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비잔틴ㆍ로마네스크ㆍ고딕
Ⅰ.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5
본 연재 글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편에서는 5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중세의 시작”에서는 로마의 분할 이후의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며,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에서는 왕과 교황의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미술과 도상”에서는 특히 중세미술에 나오는 미술 속 도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는 중세미술 전반과 초기 기독교 미술 및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부. 중세의 시작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3부. 미술과 도상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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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기독교와 신을 위한 도구
중세는 로마멸망이후부터 르네상스시대까지 약 천년동안의 시기를 말하는데(5~15세기), 동유럽에서는 비잔틴양식이, 서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으로 전개되었다. 중세시대에는 문화적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으로 이동하며,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관심사가 현세에서 내세로 이동했다. 교회권위가 강조되어 미술은 일종의 종교의 시녀가 되었고, 예술에 있어 소위 암흑시대라 일컫기도 하는데,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각 양식을 통해 중세미술의 특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선 비잔틴 미술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330년부터 1453년까지 지중해 동부지방에서 번창한 예술이다.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이 뛰어났으며 동서문화 즉, 동방 오리엔트의 사실주의와 서양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하였다. 거칠게 그려진 얼굴, 크고 무의미한 눈 및,딱딱한 구성, 체계적 배열, 상징의 사용과 같이 특수한 기독교적 특징을 보였다.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사용한 모자이크가 특히 유명한데 색유리를 구워서 채색효과를 내었다.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가 뛰어나고 반사경역할을 하여 환상적,신비적 분위기를 냈기에 비잔틴의 추상세계에 적합했다고 믿어진다. 이는 서유럽 로마네스크에도 영향을 주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주교의 입장><테오도라 황후와 그녀의 시종들> 등이 대표적인데, 차분하고 유아하면서도 감정이 절제되어있고, 권위와 경건함이 느껴지며, 부하의 발을 밟고있는 황제의 오른발이 권력을 상징하는 등 생략법과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이 특징이다.
자그마한 나무판에 그린 그림인 성상화(Icon)은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주로 성자와 성가족을 그렸다.
비잔틴의 건축양식의 최고봉으로 <하기야소피아대성당>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성스러운 지혜’란뜻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스탄불에 건립한 대성당이다. 축구장 3배의 크기로 로마의 직사각형 바실리카에 거대한 돔을 얹은 형태로, 로마건축의 거대한 스케일과 동방의 신비스런 분위기가 어우러져있다. 비잔틴 건축공학의 승리인 삼각궁륭에 의해 가능했는데, 4개의 아치가 정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돔을 지탱한다.
이처럼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로마 고전문화를 보존하면서 서유럽에 전파했으며, 후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로 로마네스크 양식은 11-12세기 중세유럽전역에 걸친 양식으로 비잔틴이 동방적 기독교라면, 로마네스크는 서방의 기독교적 미술양식이다. 고대 로마의 석조 건축과 유사하여 로마와 같다는 의미로 19세기에 고안된 말이다. 프레스코와 템페라기법의 벽화가 제작되었으며, 로마스런 전투적인 힘찬 터치, 대담한 채색법이 특징이다.
건축에 있어, 원통형궁륭과 교차궁륭을 주로 썼는데, <피사사원><생 세르냉 대성당>에서 보듯이견고하고,고요,평안,유연하다. 고딕양식과 비교했을 때, 로마네스크 교회는 둥근아치와 양식화된 조각이 눈에 띠며, 어둡고 엄숙하며 외부장식도 비교적 단순하고 엄격하다. 반면에 고딕성당은 뾰족한 첨두아치와 자연스러운 조각에, 밝고 경쾌하며, 외부에 다양한 조각상을 보여준다.
조각은 건축의 상인방 위, 아치아래 반원형 공간인 템파늄의 부조조각이 눈에 띠는데, <생 라자르성당>에서 보듯이 석조판에 그리스도와 악마의 이야기 등 교훈적인 교리를 새겨넣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딕양식은 13-14세기 중세 후기 유럽에서 성행했으며,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조각,회화,공예까지 확대발전되어 중세미술을 가장 완벽한 구현해냈다. 고딕성당은 위로 상승하는듯한 수직성, 지도자의 정치적,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뾰족한 첨탑(첨두아치)을 보이는데, 이는 하늘에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프랑스 노트르담대성당, 샤르트르 대성당, 랭스대성당, 아미앵대성당,퀼른대성당 등이 대표적이며, 크고 넓은 창의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특징적이다.
특히 <샤르트르 대성당>은 샤를마뉴의 손자 샤를드 발드가 성모경배를 위해 건립했는데, 896m의 일명 장미창이라 불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적이다. 이는 늑골궁륭과 부연부벽이라는 외부버팀목에 의해 가능했으며, 밝은 빛의 광선이 스테인드글라스와 만나 신비롭고 경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세 직조인들이 양모나 실크를 써서 고도로 섬세하게 만든 타피스트리로 성이나 교회의 차가운 석조벽을 장식했는데, <사로잡힌 유니콘>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탈리아의 고딕회화는 다른 유럽회화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피렌체학파의 지오토는 회화에서 주제와 양식측면에 변화를 가져와 르네상스 회화 탄생을 예고하면서, ‘서구 사실주의의 창시자’로 불려지게 된다. 그의 프레스코화 <그리스도를 애도함>(1305)는 마치 실재사건을 보는듯한 비극적 장면의 사실주의적 작품으로 중세평면회화에서 벗어나 실감나게 묘사해냈다. 고전적인 원근법(일명 무의식적 원근법)에 보여지며 부드러운 형태묘사와 생동감이 특징적이다. 지오토 외에도 두초, 마르티니, 로렌제티, 랭부르 형제를 비롯, 조각가 피사노,로렌조 기베르티 등이 대표적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미술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미술 등 14세기까지 신의 지배와 중세 교회의 권위아래서 모자이크,회화,조각품 등이 만들어졌으며, 사실적 묘사나 화가의 자율성은 배제되었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였다. 종교적,상징적,초자연적 성격을 띠었고 교회건축의 눈부신 발전과 카타콤벽화 등을 남겼다.
중세미학의 배경인 플로티노스의 빛의 상징주의와 고딕건축과 연관지어
인간의 영혼과 초월적인 신성함을 표현했던 비잔틴과 중세서유럽의 예술은 바로 플로티노스 미학의 기독교화였다. 3세기경 이집트 출신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는 플라톤 예술론을 ‘빛의 상징주의’로 계승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태초 가시적 세계의 배후에 선,미,일자의 The one이 있는데, 여기서부터 빛이 나와 정신이되고, 또 빛이 흘러나와 영혼이 되며, 영혼이 우리가 보는 자연을 만들었으며, 영혼이 다시 자연속에 들어가 식물,동물,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곧 빛의 자손이며, 정신-영혼-자연이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플로티노스에게 아름다움은 정신적인 빛이며, 미란 순수한 예술정신, 즉 예술 그 자체이다. 플로티노스의 미학은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미는 완전성과 광휘(빛)이라는 말로 계승되는데, 빛은 신을 상징하며, 중세의 아름다움은 당연히 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13-14세기 고딕성당은 바로 이러한 신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 장소이자 체현장이었던 것이다.
동방의 아름다움,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5~10C) _ 도상의 근원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이 쇠퇴한 후 동로마제국(395~1453)을 중심으로 4세기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약 1000년에 걸쳐 번성한 기독교미술로서 그 중심지는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즉,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제작된 그리스적 모티브와 융합된 기독교미술을 지칭한다. 이 도시는 원래 비잔티움으로 불렸으나, 콘스탄티누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하였으며, 이슬람세력에 의해 정복당한 후 이스탄불로 불려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풍부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는 비잔틴미술은 절대전제군주 통치 아래 반성한 궁정적 기독교미술로서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전성기를 누렸다.
비잔틴미술은 지적이고 그리스적인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 초기적 특징을 라벤나미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404년 로마의 황제 호노라우스는 아드리아해와 동쪽으로 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웠기 때문에 수도를 라벤나(Ravenne)로 옮겼는데 476년까지 이 해안도시가 로마의 수도였던 동안 라벤나는 오리엔트와 이탈리아반도 양식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493년경 살해되자 귀족인 벨리사리우스가 라벤나를 탈환하여 동로마황제 유스티니아누스1세(483~565)에게 바침으로써 라벤나는 동로마미술의 풍부한 보고(寶庫)가 되었다.
라벤나 회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궁정예배당이었던 산 비탈레(San Vitale) 성당의 모자이크(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동로마제국의 통치형태인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를 반영하는 것으로 유스티니아누스가 법률로 선포한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에 따른 ''삶의 의식화(儀式化)''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즉, 모든 복잡한 것,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배제되고 단순, 명료, 일목요연하며 일체의 서사시적, 일화적 정경은 완전히 상징적 장면으로 승화되고 있다. 라벤나 조각에 있어서도 이차원적이면서 상징적인 비잔틴 양식이 우세함을 알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1세는 제위 중 귀족 벨리사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동쪽으로 침입해온 페르시아 세력 축출하고, 다시 벨리사리우스가 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를 정복하여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바침으로써 로마제국의 부흥이란 이상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경제적 부흥에 바탕하여 534년경에는 로마대법전(이른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했고, 537년에 제국의 기술과 재력을 총집결하여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이 성당건축은 논리, 비례, 질서 등 그리스적 선호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비잔틴건축은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에 둥근지붕(coupola)를 덧붙임으로써 건축물 내부의 갖가지 공간부분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이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열주에 의해 신랑(nave;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건축에서 입구에서 애프스나 익랑에 이르는 중앙 회당)과 측랑이 나뉘어지고 측랑과 나르텍스(narthex; 배랑으로 번역하며 교회의 횡단 현관 홀을 일컫는 것으로써 때로 닫혀있지만 흔히 아뜰에 이르도록 한쪽을 열어놓기도 한다)에는 계상랑이 붙어있다. 중앙부에는 네 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는 대아치와 펜덴티브(pendentive; 사각형이나 다각형의 채광층으로부터 돔의 둥근 기부나 받쳐진 고형부로 내리뻗은 구조물)로 지탱된 대원개에 덮여 동서아치는 반원개로, 남북아치는 563년 중수될 때 개축된 대공벽(버트레스)으로 보강되었다.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현대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갈라져나온 정확한 시점을 잡을 수는 없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중요한 분수령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기 306년경부터 1453년까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이 나라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했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쇠퇴기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수도를 수복하고 제국을 제건했으나, 14세기의 내전으로 비잔티움은 국력을 소진했다.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 후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 로마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비잔틴제국의 전사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로운 국면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
8∼9세기에 걸쳐서 성상숭배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재흥기
13세기에 터키인의 침입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의해 붕괴
우상파괴운동
725년쯤 동로마 황제 레오3세는 모든 화상을 우상이라 하여 제거하라는 칙령을 공포했다. 그 전의 종교회의, 동서교회가 한 자리에 모였던 마지막 만국공의회는 기독교에 대한 그리스인의 시각문화의 영향을 인정하면서 말씀의 절대적 우위를 뒤집어버렸고, 692년에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통한 은총과 진리의 형상을 합법화한 최초의 결정은 강생교리에 대한 이미지도그마를 확립시켰다.
우상파괴운동(Iconoclasm)은 실제로 예술배척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일반을 박해한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예술만을 대상으로 한 것 즉, 공격의 대상은 종교적 내용을 가진 예술작품이었을 뿐 장식적인 회화에는 관대했다.
1) 운동의 배경은 주로 정치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공인되기 이전인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조형예술작품을 예배용으로 활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카타콤베에서도 엄격한 제한 속에 부분적인 표현만 허용되었다. 즉 초상화는 금지되고 조각은 기피되었으나 상징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만 허락했던 것이다. 5세기에 들어 예수를 독립상으로 그린 초상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예수 상이 종교적 그림의 표본처럼 되어 마침내 일종의 부적과 같은 기능을 갖게 되었다.
2) 우상숭배금지와 간접적으로 관계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감각적, 심미적 문화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반감이었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 3세가 성상금지령을 내린 것은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보다 성상의 숭배를 금지함으로써 그가 얻으리라 기대했던 계몽적 효과가 더 중요했다. 또한 계몽의 목적보다도 더 중요한 상층의 교양계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3) 일체의 성상을 가지지 않은 회교도 아랍인들이 거둔 혁혁한 전과가 기독교도들로 하여금 우상파괴를 자극했다.
4)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동기는 황제와 그의 추종자들이 부단히 증대해가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데 있다. 이러한 수도원은 기적을 이룬 성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한한 재물과 명예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레오 3세는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던 가장 유력한 선전무기(聖像)를 빼앗아버림으로써 수도원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에서는 한 세기가 넘도록 두 파의 대립이 계속
- 성상파괴론자 : 재속 성직자, 궁정, 군인들
- 성상옹호론자 : 정규 성직자, 승려, 주교
최종적으로는 성상옹호론자의 승리로 귀결
787년 제2차 니케아공회를 통해 기독교에서 이미지의 합법성이 조금씩 인정되기 시작했다. 2차 니케아회의의 후계자들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른다''는 교리 확립
비잔틴미술의 전개과정은 유스티니아누스 통치기간으로부터 우상파괴운동 말기까지를 전기, 마케도니아왕조(867~1056)로부터 코므네노스 왕조(1081~1185) 시대까지를 중기, 팔레올로고스 왕조(1261~1453) 통치시대를 후기로 분류한다. 특히 우상파괴운동의 영향으로 조각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까닭에 삼차원의 예배상 대신에 성화(聖畵, Icon)가 발달하였다.
비잔틴미술은 분명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기품있고 풍족한 귀족적 양식으로서 그 제한 내에서 신을 찬미하고 동방교회의 교리화된 신학과 불멸하는 의식 내에서 상상력 확대로 진보한다. 그 미술의 영향은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동유럽(특히 정교권) 문화의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비잔틴미술은 러시아로 승계되어 1917년 사회주의 혁명때까지 러시아정교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산 비탈레 성당 (Basilica di San Vitale)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앙집중식 성당으로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면서 서유럽의 비잔티움 미술과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 건축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여덟 개의 라벤나 건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은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며 웅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또 베들레헴의 성탄사원(聖誕寺院) 건립 등의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비잔틴 건축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건립된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과 그즈음 재건(콘스탄티누스 황제 창건, 3세기 소실)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다. 전자는 성(聖) 세르기우스 사원, 갈라플라시디아의 묘당(廟堂)과 더불어 팔각당 형식을 취하는 집중식이다.
다수인이 모여 제례의식을 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원(圓)에 외접(外接)하는 8각(角) 또는 방형(方形)의 플랜 위에도 돔(円蓋)을 씌운 형식으로 된 것이다. 이 형식은 그때까지의 지중해 양식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형식인데, 방형 플랜에 몇 개의 아치를 써서 돔을 얹는 식의 공법은 3세기 이래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궁정에서 채용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패널화
아치형 채광창 위의 트리포리움에는 아브라함과 멜키체덱의 이야기, 이사악의 희생 등 구약성경 속의 희생 이야기들을 묘사한 모자이크
http://commons.wikimedia.org/wiki/San_Vitale_(Ravenna)?uselang=ko 산 비탈레 성당 미술
http://ko.wikipedia.org/wiki/%EC%82%B0_%EB%B9%84%ED%83%88%EB%A0%88_%EC%84%B1%EB%8B%B9
성 소피아 성당 (Sancta Sophia )
성 소피아 사원은 소(小)아시아 출신인 두 사람의 그리스 건축가의 손으로 완성을 본 것이다. 대(大) 돔으로 덮여져 있는 정방형의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대(大) 돔을 받치고 소(小) 돔을 세 방향으로 배설(配設)하여 그 중압(重壓)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서 바실리카 형식을 구성하고 있다. 이 공법은 가공할 때 돔의 중량을 역학적으로 분산·배분하는 훌륭한 역학계산(力學計算)을 근거로 성립되어 과학과 미(美)의 결합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 형식의 특색은 오늘날의 건축에서 말하는 셸 구조와도 공통되며, 내관과 외관이 전적으로 일치하고, 모든 공간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에 있다. 단지 선(線)의 강조에 치우치기 쉬운 서방(西方)의 바실리카식에 대해서 돔-바실리카식을 완성케 한 비잔틴 건축은 항상 기둥의 직선과 돔, 아치의 곡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이스탄불에 있는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비록, 겉 보기에는 가톨릭 성당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대식으로 보자면 이슬람교와 관련이 크다. 실제로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404년, 비잔티움 제국 시대
1453년, 오스만 제국 시대
http://commons.wikimedia.org/wiki/Hagia_Sophia?uselang=ko 성 소피아 성당 미술
비잔틴 건축,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 건축은 바닥은 대리석의 모자이크, 벽면에도 색대리석판(色大理石板)이 붙여진다. 색대리석의 이용은 로마 시대 이래의 전통이었으나 대리석 자체의 반문(斑紋)을 이용한 구성적인 도양(圖樣)을 만들게 된 것은 처음 있은 일이었다. 벽의 위쪽, 아치·돔·천장 등은 금색을 바탕으로 하는 다채로운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또 힘차고 우아한 공예품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다.
집중식에 알맞는 돔 공법(工法)과 장방형의 바실리카식과의 융합은 주로 돔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에 반원통형을 붙이는 그리스-크로스형(正十字形) 플랜으로 시공되고 사방을 소돔으로 둘러싸는 방법도 쓰였다. 후자의 좋은 예로서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사원이 있다. 비잔틴의 건축은 석재축조(石材築造)보다는 연와축조(煉瓦築造)로 된 것이 많고 11세기 이후는 사라센의 영향도 있어 유약(釉藥)을 칠한 색(色) 타일이나 색연와(色煉瓦)도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architecture?uselang=ko 비잔틴 건축 미술
비잔틴 회화, 모자이크
비잔틴 시대의 회화는 모자이크가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자이크는 작은 각추대형(角錐臺型)으로 자른 색대리석을 석회벽 위에 줄 맞춰 끼워 넣어 회화나 도안을 그려내는 일종의 공예기술이다. 이미 폼페이 등에서도 우수한 예를 볼 수 있으나 고전기(古典期) 작품의 예(例)가 주로 방치장의 장식인 데 대하여, 비잔틴의 그것은 궁정과 관계가 있는 사원에 장엄함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것은 색대리석뿐만 아니라 뒷면을 도금한 유리, 색유리, 도자기 등의 소재도,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광택이 나며 색의 대비효과·표현효과 등 매우 화려하고 숭고함을 갖춘 것이었다. 비잔틴식(式)의 장려(壯麗)한 모자이크 기법의 성립은 6세기 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당시의 주요한 대사원은 대부분이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사원은 오래되고 총합적 완성미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으나, 15세기 터키인에게 점렴당하여 회교사원(回敎寺院)으로 개축될 때 두꺼운 석회질 벽으로 고쳐지는 바람에, 오늘에 와서는 일부밖에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오늘날 비잔틴 모자이크의 모습을 간직한 가장 좋은 예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있는 아리우스파 세례당(洗禮堂)의 <그리스도의 세례>, <열두사도>, 성 비탈레 사원의 <유스티니아누스와 그 종신(從臣)들>, <테오도라 왕비와 그 종신들>, <아브라함의 이야기>, 성(聖) 아폴리나레 인 누오브 사원의 <그리스도 일대기(一代記)>, 성 아폴리나레인 클라세 사원의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등은 모두 6∼7세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소재의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색의 선과 색면(色面)과의 대비, 금색의 바탕, 조형(造形) 등이 훌륭한 장식미를 낳고 있다. 여기에서 도상(圖像)면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성서의 도양(圖樣)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헤브라이인은 설화성(說話性)이나 서술적 창조성에 뛰어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천분(天分)을 결여하고 있다.
한편 라틴인의 자연주의적 사실, 소(小)아시아인의 세련된 공예기술 특히 금·은 세공에 보이는 감각, 또는 소아시아를 넘어서 멀리 중앙아시아로부터 전래된 것이라고도 생각되는 선적(線的)·추상적 묘사가 비잔틴이란 지점에서 합류, 일체화되어, 기독교 미술은 이 시대에 비로소 풍부한 설화로서의 성전(聖典)·성자(聖者)의 도상화(圖像化)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모자이크는 제작비가 많이 들므로 지방에서는 프레스코에 의한 벽화가 보급되었다. 표현 방식은 모자이크와 마찬가지이며, 다분히 동방적으로 도식화(圖式化)된 것으로서 그 유례(類例)는 오늘의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지방과 아드리아 해안에 잘 보존된 상태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비잔틴 장식사본
다른 분야와 같이 동방적인 것과 라틴적인 것이 합류되어 성립한 것이었으나 후대의 유럽에 있어서 사본류의 원형이 되었다.
http://ko.wikipedia.org/wiki/%EB%B9%84%EC%9E%94%ED%8B%B4_%EB%AF%B8%EC%88%A0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art?uselang=ko 비잔틴 미술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mosaics?uselang=ko 비잔틴 모자이크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paintings?uselang=ko 비잔틴 회화
중세미술의 영감,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 11~12C)
_ 기독교적 환상세계
로마네스크(Romanesque)란 말은 ''로마와 같은''이란 뜻으로 고대 로마 건축이 북방의 야만적인 민족에 의해 타락, 변질된 것이라는 경멸적인 의미에서 19세기에 고안된 용어로서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건물들이 두꺼운 벽과 아치가 있는 고대 로마의 석조건축과 닮았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세미술에 대한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로마네스크 건축기술의 독창성이 인정받으면서 건축 뿐만 아니라 조각, 회화에 있어서 독자적 형태와 색채의 원리도 규명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중세미술의 영감이라 할 수 있는 야만적 전통이 11, 12세기에 전형화된 것으로서 다양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특징을 지닌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 전 서유럽의 정세를 보면, 768년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가 프랑크의 왕이 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시대가 열렸는데 세속적 권력을 가진 것에 불과했던 메로빙 왕조와 비교해 볼 때 카로링왕조는 제정일치체제를 지향하여 기독교 교회의 비호자 역할을 자임함에 따라 중세 속의 문예부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특히 샤를마뉴는 그리스·로마의 고대문화의 부흥에 관심을 가져 궁정양식이 새롭게 부활했다.
그러나 834년 카롤링거 왕조의 몰락을 예고하는 베르덩 조약과 870년의 메르센 조약 이후 동서프랑크로 분리되고 이와 함께 국제 무역이 쇠퇴하면서 지방주의가 부상하였다. 이런 사회환경의 변화가 장원제도(莊園制度)에 근거를 둔 토지경제를 출현시켰고, 궁정 대신 수도원의 주도하에 교회가 점차 사회·문화의 중심지로 부각하였다. 수도원은 이미 샤를마뉴 시대에 문화의 중심으로 떠올랐는데, 수도원에 대한 샤를마뉴의 지원은 야만적인 이교도를 개종시키고 하나의 학문적 전통을 발전시키려는 복합적 목표를 가진 것이었으며, 프랑크의 수도였던 아헨의 궁정양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또한 의도적으로 로마제국의 양식을 부활시키려고 했었다.
936년 오토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수립과 함께 그 역시 로마양식을 표방했지만, 지역적 특징의 분화는 더욱 현격해졌다. 당시 교회는 중세 유럽에서 단 하나의 통일된 사회제도였으며 특히 수도원은 유일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기적을 일으키는 유물이 강조됨에 따라 성지순례가 발달하며 순례행렬의 주요 교차지점에 로마네스크 건축이 발달하였다.
a. 봉건제도가 낳은 교회미술인 로마네스크는 기본적으로 승려계급의 예술임과 동시에 귀족계급의 예술로서 단순하고 양식화된 기하학 형식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지를 반영
b. 로마네스크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그 이상 아무 것도 구할 바가 없는 안정된 공간 구현
c. 비교적 넓고 상징적이며 간소한 내부는 감상자의 눈을 끌어 그 내부에 머물게 하고 감상자에게 수동적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육중함을 특징으로 함 -신의 성채로서의 교회
d. 로마네스크 예술의 종교적 성격은 궁정사회, 도시당국, 국가의 중앙권력 등이 붕괴한 결과 실질적으로 교회가 유일한 고객이 되었다는 사정에서 예술품은 미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 제물, 헌납''의 연장. 즉 로마네스크 미술은 내면적인 비전의 논리를 기준으로 한 법칙을 따른 영적인 표현에 집중
건축
궁륭(Vault)을 사용한 교회건축은 지상의 요새처럼 두꺼운 벽체로 구성.
회화
건축의 육중함 때문에 생긴 많은 벽면을 프로스코로 장식. 특히 로마네스크의 성모상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천상의 여왕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한 로마네스크의 초상화는 공식적인 기념이나 전시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필사본 성서의 헌사(獻辭)에 해당하는 그림이나 교회의 묘비조각에서도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조각
로마네스크 조각은 원칙적으로 건축에 종속된 것으로써 특히 건물의 정면 출입문 윗부분에 형성된 삼각형의 벽면공간인 팀파늄(Tympanum)에 반자연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종교적 내용을 다룬 <최후의 심판> 등을 새긴 부조가 중요작품인데 이 부조에 표현된 인물은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을 택한 금욕주의자들로서 수도승들의 이상을 반영
<생 세르냉 성당의 정경> <생 세르냉 성당 팀파늄의 조각>
프랑스 툴루즈의 생 세르냉(Staint Sernin) 성당 : 툴루즈는 사도 야고보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순례여행길(Pilgrimage Road)의 전형적 예로서 바실리카를 기본으로 지면에 누운 십자가 위에 성체를 상징하는 첨탑을 올려 놓았다. 로마네스크 건축은 순례자들의 예배와 지역주민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피사의 성당과 종탑
1063년에 착공된 성당은 교차점(crossing) 위에 돔이 얹힌 십자가형의 바실리카
http://commons.wikimedia.org/wiki/Romanesque_art?uselang=ko 로마네스크 건축 미술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EB%84%A4%EC%8A%A4%ED%81%AC_%EA%B1%B4%EC%B6%95 로마네스크 건축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EB%84%A4%EC%8A%A4%ED%81%AC_%EB%AF%B8%EC%88%A0 로마네스크 미술
중세미술의 결정체, 고딕미술 (Gothic art, 13~14c)_ 사실주의의 부활
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인 고트족으로부터 나온 이름이지만 고트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인-특히 바사리와 같은 사람-들이 장세미술에 대해 막연히 ''야만적''이란 의미로 사용했던 말로부터 기원한다. 고딕은 일반적으로 1200년대로부터 1400년대에 걸쳐 나타난 새로운 기독교 미술을 지칭하며 중세 독일의 문서에 오푸스 프란키제눔(Opus Francigenum)이라고 적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처음에는 프랑스적 양식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고딕 양식이 지배하던 시대는 중세의 이상과 예술적 형태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서 제노바, 베네치아., 한자동맹의 육로 및 해상무역의 발달이 소도시의 번영과 성장을 촉진한 결과 소도시의 증가하는 부(富), 교회와 귀족의 후원, 새로운 세속적 생동감의 반영에 따라 로마네스크의 엄숙함을 대체하는 예술욕구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교회에 의한 십자군 소집을 통해 고무된 국제주의에 따라 강력한 왕권의 부상으로 수도원의 성직자들이 수행하는 시골풍의 교회보다 공동체의 사회적 중심지로서 성당(Cathedral)은 새로운 도시를 번영케 하는 영적 초점임과 동시에 물질적 중심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1) 로마네스크 양식이 수도원 중심의 건축이었다고 한다면, 고딕은 도시의 주교좌 성당이 중심으로서 시민계급적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따라서 고딕의 대성당 건축은 도시의 예술이요 시민계급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딕예술은 일면 로마네스크 예술에서 특징적이던 병렬의 원리를 주로 한 장식적인 구도를 지양하고 그 대신 집중의 원리에 입각한, 고전주의에 보다 가까운 양식을 도입하는가 하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장식적인 통일성이 지배하던 묘사를 모두 부분구도로 분할하였다.
2) 고딕 건물은 자체 내에 움직임을 담고 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감상자까지도 동원하여 예술감상이라는 행위를 일정한 방향과 단계적인 발전을 수반한 하나의 과정으로 바꿔놓는다(고딕건축의 미완성적 성격). 고딕 건축은 어느 쪽에서도 gssns에는 담을 수 없고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전체의 구조를 제시하는 완결되고 시선을 안정시켜주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그 위치를 바꿀 것을 강요하고 하나의 운동, 행동, 재구성이라는 형태로만 그 전체의 모습을 마음 속에 떠올릴 수 있게 만든다.
3) 로마네스크 양식과 비교해 볼 때, 건물의 벽체가 얇아지고 하중을 줄이기 위해 많은 창을 내었으며, 각 창마다 스테인드글래스로 장식함으로써 스콜라철학의 신비주의를 극대화했다. 즉, 12세기 이후로 성당은 스테인드글래스, 파이프오르간, 합창단의 노랫소리, 종소리 등이 어우러진 시청각공간이 되었다.
고딕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래스
<생 드니 성당의 평면도> 생 드니(Saint Denis) 성당 : 1137~40년 착공
아미앵 성당(높이 42.5m, 길이 145m)
사르트르(Chartres)의 노트르담 -조각원주(statue-columns)와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
파리의 노트르담
고딕건축은 ''교차리브궁륭''의 사용이 기본원리이다. 이것은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사용되었던 교차궁륭을 대각선을 이루는 리브(rib; 횡으로 천장에 맞닿아 궁륭을 떠받치는 가늘고 돌출된 아치형의 부분으로 궁륭의 부분을 분할하며 고딕건축에서 주로 장식적 용도로 사용), 측벽아치 및 횡단아치로 보강한 것으로써 이 궁륭을 바깥으로부터 공중부벽(Flying Buttress), 소형의 경우 및 지방에 따라 본당측과 직각을 이루는 부벽에 의해 보강한다.
이 구조는 여러 가지로 건축적 이점이 있는데 첫째, 궁륭의 하중이 측벽 전체에 걸리지 않고 , 측벽 아치를 버티는 기둥의 정점에 집중되므로 벽이 불필요해져서 창을 크게 만들 수 있고 석재가 절약됨은 물론 건축은 보다 경쾌해진다. 이 방식은 11세기 후반부터 영국 및 유럽 남부에서 적용되었으나, 12세기 중엽부터 프랑스 북부의 교회건축에 조직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윽고 도시의 발달과 함께 기술의 진보가 더해져 건축은 더욱 대형화하고 궁륭의 높이 또한 높아졌다.
고딕성당의 스테인드글래스
후기고딕(Late Gothic) 미술
중세 말기에 이르면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개인주의가 서앵하면서 무겁고 상징적인 것 대신에 가볍고 작으며, 사실적인 경향이 우세해진다. 특히 15세기에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사실주의와 이탈리아 화파의 영향이 섞인 궁정취미의 우아한 회화양식이 서구는 물론 프라하의 신성로마 황제의 궁정에까지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것을 후기고딕 또는 ''국제고딕 양식''이라고 부른다.
건축
쾰른대성당을 비롯하여 성이나 왕후의 관저(chateau), 도시의 공회당 등 세속건물이 성행함에 따라 이런 실용적 건물에도 국제고딕 양식이 적용되었다.
회화
랭부르형제의 베리공을 위한 기도서의 필사본 삽화
후기고딕의 왕후장상들에 의해 이동용 벽걸이인 타피스트리가 크게 애호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94%95_%EB%AF%B8%EC%88%A0 고딕 미술
http://commons.wikimedia.org/wiki/Gothic_art?uselang=ko 고딕 예술
http://ko.wikipedia.org/wiki/%EA%B5%AD%EC%A0%9C_%EA%B3%A0%EB%94%95 국제 고딕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94%95_%EA%B1%B4%EC%B6%95 고딕 건축
종교에 가려진 중세미술
찬란했던 그리스 미술의 전통이 이제 필요 없어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보다는 미술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봐야 한다. 중세시대가 요구하는 미술의 기능이 달라졌기 때문에 표현 방식도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중세를 신 중심의 인간관이 지배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와 자연현상을 신의 섭리나 메시지로 해석하고 평가했던 시기인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미술은 미술작품이라는 그 자체의 목적을 갖기보다 신의 메시지나 기독교의 교리 전달을 위한 보조수단으로 사용됐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던 시기로부터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에 이르기까지 미술양식은 많은 변화를 꾀했다. 그리고 이 모든 미술의 특징은 신 중심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개성이나 인간을 그린 것은 이 시대에 무의미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중세 말에 이런 양식에 대한 각성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그 후 지오토를 비롯한 화가들이 중세의 평면적인 회화를 현실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표현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소재나 주제에 대한 관심도 점차 인간적이고 주변 현실로 옮겨가는 움직임이 일었다.
교리서 속의 삽화나 교회 건축 및 그 안에 장식된 조각과 회화가 또 다른 하나의 복음서 역할을 했으며, 문맹자들의 교화용으로 쓰인 것이다. 영원하고 무한한 권능을 가진 신에 대한 이야기를 유한한 인간이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중세미술을 유지시켜 온 하나의 근간이었다.
사실적 묘사보다 상징성 강조
초현세적 분위기의 중세 초기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출현
르네상스로 이끈 천재 화가 지오토
이런 관점에서 중세미술은 神的(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유비관계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또 미술이 종교적 기능을 발휘하도록 이성적인 설명보다 사람들의 감성에 다가가는 형태를 취하게 됐고,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형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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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History_of_Europe?uselang=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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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ommons.wikimedia.org/wiki/Europe?uselang=ko 유럽 사진
http://en.wikipedia.org/wiki/Middle_Ages 중세
http://en.wikipedia.org/wiki/Early_Middle_Ages 초기 중세 시대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Early_Middle_Ages?uselang=ko 중세초기미술
http://en.wikipedia.org/wiki/High_Middle_Ages 중세중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High_Middle_Ages 중세중기미술
http://en.wikipedia.org/wiki/Late_Middle_Ages 중세후기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Late_Middle_Ages 중세후기미술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C%84%B8_%EB%AF%B8%EC%88%A0 중세미술
http://en.wikipedia.org/wiki/Portal:Middle_Ages 중세 포털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8m0941a 문화접변
5부 끝.
중세 미술 연대기 (500 ~ 1500)
| |||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중세 미술 (500 ~ 1500) | 중세 초기(Early Middle Ages, 476-1000) 중세 중기(High Middle Ages, 1000-1300) 중세 후기(Late Middle Ages, 1300-1453) 중세의 몰락(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1453년) 인쇄기의 발명(1456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1492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1517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
고대 로마 (753~476 BC)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 |||
| |||
아메리카 문명 (300~1533) | |||
아프리카 미술 (BC 3300~1800) |
본 연재 글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편에서는 5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중세의 시작”에서는 로마의 분할 이후의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며,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에서는 왕과 교황의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미술과 도상”에서는 특히 중세미술에 나오는 미술 속 도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는 중세미술 전반과 초기 기독교 미술 및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부. 중세의 시작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3부. 미술과 도상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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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서양 예술은 교합의 산물이다 에서 계속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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