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가

草霧 2013. 2. 27. 12:49

 

 

 

 

중세 미술 2

 

 

교황과 황제, 충돌과 협력 그리고 새로운 유럽의 시대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 1 (가)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왕 또한, 신의 백성이다 편에서는 2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부 새로운 유럽의 시대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된 종교이야기와 문화를 통하여 미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2. 새로운 유럽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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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황과 황제의 정치 문화사

 

 

 

 

그리스도교 (基督敎, Christianity)

초기 교회와 후기 유대교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신약

초기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교 성서의 형성

초기의 이단운동

신학논쟁

교회와 제국의 동맹 (312, 콘스탄티누스 대제 ~ 1806 신성로마 제국) _ 성상파괴논쟁(725~843 Iconoclastic Controversy, 동방정교회축일,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주의

동서 교회의 분열

서방 교회의 분열

중세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근대 그리스도교

 

 

로마 가톨릭교 [Roman Catholicism]

교회와 국가 [church and state]

교도권(potestas magisterii)’

공의회

 

교황령(敎皇領, Status Pontificius)

교황의 종교적인 지배권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지배권까지 미치는 영토를 뜻한다. 754년 피핀의 기증 때부터 1870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기 전까지, 천 년 넘게 이탈리아 반도의 주요 도시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 후 교황령은 사실상 소멸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나,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로마 시 안에 바티칸 시국을 창건함으로써 교황의 영토 주권이 회복되었다.

로마 공국 ( Ducatus Romanus )5세기부터 752년까지

피핀의 기증 752,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750~850)

1798 1차 해체, 나폴레옹 집권

1870 2차 해체

1929 바티칸 시국(Status Civitatis Vaticanæ), 라테란 조약

첫 개혁가들인 레오 9세와 니콜라우스 2

그레고리우스 7

십자군운동

공의회

동서 교회의 분열

서방 교회의 분열

교황권의 전성기(12~13세기)

종교재판 (宗敎裁判, Inquisitio)

종교개혁 (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

반종교개혁 (反宗敎改革,counter-reformation)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

 

 

세속의 황제(국가원수)가 기독교의 수장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교회에 영향을 미치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 근대에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 말은 보통 동로마 제국과 관련해서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교회에 대해 초월적인 지배권을 가진 세속 권력자의 통치 체제를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한다. ‘Ceasaropapism’이라는 단어는 황제(세속의 권위)를 나타내는 ‘Caesar’와 교황(교회의 권위)을 나타내는 ‘Papa’를 조합해서 만든 말이다.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

    

 

1.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교회와 국가 [church and state] 정책

프랑크왕국이 분열되어 생긴 3국 중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동프랑크였다.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단절된 뒤 선거왕제가 실시되어 삭소니아공 Heinrich 1세가 추대되어 독일 왕이 되었다. 그는 Charlemagne와 어깨를 겨눌 만한 존재로 왕권 강화, 이민족 정복에 힘을 기울여 오랫동안 침입을 거듭하고 있던 마쟈드인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955).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이 로마제국의 발상지라 하여 여기를 본거지로 유럽 통일을 꾀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투쟁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를로비스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휴(496)

카알 마르텔에 의한 이슬람 교도의 격퇴(732)

피핀에 의한 랑고바르드 족의 정복과 교회령의 증정(754)

카알 대제의 서로마 제관의 수수(800)

신성 로마제국의 오토 대제(Otto the Great, 936-973)는 확고

프랑켄(Franken)의 콘라드 1(Konrad 1, 911-918)가 독일 민족의 독일사를 개척하기 시작한 이래 하인리히 1(Heinrich 1, 919-936)와 오토 대제에 이르기까지 제권과 교권은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하인리히 1세의 동방 중시책(Drang roach Osten)

동유럽의 이교도들을 정벌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의 세계를 보호하고 확대하여, 분립되어 있던 독일 민족을 통일

    

 

Otto 1(Otto the Great, 936-973)의 중앙집권적인 군주국 '제국 교회 정책'

그의 아들이 유명한 Otto 1(936-973)이다. 또 부족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교와 수도원장을 왕권의 지주로 삼아 그들에게 많은 토지와 특권을 주는 대신에 재정, 군사상 후원하게 하였다. 그 결과 황제의 관리처럼 되고, 왕국의 사교좌와 수도원은 왕실의 사유 교회처럼 되었다. 한편 그는 교회의 조직을 그대로 국가의 조직에 적용하여 제후의 권리를 주교에게 이양시켰다. 따라서 주교가 지방 행정권과 징세권을 장악하였고, 궁정에서 근무함으로써 대제의 고문직, 행정, 재정, 군사 등에도 관여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오토 대제의 조직(Ottoman System)이라 한다.

    

 

962, 교황 Johannes 12세로부터 로마황제의 제관 부여

Charlemagne의 전통을 계승하여 로마제국 재건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이탈리아를 3번이나 원정하여 로마의 불안을 없애고, 962년 교황 Johannes 12(John Xll, 955-963)로부터 로마황제의 왕관을 받아 나라를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 일컬었다. 그 뒤 독일과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역대 독일왕은 대개 이탈리아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은 뒤 황제라 일컬었다.

    

 

 

2.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

노르만디공 (911) 작위 수여

사라센과 노르만의 침입에 대하여 무력하여 9세기 중엽 이후 세느강 하류를 점령한 노르만인의 우두머리 Rollo를 노르만디공에 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911). 노르만디는 11세기초에는 완전히 프랑스화되었다.

987, Hushes Capet가 왕위에 올라 카페왕조

   

 

 

제권(Imperium)과 교권(Sacerdotium)의 대립 (10~11세기)

 

 

 

오토 대제 이래 독일 황제들은 주로 이탈리아 중심의 정책을 폈는데, 10-11세기에는 황제가 교황과 성직자들의 임면문제를 좌우하였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교황의 명에 불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속직 문제들에 관여하면서 부패하고 타락해 버리는 경향이 생겼다.

    

 

1. 그레고리 7(Gregory Vll, 1073-1085)의 교황선언(Dictatus papae)

모든 성직자의 임면권은 교황에 있고, 교황은 또 황제를 퇴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대주교와 주교가 더 많고 이들과 황제가 특히 긴밀하였던 신성 로마 제국에 있어서 더욱 타격이 심하였다.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제권은 고위 성직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 사이에 충돌이 생겨 제권주의와 교권주의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

1122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갈리스토 2세 간에 맺어진 협정이다. 이로써 1076년 이래의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은 일단 타결되었다

 

2. 카놋사의 굴욕(Gang roach Cannosa, 1077), 황제의 서임권 행사

제권이 교권에 굴복한 것으로, 1122년에는 하인리히 5세와 카릭투스 2세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어, 교황은 종교적인 권위자로서 성직자의 임면권을 소유하고, 황제는 그 임면에 동의하는 동시에 봉건적인 영주로서 권리만을 갖게 되었다.

교황 Gregory 7(1073-1085)는 교칙에 신성로마 황제 Heinrich 4(1050-1106)의 반대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 7세의 용서를 받기 위해 이탈리아 카놋사에서 사흘 밤 사흘 낮을 눈 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다

    

1177, 프리드리히 1(Feiedrich I)와 알렉산더 3(Alexander In) 사이에 대립이 있었으나 교권이 절대적으로 우세

 

3. 교황 인노센트 3(Innocentius 111)의 교권 우위 우월성

스콜라 철학이 교권이 최절정로 교황의 칭호가 베르로의 대직(Vicarius Petri)이라 확신하고 종교와 세속 두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신정을 베풀고자 하는 이상을 실현하기에 노력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 오토 3세를 폐위시키고, 프리드리히 2세를 즉위 시키는 등 황제의 옹립과 폐위를 좌우했다. 이와 같은 교권 우위의 우월성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4. 십자군의 대원정 (1096-l270)

11세기부터 13세기 후반에 걸쳐서 유럽 십자군의 대원정도 신앙열과 교황권을 배경

    

 

5. 12세기 중엽 (그라티아누스 교회법전)(Decretum Gratiani)이 완성

인노센트 3세와 그레고리 9세에 교회의 권력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교황권의 절대 우월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논거가 되었다.

 

6. 프랑스 왕 필립 4(1285-1314)의 교황과 무력충돌, 폐위

교황 보니페이스(Boniface) 8(1294-1303)와 교회령에 대한 과세문제로 쟁의를 거듭한 끝에 무력 충돌까지 일으켜 교황을 그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7. 아비뇽 (Avignion) 유폐 (1309)

교황 클레멘트 5(Clement V, 1305-1314)를 프랑스 남쪽 아비뇽 (Avignion)에 유폐하고 말았다. 교황의 유폐는 그레고리 11(Gregory Xl, 1370-1378)까지 계속되다가 1378년에 이르러서야 교황이 로마로 돌아갈 수 있었다.

 

8. 교회의 대분열(Schisma, 1378-1417)

교황청 내에는 프랑스 파와 로마 파가 생겨 서로 교황을 세우고 또 서로 파문하면서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1409년의 파리 종교회의에서 양파가 세울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로 교황을 정했으나 양 파가 이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때 3명의 교황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쯔(Constanz) 종교회의(1414-18)에서 3명을 폐위하고 새로 마르틴 5(Martin V, 1417-31)를 교황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때에 비로소 로마 카톨릭 교회는 통일 되었다.

   

 

 

교속의 대립과 수도원의 발전 (11세기 ~)

 

교회의 최고 무기는 개인에 대한 파문과 공동체, 국가에 대한 '종교집행정지'였다. 교황권의 발전에 따라 로마법에 기초를 둔 교회법이 형성되어 승려는 물론 속인일지라도 결혼, 유언, 독신, 요술, 이단에 관하여는 교회의 재판을 받았다. 이 결과 교황과 속계의 최고 권위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우월권을 에워싸고 싸움이 벌어져 11세기 이후 약 2세기에 걸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1. 13세기 교회가 세속화로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의 수도사의가 시작

6세기 초에 St. Benedict(480-543)가 로마의 남쪽 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처음이다.

 

그 수도원의 수도사를 위해 정한 이른바 베네딕트 계율은 그 이후의 수도 원의 계율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청빈, 정결, 복종을 지킬 것과 한 평생을 수도원에서 보낼 것을 서약시키고 날마다 규칙적인 기도와 명상과 노동에 종사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노동은 육체 노동과 학예상의 노동에는 고서의 필사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원도 부유해지며, 차차 귀족화하여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타락한 수도원을 베네딕트의 계율로 돌이키려는 Cluny, Sith 등의 새로운 수도원단이 나타났으나 이것도 결국에는 세속화되었다.

   

 

중세 말 교회세력 (13세기~)

 

중세유럽인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에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교회의 세력도 교황과 세속군주와의 싸움을 통하여 로마교회 자체가 하나의 정치기구로서 세속화 한데다가 십자군의 실패로 민중의 신앙심이 식어갔기 때문이었다. 또한 봉건제후와 기사들의 세력이 약화되어 왕권이 강화되어감에 따라 보편적인 권력으로서의 교황권은 그 존립의 기반을 상실하면서 세속적인 왕권의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 1303, 교황 보니파시오 8세 굴욕

13세기 말에 교황 보니파키우스(Bonifacius Vll)는 프랑스의 필립 4세와 과세권문제로 다투다가 실패하고, 다시 재판권문제로 싸웠으나 마침내 왕에게 붙잡혀 굴욕 속에 죽었다(1303). 이때 국왕이 소집한 삼부회에서 성직자들은 귀족, 평민 대표자들과 함계 국왕을 지지하여 교황의 프랑스 교회에 대한 간섭을 배격하였다.

 

2. 1309, 아비뇽 [Avignon] 유폐 (1309~77)

1305년에 추기경회의에서 클레멘스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청은 남부 프랑스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져 약 70년간 교황은 프랑스 왕의 간섭을 받게 되어 교황의 권위는 한층 더 떨어지게 되었다.

 

3. 아비뇽 교황청 [Avignon papacy]

인문주의자 폐트라르카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주장으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가고 다음 해 로마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 우르반 6세가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추기경 들은 곧 그와 대립하게되어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여 교황청을 다시 아비뇽 으로 옮겼다.

 

4. 교회의 대분열(Schisma, 1378-1417)

황청은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져, 이른바 '교회의 대분열(Schisma, 1378-1417)로 알려진 그리스도교계의 양분현상이 나타나게 되어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의 역사,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1.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

천주교는 오랜 세월동안 평신도 신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의 피라미드식 성직계급을 유지하고 있다. 천주교의 성직계급은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제도에서 유래했다.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황(papst)을 부르는 칭호인 파파4세기 시리치오 교황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초기 기독교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교황이라는 제도를 두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이후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로마의 주교들은 교황이라는 특권계급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기발하거나 창조적인 것은 아니고 당시 로마의 황제 제도를 본뜬 것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교황 제도는 종교권력과 세속권력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한 묘책이었던 것이다.

    

위조 문서로 만들어낸 중세 교회의 역사

(왼쪽) 주교관을 쓴 베드로. 12세기 스페인의 카탈루냐에서 그려진 패널화. 교황(papst)을 부르는 칭호인 파파4세기 시리치오 교황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른쪽)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Donatio Constantini). 교황의 이탈리아 통치권의 법적 근거가 된 이 문서는 15세기에 이르러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 『교황의 역사(갑인공방, 2005)

 

교황은 6세기까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등 5대 주교 중 하나에 불과했다. 8세기 후반 로마의 성직자들은 가짜콘스탄티누스의 증여를 만들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여러 의식의 권리, 영토, 군주의 권리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넘겨주었다고 조작했다. 이렇게 조작된 문서를 근거로 중세의 교황들은 세속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1160~1170년경에 제작된파리대법전에는 진짜 황제는 교황이다.(Ipse est verus imperator)”라는 말이 적혀 있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퀼른 대법전에도 교황은 황제보다 위에있고 진짜 황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교황은 지상의 권력자인 황제에게서 세속의 통치권을 얻은 것에 불과하였다

 

2. ‘교황의 왕자추기경 등장한 것은 6세기 이후

추기경이라는 새로운 특권계급은 교황보다도 늦게 발생했다. 추기경(Cardinal)이라는 말은 돌쩌귀(경첩)’ 또는 중추(中樞)’라는 뜻의 카르도(cardo)'에서 유래했다. 처음으로 추기경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6세기 초 로마의 7개 지역에 있는 부제들이었다.

 

그레고리오 교황(590~604) 때 교회법 용어로 채택된 추기경은 8세기경 로마의 성직사들 사이에서 특권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은 로마 교회의 행정과 교황의 전례에 참여했고, 교황이 살해당한 뒤 769년에 소집된 종교회의에서 오직 추기경만이 교황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면벌부(indulgence)와 특전(Privilege)

(왼쪽) 면벌부(indulgence). 교황 레오10세가 1517년 성 페트루스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팔자 루터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했다. 이후 교황이 1521년 루터를 파문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오른쪽)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071013일에 내린 특전(Privilege). 교황의 서명 아래 특전을 받는 당사자가 서명을 했다. 바티칸 미술관

 

초기의 교황은 성직자나 일반 신도 가운데서 선출되었으며, 황제의 재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교황선거 기간 중에 뒷거래, 폭력, 뇌물 수수 등 부정부패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교황 아가피토 1(535~536) 같은 경우 부정 선거로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교회의 성기(聖器)들을 팔아치우기까지 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우스 2세는 추기경들에게만 교황선출권을 부여했고, 한동안 주교 추기경들이 교황선출권을 독점하기도 했다. 1179년의 제3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부터는 추기경 전체가 교황선출권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과 추기경이 강력한 특권을 가지게 됨에 따라 그들은 더욱 심하게 부패하고 타락해갔다. 성직을 수입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매매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공공연하게 처()를 거느리기도 했다.

3. 13세기 매춘부들의 단골 중 20%가 성직자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은 성직매매와 대처(帶妻)에서 멈추지 않았다. 13세기 프랑스 디종에서 매춘부들의 단골 중 20%는 성직자였다. 비슷한 시기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여 성직자의 매춘부라는 말이 생겼다. 심지어 포주로 나서서 매춘업을 일삼는 성직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사우스워크에 있던 사창가 중 몇몇 업소는 윈체스터 주교 관할이었다. 이런 사실을 빗대어 셰익스피어는 사우스워크의 매춘부들을 윈체스터의 거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의 은어로 매춘굴은 수녀원’, 마담은 수녀원장’, 그리고 매춘부들은 수녀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래서 성직자들을 포함한 중세의 남성들은 틈만 나면 수녀원을 다녀왔다.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바빌론의 매춘부라고 비난하면서 성직자들의 매춘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교개혁의 불길이 번져가자 오히려 매춘업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수녀원을 다녀왔다

(왼쪽) 루터의 초상화(1543).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바빌론의 매춘부라고 비난하면서 성직자들의 매춘을 극렬하게 비판하였다. (오른쪽) 1600년 파리에게 발간된교황, 루터, 칼뱅. 교황을 사이에 두고 칼뱅과 루터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Germanisches Nationalmuseum, Nuremberg

 

1600년 파리에게 발간된교황, 루터, 칼뱅이라는 그림을 보면, 교황을 사이에 두고 칼뱅과 루터가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칼뱅과 루터는 각각 교황의 양귀를 잡고 있고, 루터는 칼뱅의 턱수염을 당기고, 칼뱅은 성서로 루터의 머리를 내리칠 기세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이 그림을 통하여 16세기를 휩쓴 종교전쟁이 얼마나 무지몽매하고 우스꽝스러운 밥그릇 싸움이었나를 냉혹하게 비판하고 있다

4. ‘군주론의 모델이 된 교황의 사생아 보르지아

많은 교황과 추기경들은 결코 도덕적으로 일반인들보다 뛰어나지 않았다. 살인을 통해 교황직을 얻은 세르기우스 3(904~911)는 사생아를 낳았으며, 교황 요한 12(955~963)는 호색을 일삼아 복상사했다. 교황 베네딕트 9(1033~1045)는 백주 대낮에 살인과 간통을 자행했고, 순례자들을 강탈하다가 추방당했다. 교황 요한 23(1410~1415)는 음행, 간통, 근친상간, 남색, 성직매매, 도둑질, 살인죄로 고소당했고, 300명의 수녀들을 겁탈했다. 바티칸 기록에 의하면 그는 자기 형제의 아내와 변태 성행위를 자행하였고, 수백명의 처녀들과 성관계를 가졌고, 결혼한 여자들과 간음을 행함으로써 공개적으로 악마의 화신이라고 불렸다.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된 식스투스 4세는 추기경이 된 후 끊임없이 인척들에게 직위와 돈, 토지, 권력 등을 베풀었다. 그의 조카 가운데 무려 여섯 명이 추기경이 되었고, 성직자가 아닌 인척에게는 교황령에서 이득이 많은 영주 자리가 부여되었다.

    

군주론의 모델이 된 교황의 사생아 보르지아

마키아 벨리(왼쪽)와 체사레 보르지아(오른쪽)의 초상화. 보르지아는 교황 알렉산데르 6(1492~1503)의 사생아로 태어나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이 되었다. 마키아 벨리는 야비하고 냉혹한 그를 이상적인 전제군주로 보고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 Uffizi 미술관

 

교황 이노센트 8(1484~1492)는 여러 명의 정부(情婦) 사이에 16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여러 명의 정부(情婦) 사이에 최소한 9명의 사생아를 둔 교황 알렉산드르 6(14921503)는 자신의 두 누이와 근친상간하고, 자기의 딸에게서 자녀를 두기도 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1492~1503)는 자신의 사생아 중에서 보르지아를 발렌시아 대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보르지아 추기경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비하고 냉혹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마키아 벨리는 그를 이상적 전제군주로 보고군주론의 모델로 삼기도 했다.

 

5.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으니 마음껏 즐기자

메디치 가문의 지오반니 추기경은 1513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레오 10(15131521)가 되었다. 그는 교황의 권좌에 오르자 사촌 동생 줄리아노 추기경에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을 즐기자!”고 말했다고 한다. 줄리아노 추기경은 훗날 220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다.

 

바티간에서 행복한 쾌락을 누리며 엄청난 소비행각을 벌인 레오 10세는 로마의 모든 은행에 잔뜩 빚을 졌다. 또한 1517년 성 페트루스 대성당 건립자금을 모으려고 면벌부(indulgence)를 대대적으로 팔기도 했다. 루터는 공개적으로 교황 레오 10세의 이러한 행위를 비난했으며, 1521년 루터가 파문당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면벌부 판매 등에 뒤이은 종교개혁으로 끝났다고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해둔 교황과 추기경의 부패와 타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교황권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을 즐기자!”

라파엘로,추기경 줄리오와 루이지 데 로시와 함께 있는 교황 레오 10(패널에 유채, 155×119cm, 피렌체, 우피치) Uffizi 미술관

 

1831년 조선교구 창설을 지시한 교황 그레고리 16(1831~1846)는 철도 개설을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던 보수주의자였다. 그 뒤를 이은 비오 9(1846~1878)교황의 무오류성(無誤謬性)’을 주장한 반역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베를린 주재 로마교황대사였던 케사레 오르세니고 대주교와 로마 소재 독일 대학 학장이었던 알로이스 후달 대주교는 나치의 동조자였다. 또한, 바티칸 주재 독일대사이자 교황 비오 12세와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해왔던 에른스트 폰 바이츠자케(Ernst von Weizsacker)도 자신이 1943년 바티칸에 부임할 때 교황의 리무진이 와서 그를 태우고 교황 깃발과 나치 십자기장을 나란히 펄럭이면서 화기애애하게알현장으로 향했다고 자랑스럽게 토로하기도 했다.

 

6. 특권을 없애고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시민 곁으로

 

 

 

추기경의 문장(紋章)

김수환 추기경(왼쪽)과 정진석 추기경(오른쪽)의 문장. 추기경의 문장은 5단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현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사제들은 미사에서 라틴어를 사용함으로써 주술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천주교 성직계급의 상징들을 통하여 여전히 특권을 유지하고 있다.

 

원시 기독교에서 미사에 사용된 언어는 아랍어, 그리스어, 곱트어 등 그 공동체가 사용하고 있던 언어였다. 라틴어는 로마에서만 사용했다.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는 전례가 첫 번째 주제로 선택되어 라틴어 대신 자국어를 사용하자는 사안을 논의했지만 바티칸 관리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복음서의 저자 중 1'마가 Marcus'가 서기로서 그려진 10세기말(980-1000 )의 필사본 삽화. 즉 이 그림의 작자인 수도사는 복음서의 저자와 자신을 기록능력이라는 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

 

천주교에선 성직계급에 따라 교황은 흰색, 추기경은 빨간색, 주교는 진홍색, 일반 사제는 검정색(혹은 흰색) 수단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장(紋章)의 술의 숫자에 따라 성직자의 직책이 구분되기도 한다. 술이 3단이면 주교, 4단이면 대주교, 5단이면 추기경을 가리킨다. 교황은 술이 없는 대신 예수가 제자인 성() 베드로에게 준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두 개의 열쇠가 있다.

    

800년 로마, 교황 레오3세는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왕관을 씌워주었다.

 

양피지와 수제작 서책, 지식의 독점이 탐욕을 부른다.

양피지는 이집트가 지중해 연안으로의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Pergamon)에서 파피루스 대체품으로 개발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래서 Pergamon pergamentum 라틴어), 이는 그다지 믿을 만한 설화가 못된다. 그러나 짐승, 특히 양이나 염소, 어린 송아지의 가죽을 가공해서 제작한 필사재료로서 급속히 파피루스를 대체, 특히 파피루스의 원료를 구하기 어려운 알프스 이북 지방에서 널리 애용. 중세유럽의 대표적인 기록매체가 되었다. 기록 및 채색효과에 보존성이 뛰어난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다.

 

중세유럽에서 오랫동안 책이 귀했던 이유의 하나로서, 가령 성서 한 권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자란 양이나 송아지 약 2-300 마리 분의 가죽이 필요했다. 양피지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은 교배하지 않은 암양가죽(Virgin Parchment)이며, 그 다음이 숫양가죽(Vellum)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보통 100페이지의 양피지로된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10마리의 양이 필요로 하였다고 한다.

 

12세기말에 이르면 교육분야에 대한 교회의 독점적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수도사와 함께 일했던 세속 필경사들이 그들 나름대로 길드나 직인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은 새로 진출한 상공업 계층인 부르주아를 위해 공식문서를 작성해 주었고 또 직접 책을 필사하기도 했다.

왼손에 든 칼로 거위 깃 펜의 끝을 가끔 뾰족하게 손질하거나, 오자를 긁어내어 교정하면서(!) 기록을 한다. 양피지는 이렇게 편리한 필사재료였다. 심지어 효용가치가 없어진 기록면을 전부 긁어내고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운이 좋을 때, 새로운 기록면 밑에 잠재된 긁어낸 과거의 기록을 식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기록을 전문용어로 Palimpsest라고 한다. 유명한 예로 CiceroDe re publica(공화국론)19세기 후엽 Palimpsest에서 발견, 복원된 것이다.

 

복음서의 저자 중 1'마가 Marcus'가 서기로서 그려진 10세기말(980-1000 )의 필사본 삽화. 즉 이 그림의 작자인 수도사는 복음서의 저자와 자신을 기록능력이라는 점에서 동일시하고 있다. 양피지에는 문자기록 외에 이렇게 호화로운 채색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또한 양피지에 작성한 기록은 서책의 형태로 용이하게 제본할 수 있었다. 이 제본한 책을 Codex라고 하는데, 중세 및 근대초기의 특수한 수제작 서책, Codex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codicology라고 한다.

    

당연히 이런 Codex의 주요한 생산처와 그 수요처는 교회였으며, 기록문화의 주된 담당자는 성직자들이었다. 심지어 세속의 귀족이나 군주들도 자신들의 서기, 행정관료를 거의 모두 성직자로부터 충원했다. 기록의 생산, 취급은 소수의 성직자가 독점하는 고급의 전문기술이었다. 그리하여 성직자를 의미하는 clericus라는 라틴어는 clerks, 서기라는 뜻으로 전화되었고, 기록의 생산을 관장하는 cancellarius (역시 성직자인 경우가 대부분)에서 정부의 수반, 수상을 의미하는 Chancellor라는 말이 나왔다. 문자와 기록은 지배수단이기도 했다.

 

 

(가) 끝. (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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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