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1

草霧 2013. 2. 25. 20:59

 

 

 

중세 미술 2

 

 

광기와 검열 그리고, 카니발

 

 

. 중세유럽이 기독교를 이야기하다.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1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1부 기독교 만 존재한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중세 종교적 광기와 마녀사냥”, “2부 검열과 금서의 종교재판소, 예술의 속박”, “3부 중세 유럽인 욕망의 분출구 카니발(carnival)” 로 인간의 예술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를 속박하고, 탄압한 역사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중세 종교적 광기

2. 검열과 금서의 종교재판소, 예술의 침체

3. 중세 유럽인 욕망의 분출구 카니발(carnival)”

 

  

1. 중세의 종교적 광기

 

 

 

 

 

종교적 광기의 대명사, 마녀사냥

 

마녀사냥은 종교적 광기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마녀사냥은 집단적인 정신병으로 볼 수 있다. 서양에는 마녀들이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자초할 수 있도록 악령을 소환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 결과 테러의 전염병이 유럽 전체를 사로잡았다. 마녀는 모든 재난과 불행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다. 갑자기 소가 죽으면 그것은 마술이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병이 들면 그것도 마술이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동기가 되어 사람들은 마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사냥하고, 고문하고, 불에 태워 죽였다.

마녀사냥의 미친 짓은 가톨릭교회의 마녀칙서의 발표로 14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교황 이노센시우스 8세에 의해서 1484년 발표된 선언문은 마녀사냥에 대한 교리적 근거와 공식적인 후원을 제공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광기였다. 마녀사냥은 거의 2세기 반 동안 많은 남자와 아이뿐만 아니라 수십 만 명의 여자들이 대중 앞에서 고문과 잔인한 죽음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몇 년 동안 다른 범죄들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마녀광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코틀랜드 등에서는 마술에 대한 재판이 엄청나게 많았다. 제네바의 한 주교는 500, 다른 주교는 600, 또 다른 주교는 900명의 마녀들을 불태워 죽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이다. 250년이 지난 이후에 이 문화적인 광기의 물결이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점점 과학의 합리주의와 산업문명이 들어섰다. 기록에 의하면 루터도 볼테르도 가담하였다고 한다.

마녀란

어린이의 피를 빠는 자, 라미아: lamia, 점장이로서 디비나토르, 솔틸레구스: divinator, soltiegus, 빗자루나 지팡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바크나리아: bacnaria)

 

중세 종교재판의 역사

 

1. 이단(Heretic)과 종교재판(Inquisition)

교회는 교회의 성립 이후 끊임없는 이단시비에서 얻은 승리를 발판으로하여 교리와 제도를 확립해왔다. 이렇게 성립된 교회의 교리와 제도는 '기독교 사회'에 속한 중세인들을 통제하고,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일생을 교회와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교회법은 신자들이 지켜야 하는 생활지침을 전달하고, 강요했다. 중세교회는 개인의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생활지침과 견고한 조직망과 설득력 있는 신념체계를 포함해 거대한 제도적 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막대한 부 와 세속적 권력까지도 통제하고 있었던 중세교회의 모습은 철옹성 그 자체였다. 이단의 출현이 기존 종교자체 내에서의 만족감과 충족감이 없을 때, 돌출되어 나오는 집단현상이다.

    

 

 

이단(heresy)

교회의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에 대해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의 힘을 빌려 기독교 교의를 보충, 수정하려던 집단이었다

 

교회는 이 집단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교회를 비난하고 사회를 혼란시킨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eresy'는 희랍어 'hairesis'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선별', '선택'을 뜻하는 중립적인 개념이었던 이 말은 그 후에 '행위나 사고의 흐름'을 뜻했고 결국에는 '철학적 원칙들' 이나 '이러한 철학적 원칙들을 지닌 사람들' , '학파' '분파' 를 의미하게 되었다.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 '신앙심이 없는 자', '불경스러운 신성모독자' 등으로 호칭하면서부터 'heresy'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 카타르파(catharos)

세력확장은 이단 재판의 성립과 발전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명칭은 '순수'를 의미하는 희랍어 '카타로스(catharos)' 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마니교(Manichaeism)로써, 프랑스 남부 알비(Albi)에서 유래했다하여 알비파(Albigenses)라고도 불렸다.

    

2) 왈도파(Waldensians)

교회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16세기까지 그 공동체가 존속되어, 종교개혁의 전통과 연결된 유일한 이단으로 종교개혁 전통을 카톨릭에 반대한 복음적인 사상에 기반을 둔 왈도파에게서 찾고 있다. 12세기말 가장 유순하면서도 폭넓은 이단운동이었던 왈도파는 부적합한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개혁운동의 모델이다. 교황 알렉산더 3(Alexander III ,재임기간 : 1159-1181)는 그의 자발적인 청빈의 삶에 대한 서원은 인정했지만, 따로 집회를 가진다거나 설교를 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다. 결국 그들은 1184년 베로나(Verona)회의에서 그 불복종을 이유로 파문당했다. 이 파문은 오히려 그들의 잠재되어 있던 세력을 본격적으로 확장시키는 계기를 주게 되었다. 그후 종교개혁 당시 그들은 쉽게 그 원리를 받아들여 완전히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중세 이단사상의 출현

 

 

 

1) 중세 교회의 부패 와 복음의 변질로 교회의 권력과 부()의 확장으로 종교가 세속문화와 국가권력 위에 군림함으로써 일어난다. 11세기 말엽 교황 그레고리(Gregory) 6(재임기간 : 1045-1046), 7(재임기간 : 1073-1085), 중세 교황청의 권위가 최고조에 오르게 된 시기는 교황 이노센트 3(Innocent III , 재임기간 : 1198-1216)의 취임(A.D.1198)이다. 반신적(Semi-divine) 존재로서의 교황상이 표면화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자(Vicar of Peter)" 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 라고 불렸다. 특히, 십자군 원정과 면죄부(Indulgence)의 판매로 가속화 된다.

 

2) 성직자들의 도덕성의 문제(십일조)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원의 하나였다. 성직자들의 이러한 십일조에 대한 도덕성의 결여는 자연히 평신도들의 십일조 거부 운동으로 표출되었고, 십일조의 거부가 이단자 확인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했다.

 

3) 중세교회의 신앙이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식자층과 엘리트 중심의 신앙 양태만을 반영했으며, 교회는 이러한 민중적 종교심성을 무시했고, 저속한 것으로 비하시켰다.

 

그레고리 교황 이후, 위로부터의 교회개혁 운동 실패하고, 민중적 차원의 개혁운동을 촉발시켰다. 11-12세기를 중심으로 한 중세 이단사상은 첫째는, 유랑 설교자로 출발하여 사도적 청빈과 엄격한 도덕성을 추구하였다. 둘째는, 이원론(Dualism)을 바탕으로 한 철저하고 극단적인 금욕주의 사고이다. “알비파 전쟁(1209-1229)” 셋째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가미된 종교와 주술이 상호 분화되지 않은 신앙양태를 띤다는 것이다. 중세 이단들이 이러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에 후에 마녀와 이단이 동일시되어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단에 대한 교회의 대응

이 시기에는 종교적 확신, 곧 진리는 계시로 말미암아 교회만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과 또 교회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그 진리의 파숫군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교황 이노센트 3, 도미니크 교단의 설립이나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대한 인가, 이른바 수도원 운동의 장려

1179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알렉산더 3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Lucius III, 1181-1185) 베로나칙령

이노센트 3, 교회소송법에서 종교재판 절차가 형성, 1231년 교황청 종교재판관 임명

1224년 그레고리 9(1227-1241)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롬바르디아의 이단자 처벌 법령 반포

이노센트 4(1243-1254)1252년 종교재판관들에게 고문으로 자백 권한을 부여

이노센트 3, 1209'알비 십자군' 원정이었다. 12세기 당시의 남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인 지역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진압인 십자군 동원한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종교재판"의 가혹해진다. 동시에 프로방스 문화와 카타르파 전멸되었다. 알비 십자군은 1229년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십자군은 '이단심문',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십자군으로 변형되었다.

 

 

2. 마녀와 종교재판

이단척결을 위해 12세기에 합법화된 종교재판소는 정치적으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대세력을 이단으로 몰아세우는데 기여했으며, 종교적으로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비난했던 세력과 청빈을 이상으로 삼았던 탁발수도사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데에도 공헌했다. 동시에 이들은 이슬람교인과 유대인에 대한 박해도 서슴지 않았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종교재판소는 새로운 이단을 발굴해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녀'(witches)였다.

 

종교와 주술 사이를 구분하는 베버의 주장은 금기(taboo)와 종교적 윤리를 구분하는 데서 분명해 진다. 중세 말 신앙적인 요소에도 이러한 주술적인 요소들이 다분히 있어왔다. 다만 교회는 그것을 금기시하면서도 묵인했을 뿐이다.

 

민중들의 이러한 주술적이고, 토속적인 신앙양태의 속, 마녀로 지목된 여자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한 과부이었거나 노파였을 뿐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던 약초를 이용한 치료사, 산파, 그리고 영적으로 탁월하여 미래를 예견할 수 있고 마을의 어려운 일, 연애문제 등을 상담할 수 있는 점쟁이 등이었다. 이들이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악마숭배자 라고 낙인이 찍혀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근래에는 여성 해방주의적 관점을 지닌 사학자, 의학자, 신학자들 사이에서 박해대상이 주로 여자였다는 점을 토대로 마녀박해가 중세의 위계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하에서의 여자들의 수난사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사실상 마술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12세기 기독교회의 마술적 성향은 화체설의 교리에서 드러난다. 시작무렵에는 카톨릭의 교권을 지키기 위해 교회의 권위를 잠식해 들어가는 여성의 힘을 근절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개신교가 등장 무렵에는 신구교의 세력다툼으로 비화되었으며,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농민들의 반정부운동(엔클로저 반대운동)이 마녀박해로 전이되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마녀박해의 원인, 첫째는 마녀박해를 사회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기능론적(Functionalism) 입장이다. 둘째는 마녀에 대한 박해가 사회적 통제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사회 통제론의 입장이 있다. 그러나 마녀박해의 원인이 교회와 세속정부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배경의 혼란한 시기에 이단 척결을 위한 연장선위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다.

 

 

 

마녀에 대한 교회와 세속정부의 탄압

850년의 이탈리아 파비아의 교회회의, 1189년 프랑스 르앙의 교회회의, 1212년 파리의 교회회의 경고

13세기 교황의 이단척결 운동 '새로운 마녀'시대가 도래

교황 이노센트 3세의 교회법 재정

1307년 프랑스왕 필립 4'템플 기사단' 사건

 

마녀사냥의 절정기이자 박해가 가장 격렬했던 시기는 불행히도 종교개혁 세력과 이에 대항했던 카톨릭의 반 개혁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투쟁 시기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오를레앙과 노르망디 같은 개신교 지역도 마녀들의 온상지로 간주되었다

 

지나친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신앙의 위험성

 

18세기까지 계속 된 마녀 박해(최후의 마녀 화형은 1775년의 Kempten, 1782년의 Glarus, 1793년의 Posen)는 교회의 "악마론"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으로 군주들에게 악용되었고, 무지한 민중들에게는 자신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고발과 고소가 잇달았던 인간관계의 파멸을 가져왔다.

 

마녀로 고발된 자들은 교리와는 상관없이 가혹한 고문으로 인한 자백으로 비인도적이며, 비윤리적인 절차를 통해 전 사회의 광기에 의해 희생되어야만 했다.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비로소 마녀사냥도 종식되었던 것이다.

 

 

1) 종교재판소과 심문관(inquisitor)의 역할

1단계는 1세기부터 4세기에 걸친 사도 바울의 시대부터 박해의 시대

2단계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때부터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때까지

3단계는 1100년겅부터 1250년에 이르는 마니교적 이단 재생성시기

4단계는 이단에 대한 처벌시기로 이노센트 3세 교황의 입법시기

5단계는 반 사회적, 반교회적 성격의 카타르파와 왈도파 이단의 출현시기

6단계는 그레고리 9세 교황과 프레드릭 2세와의 협력과 '수도원의 종교재판'의 설립시기

7단계는 종교재판과정이 발전되고 고문이 사용되었던 이노센트 4세 교황시기

 

2) 12세기의 종교재판소 성립 배경

이단 세력이 과거의 그 어떤 이단 세력보다 그 세력이 확장되었다는 데 있다. 세력이 확장된 이단세력을 색출하고, 심문하여 개종으로 이끌기 위한 심문관의 역할의 커졌다는데 있다. 정치적인 이유이다.

1124,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프리드리히 황제 2세와 함께 공동으로 이단에 대한 사형 명문화

1231, 교황청 '종교재판관' 임명

1232년 프리드리히 2세의 이단색출 칙령

교황 그레고리 9세는 교황청이 직접 이단색출과 심문을 맡을 것을 주장하여 '종교재판소'라는 교황 직속의 독립된 기관을 설립

    

3) 이단 심문(inquiry)

종교재판소의 이단 심문관(inquisitor),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s) 와 프란치스코 수도회(Franciscans)의 탁발 수도사들(The Mendicant Orders)으로 임명된 이유는 탁발 수도회의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가 설교 활동이었기에 이들이야 말로 가장 휼륭하게 이단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판단에 근거했었다. 18세기 말경까지 유럽 대부분에 결쳐 이단퇴치를 위해 생겨난 이단 심문방법이 모든 종류의 피고를 재판하는 통상적인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총심문관(inquisitor general)의 지방 순회적인 성격

버나드 기(Bernard Gui : 1261-1331)이단심문의 실무

 

3) 재판과 처벌

로마교황 직속의 종교재판관이 성행시대의 이단자 처형은 성대한 축제였다. 이 축제가 스페인어로 '아우토 데 페(auto de f )' 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스페인의 이단심문 활동이 성대했다.

  

a. 재판

'사면기간

'은혜의 시간(Time of Grace)'

'신앙의 포고(Edict of Faith)'

참회의 길

 

b. 판결

고행

'혼잡의 벌(a poena confusibilis)’

감옥 투옥, 관대한 '넓은 감옥(murus largus)’과 가혹한 '좁은 감옥(murus strictus 혹은 durus 혹은 arctus)’

 

c. 사형

영혼구원, 교회의 보호 철회, 세속군주(화형)

 

d. 몰수 "재판은 크게 벌이가 되는 일(magnum emolumentum est justicia)“

4) 고문

중세 초기, 고문 허용의 로마법 폐지

11세기, 로마법 부활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는 합법적 고문 허용

14세기에 일반화

15세기에 완성

    

1단계에서는 손가락을 조인다.

2단계는 '긴박(緊縛)' 이라는 것으로 때로는 '매어 달기'가 되기도 한다.

3단계는 '() 으깨기'라고 한다.

4단계는 '스페인식 부츠'에 피고의 발을 넣는다.

5단계는 불에 의한 고문이다.

 

'철구두'(뜨겁게 한 쇠장화를 피고에게 신기는 방법. 때로는 그 두두를 신긴 발을 해머로 쳐서 으깨는 방법도 있었다), 펜치로 손톱 뽑기, 그 손뽑 자리에 바늘 꽂기, '물고문'(피고를 발가벗기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왼발 엄지발가락에, 왼손 엄지손가락을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묶은 후 연못이나 강 속에 던져 넣는 것. 만약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무죄의 증거이다. 그러나 가라앉지 않고 뜨면, 유죄이다), 머리에 바늘꽂기, 잠 안재우기 등이 있었다.

종교재판의 신학적 배경

1. 성서의 오용

2. 교권주의적 신학 _ 곤잘레스( Justo L. Gonzalez), 초기 교부 신학과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

십자군 전쟁이후 교회의 교권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교회는 폭력을 써서라도 그들의 정신을 계속 지배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개인이나 집단의 양심적 강성을 마구 억압하고 종교적 회의에 대해서도 논증과 설득이 아닌 몽둥이와 화형으로 대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의 비판을 자주해 온 존 위클리프(John Wycliff : 1320-1384), 프라하 대학의 총장인 요하네스 후스(Johannes Huss : 1369-1415)1415년에 산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신앙과 과학과 학술은 서로 어울릴 수 없었다. 화학을 마술이라 정죄하였고, 수많은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이 종교재판으로 희생되어야만 했다. 중세의 종교재판은 이러한 교권주의적 . 가부장적 신학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윤리를 제공하였다.

3. 열광주의(fanaticism)와 집단적 광신주의

어거스틴의 두 도성론과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나타난 '의로운 전쟁' 의 정당화된 폭력 논의는 중세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폭력을 통한 정의의 확보' 라는 논리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편승한 종교적 열광주의와 집단적 광신주의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그리고 신앙의 이름으로 갖은 고문과 처벌을 할 수 있었던 종교재판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십자군 운동은 이러한 열광주의와 집단적 광신주의가 표출된 사건이다. 면죄부의 문제가 이때에 일반화되었고, 고문과 이단자들의 처벌이라는 명목하의 종교재판으로 인해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내적, 외적 도덕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차지하고 있는 공통적 관심은 오직 '자기의 권리를 얻기 위한 것' 일 뿐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바이지만, 이상의 일련의 사건들(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마녀사냥)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에게는 자신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발판 기회였던 것이다.

 

절대주의(absolutism)

종교적인 배타성(religious exclusivism) _ 선민의식, 자기 우월주의(ethnocentrism)

'문화 위의 그리스도’ _ 그리스도 주권론

 

4. 성차별주의

이브적 관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를 '잘못 낳은 남성'(misbegotten males)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 _ 악마 = 여성= 마녀

결국, 중세 유럽에서의 마녀사냥은 교회가 탄생시키고, 성장시켜온 '여성 협오 전통' 속에서 여러 가지 요인들이 가미되어 발생한 집단적 광기의 역사였던 것이다.

    

 

마녀사냥

15세기부터 18세기초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에서 유래한 말. 십자군 전쟁 실패 후 사회불안과 종교적 위기가 계속되자 권력층과 교회는 주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멀쩡한 사람을 마녀 또는 악마의 사도로 몰아 대대적인 재판을 벌였다. 1950년대 미국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주도로 벌어진 '빨갱이 사냥'이 마녀사냥의 전형으로 꼽힌다. 이 사건 이후 마녀사냥이란 용어는 '권력자들이 도덕적 공황상태를 이용,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행위'를 의미하게 됐다. 1400년경부터 시작되어 1600년을 중심으로 하는 일세기 동안은 바로'마녀선풍'의 기간이었다.

 

이 기간을 절정으로 하는 마녀 선풍은 13세기 무렵에 프랑스에서 불기 시작하여 결국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 즉 서유럽 전역을 황폐화시키고 17세기 말에 그 여 파가 신대륙 아메리카에 퍼진 후 급속하게 진정되었다. 수만, 수십만의 마녀가 교살당하고, 혹은 교살당한 후에 불태워지고, 또는 살아있는 채로 불태워져 죽었다. 1590년에 독일을 여행했던 여행자는 적고 있다. 제네바에서는 3개월 동안 5백명(1513),트레이브즈(독일)에서는 7천명이 불태워진 탓에 두 개의 마을이 전멸되고, 다른 두 개 마을에서는 여자 2명만이 살아 남았을 뿐이다.(1580).

 

작센에서는 하루 사이에 133(1589), 알사스의 마을 상 아라만에서는 1년 동안 2백명 이상(1596), 라부르에서는 4개월 동안 6백명(1609), 스트라스부르크에서는 5천명(161555), 뷔르츠부르크에거는 8백명, 밤베르크에서는 15백 명..이러한 마녀선풍의 특이한 점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최전성기에 휘몰아쳤다는 것, 이 선풍의 선두주자였 던 이들이 교황, 국왕, 귀족, 당대의 일류의 대학자, 재판관, 문화인이었다는 것, 마녀의 존재가 옛부터 존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 그리고 공적 권위와 권력들이 전국적인 조직망을 둘러침으로써 행해졌다는 것, 1600년을 절정하는 전후 3, 4세기 동안에 한정된다는 것등이다.

 

마녀탄압의 가장 오래된 예는 기원년전 1200년의 이집트에서 있었고, 그리스에서는 데모스테네스의 시대(BC 4세기)에 한 사람의 마녀가 처형되엇고, 로마에서는 네로와 카라카라 황제에게 심하게 박해 받았고, 그리스도교에 개종한 직후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 AC 4세기)와 프랑크 왕구의 샤를르대제(AC 9세기)도 주술을 금지한 엄격한 법령을 선포하는 등, 마녀와 그 주술에 대해 탄압과 박해를 가한 예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는 마녀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반사회적인 범 죄에 대한 것이었다. 마녀 선풍기 이전에는 마녀에 대해 매우 관용적이고 탄압도 극히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마녀에 대해 온정적이기까지 하다.그러나 1300년을 경계로 하여 사태는 일변한다. 마녀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돌연 강경해진 것이다

    

이단심문제(異端審問制), 마녀재판의 모태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의 역사는 그리스도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오랜 것으로, 초기 교회의 교부와 교회회의도 점차 이단자 대책에 관해 의견을 표명하고 규정을 정하고 있다. 교회의 태도급변은 12세기 발발했던 대규모 과격 이단운동이 교회 당국에 던진 심각 한 충격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교황권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11981216)의 시대에 남프랑스의 이단운동이 격화되고 로마교회가 공황속에 내던져진 것이다. 원인은 교황권력의 강대함과, 성직자의 독선적인 우월감때문이었다. 이 무렵 성직자들은 부패와 타락에 빠져 있었다. 면죄부의 판매는 상식이 되고 영혼의 구제는 금전적 거래에 의해 행해지고 성찬례,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 임종의 희사, 그 외에 모든 의식은 그 본질을 잃고 형식만 남았다. 성직매매는 보통이고 성직자는 정부를 두었으며 참회실은 여자를 감쪽같이 유혹하는 밀실이 되고 수녀원은 적선구역이 되었다. 여기에 반항해 일어난 것이 이단운동이 었다.

 

12세기 남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적인 지역이었고, 많은 종파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자유로운 지역이었다. 이같은 자 류스러운 공기는 로마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고 그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높이는데 극히 합당했다. 혁신가들은 12세기 초부터 알비와 툴루즈의 마을을 돌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뼈대만 남은 로마교회의 모든 의식을 부정했다. 그리스도의 인성, 화체 설(化體說), 유아세례 등의 교리를 부정했다. 또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학살 도구이므로 불태워야 하며, 성직자 외경을 중지하 고 교회유지비 내기를 거부했다. 이들이 알비파들이다.

 

또 한 무리는 리용의 거상 피에르 발도(11401197)가 성서의 복음을 전한고 다닌 '리용의 빈자'라 불리는 일단의 개혁적 설교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어 간 일이다. 그리스도가 명한 것을 이살생활의 지도원리로 엄격하게 지키자는 발도파의 복음주의, 성서주의등은 교황과 성직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했고, 죽은 자에 대한 미사 , 기도, 포교 등의 일정한 의식은 무의미한 것이며 연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침상에서의 기도도 마굿간 안에서의 기 도도, 교회당에서 행한 것과 유효하고, 참회는 평신도도 청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적 개혁적 세력들의 원동력은 원시 그리스됴교적인 결벽하고 순수한 윤리감이었다. 그러나 인토켄티우스 3세가 즉위(1198)하면서 이단자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 설 것을 결의했고 이후 이단토벌군대인 '알비십자군'이 결성되었다.알비십자군은 1229년에 해산했다. 이 십자군에서 '이단심문' 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십자군이 탄생했다. 마녀재판에서 이 새로운 십자군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단심문(inquisitioher eticae pravitatis)제도는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이 임무를 맡는 적격자로 '도미니크수도회'가 뽑혔다. 이단심 문관(inquisitor)은 교황이 내린 칙서로 위신을 부여받아 이단추궁에 관한한 교황대리로서 교황권의 직접적인 엄호를 받게 되었 다. 그의 지배는 주교와 관리보다 우월한 동시에 그리스도교 국가 어느 지역에서도 절대적 권력과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단 심문 활동에는 각국의 세속권력이 관계되어 있었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 였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이단자의 몰수재산을 목표로 교회와 국가가 이단적발을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단자운동에 11, 12세기 무렵부터는 이단자를 재판하는 교회 법정에 '마녀'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재판받는 이단자의 죄상 중에 마녀적 인 행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239529일에 샹파뉴에서 이단자 약 180명이 불태워졌는데 그 죄상에는 " 악마의 도움을 요청했다"라는 마녀 행위가 첨가되어 있었고, 1275년에는 툴루즈에서 60세의 노파가 화형을 선고받았는데, 마녀가 악령과 성관계를 맺어 귀신 아들을 낳아 가까운 묘지에서 파낸 젖먹이의 살로 그 아들을 키웠다는 하는 행위, 1303년에 루브르의 입버회의는 프랑스왕 필립과 다투던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를 이단자로 고발했는데, 교황이 '심부름하는 악마'를 이용 해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거나 점장이나 예언가 등과 관계를 가진 마녀라는 것이었다.

 

이단퇴치의 열의에 불타고 있던 이단심 문관들은 그 활동범위를 마녀에게까지 확대시켜나갔다. 교황 요하네스 22세의 교서(1318227일자)"언제, 어디에서라도 마녀재판을 개시하고 계속하고 판결하는 충분하고 완전한 권능을 당신들 각자에게 부여하는 것이다"는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출발을 하였다. 요하네스 시대는 '교황의바빌론 죄수'시대(130977)로 교황의 권력은 국왕의 권력에 눌려 교황청은 로마에서 아비뇽(남프랑스)로 옮겨져 프랑스왕의 지배하에 있고, 로마교황을 주권자로 하는 카톨릭적 '세계정부' 가 붕괴될 위기상황의 시대였다. 또한 중세의 세계관이 붕괴되고 새로운 사상이 꿈틀거렸으며, 흑사병에 의해 인구가 급격히 감 소한 이후에 사회의 재편성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또한 봉건체제가 붕괴되면서 지방분권이 중앙 집권 체제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여기에종교개혁운동과 연결되어 '종교전쟁'이 서유럽 전체를 황폐화 시킨 사회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니 마녀사냥은 이 러한 정치적 문제와 시기를 같이한다. 마녀가 정치적 도구를 사용된 것은 템틀기사단(1119년 설립된 수도회, 성지순례의 보호와 성묘방위를 목적, 13세기 말 막대한 부를 축적)에 대한 마녀재판을 선두로 고문과 판결과, 화형 그리고 재산몰수가 행해졌다.

 

또 하나의 예는 잔다르크의 이단심문일 것이다. 영국·프랑스간의 '백년전쟁'과정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20세의 시골처녀 잔 다르크를 누군가가 미워하고 몹시 싫어하여 마녀적 이다자로 만들어내고, 그에 따라서 기적적인 프랑스군의 대승을 요술의 소행으 로 만들어 신성한 이단심문의 판결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이 처녀를 죽이려는 영국측의 정치적인 책략과 관계되었다. 처형의 날(1 431530)루앙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제시된 잔 다르크의 이단 내용은 '요술사''미신자''악마의 기도사'등이었다.

 

마녀재판은 실로 능률적인 이단심문의 간소화였다. 이러한 마녀재판은 이단심문으로서 출발했고, 이러한 것을 정당한 시켜 주었던 , 즉 마녀이단자,의 증명을 수월케 해준 것이 마녀의 망치(1485)라는 책이었다. 이것은 마녀재판의 확립을 위해 씌어졌는데,마녀재판관이 지녀야할 이론과 실천 양면에 걸친, '마녀의 모든 것'이었다. 이 책은 18절지의 포켓판으로도 만들어져 마녀재판관 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

 

"마녀는 악마와 맹약을 맺어 악마를 신하처럼 따르고, 그 보상으로 악마의 마력이 주어져 초자연 적인 요술을 행할 수 있다." 이러한 마녀에는 고상한 사상가에서 아래로는 독초를 따는 노파에 이르기까지 빈부귀천, 나이의 많고 적음, 남녀 성별을 불문하였다. 마녀 사냥의 희생자 중에 약 80%는 여자였고 그 중 대부분은 45세 이상의 이었다. 여성 이 많은 이유는 당시 마을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도와주며 긍적적인 역할을 하였던, 전염병이나 기근같은 일이 발생 하거나 불구가 되어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가축이 새기를 낳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이들에게 도움을 청 했다. 이들은 그들의 불행을 마법을 통해서 사라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마을 공동체의 생활이 유지도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는데 이러한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생활의 안정이나 마을 내에서의 영향력 을 가장 필요로 하던 사람들이었다. 대체로 늙고 가난하거나, 독신, 그 중에서도 과부인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경제적 곤궁이 더 심했기 때문에 더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 을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많은 숫자의 여성들이 희생을 당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여성들은 산파의 역할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는데, 위생조건이 열악했던 당시 사랑하는 부인이나 신생아가 출산 도중 사망할 경우 이들은 쉽게 분노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녀를 공격한다는 것은 기성의 기독교 사회가 새로운 지역에 그 세력과 영향력을 확장시킨다는 것을뜻하는데, 마녀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마을에서 도덕적, 정치적 권위를 선언하게 되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함으로써 마을 공동체 에서 기독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의미였다.

    

 

마녀재판에서 사용되어졌던 마녀의 행위

마녀집회(Sabbat) 집회시각은 밤중이다. 장소는 전설적으로는 독일의 브로켄산이 유명하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마을에서 떨 어진 들판, 숲속, 산꼭대기, 묘지, 빈집, 교회당, 시청사, 공회당등이 이용. 집회에 참석한 다수의 공범자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능률적인 부분.공중비행으로 출석하는 마녀는 나오기 전에 온몸에 특수한 연고를 바른다. 또 날을 때 타는 지팡이나 그 외의 막대기에도 바른다. 빠져나오는 출구는 일반적으로 창 또는 굴뚝. 집을 나오면 지팡이나 빗자루에 올라타고 하늘을 날아 국경을 넘어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의 집회장이라도 일순간에 도착한다. 그외 산양, 개 등의 동물의 등을 통해서도 옮겨진다

 

1. 악마예배 충성을 맹세하는 묘시로 마왕의 엉덩이 부분에 입맞춤을 한다. 예배가 끝나면 신참자의 입문식. 악마와 제휴하는 '계약'이 행해진다

 

2. 악마와의 '계약' '충성의 맹세''악마의 인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녀집회는 떠들썩한향연으로 옮겨지고, 식 사가 끝나면 춤을 춘다. 마녀들은 손을 잡고 원형을 만들어 춤추지만 일동은원의 중심에 대해 등을 돌린다. 따라서, 타인과 얼 굴을 맞대는 일이 없다.

 

3. 악마와의 성교 색마와 마녀와의 무차별 성교로 옮겨진다. 색마에는 여자마녀와 성교하는 남색마(incubus)와 남자마녀와 성 교하는 여색마(succubus)가 있다.

 

4. 마녀마크 신참마녀는 악마와 결탁한 표시로 몸의 어느 부분인가에 '마녀 마크'가 새겨진다. 이마크는 마녀재판에서는 중 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죄를 추정하는 유력한 증거이다. 대부분은 몸의숨겨진 부분에 새긴다. 남자의 경우는 눈꺼풀 안쪽, 겨드랑이 밑, 입술, 어깨, 엉덩이 그 외, 여자에게는 유방 또는 음부가 보통이다. 이 마크는 악마의 손톱으로 새겨진다. 이 마크 부분 은 감각이 없고 큰 침으로 깊게 찔려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에 침찌르기기 마녀 발견의 유력한 수단으로 중요시 되며 스코틀랜드에서는 침찌르기 업자의 정식 조합이 생겨나기도 했다.

    

마녀재판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을까?

체포 ·누군가가 어떤자의 이단죄를 재판관에게 고발하고 그 죄를 입증할 것을 자청한 경우 누군가가 어떤자의 이단죄를 고발은 했지만, 그 죄를 입증하거나 그 사건에 관계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경우 고발도 밀고도 없지만 어떤자의 이단에 대해서 '세상의 소문'이 있는 경우 '세상의 소문'은 용의자를 체포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1. 밀고 심문규정의 의하면 14세 이상의 남자, 12세 이상의 여자에게는 이단을 밀고할 의무가 있다. 이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은 '간접적 이단'이었다. 마녀재판의 기록에 부모자식, 부부, 형제, 사제, 주종이 서로 밀고하는 예가 많이 보인다

 

2. 자수 실제로 나가 자수하는 예는 극히 적었다. '몸의 결백'이 명백히 밝혀지리라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3. 투옥 체포된 용의자는 그대로 감옥에 넣어진다.감옥의 고통은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일종의 고문이었다. 피고들은 항상 고문의 공포와 동거하였다.

 

4. 재산수색 용의자의 체로, 투옥과 동시에 재산관리 공무원과 공증인은 용의자의 집을 방문하여 그 동산, 부동산, 채권, 채 무를 상세히 점검하여 기록에 남긴다. 이것은 재산몰수를 위한 준비이다. 이단의 본질과는 관계없이 이 재산몰수가 마녀재판의 실질적 이유였다해도 무방하다.

 

5. 증언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행하는 경우에 한해 증인으로 인정한다. 마녀도 다른 마녀의 죄를 증언할 수 있다. 마녀의 죄에 대해서는 모든 종류의 인간이 증인으로 인정된다 사춘기(14, 12)가 안된 어린이의 증언도 배척해서는 안된다. 뉴잉글랜드의 '세일럼의 마녀'(1692)의 증인 엘리자베스 파리스는 9, 아비게일 윌리암즈는 1, 안 파트남은 12세였다. 잉 글랜드의 '성 오시즈의 마녀'라 불린 사건(1582)에서는 실제로 6세부터 9세까지의 어린이의 증언조차 채택되었다.

 

6. 변호 변호를 허락하는 원칙은 있어도, 이단의 혐의를 자청해서 받으면서까지 변호의 임무를 받아들일 자가 없었다.

 

7. 대답할 수 없는 심문

당신은 마녀가 된 지 몇 년이 되는가.

마녀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선택한 남색마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악마에게 어떤 것을 서약했는가.

마녀집회에는 어떤 악마와 인간이 출석했는가.

집회에서는 무엇을 먹었는가.

당신의 공범자는 누구인가.

빗자루에 칠해진 연고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8. 고문 이단심문의 중추이다. 고문방법에는 세 단계가 있는제 제 1단계는 고문실에서 우선 피고를 나체로 만든다. 고문도구를 여러 가지 보여주어 위협한다. 몸을 꽁꽁 묶고 채찍질한다. '손가락 조기''사다리'등의 형벌로 고문한다. 단 이단계의 자백은 ' 고문에 의하지 않은 자백'으로 법정기록에 기록된다. 2단계의 자백은 '매달아 올리기''매달아 떨어뜨리기''뼈 부수기'등이 쓰 였다. 소극적 고문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기아, 불면, 정좌, 강제보행등이 쓰였다. 마녀재판의 구조를 여기까지 보면 첫 번째 마녀개념 그 자체가 어느 연대, 어느 지역에서도 공통된 보련적인 개념이었다는 것, 두 번째로 이 보편적인 개념을 토대로 범례에 따라 어느 재판관이나 같은 심문사항을 같은 방법으로 심문했다는 것. 즉 심문사항 과 심문 방법이 정형화되어 있었다는 고문에 의한 강요로써 날조였다.

 

9. 마녀재판으로 인해 들어오는 이익은 상당했다. 재판은 크게 벌이가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썩어가고 있는 이단자의 유해를 성직자들끼리 서로 빼앗는 일도 일어났다. 몰수재산은 관리의 손안에서 녹아 없어졌다. "잔인한 도살로 죄 없는 사람 들의 목숨을 빼앗고 새로운 연그물이 사람의 피에서 금은을 만든다"(코르넬리우스 루스 요술의 참과 거짓1592) 중세를 암흑과 잔학과 부정과 탐욕, 기만과 위선과 현학으로 물들였던 이러한 마녀재판은 보다 과학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출현 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세계국가'로서의 그리스도교적 유럽의 성속 양계의 권력지배자가 이제는 교회가 아니라는 점. 따라 서 이단심문이나 마녀재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 세속적 권력도 더 이상 동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 17세기에 정신과 물질이 두 개 의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이 인식되면서 사람들은 말이나 생각이 사물예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차츰 버리게 되었다는 점등으로 인해 엄청난 희생자를 낸 광란의 마녀사냥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것은 후에 매카시즘(McCarthyism)의 형태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마녀사냥은 통치를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다.

 

이 마녀재판의 근거는 현대에도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권력이 자기국민을 탄압할 때 사용하는 근거와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다. 마녀들은 단지 사악한 생각만으로도 남에게 해를 끼칠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 생각만으로도 처벌받았다. 중세의 마녀사냥과 이적표현물 소지만으로도 '의식화'라는 단계를 건넌 '빨갱이'로 처벌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처벌을 위한 자백을 받아내는 것도 '고문'이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은 기술자였다. 김근태를 고문했던 이근안이 가지고 있던 고문방법에 대한 기술(그는 칠성판을 자신이 발명했다며 자랑스러워 했다)이나 마녀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기술에 관한 마녀사냥꾼들의 저서 내용의 유사성은 자유를 탄압하기 위한 기술이 300년이라는 시대를 뛰어 넘어 전수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마녀들은 성직자와 귀족들의 정치적 무능과 부도덕에 대한 희생양이었다. 이들은 마녀를 사냥함으로써 소위 인민의 보호자가 되었다. 빨갱이로부터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는 국가권력이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고 국민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옛 안기부처럼 이단 심문소가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게 만들고 난 18세기에 와서야 인류는 계몽사상가들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가 보편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영국과 유럽의 마녀 사업

영국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 마녀가 하층계급 출신의 여자들, 특히 과부들 중에서 ``발견''되었다.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거나 마법을 부린다고 고발되기 전에도 그들은 재산없는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고발인들도 대부분 하층계급 사람들이었다. 영국 법체계는 마녀임을 확인하고 입증하는 역할을 맡는 전문직을 일시적으로 발달시켰다.(영국법에 의하면 마녀를 포함하여 어떤 범죄도 자백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증인의 증언이 있어야 입증되었다. 따라서 비밀스런 방법으로 진짜 마녀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전문적인 증인''계급이 생겨났다.) 영국 역사를 통틀어도 마녀로 사형당한 사람은 500600명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는 사정이 사뭇 달랐다. 수십만명이 마녀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그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자신의 범죄를 자백했다. 또한 그들의 다수는 가난한 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종종 그들을 귀족계급 상층부에 속했다. 마녀로 유죄판결을 받으면 그는 가족 재산을 완전히 상실한다. 마녀가 소유했던 많은 토지와 동산은 재판을 담당했던 공무원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대륙의 교회법에 따르면 유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마녀의 자백이 필요했기 때문에, 고문은 무제한으로 행해졌다. 고문은 언제나 자백을 이끌어냈고, 이를 본 일반인들은 마녀현상이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게 되었다. 고문은 또한 고발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마녀는 자백할 때 공모한 동료의 이름을 불어야 했던 것이다. 각 마녀마다 두세명의 다른 마녀의 죄를 실토함으로써, 화형장에 끌려가는 마녀의 수와 함께 교회국가의 새로운 지배계급에게 이전되는 재산과 중앙집권적 정치적 권위에로 옮아가는 권력의 양은 차츰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유럽대륙에서 마녀사냥은 주요한 사업의 하나가 되어갔다. 대륙법은 영국법과 같은 제한을 거의 갖지 않는 억압적 체제였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당국에 가해지는 제한으로 인하여 ``마녀 사업''은 훨씬 위험했고 이윤이 별로 나지 않았으므로 잠재적 고발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이 못되었다. 커리는 대륙법과 영국법이 차이나는 원인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블랙법의 사례에서 이에 대한 답을 시사받았다.

 

영국의 엘리트는 교회의 지원을 받는 대륙의 엘리트에 비하여 훨씬 파편화되어 있었고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대륙의 억압적 법체계는 이기적인 지배계급이 인민들의 공포에 기대어 그들을 조작함으로써 발달시킨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제약없는'' 과정을 통해 점점 부자가 되어갔고 점점 강력해져 갔다. 몇몇 조건의 결합으로 인하여 영국 공무원들은 이러한 연쇄적 부정을 저지를 수 없었다.

 

마녀사냥은 15세기초부터 산발적으로 시작되어 16세기말부터 17세기 들어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유럽 사회는 악마적 존재, 곧 마법의 집회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초기에는 희생자의 수도 적었고, 종교 재판소가 마녀사냥을 전담했지만 세속 법정이 마녀사냥을 주관하게 되면서 광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악마의 주장을 따르고, 다른 사람과 사회를 파괴한다는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17세기말 마녀사냥의 중심지였던 북 프랑스 지방에서는 300여명이 기소되어 절반 정도가 처형됐다. 마녀사냥은 그 극적이고 교훈적인 효과 덕분에 삽시간에 번졌고,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켰다.

 

마녀사냥의 물결은 15세기 이후 이교도의 침입과 종교개혁으로 분열되었던 종교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법과 마녀는 그 시대가 겪었던 종교적 번 민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던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종교적 배경과 함께 마녀사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중세 사회의 혼란이었다. 마녀사냥은 개인 적, 집단적으로 농촌사회가 분열되고 개인들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곤 했다. 종교전쟁, 악화되는 경제상황, 기근, 페스트의 가축들의 전염병이 당대 농촌사회를 휩쓸었던 불행의 목록이다.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았고, 마침내 불순한 사람들-마법사와 마녀의 불길한 행동-의 마법과 저주에서 찾아냈다.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해 심판관은 개인간의 분쟁을 악마적 마법의 결과로 해석하고 자백을 끌어냈다. 자백하지 않는 자에게는 공포심을 자극하는 심문과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마법사를 인정하는 방법 한가지를 보자. 용의자는 강이나 늪, 운하에 던져졌다. 만일 물위에 떠올 면 "역시 마녀야. 악마는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라며 즉시 처형했다. 물론 빠져 죽은 자는 결백한 자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악마와 마법 그리고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신념은 지배계급과 당시의 지식인인 신부와 법관들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었다. 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은 과부, 즉 여성이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이란 원죄로 각인 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을 자아낸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 쥘 미슐레 는 1862<마녀>라는 책에서 "마녀는 교회에 저항하고 억압받는 여인의 전형이며 자연과 육체와 의학을 이해했기 때문에 근대 과학의 어머니."라는 낭만주의적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의 진실

 

 

중세 유럽의 암흑시대인 13~17세기에 걸쳐 종교 성직자들과 이단 심문관들의 야만적 광기에 의해 저질러진 참담한 비극이었다. 통상 그 희생자는 최소한 몇 백만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아무런 죄도 없는 멀쩡한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녀로 몰린 희생자들은 처음에는 혼자 사는 과부, 노약자, 주술가(呪術家), 일부 정신병자에서 시작되었으나 점차 품위 있는 주부, 관리, 학자, 순결한 처녀나 어린 소녀, 노파 등의 남녀노소 ,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확대되어 나갔다.

 

1)중세에 교회 성직자들이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자 12세기부터 이에 대중들이 반발하고 교회의 부당한 권위와 횡포를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교회의 권위와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어 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를 탄압하고 억누름으로써 교회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단심문제도(異端審問制度)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각지의 주교(主敎)가 전담하던 이단자 색출작업이 이단 세력의 규모가 커지자 여기에 병행해 점차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의 칙령에 의해 이단 심문관들은 어디서나 이단자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심문할 수 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단자나 이교도들을 마녀나 마법사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2)당시는 중세 유럽을 휩쓴 전염병이나 가뭄, 기근 등의 자연재해와 교회의 폭압에 따른 사회적 불안, 체제 불만 및 저항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이를 해소시키기 위해 방출구로서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바로 그러한 희생양으로 선택되어 조작되어진 것이 마녀이다. 악마, 마귀, 마녀라는 대상은 교회 교리에 의해 기독교 세계인 중세 유럽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주입돼 있었으므로 이는 효과적이었다. 처음에는 이교도들이나 이단자들을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이 이처럼 사회적 광기에 휩쓸려 보다 폭넓은 마녀사냥 열풍으로 옮겨갔다.

 

3)마녀사냥의 주된 공격대상이 여성이었던 것은 -마녀로 희생된 사람의 80~90%가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여성은 원죄로 각인돼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악마의 심부름꾼이라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중세 사람들에게 있었고, 여성의 육체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면에서 교회권력이라는 남성 우월적 기득권 세력이 종교적 편견에 따라 나약한 여성을 더욱 차별하고 통제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측면이 있다.

 

우선 마녀로 체포되는 사람은 이단 심문관들의 직접적인 색출 외에도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 마녀로 의심된다고 고발을 하든가, 떠도는 불확실한 소문만으로도 체포될 수가 었었다. 예를 들면 교회를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녀로 의심되었고, 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은 위장된 마녀라고 단정되어졌다. 그리고 일단 체포된 사람은 스스로 마녀라고 자백할 때까지 잔인하고도 끔찍한 고문이 합법적으로 자행될 수가 있었다.

 

고문방법으로는 먼저 발가벗겨 나체로 만든 후 결박하여 바늘로 찌르기, 채찍질, 손가락 조여 뼈 부수기, 매달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기, 쇠로 만든 신을 신겨 쐐기로 다리뼈 부수기, 손발 잘라내기 등이었다. 이런 고문과정에서 마녀라고 자백하면 물론 마녀라고 인정되어 목매단 뒤 불태워 죽였다.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자백하지 않은 그 자체가 악마의 보호를 받고 있는 증거라고 단죄되었다. 한편 손발을 묶은 뒤 강이나 늪 같은 물에 빠뜨려 가라앉으면 무죄, 떠오르면 마귀의 도움이 있었으므로 유죄라는 어처구니가 없는 감별법도 사용되었다. 끝까지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산 채로 화형(火刑)시키거나 나체 상태로 날카로운 창으로 몸을 밑에서 위로 관통시켜 매단 채 죽였다.

 

이처럼 일단 한번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빠져나올 구멍이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녀재판에 몰려 처형된 사람의 재산은 몰수되어 그 지방의 영주(領主), 주교(主敎), 이단 심문관 등이 배분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매우 벌이가 좋은 장사였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가톨릭에서만 성행한 것은 아니었고 나중에 개신교 국가에서도 극심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며, 17세기 신대륙 아메리카에까지 넘어가 그 여파가 미쳐졌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도 마녀에 대해 증오를 나타내며 이를 부추긴 사실이 있으며, 저 유명한 프랑스의 성녀 잔 다르크마저도 이단 심문에 의해 마녀로 단정돼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렇게 고통 속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몇 백만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는 천상에서 온 빛의 존재들인 초자연적 능력의 소유자들, 예언능력자들, 약초를 다루던 민간요법가들, 마을과 남을 돕던 주술가 등이 마녀로 몰려 대량으로 희생되었다. 결국 중세 유럽의 마녀 사냥이란 어둠의 세력의 조종에 의해 광기에 휘말린 하수인들이 빛의 존재들을 이단이나 마녀로 정죄해 피비린내 나는 대량학살을 자행한 끔찍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마녀사냥과 중세 유럽의 민간신앙

    

마녀소동 / 마녀재판

13세기(1275년 최초의 마녀재판)에 시작되어 18세기(1714년 법률로 금지, 그러나 실제로는 1775년 최후의 마녀재판)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마녀 재판은 말 그대로 '광기의 역사'였다.

 

처음에 마녀재판은 '이단'에 대한 정죄의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종교적 의미의 이단만이 아니라 비종교적 차원의 '이단자'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져(교회와 국가기관의 결합-이단심문관/관료/사냥꾼), 16-17세기에 이르러 유럽 전역에서 광적인 소동으로 확산된다: 프랑스지역의 경우 예> 1557 툴루즈 40, 1582 아비뇽 18, 1581~91 로렌 900, 1609 4개월 400/ 독일지역 예> 1572 토리아 5, 1587~94 330명이상, 17세기초에 이르러는 수천명씩, 1631~36 어떤 지역에서는 300명 주민 가운데 절반, 밤베르크 1,600, 뷔르츠부르크에서는 3~15세의 어린이도 포함 / 미국에서는 1692년에 절정.

그 대상도 처음에는 늙은 여인들, 산파, 유랑자, 거지들, 떠돌아다니는 도제들, 하루벌이 노동자들에서 급기야는 명문귀족의 딸들, 공무원, 사제, 수녀, 여자상인들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마녀로 혐의를 뒤집어쓰는 그 이유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며,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참혹한 고문의 방법 또한 다양하고 어처구니없었다.

마녀소동이 벌어진 까닭?

마녀사냥의 공식적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 혹은 그리스도교적 세계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사탄의 세력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사실 마녀사냥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 사회질서 내에서 '이단자들'을 규정하여 배제해 왔다: 이단자, 문둥병환자, 유대인, 마법사, 남색가, 불구자, 이방인, 낙오자.

 

그러나 마녀사냥이 유독 16-17세기에 광적인 상태에 이른 현상과 그 실질적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이 시기 유럽은 한편으로는 길고 참혹한 전쟁과 종교개혁의 후유증으로 무력감이 만연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농촌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였다. 한마디로 중세적 그리스도교 유럽 세계가 동요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의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염병과 굶주림, 흉작과 가축의 떼죽음 등은 어둠의 세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라는 믿음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지배세력은 동요하는 사회질서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찾고자 했고 그 결과가 광적인 마녀사냥으로 이어졌다. 무질서와 사회적 해악의 책임을 '마녀'라는 희생양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유럽의 민간 신앙과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마녀사냥이 광적인 지경에 이르렀을 때 희생의 대상은 거의 무차별적이었지만, 본래 마녀사냥의 가장 주된 희생자들은 농촌사회의 나이든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민간요법과 민간신앙의 전수자들이었고 많은 경우 농촌 사회에서 치료자로서 산파로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마녀사냥이 진행될 때 이들은 특별한 악마적 의식(마녀제의)를 치르는 것으로 음해받았으나, 실제로 마녀제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느 전통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민간의식(치유, 출산, 농경주기와 관련된)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적 양식을 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한 지역의 공식적 교회의 성직자들만큼 많았으며, 공식적 교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 자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대개 노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살았던 이들은 이러한 역할을 통해 농촌공동체의 부양을 받음으로써 실질적 구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말 그대로 '마녀'라고 일컬어지는 경우에조차도 이들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보호함과 아울러 농촌사회 사회 자체를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그러나 마녀사냥은 이들의 역할을 해체함과 더불어 농촌사회 자체를 급격히 와해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그 결과 이어진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경쟁이 지배하는 메마르고 거친 사회였다.

오늘도 되풀이되는 마녀 사냥

불행하게도 마녀사냥이라는 광기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되고 있다. 하나의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려는 태도,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틀 안에 우겨 넣으려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는 태도이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문화는 '차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이 같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http://blog.daum.net/arrogant28/2229

http://blog.naver.com/dan11/30100261607

http://ko.wikipedia.org/wiki/%EC%95%85%EB%A7%88

http://www.agkdced.org/board/bbs/board.php?bo_table=05_&wr_id=10&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35&sop=and&page=2

http://www.agkdced.org/board/bbs/board.php?bo_table=05_&wr_id=15&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35&sop=and&page=2

http://www.agkdced.org/board/bbs/board.php?bo_table=05_&wr_id=6&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35&sop=and&page=2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