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2
광기와 검열 그리고, 카니발
Ⅱ.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2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기독교 만 존재한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중세 종교적 광기와 마녀사냥”, “2부 검열과 금서의 종교재판소, 예술의 속박”, “3부 중세 유럽인 욕망의 분출구 “카니발(carnival)” 로 인간의 예술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를 속박하고, 탄압한 역사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부. 중세 종교적 광기 2부. 검열과 금서의 종교재판소, 예술의 침체 3부. 중세 유럽인 욕망의 분출구 “카니발(carn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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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검열과 금서의 종교재판소, 예술의 침체
초기 교회의 이단과 기독교 논쟁 [Catholic]
1. 초기의 이단들
유태주의적 기독교-에비온派
영지주의靈知主義(Gnosticism) _ 그리스어 'Gnostikos'<'Gnosis',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
마르키온派(Marcionite)
몬타누스주의(Montanism)
군주신론君主神論 (monarchianism)
2. 교회의 대응
正經(Cannon)의 확립
信條의 제정
아리우스(Arianism)논쟁(신학적 논쟁)과 니케아 공회 _ 아리우스派 정죄
1)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 派의 재기와 분열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추방
상이 본질파(Anomoean)
동류 본질파(Homoean)
유사 본질파(homoi-ousian)
2)니케아派의 승리 _ 니케아 信條
알렉산드리아 공회의 _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派의 승리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
기독론 논쟁과 칼케돈 信條 <신성이든지 인성이든지>
1) 서방 교회의 입장
2) 동방 교회의 입장
①기독론에 대한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의 견해
②아폴리나리스에 대한 안티오크 학파의 반박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 – 아리우스파, 아폴리나리스派 이단
네스토리우스 논쟁 [Nestorius]
①네스토리우스의 주장
②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반응 - 430년 교황 셀레스틴[Celestine]의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 단죄
에페소스 공회의
①키릴, 알렉산드리아 학파과 네스토리우스, 안티오크 학파의 대립
②431년 에페소스 공회의의 소집- 펠라기우스파 이단 정죄
③433년 황제의 개입 - 황제 발렌티누스 3세[Valentinus Ⅲ],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Ⅱ] _ 안티오크로 강제 추방, 교회의 분열 표면화, 재연합 신조
칼케돈 공회의 _ 444년 單性論者인 디오스코루스[Dioscorus]가 키릴을 계승
①제2차 에페소스 공회의-448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에우티케스[Eutyches] 파문, 에우티케스 복권 및 안티오크 교회을 파문
②칼케돈[Calcedon] 공회의- 키릴의 기독론을 정통으로 선언, 디오스코루스와 네스토리우스派를 추방
③칼케돈 신조-동방과 서방의 교회 및 보수적 개신교 등에서 기독론에 대한 최종적 해결
단성론•단의론•네스토리우스 교회
①단성론-콥틱(Coptic) 교회•야콥 당(Jacobite)•에티오피아 정교회•아르메니아 정교회, 兩性論 반대
②단의론-7세기에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오스[Heraclios]는 조정,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소집된 제6차 세계 종교 회의에서 로마의 대주교인 아가토[Agatho]의 서신에 기초
③네스토리우스 교회- 인도와 중국 (景敎)에까지 확산
중세 교회사
중세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눌수 있다. 초기시대는 592년 교황 그레고리 1세로 시작하는 교황권의 확대로부터 80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설립에 이르기까지 중세교회의 선교와 수도원제도가 확립되었다. 이기간 동안에는 어거스틴 신학을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반-어거스틴 신학의 정립으로 중세 전반에 걸쳐서 어거스틴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는 중세교회가 외부적인 침입을 받아서 기독교권의 침체와 축소를 맞이하였던 기간이다.
중기 시대는 교황권의 확립을 이루었다. 교회의 세력확보는 내부적인 부패를 의미한다. 중세교회는 정치적인 결탁에서 오는 재력의 확보를 인한 시몬주의, 교황권을 둘러싼 음란주의가 부패하는 개혁으로서 정치적인 면에서는 오토 대제의 개혁운동, 수도원의 개혁운동 등이 이루어졌었다. 이러한 제도권내에서의 개혁운동은 한계가 있었으며, 이 시기 동안에 제도권 교회에 대한 각종 반항운동이 있었다.
첫째, 제도권에 도전하는 개혁운동으로서 영국과 폴란드에서 일어난 운동, 둘째, 제도권을 떠나서 도피적인 입장을 취하는 수도원적 공동체운동, 셋째, 각종 이단운동, 그리고 넷째, 신비적인 미신신앙의 유행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운동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서 중세 교인들의 반발을 해외로 돌림으로써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중세 후기 교회는 십자군전쟁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황권이 둘로 나누임으로 인해서 교권의 실추가 가속화되었다. 중세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유명론 신학 이론을 들여옴으로써 교회의 타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중세교회는 신학적으로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대치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교회는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부담 없이 판매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위 말하는 문예부흥 교황들은 앞을 다투어서 화려한 교회당을 건축하였으며, 이것이 곧바로 중세의 패망을 가져오게 하였다. 중세는 여기에 덧붙여서 스콜라신학의 흐름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므로 스콜라신학의 흐름을 시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중세를 이론적으로 개괄하려고 한다.
어거스틴의 신학적 이론과 중세, 신학적 논쟁
도나투스 이단과 교회론
마니교와 신론
로마의 멸망과 역사론
연옥
중세 초기의 신학
후대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으로 테오도릭 아래서 집정관과 궁정 자문관을 지냈던 보에티우스와 두사람이 세운 신학의 학문적 전통은 중세 초기의 신학적 전통을 확립시켰으며, 더 나아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신학의 두 흐름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
위- 디오니시우스
중세 초기의 선교 _ 영국의 선교, 아일랜드와 북유럽의 선교
중세초기의 신학존쟁 _ 기독론 논쟁의 계속
451년 니케아회의의 결정은 제국에서 원하는 대로 온전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칼케돈신조의 신학적 흐름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쪽에 더욱 유리하였기 때문에 안디옥 계열에서는 자연적으로 안디옥 신학적 흐름에 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특히 칼케돈신조를 전체적으로 반대하면 제국의 통일을 반대하는 위험스러운 인물이 된다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신도의 내용 가운데에서 '두본성으로 된'이라는 부분을 싫어 하였다. 이들은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유티케스를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본질공존체라고 고백하였다.
황제 찬탈자 바실리스쿠스는 엠사아클론]을 출간해서 칼케돈신조를 무효화시키려 하였으나, 그가 쫓아 낸 황제 제노가 다시 복위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황제 제노는 제국의 통일을 위협하는 칼케돈신조를 드러내 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통일칙령] 혹은 [헤노티콘]을482년에 발령하였다. 헤노티곤은 실제적으로는 말씀 - 단성론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었으나 칼케돈신조와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언어적 의미의 장벽을 제대로 밝혀 내지 못하였다. 헤노티콘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칼케돈신조를 옹호하기보다는 오히려 단성론을 보호하였다.
회교의 발달과 기독교권의 축소
570년 메카에서 출생한 모하메드는 부모를 잃고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622년 7월15일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동하였는에, 이 날을 회교도에서는 헤지라라고 부르며 또한 회교도의 기원 원년으로 삼는다. 이렇게 출발한 회교도는 한 손에는 코란을, 한손에는 칼을 들고서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아라비아 전역을 점령하였으며, 칼리프 오마르는 635년 다마스커스를, 638년에는 예루살렘을 각각 점령하였다. 동시에 또 다른 회교도들은 이집트를 침공해서 오늘날 카이로로 알려진 도시를 건설하고 642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으며, 647년에는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서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51년에는 페르시아까지 완전히 점령하였다.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기 시작한 회교도들은 695년 카르타고를 점령하고서 그때까지 존속하였던 모타누스 교회, 도나투스 교회, 아리우스파 교회, 그리고 단성론파 교회들은 모조리 회교도화 시켰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스페인을 점령하기 시작하였으며, 732년에는 피에네 산맥을 넘어서 프랑스까지 침공하다가 투르에서 프랑스의 망치왕 찰스를 만나서 퇴격당한 이후로 스페인의 코르도바에 독립적인 칼리프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들 칼리프제국은 유대교도들과 기독교도들에게 회교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였으며, 이렇게 스페인에서 회교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하였으며, 이렇게 스페인에서 회교도 밑에서 잔존하였던 기독교도들을 '모자람이라고 부른다. 기독교권은 회교도들을 맞이해서 유럽의 동쪽과 남쪽에서 축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건설
신성로마제국의 건설은 게르만족의 위대한 역사를 이어가는 첫출발이라고 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지금까지 로마의 통치 아래서 야만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시당하여 왔던 게르만족들의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이러한 학문적 부흥의 기간을 카롤링 문예부흥이라고 부르며, 이 기간동안에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사건은 성찬 논쟁, 예정론 논쟁, 사고백제도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필리오케 논쟁 등이다.
1. 성찬 논쟁
성찬 논쟁은 프랑스의 코르지 수도원의 원장을 다같이 역임하였으며, "주님의 몸과 피에 관하여" 라는 동일한 제목의 책을 저술하였던 두 사람의 견해에 관한 사건이다. 중세는 라드베르투스의 견해를 추종하고 라트람누스의 견해를 배척하였기 때문에 거의 잊혀져 있었다가 쯔빙글리리 추종자들에 의해서 다시금 거론됨으로써 트렌트회의에서 금서목록에 삽입되고 알았다.
2. 예정론 논쟁
중세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예정론을 어거스틴이 말하였던 원모습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렌지회의에서 결정된대로 방아들임으로써 순수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3. 사 고백제도의 발달
고대로부터 교회는 공적인 참회제도를 유지 했었다. 그러다가 박해로 인한 배교자들의 재입교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서 대립을 벌이다가 온건파가 승리하게 되었다. 314년 안키라회의는 참회자의 사면에 이르기까지를 이렇게 규정하였다.
제 1 단계 : 우는 자의 단계.
제 2 단계 : 청문자의 단계.
제 3 단계 : 무릎 꿇는 자의 단계.
제 4 단계 : 서 있는자의 단계.
참회기간은 통상적으로 3-4년이 소요되었으나 정상에 따라서 단축되기도 하고 연장되기도 하였다.
4. 필리오케 논쟁
필리오케 논쟁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다가 서방교회가 전반적으로 받아들인 내용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가 성령에 관해서 "아버지로 부터 발출하신다." 라고 단순하게 언급한 데 있었다. 결론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설립 자체가 다분히 교회와 정치 양쪽 측에게 정치적인 속셈이 있었다. 로마는 410년 이래로 위축되었던 옛 로마 교회의 영화를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정치적인 힘이 더 요구되었다. 또한 게르만족 출신이었던 살리안 프랑크 왕조는 자신들의 야만성을 은폐시키려면 기독교라는 문화가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 이익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은 샬레만뉴가 죽은 이후로 왕권이 축소된 반면에, 교권은 교황들의 재치 빠른 활동으로 더욱 확고히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교황권의 증대가 가속화되었으나 반면에 교회의 부패가 또한 초래되기도 하였다.
교황권의 증대와 교회의 부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본장에서는 교황권의 증대와 부패,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1. 교황권 증대를 위한 문서들
1) 콘스탄틴 증여문서 _ 교황권이 샬레만뉴의 황제권
2) 이시도르의 거짓 교령집
첫 번째 부분은 디오니시우스의 모음집에서 발췌한 50개의 사도적 교회법을 정리한 다음에,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로부터 멜키아데스에 이르기까지 발표되었다고 여겨지는 60개의 거짓교령을 싣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콘스탄틴 증여문서'를 싣고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교황 실베스터로부터 그레고리 2세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교령을 싣고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35개가 거짓이었다. 이 거짓 교령집의 목적은 교황 중심적인 신정통치를 밝히려는 데 있었음이 분명하다.
교회의 부패
중세교회의 부패의 두 가지 요인을 일반적으로 니콜라주의와 시몬주의라고 부른다. 니콜라주의는 교회의 음란을 말하는데, 중세의 성직자들이 고백해야 할 부끄러운 면모였으며, 시몬주의는 교회가 치장과 사치에 빠져서 재정적인 필요를 메꾸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도입한 추문이었다.
1) 니콜라주의
1139년 제2차 라테란회의에서 성직자의 결혼은 불법이며, 또한 무효라고 선언함으로써 트렌트회의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효한 교회법이 되었다.
2) 평신도 서임권 논쟁과 시몬주의
문제의 핵심은 중세는 샬레만뉴 이후로 토지를 근간으로 한 봉건 영주제도에 의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토지를 경작하는 시민들과 이들을 지키고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봉건군주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유럽을 지탱시켜 주는 기반이었다. 서임권 논쟁은 결과적으로 교황청의 승리라고 할 수 있으나, 교황청은 이 승리로 인해서 내부적인 부패에 빠져서 결국은 중세교회의 멸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수도원의 부패와 개혁
중세 수도원 제도는 성베네딕트에 의해서 기초가 잡힌 이래로 경건과 학문, 그리고 선교와 사회봉사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었다. 바로 이 장점이 또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수도원이 내부적으로 부패할 수 있었던 원인은 크게 볼 때에 금전과 권력에 관한 부분이었다.
수도원 세속화에서 생긴 자금으로 학교를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사례로서 우리는 영국의 월시 추기경이 설립하였던 그리스도 대학을 거론할 수 있다.
개혁은 새로운 제도를 창설함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도가 개선되어야 할 사항도 있겠지만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개혁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중세의 이단들
1.카타리파
이단들의 출현은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제도권으로 하여금 제 길을 가도록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한다. 이들의 이론은 마니교와 매우 비슷한 이원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들은 육적이며 물질적인 창조를 악의 창조로 보았다. 그들은 성례전을 부인하였고 지옥, 연옥, 몸의 부활 등도 부인하였다. 1208년에는 교황청 특사 카스텔나우의 피터가 살해되자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십자군은 1218 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학살과 전투 등으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알비파들의 영토를 프랑스에 귀속시키려는 영토 분쟁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하였다. 종교재판의 결과로서 평신도들은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할 수 없었으며, 더 나아가서 모국어로 된 성경을 휴대하거나 읽을 수도 없었다.
2.왈도파
왈도파는 프랑스의 리용에 거주하였던 피터 발데스에 의해서 12세기에 형성된 '리용의 가난한 자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왈도파들은 사회의 저급층에서 급속도로 번졌다.
중세교회의 대처
1.교권의 강화
교회의 위상과 교권을 세운 사람은 우리가 흔히 개혁자라고 부르는 추기경 훔버트, 교황 레오 9세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 7세에 이르는 세 사람이다. 그레고리 7세가 주장하였던 교황권은 중세 전반에 흐르는 교권 옹호의 원천이었다. 그레고리7세의 주장은 중세 전반에 흐르는 교권의 우위를 다지는 이론으로서 인노센트 3세에 의해서 반포된 '우남쌍탐'의 기초 이론이었다.
2. 신학의 발전
중세신학은 카롤링 문예부흥 시대에 영국 계열의 신학자들을 -예를들면 알쿠인, 라바누스 마우루스, 에리게나-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11세기 이후로는 대륙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발전하였다.
(1) 란프랑과 베렝가
란프랑과 투르의 베렝가에 의해서 재현된 성찬 논쟁이 중기 신학의 서곡이었다. 화체설을 확립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름은 롬바르드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1060년에 노르만디에 있는 벡 수도원에서 수도사 서약을 하였다. 안셀름은 신학적 명제를 제시하고서 교부들이나 여타의 교권적 권위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서 오히려 이성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안셀름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분'이 곧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안셀름의 속죄론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안셀름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성을 사용하면서도 정통적인 교회의 이론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더욱 높여 주었으며, 스콜라신학의 발전을 크게 도모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3) 피터 롬바르드
피터 롬바르드의 문장론은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는 중요한 사실과 더불어서 성례전 이론의 확립에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개혁은 시작한다. 사제와 교회의 억압으로부터 중세인들에게 자유를! 바로 이 과업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이루었다.
3. 새로운 교단의 창설
(1) 어거스틴파 _ 어거스틴파의 규범은 재산의 공유화에 있었다.
(2)카르투스파 _ 이들은 특히 자아 학대를 통한 수도에 전념하였다.
(3)카르멜파
(4)걸식교단
중세교회의 권위를 회복시켜 준 종단이 바로 걸식교단으로서 프란테스코파와 도미니크파였다. 프란체스코는 가장 섬세하고, 인자하고, 사랑이 넘치는 수도원출신의 성인이었다면, 도미니크는 냉철하고 조직적이며 근엄한 성격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인격으로 종단을 이끌어 갔다고 한다면, 도미니크는 훈련의 대가로서 종단을 엄격한 규범으로써 이끌었다. 프란체스코는 사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의 필생의 사업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 있다면, 도미니크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겸손의 표상으로서 존경을 받는다면, 도미니크는 이단을 물리치는 망치와 같았다.
① 프란체스코파
㈎ 성프란체스코의 본명은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도네로서 1182년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아나서 1226년에 죽었다. 프란체스코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보면 창피를 느꼈다. 이렇게 해서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하였다. 프란체스코파는 창설자 프란체스코의 지시를 끝까지 따르려는 순수파 혹은 엄격파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된 추기경 우골리노가 세운 규범과 재산소유를 인정하는 완화된 온건파로 나누었다.
㈏ 보나벤투라의 본래 이름은 지오반니 디피단자였다. 그는 아시시의 성자를 따르는 데 있어서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는 위기상황에서 중도 노선를 취함으로써 위대한 신학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교회 행정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면에서 그는 교단의 제2의 창시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보나벤투라의 신학적 업적은 그의[롬바르드의 문장론 주석]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서에 잘 나타나 있다. 피조된 우주가 창조자에게 이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한 관조에 있다. 보나벤투라의 신비주의는 또한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관조하는 데 있다.
② 도미니크파
㈎ 도미니크 혹은 도밍고는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1170년에 태어나서 볼로냐에서 1121년에 죽었다. 학문과 영혼구원이 도미니크 교단의 주된 강조점이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프랑스의 왕가와 인척관계에 있는 아퀴노의 랜둘프 백작의 막내아들로서 로카세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세의 보편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는 보편은 "스스로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즉 보편은 사물 안에 구체적인 사물로 존재한다. 여기에서 토마스는 존재유비의 타당성을 말한다. 토마스는 존재론적인 신 증명방법을 인정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부정할 수 없는 운동을 사실로 삼고 출발한다. 두 번째는 인과율이다. 세 번째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다. 네 번째 방법은 존재들이 완성되는 각종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다섯 번째 방법은 우주의 질서로부터 출발하는 전통적인 목적론적 논증이다.
이상과 같은 토마스의 하나님 존재증명 방법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단순한 생득적인 인지능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점에서 철학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토마스는 13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1567년 교황 피우스 5세는 '교회의 완전한 박사'라는 칭호를 '천사박사님'께 하사하였다.
회교도에 대한 공격과 유럽교회의 몰락
십자군 전쟁과 스페인의 회교도에 대한 공격은 중세 유럽의 불만의 입김을 아시아로 배출케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교회의 권위를 세워 보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술책이었다.
1. 십자군전쟁
성지 회복을 위한 전쟁의 필요성은 일찍이 그레고리 7세 때부터 제기되어 있었다. 1096년 8월 15일 승천기념일에 출발한 제1차 십자군 원정단은 우르반 2세가 지명한 푸이의 주교인 아드헤마르가 총사령관으로서 이끌었다.
제2차 십자군운동은 제1차 십자군들의 외곽 거점이었던 에뎃사가 터키족에게 재탈환 당하자, 십자군을 지원하자는 운동이 클레르보의 버나드를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퍼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3세가 제2차 십자군 200,000명의 군대를 동원했으나 곳곳에서 패배를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1187년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재탈환 당하였다. 황제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그리고 프랑스의 필립2세 아우구스투스가 제3차 십자군을 동원하였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출군을 명령하였다. 제5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왕이 이집트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제6차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서 예루살렘, 나사렛, 베들레헴을 관할하고 동시에 성지로 잇는 도로들을 양도받음으로써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이끌었으나 대실패에 그쳤으며, 제 8차 십자군도 루이 9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7차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튜니스에서 열병으로 사망함으로써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2. 스페인 재정복
이때로부터 스페인은 대양탐험과 신대륙 발견, 그리고 무적함대를 이끌고서 유럽의 여러 나라를 위성국가로 만들었으며, 특히 교황청을 종이 호랑이로 만들었다.
3. 회교도들에 대한 공격의 결과
정치적인 면에서 유럽의 기독교는 샬레만뉴의 부흥 이래로 내적인 타락을 겪었으며, 일반인들의 불만이 쌓이자 이를 밖으로 터뜨린 해결책이 성지 회복이라는 명분을 가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는데, 십자군전쟁으로 인해서 회교도들에 대한 전도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에 십자군운동의 힘은 하나님이 원하셨다. 이러한 기사단들은 유럽의 기사전통을 수립해 주었으며, 소위 말하는 신사도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유럽인들은 이 시기를 즈음해서 동양인들의 화약, 유리와 안경, 나침반, 종이와 인쇄술, 연금술과 의학을 수입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운동에 참전한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도 작용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이 발표한 완전 면죄부의 수여가 더욱 매력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곧바로 십자군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중세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교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개혁으로 끝맺음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중세유럽과 마녀사냥
중세유럽이라고 하면 '카톨릭', '십자군 원정', '흑사병(페스트)', '마녀사냥' 등이 떠오를 겁니다. 저 4가지는 중세 암흑시대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각익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마녀사냥은 중세유럽의 암흑기를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는 테마입니다. 왜냐면 마녀사냥은 13세기초에 시작해 무려 18세기말까지 이어졌으며 그 최전성기는 중세시대가 아닌 16~17세기였습니다. 게다가 마녀사냥은 구교지역 뿐만이 아니라 신교지역에서도 폭넓게 행해졌고 심지어는 18세기 미국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졌던 행위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성공회의 존 웨슬리 신부 같은 사람조차 마녀사냥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습니다.
그럼 900만 명에 가까운 생명을 앗아간 광기가 600년이나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녀사냥은 의학의 발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서 유럽 전역의 국가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형국이 됩니다. 이 시기에 4회에 걸쳐서 로마의 라티라노 대성당에서 라티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가 열립니다.(5회는 16세기에 열렸으니 논외로) 이 라티라노 공의회를 자세히 살펴봅시다.
1회(1123년)
교황 칼릭스투스 2세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2회(113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소집. 대립교황(對立敎皇)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잔당(殘黨)을 처리하고 브레시아의 아르노르드, 브류이의 피에르 등의 이단설(異端說)을 처벌했으며, 교회규율에 관한 30항의 카논(canon)을 의정했다. 이 회의에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 프레나리아(완전한)공의회라 불렀다.
3회(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소집. 추기경 전체 투표수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야만 교황에 선출된다는 교황 선거 절차를 확정하였다. 또 이단들을 배제, 교회쇄신을 추진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4회(121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派), 플로리스의 요아킴, 아말리크 드 벤 등의 여러 이단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백성사와 배령성체(拜領聖體)를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또 교회의 승인 없이는 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1215년에 열린 제 4회 라티라노 공의회입니다. 4회 라티라노 공의회는 십자군원정을 명령한 것으로 유명해서 다른 부분들이 소홀하게 여겨지는데요. 여기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의 승인 없이 치료행위를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것이 이후 벌어지는 마녀사냥의 불씨를 당기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지던 민간의술이 존재했습니다. 주술적인 개념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민간의술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인체에 대한 지식(주로 뼈 등), 그리고 출산에 대한 지식 등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중의학이나 한의학과 상당히 비슷한 약초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약초 지식을 지닌 사람을 빗커(Wicc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고대영어로 '현명한 여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녀를 지칭하는 위치(Witch)의 어원입니다.
그런데 12세기에 이르면서 서양의학이 크게 발전을 이루면서 기존의 약초학과 대립하게 됩니다. 중세시대만 해도 학문의 중심이 교회와 수도원이었는데요. 이 때문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사는 대부분이 성직자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직자들에 의해서 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곧 교회의 큰 수입원이 되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초학을 이용했고 아이를 낳을 때는 약초학에 정통한 산파를 불러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에 교황청은 의사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교회의 의료 수입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교회의 승인 없이 행해지는 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 신의 대리자인 교황이 발표한 칙령은 곧 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신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이단행위가 됩니다. 바로 마녀의 탄생이었던 겁니다.
당시에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들이 생계를 위해서 약초학을 배워서 치료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약초학의 지식을 지닌 치료사들은 대부분이 40세 이상의 노파였습니다. 그리고 약초학에 정통한 노파들은 매일 중노동을 하는 농가의 여인들에 비해서 수명도 길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등 구부러지고 이빨은 다 빠진 마녀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이단심문관을 제도화하고, 1318 년 교황 요하네스 22세가 이단심문관에게 재판 없이 언제라도 죄를 판결해 단죄할 수 있는 권리를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단심문관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됩니다.
13세기 초부터 시작된 마녀사냥은 그 표적이 주로 약초학 지식을 지닌 여성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이 노파나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사는 젊은 과부 등 주로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거의 100년 넘게 계속된 마녀사냥의 결과 교회는 유럽의 전통 약초학의 씨를 말리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유일한 의료시설이 됩니다.
교회는 당초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이제 마녀사냥은 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얻던 집단에게는 좀 달랐습니다. 100년 넘게 마녀사냥이 지속되면서 마녀사냥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 자리잡습니다. 마녀 판정을 위한 각종 서적 산업, 각종 고문도구 산업, 화형식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거나 화형식을 집행하는 대리 업자 산업 등 마녀사냥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산업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삼았던 대상들이 거의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이 사업들은 유지되기가 힘들었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12세기에 확립된 교회법 중에는 이단 행위자에 대한 재산몰수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 판정 받은 사람은 당연히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고, 심지어는 죽은지 40년 이내에 살아 있던 시절에 행한 이단 행위가 발각될 경우 그 자손들에게 상속된 유산을 전부 몰수하는 규정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산은 당연히 교회에 귀속되는 것이었지만 그 재산을 몰수하는 당사자는 교회가 아닌 이단심문관이었습니다. 이런 끝내주는 사업모델을 구상해냈는데 안타깝게도 유럽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서 이런 수익모델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뭍혀버립니다.
14세기가 되자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아시아를 통해 흑사병이 전래된 것입니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한 흑사병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1350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유럽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습니다. 중세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녀의 소행이라고 여겨 힘 없는 여성을 잡아 산채로 화형시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마녀사냥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인데요.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흑사병의 창궐로 마녀사냥은 한 동안 시들해집니다. 물론 흑사병이 갑자기 퍼진 것에 분노한 시민들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일으켜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지목해 화형하는 사례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16~17세기의 마녀사냥에는 비교도 안 되며 13세기에 성행했던 마녀사냥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흑사병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전염병의 전파 속도가 너무 빨랐고, 교회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에 마녀사냥은 오히려 주춤하게 됩니다.
흑사병은 농민 뿐만 아니라 귀족이나 성직자, 왕족 등 닥치는대로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유럽을 유지하던 인프라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는 이야기이며, 당연히 마녀사냥이라는 비즈니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던 집단도 대부분 소멸했음을 의미합니다.
흑사병의 공포가 지나가고 15세기가 되면 대항해시대가 열립니다. 대항해시대를 통해 유럽은 전세계와 교역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유럽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교역은 경제의 발전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종교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슬람을 비롯한 타 종교의 확산, 기독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리주의 운동 등에 두려움을 느낀 교회에서는 14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가 '가장 바람직한 것에 관하여'라는 마녀박멸교서 등을 발표하며 이단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등으로 맞섭니다. 이런 시기에 한 책이 출판됩니다.
도미니크회의 이단심문관이었던 '앙리 엥스티토리스'와 '자크 스프렝거(야곱 슈프렝겐)'가 쓴 <마녀의 망치>라는 책이 1487년에 나온 것입니다. 이 책은 두 이단심문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마녀에 대한 연구서였습니다. 이 책에는 성교불능, 남근탈락, 유산, 불임은 물론이고 자연재해와 병충해까지 마녀의 소행으로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유럽에는 다시금 마녀의 공포가 형성되었고 두 이단심문관은 직접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마녀사냥을 합니다. 이 책의 출판은 마녀사냥의 대상자가 여성에서 남성으로까지, 힘없는 자에게 권력과 재산을 지닌 귀족이나 관리에게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됩니다.
물론 <마녀의 망치>는 종교적 맹신에 의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과 함께 불어닥친 마녀사냥의 열풍은 상당한 희생자를 내는데,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규정은 이때도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재산 몰수의 집행자는 당연히 이단심문관이었기 때문에 이단심문관은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16세기가 되면서 마녀사냥은 또 다시 거대한 비즈니스로 발전합니다.
15세기 말부터 다시금 마녀사냥의 불씨가 살아나면서 수많은 고문도구와 화형의식의 대행 등 많은 비즈니스들이 성장합니다. 비즈니스가 거대해지면서 이 산업의 종사자들은 수익성을 고민하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수익성이 높은 아이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녀사냥은 힘없는 사람을 마녀를 몰아서 화형시키는 종교적 광기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 죽인 뒤 그 재산을 몰수해 공모자들끼리 분배하는 야쿠자 비즈니스로 변질됩니다. 실제로 16~17세기에 마녀사냥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상당수가 자산가의 미망인, 지방 지주, 지방 관리, 상인 등이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자산가의 미망인이 가장 많았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마녀사냥이 재산을 빼앗아 분배하는 비즈니스였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30년 신성로마제국황제가 마녀사냥으로 이단판정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 조치는 1631년까지 단 2년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1629년까지 매년 평균 100명이 마녀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던 마녀사냥의 메카 독일의 밤베르크(Bamberg)는 1631년에는 단 한 명도 마녀재판으로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6~17세기에 와서는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가 아닌 살인을 통해 재산을 빼앗는 야쿠자비즈니스였던 겁니다.
18세기말까지 이어졌던 마녀사냥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나폴레옹입니다. 171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헤름 1세가 마녀재판을 금지했음에도 여전히 성행했던 마녀사냥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인해 프랑스혁명의 정신이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사라지게 됩니다. 자유를 알게 된 인민들에 의해 교회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서 마녀사냥은 그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수도원의 운동과 개혁
교회가 부흥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전 교회들이 제자교육에 열을 올리던 시대가 있었다. 이처럼 초대 교회 시대에도 한 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면서 신앙이 침체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질때 변함없이 신앙을 추겨 세우기 위하여 수도원 운동이 시작이 되었다.
수도원의 태동
313년 교회가 자유화되고 392년 거대한 나라 로마의 국교가되자 곳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인의 수가 급증하여 갔다. 그리고 빠앗겼던 재산을 돌려주고 기독교인들을 나라가 후대하여 주자 부유층들이 개종을 하게 되면서 교회는 점점 세속회되어가게 되었다.
신앙적으로는 순교자의 신앙에서 차차 인본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을 하였는데 431년 에베소 총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숭배하기로 정식 승인이 되어 마리아를 성자와 마찬가지로 중보 기도를 드리는 관습이 생겨나고 그것은 이윽고 화상예배가되어 성상예배로까지 발전을 하였다.
이러한 때 교회의 신앙은 점점 고갈되어가고 있을때 신앙의 생명을 계속 불타 오르게 한 것이 수도원이다. 동방교회(東邦敎會)의 수도원은 3세기경(251-356) 에 애굽의 안토니에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안토니가 수도원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수도원의 규칙을 성경의 진리에 근거하여 수도원 정신을 가르치사람은 바실리우스이다. 그렇게하여 안토니는 동방 수도원을 다리를 놓은 사람이다.
서방교회(西方敎會)의 수도원은 그보다 조금 늣은 A.D 404년 시작이 되었다. 서방의 수도원은 히에로니무스에 의하여 파코미우스의 수도원규칙이 라틴어로 번역이 되어 이탈리아에 소개 되면서 부터이다.
서방교회의 수도원이 역사상 최초로 큰 활동을 하게된 것은 마르티누스(316-397)였다. 당시의 수도원은 공동생활을 영위하고 이교도를 교화 시키는데 힘썻다. 수도원은 예수의 교훈에 기초하여 세가지 서약을 해야 하는데 청빈과, 정결과, 복종할 하는 의무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생활의 바른 규칙은 기도와 명상과 노동을 해야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독립자존의 완전한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수도원 운동은 분파주의자들의 성별 운동과도 관련이 있었다. 박해중의 교회가 순교의 미덕으로 삼던 그 자리에 금욕과 독신생활과 금식을 예찬하는데서 시작된 수도원은 영적 유토피아 운동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앙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던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과 육의 대립의 문제를 금욕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는 결혼을 멀리하게 되었고 그의 대표적인 인물이 오리겐과 제롬이다.
수도원의 기원
1) 안토니( Anthony) 수도원.
수도원의 최초 창설자요 수도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안토니는 A.D250년경 이집트 중부의 코마에서 부자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A.D 269년경 교회에서 복음서의 19: 21절의 말씀을 듣던 가운데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었으며 또한 그 말씀을 따라 소유한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집을 떠나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A.D3세기 경에는 사막으로 들어가서 금욕생활과 운둔 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 그의 소문을 들은 추종자들은 그에게 찾아와 그의 거하는 곳에 함께 정착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함께살기 시작하게 되면서 부터 이것이 안토니수도원의 기원이 되었다. A.D 305년에 35세가 되었을때 그는 사막의 영적인 교부로 활동을 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나타 난 목적은 그곳에서 잡혀 순교의 영광을 얻을때까지 그곳에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억눌린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안토니는 또 노령에도 아다나시우스를 방문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을 물리치라고 격려를 하기까지 하였다.그로 인하여 결국 아다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전기를 기록하게된 동기가 되었는데 아다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전기에서 안토니는 기도를 많이한 성자라고 하며 또한 그는 기도를 많이 하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 해도 그는 자랑하지 않은 성자라고 말한다.
아다나시우스는 안토니를 예수 그리스도 다음가는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도 안토니를 영적인 아버지로 부를정도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며 이러한 안토니의 전기를 읽고 수도원에 문을 두드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안토니의 전기는 어거스틴의 참회록에도 언급이 될만큼 그 시대가 본받을만한 수도사였다.
2) 파코미어스 (290- 346)
292년경 데바이드에서 이교도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시절 콘스탄틴을 대항하여 싸우던 맥시민(Maximin)군대에 배속이 되어 생활을 하던 중 테베에서 기독교인들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제대후 세례를 받고 313년 유명한 운둔성자 팔레몬을 찾아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파코미어스는 안토니의 운둔식 수도원을 개혁하여 조직적 수도원을 운영한 사람이다.
수도원 공동체를 최초로 조직적으로 하여 북부 이집트의 나일강변 타바내시섬에서 수도원을 건립하였다.2) 그후 기독교가 공인되자 수도원은 애굽에서 팔레스틴과 시리아로 확산이되어 4세기 중엽에는 세바스테의 주교 에우티우스(300-377)가 처음으로 소아시아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수도원 조직은 첫째 수도원에 모여 같은집에 살며 일정한 시간에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며 공동 예배를 가진 조직적인 생활이다. 둘째는 수도원 건물을 사막에서 도시 가까운쪽으로 옴겨 세웠다. 셋째는 엄격주의를 철저히 제한하였다. 자신의 노동을 고난보다 더 중요시하고 예배라 할지라도 그것이 너무 길어서 사람에게 억압이 되어서는 안되며 하루의 기도 시간도 여덟시간으로 줄였다. 넷째는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수도사들의 집에 학문을 연구하게 한 것은 장래에 신학사상의 열매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방 교회의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의 학문 연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책을 가까이 하게 함으로 중세기에 탁월한 인물들을 배출하게 되었고.4) 파코미어스는 안토니 수도원을 개혁하여 제복을 입도록 하였으며 후대에 수도원의 새로운 기원(紀元)을 이룩하였다.
3) 베네딕투스 (Benedict) 수도원
마르티누스를 서방교회 수도원의 창설자라고 한다면 그것을 확립한 사람은 베니딕투스이다. 베니딕투스는 (480-543)는 이탈리아의 움부리아주의 누르시아라는 시골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로마에서 철학과 법률을 배웠으나 학우들의 타락한 생활을 보면서 그 생활에 물이 들까 두려워하여 학업을 중단하고 학업 도중에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스비아고의 산중의 동굴에서 3년동안 고행과 기도 생활을 하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과 파코미우스 수도원을 보기로 수도원을 창설하였고 또한 수도원을 개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모아 12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529년에는 아폴로 사원의 옛터인 몬테캇시노 언덕에 아름다운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는 거기서 죽을때까지 소신껏 수도원을 운영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돕고 이웃들에게 전도하기에 힘썻으며 공동생활에 모범이 되는 수도원을 만들었다. 당시 토틸라왕은 수도원에 찾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땅에 엎드리어 성자의 축복을 받고자 하던일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이처럼 베네딕투스 수도원은 그의 생애 못지않게 수도원의 민주적 규칙을 높이 평가할수 있다.
(1) 수도원은 선거에 의하여 피택된 원장에 의하여 종신적으로 운영을 한다. 그리고 수도사는 원장에게 순종해야 한다.
(2) 원장과 수도사는 규칙앞에 평등해야 한다. 원장은 중요한일을 결정할 때 수도사들과 상의(相義)해야 한다.
(3)수도사의 제일의 의무는 예배이고 노동과 독서도 중요한임무이다.
(4) 수도사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다른 수도원으로 마음대로 옮길수 없다.
(5) 수도원 생활은 규칙적이나 고행적(苦行的)일 필요가 없다.
(6) 각 수도원은 자립, 독립 운영이므로 다른 수도원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7) 수도원의 중심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자라는데 있다.
전 유럽으로 확신이 되었고 이때부터 수도원과 수녀원은 자신들의 구원의 문제에만 힘쓰는것이 아니라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등에고힘을 쏟앗기 때문에 사회에 참여하는 비중도 중대하였다. 수도원이 고대의 정신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데는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동방의 수도사중에는 운둔적인 것이 많이 있었으나 서방의 수도사중에는 사회적인 사람들이 많았었다.
4) 도미니크 수도원(Dominic 1170-1221)
스페인의 칼라로가에서 태어나 피렌치아 대학에서 수학을하고 그곳의 감독 디아고에게 인정을 받게 되면서 어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수도사가 된뒤 1203년오꾸마 주교의 디에고와 함께 로마에 가는 도중 프랑스 지방의 로정에서 당시 이단시되는 카다리(Catari)와 접촉하게 되었다 카다리는 이원론과 금욕생활을 주장하는 반 사회적 종파이다. 당시 교황들은 이단을 진압하는데 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때 도미닉은 이단 교회들을 막으려고 수도원을 창설하려고 하였지만 인노센스3세는 이를 허가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프란시스 수도원에 가입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도미니크는 포기하지 않고 수도원을 창설하기 위하여 다각적으로 노력한 결과 1216년 인노센스 3세가 죽자 다시 로마로 올라가 교황 호노리우스3세에게 승인을 얻어냈다.
그 뒤 유럽 여러나라에 60여개의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1228년에는 폴란드, 덴마크, 그리이스, 예루살렘,등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수도원의 특색을 보면 프란시스 수도원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와 헌신을 강조를 하면서도 연구를 중요하게 생각한 반면 도미닉 수도원은 오직 연구하고 전도하라는 표어가 도미니크 수도원의 특색이다. 도미니크 수도원은 4년간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한후에 설교면허가 주어지고 계속해서 3년간의 신학을 더 연구 하도록 하였다.
그리한 결과 도미니크 수도원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같은 대 신학자를 배출하였고 엑크하르트(Eckhart)나 타울러(Tauler)같은 신비주의자들과 사보나롤라(Sabonarola)와 같은 개혁적인 인물의 배출로 인하여 당시 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5) 클루니(Cluny) 수도원의 개혁
클루니 수도원으 몬카지도 다음가는 대규모의 수도원으로 A.D 910년 프랑스 마콘에 세워졌다. 클루니 수도원은 세명의 교황을 배출한 영향력있는 수도원이었으며 교황이 직접 감독하고 귀족들의 간섭을 받지 않은 수도원이다. 클루니 수도원은 베닉투스의 업격한 규율을 따라 수도생활을 하였고 유능한 원장들의 개혁운동은 다른 수도원들의 모범이 되었다.
당시의 유명한 원장들은 오도와 베드로 였는데 이들은 당대 큰 스켄달이었던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결혼문제를 철저하게금하며 성직자의 기강을 세우는데 앞장을 섰다. 또한 사회 개혁으로는 봉주들간의 싸움을 금지시키고 주님의 수난을 상기 시키기 위하여 수요일밤부터 월요일 아침까지는 휴전을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클루니 수도원은 사회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웃 수도원들도 이를 모방하여 지원이 되기를 원했다.
이리하여 937년에는 17개의 지수도원이 세워졌으며 994년에는 37개가 세워졌고 981년에는 서 유럽에서 제일큰 교회당의 건물을 가진 수도원이 되었다.
중세 교부철학 -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교부철학의 시작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잡혀왔다. 대왕이 꾸짖었다. “너는 도대체 왜 사람들을 괴롭히는가?” 해적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폐하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단지 저는 배 한 척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부르고, 폐하는 큰 함대를 거느리고 일을 하기 때문에 황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신의 나라 De civitate Dei] 4권에 등장하는 예화다. 그는 여기서 전쟁을 통한 제국의 확장이 해적의 강탈행위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묻는다. 그리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해적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예화를 키케로가 쓴 [공화국]에서 빌어왔다.
서양 고대사를 들여다보면 큰 위기가 세 차례쯤 있었다. 그 때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 위기에 대한 철학적 진단을 내렸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국가가 심각하게 부패했을 때 내려진 처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국가]다. 그로부터 4백 년쯤 뒤 로마 공화정이 붕괴했을 때 키케로는 [공화국]을 집필했다. 또 다시 4백 년이 흘러 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시점에서 나온 것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22권의 대작 [신의 나라]다.
마지막 고대 철학자이자 최초의 중세 철학자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결합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을 쓴 결정적 계기는 410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7백 년 동안 로마는 단 한 차례도 적군에 점령된 적이 없었다. 그런 위대한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서 맥없이 짓밟힌 것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사의 스펙트럼을 넓혀서 해석하면, 이 사건은 유럽을 호령했던 로마의 영광이 꺾이는 결정적 사건이자, 머지 않아 한 시대의 막이 내릴 것이라는 징후이기도 했다.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로마는 그 후 게르만족의 계속적인 침공을 받아 476년 마침내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다. 역사가들은 로마 멸망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한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좌표를 그린다. 첫 번째는 시간 좌표다. 그는 고대의 끝 자락에 위치한 마지막 고대 철학자이며, 동시에 중세의 첫 대목에 등장하는 최초의 중세 철학자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공간 좌표다. 그는 제정 로마 시대의 라틴 교부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주로 활동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였다. 그는 지금의 알제리에 있는 히포 레기우스의 주교로 34년 동안 봉직했다. 그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 당시 히포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놓고 한때 로마와 자웅을 겨루었던 카르타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로마에서는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의 경계지대에 위치해 있고, 공간적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들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철학 좌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원시 기독교를 접목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 사상의 원형을 이루는 두 개의 전통, 곧 그리스 철학에 배경을 둔 헬레니즘 전통과 기독교 종교에 배경을 둔 헤브라이즘 전통을 하나로 묶어 기독교철학 또는 신학을 출범시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그는 교부철학을 정립한 중세 초기의 최대 철학자, 또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잠깐! 기독교는 철학이 아니지 않은가? 종교란 추상적인 이론체계가 될 수도 없고, 또 굳이 이론체계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중세철학의 권위이며 성공회 신부이기도 한 코플스톤은 기독교는 하나의 계시 종교로 세상에 나타났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기본 과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 체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믿음과 이성의 균형
예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선후관계로 보면 기독교도는 예수의 말씀이 이치에 맞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반면 철학은 항상 이치를 따진다. 이치에 맞으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으면 내친다. 그것이 바로 철학의 기본 속성이다. 바로 이 교차 지점에 믿음(fides)과 이성(ratio) 사이의 긴장 관계가 숨어있다. 그러면 믿음과 이성은 대립과 충돌의 관계인가, 아니면 균형과 조화의 관계인가? 서양 사상의 지적 전통은 양자의 관계를 후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1998년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2세가 발표한 “믿음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면서 날아오르는 두 날개”라는 [신앙과 이성의 회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종교는 이성과 배치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요청한다는 메시지다. 믿음은 광기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함께 날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이성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두 날개라는 견해는 중세 후기에 등장하는 스콜라 철학에서 공고화되지만, 믿음과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이미 강조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귀의하기까지의 정신 편력은 그가 쓴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서양 자서전 문학의 효시로서, 어린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과 젊은 날의 방황에 대한 고백을 기도문 형식으로 담고 있다. 팔딱팔딱 튀는 문학적 감수성이 담긴 글을 읽는 맛도 좋지만, 당대 최고의 지성이 그리는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지적 풍토를 읽는 맛도 쏠쏠하다. 어린 시절 한번쯤은 해봤음직한 과일 서리를 두고 “과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와 과일을 훔치는 행위를 사랑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 대목에서는 심리 묘사가 뛰어난 한 편의 소설을 읽는다. [고백록]이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근원을 선의 결핍에서 찾는다. 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죄를 범하는 인간 의지의 나약함에서 찾았다.
그래서 이웃집 과수원에서 과일을 따먹는 일과 같은 어린 시절의 장난까지도 악의 증거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런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답은 미약한 인간은 혼자 힘으로 이 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고, 인간을 도와주는 신의 전능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의지 –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를 체계적인 논리로 정립한다. 아마도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체계적 교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태어난 인간이었는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서로 다른 위격을 가지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삼위일체에 관한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그에 대한 답을 할 필요도 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또 신학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논리를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기독교의 진리를 지적으로 변호하는 변증론(apologetics)이 신학의 주요 분야로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플라톤의 철학과 '역사적 종교'와의 만남
교부철학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에 플라톤 철학의 옷을 입혔다. 플라톤은 인간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쇠사슬에 묶인 동굴 속의 죄수와 같다고 했다. 지성(nous)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안의 눈으로만 보는 것은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그림자를 만드는 진짜 세계는 우리가 갇힌 동굴 속 너머 저편에 있다고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진짜로 실재하는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되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현상 세계라고 했다. 우리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들을 감각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면서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한 가짜라고 했다. 정말 실재하는 것, 곧 이데아는 현상 세계에서는 망각되었다고 했다. 플라톤은 몸과 감각에 묶여 망각된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을 철학의 사명으로 삼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은 신의 개념이 되었다. 신은 완전한 실재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곧 플라톤이 말하는 현상 세계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와서는 불완전한 실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위치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혼을 가진 완전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가진 불완전한 실재가 된다. 플라톤은 참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이성의 지도를 받은 절제와 조화를 강조했다. 플라톤은 그러한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이데아를 기억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참된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완전한 실재인 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기억해 낸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완전한 실재인 신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철학이라는 옷을 입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대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허용되고, 또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식 국교가 되는 시기였다. 제국이 공인한 유일무이한 종교로서 기독교가 가진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기독교를 로마인에게 이치에 맞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은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나라]에서 신을 멀리 하는 나라를 하나의 강도 집단으로 봤다. 그것은 신을 멀리 하려는 인간의 교만의 결과이다. 이러한 교만한 자의 공동체가 아닌, 겸손하게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고대하는 공동체가 바로 신의 나라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신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 곧 교회를 말한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이 사라진 이후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론체계(교의)를 구축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필요한 제도로서의 교회이론을 세운 ‘교회의 아버지’(교부)였다. 그가 세운 이론을 교부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검열과 금서로 생각을 통제하다
서구에서 검열이란 말은 기원전 로마시대 제도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검열 정책이 구체적으로 마련되고 집행된 때는 중세시대다. 카를 5세 때 ‘위험한 서적 목록’이나 교황 비오 4세 때 ‘인덱스 리브로룸 프로이비토룸(신자가 읽어서는 안되는 금서 목록)’이 나왔다. 중세의 검열은 미풍양속을 유지해 권력을 보호하고, 과학의 공격을 막아 종교의 권위를 지키려는 의도였다.
‘어느 곳에나 있으면서, 아무 데도 없는’ 있지만 없는 책 ‘금서’
금서는 권력자들이 이념과 사상을 독점하고 통제하며 생겨난다. 권력자들은 국가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혹은 사회의 미풍양속을 거스른다고 낙인을 찍어 금서를 만든다. 금서란 ‘어느 곳에서나 있으면서도, 아무 데도 없는’ 책이다. 금서는 사상 통제, 사회 통제의 한 방법적 장치요 기술이다. 금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서양 문명에서 대표적인 서적 검열의 역사는 가톨릭 교회의 '금서목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559년 교황 파울루스 4세가 처음 펴낸 후 42번째 목록까지 총 4천126권을 수록한 교황청 '금서목록'은 1966년 로마 교황청이 이를 폐지할 때까지 400여년간 가톨릭 교도를 구속하는 역할을 했다.
이중에는 베르그송, 콩트, 디포, 데카르트, 디드로, 플로베르, 홉스, 흄, 칸트,로크, 밀, 몽테뉴, 몽테스키외, 파스칼, 루소, 상드, 스피노자, 스탕달, 볼테르, 졸라 등 서양을 대표하는 지성이 쓴 고전이 포함되어 있다.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책은 시대를 막론하고 탄압받아 왔으며 이와 같은 탄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종교가 금서를 양산하는 이유, 권력
책이 출현 이후, 금서를 가장 많이 양산한 것은 아마도 종교일 것이다. 물론 책의 태동 이전에도 종교는 사상과 철학을 통제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신에 대하여』에서 “신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이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또 그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려는 데에 장애가 많아 그것을 지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도 짧기 때문이다”라는, 지금으로 보면 온건하지만, 당시로서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다신(多神) 사회로 주된 종교가 없었음에도, 프로타고라스는 무신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다.
한편 기독교는 서책의 종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많은 금서를 만들어냈다. 심지어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 1536년 윌리엄 틴들을 처형한 것이 바로 기독교다. 중세 기독교는 정치와 불과분의 관계로, 사실상 이 시대의 금서를 규정한 주체를 정치와 종교로 구분하기는 모호하다. 당시 사회 지배 세력으로서의 종교는 정치를 포괄할 뿐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윤리적 판단마저 좌우하는 절대적 영향력을 지녔다.
종교가 금서를 양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권력’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종교의 정통 교리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은 이단시되었다. 그것은 시도 자체가 교리에 어긋난다. 아울러 인간 중심적 사고, 즉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교적 권위 아래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중세 지배계급은 성을 포함한 인간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특히 기독교의 금욕 윤리는 물질세계를 독점하려는 특권층이 피지배층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을 제도화하는데 일조했다.
무지렁이들의 현세적 욕망을 충족시키면 지배 질서의 문란과, 나아가 파괴를 가져온다. 결국 육체의 욕망이 살아 숨 쉬는 현세는 경멸 대상이었고, 현실에 대한 작은 기대마저 박탈하기 위해 내세에서의 천국은 강조되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며 살아야 함에도, 중세 기득권 세력은 ‘현세는 잠시잠깐이요, 내세는 영원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피지배층을 농락했다.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다. 『데카메론』은 근대 소설의 시조로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바티칸의 금서 목록 중 첫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교황과 추기경, 왕, 기사, 재판장, 의사, 도적, 요리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해 성적 욕망과 함께, 이들이 벌이는 사회적 속임수를 풍자적이고 희극적으로 묘사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보카치오는 1348년 유럽을 휩쓴 페스트의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썼다고 발뺌했지만, 날카로운 사회 풍자와 기성윤리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빨간 딱지를 붙이고야 말았다.
종교와 금서, 새로운 세계관 싸움의 축소판
종교가 금서를 양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과학기술 등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세계관이 발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대표적인 과학적 발견이 바로 지동설이다. 지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했고, 생활했으며,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의 환희를 일구었다. 지구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며, 이것에 도전하는 지동설은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지동설은 결국 말도 안 되는 위험한 사상으로 단죄되었다.
지동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갈릴레이다. 획기적 전환을 의미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발표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종교 당국의 탄압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미 1530년경에 책의 집필을 마치고도 사망이 임박한 1543년에야 책을 출간한다. 책을 출간할 당시 교황청은 코페르니쿠스의 책은 물론 지동설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지동설이 공감대를 형성해가자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결국 코페르니쿠스는 고난당한 선각자는 아니되, 지동설을 지지한 그의 후계자들은 모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케플러는 신교와 구교의 박해 속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우주의 조화』를 선보였는데,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뉴턴의 모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펼친 사람 가운데 가장 심한 박해를 받은 사람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이 학설의 정당성을 옹호했는데, 당시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도미니스 수도회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성서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도 대립이었다면 갈릴레이는 아마도 자유롭게 학문적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성서 자체는 진리이지만 그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말로 도미니크 수도회를 자극하면서 가톨릭의 미움을 산다. 결국 1632년 출간한 『천문 대화』는 판매금지 처분되고, 이어 종교재판소 출두 명령을 받는다. 『천문 대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주제로 4일간 논쟁하는 형식인데,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강력 옹호한다.
중요한 것은 갈릴레이가 지동설 등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펼쳤다는 사실인데, 그 새로운 세계관이란 다름 아닌 평등사상이다. 로마 교황청도 지동설보다는 갈릴레이의 급진적 평등사상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늘은 땅보다 고귀하고 영생불멸하기 때문에 달에 굴곡이 있거나 태양에 흑점이 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실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하늘도 대지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이 고귀하다면 결실과 수확을 가져다주는, 또 재스민 꽃을 피우는 땅도 고귀하다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에 대한 인간 도전을 인식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갈릴레이는 위험한 세계관을 지닌 인물로 받아들여졌고, 대부분의 저서가 금서로 묶이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인간 중 신을 가장 크게 모독한 스피노자
종교와 금서를 말할 때 가장 앞자리에 놓여야 할 사람과 책은 바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다. 『에티카』의 원제는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으로, 읽어본 사람은 대부분 “이게 정말 윤리학이야?”라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서술 방식의 독특함 때문인데, 스피노자는 신과 정신, 정서, 지성 인간의 자유 등을 주제를 마치 논리학을 풀어내듯 증명한다. 이런 전개 방식을 선택한 이유는, 인간과 윤리에 대한 장황한 설명보다 기학학적 증명방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해설하는 것이 가장 체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에티카』 1장에서 ‘신에 대하여’ 증명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가 공을 들인 대목은 자연 개념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은 산과 바다, 땅, 하늘 등 말 그대로의 자연을 포함하지만 그 이상이다. 그에게 자연은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그 무엇으로, 결국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곧 신과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그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과 “자연”이야말로 그러한 실체로 파악한 것이다. 결국 스피노자가 말한 신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신이 아니라 무한한 자연 그 자체다. 따라서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은 무한한 자연을 지성을 통해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피노자는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이자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의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자의 삶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스피노자가 활동한 시기는 17세기로, 여러 가지 혁신적인 주장이 펼쳐진 시기였지만 스피노자의 주장은 과감 그 자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과격한 주장이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신교와 구교의 30년 전쟁이 국지전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었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교회의 권위를 흔들었다. 회의주의가 만연하면서 인류의 기존 지식에 대한 회의와 대안 모습이 한창이던 때였다. 결국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유럽 사회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서,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져야했던 스피노자의 십자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신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유럽 주류 지식인 사회는 물론 동족인 유대인 사회에서도 파문당했고, 사후인 1677년 출간된 『에티카』는 신교와 구교, 유대교로부터 금서로 낙인찍혔다. 『에티카』뿐 아니라 『신학정치론』 등 모든 저서가 금서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어려움을 세간의 평이었다. “일찍이 지구 표면에 발을 딛고 살았던 인간 중에서 신을 가장 크게 모독한 무신론자”가 바로 당대 스피노자가 들어야 했던 평이었다.
종교와 금서, 우리 시대의 자화상
종교와 금서를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성서다. 중세시대에는 라틴어 성서밖에 없었으나, 그것마저 아무나 읽어도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라틴어 성서를 방언, 즉 영어나 독일어로 반역하는 것조차 불허했다. 라틴어 성서와 라틴어 강독은 성서, 아니 권력을 독점하겠다던 종교 권력의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성서가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있는 지금은 어떨까. 우리말 성서가 있으되,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권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성서는 우리 시대 금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로 인해 금서의 멍에를 써야했던 책들은 이 외에도 수도 없이 많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반유대적 정서를 담고 있다는 이유로 악의적인 유대인에 대한 표현을 순화하여 다시 출간되었고, 아예 미국에서는 유대인학부모모임에 의해 논쟁의 중심에 섰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창세기의 해석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떨어뜨린 사람”으로 비난 받으면서 영국 전역은 물론, 반세기가 흐른 뒤 미국에서 다윈의 진화론 반대 물결이 확산되었다. 세상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지금은 진화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창조론이 교과서에 실릴 수 없다는 점에서 책 혹은 금서를 평가하는 기준도 돌고 돈다.
종교는 삶을 치유할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는 일에, 마침내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책의 기능과 역할, 궁극적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서책의 종교였으나 금서를 양산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모순된 행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종교와 금서, 그것은 우리 사회, 아니 지금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비춰주는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글_장동석(출판평론가)
빛의 미학, 중세예술
색과 빛을 중요시한 중세미학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Rosario Asunto 의 「중세의 미론」이라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중세의 예술론들, 미론과 예술론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미술사에서는 형이냐 색이냐 하는 아주 오랜 논쟁이 있었다. 고전주의적인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형을 중요시했고 바로크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색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 논쟁은 결국은 둘 다 중요하다는 타협안으로 귀결된다. 중세미학에서는 기본적으로 형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색이다. 색과 빛이 연출하는 효과 이것이 중세의 미와 중세예술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formal definition과 material definition
그리스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은 형이고 아름다움의 본질은 바로 수적 비례관계였다. 그것을 캐논이라고 한다. 이상적인 인체의 비례를 만들어놓고 거기 맞춰 작업을 했던 것이다. 모든 조화에는 그 밑바탕에 수적 비례관계가 깔려있다. 우리가 많이 쓰는 명함이라든지 담뱃갑 등이 황금분할로 되어 있다. 그리스로마문화가 끝나고 중세로 넘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미감이 생기고 새로운 형태의 미론이 등장한다. 미에 대한 정의는 두 개가 있다. 하나는 formal definition이고 나머지 하나는 material definition이다. 미에 대한 형식적 정의와 미에 대한 실질적 정의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미감은 formal definition이다. 미란 수적 비례관계고 이때 미는 결국 quantity, 양의 문제가 된다. 측정하고 계량하고 굉장히 높은 추상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관계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문명이 상당히 높은 단계의 문명을 자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사람들은 material definition을 중요시한다. 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색채, 혹은 빛의 아름다움 을 중요시한다. 색에는 부분과 전체의 비례관계는 있을 수 없다. 결국 그들에게 미는 quantity가 아닌 qulity, 현상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qulaia(감각적 질)의 의미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갈 때는 문화적 중추가 달라진다. 게르만족이 로마를 멸망시키고 중세문명을 만든다. 게르만민족들은 상당히 문명정도가 높지가 않았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질취향이 새롭게 유럽문명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는 게르만민족의 문명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자의 빛
이렇게 미감이 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플로티누스Plotinus라는 인물이 있다. 헬레니즘 문명이 멸망할 때쯤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사로잡았던 생각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사람이다. (신플라톤주의) 이데아와 상기설을 주장했던 플라톤과 달리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의 틀을 받아들이지만 다양한 이데아 중에 통째로 일자라는 것이 있고 이 일자로부터 빛이 흘러내려온다는 유출설을 주장한다. 촛불을 켜놓으면 빛이 가까우면 밝다가 떨어지면 점점 어두워지다가 나중에 완벽한 어둠에 묻히게 된다. 완벽한 어둠은 아무런 형이 없는 물질만의 상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물질과 일자라고 하는 정신, 이것의 혼합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상과 현실을 나눠놨다면 플로티누스는 이상과 현실을 연결했다는 것이 다.
아름다움에 관한 헤겔의 주장
헤겔은 광물은 형이 없고 아무런 정신적 원리가 없는 물질이라 아름답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수정같이 자연 상태에서 형이 있는 광물이 있다. 조금 아름답다. 거기서 조금 더 아름다운 것은 식물이다. 식물은 나름대로 구조가 있고 부분과 전체의 원리가 있다. 그러나 식물은 자르면 또 자란다. 유기적인 연결도가 약한 것이다. 반면에 동물은 훨씬 더 유기적 구성도가 강하고 정신적 원리가 강하다고 한다. 특히 인간은 피부 밑으로 피부가 보이고 언어를 가지고 있다. 내면성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세계에서 존재하는 사물들 중 인간이 가장 아름답다고 보았다.
플로티누스의 빛의 미학
플로티누스는 인간 역시 물질과 정신의 혼합으로 되어있다고 본다. 물질은 육체고 정신은 영혼 또는 정신이다. 플로티누스의 이상은 물질의 때를 벗고 상승하는 것이다. 정화의 방식은 첫 번째가 예술이고 두 번째는 철학이다. 예술과 철학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의 육체성, 혹은 물질성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정신적 존재가 됐을 때, 위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하게 물질성을 극복하고 완벽하게 정신적 존재와 가까워졌을 때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가 됐을 때는 바로 합일의 체험, 몰아의 체험을 하며 엑스타시를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유럽에서 막 출발할 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패러다임, 사유의 방식이었다. 여기에 기독교가 들어가는 것이다. 플로티누스 철학은 중세 교구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신학을 정립하는 패러다임이 된다. 따라서 이 빛의 형이상학이 중세로 넘어가는 빛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빛의 미학이 되는 것이다. 신은 참되고 선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신의 아름다움, 일자에서 뿜어 나오는 신의 빛에 힘입어서만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그리스에서 중세로의 미의 변화
그때 빛은 눈에 안 보인다. 초감각적인 빛이고 초월적인 빛이다. 이것이 중세 예술가들의 과제였다. 예술가들은 감각적인 재주를 부려 눈에 보이지 않는걸 보고, 보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료, 빛나는 재료(금, 은, 보석)를 사용한다. 또는 자연광, 촛불 등을 이용해 일자로부터, 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초감각적인 빛을 상징한다. 그렇게 신앙의 결과로서 미감이 완전히 바뀌었다. 플로티누스는 미감의 전환기에 고대 그리스의 미론을 공격한다.
고대그리스의 formal definition을 공격하는 플로티누스의 주장
1. 찬란한 햇빛이나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을 보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낌. 그런 빛과 색의 아름다움에는 부분과 전체가 없음.
2. 덕과 미가 같이 존재하는 그리스인들의 미감을 공격. 사람의 인품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인품에 부분과 전체, 비례관계를 따질 수 없으므로 따라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얘기하면 분명히 아름답다고 일상용어로 얘기하는 그 현상을 formal definition으로 설명할 수 없음
3. 부분은 그 자체가 단위로 비례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역설에 도달하게 됨.
이렇게 기독교로 넘어오면서 미의 정의가 달라진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수적 비례관계가 아름다움이었지만 중세에 들어오면 그것은 아름다움의 원인이 아닌 결과일 뿐이다. 중세인 들에게 아름다움의 원인은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다. 초감각적인 빛이 우리 감각세계에 나타날 때 수적 비례관계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
고대 그리스와 중세 미술의 비교 | |
고대그리스 | 중세 |
수직적 비례는 미의 결과중 하나 (유일한 아름다움X) | 수직적 비례는 미의 원인 |
아름다움은 형 | 아름다움은 빛(색채) - 재료가 중요 |
현세의 재현 | 현세의 밑에 깔린 초감각적 세계가 중요 |
고대그리스에서 중세로 변화 _ 예술의지의 변화
그리스의 조각과 비교해 중세예술을 미숙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암흑기라고 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예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항상 밝고 빛났다. 의지가 달라졌을 뿐이다.
의지가 전혀 달라졌고 중세 사람들에게는 가시적인 것이 아닌 초월적인 세계를 어떻게 눈에 보여주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진중권 <서양미술사>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의 정신주의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적 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즉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인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고 있는 단층보다도 큰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세 세기의 경계선을 긋는 여러가지 변동들은 르네상스가 가져온 정신적 업적을 오히려 능가한다.
일반적으로 중세예술의 특색이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특징들, 즉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인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부시한 자의적인 취급 등은 중세 초기에만 적용되는 것이고 도시적 화폐경제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예술 및 문화의 근본적인 특색으로 시종일관했던 것은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다. 즉 중세의 예술은 중세 초기에서 전성기로 넘어가면서 그때까지의 엄격한 여러 구속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극히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로서의 성격은 잃지 않았으며, 교회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리스도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의 표현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이 갖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미적인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술작품의 가치는 미학 외적인 것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적 유산에서 제일 먼저 잃어버린 것은 형식의 자율성 원리였다. 중세에는 오로지 종교가 있을 뿐 학문을 위한 학문이 없었듯이 신앙과 무관한 자율적 예술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예술은 적어도 그 효과가 넓은 범위에 미치는 점에서는 학문보다 더 중요한 도구였다.
그리스도교 예술관의 가장 현저한 특색은 예술을 도덕교육의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이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와 더불어 그 시대가 추구하던 감각과 쾌감도 자취를 감추었다. 고대의 영광은 사라지고 로마제국도 무너졌다. 교회는 로마 지배계급의 정신으로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자칭하는 새로운 권세의 이름으로 승리를 구가했다. 그리고 절대권을 완전히 장악한 지금, 교회는 고대 그리스, 로마와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예술양식을 스스로 만들어 내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p.177~187)>
중세시대의 종교와 미술의 역할
종교와 예술의 불가분의 관계는 유럽의 중세사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세는 5세기로부터 15세기까지 1000년의 시간을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중세 유럽은 기독교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는데,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사회 문화가 기독교와 관련되어 파생되었다. 지금부터 언급할 중세시대 예술은 기독교 미술에 관련된 것 들이다. 그 까닭은 미술이 문학이나 음악 혹은 그 밖의 다른 예술 분야 보다 뚜렷이 시각적으로 확인이 되고 가장 많았으며 또한 그 사회에 있어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회화는 당시 하나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켜주고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장려되었다. 많은 신도들이 글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이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그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중세 이전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 미술은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인체의 비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중세 초기로 넘어가며 관점의 변화를 맞이한다. 인간에 대한 주제는 기독교 사회에 있어서 더 이상 그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 못한 것이다.
<타오르는 불길 속의 세 사람>, 프리스킬라 카타콤 벽화, 3세기로 추정, 로마 소재
인체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수려한 옷자락이나 이상적 비율을 가진 신체의 묘사, 이상화된 얼굴 표정의 절대미에 대한 추구가 사라지고 미술은 극도로 단순하고도 명료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상에 대한 관심이 아닌 신에 대한 관심사는 인간과 현세에 대한 것은 극도로 자제하며 대상을 충실히 묘사하고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모방에 대한 관심보다는 미술가가 그의 이야기를 가능한 명확하고 단순하게 표현 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이야기에 속하는 내용을 의미 있는 사물들만을 강조하여 배경을 단순화하는 방법으로 뚜렷이 부각시키는 것은 그림 안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읽어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간결한 수단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된 것만을 중점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편의 서사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12세기로 넘어가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납작하고 두꺼운 전투적인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둥근 아치의 석조천장과 이것을 받쳐주는 창문 없는 두꺼운 벽, 그리고 굵은 기둥의 견고함 등의 육중한 건축양식이 로마의 건축과 비슷하여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시기에는 혼란하고 전쟁이 만연했던 시기였던 터라 교회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살리는 강한 요새의 역할을 맡게 된다.
<성 마태>, 필사본, 830년경, 에페르네이 시립도서관 소장
회화로는 교회 벽을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나 채색 필사본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그림들은 사실성은 결여되었으나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볼 수 있다. 이 점 역시 성서를 읽을 수 없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애쓰지 않아도 표현되는 이야기를 쉽게 그림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이었다.
<샤르트르 대성당>, 1194-1250년경, 프랑스 샤르트르 소재
13세기로 가면 로마네스크의 건축양식과는 다른 고딕의 양식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교회들은 서로 더 높고 뾰족하게 하나님과 가까워 지기위해 탑을 높이 올리게 된다.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건축 기술상으로 획기적인 발명인 교차궁륭의 발명으로 교회는 높고 뾰족하게 탑을 세우고 두꺼운 벽 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끼워 넣었으며 돌과 유리로 완성된 교회의 구조는 이전의 견고하고 답답하며 투박한 로마네스크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끝없이 위로 뻗어 올라간 내부 상승선들과 애처로워 보이는 성상들과 빛의 극대화효과 등은 인간을 압도하고 이 땅에서 천상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넋 나간 무아지경의 상태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고딕양식의 교회 건축은 천국을 이 땅에 교회로서 구현하며 사람들을 신의 세계로 인도해 나가는 역할을 교회의 건축양식으로 이루어내었다.
중세는 고대 그리스시대와 중세 이후인 르네상스 시대에 비교해 암흑시기, 혹은 예술의 침체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 당시의 시대를 이해해 볼 때, 미술은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찬란한 기독교 예술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예술은 지금과 아주 달라서 화가의 이름이 알려지지도, 중요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사유나 세속의 이야기들은 다루어지지 않은 모습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예술은 인간에 대해 탐구하고 발전을 모색하고 인간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인본주의적 관점보다는 신의 것을 구현하고 전파하며 드러내는 데에 목적을 둠으로써 자신이 부여받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또한 성서가 가진 고유의 상징과 알레고리의 역할을 그대로 회화나 조각에 도입함으로서 알기 쉽게 사람들에게 추상적인 신과 천국의 세계를 비유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성서은유의 이점은 신의 사물들과 정신을 물질적인 직유로 전이시킨 것이다.
교회에 있어서의 미술의 정당한 목적은 신에 의한, 신을 위한 것 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세계에 관한 관심이 불러일으킨 종교에 대한 열망은 예술로 표현되고 그와 연합함으로서 시대를 풍미하는 문화예술의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중세시대의 예술 역시, 도입부분에 언급 했듯 당시 신 중심이었던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세시대의 예술은 예술 자체의 미를 추구하기보다 기독교를 가르치고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적 기능을 담당했다. 지나치게 신에 대한 것을 강조했던 중세 예술이 점차 시간이 지나 시대변화와 함께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것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어 르네상스로의 길목을 열어 주기도 하였지만 1000년 동안 문맹이 태반이었던 사회에 성서를 그림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 미술이 종교의 도구로서 사회를 교화시키고 가르쳤던 역할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을지는 짐작해 볼 수 있는 바이다. 예술은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삶 바로 그 자체였던 것 이다.
http://www.zeone.co.kr/031B_CD/031B_01_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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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wikipedia.org/wiki/%EB%A7%88%EB%85%80%EC%82%AC%EB%83%A5
http://ko.wikipedia.org/wiki/%EB%B6%84%EB%A5%98:%EB%A7%88%EB%B2%95
2부 끝. 3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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