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 가

草霧 2013. 2. 23. 00:00

 

 

 

 

중세 미술 1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오리엔탈

  

.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3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 헬레니즘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예술 세계가 중세에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며, “2. 헤브라이즘에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무슬림의 성장과 영향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1, 6부 고대 그리스 미술-2을 참조하세요.

 

1. 헬레니즘

2. 헤브라이즘

3. 오리엔탈리즘

 

  

3.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가)

  

 

본 글은 중동지역과 이슬람 제국과 이슬람교로 한정하여 작성한다.

  

유럽 밖의 중세 , 이슬람의 황금시대

 

 

 

중세라는 용어는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서 자신들과 고대 사이의 역사를 암흑기로 인식하는 입장에서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쓰이는 중세라는 표현은 오늘날 많은 비판이 있다. 그러나, 중세는 근대 이전의 시기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의미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 호이징아는 오히려 르네상스를 중세의 가을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양의 역사에서 중세를 구분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역사 구분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유럽 _ 로마 제국의 멸망 ~ 16세기

 

 

 

(1) 유럽의 중세는 어느 한 시점에 급작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유럽 중세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는 훈족의 침입,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독교 공인, 게르만족의 이동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 등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유럽 중세의 시작을 로마 제국의 붕괴로부터 보고 있다.

 

게르만족의 유입 이후 이슬람교 세력, 노르만족, 마자르족 등으로 대표되는 이민족이 침입해 온다. 이로 인한 고대 제국의 붕괴. 이에 따라 상업과 교통이 붕괴하면서, 통일적이었던 고대의 사회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적 자급자족 체제로 전환된다. 이민족으로부터 자기 방어 능력을 갖춘 기사 등이 영주로 등장했다. 이들은 상위의 계층에 대해 쌍무적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장원이라는 자급자족적 단위를 거느리면서 유럽 내에서 분권적인 질서를 구축한다.

 

장원의 아래에 고대의 노예나 소작농 등이 특정 지역에 묶이면서 만들어진 농노 계층이 등장하게 된다. 사상적으로는 크리스트교 질서 아래에서 모든 학문이 포괄되어 움직이면서, 고대의 인문주의가 쇠퇴하는 한편 형이상학적인 신학이 발달한다. 이것은 후에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교황권이 성장하여 교황이 서유럽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힘입어 한때 교황권은 세속권을 상당 부분 겸하거나 제약하기도 하였는데, 카노사의 굴욕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던 것이 생산력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등장, 보다 중앙 집권적인 왕권의 확립 등으로 그 구도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어 십자군 전쟁과 아비뇽 유수 등으로 교황권도 서서히 몰락하고,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인문주의가 대두되면서 중세는 해체 국면을 맞게 된다.

 

과학의 발달과 아메리카의 발견 등으로 기존의 신학적 세계관이 붕괴하면서, 중세 질서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절대 교황권' 또한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 더는 존재할 수 없는 과거의 관념으로만 남게 되었다.

 

(2) 유럽의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그리스, 로마 시대 세계에 존재했던 과학 지식의 재발견과, 당시 유럽의 경제와 사회의 발전에 있어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는 호기심의 문화도 만들었고, 끝에 가서는 인문주의를 이끌게 된다. 바로 과학 혁명이 그것이다. 또한 르네상스는 그당시의 의학, 예술, 건축학, 기술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 시대에 이루어졌던 르네상스의 산물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기도 한다.

 

고대 로마에서 '유일한 황제' 개념이 붕괴되고, 사실상 비잔티움 지역에 힘이 많이 기운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

비잔티움으로 천도하고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시대

게르만족, 훈족 등이 난입해 국가가 난립하던 5세기 전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

로마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으나 결국 무위로 돌아가고 비잔티움이 별도의 길을 걷게 된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고 백년전쟁이 끝난 1453

이베리아 반도의 수복이 완료되고 신대륙이 발견된 1492

사코 디 로마,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등으로 교황권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을 정도로 몰락하게 된 16세기 초반

'중세의 전성기'였던 르네상스가 끝나고 30년전쟁이 끝난 17세기 초반

 

아랍 _ 이슬람의 출현으로 오스만 제국의 비잔틴 함락과 전성기

 

이슬람의 확산은 중세 아랍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이다. 성사(聖使) 무하마드에 의해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에 확산된 이슬람은 무하마드가 사망하던 632년무렵 이미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퍼져 나갔다.[60] 이 후 이슬람 제국은 661년 성립된 우마미야 왕조와 750년 성립된 아바스 왕조를 거치면서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였다.[61] 심지어 발칸 반도, 스페인까지 퍼져 나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그리스 시대의 지식이 유럽으로 들어와서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중국: 당나라 후기 - 명나라의 시기

한국: 고려시대

일본: 가마쿠라 시대(1192- 1333), 남북조 동란기(1336- 1392), 무로마치 시대(1338- 1573)의 기간

인도: 10세기 말 이슬람의 침입 - 무굴 제국에 유럽의 개입이 시작된 17세기 무렵

 

 

 

서구인의 환상과 경멸의 단어,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서양의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동양 문화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이른다. "오리엔탈리스트"란 말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으나,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를 이르는 전통적인 용어이기도 하다.[1] 오리엔탈리즘은 예술사에서 북아프리카나 근동(또는 서아시아)의 지중해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얻은 요소들을 이용한 내용, 색깔, 양식을 주제로 다룬 19세기 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이를 때 널리 쓰인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 대표적인 오리엔탈리즘 화풍의 작품

 

일종의 환상

이러한 의미는 20세기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논쟁적인 책 오리엔탈리즘을 내놓으면서 달라졌는데, 이 저서에서 사이드는 18~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적 태도로 형성된 동양에 대한 적대적이고 탄원적인 시각의 서양 예술 및 학술 전통을 이를 때 이 용어를 썼다. 이런 의미로 쓰일 때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문화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편향된 외부의 해석을 뜻한다. 사이드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학술 전통을 비판하였으며, 현대 학자 특히 버나드 루이스에 대해서도 그러하였다.

반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을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문화를 무가치하다고 보는 사람에 반대하며 동양적인 태도를 보였던 저자들을 이르는 말로 쓰기도 하였다.

 

'동양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

어원으로 보아서 오리엔트(orient)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리엔트란 라틴어로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인 오리엔스(oriens)에 해당되는 단어로서 이 단어가 발전하여 동방, 동양이 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이 본격적으로 쓰이게 될 때부터는 19세기 중엽부터로, 동양을 연구하는 학문, '동양학'으로 서양이 동양에 반응하는 방식이라든가 서양인들이 동양 문화에 대한 태도, 관념, 이미지에 대해서, 서양인이 동양에 대해서 만들어내는 담론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이후에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에 의해 만들어진 신조어가 아니고 서양인들이 동양을 바라볼 때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뜻으로 치우쳐졌으며, 그 뜻이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시대의 오리엔트의 범위는 제국 내에 동부 지방은 물론 제국 외부에 있는 다른 국가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였다. 그 후에 로마 제국이 분열되고 서유럽이 그들의 중심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옥시덴트(occident), 서방이라 부르며 오리엔트는 이와 대조되는 문화를 가진 동방세계라는 뜻이 부가되어, 인도와 중국, 일본을 이루는 광범위한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인들이 동양을 볼 때에 선입견을 가지고 본다는 것으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동양이 서양인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대상으로, 열등한 동양이 존재하기에 우월한 서양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열등하며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보다 두뇌나 신체 면에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수많은 문화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한꺼번에 동양이란 단어로 포함시킨다고 주장했다. 또한 쇠퇴하고 비참한 동양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동양을 구출해 내었다고 주장해 자신들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78오리엔탈리즘이란 책을 냈다.

옥시덴탈리즘

이슬람 근본주의

백인의 의무

와패니즈

문화상대주의

 

중동(Middle East)의 역사

    

고대 근동 (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

"고대 근동(古代近東, Ancient Near East)"이라는 낱말은 19세기에 대영제국이 관심을 가졌던 지역들을 지칭함에 있어서 근동(近東, Near East)과 극동(極東, Far East)을 구분하였던 용법을 활용하여 성립된 용어이다. 근동과 극동의 구분이 최초로 나타난 때는 크림 전쟁(1853~1856) 동안이다. 국가간의 외교에서 이 두 용어가 사용된 뚜렷한 예로 가장 큰 마지막 사건은 오스만 제국이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를 학살한 1894~1896년의 하미드 대학살(Hamidian Massacres)1894~1895년의 청일 전쟁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정치가들과 정치 고문들은 이 두 사건이 전개된 지역을 각각 "근동(Near East)""극동(Far East)"이라 불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동(Middle East)이라는 낱말이 사용되었는데, 20세기에서는 "중동""근동"보다 더 널리 쓰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근동"은 원래 오스만 제국(1299~1922)이 최대 영토를 가졌을 때의 그 강역을 대체적으로 가리킨 낱말이었다.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국가간의 외교에서 "근동"이라는 낱말의 사용 빈도가 확연히 감소하였으며 대신에 "중동"이라는 낱말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정치 · 외교적으로 "근동"보다는 "중동"이라는 낱말이 더 많이 사용되어가는 동안,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이라는 낱말은 오히려 더 뚜렷한 자리를 잡아갔다.

 

이 낱말은 처음에는 주로 성경에 나오는 땅들을 가리키는 용도로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지배했던 근동은 북쪽으로는 빈까지, 남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끝까지, 서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동쪽으로는 이라크의 국경선까지였다.

 

19세기의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여기에 이란을 추가하여 "고대 근동"이라 하였는데, 이란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이 전혀 없었던 지역이다.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제국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 기원전 330)을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1979년까지 이지역에 일어났던 여러개의 제국들을 역사학자들은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른다.

메디아(기원전 728- 기원전 550)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0기원전 330)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 시대(기원전 330기원전 250)

파르티아(기원전 250226)

사산 왕조(226651)

이슬람 제국(6501037)

셀주크 제국(10371219)

몽골 제국 점령 시대(12191500)

사파비 왕조(15001722)

호타키 길자이 왕조(Hotaki Ghilzai dynasty: 17221729)

아프샤르 왕조(17361796)

잔드 왕조(Zand dynasty: 17501794)

카자르 왕조(Qajar dynasty:17811925)

팔레비 왕조(Pahlavi dynasty: 19251979)

    

 

아랍 제국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칼리파가 이끄는 시기(칼리파조)를 가리킨다. 칼리파는 무함마드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치 지도자이다.

라시둔 칼리파조 (632~ 661)

우마이야 칼리파조 (661~ 750) - 라시둔 칼리파의 계승자

이슬람화 된 스페인의 우마이야 토후국 (750~ 929)

이슬람화 된 스페인의 우마이야 코르도바 칼리파조 (929~ 1031)

아바스 칼리파조 (750~ 1258) - 우마이야 칼리파의 계승자. 이슬람 황금시대(9-11세기)

파티마 칼리파조 (910~ 1171)

 

새로운 신앙운동, 이슬람교( al-islām )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단일신 종교로, 기독교 ·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복종 · 순종"이란 뜻이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는 남성일 경우 무슬림이라고 하고 여성일 경우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쿠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지브릴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순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순니파는 전체 무슬림 인구의 80-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순니파 이슬람교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 또한, 기독교와도 수많은 전쟁을 한 역사도 기록되어 있으며, 그 불씨는 감정적으로 남아있을정도로 유럽에서는 이슬람교가 폭력 종교라는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인정되고 있지 않다.

무함마드의 유년시절

카디자와의 결혼

메디나로의 피신

메카정복

무함마드 사후

 

정복전쟁 (7C ~ 13C)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후계자인 칼리파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 이라크 · 북부 메소포타미아 · 아르메니아 · 이란 · 이집트 등을 정복하였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732년 푸아티에(Poitiers)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 동방에서는 751년 탈라스 강의 싸움으로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750-1258) 초기 100년간은 칼리파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 튀니스 · 중앙아시아 · 이란 동부 ·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파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투르크의 이슬람화 (10C ~ 11C)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 960년 이래 톈산 산맥 남북로의 투르크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 화 한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었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로,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의 정복으로 1493년에는 그라나다가 함락되었다.

 

   

 

비잔틴 정복 (1453)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 제국(330-1453)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만 (6)

다섯 기둥 (5)

신앙고백의 의무 (샤하다)

하루 다섯번 예배의 의무 (쌀라트)

자선의 의무 (자카트)

라마단 금식의 의무 (사움)

메카 성지 순례의 의무 (핫즈)

순니파

카와리즈파

시아파

열두 이맘파와 자이디야파

이스마일파와 암살단파

알라위파와 드루즈파

바비파와 바하이파

 

수피즘(Sufism)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분파로 전통적인 교리 학습이나 율법이 아니라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신과 합일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수피즘의 유일한 목적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 춤과 노래로 구성된 독자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 수피파라 부르기도 한다.

 

9세기경 절정에 달했다. 타리카는 원래 도()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수피즘에서는 수행의 도정(道程)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였고 나중에는 교단을 뜻하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 시기인 12세기에 창설, 5세기 경 이슬람 전역, 13세기에 여러 타리카, 15세기 - 18세기에 성자 숭배, 민간 신앙의 도입 등으로 더욱 다양해졌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 무슬림[Islam]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존재도 숭배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들도 딸도 없는 이로, 홀로 있으며 전지전능한 창조주이다. 하나님이 금지한 모든 것은 무슬림들에게 금지된 것이며 "하람"이라고 하고, 허용된 것은 "할랄"이라고 한다. (할랄 푸드)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칼리파(khalīfa)

서기 632년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제1대 칼리파로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어 "알라의 사도의 대리인"을 칭했던 것에서 시작되며, 2대 칼리파가 된 우마르 1세는 "신도들의 우두머리(Amīr al-Mu'minīn)"라고 하는 칭호를 채용하여, 칼리파의 칭호와 함께 이용되게 되었다. 3대는 우스만 이븐 아판, 4대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로 계승되었으며, 4명은 꾸르안과 순나에 기초하여 '움마'를 통치하였기 때문에 정통 칼리파(Al-Khalifah Ar-Rashid)라고 불린다. 그 후, 우마위야 왕조·압바스 왕조에 세습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아파가 칼리파의 권위를 부정하고 분파하여, 수니파만이 칼리파를 따르게 되었다.

    

칼리파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의 교의를 좌우하는 종교적 권한이나 꾸란을 독단적으로 해석해 입법하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대신에 이것들은 울라마들의 합의에 의해서 보충되어 단지 움마의 행정을 통괄하여 신도들에게 이슬람의 의무를 준수시키는 역할 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10세기에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가 대()아미르에 정권을 맡기게 되면서, 칼리파는 실권을 잃고 아미르나 술탄의 지배권을 승인하는 대신에 그들의 비호를 받았다. 그 후 안달루스 왕조도 칼리파를 칭하게 되고, 수니파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마지막 바그다드 칼리파인 알 무스타심은 1258년에 일칸국의 건국자인 훌라구에 의해 살해되어 아부 바크르 이래 계속된 칼리파 제도는 여기서 한 번 끊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살아남은 압바스 왕조의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을 카이로로 초대하여 새로운 칼리파로 옹립해, 맘루크(노예 군인) 출신의 술탄에게 지배의 정당성을 주는 존재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1517,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왕조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카이로의 칼리파는 오스만 왕조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가 버렸다.

당초 오스만 왕조는 칼리파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실력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서 행동할 수 있었지만,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제국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군사적 열세가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 내외의 무슬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칼리파의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로부터 칼리파권을 선양받아 술탄과 칼리파를 겸비하는 군주제가 생겨났다(술탄-칼리파제).

 

칼리파를 지도자로 삼았던 이슬람 왕조들

정통 칼리파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가) 끝, (나)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