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오리엔탈
Ⅰ.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헬레니즘”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예술 세계가 중세에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며, “2부. 헤브라이즘”에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무슬림의 성장과 영향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1, 6부 고대 그리스 미술-2을 참조하세요.
1부. 헬레니즘 2부. 헤브라이즘 3부. 오리엔탈리즘
|
3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본 글은 중동지역과 이슬람 제국과 이슬람교로 한정하여 작성한다.
(나)
이슬람의 황금 시대
이슬람 문화는 이슬람교를 기초로 하여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나, 페르시아·인도의 여러 문화를 받아들여 성립된 일대 총합 문화이며, 중세 및 르네상스기의 서구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줌으로써 그 역사적인 의의는 매우 크다. 무함마드의 사후 《꾸란》의 해석을 통해 법학이나 신학이 성립되었지만, 옴미아드 왕조 때부터 외래 학문의 이식이 시작되고, 아바스 왕조 시대가 되면서 그리스어 문헌 번역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철학·수학·과학의 연구가 발달했다. 특히 제7대 칼리프인 마문(재위 813~833)이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을 세우고, 그리스어 문헌의 수집 및 번역을 장려하게 되자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 문화 활동에 종사한 사람은 아랍인보다도 오히려 피정복민이었으며, 특히 페르시아인의 역할이 컸다. 이슬람 문화의 전성기는 9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서이며, 12세기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화학 _ 연금술(鍊金術)
문학 _ 《천일야화(Arabian Nights)》맘루크 왕조 시대
건축 _ 비잔틴 양식이나 페르시아 양식의 건축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독자적인 종합적 이슬람 건축 양식을 만들어 놓았다
이슬람의 건축과 그림에 나타난 뛰어난 미적 감각과 과학기술
이슬람 건축
시각적 예술의 최고 위치를 차지한다. 이슬람 건축은 크게 확대된 종교적ㆍ사회적 기능에 부응하여 건립된 건축물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이슬람교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시각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어디에서나 예배를 드렸다. 무하마드 사후 50년간 그들의 기도장소는 먼저, 종교적 목적으로 빼앗은 교회나 두 번째로 페르시아의 기둥으로 된 홀, 마지막으로 울타리나 개천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 장소 등으로 다양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슬람의 사원들은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된다. 코란에서는 사치와 방종을 하지 말라고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기와 화려함으로 비 이슬람교도들의 조상의 힘을 능가해 보임으로써 그들의 힘을 시각적으로 상징화하려는 욕망에 대규모 건물을 정복지에 축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초기의 몇몇 이슬람교 사원의 거대한 크기는 그 건물이 한 도시의 모든 이슬람교도를 수용하고자 의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도시에서는 때때로 이슬람교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슬람교사원이 넓어져야 했다. 이어 이러한 확장을 쉽게 해줄 수 있는 구조적 기술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것에서 이슬람의 건축은 많은 발전과 변화를 가지게 된다.
이슬람의 건축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1)가 주축을 이루었다. 모스크는 대표적으로 ‘꿉바(Qubba)’라고 불리는 둥근 지붕인 돔과 ‘미나렛(Minaret)’이라고 부르는 첨탑을 특징으로 하며, 내부는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사실 돔이나 첨탑과 같은 건축양식이 이슬람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공동체가 점차 확산되고 정복을 통해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주변의 비잔틴이나 페르시아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특유의 모스크 건축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모스크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인 돔은 대부분 학자들이 비잔틴 건축양식의 영향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랍 민속학자들은 이미 이슬람 출현 이전에 아랍 유목민들이 낙타의 등 위에 싣고 다니던 조그만 가죽 천막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완만한 선이 의미하듯 모스크의 돔은 평화를 상징한다. 돔의 끝은 보통 초승달로 장식하는데 초승달은 샛별과 함께 이슬람의 대표적 상징이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한다. 즉, 무함마드가 최초로 계시를 받을 때 초승달과 샛별이 한데 어울려 떠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때부터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게 내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스크 건축양식의 또 다른 특징인 첨탑은 기능면에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하나는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무앗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 첨탑 위에 올라가 ‘아잔’2)을 외쳤다. 높은 데 올라가 소리칠수록 멀리까지 잘 들리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기능은 이방인들에게 그 지방의 모스크 위치를 쉽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높은 첨탑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길을 모르는 외지인이라도 이 첨탑을 보고 모스크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첨탑의 양식은 지역에 따라 사각형, 나선형, 원통형 등 모양이 다양하다.
돔과 첨탑 등 화려한 외부구조와 달리 모스크 내부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돔이 받치는 내부구조는 기둥이 필요 없기 때문에 ‘싼’ 이라 불리는 운동장과 같은 넓은 공간이 펼쳐지며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든 모스크들은 단순하나마 일정한 구조물을 갖추고 있다. 사방의 벽면 중 한쪽 벽면에는 아치형으로 움푹 패인 벽감이 있다. 이를 ‘미흐랍3)’이라고 부르는데, 예배를 보는 방향 다시 말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을 나타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따라서 전 세계의 모든 모스크들은 메카 방향을 향해 모스크가 건립된다.
미흐랍의 바로 오른쪽에는 계단 형식의 설교대가 있어 ‘민바르’라고 부른다. 금요일 합동예배 전에 ‘카팁’이라고 불리는 설교자가 이 설교대에 올라가 설교한다. 한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은 모스크의 양 측면이나 뒷면 혹은 2층에 마련되어 있는데 보통은 커튼이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모스크 내부 장식 중 특이한 것은 인물이나 동물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인물이나 동물의 조각은 물론이요, 인물이나 동물을 묘사한 모자이크나 프레스코 벽화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꾸란 59장 24절의 하나님만이 진정한 ‘창조주’로서 인간이나 동물을 만들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조각이나 그림은 자칫 잘못하면 우상숭배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의 우상숭배 경계 때문에 모스크 내부 장식에서는 인물상 및 동물상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양의 아랍어 꾸란 장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위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꽃문양에 기초한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모스크 벽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결국 이슬람은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 때문에 회화는 발달하지 못했지만 대신 서예와 조형미술이 발달한 셈이다.
이슬람 건축의 시대 흐름
① 이슬람 초기 건축
이슬람 초기, 몇 세기에 걸쳐 건축분야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업적은 공공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스크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모스크는 햇볕에 구운 벽돌로 지어졌으며, 사각형의 안 뜰과 동쪽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 남쪽과 북쪽으로는 대추야자나무로 만들어진 짧은 주랑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초기 이라크 모스크의 형태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스크의 안뜰에는 무슬림 공동체의 금고로 쓰인 작은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에 시리아와 이란, 이집트에서는 교회나 다른 종교의 예배당을 모스크로 개조하기도 했다. 현존하는 최초의 이슬람 유적은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 있는 바위의 돔 (Dome of the Rock, 691년) 이다. 원래 이 터는 유대교 사원의 자리였다. 바위의 돔은 이슬람의 승리를 강조하고,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리스도교 성소들과 경쟁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건설된 것이었다. 이 돔에는 건축양식과 규모, 건축 기술과 장식, 그리스도교 적인 문장을 포함하는 ‘꾸란’ 의 명각 등 다양한 종교적, 예술적 기법들이 시도되었다.
② 우마이야 왕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들은 여러 채의 훌륭한 궁전을 세웠다. 대부분 요새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대리석판과 모자이크로 풍부한 장식을 한 것이 보통이다. 이슬람이 새롭게 획득한 힘은 다마스쿠스의 알 왈리드 1세(706-714)에 의해 건축된 다마스쿠스4)의 대모스크 (Great Mosque of Damascus)에 잘 나타나있다. 이 모스크는 고대 로마의 성소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그 로마 성소에서 나온 건축 재료들을 재활용 한 것이다, 예배공간은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법정이나 교회당으로 쓰인 옛 로마의 장방형 회당)교회들을 모방한 듯하다. 바위 돔 모스크와 같이 이들 모스크의 중요장식은 모자이크로 이루어져있다. 안 뜰은 조형물처럼 입체감을 살린 모자이크와 그림, 치장 벽토 조각, 헬레니즘 전통을 따른 석조조각들로 장식 되었다.
③ 초기 압바스 시대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진 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인 알 만수르는 수도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바그다드는 원형으로 설계된 도시였다. 목조 기둥이 편평한 지붕을 받치고 있는 100㎡의 모스크가 도시 중심부에 건설되었고 200㎡의 칼리프 궁전이 키블라 쪽을 향해 서 있다. 이어 바스라·쿠파·와시트·메르프 등 그 밖의 도시에서도 이런 설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거대한 궁전복합 단지와 같은 유적에는 모스크와 목욕탕, 접견실, 주거지역등이 드넓은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궁전과 주택에 가장 즐겨 사용된 장식은 치장 벽토이다. 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포도나무 이파리 모양의 자연주의적인 형태와 정교한 부조, 그리고 빗각 문양의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반복되는 문양을 지닌 추상적인 형태는 이슬람식 디자인에 새롭고 폭넓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략 이 무렵 38개의 첨두형 아치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아케이드 위에 볼트형 천장을 덮은 구조의 건물로서는 세로 처음으로 라물라의 저수지(789)가 건설되었다. 827년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모스크(알푸스타트 소재)가 2배 크기로 증축되어 세로 109m, 가로 120m에 이르렀다. 지금 남아 있는 장식은 얼마 안 되는 이음들보나 목조 프리즈에 남은 부조만을 들 수 있다. 이 장식은 시리아의 헬레니즘 미술에서 유래한 말기 아칸서스 무늬로 구성되어 있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모스크과 마찬가지로 알카이라완의 대사원도 초기 이슬람 시대에 창설되었다.
압바스 왕조가 통치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폭넓은 이슬람 지역에서는 또 다른 건축양식들이 나타났다. 이른바 아홉 개의 돔으로 된 모스크 (셋 또는 네 면이 개방된 조그만 모스크)로부터 리바트묘역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이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 동안 그리스, 로마와 사산 왕조의 전통들이 이슬람식 형태와 기능에 반영되어 무슬림에 전파되었다.
④ 11~15세기의 이슬람 건축 (무슬림 제국의 신 건축 양식)
10세기부터 투르크족이 이란 쪽으로 이동하면서 건축 유형과 건축 설계 구조에 혁신을 가져왔다. 수도 이스파한에 있는 셀주크 왕조 최고의 모스크인 이맘 모스크는 중요한 두 가지 변화를 수용했다. 그 하나는 우선 두 가지 돔을 추가로 건설한 것이다. 돔들의 기능은 분명하지 않지만, 왕족의 예배실이나 담소를 나누는 방으로 쓰인 듯하다. 두 번째는 시아 이스마일파가 수니 사상의 중심지였던 대 모스크를 불태운 1121년에서 1122년 뒤에 일어난 변화로써 각 안뜰 장면에 이완5) 하나를 추가로 건설했다. 이와 같이 이완이 네 개인 설계 방식은 공간에서 새로운 교차축을 건설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 당시의 건축을 대표하는 셀주크 양식과 이란의 후대 모스크 양식, 마드리사나 병원 건물과 같은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다. 단일한 돔 양식과 네 개의 이완에 대한 관심은 이슬람 이전의 건축양식이 부활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⑤ 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의 시아파 교리와 왕궁의식은 모스크의 설계와 장식에 그대로 반영 되었다. 두 개의 거대한 대규모 집회용 모스크인 알 아즈하르 모스크와 알 하킴 모스크가 수도 카이로에 현존한다. 파티마 왕조 초기에 건설된 많은 묘지들은 파티마 칼리프제의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알리 자손들의 조상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티마 왕조는 11세기 중반 이래로 카이로에 정면을 정교하게 돌로 조각한 소규모 모스크들을 건축했다. 이 같은 세속적인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것은 카이로 외곽 성벽에 돌로 만들어진 세 개의 문 이었다. 이것들은 시리아의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군사 건축물과 유사하다.
⑥ 맘루크 왕조
예전 왕조들의 건축양식과 장식은 맘루크 왕조에 이르러 한 층 수준이 더 높아진다. 맘루크 왕조에서 가장 많이 지어진 건축물은 묘지 복합 단지들로, 대게 후원지의 묘역 주위에 모스크와 마드라사, 병원이 잇따라 건설 되었다. 카이로에 있는 술탄 하산 복합단지는 규모와 돌조각 장식이 보여주는 역동성이 인상적이다. 복합단지들은 15세기 무렵에 이르러 그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맘루크 왕조 특유의 돌 조각 돔과 다각형 첨탑 양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이로에 있는 카이트바이(1472-1475)복합단지이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독특한 양식에도 불구하고 돌 양식은 물론 묘지 복합 단지의 설계와 돔 형태, 기념 건축물의 문들은 당대의 이란 및 아나톨리아 건축양식과 관련이 있다.
이슬람 미술
이슬람교와 같이 진행되고 발전되었다. 엄격한 일신교 체제하에 나타나는 신의 구체적 표현 억제와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는 회화와 조각상들의 부정적 태도가 있었다. 그래서 종교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불상이나 예배상은 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상금기는 조형예술에 추상적 형태를 널리 채용하는 경향을 낳아 아라베스크 등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나 정교한 장식공예의 발달을 낳았다.
또한 이슬람 미술은 하나의 융합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슬람 출현 이전의 아랍 유목민들에게는 조형예술 문화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이슬람은 정복한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조형예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 중앙아시아에서 각각 건축술과 공예, 직조술, 세밀화(細密畵) 등의 기법이나 모티프를 수입해 이슬람 미술의 기반을 구축하고, 여기에 그리스나 비잔틴의 다양한 미술요소들을 첨가했다.
아라베스크(Arabesque)
이슬람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라베스크’인데 아라비아 풍이라는 뜻으로 이슬람의 사원, 공예, 염직 등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서 나타난다. 아라베스크란 장식무늬의 일종으로, 좁은 의미로는 이슬람 공예나 건축의 평면 장식에 사용하는 아름다운 곡선과 부분적인 직선, 혹은 직각으로 된 좌우대칭의 무늬를 말하며, 넓은 의미로는 유동적인 선에 꽃이나 과실, 짐승, 인물을 섞은 공상적인 무늬를 말한다. 이 양식은 형상 숭배에 반대하반대하는 이슬람 문명의 중요한 예술적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라베스크는 비잔틴 제국을 통해 유입된 헬레니즘 문화가 남긴 유산이지만, 별이 총총히 박힌 다각형과 장미꽃 모양 같은 모티브는 메소포타미아와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뒤얽긴 식물 모티브에서 유래한 이 아라베스크 양식은 주로 벽에 사용되는데, 조화롭고 경쾌하게 전개된 잎사귀들과 꽃들이 달린 줄기를 서로 얽히게 하거나 연속적으로 분할하여 양식화되고 추상적인 경향을 뚜렷이 드러낸다. 또한 서책예술과 도자기, 건축에도 쓰였는데 어떤 배경이나 크기, 기술에도 폭 넓게 작용된다. 또한 아라베스크는 서예나 기하학적 문양, 동물이나 인간을 표현한 형상과도 결합할 수 있다.
'이슬람 서예'(Islamic calligraphy)
이슬람 미술에서 서예는 건축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알라의 메시지에 대한 찬미를 목적으로 한 서예는 모스크나 마드라사 안팎의 장식에 이용되었다.
또한 문인들이 <쿠란>의 언어인 아랍어의 신성성을 근거로 서예를 다른 예술과 견줄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서예는 무엇보다도 서책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예는 <쿠란>을 베끼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모가 나고 장중한 느낌의 구파체(kufa-이라크의 도시 쿠파에서 유래)와 둥그스름하고 유려한 느낌의 나스히체(naskhi)는 아랍 서체의 토대가 되었다.
서예는 아바스 왕조시대에 이르러 중요한 예술로 자리 잡았고, 9세기 말에는 서체의 종류만도 20가지 넘었으나 점차 6가지의 서체로 정리되었다. 또한 이슬람 세계에 종이가 보급되면서 이 6가지 기본 서체가 오늘날까지 현존하는데 주춧돌이 되었다. 이 글씨체들 중에는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들이 있다. 먼저 나스히체는 필사본이나 작은 <쿠란>을 베끼는데 사용되고 아랍어로 ‘3분의 1’ 이라는 뜻의 술루스체(thuluth)는 <쿠란>의 장 첫머리나 건물의 비문에 사용되었다. 또한 무하카크체(muhaqqaq)와 라이하니체(rayhani)는 큰 <쿠란>을 베끼는데 사용하였으며, 좀 더 부드러운 서체인 리카체(riqa)와 타우키체(tawgi)는 인명부를 기록하는데 사용하였다.
이렇듯 서예가 중요하고 발달한 이유는 이슬람교에서 신의 계시는 아라비아어로 전해졌고 아라비아문자로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쿠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슬람 사회에서는 <쿠란>을 베끼거나 명상을 즐기기 위해 혹은 단순히 예술적인 취미 생활로 서예를 즐기고 있다.
이슬람 회화
내용에서 인물이나 정물(靜物)의 표현은 삼가하고, 기법에서는 색채의 구성과 선의 효과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슬람 회화는 주로 궁전에 그려졌던 벽화와 책에 삽입되었던 사본 삽화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난다. 궁전의 벽화는 칼리프 등의 궁전을 장식하고 꾸미면서 발전 되었고, 사본 삽화는 처음에는 그리스 과학서나 철학서의 아라비아 번역판에 삽입되어 나중에는 문학서나 사서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초상화나 그림책 등 독특한 작품은 근세에 와서 제작되었고 사본은 대부분이 궁정에 속한 화가, 서예가들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화가의 관심은 장식효과의 증대, 구도의 양식화 등에 집중되었다.
페르시아의 회화는 서정성, 세련된 색채감각 등을 특징으로 한다. 중국의 송나라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고, 티무르왕조는 페르시아회화의 융성기로서 헤라트, 실라즈를 중심으로 해서 장식성과 치밀함을 추가한 작품들이 제작 되었다. 또 화가 비자드는 전통적인 방법을 완성하여 새로이 초상화나 풍속화의 길을 열었고 사파비왕조의 리자, 아바시 일파는 이것을 한층 발전시킴과 동시에 훌륭한 선묘화를 남겼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서구화와 전통의 상실로 페르시아회화는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랍 지역의 회화는 이미 12세기 무렵 바그다드, 모술, 바스라 등의 지역에서 아랍 최초의 화파(畵派)인 메소포타미아파가 활발한 제작활동을 하고 있었고 삽화 중심으로 진행 되었다. 하지만 왕이나 종교의 주제뿐만 아니라 도시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들도 나타난다. 맘루크왕조(이집트·시리아)에는 주제와 양식 모두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이 이어지는데 도상(圖像)의 유형화, 여러 가지 요소의 추상화 · 장식화가 두드러진다.
투르크 회화는 15세기경부터 오스만제국 지배 아래서 페르시아적 성격이 짙은 삽화가 주로 나타나며 16세기의 비로소 투르크의 독자적 양식이 형성 되었다. 서정성이 강한 페르시아회화와는 대조적으로 오스만제국의 회화는 현실성이 강하고, 주제도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한 것이 많이 나타난다. 16세기의 작품들은 단순하고 획일적인 화면구성과 딱딱한 도상을 특징으로 하며, 술탄의 초상화도 많이 그려졌다. 일찍이 유럽과의 교섭이 빈번했던 투르크에서는 이미 17세기 초에 전통예술의 쇠퇴가 심해져, 투르크회화도 몰락하게 되었다.
이슬람 공예
종교적인 원인으로 회화나 조각에 대한 활동이 억제되어 온 이슬람 미술에는 공예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 공예의 여러 부분에서의 공통된 특징은 과잉장식으로 그 사물의 원래 기능이나 질감을 두드러지게 손실된다는 점이다.
금속공예는 청동․놋쇠 이외에 금․은․구리․철을 소재로 하여 상감, 주조, 타출, 도금, 금박, 등의 기법을 사용해 촛대, 향로, 물주전가,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금속공예에서 대표적인 기법은 ‘누금감옥(鏤金嵌玉)’이다. 누금은 가는 금줄과 금알을 늘여 붙여서 물형을 만드는 정교한 세공수법이며, 감옥은 금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옥을 박는 공예기법으로 이른바 ‘다채장식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법은 이집트에서 발생한 후 이슬람시대에 널리 퍼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전파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에서는 몽골시대에 걸쳐 은상감의 기법이 유행하였으며 16-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도기공예도 크게 발전하였는데 산화납이나 황화납을 매용제로 하는 시유기술11)을 사용한 작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시유기술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발, 연구했다. 특히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다채유도(多彩釉陶)유명하고 그 이후에도 시유도의 전통은 계속 되었다.
그 후 이집트 각지에 새로운 요(窯)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도기류의 제작은 사산조페르시아나 비잔틴의 제도활동(製陶活動) 기초로 하여, 다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반영되어 큰 자극이 되었다. 연유를 사용한 각종 색유를 배합한 삼채나 주석을 용매제로 사용한 실투성의 백유에서 나타나는 무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습을 보여준다.
11-15세기에도 중국도자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의 전개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도기는 풍부한 삼채는 없어지고 청, 남, 백 등의 단색유와 복잡한 장식법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예로 투르크 블루의 청유가 있다. 그리고 14세기 말엽에 일한국12)이 멸망한 뒤 도자기제작이 한때 저조했으나 16세기 이란의 사파비왕조가 일어나 도자기의 옛 전통이 되살아났다. 이때는 부드럽고 독특한 작품이 나타나고 쿠바치라는 투명유 밑에 문양을 그린 밝고 온아한 채색도기가 나타난다.
이슬람 과학
1. 연금술
일반적으로 연금술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의 화학기술로 구분된다. 첫째는 동·납·금·은 등 귀금속 제조기술이고, 둘째는 불로장생의 선약(仙藥) 제조기술이다. 연금술의 기원이 된 로마시대의 이집트에서는 귀금속의 제조에 주력했고, 중국에서는 선약의 제조에 역점을 두었다. 자비르 이븐 하얀을 비롯한 중세 무슬림 화학자들이 양자를 비로소 결합하여 의학과 화학의 발전을 촉진하였으며, 그것이 13세기 이후 유럽에 전파됨으로써 비로소 현대 실험과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중국의 연단술은 마니교도들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아랍지역에 소개되었다. 특히 8세기 중엽 귀족 상층들은 장생을 갈구하여 연단술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슬람세계에서 연금술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최초의 무슬림 연금술사인 자비르는 중국의 연단술을 전수받아 큰 각광을 받았다. 일릭서(elixir)라는 특수한 연금영약으로 재상 애처의 중병을 치유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같은 사실은 무슬림들의 연금술이 종래의 순수 금속제조술에서 탈피해 동양식 선약제조술로 변신했음을 시사한다.
또 한명의 훌륭한 학자였던 알라지는 마술적인 절차에 완전히 반대되는 실증적인 이론을 보여주었다. 증류, 하소, 결정화, 증발, 여과 등과 같은 연금술의 기본 절차들은 그의 노력으로 정확성을 얻었으며 그가 사용했던 실험실 기구와 용기들의 종류는 오늘날과 비슷하게 되기까지 다양화되고 개량화되었다.
2. 의학
6세기까지 페르시아의 군데샤푸르는 의학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학자들은 이 도시로 의학 관련 번역서와 철학 및 과학 관련 번역서들도 가져와 모든 치료 분야에서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리스 서적은 곧 아랍어판으로 번역이 되었고, 히포크라테스, 디오스코리데스, 갈레노스의 저서 대부분을 아랍어로 번역함으로써 이슬람의 초기 의학도들에게 귀중한 참고서적을 제공해주었다.
또한 이슬람의 초기 발전기에 이미 의학 기술의 진보에 필요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즉 도서관이 늘어났고, 번역 기관은 과거로부터 수집한 지혜를 전파하는 데 박차를 가했으며, 병원들도 발전되고 있었다.
중세 무슬림 병원의 조직과 시설은 그 시대에 상당히 진보한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을 위한 분리된 병동이 있었고, 외과계 질병, 정신질환, 전염병, 내과계 질병, 안질환, 정형외과 환자들을 위한 개별적인 병동을 만들었다. 또한 집중 교육과 약학 시설들도 탁월하였다. 의사들은 수련 기간 동안 의사로서 필요한 모든 소양을 교육받았다. 의사의 윤리를 다룬 아랍 최초의 서적 중 하나인 『의사의 윤리 규약』은 9세기에 출간되어, 인턴들에게 많은 것을 충고하였다.
무슬림 의학자인 알라지는 서양에서는 라제스(Rhazes)로 알려져 있으며 '조건 반사', '천연두', '소아 질병', '홍역'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한 의학지식을 소유한 자였다. 그의 저서 『총서』는 23권으로서 그리스, 이슬람 이전의 근동, 시리아, 인도, 아랍의 백과사전적 의학 지식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이후 1279년부터 1542년까지 3세기에 걸쳐 라틴어로 번역돼 수없이 읽혔다. 그의 서적들은 또 외과수술, 임상의학, 피부병과 관절병, 식이요법, 위생학을 포함한 여러 의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븐 시나의 백과사전적 저서『의학정전』은 아랍어 주석과 더불어 모든 그리스 의학 지식을 망라했다. 해부학, 질병, 위생학, 관장, 단순한 치료 물질들, 골절, 열, 종창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의료 기구와 함께 합성 제조된 특별한 의약품을 설명함으로써 근대 초까지 유럽의 중세 학교에서 필독서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심리학 분야의 개척자로서 환경, 암 치료와 같은 인간 복지적 측면을 많이 연구했고, 감정과 신체적 상태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인식했다.
12세기까지 무슬림 의사들은 백과사전, 의학 자서전, 안과학과 같은 전문 분야와 개업의에 대한 안내서뿐만 아니라 의학 실습에 대한 안내서 등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다. 또한 천연두, 콜레라, 페스트가 가져온 참상을 충분히 관찰할 기회를 얻어 14세기 안달루시아, 이븐 알카팁 같은 의사들은 유행성 전염병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중세 무슬림 의사들은 해부학과 생리학에 중요한 지식을 덧붙였다. 이븐 알파키흐 일리야스가 쓴 15세기 『인체의 해부학』과 같은 연구들은 신체의 구조, 순환, 신경 체계들이 나타난 도표를 제공했다. 게다가 외과수술에서 무슬림들이 이룬 업적은 인간 신체의 해부에 대한 종교적 반대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놀라운 것이다.
의학적 연구와 치료 분야에서 이슬람의 조제술의 두드러진 발전을 꼽을 수 있다. 조제술은 배합과 투약, 사용법, 단순약과 복합약의 치료 효능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정의되어질 수 있다. 무슬림들은 예전부터 알려진 내복약에 많은 품목을 추가하고, 최초로 시럽과 감미 음료의 제조를 완성시켰으며, 최초의 약국도 개설했다. 특히 이븐 알바이타르(Ibn al-Baytar)의 『간단한 식이요법들과 약들의 모음집』작품은 천 개 이상의 각기 다른 항목들을 기술한 약용 식물학을 다룬 아랍에서 가장 훌륭한 저서였다. 약을 조제하는 조제술이 이슬람 세계에서 독립된 직업으로 처음 나타난 시기는 8세기였다. 조제술은 서양 약학과 조제술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 인기 있는 건강 교육이 된 자연의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3. 수학
기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의 수학이 이슬람 문화 초창기에 들어왔다. 하나는 기하학적으로 개념을 형상화하려는 그리스의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인도에서 차용한 자릿값 계산법인 십진법과 더불어 자릿값 숫자로써 60진법 계산법을 강조한 바빌로니아 계산 방식이다.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과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사람들이 세운 ‘지혜의 집’ 같은 학문 중심지에서 출발하여 초기 이슬람의 수학자와 철학자들은 그들의 지적 노획물에 열심히 빠져들었다. 그들은 곧 충분히 능통해져서 자신들이 받아들인 개념, 공식, 그리고 부정확하고 일관성이 없거나 오류가 있는 세세한 부분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롭게 번역을 하거나 기존의 것들을 개정함으로써 과거의 것을 수정하여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바빌론, 인도, 고대 그리스에서 물려받은 지적 유산을 세밀히 조사하고 정리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대수학에서 그들은 그 이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은 바로 8세기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알콰리즈미이다. 그는 바빌로니아와 인도 숫자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간단하고 실행할 수 있는 체계로 전환하는 데 힘썼고, 이면의 개념에 따라 ‘대수학’과 ‘알고리즘’이라는 두 용어를 만들어 냈다. 대수학, 즉 아랍어로 알자브르는 방정식의 양쪽 변에서 똑같은 수를 감하거나 더함을 통한 이항(移項)을 나타낸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거나 문제를 풀기 위한 단계적 해법이나 체계적인 계산법을 의미하게 되었다.
삼각법 또한 실질적으로 무슬림의 창조물이다. 특히 평면과 구형 삼각형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삼각법은 천구에 하늘의 점 지도를 그리는 것에 관심있는 천문학자들의 필요에 의해 학문으로 발전했다. 사인, 코사인, 탄젠트, 코탄젠트와 같은 비율을 포함하고 있는 삼각법의 기능은 이슬람 지역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며 더욱 세련되어졌다.
이슬람이 영토를 넓혀 감에 따라 무슬림들이 발전시킨 수학을 적용한 일상 문제들이 규모와 복잡성에서 자연스럽게 증가했다. ‘일상생활의 산수’는 세금 계산에서부터 <꾸란>에 명시된 개인의 부동산 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수학들의 실제적 적용 또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물레방아와 물을 끌어들이는 기구들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바퀴를 디자인하고, 조사하고, 농기구를 개선하고, 전쟁도구와 엔진을 고안하는 데 복잡한 기하학을 이용했다.
무슬림들은 일상생활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학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다. 철학자들과 학자들 중에는 그들의 고전적인 지적 유산의 일부인 피타고라스 학설의 개념에 매혹된 사람들이 많았다. 수 이론에 대한 관심, 수를 진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 마술 같은 제곱수에 대한 탐구, 그리고 수와 글자와의 관련성 등 이 모든 활동들은 이슬람 수학에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면을 제공하였으며, 그것은 연금술과 마술과 같은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4. 이슬람의 천문학
중세 무슬림들은 천문학을 수학적 과학 중 하나라고 여겼다. 천문학에 기울인 그들의 노력은 주로 천체의 뚜렷한 움직임을 연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것을 수학적 용어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천체의 기본적 성격이 그렇듯이 별빛과 같은 현상과 유성 및 혜성과 같은 대상물은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했다. 그러한 분류는 이슬람이 최초는 아니었다. 무슬림들이 이어 받은 천문학적 개념, 용어, 그리고 실천의 방법은 고대 그리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일부 지식은 인도인과 페르시아인의 유산에서 유래했다. 이 풍부한 유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수천 년 동안 면면히 내려온 지식이 포함되어져 있다. 그곳에서 천체 관측은 면밀히 수행되었고, 달력 계산법은 천체에서 보여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통설이 되어온 지구중심설을 부정하고 지구공전설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구둘레 측정에서 그리스인들이나 인도인들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냈다.
천문학은 신앙에 봉사하는 과학이었는데, 무슬림 천문학자들이 고도로 발달한 관측법과 이론적 방법을 개발하기 오래 전, 그들은 예배에 필요한 기본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천문학 지식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이슬람의 종교적 행위는 예배와 관련하거나 이슬람 태음력에서 월의 시작과 휴일의 시작과 관련해서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 관한 결정을 필요로 했다.
무슬림들은 시간을 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의 방향도 알아야 했다. 모든 이슬람교도들은 가장 성스러운 무슬림 성지 카바신전이 있는 고대 도시 메카를 향해 예배한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모스크들에는 미흐랍(예배 방향을 나타내는 모스크 안의 벽감)이 있어 모든 신도들이 카바 방향을 향해 예배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중세 무슬림들의 용어로 일므 알미카트, 즉 시간 기록학 또는 ‘계시 과학’으로도 알려진 이 천문학 분야는 매일 다섯 번의 예배 시간(석양, 늦은 밤, 새벽, 정오, 늦은 오후)을 정하기 위해 수학적 계산법을 이용하고 직접 도구를 사용해 관측하였다. 이슬람에서의 하루는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며, 이슬람의 한 달은 초승달이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 날부터 시작한다. 게다가 아랍인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긴 여정의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수세기 동안 밤하늘을 연구해 왔었다. 그들은 계절의 지표로써 달의 모양과 상대적 위치는 물론 특정한 별자리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
초기 이슬람의 팽창 직후 무슬림들은 조직적으로 자세하게 하늘을 관측했다. 이러한 노력은 달력, 예배 시간표, 그리고 12궁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정확한 시간표에 대한 요구에 의해 점점 가속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칼리프들과 다른 통치자들이 설립하고 후원한 수많은 관측소들은 이집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의 시라즈, 이스파한, 레이 같은 중심지에 세워졌다. 천문대는 무엇보다도 점성술에 대한 왕궁의 흥미 때문에 설치한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저명한 대학들이 하는 것처럼 중세 이슬람 천문대와 궁정은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과 교수들을 초빙했다. 그들은 자석고 같은 역할을 하여 다시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부터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천문 관측 기구에 대해서 말해보면,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한 벌전을 이룬 것은 훨씬 더 작은 천체 관측 기구의 개발과 개선이었다. 특히 천체 관측 기구인 아스트롤라베는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쓰였던 아주 중요한 계산 기구였다. 기원전 2세기경 그리스인의 발명품으로 추정되는 아스트롤라베는 무슬림들에 의해 그 기능이 현저히 향상되었으며, 어떤 이들은 무슬림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놀라울 정도로 아담하고 작은 이 장치는 매우 다양한 천문학적 문제와 시간의 기록 문제들을 푸는 데 있어 복잡한 기술자의 계산자 또는 심지어 아날로그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한다. 또 다른 비관측용 기구 ‘천구의’는 과학적 효용성 못지않게 미적 아름다움으로도 찬사를 받았다. 기본적으로 교육용 기구인 천구의는 주로 지평선 위에서 천구가 매일매일 뚜렷한 자전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천구의는 장식적 선물로도 찬사를 받았는데, 오늘날 사무실에 배나 비행기 모델로 장식되어 풍기는 멋이 칼리프 집무실에도 있었다.19)
결론적으로, 천문학 이론 분야에서 무슬림들이 이룩한 혁신은 역사적으로 천문학 발전의 중요한 걸음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천문학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천체상의 거리와 방위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슬람 사원에서 금요일에 예배
이슬람에선 금요일에 태양이 떠올랐고, 아담이 창조되었으며 심판이 일어났던 날이었기 때문에 금요일을 가장 훌륭한 날로 여긴다. 그래서 금요일에 예배를 본다.
메카 방향을 향해 예배
무하마드가 처음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도록 했다가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구약도 제대로 모른다’라고 하여 630년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메카의 카바 신전
원래 아라비아 다신교의 우상숭배 장소였으나 무하마드가 ‘아브라함과 그의 서자인 이스마엘이 알라에게 예배를 드린 곳‘ 이라며 이곳을 성지로 일컫는다.
바위의 돔의 황금은 언제 씌워졌나?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50만 달러의 사재로 돔을 24K의 순금으로 씌우게 했다. 1993년 시작된 공사는 15개월간 계속되어 1200장의 얇은 순금 판이 돔 위에 입혀져 진짜 황금의 돔이 되었다. 돔 내부에는 대리석 기둥들은 색깔, 높이, 두께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 이유는 이 기둥들이 비잔틴이나 로마시대 신전의 것으로 파괴하거나 새롭게 만들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바위의 돔에 복잡한 배경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건축양식이 독자적인 것인가
이슬람의 건축 양식은 갑자기 새로운 것에서의 창출이 아니라 여러 문화적인 요소를 흡수해서 발전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모스크의 주요양식인 돔 양식을 보면, 이슬람 건축이 로마의 돔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돔 형태의 건축은 로마건축양식을 이어받았으며, 그것은 이슬람 문화권에 존재하는 모스크에서의 돔과 아치형태의 건축 모습에서 나타난다. 또한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나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볼 수 있는 내부 구조 또한 수용하여 모스크 건축에 이용하였다. 이렇듯 자신들의 종교적 교리에 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문화를 충분히 수용하여 이슬람 문화, 그리고 건축분야를 발전 시켜 나갔다.
맘루크왕조의 건축양식
맘루크시기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모스크를 건축함으로써, 모스크 복합단지를 조성하였다. 11세기 즈음부터 하나의 모스크에 돔과 첨탑의 추가로 확장되어 그 위용을 보이던 것이 발전하여, 복합 단지 조성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이슬람 문화와 세력의 확장과 더불어 발전된 모스크 건축의 모습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맘루크 시기에도 첨탑의 모양과 크기를 각각 다르게 하여 건축하는 양식이 많이 보이며, 그것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위용을 보여주는 것으로 맘루크 시기 건축양식의 발전을 보여준다.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한다고 했는데, 이슬람 후기에 건물에 동물의 석조 조각상이 생기게 된 것일까?
이슬람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석조조각에 대한 부분은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허용했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발표지에서도 볼 수 있 듯이 다마스쿠스 대 모스크는 원래 다신교(多神敎) 사 원의 성역이었는데, 후에 그 건물을 이용해 그리스도교 성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것을 이슬람이 정복한 후 또 모스크로 개조하였다. 때문에 성 소피아 성당과 같 이 이슬람의 건축 및 예술 문화 외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8~9세기 이슬람 건축물을 보면 동물이나 사람 조각상 많이 보였는데, 원래 우상숭배는 이슬람에서 금지로 하였는데 신의 특별한 계시로 인해 만든 특별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유는 질병치료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런 것을 그로인한 이유로 만든 것이면 우상 숭배로 보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의 당초문과 아라베스크문양과의 관계
당초문은 원래 당대에서 출발된 문양이 아니다.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고대 이집트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집트의 연꽃무늬인 로터스(lotus)를 도안화한 장식문양이 그리스로 건너가 기원 전 5세기경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당초문은 그 후 문양의 형태에 따라 그리스의 안테미온(Anthemion) 계와 아라비아 지역에서 발전한 아라베스크(Arabesque) 계로 나눌 수 있다.
안테미온은 잎이 다소 넓고 장중한 감이 있는데 비해 아라베스크 양식은 섬세하고 조밀한 감을 준다. 또 같은 안테미온 계의 문양에서도 원형의 꽃무늬 형식을 주로 하는 로터스(lotus), 부채꼴 꽃무늬 형식의 팔마트(palmette), 그리고 덩굴무늬 형식의 아칸더스(Acanthus)로 나눌 수 있다. 영국에서는 인동문을 허니서클(honeysuckle)이라 하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종려나무잎(palm) 모양이라 하여 팔마트(palmette 棕櫚葉紋)라 한다. 서방의 덩굴형태로 연결되는 아칸더스 문양이 육조시대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으로 전해진 것이 인동당초문이라 할 수 있다.
당초문이란, 중국 한자음을 따서 덩굴풀이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당초문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당초문양은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고, 분포상태도 매우 광범위하다. 고대 이집트의 로타스·로제트, 메소포타미아의 팔메트 등은 가장 오래된 당초문양이다. 문양의 형태가 발전하여 리드미컬한 형식으로 전개한 그리스의 당초문양에 이어 여기에 아칸서스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이것이 로마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서방계의 당초가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은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일이다. 북제(北齊)에서 수·당시대에 걸쳐서, 이 당초에 화문(花文)과 포도·석류 등의 과일이 덧붙어서 채색이 다채로워졌다.
서체는 필기체인가 인쇄체인가?
굵고 힘찬 쿠파체는 인쇄체, 파피루스나 종이에 쓰기 적합한 나스히체는 필기체 이 두가지가 있다. 쿠파체는 7세기 말에 발달하여 돌이나 금속에 글을 새기거나 쿠란의 필사본을 쓸때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나스히체가 폭넓게 사용되었다. 리카체도 필기체이다.
이슬람 음악
무슬림들의 예술은 쿠란과 하디스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쿠란에서는 시에 대해서는 방대하게 밝히고 있는데 음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이는 무하마드 시대의 아람사회가 음악을 시보다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궁정은 음악을 보호, 육성했는데 페르시아 그리스 음악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수피들은 독자적인 주제를 가진 종교음악을 만들어 내서 공식적인 예배시간, 축제에 연주했다. 또 오스만제국에서는 병원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슬람 연금술
화학에서는 실험기구의 발전으로 증류기, 도가니, 플라스크(모태와 우주를 모델로 한 연금술사의 ‘기적의 그릇’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음), 여과기 등을 발전시키고 개량화 한다. 새로운 물질, 약품들의 발견으로 기원전 300년 경에 은을 추출 해 냄, 13세기 이전에 코올을 발견함, 이 외에도 에테르, 질산, 황산, 비누, 알칼리, 황산과 알루미늄의 화합(백반)을 발견한다.
황-수은 이론은 플로지스톤설에 영향을 줌 : 황-수은 이론이란 서로 다른 금속이 생기는 이유는 생성된 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론. (이때 황이란 휘발성, 연소성 물질을 나타내는 것이고 수은 또한 휘발성 액체를 말함) 이로 인해 금속이 가연성 원소를 함유한다는 개념이 지속되어 유럽 화학의 플라지스톤설에 영감을 주기도 함. 플라지스톤설이란 플라지스톤을 가연성을 대표하는 원소로 생각한 18세기 무렵의 화학현상의 지배적인 가설임
의학은 만병통치약을 만드려는 시도 속에서 의학을 발전시켜서 생명을 연장시킴 즉, 연금술이 화학약품을 만드는 수단, 수술, 약품, 충치를 때울 때 쓰는 아말감을 발견한다.
이슬람 왕조의 회교미술 1526-1858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창시한 세계3대 종교로서 그 강대한 세력은 사라센 제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쪽은 인도에서 아프리카 북안을 지나, 서쪽은 한때 스페인까지 그 판도가 미쳤다. 인도는 팔라 왕조가 망한 뒤 정치적인 혼란시기에 들어갔다. 13세기 이슬람 교도들의 침략으로 인하여 불교와 힌두교는 정치·문화·예술에서 이슬람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슬람 문화예술은 서양의 기독교 문화예술, 동양의 불교문화예술과 아울러 세계3대 문화권과 예술계통의 하나로 중동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일반적인 이슬람 미술의 특색은 궁륭형의 천장 돔과 높은 첨탑, 그리고 회교사원인 모스크가 있다. 모스크들은 엽식 도안과 아라비아 문자로써 복잡하고도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아름다운 반구형 지붕의 돔dome과 높이 솟아 있는 첨탑, 모스크의 내외를 장식한 각종의 도안과 문자는 호화로운 이슬람 건축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슬람 미술은 서방으로는 비잔틴Byzantine 시대를 비롯하여 중세의 기독교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동방으로는 인도·파키스탄·중앙 아시아·중국 등지의 아시아 미술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미니어처miniature미술"은 이슬람 미술의 독특한 특색으로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을 장식한데서 시작되었다. "미니어처 미술"은 화려한 궁전, 왕후 귀족들의 초상과 전투, 수렵장면과 남녀의 연애, 결혼 등의 각종 생활풍습과 동식물, 엽식葉飾, 문자의 도안등을 주제로 하여 극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그림의 화법과 양식은 묵선을 중심으로 짙은 채색을 써서 제작되었다.
이슬람미술의 회화
이슬람 회화는 사본(寫本)의 장식화(미니어처)로 대표된다. 본래 문학과 자연과학 서적의 삽화로 발달한 것인데 그 세속적인 성격 때문에 교의상의 제약이 적고, 이슬람교도의 장식적 재능에도 적합하여 고도로 발달하였다. 13∼14세기에는 바그다드와 몽골의 두 유파가 최초의 황금시대를 이룩했으며, 그뒤 15∼16세기에는 강대한 티무르왕조·사파비왕조 치하에서 군주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낳았다. 비흐자드, 술탄 무하마드, 리자 아바시 등이 뛰어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교도는 장식예술 전반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특히 금세공·목공·도기·유리·염직 등의 분야에서는 때때로 같은 시대의 서유럽 여러 나라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 금속공예에서는 금·은·동·청동·황동·철 등을 소재로 여러 그릇과 무구(武具)·금속장식류가 제작되었다. 목공의 경우도 상안(象眼)이나 목화(木畵)에 의한 표면장식에 특색이 있다. 도기는 이슬람 공예의 가장 중요한 분야이며, 시리아·메소포타미아·터키·에스파냐 등지에서 각각 특색 있는 제품을 만들어 유럽 도예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염직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지역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전통을 기초로 시리아·페르시아·이라크·터키·에스파냐 등에서 눈부시게 발달하였다. 특히 16∼17세기에 페르시아·투르크 등에서 짜여진 융단은 대체로 페르시아 융단이라고 하여 최고품으로 꼽는다.
세계의 이름난 미술관들은 많건 적건 이슬람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이 특히 유명하다. 전문 미술관으로서는 카이로의 이슬람 미술관, 그밖에 이스탄불의 토푸카피궁미술관이 투르크궁정에서 오래 전부터 소장한 호화로운 공예품·사본류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사본류의 경우, 파리의 국립도서관 컬렉션이 이름높다.
아랍 문자(Contents)
'이슬람 서예'(Islamic calligraphy)
이슬람 미술 [Islamic art]
불교미술·그리스도교미술과 더불어 세계 종교미술에서 중요한 분야를 차지한다. 그 연대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나, 전반적으로 이슬람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7세기 말 무렵부터 17세기 무렵까지가 대상이 된다. 지역적으로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페르시아·이집트·에스파냐·인도 등 이슬람교의 지배기간이 비교적 길고 영향이 강했던 지방을 중심으로 한다.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엄금하고, 특히 종교관계의 조형에는 신이나 인간을 비롯하여 새나 짐승 등 생명체의 표출을 금하였다. 그리하여 종교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불상(神佛像)·예배상 등은 제작되지 않았고, 조각상이나 대형 회화의 발달은 볼 수 없다. 반면에 우상금기는 조형예술에 추상적 형태를 널리 채용하는 경향을 낳아, 아라베스크 등 복잡하고도 화려한 무늬나 정교한 장식공예의 발달을 초래하였다. 또 이슬람교는 원래 다른 민족을 강제할 정도의 예술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교의 영향이 미쳤던 지역에서는 교의의 엄격한 제약 아래 있으면서도 토지나 민족 고유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미술 활동이 계속되어 지방적 특색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슬람미술의 건축
이슬람 건축의 주요한 것은 모스크(이슬람교 사원:정식으로 마스지드라고 한다)·마드라사(학교)·궁정·묘묘(墓廟) 등이다. 모스크의 플랜은 주랑(柱廊)·중정(中庭)·배당(拜堂)을 세로로 연결한 형식과 비잔틴 성당을 모방한 중앙집중당(中央集中堂)의 형식 등 두 가지로 대별된다. 내부에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일종의 壁龕)가 설치된 것 이외에는 제단 등의 특별한 시설은 없다. 지붕은 보통 반구형 돔으로서 건물 주위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첨탑(尖塔)을 가지고 있다. 건축재는 돌 또는 벽돌이지만 안팎의 벽면은 화려한 색채의 장식타일로 덮여 있는 경우가 많다. 초기의 모스크로서는 예루살렘의 바위돔(691), 다마스쿠스의 대모스크(705), 사마라의 대모스크(846∼852) 등이 있고, 후기의 예로서는 이스탄불의 아하마드 1세의 모스크(1609∼1616), 이스파한의 마스지디샤(1612∼1637) 등이 있다. 궁전건축에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궁(14세기), 묘묘에는 인도의 타지마할(1630∼1658)이 특히 유명하다.
(나) 끝, (다)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맑음의 정신병자 > 중세미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미술 2, 1부 기독교 만 존재 한다 - 1 (0) | 2013.02.25 |
---|---|
중세 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 다 (0) | 2013.02.24 |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 가 (0) | 2013.02.23 |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0) | 2013.02.22 |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1 (0) | 201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