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2 - 다

草霧 2013. 3. 1. 00:00

 

 

 

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2 -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시절,  교황의 전성기

   

 

 

1. 그레고리오 개혁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과 약 1050-1080년경 교황청에서 전국적인 규모로 성직자들의 기강 확립과 세속으로부터의 독립 문제를 처리한 사건을 일컫는다.

 

개혁의 이름은 교황 그레고리오 7(10731085)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나, 그레고리오 7세 본인은 자신이 주창한 개혁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직접적으로 거부하였다.

 

신의 대리인 교황이 세속권력인 황제나 왕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하였으며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이를 위해서 성직자의 규율을 확립하여 세속권력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그는 개혁의 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령을 내렸는데 그 주요 내용은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중 가장 문제가 된 것이 속인의 주교 서임권이었다.

 

속인이라 함은 교회조직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신도인데, 황제도 교회조직 밖의 사람으로 신자 신분으로 따지자면 평신도였다. 그런데 오랫동안 왕과 황제의 권력에 의탁하여 세력을 확장해온 교회는 각국의 교회를 주관하는 주교의 서임권을 해당국가의 왕들에게 맡기고 있었다. 서임권이란 주교를 임명하거나 사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서임권이 왕에게 있다 보니 주교후보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은 교황보다는 왕에게 더 의지 했으며 왕의 권력 하에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왕보다 미미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교황의 휘하에 주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이는 일이 어려움을 뜻했다.

 

주교들은 교황의 말보다는 왕들의 구미에 맞게 행동했고, 그레고리오 7세는 이것이 교회의 타락과 혼란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서임권을 교황이 가져옴으로써 유럽 전지역 교회를 개혁하고 교황권을 확립시키려는 그레고리오 7세의 의도는 왕들의 교회에 대한 권력을 축소내지는 박탈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하인리히 3세 시절 교황을 완전히 장악했던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교황의 이런 선언은 황제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전시대의 강력한 황제권에 대한 동경이 있던 하인리히 4세에게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있을 수 없는 반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황제와 교황의 서임권을 둔 분쟁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이 이긴 것으로 일단락 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끝내 그레고리오 7세에게 굴복할 수 없었고 분쟁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1) 중세교회 대개혁 단행으로 전성기을 구사한,

 

 그레고리 7(Gregory Vll, 1073-1085)의 교황선언(Dictatus papae)

 

 

갈등하는 교황과 황제카노사의 굴욕

교회의 대개혁과 서임권 분쟁

하인히리4세의 역습와 폐위 _ 객사 _ 클레멘스 3

    

 

2)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Heinrich IV,1050 1106 )

    

 

3) 서임권 투쟁 (敍任權鬪爭)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인 서임권을 놓고 벌인 권력다툼을 말한다. 이 서임권 투쟁으로 독일에서는 약 50년 동안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귀족 계급이 황제보다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직자를 임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교회의 책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세속의 권력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주교와 대수도원장 등 고위 성직자와 수도자는 직위에 따라 토지를 갖고 있었고 교회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 직무도 수행하기 때문에 이들의 임명은 세속 권력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의 임명에 대한 특별한 권리가 있었고 교황은 황제의 대관식을 치루어주고 차기 황제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으므로 다른 세속 권력에 비해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이러한 성직자 임명권에 대한 중요성은 더욱 컸다.

 

서임권 투쟁의 발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세속 권력이 가지던 서임권을 교회로 다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레고리오 개혁론자들은 황제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교회권력을 추구했는데 마침내 1056년 하인리히 4세가 6살의 어린 나이로 독일 왕으로 선출되자 개혁론자들은 기회를 잡게 되었다. 1059년 로마에서 벌어진 교회 회의에서 개혁론자들은 교황의 선출에 세속권력이 관여하지 못하도록하고 추기경단의 임명에도 관여하지 못하게 선언했다. 교황청은 교황임명권을 되찾게 되자 다른 성직 임명권도 교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려고 시도하였다.

 

이후 1106년 하인리히 4세가 죽고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 역시 서임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서임권 논쟁, 정복자 윌리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캔터베리 대주교, 1106년 잉글랜드의 헨리 1

 

4) 파문(破門, 영어: excommunication)

 

 

로마 가톨릭에서 세례받은 신자가 교리나 윤리상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를 공동체로부터 제거시키는 처벌을 뜻한다. 바깥을 뜻하는 Ex와 성도의 교제(사도신조 참조)를 뜻하는 Commununion이 더해진 말이다.

'톨레라투스'(관용을 베푸는 것)

'비탄두스'(상대하지 못할 사람으로 간주해버리는 것), 이 파문은 대단히 큰 범죄에 한정되었다.

'죽을 위험에 처해 있는 경우'(in periculo mortis)를 제외하고는 사면

정직제재(停職制裁) 및 금지제재

 

5) 카놋사의 굴욕(Gang roach Cannosa, 1077)

10771월 추운 겨울날. 북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 문 앞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은 이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자임하던 중세 독일의 국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내복바람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기 위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을 파문한 교황에게 용서를 빌고 복권을 부탁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사흘이나 황제를 성문 밖에 방치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알리는 첫 신호 카노사의 굴욕사건이다.

 

1076년 겨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아우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출발했다. 그가 알프스를 넘을 때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순간 긴장했다. 군대를 가진 하인리히 4세가 무력으로 자신을 몰아 내려고 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교황의 본거지를 떠나 단출한 여행객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 것은 카노사 성의 성주였던 백작부인 마틸데였다. 그녀는 교황의 오랜 친구였으며 그의 교회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카노사 성으로 들어간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황제가 아니라 자비를 구하는 고해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하인리히 4세는 맨발에 수도사의 옷을 입고 성문 앞에 도착해 그레고리오 7세의 알현을 청했다.

 

교황이 파문을 거둬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만나줄 때까지 내복바람에 금식을 하며 3일을 버텼다. 이 카노사의 굴욕을 당하면서 하인리히 4세는 이날의 치욕을 훗날 반드시 갚겠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7세의 파문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는 더 이상 훗날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참고 또 참았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미 하인리히 4세에 대해 마음이 돌아선 그를 설득한 것은 성주 마틸데 백작부인과 클뤼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 후고였다. 황제의 신분을 떠나 성문 밖에서 추위에 떠는 신자를 자비의 교황이 내팽개쳤다는 오명을 덮어쓸 수 없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하는 수 없이 성문을 열게 하고 하인리히 4세를 만났다. 하인리히 4세는 무릎을 꿇고 교황에게 용서를 구걸했으며 그레고리오 7세는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에 하인리히 4세를 참석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파문을 거둬들였다.

    

 

한 순간의 치욕을 참아내고 훗날을 도모한 하인리히 4세의 인내와 정치적 판단에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실제로 하인리히 4세는 파문이 취소된 후 독일로 돌아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보복할 힘을 길렀으며 끝내 그를 교황자리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교황을 만나기 위해 추위 속에서 3일을 기다려 무릎을 꿇었다는 에피소드는 강력한 교황권의 상징으로서 충분히 빛을 발한다.

    

 

이 사건으로 세속의 권력에 대해 교황권력이 항구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카노사 라는 이름은 세속적 권력의 교회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중에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해 이른바 문화 투쟁(Kulturkampf)’을 벌일 때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라고 연설했는데 이 말은 바로 이 카노사의 굴욕 사건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 독일은 로마 교황청 등 외세에 굴복하지 않고 문화적·종교적으로 독자적인 길을 갈 것이라는 천명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북이탈리아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첫 번째 사건으로 간주한다. 교황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가 독일을 몰아내기 시작한 단초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카노사라는 말은 일종의 굴복, 복종, 항복을 나타낸다. ‘카노사로 가다라는 표현("go to Canossa")은 하기는 싫지만 억지로 굴복해야 하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인다.

 

우르바누스 2(우르반 2, Urbanus PP. II: 1088 - 1099), 클레르몽 공의회

    

 

 

6) 하인리히 5(10861125)

왕위 계승과 대관식

제후의 반란

작센의 자립

보름스 협약

    

 

7)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

1122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갈리스토 2세 간에 맺어진 협정이다. 이로써 1076년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 내용은 성직자(聖職者)는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지환(指環)과 장(영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서임권(敍任權)을 포기하고 홀(세속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교회령 및 이에 부수되는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독일 국내에서는 황제의 홀()에 의한 수봉(授封)은 성직자서임(聖職者敍任) 때 행해지는 성별(聖別)의 의식(儀式)에 선행(先行)되며,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에서는 성별(聖別)이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 교회국가(敎會國家)에서는 이러한 협정(協定)은 적용되지 않음 따위 등이다. 이 내용은 교황과 황제가 다같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타협으로 서임권 투쟁은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123년에 열린 제1회 라테란 종교회의는 보름스 협약과 교회개혁의 기본노선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서임권 투쟁의 결과 독일에서 권력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더욱 분권화되고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지방 권력은 더욱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고 결국 19세기까지 독일 지역에서는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는 형성되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한편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한 교황권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교황은 십자군 제창 등 자신의 의도대로 정세를 움직일 수 있었다. 보름스 협약으로도 황제와 교황과의 서임권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며 신성 로마 제국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손실은 카를 대제로부터 시작해 오토 왕가, 잘리어 왕가를 거쳐오는 동안 통일된 기독교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상징의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8) 로마교황청의 최전성기, 교황 인노센트 3(Innocentius, 1198-1216)

로마 교황.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사망 후 황제령(皇帝領)의 일부를 교황령(敎皇領)에 합병시킨 외에 독일 왕 오토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사로운 일에도 간섭했다.

 

 1206년에 캔터베리 대사교(大司敎) 임명에 관해서 영국의 존왕과 다투어 그를 파문했다. 그 때문에 존왕은 교황에 굴복하고 자기의 국토를 일시 교황에게 헌상했다가 다시 교황으로부터 왕으로 봉해지는 형식으로 지위와 국토를 다시 받아들이는 추태를 연출했다.

    

 

 

4회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는데, 처음 교황은 그 공격이 십자군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많은 재보를 가져오고 동방교회가 로마 교회에 종속되는 성과를 낳자 교황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다. 그 밖에 성()프란체스코, 성 도미니쿠스의 수도원 운동을 공인(12101215), 육성하였으며, 1215년 라테란 종교회의를 열어 교의상·교회 규율상의 여러 결정을 짓기도 했다. 그가 교황권의 제권(帝權)에 대한 우월성을 태양과 달과의 비유로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라테란 종교회의

    

 

 

2. 교권의 몰락의 전조, 십자군 운동 (croisade, 1096-l270)

 

 

추후, 별도의 장에서 서술합니다.

 

 

 

() .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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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A%B5%90%ED%99%A9_%EB%A0%88%EC%98%A4_1%EC%84%B8교황 레오 1(Sanctus Leo I Mag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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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에게 미술

중세 미술

(500 ~ 1500)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

인쇄기의 발명(1456)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비잔틴 제국

(476BC-1453)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비잔틴 미술 - 1

비잔틴 미술 - 2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1

성서의 가르침을 그림으로 읽는다.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3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4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3

기독교 만 존재한다. - 1

기독교 만 존재한다. - 2

기독교 만 존재한다. - 3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아메리카 문명

(300~1533)

고대 아메리카 미술-1

고대 아메리카 미술-2

고대 아메리카 미술-3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미술의 탄생

원시미술 -2

메소포타미아 미술

이집트미술

아프리카 미술-1

아프리카 미술-2

 

  

 

3. 인간의 야욕이 신을 닮았다 편에서 계속 됩니다.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