 교황권의 타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운동은 수도원 내부에서 발생한 최초의 커다란 개혁운동이었다.
910년에 아퀴탱의 윌리암 공작에 의해 설립된 클루니 수도원은 교황의 명을 제외하고는 수도원 내부의 방침을 따르는 등 수도원의 자치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 수도원은 엄격한 베네덱트 규율에 따라 수도생활이 규제되었고, 당대의 스캔들이었던 성직 매매, 성직자들의 결혼도 철저히 금지시켰다. 당시의 성직자의 독신의 강제가 아닌 권장사항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의 개혁에 성공한 수도사들은 성직자들도 수도사들처럼 독신을 지켜야 개혁이 된다고 보았다. 또 하나의 개혁원칙은 복종의 원리였다. 수도원에서 모든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함으로 개혁이 가능했듯이 기독교권은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원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 중심의 초기 개혁운동은 수도원과 교회 양쪽에서 다 실패하고 말았다.
클뤼니 수도원 (L'Abbaye de Cluny)
중세의 교회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베네딕투스회의 수도원이다. 클뤼니는 프랑스 부르고뉴주(州) 손에루아르현(縣)에 있는 지명이다. 910년 아키텐공(公) 기욤(Guilaume de Aquitaine )이 성베드로와 성바울로를 수호성인으로 하고 로마교황 이외의 권위로부터 독립한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자기의 별장을 제공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설립 초부터 수도사들에게 원장(Abbas)의 선출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으며, 자신이 설립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사유교회영주로서의 권리 일체를 포기하였다. 이어 그는 수도원에 대한 통어권을 교황에게 넘겨주었다. 이로부터 클뤼니수도원은 설립당시부터 귀족의 지배나 대주교의 감독권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수도원이 유명한 것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수도원 개혁운동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 수도원은 개혁을 위해 세워진 것은 아니었으나 대를 이어 뛰어난 수도원장들이 부임하여 로마교황이나 봉건제후의 신뢰를 얻어 옛 수도원의 개혁에 성공하여, 그 정신에 근간을 두고 각지에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그 개혁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 개혁의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은 봉건제후 등 세속권(世俗權)으로부터의 간섭을 물리친 수도회칙 보칙(補則:콘스에투디네스)에 토대를 둔 수도원을 세우는 것이었으며, 그와 관련하여 성직매매 ·대처(帶妻) 수도사 등에 대하여 당시의 제후들이 추진하는 개혁을 지지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비롯하여 개혁에 열의를 보인 교황이나 주교들 가운데는 이 수도원 출신이 많다. 그리고 이에 속한 개별수도원의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여 12세기경에는 유럽 천지에 약 1500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하지만 클뤼니 수도회는 그들의 성무(聖務; 기도와 예배)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자주 호화롭고 거창한 종교의식을 벌리는 전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910년 프랑스 마콘에 세워진 클루니 수도원은 베네딕트가 세운 엄격한 규율을 채용하여 지킴으로 당시에 가장 경건한 수도원이 되었고, 교회를 개혁하였던 교황레오 9세와 그레고리 7세 같은 걸출한 교황을 배출하기도 하였으며, 교황의 보호아래 세속적인 권력으로부터 간섭을 받지않는 특전이 있었다. 본래는 자체개혁을 의도한 것이었으나 차츰 교회와 사회의 개혁에까지 미쳤고, 재산소유와 성직매매를 금했으며, 성직자의 독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순종과 청빈을 강조하면서 경건의 표상이 되었던 클루니 수도원도 결국은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회당과 수도원 건물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7. 이단운동
12세기의 이단은 그 때까지의 이단이 주로 카톨릭교회의 신학이나 교리를 중심으로 한데 반해 교회의 성직자들의 실천내용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반성직자주의(Anti-clericalism)를 지항하는 개혁의 공통점은, 복음서에 기술되어 있는 바와 같은 크리스트의 생활이 진정한 크리스트인의 생활이라는 신념이었다.
즉 12세기의 이단운동이란 크리스트의 생활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에 대표적인 주요 그룹이 알비파와 왈도파이다.
알비파에 의하면 이 세상은 선과 악의 싸움인데 선은 크리스트와 신약성서이고 구약성서의 여호아가 악의 구현이라는 데서 이단으로 판명되었다.
왈도파는 진실한 크리스트인의 생활은 오직 가난한 생활에 있다고 확신하여 성직자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카톨릭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받았다.
8. 시토와 탁발의 출현
12세기에는 또 베네딕트의 계율을 엄수하려는 시토교단(Order of Citeau)이 크게 발전하였다. 창설은 11세기말이었으나 시토교단의 발전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인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였다. 그의 정력적인 노력에 의해 그가 죽을 때는 교단수가 343개로 증가하였다. 시토교단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장원을 비롯한 농경지의 기증을 거부하고,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이를 교단의 수입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여 많은 황무지가 개척되었다.
13세기에는 도시의 발달, 이단의 발생, 그리고 정화된 복음지향의 생활에 대한 갈망 등이 결합하여 두개의 탁발교단(Friar)이 등장하였다. 그 하나가 아시지의 聖 프란체스코(St. Francesco, Fransis of Assisi, 1182-1226)였다. 프란체스코는 중세 성인중에서 가장 사랑스런 인물로서 보다 단순하고 자연스런 생활을 권고하였다. 그는 자연을 찬미하고 그 속에서 신의 영광과 업적을 보았으며, 새에 까지 설교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도시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도시민에게 단순하고 자연스런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수도회 회원은 걸식을 하는 성직자로서 순전히 개인의 인격을 통한 구제를 역설하였다.
또 다른 탁발교단은 성(聖) 도미니쿠스(St. Dominicus, 1170-1221)에 의해 설립된 도미니쿠스교단이다. 도미니쿠스는 에스파니아출신으로 남부 프랑스를 여행중 알비파의 이단에 놀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설교를 시작했으며, 1216년 교황의 인가를 받아 교단을 설립했다. 그의 주된 목적은 성(聖) 프란체스카와는 달리, 청빈을 강조했으나 그것은 교단의 세력과 위엄을 증가시키는 방편이었으며, 도미니쿠스교단은 종교재판에 주로 간여하였다.
두 교단은 급속도로 교세가 발전하였으며, 이런 탁발승들이 중세 크리스트와 문화에 미친 영향력은 지울수 없는 것이었다. 13-14세기의 대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당대 제일가는 석학을 배출하였다. 13세기와 14세기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대부분은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쿠스파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초기의 청빈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15세기에는 쇠퇴하였다. 수도원 생활에 대한 정열이 식어갔고, 따라서 수도원이 더이상 헌신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이지 몼했다. 수도원안에서 점차 임금체제가 성장되고, 그와 더불어 공동생활이 해체되어 갔다.
시티 수도원
중세 수도원의 개혁을 시도한 또 하나의 수도원은 시키 수도원으로서 클루니 수도원과 다른점은 수도사들의 출신이 대부분 농부와 빈민 출신이며, 금욕생활을 강조하였고 수도사들은 학적인 연구보다 명상에 힘썼다.
버나드가 들어온 후 1115년에 클레르보 수도원을 세우고 12명의 수도사들을 파견하여 시티 수도원의 개혁을 확산시켰다.
그는 겸손하며 감화력이 큰 인격의 소유자로서 십자군들을 감동시켰다.
버나드는 평생을 클레르보의 수도원장으로 지내면서 중세 수도원 중에 가장 모범적인 수도원을 만들었다.
9. 탁발교단들 (13세기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
교황과 감독 등이 부와 권세를 얻고 사원에서 안일하게 지내며, 세속적 향락에 빠져 백성을 멀리하는 등 폐단이 심하였다. 지금까지 수도사들은 청빈, 금욕생활, 고행주의, 신앙적 경건주의만 고집하고 전도와 구제 사업을 등한히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의 입장에서 전도와 구제를 하며,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맛보고자 하는 새로운 수도단이 창설 되었다. 그들은 십자군이 옮겨온 사치풍조에 대항하여 낡은 옷을 입고 맨발로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화 시킨 새로운 스타일의 종교생활을 소개하였다. 이러한 취지하에 발생한 탁발교단으로 제일 유명한 것이 프란시 교단과 도미니크 교단이며, 교황은 이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
탁발 수도회
13세기에 들어 유럽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교회와 수도원 운동에도 새로운 흐름을 요구하였다. 즉 봉건제와 기존의 교회 체제 그리고 수도원 체제의 틀이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크레르보 수도원이 세워진 지 100년만에 탁발수도회라는 도미니크와 프란시스의 수도단이 창설되었다. 이 박탈 수도단들은 거리로 자리를 옮겨 구체화 시켰다. 그들은 수도원 개혁자들이었다기보다는 그 시대의 시회개혁자들이었다.
도미니크(1170 - 1221)는 도미니크 수도회를 조직하여 이교도와 이단의 개종에 힘썼다. 청빈과 봉사를 통한 이웃 사랑을 수도단의 양대 원칙으로 삼았다.
프란시스(1182 - 1226)는 도미니크보다 12년 늦게 태어났지만, 그는 가난의 길을 살며 선을 베푼 빚의 성자이다.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자 그는 1209년에 간단한 수도회칙을 작성하였다. 그는 1212 년에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수도회를 승인받게 되었다. 그는 빈곤, 독신, 순종의 삼대 서약을 강조하며 봉사와 전도에 힘써다.
수도원과 수도단이 진실하게 사도들과 같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탁발수도회는 하나의 배타적인 성격을 띤 세력과 조직으로 변모되어 13세기 이후에 급변하는 유럽사회에 교회가 뒤떨어지게 되는 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교회개혁과 신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운동과 관련한 동방 문화의 유입과 유럽사회의 변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특히 르네상스의 기틀이 된 고대 그리스문명과 학문에 대해 폐쇄성을 보임으로 마녀사냥, 종교재판, 유대인 박해라는 일종의 종교적 광기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프란시스파
프란시스는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Assisi)에서 출생하여 1226년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에 그레고리 9세는 성자의 칭호를 붙였다. 3인조 전도대를 조직하여 걸식 수도를 하며,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를 하였다. 많은 동조자가 생겼고 인노센트 3세가 1210년 정식으로 교단을 인정하였고 1216년에 명칭을 소형제단으로 개칭하였다. 수도단의 규율을 세워 엄격한 규칙생활을 하게 하며 빈곤, 독신, 순종 등 3대 서약을 강조하였다. 1224년에는 여자들을 위한 교단도 생겼다. 개인뿐만 아니라 수도단 자체의 재산소유도 부정하는 청빈을 목표로 하였으며 농사를 도와주고 나환자를 돌보면서 선교하였다. 도미니크파보다 서민적이었으며, 교황 레오 10세때 신령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었다.
도미니크파
성 도미니크가 1215년에 세운 교단으로, 도미니크는 1170년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태어났다.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정식교단으로 인정받았으며, 교육을 강조하여 여러 지방에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대학이 특히 이들의 활동분야로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서유럽의 중심적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였다. 제1회 도미니크 회의가 1220년에 볼로냐(Bolona)에서 개최되어 걸식을 통한 자신의 청빈과 설교와 봉사를 통한 이웃 사랑의 양대 원칙을 결정하였다.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대표적인 사람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신비주의자인 엑크하르트나 타울러 같은 인물들을 들 수 있다. 이 교단은 금욕주의와 주지주의의 경향을 띠었고, 묵상보다는 활동을, 의식보다는 설교를 강조했으며, 학문과 전도교육에 힘썼다.
탁발교단의 영향
a) 민중의 벗이되어 일반의 종교생활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주었다.
b) 많은 학자를 배출하는 등, 학문과 대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c) 스페인, 헝가리, 아시아에 탁발수도사를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벌였고 사라센 족속의 개종을 도모하였다.
10. 14세기의 신앙운동단체
개인의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전도와 선교사업을 했으며, 수도원 학교는 교육과 고대의 문화를 보존했고, 농사개량에도 공헌하였다. 기사단들은 오늘 서구인들의 신사도의 정신을 길러 놓았다.
a) 성당기사단과 병원기사단
이들은 청빈, 순결, 복종의 수도사들의 서약 외에도 성지수호, 순례자 보호, 구제를 임무로 삼았다.
b) 공동생활 형제단과 공동생활 자매단
공동생활의 형제단이란 이름으로 모인 이 단체는 흐루트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가정에서 초대교회와 같이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노동과 기도와 명상과 성경연구와 금욕생활을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신앙운동으로서, 이들의 공헌은 교육사업이다.
11. 중세 수도원의 영향
일찌기 동 지중해에서 출발한 수도원운동은 초기 중세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전문화의 보존 및 전달, 이교도들의 개종이 그들의 주요임무였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코 꿰여졌던 바, 이교도들의 침입으로부터 고전문화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하는 전도사업이었던 것이다. 동 지중해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출발한 엄격한 수도원 운동은 갈리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출신의 수도승들은 그들 주변에 몽땅 이교도였으므로 그들의 개종에 나섰던 것이다. 갈리아에 전파되었던 수도원은 다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6세기와 7세기에 걸쳐, 이 두 섬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도활동과 수도원운동이 전개되었다. 사실상 7세기와 8세기에 들어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선교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거꾸로 그들이 보존한 여러 고전문화들이 대륙으로 역수출되는 일까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라틴어로,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고전 문법책을 구해 그것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반면, 대륙의 라틴어들은 지방 속어들과 융합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고전문화만을 보존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대륙에서 섬나라로 들어갔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시 섬나라들에서 대륙으로 퍼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일랜드 출신 수도승인 보니파키우스(Boniface, 680??755)이다. 그의 별명이 "독일인의 사도" 였으니, 그의 활동무대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뒤에 다시 보겠지만, 서 로마교회가 위기에 처했을때 프랑크왕국과 제휴를 위해 정략적으로 파견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 피핀에게 국왕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세례식을 한 장본인이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출신의 수도승들은 농촌지역의 미개하고 원시적인 농민대중을 개종시켜 유럽을 기독교 대륙으로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계열의 기독교이고, 그의 출발지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였다. 대륙의 기독교 수도원들은 대부분 보니파키우스의 영향을 받아 아일랜드 베네딕트 계의 계율을 받아들였다. 특히 보니파키우스의 업적은 두 방향에서 이후 서방 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그의 전도사업으로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최초로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둘째로 갈리아 지방에서 그의 활약으로 프랑크 교회와 교황(로마) 사이의 관계가 전례 없이 밀접해지게 되었다.
수도원은 중세를 통해 저명한 교회지도자를 배출했으며 모든 문제에서 교황을 지지하였다. 수도원은 부속학교를 운영하고 도서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므로, 중세사회에 있어서 교육 및 학문연구와 같은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사회적으로 수도원은 자선을 베풀고 새 농경법을 가르치고 육체노동의 귀중함을 알려주는 사회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중세경제가 화폐경제로 발전함에 따라 수도원도 부의 축적으로 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단운동의 배격과 종교재판의 피해는 많은 반발을 초래해서 결국 종교개혁을 연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나) 끝. (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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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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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
고대 로마 (753~476 BC)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 |||
아메리카 문명 (300~1533) | |||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3부.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편에서 계속 됩니다.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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