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 나

草霧 2013. 2. 27. 13:09

 

 

 

 

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 나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나)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제국과 교회 _ 교황과 황제 간의 보편적 투쟁

 

 

1. 그레고리우스 개혁

 

 

 

클뤼니 수도원과 함께 시작된 교회개혁의 기치는 11세기 중순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교황권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교회의 개혁이 세속권력과의 절연을 의미하고 이 절연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속권력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교회만의 강력한 권력수립이 요청되었는데, 이는 곧 교황권을 중심으로 한 교회조직의 중앙집권화로 현실화되었다. 개혁의 이상에 고무된 교황권은 전 서유럽 기독교 세계에 일괄적으로 개혁을 실시해야하고 또 각 개별 교회들이 부딪치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해야만 했다. 세속 권력과의 대결은 기존의 중심 없는 느슨한 조직의 연합과 같은 형태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혁은 교황권 스스로가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가능했으며 이는 성직자들의 성직매매와 혼인풍습을 근절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교황권이 주도한 이 개혁은 후대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1073-85)의 이름을 따 그레고리우스 개혁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1049년 레오 9(1049-1054)부터 시작되었다. 그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지명된 교황이었던 레오 9세는 교황 특사들을 서유럽 곳곳에 파견하여 성직매매와 혼인풍습 척결에 열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교황의 단명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1059년 즉위한 교황 니콜라스 2세는 교황권과 성직자 선출과정에도 대대적인 개혁의 칼을 들이대었다. 당시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명을 받고 로마 인근의 성직자 및 귀족들의 동의를 거쳐 선출된 교황직은 이제 전적으로 교회 성직자로만 이루어진 추기경단에 의해서만 선출되도록 결정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남부 이탈리아에 새롭게 들어서서 정당성이 취약했던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왕조와의 새로운 동맹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신생 정복왕국과 신흥 개혁교회는 각각 정당성과 군사적 지원을 교환하였다.

교황권 선출에 대한 세속권력의 개입 차단에 일단 성공하자 후임교황 알렉산데르 2(1061-1073)는 본격적으로 전 교회 성직자 서임과정에서 세속권력의 개입을 근절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세속권력과의 관계를 절연한 성직자들만의 교회공동체 확립을 통해서만 성직매매와 혼인풍습 근절과 근본적인 교회개혁을 달성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차원에서 교회개혁은 유럽 내 모든 성직자들 사이에서 교황을 유일무이한 최고주권자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교황은 전 서유럽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지도자로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교회개혁의 정치적 결과는 대내적 측면과 대외적 측면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대내적으로 당시까지는 느슨하게 엮여져 있던 서유럽지역 교회들은 종교적·윤리적 정당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교황권에 의해 포획되어 이를 중심으로 통일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 교황권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기독교는 대외적으로 우상파괴 문제와 여러 전례상의 차이를 빌미로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오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와 동로마 황제의 간섭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res publica christiana)라는 이상이 구체적인 외연을 지니기 시작하였고 이는 적어도 서유럽에서 보편권을 주장하는 교회의 등장, 즉 로마제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교회의 등장을 의미하였다. 승승장구하는 교황권의 다음 계승자가 바로 그레고리우스 7(1073-1085)였으며 그의 재위기간에 교황권은 처음으로 황제권을 굴복시키고 전 서유럽에 대한 교황주권을 명시하게 된다.

 

 

2. 서임권 투쟁

교회가 추진한 개혁들, 특히 서임권(성직자에 대한 임명권)에서 세속권력을 배제하려는 시도들은 교회나 수도원을 중요한 가산이자 지역권력의 핵심으로 여기던 세속권력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잉글랜드나 프랑스의 상황이 더 악질적이었지만 교황과의 충돌은 이곳의 세속권력들보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발생하였다.

 

이 충돌은 두 가지 문제들로 인해 야기되었는데, 그 첫째는 서유럽에 대한 보편적 지배권이라는 명목적인 문제였고 두 번째는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3.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교령 교황의 확언(Dictatus Papae)’ 

곡창지대이자 상업적으로도 성장하기 시작한 북부 이탈리아 지역은 황제권과 교황권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경제적 요충지였다. 여기에서도 특히 주교의 권력이 시정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밀라노(Milano)시가 분쟁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즉 밀라노 주교를 황제파와 교황파 사이에서 어느 편을 선출하는가의 문제는 밀라노 시는 물론 인근 지역에 대한 지배권 장악의 문제와 연결되었다. 황제 하인리히 4(Heinrich IV, 1056-1106)가 기존의 권한을 내세우며 자신의 측근을 주교로 삼으려 하자 교황은 개혁을 내세우며 성직자에 의한 주교선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074에 벌어진 이 분쟁은 제국 내 지방분권적 제후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 때문에 일단은 하인리히 4세의 양보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제국 내의 정세를 안정시킨 황제는 다시금 밀라노 주교에 자파 세력을 심어 놓으려고 했고 나아가 제국 내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서유럽 내 최고주권자는 교황임을 내세우는 교황의 확언(Dictatus papae)’이라는 제목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황제를 파문으로 위협하였다.

 

확언으로 번역된 딕타투스(Dictatus)’는 여기에서 파생된 독재자(dictator)’라는 말이 보여주듯 지배자의 일방적인 명령을 의미한다. 이 교령은 교황을 황제를 뛰어넘는 영적인 보편적 주권자로 규정하고 모든 성직자들은 물론 황제를 포함한 세속권력들까지 교황에게 굴복해야 하며 이들에 대한 파문권과 폐위권을 교황이 쥐고 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교황은 세속권력자들과 달리 영적인 차원에서 성직자와 세속인들에 대해 주인된 권리, 즉 주권(Souveraineté)을 지니며 이는 물론 세속권력들 사이에 형성된 봉건적 주종제에 나타나는 종주권(宗主權, Suzeraineté)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그레고리우스 7세와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 앞에 무릎 꿇은 하인리히 4

하지만 하인리히 4세의 밀라노 주교 서임권 개입은 계속되었고 이에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를 실제로 파문, 좀 더 정확히 말해 대파문(Anathema)에 처했다. 일반적인 파문(excommunication)이 기독교 신자를 기독교 공동체 바깥으로 추방한다는 뜻을 지닌다면 대파문 또는 이단파문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단과 이교도를 영원한 저주와 함께 추방한다는 뜻을 지닌다. 여하튼 파문이나 대파문이나 이는 해당 인물이 더 이상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며, 나아가 기독교 신자만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파문을 당한 자는 더 이상 공동체를 규제하는 실정법의 적용 대상자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게 된다.

즉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더 이상 기독교 공동체의 정당한 구성원이 아니므로 다른 이들에게는 불법적이라 할 수 있는 위해를 그에게 가할지라도 불법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셈이다. 단지 말뿐인 교황의 파문 선언이 현실적인 정치적 위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이상의 의미가 제국 내부에서의 정치적 맥락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호시탐탐 제국 내 지방 제후들을 제압하고 중앙집권적인 패권을 유지하려던 황제에 대해 교황의 파문은 지방분권적인 제후들에게 황제에 대한 봉기의 정당한 대의를 제공해 주었다.

결국 교황의 파문권이 효과를 거둔 것은 영적인 권위와 교황의 신정정치론에 대해 인민들이 일방적으로 복종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파문의 정치적 효과는 현실적인 정치권력들의 파편화 과정 속에 파고들어 상황논리를 잘 이용했다는 점에 있었다. 만약 권력의 파편화가 봉합되어 통합적인 국가체제가 들어선다면 파문의 위협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며 이는 실제로 14세기 초 필리프 4세의 프랑스 왕국에서 벌어지게 될 상황이었다. 어쨌든 하인리히 4세는 반 황제파의 결집이 가시화되고 이에 대한 교회의 정당성이 주어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교황에게 파문 철회를 간곡하게 부탁해야만 했다.

1076년 겨울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7년 봄 황제의 파문과 관련하여 독일 남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은 자신의 지지세력이었던 토스카나 백작 가문의 영지에 위치한 카노사(Canossa)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는 한 겨울에 거칠고 험한 눈길을 헤치며 카노사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교황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3일간 눈밭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속죄하며 용서를 빌었다.

 

카노사에서의 참회’, 또는 카노사에서의 굴욕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반대로 이 사건은 황제에게 이만저만한 굴욕을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황제는 교황을 로마 대주교로서 자신의 신하로 취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석고대죄한 사건의 현장에는 자신의 신하였던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가 교황과 나란히 배석하여 자신의 굴욕적 사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오토 1세의 제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회제국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본격적으로 정치세계의 질서이자 제도로서 현실적인 권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3. 교회와 세속권력의 타협안

물론 교황권의 승리가 교황 개인의 영광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7년간 절치부심 복수를 준비한 하인리히 4세는 제국 내 반 황제파를 소탕하고 황제파 세력을 굳건히 한 후 1084년 로마로 진격하여 새로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추대하였다. 그리고 후자의 도움으로 교황과의 불화 속에서 아직 치르지 못했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가 로마로 들이치기 전에 시칠리아 왕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 회한 속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 또한 지방분권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바로 그의 아들이 지방제후들과 연합하여 봉기를 일으키고 그를 폐위시킨 다음 1086년 하인리히 5세로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해결책이나 타협안은 황제와 교황 두 당사자로부터 도출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일찍이 뛰어난 정치 감각과 실용적 태도를 보여준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등장하였다. 11세기 말부터 황제와 교황의 투쟁과 유사한 분쟁이 잉글랜드에서도 국왕과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에서 벌어졌고, 12세기 초에 그 주역들은 바로 윌리엄 1세의 막내아들 헨리 1세와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인 안셀무스(Anselmus)가 되었다. 결국 이 둘은 1107년 서임권과 관련한 일종의 타협안을 마련하여 당시 교황 파스칼리스 2세에게 승인을 받았다.

이 타협안에 따르면 주교는 일단 먼저 교회에서 선출되며 취임 전에 국왕에게 봉건신서를 맹세함으로써 토지보유권을 인정받았다. 달리 말해 국왕은 교회의 생계에 필요한 봉토수여권과 관련하여 교회가 선출한 주교에 대해 찬반을 표할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국왕봉토 없이 교회를 경영할 수 없었던 성직자들은 국왕의 반대 표명시 새로운 주교를 선출해야만 했다. 교회 개혁의 이상에 따라 주교 선출과정에서 세속권력의 개입을 차단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는 세속권력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 파스칼리스 2세는 보다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급진적인 해결책은 바로 교회와 성직자가 세속권력으로부터 토지와 같은 어떠한 물질적 지원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고 교황의 제안은 곧 사장되었다. 결국 투쟁이 시작된 지 50여 년이 지난 1122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와 하인리히 5세는 보름스에서 화약을 맺고 잉글랜드의 경우와 유사한 타협안을 채택함으로써 서임권 투쟁을 일단락 지었다.

서임권 투쟁을 거치면서 가장 큰 성장을 한 것은 당연히 교황권이었다. 교황은 12세기에 들어와 서유럽 최고의 영적인 지도자로 그 권위를 굳건히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진행 될 교회법 체계와 교회 행정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가속화 시켰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제국에 대한 보편권을 둘러싸고 황제와의 투쟁은 더욱 격심해지기 시작하였다. 12세기에 들어와 제국과 이탈리아에서는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황제파와 반황제파(즉 교황파)라는 양대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중세말까지 중요한 정치적 갈등의 담지자들로 활약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교황의 파문정책은 결국 신성로마제국이 통합국가로 발전해 나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교황과 황제가 지닌 정당한 권위의 이원성은 중앙집권적인 황제 세력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에 종종 윤리적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다. 황제에 대한 반란은 대역죄로 단죄되기보다는 교황의 지지를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황권이 정말로 제국 전체를 통치할만한 정치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보편권에 집착함으로써 교황과 끊임없이 충돌한 중세의 경험은 결국 19세기 말까지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할 때까지 제국의 통합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정치논리를 산출하였다. 물론 당대인의 입장에서 또 상징적인 차원에서 진정한 황제란 로마의 황제여야만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말이다.

홍용진

    

 

서양 중세와 가톨릭 교회  

서양 중세와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논하기 전에 중세라는 시대적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원래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항상 연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시대구분 문제는 학자에 따라 편의상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의 특성을 토대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서양 중세라면 4,5세기의 게르만 민족의 이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14,15세기 이른바 르네상스 때까지의 약 1천년이란 오랜 기간을 뜻한다. 이 시대의 제분야의 특성을 보면 정치적으로 군주는 명목상의 존재일뿐 제후들이 실권을 행사한 지방분권 시대이며, 경제면에서는 영주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장원경제(莊園經濟) 시대이며, 사회면에서는 계급사회인 봉건시대에 해당되며, 문화면에서는 로마 멸망과 더불어 상호 이질적인 3대 문화권(프랑크, 비잔틴, 이슬람)으로 발전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한 정신문화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서양문화, 즉 유럽문화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유럽문화는 희랍, 로마적인 서양의 고전문명과 그리스도교적, 게르만적인 3대 요소가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요소들이 융합된 것은 당시 로마교황의 절대적 지원하에 성립된 프랑크제국 시대로 칼제국이 탄생한 기원후 800년을 유럽문화의 탄생기로 보고 있다. 따라서 유럽문화는 프랑크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이른바 유럽문화권이 새로이 역사무대에 등장하여 그리스도교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이후 유럽사회를 리드하였다. 이와 같이 오늘날 세계문화의 주류는 서양문화 즉 유럽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근간은 서양 중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문화의 근원은 그리스도교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중세교회는 항상 자체의 쇄신과 개혁이 뒤따랐다. 특히 수도원 중심으로 자체 쇄신운동이 전개되어 교회의 세속화 방지에 노력하였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당시 프랑스의 클뤼니(Cluny) 수도원의 세속화 방지운동, 이탈리아의 성 프란치스코회와 스페인의 성 도미니꼬회는 이른바 탁발수도회로서 수도원의 세속화는 봉건영주로서의 토지소유에 있다고 주장하여 세속적 욕망을 배제하고 수도자는 신자들의 희사에 의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이른바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회자체 쇄신운동이 적극 전개되었으며(트리엔트 공의회 등) 예수회의 창설과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교회는 한때 제왕들의 비속한 권력이 교회를 지배하고, 교황과 주교의 인선과 서품권을 빼앗긴 결과 세속화가 초래되었고 기강이 해이해져 마침내 암담한 세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때 그레고리오 7세는 분연히 일어나 속인의 서임권(敍任權)을 근절하여 폐해를 일소하였다. 그리하여 중세의 황금시대인 13세기를 창출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3, 성왕 루이 9,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프란치스코 등의 인물을 배출하여 참된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서양 중세사회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서 군림하였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몰락 후에도 교황의 권한은 변하지 않았으며 당시 서로마제국을 이룩한 프랑크왕국을 적극 지원하여 미개한 게르만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케 하여 사회혼란을 방지하게 한 것은 유럽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6세기에 출현한 수도원은 세속화의 방지는 물론 부속학교를 통한 학문발전과 사회사업도 그들의 소관임무였고 노동의 신성성을 고취하여 경제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띠면서 세속적인 국가에 대해 모범이 되었다. 즉 미개민족에 대한 교화에 힘썼다. 특히 고트족, 반달족, 훈족을 교화시켜 그리스도교 교훈에 따른 인간성을 도야했다. 또한 야만민족의 침입으로부터 구출하여 국가사회의 질서회복에 크게 기여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신자들이 제왕이나 제후간에 일어나는 항쟁의 조정을 호소하는 최고 법정역할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제왕에게 왕관을 씌워주기도 하고 제왕의 폐위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조경래(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대립과 분열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1(379-395)가 죽은 다음에 로마 제국은 서로마(라틴)제국과 동로마(비잔틴)제국으로 갈라져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 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남아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서방(라틴)교회와 동방(비잔틴)교회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발전하면서 교리와 전례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겪었다.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논쟁에서 교황 레오 1(재위:440-461)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하는 단성론(單性論)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구분되어 있다는 교의교서를 반포하였고 칼체돈공의회(451)가 동의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방교회들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랜 논쟁 끝에 갈라져 나갔다. 이렇데 단성론을 주창하는 교회들은 오늘날 '고대동방교회'라고 불린다.

 

비잔틴제국에서는 성화상(聖畵像)문제로 교회가 격심한 대립세력으로 양분되었다. 5세기에 이르러 성화상은 국민들에게 신심의 대상이 되었고 6-7세기에는 성화 숭경이 개인신심이나 대중신심에 있어서 핵심요소를 이루고 있었다. 성화 숭경은 살아있는 신자들과 천국의 성인들 사이의 영적 교류인 '성인통공'의 교리에 근거한 성인공경에서 비롯하였다. 이렇게 성화상 숭경을 반대하는 견해에 대해서 성화상 지지자들은 2-3세기의 다신교의 이교도들은 신들에게 존경을 드리기 위해 만들어진 석상과 예배를 드려야하는 신들을 구분하였다는 논증을 제시하였다. 칼체돈 공의회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육체를 받아들이셨다고 정의한 교리에 근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제국 황제 레오 3(717-741)는 성화상 공경을 금지하고 성당에서 성화상들을 철거,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교황 그레고리오 2(재위:715-731)는 성화상 파괴를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741-775)는 성화상을 배척하는 주교들을 모아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754)에서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하였다. 그리고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던 사람들 특히 수도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성화상 파괴논쟁은 786년에 황실에서 성화상 공경 신심을 회복시킴으로써 끝맺었고 제2차 니체아공의회(787)에서 성화상공경을 우상숭배로 단죄한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84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는 성화상 공경의 회복을 선언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사순 첫째 주일을 '전통신앙의 축일'로 제정하여 지내고 있다. 성화상 공경의 부활은 동방교회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양식의 비잔틴 종교예술의 발전을 갖고 왔다. 성당을 장식하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화려하기보다는 엄격하게 신학원리, 성서내용, 전례집전에 맞게 제작되었다. 성화상 파괴세력의 패배로 성화상 공경을 지지하던 수도원은 부흥시대를 맞이하여 중세 비잔틴교회 안에서 예술, 문학, 성가, 전례와 같은 부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비잔틴교회와 교황청을 충돌로 몰아넣은 사건 즉 '포시우스분규'가 발생하였다. 847년에 섭정 황태후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이냐시우스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856년 쿠데타로 테오도라가 물러나고 황제 미카엘 3(842-867)가 친정(親政)하면서 이냐시우스는 비잔틴교회의 분열을 우려한 주교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임하였고 2년후에 주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교의 철학교수인 평신도 포시우스(810-895)를 총대주교로 황제에게 천거하였다. 황실의 요구로 교회회의가 소집되어 이냐시우스의 총대주교 서임이 교회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임이 선언되었다.

 

860년에 포시우스는 교황 니콜라오 1(재위 : 858-867)에게 편지를 보내어 총대주교 착좌사실을 알렸고 미카엘 3세는 성화상 파괴사상을 다시 단죄하기 위하여 소집되는 교회회의에 특사를 파견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교황은 평신도의 총대주교 선임을 반대하면서 특사를 파견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861)에서 포시우스는 합법적 총대주교로 승인되었고 이냐시우스는 교황에게 상소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863년에 교황은 포시우스의 불응에 대응하여 로마교회회의에서 포시우스 선출을 위법으로 규정하여 이냐시우스의 복직을 결정하였다.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관계는 불가리아 문제로 악화되었다. 불가리아는 비잔틴교회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파한 나라였다. 불가리아의 왕 보리스 1(852-889)는 대주교 또는 총대주교의 파견을 요청하였는데 포시우스는 선교사들만 보냈다. 865년에 불가리아 왕은 로마교회와 유대를 맺게 되었고 니콜라오 1세는 두명의 주교들을 보냈다. 불가리아에서 서방라틴교회의 성직자들은 '니체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그리고 성자로부터'를 삽입하여 사용하였다. 이는 6세기 말에 서방교회에서 '니체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좇아나셨다' 다음 '그리고 성자에게서'를 첨부하여 9세기 초부터는 미사에서 이 신경이 노래로 불렸다. 교황 레오 3(재위:795-816)는 이러한 구절을 신경에 삽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꺼렸으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좇아나셨다'에 담겨있는 '성령 이중 유출설'을 교리로 인정하였다. 867년에 포시우스는 비잔틴교회의 주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성자로부터'를 이단교리로 배척하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되어 황제가 주도한 교회회의에서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였다.

 

이러한 최악의 위기에 궁정혁명이 일어나 미카엘 3세가 암살당하고 바실리우스 1(867-886)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며 포시우스가 사임의 강요를 받고 이냐시우스가 복직하였다. 따라서 교황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와 관계를 개선하였으나 포시우스 지지세력의 강한 도전을 받았다. 이러한 긴장상태는 877년에 이냐시우스가 사망하였을 때에 교황 요한 8(재위:872-882)가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보장받기 위한 의도에서 포시우스의 복직을 승인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가 개최되어 포시우스의 단죄를 무효화하였고 그를 합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하였으나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토의하지 못한 교황의 수위권과 '그리고 성자로부터'의 문제는 나중에 두 교회를 결별에 이르게 하였다. 325년에 니체아공의회는 이러한 옛 관습을 승인하면서 서열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로 정하였다. 451년에 칼체돈공의회는 서열을 전교회 안에서 수위권을 갖는 로마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으로 확정하였다.

    

교황 레오 1(440-461)가 총대주교구의 특권은 사도교회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총대주교구의 추가결정을 반대하였을 때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참석 주교들은 레오 1세에게 로마주교(교황)의 수위권을 거부할 의사는 없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교황의 반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비잔틴제국에서 총대주교로서의 법적 인정은 받지 못하였으나 제국의 확장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의 영향력도 증대하면서 총대주교와 같은 특권을 행사하였고 점차로 총대주교로 불려졌다. 비잔틴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527-565)는 로마법을 반포하면서 명예직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법적 총대주교로 승인함으로써 그는 로마주교(교황) 밑에서 자치권을 갖는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교황 펠라지오 2(재위:579-590)와 그레고리오 1(재위:590-604)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런데 7세기에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제국의 다른 총대주교의 관할지역을 정복하자 총대주교구의 균형은 깨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만이 남아 로마교회에 대해 경쟁과 대립의 위치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11세기에 이르러 노르만족이 비잔틴제국의 영토인 이탈리아 남부지방을 점령하고 있었을 때에 교황 레오 9(재위:1048-1054)는 점령자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9(1042-1055)와 군사동맹의 체결을 계획하였다. 이때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롤라리오스(1043-1058)는 그의 관할지역으로 주장하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하면서 분규가 시작되었다. 케롤라리오스는 총대주교구의 독자적 자치권을 주장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유일한 로마제국의 수도임을 내세우면서 로마교회(교황청)와 그리스도세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려는 강력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레오 9세는 두교회의 관계개선을 위해 실바 칸디다의 추기경 훔베르토(1000-1061)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였다. 황제가 중재에 나서서 케롤라리오스 총대주교에게 사절단을 만나도록 권유하였으나 총대주교는 거절하였다. 훔베르토는 케롤라리오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서를 작성하여 1054716일에 성 소피아대성당의 제대 위에 놓고 로마로 돌아갔다. 파문소식을 들은 케롤라리오스 추종자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황제는 질서회복을 위해 파문서를 소각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훔베르토 추기경과 일행을 파문하였다. 이로써 두교회가 헤어져 그리스도교 세계는 둘로 갈라졌다.

 

그러나 이러한 결별은 두교회 사이의 공식파문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훔베르토는 레오 9세가 사망한 다음 총대주교를 파문하였기 때문에 파문의 효력은 없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회의에서 파문한 대상도 교황이 아니라 사절단이었다. 그래서 30년 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재위:1088-1099)가 투르크의 침공을 받던 동로마제국의 군원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황제에게 비잔틴전례 중에 생존자를 위한 기도문에서 교황의 이름이 삭제된 것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라틴전례의 성당들이 폐쇄된 이유를 질문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총대주교는 두교회의 결별에 대한 공식문헌이 없기 때문에 1054년의 상호파문은 훔베르토와 케롤라리오스 사이의 개인적 문제로서 두교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교황이 파문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문에 교황 이름이 삽입될 수 있다고 답변하였고 폐쇄된 성당은 라틴전례의 성당이 아니라 침략인 노르만족의 성당이라고 해명하였다.

    

 

14383월에 비잔틴제국의 황제 요한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함께 대표단을 이끌고 페라라-피렌체공의회(1431-1445)에 참석하여 연옥, '그리고 성자로부터', 성령, 성체성사,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공동합의를 이루고 일치교령이 반포되었다. 143966일에 양측 대표들은 일치교령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비잔틴제국에서 수도자들과 국민들의 반대로 일치교령을 선포하기를 주저하였고 교령에 서명한 고위성직자들도 그들의 동의를 취소하였다. 1452년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1(1448-1453)는 일치교령을 선포하였으나 1453529일에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폐망함으로써 교회의 재일치 희망은 사라졌다.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소집되면서 고대동방교회와 비잔틴전통의 정교회들은 가톨릭교회와 만남의 자리를 갖고 두교회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였다. 교황 요한 23(재위:1958-1963) 이후 현대 교황들과 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대화를 통해서 분열의 원인이었던 교리논쟁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일부 고대동방교회의 지도자들은 칼체돈 공의회의 그리스도 논쟁은 신학문제보다는 용어문제에 기인하였다고 인정하면서 가톨릭교회와 함께 신앙공동선언도 발표하였으며 교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합동대화위원회도 구성하였다. 1979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방문한 자리에서 신학대화를 위한 '가톨릭-정교회합동위원회'가 결성되어 오늘날 대화의 결실을 이루고 있다

김성태(신부, 가톨릭대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장) 

 

 

서양 중세문화와 교회의 역할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언제나 그 시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사상이 있었고 때로는 그 시대를 주름잡는 중심인물이 나타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분야의 발전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렇게 성립된 문화는 나름대로 고유성을 띠면서 민족문화를 형성하기도 하고 한 시대문화를 형성하여 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하면 서양 중세사회의 정신적 활력소가 된 보편적 그리스도교 정신이 그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게르만(German)과 노르만(Norman)의 민족이동을 통한 혼란한 사회와 미개한 그들을 개종케 하고 유럽사회를 안정케 한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말로 해석할 수가 있다.

사실 서양중세는 그리스도교적 세계라는 이름의 사회적, 종교적인 통일체가 육성되어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윤리 그리고 지성(知性)이 점차 유럽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 신앙 뿐만 아니라 지식의 영도자, 고전문화의 보존과 도덕성의 앙양, 근로의 신성성, 평등의식의 고취 등 서유럽 형성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하나의 국제국가, 국제왕국으로서 초국가로 군림하여 당시의 국제사회의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제왕도 파문을 받으면 국민들에게 왕의 구실을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부터 처벌받은 이단자가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국권에 의해 새로운 재판을 받을 필요없이 사형이 집행되었다.

특히 당시 문화활동의 중심은 교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제도의 가장 중대한 의의는 학문 특히 고전문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빈민구제, 병자의 간호, 약자의 보호, 사회교화, 지식보급, 복음전파 등 국가기능의 수행이다. 따라서 당시 교회는 문화활동의 중심지로서 교육, 사상, 문학, 예술, 도덕, 풍속 등 그리스도교의 교의(敎義)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은 기도와 명상생활을 통하여 학문연구와 자립생활을 근본정신으로 근로의 신성성을 고취하여 노동은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 중세 경제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정신 세계를 바로잡고 오늘날 서양문화 발달에 산실 역할을 하였다.

또한 최고 지식을 양성하는 대학도 교황의 특허를 얻어 교회 내에 설립하였다. 교수들은 성직록을 받고 있는 성직자들이었으며 12세기부터는 수도원 부속학교로 대학이 발생하였다. 대표적 대학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사래르노(Salerno)대학, 보로그노(Bologno)대학, 프랑스의 파리(Paris)대학, 영국의 옥스퍼드(Oxford)대학 등이 있다. 이들 대학들은 모두가 700-800년의 역사전통을 자랑하고 지금도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당시 대학들은 교황이나 왕으로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으며 학생들도 특별대우를 받았고 대학은 각기 특성을 갖고 있었다. 즉 사래르노 대학은 의학으로 유명하였고, 보로그노 대학은 법학,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특히 파리대학은 노틀담 교회의 부속학교로 출발하였는데 당시 프랑스가 낳은 매혹적인 철학자인 아벨라드(Abelard)와 이탈리아 출신인 파리 주교 롬바르드(Lombard)등과 같은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중세 초기의 학문은 교부철학(敎父哲學)이 중심이었고 후기에는 스콜라(Schola)철학이 중심이었다. 초기의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란 말이 있듯이 철학과 신학은 별도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철학은 신학체계에 동화되었다. 교부(敎父)라 함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를 지칭하였는데 신국론, 고백론, 삼위일체론을 저술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간은 원래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나 아담이 죄를 범한 때부터 원죄를 얻어 그 죄는 신() 즉 그리스도에 귀의(歸依)함으로써 구제된다고 하여 교회 밖의 구원은 없다는 중세철학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신에게 절대 복종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는 지상에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대립으로 지상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보다 우월하다는 교의와 권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신학체계를 마련하여 플라톤 내지 신플라톤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여 중세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중세후기 학문을 대표한 것은 스콜라 철학으로 교회와 부속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는 9세기 예루게나(Eriugena)에 의해 창시되고 안셀무스(Anselmus), 아벨라드(Abelard) 등에 의해 발전되고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대성되었다. 특히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중세철학의 집대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신학의 과학성을 강조하여 명목론(名目論, 이성의 선행)과 실재론(實在論, 신앙의 초월성)의 조화와 합일을 이루어 놓았다.

    

 

 

또한 중세문학 역시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였다. 특히 민족고래의 신화와 전설, 영웅의 사적을 노래한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의 민족적 서사시인 '니밸룽겐(Nibelungenlied)의 노래'와 기사문학으로는 영국의 전설상의 지배자 '아더왕의 이야기'와 찰스대제의 영웅담인 프랑스의 '로랑의 노래'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에는 라틴어로 씌어지고 작자도 교회관계자가 대부분이었으나 후기에는 차츰 속어(俗語)로 씌어져 기사(騎士)의 모험이나 연애를 주제로 하는 기사문학이 성행하였다. 예술방면에 있어서도 교회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교회건축이 중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바시리카, 중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였고 후기에는 고딕양식이 중세 건축을 대표하였다. 이는 천국을 바라보는 중세인의 종교적 동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미술도 교회내부의 공간을 장식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색채유리에 의해 더욱 효화를 표현하였다. 조각 역시 교회를 장식하는 기교에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문화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조경래(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그레고리오 개혁

 

 

1) 그레고리오 7(재위:1073-1085)의 교황명에서 나온 용어로, 넓은 의미에서는 10494월 교황 레오 9(재위:1049-1054)가 교회개혁을 선언한 때부터 1122년 교황청과 신성(神聖)로마제국이 체결한 보름스종교협약이 1123년에 가톨릭교회의 라테란교회회의와 신성로마제국의 밤베르그제국의회에서 인준되었던 때까지 이루어진 개혁을 뜻하며 좁은 의미로는 그레고리오 7세가 평신도(세속군주)의 성직서임(聖職敍任)을 금지함으로써 서구 그리스도교를 개혁한 운동을 지칭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이 개혁운동을 창시하거나 완수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교회개혁 조처로 상실되었던 교황권의 회복과 함께 교회쇄신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재위기간은 교회개혁운동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였으며 교황사(敎皇史)에 있어서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에 '그레고리오'라는 단어가 개혁운동에 붙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레오 9세부터 알렉산데르 2(재위:1061-1073)에 이르는 그레고리오 전시대(1049-1073)이고, 둘째는 그레고리오 7세가 개혁을 전개한 그레고리오시대(1073-1085)이며, 셋째는 그레고리오 7세 이후의 개혁교황들이 추진한 그레고리오 후시대(1085-1123). 과거에는 그레고리오 개혁을 다룰 때, 오늘날 일부 중고등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에서 나타나듯이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의 주도권 쟁취를 위한 교회와 국가간의 대립으로만 보여지는 '평신도의 성직서임권'에 대한 논쟁에만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교회의 자유를 찾는 문제 이외에 도덕적 개혁, 교회규율의 개혁, 교회조직의 개편과 같은 교회문제들이 중요한 과제였고 교황청, 수도회, 성직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교회개혁운동이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내용은 네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교황권 특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강화, 클뤼니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수도회개혁, 성직자의 생활쇄신, 평신도 지배로부터의 교회의 자유다. 교회의 자유는 교회가 속권(俗權)과의 대립에서 특히 성직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하여 교권(敎權)을 다시 찾는 것을 말한다.

 

교황 니콜라오 1(재위:858-867)의 서거 이후 레오 9세의 등장에 이르는 180여년, 특히 요한 12세의 죽음까지의 1백여년은 교황사에 있어서 교황권위가 떨어진 불행한 시대였다. 754년에 교황청과 우호동맹을 맺고 로마교회의 보호자가 된 카롤링가의 프랑크왕국이 국력이 약화되면서 로마를 둘러싸고 있던 정치세력들이 교황청을 지배하였다.

 

9세기말 로마교회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던 노력은 스폴레토공국의 지배자들에 의해 실패하였다. 10세기에 이르러 투스콜룸의 귀족들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50여년간 로마교회를 지배하였다. 그들은 측근들을 교황에 선임하였고 나중에는 가문에서 요한 11(재위:931-935)와 요한 12(재위:955-963)를 교황으로 선출하여 로마교회를 장악하였다.

    

요한 12세는 이탈리아의 정치 세력들로부터 로마 침공 위협을 받고 961년에 동()프랑크왕국의 오토 1(936-973)에게 군원을 요청하였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점령된 교황령을 탈환하였고 이에 교황은 감사의 뜻으로 오토 1세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황제로 축복하였다. 이로써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이 창설되었다. 오토 황제는 '오토특허장'을 공표하여 로마교회에 이탈리아 영토의 4분의3을 부여하는 대신, 교황피선자는 축복되기 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충성선서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교황과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교황령의 해방자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황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토 황제는 963년 로마로 돌아와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요한 12세를 몰아내고 황제 측근인 레오 8(963-965)를 교황에 임명하였다. 황제는 로마인들에게 앞으로는 황제의 동의없이 교황을 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로마인들은 요한 12세가 사망한 다음에 새 교황으로 베네딕도 5(964)를 선출하였으나 로마에 다시 온 오토 1세는 레오 8세를 복권시켰다. 이후로 황제들은 마음대로 교황을 임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로마교회는 정통교황과 대립교황의 등장으로 내분에 휩싸였으나 1046년 수트리교회회의에서 황제가 교황 선출 권리를 로마교회에 돌려줌으로써 교황청 분규는 해결되었다. 그러나 황제들은 주교임명권을 그대로 행사하였고,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개혁을 위한 주요 투쟁 목표가 되었다.

 

10494월 레오 9(재위:1049-1054)는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의 방법으로 주교가 된 성직자들을 해임하고 이러한 주교들에게 신품성사를 받은 신부들을 처벌하였다. 교황은 짧은 재위기간 동안 유럽을 여행하면서 지역교회 회의들을 소집하여 성직자들에게 교황청의 교회개혁에 대한 결정을 알리고, 주교와 수도원장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교황은 보편교회 위에서 유일한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나중에 그레고리오 7세가 된 힐데브란트, 훔 베르토, 베드로 다미아니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을 교황청에 불러들여 그들의 자문을 받았다. 이로써 12세기 교황권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교황 빅토리오 2(재위:1055-1057)도 교회개혁에 관심을 두고 105564일 황제와 함께 피렌체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를 단죄하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명령하였다. 후임 교황 스테파노 9(재위:1057-1058)는 레오 9세의 개혁그룹에서 교황을 도와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교회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교황은 다미아니와 홈 베르토와 같은 개혁가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교회개혁을 주도하게 하였다. 그는 홈베르토의 '성직매매자들을 반박함'이라는 개혁서를 통해 개혁정신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성직매매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직매매에 의한 서품과 이러한 서품을 받은 이들이 집전한 성사와 모든 서품은 무효이며, 교회법에 의한 선거의 완전한 회복은 교회를 평신도 지배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콜라오 2(재위:1058-1061)는 교황권의 독립을 위해 1059413일에 라테란교회회의에서 교황선거에 관한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로마의 추기경들이 의견을 모은 다음에 토론, 심의하여 후보를 지명, 인준하면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으로 받아들이고 황제는 교황선출에 대한 형식적 승인권만을 지닌다.

 

교황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 중에서 선출되어야 하나 마땅한 인물이 없으면 로마 밖의 교회에서도 지명될 수 있다. 또한 교황선거는 원칙적으로 로마에서 실시되어야 하나 로마가 안전하지 못할 때에는 다른 곳에서 실시할 수 있다. 그러나 대관식은 반드시 로마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1059년에 교황 니콜라오 2세는 라테란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차부제품(次副祭品)을 받은 성직자들부터 시작되는 독신생활의 의무를 부과한 라틴교회의 전통적 규율을 상기시켰다. 로마의 귀족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교령은 10604월에 열린 라테란교회회의에서 확인, 강화되었다.

    

이로써 교황선거에 대한 속권의 정치적 개입을 막고 교황청은 교회의 모든 개혁의 전제조건인 독립권을 회복하였다. 교황 니콜라오 2세는 레오 9세의 성직매매와 성직자 독신생활에 대한 교령을 갱신하였고 성직자들이 모여 사도적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참사회(參事會)를 설립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교황은 성직매매를 통해 서품된 성직자들을 해임하는 강경한 정책보다 그들을 다시 서품하자는 베드로 다미아니의 온건한 현실적 주장을 받아들였고 성직자들이 평신도(제후)들로부터 본당을 받는 것을 금지하였다.

 

2) 교황 그레고리오 7(재위:1073-1085)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가로서 그의 중요한 개혁과제는 로마교회의 수위권(首位權)을 주창한 것이었다. 그는 신자들과 제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 수위권의 신수설(神授說)을 주창하였다. 1075년 교황은 27개 항목으로 작성된 '교황훈령'이라는 개혁지침서를 내놓았다

 

이 지침서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無謬權)을 강조하였다. 로마교회는 하느님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교황은 보편교회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지 않고서도 주교를 임명하거나 해임하고 전임시킬 수 있다. 교황의 결정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취소될 수 없으며 로마교회는 절대로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황의 명령 없이 어떠한 공의회나 교회회의도 소집될 수 없다.

 

'교황훈령'에 근거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정책은 당시에 편찬된 법령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 개혁법령은 교황의 수위권 옹호, 교황의 입법 및 사법권의 행사, 평신도의 성직서임권에 대한 배격, 성직자의 독신생활 강조, 성직매매의 엄금을 주요목표로 편찬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교회개혁의 구현에 노력하였다.

 

1074년에 교황은 로마에서 사순절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전임 교황들이 내세웠던 성직매매금지와 독신생활의 준수와 같은 성직자의 생활쇄신을 강조하였고 1075년에 로마교회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서임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 특사들을 지역교회에도 파견하여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교회개혁을 구현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를 받으며 제한된 성공을 이루었지만 교황사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특히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1056-1106)의 성직서임에 반대하여 일어난 '카놋사사건'에서 그레고리오 7세가 황제의 속죄를 받아들임으로써 교회의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고 교회개혁의 길이 마련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를 이은 역대 교황들은 교회개혁과 함께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를 책임지는 임무를 지니게 되었다. 이제 교황은 교회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십자군운동과 같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보편적 이익을 위해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들을 단합시키고 국가들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조정하는 중심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인노첸시오 3(재위:1198-1216)의 시대에 이르러 교황의 영향력은 절정에 올랐다.

 

우르바노 2(재위:1088-1099)는 그레고리오 7세가 전개한 개혁을 계속하였다. 그는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재위초기에는 당시의 정치 및 종교적 배경 때문에 신중한 타협적 정책으로 개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093년 말에 우르바노 2세는 교황의 위치가 견고해지자 강경한 개혁정책을 시행하였다.

    

1095년에 교황은 여러 차례에 걸쳐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성직매매에 의한 서품을 엄금, 무효화하였고 성직자의 독신제(獨身制)를 천명하였고 평신도의 성직서임권에 대한 금령을 엄격하게 규정하여 주교를 임명하는 세속군주 뿐만 아니라 세속군주의 서임대상자, 그리고 서임대상자를 서품하는 주교를 파문하기로 규정하였다. 아울러 교황은 성직자의 세속군주에 대한 충성서약도 금지함으로써 교권의 완전한 자율권을 요구하는 교령을 선포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교황권의 강화를 표시하려는 의도에서 봉건 군주국의 통치조직을 본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정부를 조직하기를 원하여 교황청을 '라테란성궁' 대신에 세속국가의 최고통치기관인 왕궁을 뜻하는 '쿠리아'라는 라틴어 단어를 교회의 중앙정부 공식명칭으로 채택하였다.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쿠리아는 교황청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쿠리아의 채택은 교황청에 세가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첫째로 최고통치기관으로서의 쿠리아 설립은 교황청을 세속봉건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둘째로 쿠리아라는 새로운 개념은 교황청에 사법권을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세속국가에서 쿠리아는 국왕의 법정도 뜻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로 로마의 성직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체제는 그리스도교 전체를 통치하는 군주체제의 정부기구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교황은 전체교회에 대해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을 행사하였다.

    

파스칼 2(재위:1099-1118)가 교황에 선출된지 1년 후인 1100년에 영국에서 헨리 1(1100-1135)가 등장하면서 평신도의 성직서임권논쟁이 일어났다. 영국 국왕은 캔터버리의 대주교 안셀모(1033-1109)에게 영국의 전통인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요구하였다. 대주교가 교회의 결정을 지적하면서 서약을 거부했을 때, 헨리 1세는 이에 대한 관면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파스칼 2세는 영국 국왕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국왕에 의해 서임된 영국 성직자들을 파문하였다.

 

이러한 파문은 국왕이 대주교와 화해하도록 하였고 1107년에 지방영주와 고위성직자들이 모인 런던회의에서 국왕이 성직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교황청은 주교가 서품받기 전에 국왕에게 하는 충성서약 수행을 양보하였다. 이 회의에서 안셀모 대주교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강조하였다.

 

파스칼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성직서임권논쟁에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1102년에 교황은 로마교회회의에서 평신도의 성직서임에 대한 금령을 선언하였고 황제를 파문하였다. 그는 새 황제인 하인리히 5(1106-1125)가 다시 성직서임권을 요구하였을 때에 세차례에 걸쳐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하인리히 5세를 단죄하였다.

 

11112월에 파스칼 2세는 수트리종교협약을 통하여 황제의 성직서임권의 포기를 받아내고 신성로마제국 교회의 재산과 권리를 황제에게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교황 양측의 심한 반발이 일어나 황제는 합의를 깨뜨리고 교황을 위협하여 서임권을 황제의 특권으로 승인하도록 강요하여 받아냈으나 교황은 추기경단의 항의로 1116년에 라테란교회회의에서 이 특권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칼리스트 2(1119-1124)는 교황이 되자 즉시 황제와의 화해모색을 위해 특사를 독일에 파견하여 하인리히 5세와 잠정적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쟁점문제에 있어서 잠정적 합의문이 명백하게 규정되지 못하였다. 칼리스토 2세는 황제에게 성직서임권과 교회재산에 대한 포기를 요구하였고 하인리히 5세는 재산을 부여하는 조건 아래 성직서임권과 성직자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서약을 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과 황제가 만나기로 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121년에 하인리히 5세는 독일제후들에게 교황청과 평화협정을 시작하도록 위임하였고 교황은 동의하여 3명의 추기경을 독일에 파견하여 양측이 의견의 일치를 보고 1122923일에 보름스교회회의에서 종교협약이 체결되었다.

 

칼리스토 2세가 작성하였다고 해서 '칼리스토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보름스종교협약은 황제가 교황과 교회에 양보하는 부분과 교황이 황제에게 양보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교황의 양보사항은 하인리히 5세에게 국한되어 있어 황제의 사망과 함께 효력이 소멸되는 것이었다.

 

황제는 성직서임권을 포기하고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교회법에 의한 주교와 수도원장의 선출과 주교서품을 보장하였고 교황은 하인리히 5세에게 황제와 주교선출에 대한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때 선출장소에 입회한 황제에게 주교선택권을 부여하였고 황제로부터 재산과 권리를 부여받은 주교는 황제에게 봉사하는 임무를 갖게 하였다. 이 종교협약은 독일에서는 밤베르그제국의회에서 인준되었고 교회에서는 제1차 라테란공의회(1123)에서 추인되었다. 아울러 공의회에서 칼리스토 2세는 성직매매에 대한 금령과 성직자의 독신생활 준수를 강조하였다

 

김성태(신부, 가톨릭대 교수, 가톨릭교리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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