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오리엔탈
Ⅰ.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헬레니즘”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예술 세계가 중세에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며, “2부. 헤브라이즘”에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무슬림의 성장과 영향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1, 6부 고대 그리스 미술-2을 참조하세요.
1부. 헬레니즘 2부. 헤브라이즘 3부. 오리엔탈리즘
|
3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본 글은 중동지역과 이슬람 제국과 이슬람교로 한정하여 작성한다.
(다)
이슬람 문화 속 이슬람 과학과 미술
우리들은 이슬람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무슬림의 종교와 문화를 떠올린다. 특히 모스크에 장식된 아라베스크나 모자이크의 기하학적 무늬 혹은 아름답게 장식된 책의 글씨들은 무슬림의 생활을 엿보게 한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미술(Islam art)은 기독교 미술 혹은 불교 미술처럼 종교와 관련지어 좁은 의미에서 해석되거나, 르네상스 미술, 이탈리아 미술처럼 특정한 시대 혹은 특정한 지역의 민족 미술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이슬람 미술은 특정한 양식이나 운동을 지칭하지 않고, 종교의 의미를 넘어서 이슬람 문화 전체와 관련된 모든 미술을 통칭한다.
또한 서양미술이 예술가와 교회나 종교단체 등 특정한 후원자의 관계 아래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처럼 이슬람 미술도 이슬람교의 영향 아래 창조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슬람 미술은 반드시 무슬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신앙에 의해서 결정되지도 않았다. 또한 무슬림 후원자를 위해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혹은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위해 무슬림이 ‘이슬람 미술’을 창조했다. 즉 이슬람 미술은 7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슬람 문화 자체에 의해서 혹은 외지인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미술을 종교의 테두리 내에서 살펴보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슬람 문화의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이슬람교이기 때문이다. 7세기 초 예언자 무하마드는 아라비아반도 메카에서 유일신 알라의 예언을 받아 ‘신에게 순종’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슬람교를 세웠다. 그는 610년경 유일신인 알라에게 순종하는 사람, 즉 무슬림이 된다면 번창할 것이라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런 계시들이 아랍어로 ‘암송’을 뜻하는 코란으로 알려졌다.
이슬람의 교리 및 실천의 기본은 알라의 존재와 그의 예언에 대해 설명하는 육신과 무슬림들이 행해야 할 종교적 의무인 오주를 강조했다. 특히 이슬람 문화를 알려주는 이슬람 오주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먼저 “하나님 외에 신은 없고 무하마드는 그의 사도입니다” 라는 신앙선언을 함으로써 무슬림이 되고, 둘째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하여 정해진 시간에 절을 한다. 셋째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40분의 1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카드’가 있고, 넷째 단식을 하면서 음식을 소중함을 느끼는 ‘라마단’이 있다. 마지막으로 인생에 한번 메카를 방문하는 성지순례가 있다.
그럼 오주와 이슬람 미술 혹은 이슬람 과학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무슬림이 사는 곳은 주로 사막이다. 대부분의 무슬림은 사막에 살면서 유목민들처럼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사막생활을 통해서 신기루를 비롯한 광학 현상을 목격하고, 사막의 강한 바람 때문에 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들은 낮에 햇빛을 가려주고 밤에 이불과 담요 역할을 하며, 성지순례 도중 예배를 위해서 어디에서나 바닥에 까는 생활용품이 필요했다.
무슬림은 생활조건에 따른 잦은 눈병을 치료하는 과정 중 눈과 시각현상에 대한 많은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븐 알하이탐(Ibnal-Haytham, 965?-1039)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과 수학적, 해부학적 전통을 결합시켜 이슬람 광학을 체계화시켰다. 또한 그는 시각 현상 이외에 무지개, 후광, 거울 등 광학에 대해서 광범위한 연구를 했다. 그의 연구 성과는 베이컨, 케플러 등을 비롯해서 서구의 많은 광학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무슬림은 생활용품으로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 그것은 코란처럼 인물이나 동물의 형태가 쉽게 드러나 있지 않고, 다만 여러 가지 색깔의 동물이나 식물을 상징하는 기하학적 무늬가 있을 뿐이었다. 또한 무슬림은 사막과 같이 광활한 공간에서 살기 때문에 빈 공간에 대한 공포감, 즉 심리적인 불안감을 완화하기 위해서 태피스트리의 공간을 빽빽이 채웠다. 즉 무슬림은 자연 조건에 의한 심리적 불안감에서 회화나 태피스트리를 만들 때 원근감을 주지 않고 상하좌우 대칭 구조에 따라서 공간을 빽빽이 채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미술은 서양미술과 다른 커다란 특징이 있다. 서양미술이 회화나 조각을 통해서 기독교 문화의 창조에 힘썼다면, 이슬람 미술은 거창한 그림이나 조각을 통한 미술 발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슬람에 서양처럼 새롭고 획기적인 시도를 하려고 했던 미술가들이 없었기 때문일까.
서양미술에서 기독교 교회는 예술의 후원자로서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무슬림도 기독교인들처럼 그들의 종교에 매우 헌신적이어서, 유일신의 존재를 위협할 만한 그림이나 조각들을 계율에 반하는 것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슬람교에는 기독교 미술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에 비교될 만한 제도가 발전하지 못했다. 즉 세속의 통치자와 개인들이 무슬림들의 종교에 대한 경의를 살필 수 있도록 기하학적 무늬인 아라베스크와 모자이크로 채워진 모스크 건설과 예술품을 의뢰하기는 했으나, 기독교의 교황이나 주교처럼 공식적으로 의뢰할 만한 성직자가 이슬람교에 없었던 것이다.
제도적 틀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이슬람 과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과학은 중세 초기에 그리스 과학을 잘 보존, 소화하여 서유럽에 넘겨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그리스 원전을 수집하고 번역해 그리스 과학을 소화하고, 그것에 동양의 과학적 전통을 융합시켜 자신들의 수학적, 역학적, 연금술적 독창성을 일구었다. 즉 무슬림은 적극적이고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이슬람 과학을 형성한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 과학은 독자적인 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슬람 미술과 유사하게 보수적 종교 세력의 탄압뿐만 아니라 국가적 혹은 종교적 차원의 적극적인 후원을 계속해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거대한 회화나 조각 대신에 신의 계시를 옮겨 적은 책을 통해서 자신들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서양에서 부차적이고 정신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에 코란을 그림이 없는 글씨들로 가득 채웠으나, 이후 코란을 읽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신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딱딱한 글씨 대신에 아름답게 장식한 글씨들이 탄생했다. 이슬람에서 특히 발전한 연금술에 관련된 서적의 그림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건물에서 동전까지 모든 예술품에 글이 덧붙여지면서 글쓰기에 담긴 의미가 다른 예술 형태로 전이되었다.
이슬람은 1000여년 이상 큰 변화 없이 보존된 모스크 같은 거대한 건축물이나 예배를 위해 필요한 태피스트리 등을 통해서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갈구 혹은 이슬람의 문화적 전통을 키워나갔다. 즉 그 속에 자신들의 고유한 독창성을 통해 이슬람 과학을 발전시킨 것처럼 이슬람 미술을 발전시킨 일면이 잘 나타난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과학
헬레니즘 문명권의 여러 지식들이 이슬람권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의 자연 철학 내용을 담은 서적들이 7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이들의 번역에는 정교하고 긴 주석이 덧붙여지게 되어, 독특한 색체를 띤 이슬람 과학의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이븐 알하이삼의 생리학적인 광학이나 연금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스 과학의 보관창고였던 이슬람과학
이슬람의 광학
연금술의 발전
중세 유럽의 과학
1085년 십자군이 스페인 지방의 톨레도를 탈환함으로써 서양의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문화적 접촉이 매우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번역되어 연구되던 서양 고대 과학의 내용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갑자기 유입된 방대한 지식을 배우고 전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중세의 대학이 탄생했다.
중세가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제공한 통찰
근대 과학은 고대ㆍ중세과학의 연속선상인가?
과학과 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비판
중세 대학
오리엔탈리즘 왜곡의 역사,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 (croisade)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해진 대규모의 군사 원정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레콩키스타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 등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 ~ 1187년 및 1229년 ~ 1244년뿐이었다.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십자군은 의로운 군대로 이 전투는 성전이 되지만, 실제로는 이슬람 세계의 여러 나라들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었던 동방정교회의 나라들까지 공격해 들어간 침략군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십자군 운동은 처음의 순수한 열정과는 달리 점차 정치적·경제적 이권에 따라 움직이면서 순수함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교황은 교황권 강화를, 영주들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등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성향이 반영된 전쟁이었다. 사자심왕 리처드 등 서유럽의 대표적인 세 나라의 군주들이 함께 참가한 제3차 십자군이 가장 유명하고, 그 절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라틴 제국을 세운 제4차 십자군이었다.
약탈되어 온 유물, 서적들은 당시 암흑시대를 지내고 있던 중세에 큰 영향을 끼쳐 훗날 르네상스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과거 십자군에 의한 침략과 학살, 약탈행위 등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군중 십자군 (1096년)
제1차 십자군 원정 (1096년~1099년)
제2차 십자군 원정 (1147년~1148년)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년~1192년)
리보니아 원정
독일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1202년~1204년)
알비주아 십자군 (1208년)
제5차 십자군 원정 (1218년~1221년)
프러시아 원정
제6차 십자군 원정 (1228년~1229년)
제7차 십자군 원정 (1248년~1249년)
양치기들
제8차 십자군 원정 (1270년)
어린이 십자군
제9차 십자군 원정
아라고네스 전투
알렉산드리아 전투
니코폴리스 전투 (1396)
북방 십자군(1147, 12c)
후스파 전투
바르나 전투
오트란토 전투 (1480-1481)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1663)
레판토 해전 (1571)
빈 전투
십자군 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이슬람권의 결집이다. 초창기 십자군의 연전연승은 당시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드 앗딘 장기(통칭 장기)나 살라흐 엣 딘(통칭 살라딘으로 불림)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이슬람권은 세력을 결집하여 십자군에 반격을 하여 그들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당시 살라딘은 예루살렘 점령시 피정복민들에게 관용을 보였고, 이는 이슬람이 대중들의 지지를 받게 했다.
두 번째는 십자군의 잦은 와해와 그로써 야기한 내부 분쟁이다. 십자군은 상호 간, 또는 내부에서 국가 간 대립 및 영토와 경제적 이익 등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는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자라시를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점령한 적도 있다.
또한 무지와 광신, 편협성을 버리지 못한 십자군의 잦은 횡포는 당시 성지의 백성들과 같은 기독교권이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신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거창하게 시작되었던 처음과는 달리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끝에는 초라하게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서 십자군들이 벌인 동방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 그리고 정교회 성당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무례함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교인 동방정교회와 십자군 기사들의 종교인 로마 가톨릭 간의 대립이 더 심하게 고착되어, 1054년에 있었던 교회 역사 최초의 분열 사건인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간의 분열이 고착화되게 했다.
비록 십자군은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서유럽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이들이 획득한 부는 당시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여 상업과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과 함께 교황을 지지했던 세력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과 지지 세력들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중세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던 정치적 통합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교황과 지지세력의 영향을 벗어나 지역 중심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프랑코 제국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통합이 약화되자 유럽의 각 나라들은 자국 왕권을 강화하여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중세는 해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유럽에서는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국가과 동로마 제국의 후계인 비잔티움제국에서 약탈한 물건들이 발전에 기여했다. 서유럽 중심의 십자군은 기독교내에서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깊은 골을 가져왔고,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전에 없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극단적인 적대 태도가 서유럽에 남게 되어 지금까지 그 불씨가 전해진다.
인문주의 [humanism]
또는 인본주의(人本主義)는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본적으로 세계는 신이 지배한다는 신본주의(헤브라이즘)에 반대하며,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람 중심의 생각에 뿌리를 두는 정치· 사회사상이다. 인간주의(人間主義), 휴머니즘(humanism) 등으로도 부른다. 또한 이를 중시하는 사람을 인본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라고 부른다.
과학혁명
5, 16세기 서구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함께 과학의 부활도 가능하게 했다. 이는 다시 그리스 과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가능하게 했고, 점차 비판적인 안목도 키워주었다.
그 결과 16, 17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리스 시대의 과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과학의 토대가 형성되는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 부흥, 학예 부흥은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을 말한다.
과학 혁명의 토대가 만들어져 중세를 근세와 이어주는 시기가 되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유럽은 르네상스의 시작과 더불어 기나긴 중세시대의 막을 내렸으며, 동시에 르네상스를 거쳐서 근세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 혹은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으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페인 등지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은 이 운동에 거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 때는 '절정기', '융성기'를 뜻하는 것이다.
간다라미술, 오리엔트 그리고 헬레니즘 문화
간다라 지방은 원래는 고대에 인더스강 서안(西岸)과 바조르, 스와트, 부네르 계곡을 아우르는 페샤와르 북서쪽의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이 지역은 서아시아 및 중앙 아시아에서 인도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이 지방에는 알렉산더, 박트리아, 파르티아의 침입으로 그리스 문화가 일찍부터 전파되었습니다.
간다라 미술은 이 지역을 넘어 인더스 남쪽 고대 탁실라와 마니얄라 지역에까지 퍼졌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BC 3세기 이후부터 생겨났으나, 불상은 간다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때까지 불타는 오직 보리수[菩提樹]·스투파·법륜(法輪)·보좌(寶座) 등 상징적으로만 표현되었을 뿐이다. 그 후 이것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간다라불상이라고 한다.
간다라불상에서 특이한 것은 머리카락이 고수머리가 아니고 물결모양의 장발이라는 점과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것이 마치 서양사람과 같다는 점이다. 또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졌고 그 모양이 자연스러워 형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즉, 간다라 불상의 표현은 그리스풍의 자연주의·현실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이것의 역사적 근거로는, 이 지방에 알렉산드로대왕의침입(BC 327~BC 326) 이래 BC 2세기부터 AD 1세기에 걸쳐서 그리스인·샤카족(族)·파르티아족·대월지족(大月氏族)이 잇따라 진출하여 그리스계의 문화가 이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간다라 조각 중 제우스·아테나·헤라클레스·아틀라스, 그 밖에 그리스적 주제가 담긴 상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도의 불교 문호와 그리스의 문화가 결합되어 그리스·로마풍의 불교미술인 간다라 미술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간다라 미술은 알렉산더의 제국에서 발달한 헬레니즘 미술에 가깝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오리엔탈리즘
http://mirror.enha.kr/wiki/%EC%98%A4%EB%A6%AC%EC%97%94%ED%83%88%EB%A6%AC%EC%A6%98
http://ko.wikipedia.org/wiki/%EB%8F%99%EC%96%91
http://mirror.enha.kr/wiki/%EC%95%84%EB%9E%8D%20%EB%AC%B8%EC%9E%90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Caliphates?uselang=ko
http://mirror.enha.kr/wiki/%EB%AC%B4%EC%8A%AC%EB%A6%BC
http://ko.wikipedia.org/wiki/무슬림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A%AC%EB%9E%8C%EA%B5%90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C%8A%AC%EB%9E%8C%EC%9D%98_%EC%97%AD%EC%82%AC
http://ko.wikipedia.org/wiki/%EC%88%98%ED%94%BC%EC%A6%98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Sufism?uselang=ko
http://k.daum.net/qna/view.html?qid=016dB&q=%C0%CC%BD%BD%B6%F7%B9%CC%BC%FA
http://k.daum.net/qna/view.html?qid=016dD&q=%C0%CC%BD%BD%B6%F7%B9%CC%BC%FA 공예
http://www.mu-um.com/history/detail1.php?bid=hist_w&idx=173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20%20%20%20%20&qid=2f3Jf&
http://k.daum.net/qna/view.html?qid=016d9&q=%C0%CC%BD%BD%B6%F7%B9%CC%BC%FA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201&no=1372&page=164&sm=
http://k.daum.net/qna/view.html?qid=016d5&q=%C0%CC%BD%BD%B6%F7%B9%CC%BC%FA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C%84%B8_%EC%9C%A0%EB%9F%BD%EC%9D%98_%EA%B3%BC%ED%95%99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atidx=0000012956
http://ko.wikipedia.org/wiki/%EB%A5%B4%EB%84%A4%EC%83%81%EC%8A%A4
http://ko.wikipedia.org/wiki/%EA%B3%BC%ED%95%99_%ED%98%81%EB%AA%85
http://ko.wikipedia.org/wiki/%EC%9D%B8%EB%AC%B8%EC%A3%BC%EC%9D%98
http://ko.wikipedia.org/wiki/%EC%8B%AD%EC%9E%90%EA%B5%B0_%EC%A0%84%EC%9F%81
(다) 끝
3부 끝.
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 |||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
고대 로마 (753~476 BC)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 |||
| |||
아메리카 문명 (300~1533) | |||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헬레니즘”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예술 세계가 중세에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며, “2부. 헤브라이즘”에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무슬림의 성장과 영향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1, 6부 고대 그리스 미술-2을 참조하세요.
1부. 헬레니즘 2부. 헤브라이즘 3부. 오리엔탈리즘
|
4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에서 계속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맑음의 정신병자 > 중세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미술 2,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2 (0) | 2013.02.26 |
---|---|
중세 미술 2,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1 (0) | 2013.02.25 |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 나 (0) | 2013.02.23 |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 가 (0) | 2013.02.23 |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0) | 201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