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草霧 2013. 2. 22. 17:46

 

 

 

중세 미술 1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그리고 오리엔탈

  

.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 2

 

 

 

 

 

본 연재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편에서는 3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 헬레니즘에서는 그리스·로마의 예술 세계가 중세에 영향에 대하여 설명하며, “2. 헤브라이즘에서는 중세 기독교 신앙과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 오리엔탈리즘에서는 무슬림의 성장과 영향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1, 6부 고대 그리스 미술-2을 참조하세요.

 

1. 헬레니즘

2. 헤브라이즘

3. 오리엔탈리즘

 

   

2. 헤브라이즘 [Hebraism]

 

 

기독교 사상, 헤브라이즘(Hebraism)

 

 

히브리어의 사용, 기질, 특징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며, 헤브라이 문화 또는 헤브라이 정신 모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유대인과 그들의 믿음, 국가 이념, 문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정통을 총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형성한 2대 조류의 하나로, 헬레니즘이 이성적·과학적·미적인 데 비하여, 헤브라이즘은 의지적·윤리적·종교적이다.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를 말하며,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申命記)율법의 기자,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2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이 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말관)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 헬레니즘 (Hellenism) VS 헤브라이즘 (Hebraism)

 

 

고대 그리이스인들의 생활의 중심이며 지주였던, 폴리스가 무너지고 오리엔트적 전제 군주제가 등장하자 그리이스인들은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고, 개개인으로 흩어져 폴리스를 초월한 세계시민이 된 것이다. 폴리스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관심은 애국심이나 공공정신보다 개인의 행복, 개인의 구원에 있었고, 이러한 개인의 행복 추구나 개인적 구원의 소망에 있어서, 민족적 구별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레니즘 사상의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즉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이다.

 

아울러 인간을 이성의 존재로 파악한 그들의 사고는 자연과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자연 과학이 주로 철학적 사색의 결과였던 데 비하여 이 시대에는 보다 실제적인 과학 지식이 발달하였다. 특히 천문학 분야에서는 지동설. 지구의 둘레 계산 등의 여러 가지 성과도 나타났다.

 

이에 반해 신의 창조물로서 인간을 이해한 크리스트 문화에서는 신중심의 사고가 지배적이었고, 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으며, 신에 대한 숭배와 관련하여 음악, 미술, 건축술의 발달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서양 사상의 연원은 그리스 사상(헬레니즘)과 유대기독교 사상(헤브라이즘)이다. 전자는 폴리스를 배경으로 한 자유로운 시민 사이에서, 후자는 광막한 사막 지대를 배경으로 한 수난의 유목민 사이에서 각각 발원하여 처음에는 한 사회, 한 민족의 사상이던 것이 점차로 그 심도(深度)와 진폭(振幅)이 확대됨에 따라 지중해 연안의 통일된 고대 사회 속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전사의 공동체로서의 폴리스와 그들의 자각적인 연맹·단결 속에서 그리스인은 개인의 자각적·목적적인 의지나 자유를 익히게 되었고, 합리적인 이성이 인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령(本領)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절망적인 자연환경과 타민족의 압박 속에서 온갖 수난을 겪고서도 민족의 통일성을 지켜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속에서 구원을 기대하고, 이 신앙을 통하여 자신들의 행복이나 단결을 기원하였다. 그들은 현실 속에서의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절망적인 운명을 극복해 줄 수 있는 비합리적인 신앙과 신의 구원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사고가 자연 철학에서 인간 중심으로, 다시 개인의 행복 문제로 초점을 옮겨가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종교로서의 유대교가 쇠퇴하고, 사랑과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가 일어나 헬레니즘 세계 속에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 속에서 만난 이들 두 사상은 처음에는 서로 충돌·절충을 거듭하였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성 때문에 결국은 하나로 융합될 수 있었다. 즉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사상은 그들 간의 근원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 함께 민족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를 전제로 한 것이었고, 세속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을 과제로 한 점에서 일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자가 비교적 로마의 상류층에서부터, 후자가 비교적 로마의 하층민 속에서부터 퍼져나갔지만, 그들은 결국 로마 세계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중세 사회의 두 기둥이 될 수 있었다. 사상사상(思想史上) 그들 두 사상이 어느 때는 한쪽이 다른 쪽을 위압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한쪽이 다른 쪽과 격렬한 대립을 일으키는 일이 있었지만, 서양 사상은 이 두 연원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표면상으로 기독교 사상이 그리스 사상을 위압하는 가운데 그러나 실은 내면적으로 후자를 포용하는 가운데, 중세 봉건사상이 1000년간 지속한 다음, 이번에는 후자의 전자에 대한 반발로부터 새 시대의 사상이 형성되니 이것을 근세(近世) 사상이라고 한다. 근세는 확실히 고대 그리스의 인간 중심·합리주의를 회복시켰고, 개인의 원자적(原子的)인 독립성을 더 추가하여 자유·평등·박애의 시민 민주주의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근세라고 해서 중세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요, 중세의 기독교 사상은 계속해서 근세 사상의 저변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그 이성의 한계와 이성 이전의 비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미 자기들 내면에 깊이 파고든 두 사상의 갈등과 모순을 더욱 절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성의 성과인 과학 문명의 발달과 시민 사회의 번영 속에서도 이성(理性)과 신앙(信仰) 간의 논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고도화된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한계가 뚜렷해지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양 사상은 다시 한 번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부는 이성의 합리성을 교조화하여 무신론(無神論유물론(唯物論)으로 발전하였고, 일부는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비합리주의 쪽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부는 근대문명 자체에 절망한 나머지 중세 기독교로의 복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거쳐 온 이전의 사상 전체에 실망한 일부 사람은 자기들의 위기가 서양 사상 내부의 보다 근본적인 결함에서 온다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별로 겪지 못한 전연 이질적인 동양 사상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하였다.

이들 여러 갈래의 움직임은, 20세기 후반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중 어느 것이 과연 타당한 길인지 아직 판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단계에서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서양 사상 자체의 내적 본질이나 현대 세계의 상황으로 보아 서양 사상만으로의 전개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동양 사상이 이미 오래 전에 순수한 동양 사상만으로의 전개를 단념했듯이 서양 사상 역시 그들의 것만으로는 뚜렷한 진로를 찾기가 힘들 것이다. 세계가 이제 비로소 진정한 하나로 되어 가듯이 인간의 사상도 이제부터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새로 출발할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관점 - 완전성은 신성(神聖)에 있다. 인간이 그것을 받는다.

 

그리스 관점 - 자연의 완전성에 신성이 있다. 영웅들은 신성하다.

 

 

역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수레바퀴로 굴러간다.

 

 

 

 

유럽 문화의 원류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시대는 바로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2000년부터 시작된 이 시기는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의 해체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개인적인 성향을 중시하던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서와 로마 제국의 세계 시민주의가 융합되어 독특한 헬레니즘만의 문화적인 성향이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융성은 헤브라이즘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의 탄생과 함께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기독교의 공인 후 100여 년 만에 로마제국이 붕괴되면서 헬레니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헤브라이즘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하 동굴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던 기독교도들이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지상으로 나오면서 헤브라이즘의 전성기는 시작되었고 중세 시대에 있어서 그 절정을 맞게 되었다. 헤브라이즘의 시대인 중세에는 기독교 이외의 것에는 눈을 감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면보다는 신을 경배하는 것과 감성적인 면이 삶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모든 개인들은 성지 순례를 가거나 혹은 성지 순례를 꿈꾸었으며, 더 높은 교회를 지을수록 신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믿음은 뾰족하고 높은 고딕 양식의 성당과 교회가 경쟁하듯 더 높게 높게 건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 문예 부흥시대의 싹이 트기 시작하면서 신 중심의 중세의 시대는 다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 헬레니즘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중세에 억눌려있던 지적인 욕구와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중시, 다양성을 향한 갈구와 같은 헬레니즘적인 가치들이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만개하게 되었고 역사는 다시 헤브라이즘의 세계에서 헬레니즘의 시기로 그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 광범위하게 말하자면, 유럽의 역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영향력 속에서 그 변화를 맞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 속에서 종교적인 두 문화가 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다.

 

근세와 근대 유럽 심지어는 최근까지도 헬레니즘 문화와 헤브라이즘 문화는 역사 속에서 그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으며 헤브라이즘 문화의 부산물인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간의 분쟁은 현대 유럽의 역사를 종교 분쟁으로 장식하고 있다. 아직도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유럽문화의 원류이자 여전히 커다란 두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 헬레니즘 VS 헤브라이즘

 

 

 

 

 

서양 문화에 접근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헬레니즘헤브라이즘이라는 용어가 떠오른다. ‘헬레니즘은 헬렌의 사람들이 만든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여기서 말하는 헬렌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또는 이들이 살아가는 지역을 지칭한다. 헬라라는 지역과 헬라어는 오늘날 대체로 그리스와 그리스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그리스 헬레니즘의 주된 내용으로 인간의 이성(理性)을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문화전통이 있다. 인간의 이성을 믿는 문화 전통이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확립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면, 이와는 정반대인 인간의 존엄성을 확립하는 방식이 있고 서양인들은 그것을 헤브라이즘이라고 규정한 듯하다.

 

헤브라이즘은 헤브라이 민족의 사람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문화 전통이 서구화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내용으로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유일신(唯一神)사상이다. 이 사상은 단순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유일신 사상은 신은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오직 야웨만이 신이고 그 밖의 어느 것도 신이 아니라는 생각은 유대민족으로 하여금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게 한 바 있다.

 

대략 기원전 11-14세기 즈음에 모세가 유대민족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지역으로 인도하였을 당시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던 거의 모든 민족들은 자연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 현상은 헬레니즘 문화 전통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그리스 올림포스 산에 신들을 살게 하고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제를 통하여 도시수호신으로부터의 신탁(神託)을 구하던 헬렌 사람들의 신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전지전능의 속성을 가진, 초월적 존재인 야웨만을 오직 신으로 믿고 이외의 모든 자연에 대한 숭배를 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야웨의 놀라운 솜씨를 드러내 보이는 대상 즉 피창조물에 불과한 것이고 인간이 야웨 이외의 그 어느 대상을 신처럼 섬긴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된다. 야웨가 모세를 통하여 인간에게 준 십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 계명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왕을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고귀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유일신 믿음, 야웨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왕을 신처럼 섬기는 것 역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인간 자신의 이성을 믿는 방식을 취하든지 또는 유일신인 야웨를 믿든지 역사를 경험하며 인간은 바라던 바를 조금씩 실현하게 되었다. 헤브라이즘의 유산인 모든 인간의 존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헬레니즘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헤브라이즘에 파괴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했으며, 기원전 3세기 건립된 이후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기원전 323~283) 혹은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기원전 283~246) 때 창설된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46~120)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때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후속인 아킬라스가 카이사르의 해상 능력을 제한하려자 카이사르의 배에 불을 질렀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도서관을 불태웠다고 한다. 반면에 에드워드 기븐은 도서관이 391년 세라페이온의 파괴를 지시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오빌로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역시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도서관이 파괴된 후에,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다른 지역에 위치한 세라페이온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대신 이용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알렉산드로스 사후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치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에 의해 최초로 조직되었다. 자신의 아들 교육을 위해 대학자 스트라토를 아테네로 초빙하였고, 좀 더 조직적인 교육을 위해 BC 306년 무세이온을 설립했고 이것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기원이 됐다.

 

무세이온 (Musaeum, 그리스의 사원이나 학예관)

회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을 보관하는 책장들로 채워졌으며, 이들을 도서관(bibliotheca)이라고 불렀다. 책장의 벽에는 영혼의 안식처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지금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얼마나 많은 문서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대부분의 문서들은 파피루스 종이로 되어 있었고, 기원전 3세기 이후 양피지로 만든 고사본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양피지 문서를 만들지 않았다. 이는 도서관과 파피루스 무역 간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창업

상공업의 발달

대도시로의 성장

파피루스의 생산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더의 동서문화 융합 정책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으며 이를 헬레니즘문화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세계시민주의와 개인주의이며,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두 흐름이며 유럽문화의 고대 진원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

기원전 48,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방화

3세기경 아우렐리아누스의 침략

391, 콥트교황 데오빌로의 칙령, 세라페이온의 파괴

642년 이후,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

 

박물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무세이온의 부속이었다. 무세이온은 다른 말로 알렉산드리아 뮤지엄이라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대의 학문 연구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무세이온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말고도 천문학, 해부학 등을 연구하는 공간을 갖추었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의 동물들을 모아놓은 동물원도 있었다. 수학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공학, 생리학, 지리학, 의약의 아버지라 불러지던 당시 사상가들은 여기서 연구와 실험을 진행하고 기록을 남겼다. 이곳에서 연구를 진행했던 주요 사상가들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에라토스테네스, 헤로필로스, 이라시스트라토스, 파푸스, 히파티아,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 등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할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그 의미가 있다. 또한, 도서관의 기능과 학문 연구의 대학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점에서 국립학술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특히 자연 과학 연구의 중심지였고,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학자들 책의 원본을 상당수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학자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연구실을 제공하고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수학, 천문학, 기하학, 의학, 응용과학 등의 분야에서 당시 학계를 주도했다.

또한, 문화의 중심지로써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주변의 고대 희랍 세계 문화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그리스 문명 수집과 보존에만 치우치다가 새로운 학문 저술이나 희랍 문헌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의 문헌 수집, 배열 주석 등을 부가하였고, 그리스 문헌을 취합함은 물론 주변 국가들과 지중해, 중동, 인도 등지의 모든 언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보전하였다고 한다.

 

 

헤브라이즘 정신적 뒷받침, 기독교 신학 (theology)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2-3세기에 서서히 학문으로서 틀을 갖추기 시작하여 성서해석을 포함하여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련된 일체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서에서의 유추(analogia scripturae)

믿음의 유추(analogia fidei)

성령의 내적조명(testimonium spirtus sancti internum- John Calvin)

기도(prex)

그리스도 중심적 방법

교의(신조, 신앙고백서)

교의학 재료를 분류하는 방법들의 한계

세계관 (World view)

인생관 (Life stance)

종교 (Religion)

철학 (Philosophy)

이데올로기 · 이념 (Ideology)

중세 논리철학

스코투스주의

유대-이슬람 철학

초기 이슬람 철학

 

교부철학 (敎父哲學, patristic philosophy)

이단에 맞서 교회의 이론을 세운 사람들의 기독교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철학을 일컫는다. 교부철학은 흔히 종교철학에서 다루어지는 한 분야이지만, 전문적인 연구는 주로 가톨릭 신학의 교부신학에서 하고 있다. 때문에 교부철학과 교부신학은 연구 분야는 같지만 방법론, 특히 교부들의 이론을 해석하는 데에 차이가 있다.

교부철학은 시대적으로 2세기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으며 8세기에 이르러 스콜라 철학으로 전통이 계승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3541113~ 430828)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라고도 불린다. 그의 이름을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좋은 징조의또는 덕망있는이란 뜻을 담고 있다. 영어식으로 어거스틴(Augustine) 이라고 부를 때가 많고, 간혹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고 부를 때도 있다.

 

고백록(Confessiones)

 

그는 기독교 신학은 물론 서양 철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어거스틴주의(Augustinism)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 발전에 끼친 영향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정리한 사도 성 바울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신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중세의 스콜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중요한 신학적 공헌은 은총론이다. 펠라기우스의 선행구원론을 반대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한 구원을 남겨주었다.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 축일은 828. 상징물은 주교관과 목장··펜이며, 인쇄공과 신학자의 수호 성인이다. 일반적으로 집필에 몰두하는 주교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15세기의 그림에는 주변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거나 조가비가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스콜라 철학 (schola)

고대 그리스어에서 '여유'라는 뜻을 가진 스콜레(σχολη)를 라틴어로 (schola) 소리 나는 대로 적은 낱말로서 오늘날 '학파'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특히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였던 신학에 바탕을 둔 철학적 사상을 일컫는 데 쓰이고 있다.

기독교의 신학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일반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 탐구와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켜 생각하였으며, 인간이 지닌 이성 역시 신의 계시 혹은 전능 아래에서 이해하였다. 가령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의 존재 문제를 애써 다루었는데, 여기서 스콜라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물질적 혹은 추상적인 방법론으로 관찰 또는 연구하지 않고 언제나 기독교의 신앙에 따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산물 혹은 수단으로서 스콜라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아래 광범위하게 논리학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토미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25~127437)의 철학)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이다. 또한 그는 자연 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로마 가톨릭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토마스 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학자 33명 중 하나이며, 로마 가톨릭에서는 그를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로 여기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그는 크리스트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 철학을 대성한 중세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이다. 그의 근본 사상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이것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자연이 은총에 의해 버림을 받지 않고 완성되는 것처럼 자연적 이성은 신앙의 전단계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토마스주의(도마주의, 토마스파, Thomasenes, Thomasines)는 토마스 교회(Thomasine Church)

사도 토마스(Apostle Thomas: d. AD 72)가 자신들의 교회들의 창시자라고 여기는 인도(India)의 기독교인들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 그룹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는 성 토마스 기독교인들(Saint Thomas Christians)이다. 토마스 복음서(Gospel of Thomas), 의심자 토마스의 서(Book of Thomas the Contender)및 관련 문헌들을 중시했던 고대의 종교 공동체들을 가리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러한 공동체들이 실제로 존재하였는지와 존재했다면 그 성격이 어떠했는가는 교회사 연구가들 사이에서 아직 논쟁중인 사항들이다. 하지만, 뚜렷한 공동체로 존재했건 아니건 간에, 이 그룹들이 고대의 나스티시즘 종교 운동을 전개했던 나스틱 기독교인들(Gnostic Christians, 기독교 영지주의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대개 학자들은 이 그룹들을 지칭할 때 성 토마스 학파(School of Saint Thoma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헤브라이즘의 반동, 인문주의(人文主義)

또는 인본주의(人本主義)는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기본적으로 세계는 신이 지배한다는 신본주의(헤브라이즘)에 반대하며,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사람 중심의 생각에 뿌리를 두는 정치· 사회사상이다.

 

인간주의(人間主義), 휴머니즘(humanism) 등으로도 부른다. 또한 이를 중시하는 사람을 인본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트라고 부른다.

 

르네상스 시대

장 조레스

에라스무스

칼 마르크스

 

 

 

 

서구 문화의 두 정신 축,

 

헬레니즘[그리스로마 사상, Hellenism] 과 헤브라이즘 [크리스트교 사상Hebraism]

 

 그리스 미술, 헬레니즘 미술, 로마미술, 비잔틴미술, 중세미술

 

흔히 우리가 말하는 문예사조란, 문학 예술에 있어 사상적인 주조(主潮)로서 사상의 뚜렷한 흐름이나 주된 경향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조는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문예상의 흐름이며 변천이다. 여러 사조 중에서 그리스로마 사상(Hellenism-헬레니즘)과 크리스트교 사상(Hebr aism-헤브라이즘)은 서구 문화의 두 정신축이라 할 수 있다.

 

헬레니즘(Hellenism) 사상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합리적이어서 철학과 과학을 발달시켰고, 헤브라이즘(Hebraism) 사상은 유태교에서 출발한 종교적 세계관으로서, 감성에 호소하여 신앙심과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두 사상은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화합하기도 하면서, 서양 문화와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 두 사상은 위에서 성격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서로 상반된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 문예부흥의 정신과 상통하는 동시에 리얼리즘의 바탕이 되고 종교개혁의 정신과 상통하는 동시에 로맨티시즘의 바탕이 되고 있다

 

1. 헬레니즘(Hellenism) 사상

(1)헬레니즘은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hellenIz ein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로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스 정신, 고대 그리스의 이상, 그리스 문화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며, 그리스인은 자기 나라를 헬라스라 부르기도 한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초 역사가 J. G. 드로이젠(1808~1884)에 의해 정의되었다.(헬레니즘사())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 문화까지 포함한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2)세계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표방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이것을 계발, 발전시키려는 삶의 방식 또는 이상이다. 헬레니즘은 인간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적, 본능적인 면의 추구로 볼 수 있다. 또 객관적으로 우주의 원리와 인간 행위에 대한 탐구에 몰두 했고,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밝히며, 그것을 체계화 했다. 헬레니즘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행동을 규범으로 삼고 그것을 함양하고 전수했다. 국가관에 있어서는 시민의 참여와 그들의 의견을 중요시 여겼다. 따라서 기술이 뛰어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는 될 수 있는 한 민족의 특성이나 특수한 생활 태도를 무시하고, 그 대신 아름다운 교양을 지닌 민족적 차별이 없는 인류를 이상으로 하였다. 문헌에서도 보면, 사물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조리있는 기술, 가공적일지라도 다양한 상상의 세계, 일상사나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 등이 담긴 문학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알렉산더 대왕은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고,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지만,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 철학 사상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그중에서도 헬레니즘을 대변할 수 있는 사상은 에피쿠로스(Epicuros) 학파와 스토아(Stoa) 학파이다. 이 두 사상 체계의 공통점은 영적인 것을 부정하는 물질주의 적이라는 점과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보편주의적은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사후(死後)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간의 행복은 현세에서 지적 만족, 검소한 생활, 우정 등을 통해 얻어지는 마음의 형정이 최고의 쾌락이며 행복이라고 했고(행복이 쾌락에 있다), 반면에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행복은 이성에 의하여 감정과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완전한 덕을 이루게 된 마음의 상태라고 했다.(행복이 금욕에 있다). 또한 자신을 전 우주적인 질서와 목표에 일치시킴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였고, 후에 헬레니즘 사상뿐만 아니라 후에 고대 로마를 거쳐 평등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헤브라이즘 사상

(1)헤브라이즘은 헤브라이 정신, 헤브라이인적인 습관, 문화 사상을 지칭한 것이다.헤브라이란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말로방황하는 자란 뜻으로 游牧民을 일컫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시대의 종교사상, 유일한 전능 신과 중개자인 모세, 그리스도교의 모태(母胎)인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하며, 헤브라이즘 정신은 신 중심적, 윤리적 인생관,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하여 헬레니즘과 서로 대립하는 유럽문화의 2대 원류이다. 넓은 뜻의 헤브라이즘은 품행, 복종(服從), 윤리(倫理)의 이상(理想)을 지상목표로 하는 인생태도로서, 인간이 아닌 신(), 즉 여호와 의지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생의 근본이념으로 삼았다.

    

 

 

(2)히브리인들의 유일신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그 실천으로서의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며, 그리스도교의 근간이 되는 구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자유로운 인간중심의 삶과 인생관인 헬레니즘적인 사고방식과는 달리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원죄사상, 현세와 내세에 대한 소망과 영적인, 금욕적인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영적인 만족을 추구하며, 다신적인 무신론적인 신앙을 배격하며 세속적인 인간중심의 현실 집착의 사고를 경원시 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순수하고 정결한 모습을 유지하게 되기를 원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은 자를 존경하며, 종교적인, 사회적인 지도자로 섬겼다. 그리고 주관적이며, 이상적인 평화의 세계를 갈망하였고, 예술적인 것에 치중하지 않았다. 문헌에도 살펴보면, 꾸밈없는 진실이나 신비스러운 세계, 때로는 역경과 고난의 한숨, 소박함 등을 찾아볼 수 있다.

 

3.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사상의 비교

 

헬레니즘(Hellenism)

헤브라이즘(Hebraism)

그리스

인간중심주의

지상낙원주의(현세지향, 현실적)

자유와 화해추구

그리스의 인본주의 정신

이교도적(다신교)

디오니소스적(뜨거운 감성)

불의 이미지(상승작용)

원심력 지향(발산) -> 세계로 향함

감성과 지성을 매개

현실지향의식(객관성)

발달 : 철학, 과학

합리주의

유태

신중심주의

천상낙원주의(내세지향, 이상적)

엄격과 경건 추구

이스라엘의 신본주의 정신

청교도적(유일신)

아폴론적(차가운 이성)

물의 이미지(하강작용)

구심력 지향(침잠)

이성과 덕성을 매개

이상지향의식(주관성)

발달 : 신앙, 예술

신비주의

 

그리스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헬레니즘을 인간중심적육체적 본능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적영혼적금욕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전자가 현실세계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 사고에 의해서 과학의 세계에 진력하는데 비해, 후자는 이상 세계에 바탕을 두고 주관적 사고에 의해서 신앙의 세계에 진력하는 상반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인본주의에서 출발하여 로마의 향락주의, 근대의 르네상스와 인본주의, 계몽주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로 그 맥을 이어갔고, 헤브라이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정신과 또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로마의 기독교와 중세, 종교개혁 등으로 그 맥을 이어갔다.

 

M.아놀드(Arnold Matthew, 1822~1888)헬레니즘의 최고 이념은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일이며, 헤브라이즘의 최고이념은 행동과 복종이다. 이 차이는 도저히 말살될 수 없다라고 하여 이 말에서도 충분히 두 사상의 특징을 엿볼 수가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_%EB%8F%84%EC%84%9C%EA%B4%80

http://gujoron.com/xe/aesthetics/8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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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cm.kr/dic_view.php?nid=37458

http://blog.daum.net/ynkimf0902/7300124

http://banni.interpark.com/column/view.html?section=2&wno=94&webzine_person_seqno=38

http://k.daum.net/qna/view.html?qid=0EzZd

    

    

 

2부 끝. 3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