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4

草霧 2013. 2. 21. 12:24

 

 

 

 

 

중세 미술 1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4

 

 

 

 

 

본 연재 글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편에서는 5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 중세의 시작에서는 로마의 분할 이후의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며, “2.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에서는 왕과 교황의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 미술과 도상에서는 특히 중세미술에 나오는 미술 속 도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4.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는 중세미술 전반과 초기 기독교 미술 및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중세의 시작

2.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3. 미술과 도상

4.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4.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종교미술, 중세미술

 

중세를 그리스로마의 고전시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낀 ''암흑기''로만 파악하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중세의 역사를 보면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가 지배적이던 초기로부터 宮廷騎士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는 도시 및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로 이질적 사회와 문화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부터 르네상스가 태동하기 시작한 약 1000년의 기간을 중세로 묶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 특징적이었던 단순화와 양식화의 경향, 공간적 깊이나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나 기능을 무시한 비자연주의적 취급 등이 중세의 전 시대에 걸쳐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종교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중세미술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던 중세시대는,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억압되어 흔히 암흑기라고도 불리운다. 하지만 사실 중세에는 다른 시기 못지 않게 화려하고 다양한 미술들이 있었다. 물론 후기 르네상스를 비롯한 여타 미술들과의 차이는 분명하겠지만, 신의 은총과 종교적 열망을 표현하기 위하여 중세미술 나름의 번영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 신이었기에, 중세미술은 황금과 같이 반짝이는 재료를 사용하고 스테인드글라스, 모자이크를 이용하여 굉장히 화려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산 파울로 대성당의 바실리카>

 

로마 4대 대성당 중 하나로 꼽히는 산 파울로 대성당의 바실리카다. 본디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큰 홀을 뜻하는 바실리카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되며 나타났다. 과거 지어진 신전들은 모두 이교도의 것들이었기에, 기독교도들은 그들만의 신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예배장소로 만들어지고 사용되는 것들이 위와 같은 바실리카, 4세기부터 발달한 초기 기독교의 장당식 평면 성당건축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이 필요했던 이유를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전 다른 종교의 신자들은 신전 밖에 모여 예배를 드린 반면 기독교의 신자들은 교회라는 신전 내부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러한 차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중세미술은 이렇게 교회를 중심으로 거진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속된다. 그러면서 유럽의 동쪽과 서쪽은 상당한 차이를 가지며 저마다의 중세미술을 이룩하는데, 먼저 소개할 것이 동유럽의 비잔틴미술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

 

비잔틴미술은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의 5세기부터 15세기 무렵까지의 미술을 일컫는다. 이스탄불, 즉 비잔티움에 위치한 <성 소피아 대성당>과 같이 건축에서는 원형의 돔과 내부 모자이크 장식을, 회화에서는 성경필사본 장식이나 칠보기술들을 특징으로 한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모자이크는 반짝이는 재료를 쪼개고 붙이는, 앞서말했듯 화려한 양식의 대명사인데 위의 모자이크는 예수가 행하였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사실적인 표현을 주로 하였던 그리스 미술보다, 이집트 미술의 표현과 유사한데 아마 종교적 목적을 강하게 띄어서가 아닌가 추측해본다.

    

<옥좌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1280년 경의 이콘화이다. 이콘(Icon)은 성상(聖像)이란 의미로 종교적으로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정형화된 작품을 의미하는데, 비잔틴미술의 대다수가 이콘화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양식의 대표적 특징으로는, 성모 뒤로 보이는 저 황금빛 배경이다. 그리고 이 옥좌에 앉아있는 성모자의 모습을 보면, 앞서 첨부한 모자이크나 이집트미술의 딱딱한 양식성에 부가하여 어느 정도의 양감을 덧댄 그리스의 사실적 묘사까지 동시에 갖췄음을 알 수 있다. 성모의 얼굴과 손에 드러난 그림자, 옷주름이나 옥좌의 형태에 나타난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다.

    

<린디스판 복음서>의 한 페이지, 채색사본 · <성 마태오>,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과거의 성서는 모두 필사본의 형태였는데, 이렇게 손으로 글을 쓰는 중간중간 그림이나 문양을 집어넣었다. 왼쪽은 용이나 뱀을 복잡하게 꼬와 넣은 십자가 도안을 그려내고 있다. , 오른쪽에 보이는 <성 마태오>와 같이 성인들의 모습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성인의 집중력과 전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주의적인 특징도 찾아진다.

 

이집트미술은 알고있는 것, 그리스미술은 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중세의 미술가들은 점차 자신이 느낀 것들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유럽의 비잔틴 미술은 근 천년간을 위와 같은 일관된 특징을 유지하는데, 그와는 달리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 미술은 양식적 실험을 지속적으로 구가한다.

    

<생 새르맹 대성당>, <더럼 대성당>

 

위에 보이는 건물들이 10세기 말에서 12세기 사이 서유럽의 미술 양식, 즉 로마네스크 미술인데, 이들은 교회를 하나의 성채로 악으로부터 성도를 구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 이로 인해 두꺼운 벽과 원통형 궁륭, 둥근 아치, 작은 창문등의 특징을 보이며 이후 고딕양식과 비교했을 때에 상당히 둔탁한 느낌을 갖게되는 것이다. 또한 내부에 있는 많은 장식품들 역시 성서의 묘사에 아주 밀접한, 이집트 미술처럼 딱딱하고 양식화된 전통을 갖고 있다.

    

<수태고지> 스바비아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1150년 경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를 예고하는 신약 <수태고지> 역시도 로마네스크 미술에서는 굉장히 평면적이고 추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오는 고딕양식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 <사르트르 대성당>

 

고딕미술은 12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서유럽 전반에서 유행하는 미술 양식으로, 회화에서는 사본회화가 성행하였으며, 성당건축은 높은 첨탑과 뾰족한 아치,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전의 로마네스크 미술이 신도들의 보호를 위해 둔탁한 성과 같은 건축을 추구했다면, 이어지는 고딕 미술은 하나님에게 보다 가까워지고 싶어하며 높이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러한 높이를 강조하여 건물을 높게 쌓다보니, 자주 무너지고 다시 지어가며 건축공법의 발달까지도 이루어냈다. 높이를 위해 벽이 점차 얇아지며 첨형 아치의 모습도 나타낸다.

    

<사르트르 대성당 북쪽 현관 부조>

 

로마네스크나 이집트미술과 달리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가는 모습 또한 특징이다.

    

<스테인드글라스, 그 화려함>

    

<성 프란시스의 제단화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 Bonaventura Berlinghieri(1221~1274) >

 

이 작품은 중세 고딕 양식의 르네상스로 이행하는 초기의 작품으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 회화에서 주도적이었던 비잔틴 양식, 즉 그리스적이라는 의미의 '마니에라 그레카'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중앙 성 프란체르코의 오른편 중앙의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성인을 포함한 수행원들은 얕은 공간에 겹쳐지듯 배치되어 있으며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풍경은 선적으로 단순화된 산의 형태로 묘사된다. 중앙의 성인은 종이 인형과 같은 딱딱한 자세에 입체갑을 찾아볼수 없이 오로지 크기와 형상으로서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나 한 편으로 일화 속의 성흔을 입은 성 프란체스코의 얼굴에서는 아픔과 성스러움의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제한적이나마 산의 풍경이나 건물들에서 명암 표현이 시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그리스도를 애도함 조토 1304~1306, 중세 미술을 벗어나서 르네상스 미술, 서양미술의 출발을 연 조토>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ocxxx&logNo=80174345355

 

 

초기 기독교 미술 (Christian art)

 

기원 1세기 초, 기독교가 생겨난 이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 관용령(寬容令)이 공포(311)되기까지의 300년간 가까이 이 신흥종교는 역대 황제에게 계속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제정(帝政) 말기에 정신적 구제를 찾는 기독교인들은 날로 증가해 갔다.

 

1세기에서 시작되어, 5세기경 동방에서 비잔틴 미술, 서방에서는 메로빙거 왕조 미술의 시대가 출현하기까지, 주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미술을 초기 기독교 미술이라고 부른다.

 

초기 기독교 미술의 탄생이 상당히 늦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신인 유대교가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신학자 사이에도 그의 옳고 그름을 둘러싼 논쟁이 있어 종교미술로서의 발생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제의 박해로 인해 공공연한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타콤베의 미술 (Catacombae)

박해를 피한 그들은 지하묘실에 제실이나 예배실을 만들어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이 지하 제실을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로마 주변 특히 아피아 가도를 따라 만들어진 상 칼리투스, 도미틸라, 프레테스에 있는 것이나 로마 시내의 상 아그네제, 프리실라에 있는 것이 유명하다.

 

카타콤베 내부는 지하에 여러 층을 이루면서 종횡으로 뚫린 갱도를 파서 주위 벽면 곳곳에 사자를 모시는 감실을 배치하고, 여기저기 광장을 만들어 이곳을 그들이 예배 장소로 사용하였다.

 

벽이나 천장은 벽화나 부조를 이용하여 장식하고 있다.

 

카타콤베의 장식 양식 중, 초기는 폼페이의 벽화 등과도 공통점이 많은 헬레니즘 미술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주제는 신이나 복음서의 내용 자체가 아니고 허다한 상징을 통한 표현이 행하여졌다. 자기들의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가장 소박한 이유에서 생겨난 초기의 장식은 식물이나 신화의 세계를 묘사한 세속적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주제에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자 단순한 장식도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상징적 도양으로서는 목자(나는 선한 목자로다, 요한복음 제10), 포도 무늬(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요한복음 제15), 어린 양(보라 신의 어린 양, 이사야서, 요한복음 제1) 등은 성서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 밖에 전원 풍경과 로마 신화에서 취재된 낙원의 그림 등은 기독교의 천국의 상상도로서 전용되었다.

 

이러한 목가적 표현은 헬레니즘 미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 외에 불후를 나타내는 공작, 성령이나 죽은 자의 영을 천상으로 옮기는 사자로서의 비둘기, 부활을 의미하는 불사조 등이 기독교적 상징으로 자연주의적 표현에 의해 취급되었다.

 

상징적 표현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PX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물고기(그리스어로 '신의 아들 예수, 구세주'의 두 문자를 조합하면 물고기의 의미가 된다는 데서 유래된다), 또는 신에게 기도하는 인물(오란테), 신자의 상 등 신앙 자체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표현이 발견된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것이나 선각이나 일종의 프레스코로써 표현되었다. 4세기 초, 기독교가 공인되어 지상에 나온 후에도 5세기경까지 계속하여 제작되었다.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Catacombs?uselang=ko 카타콤 미술

 

 

바실리카식 교회당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해 지상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은 사도 순교의 땅을 비롯하여 요소에 교회당을 건설하였다. 기독교 교회와 고전시대의 종교적 신전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단순히 신이 거처하는 집인 데 대해, 후자는 신의 주거인 동시에 신도가 그곳에 모여 예배상의 의식이나 집회를 행하는 장소였던 점에 있었다. 따라서 후자는 제실 이외에 보다 큰 공간이 필요하였다.

 

초기 기독교가 채택한 교회 건축의 한 양식은 바실리카식이었다. 고대사에 거래소·재판소 등,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공공건물 형식과 유사하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바실리카식 회당의 기원은 근년에는 교도 박해가 적었던 오리엔트 지방에 있던 교회 건축과,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민가 양식이 구 바실리카에 상호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이 형식은 그 후 중세를 통해 교회 건축의 원형이 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평면도에서는 우선 교회당 전면에 넓은 아트리엄이 있고, 여기에는 성천분수가 있는 수가 많다.

 

다음 입구에는 참회자가 머무는 작은 방인 나르텍스가 있고 그 안쪽에 본당이 있게 된다. 당내는 입구에서 제단까지 잇닿은 좁고 긴 네이브를 사이에 두고 양측으로 일렬 또는 2열의 계단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줄지은 기둥으로 나뉘어 있다. 제단 앞에는 승려가 의식을 행하기 위한 장소인 비머가 네이브와 직각으로 폭넓게 교차되어 있다.

 

비머는 후세, 특히 중세의 트랜세프트(좌우에 붙은 낭하)로 발전하여, 자형 플랜을 구성한다. 후기에는 비머 앞에 성가대석이 놓인다. 또한 제실의 후편은 반원형으로 튀어나오게 한 애프스로 되어 있다.

 

구조는 고대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네이브가 아일보다 높고, 여기에 채광(採光)을 위한 높은 창이 있다. 기둥은 네이브의 주벽(主壁)을 받치기 위해 창과 평행으로 세워졌으나 아치 구조가 발전됨에 따라 기둥 사이는 넓어진다. 지붕은 처음에는 목조(木造)의 박공 형태였으나 후에 석조의 아치 구조로 발전하였다. 애프스의 지붕(石造) 내부 및 제실과 네이브를 구분하는 아치형 부분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다.

    

<라테라노의 성() 조반니>                                    <성 파울로 폴리 레 무라>

 

바실리카식()의 주된 예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운 성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라테라노의 성() 조반니, 성 파울로 폴리 레 무라(폴리 레 무라는 성외란 뜻) 등이 있으나 모두 그 후의 개축(改築)으로 원형(原型)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5세기에 건립된 성()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성 사비나 사원, 성 클레멘테 사원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성 사비나 사원>                   <()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집중양식

초기 기독교 시대의 건축 방식으로 집중식이 있다. 로마 시대의 묘당·욕당·신전 등으로부터 발달하여, 주로 세례당의 건축양식으로 쓰였다. 기둥의 열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원당 또는 팔각당 형식이다. 로마의 성 콘스탄차는 묘실로부터 개축한 집중식의 좋은 예이다.

    

<콘스탄틴의 세례당>

 

모자이크

교회 건축은 이탈리아의 강한 일광을 피하여 두꺼운 벽으로 덮여 있으나, 이러한 큰 벽면을 메우는 데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모자이크였다.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폼페이나 엘코라노를 거쳐 발달된 모자이크화는 힘찬 선과 호화로움을 표현하는 점에, 새로이 세력을 넓혀가는 기독교 미술의 정신과 동방적인 취향에 적합한 바가 있었다.

 

초기는 아직 카타콤베와 공통되는 헬레니즘적 목가적, 또는 장식적인 소박한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 있었으나, 4세기 말의 산타 푸덴치아나에는 12사도에 둘러싸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거리와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십자가를 눈앞에 그리는 장면이 있다.

 

5세기 초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서쪽에 신·구약 성서가 벽면에 도해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국가 보호하에 적극적인 태도로써 새로운 권위로 등장해 간다는 사실의 표현인데, 표현 방법은 오히려 종래의 자연적 형체를 추구하는 사실적 방법을 벗어나 인상적·추상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형체의 간결과 강조를 통하여 교의 설명을 용이한 것으로 하는 동시에, 기독교 신앙의 모체가 된 동방의 전통이기도 하였다.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사원>

 

조각 <선한 목자>란 대리석상(3세기 말) 또한 공예에도 대개 로마 시대의 것을 계승한것으로 기독교적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도상이 그려진 유리 제기 등에 다소 볼 만한 것이 있을 뿐이다.

 

 

중세 초기 미술

 

 

로마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4세기경부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각지에 침입하여 새로운 지배자로서 정주(定住)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전역에 퍼져 있던 기독교는 이 지방민족(地方民族) 사이에도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교(異敎)나 아리우스파(4세기 전반에 비잔틴제국의 교회내에 일어났던 이단파)를 믿고 있던 그들의 지배자도 57세기에 걸쳐 점차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마침내 프랑크제국을 중심으로 서구적 기독교 미술이 형성되는 길이 열렸다.

 

고대제국의 붕괴로부터 소위 로마네스크 미술이 생겨났던 10세기경까지의 사이를 넓은 의미의 중세초기라고 부르고 있다. 8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전기를 메로빙거 왕조 시대(또는 갈로로만시대), 후기를 카롤링거 왕조시대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 특히 전기에는 강력한 통일국가도 없으며, 토지개발도 충분히 진척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지역차가 컸다.

 

A. 중세 초기 미술, 사본장식

서유럽의 고대 로마 문명은 6세기 후반경에 침몰되었으며, 이후 암흑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가지 근본적인 변화들이 발생했다. 수세기에 걸친 지중해의 예술전통은 거의 모두 소멸했고 북부 유럽의 문화적 구조는 점차적으로 새로운 부족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북유럽에서 7세기경에 회화가 다시 부활한 것은 첫째, 새로운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로 전향하여 광범위한 그리스도교 도상과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발전시켰고, 둘째, 그들에게는 회화가 발달했던 후기 로마 문화를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나무판자 위에 인물을 약간 그려넣는 것 이외에, 건물 벽에 그리는 대형벽화와 필사본에 그려넣는 소형 삽화들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서로 분리된 전통을 갖고 있었고 서로 다른 기법을 사용했다. 거의 모든 교회와 공공건물에서 발견될 법한 벽화들은 의외로 극소수만이 남아 있으며, 반면 채색필사본들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중세의 화가들은 복음서와 구약성서, 그리고 교회에서 필요로 했던 예배 및 헌신과 교리용 책들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황의 본거지였던 로마에서는, 비잔틴 양식의 영향과 함께 평면적이고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그리는 양식이 등장했다. 7~8세기에는 동방의 여러 가지 회화 전통이 전파되어 엄격하게 대칭적인 구성, 엷게 칠하는 미묘한 채색, 그리고 모델링 없이 경쾌하고 유연한 선들을 사용했다.

    

 

안슈타인 성서의 그림문자

머릿글자는 여러 모양으로 장식 '밝게 꾸미는 일' 할 수 있었다. 밖은 색채를 사용할 수도 있었고 개개의 문자를 여러 가지 장면으로 장식할 수도 있었다. 위의 문자는 '요한복음'의 첫글자이다.

 

 

 

B.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의 미술

5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갈리아의 영토를 이어받아 대부분의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과 스위스 일부분을 로마인들의 점령 직후 5세기부터 8세기까지 통치한 프랑크족을 다스리던 왕조이며 왕족이다. 이들의 왕국은 자주 내부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는데 8세기에 이르러 왕조의 군주들은 유명무실해지고 궁재로 대표되는 궁정의 신하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751년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인 피핀이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프랑크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종말을 고하고 카롤링거 왕조로 대체되었다.

 

유럽 대륙에 있어서 초기의 채색필사본들은 프랑크 왕족 중의 메로빙거 왕조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필사본들의 장식은 상징적인 주제를 많이 담고 있었다. 그 예로 머리글자의 획은 비둘기 또는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거나 단순한 장식적 모티프들로 채워져 있었다.

 

고전고대의 미술과 중세미술을 잇는 꼭 중간점에 있었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프랑스), 게르마니아(독일), 비지고트(에스파냐), 브리타니아(영국과 아일랜드)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생겨나려 하고 있었으나, 알프스 이북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 또는 동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감각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이 행하여지고 있었다.

 

5세기경부터 프랑크족의 여러 왕은 종교 건축물의 건립을 원조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예는 없으나, 파리, 마르세유, 낭트, 리옹 등의 대성당은 이 시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교회의 건축양식은 바실리카식으로 지어졌다. 공법은 석재를 쌓아올리는 로마 고래의 방법에 따라 주두가 있는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이미 목재 사용에 뛰어났던 북방 민족인 게르만인은 그 기술까지도 병용하여 지붕은 주로 목조로 하였다.

    

갈리아·게르마니아 지방의 교회의 특유한 종탑도 목조기술의 산물이며, 후일 중·북유럽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시설이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는 생드니, 생 밴드릴 등의 수도원이 만들어져서, 대수도원 건축이 시작되었다. (西) 고트족이 이주한 남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는 비잔틴제국과의 접촉이 잦아 교회 건축에도 동방적인 것이 출현하였다.

 

석조의 아치 구조와 돔도 쓰이게 된다. 내부는 동방의 그것을 본떠 호화로운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것이 기록에 의해 알려져 있다. 포아체의 생 피에르 사원의 벽화나 8세기에 소실된 쓰루즈의 두라도 사원의 모자이크는 그 잔영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거기에서 자연주의적인 사실표현은 그 빛이 희미해져 있다.

 

조각은 남부에서는 석관이나 기둥머리에 고대 로마의 모습이 엿보이는 반환조 수법으로 고대전설이나 기독교 도상을 남기고 있다. 갈리아 이북에서는, 석관과 석비 표면에 있는 도상은 아직 자연주의적인 사실적 수법이 쓰이면서도 선각이나 철판면과 같은 평부조가 되어 있어, 입체상으로서의 조각이 전통을 가지지 못하는 민족의 특질을 보여 주고 있다. 도상의 주위는 와문이나 꽈배기 무늬로 둘러져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북이탈리아나 지중해에서 활약하던 노르만인의 영향을 받은 영국 등에, 게르만적인 선각과 동방적인 환조(丸彫)의 융합으로 생긴 석조의 반부조가 재차 대두된다. 또 서유럽 일대에 로마풍 석관 조각의 방법이 조금씩 보급되고 후에 로마네스크 조각으로 옮겨 간다.

 

이즈음부터 활발하게 된 수도원 활동 중에서도 포교와 더불어 다수의 직업 예술가가 신을 찬미하는 제기와 성전의 제작에 봉사하고 있었다. 칠보, 금공, 상아조각, 사본장식 등의 분야가 그것이다. 게르만인은 이러한 공예적 기술이나 색채감각 방면에 뛰어났다. 그들은 장신구나 무구에 제각기 재질미를 살려 추상적인 기하학무늬·곡선무늬, 공상적인 동물무늬로써 뛰어난 장식미를 만들어내는 전통적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종교미술의 제작에 참가함으로써 종교공예는 미술 가운데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금공과 칠보는 중요한 것이다. 이 두가지 기술로 나타내는 단순한 선의 미의 윤곽선에 둘러싸인 편편한 색면이 주는 느낌은 사본의 삽화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http://cafe.daum.net/lovedrawing/47dz/183?docid=UP5L|47dz|183|20110406195619&srchid=IIMzqpBY400#A18252A4F4D9C45122E0BB4

http://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EC%9D%98_%EC%97%AD%EC%82%AC

http://blog.hankyung.com/raj99/blog/294176

    

 

C. 카롤링거 왕조(Carolingian dynasty)의 미술

프랑크 왕국의 전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에 종사하는 궁재이었으나, 점차 실권을 잡아 프랑크 왕국의 2번째 왕조를 열었다. 덧붙여 "카롤링"은 성씨가 아니라 "카를의"라는 의미이다. 751년에서 987년까지 프랑크 왕국이나 그것이 갈라진 동 프랑크 왕국·서 프랑크 왕국·중 프랑크 왕국의 왕을 배출했다. 987, 서프랑크 왕국의 왕가가 단절되면서 소멸했다.

 

8세기 말, 샤를마뉴(카를)는 스스로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받아 고대로마의 재래를 기대하며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고전문화의 부활을 시도하면서 서쪽의 그리스도 교권의 지도적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부친 피핀이 랑고바르트로부터 탈취한 라벤나를 법황령으로 기증(756)함으로써 궁정과 교회의 결탁이 성립되었다. 종래와 같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나 교단 가운데서 만들어지던 것으로부터, 점차 확립되어 가는 봉건제도하의 궁정이나 영주 등의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800년에 신성로마 황제가 된 카를 대제(샤를마뉴)의 궁정을 둘러싸고 8세기 말부터 9세기 말까지 전개된 미술이 중심이다. 그리스도교를 주체로 하여 고대 및 비잔틴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한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 건축에서는 비잔틴적인 8각당의 대원개(大圓蓋)가 특징을 이루는 아헨대성당(796814), 그리스 십자형 평면으로 이루어진 집중 형식의 성제르미니 데 프레대성당(799818), 고대로마 바실리카 양식의 풀다수도원(재건) 등의 몇몇 유례가 오늘까지 전해진다. 또한, 아헨 ·랭스 ·투르 ·생드니 등지의 수도원 및 궁정에서 활발히 제작된 공예품과 모자이크화 ·수사본(手寫本) 장식 등은 고대 말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게르만인들의 감각에 의해 서유럽의 그리스도교시대로 옮아가는 초기 중세미술의 중요한 유품이다.

 

8세기 중반경에 새로운 세력을 얻게 된 프랑크 왕국은 서로마 제국 최초의 황제인 샤를마뉴 대제의 치하에서 후기 고대 로마나 동시대 비잔틴 문화에 버금 가는 궁정문화를 이루었다. 화려한 장식의 복음서를 만들어낸 샤를마뉴 궁정화파는 매우 창조적이며 기지에 찬 장식을 보여주었고, 성 마르코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물 표현의 경우 밝은 색채와 정교하게 주름 잡힌 의복 묘사, 주의 깊게 그려진 팔다리 등을 통해 능숙한 인체묘사를 나타냈다.

 

 

당시 영국에서는 예배의식에 사용되는 책들을 상당수 제작했는데, 그 책에는 번쩍거리는 황금색채와 휘날려 헝클어진 옷주름을 지닌 활기찬 인물들을 가득 담고 있다. 서술적인 구성과 머리글자 양식은 수많은 나뭇잎들로 가득 찬 황금막대, 아치형 또는 4각형의 돌출된 격자 모양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0세기말경 교회 내의 개혁정신을 반영하는 북부를 중심으로 영국에서 유입한 기운찬 윤곽선 양식이 발전되고 있었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8~9세기) _ 사회개혁운동

794년 카롤루스는 고대 로마 제국의 위엄과 영광을 되살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의 로마 제국의 번영을 부활시킬 것을 선언하고 고대의 학예부흥을 선언하였다. 자신의 궁정을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드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른 문화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나온 샤를마뉴의 책(Libri Carolini)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인들과 교황의 전권 대사가 성상 예배를 찬성하는 니케아 공의회(787)에 대항하고, 성상 파괴령에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실었다.

 

또한 아헨에 라벤나의 산 비탈레성당을 본으로 한 궁정 성당등을 건립하여 표본으로 삼기도 했다.

 

 

 

 

아다 사본집 _ 위트레흐트 시편에 삽입된 풍경들(830, 위트레흐트국립대학 도서관)

    

 

D.오토 왕조 미술(Ottonian art)

중세 독일 전기의 미술로서 하인리히 재위시절을 비롯하여 오토1~3세를 거쳐 하인리히 2세 집권 시기까지의 미술을 지칭한다.전대의 카롤링거 미술의 전통을 부활시키고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들였으며, 고대 미술의 부흥을 의도하여 후일 로마네스크 미술의 기반을 마련했다

 

독일의 경우 작센 오토 왕조 치하에서 통합된 왕족과 교회의 후원을 배경으로 커다란 예술부흥이 있었다. 10세기 후반에는 '그레고리 등기소의 거장'이라고 알려진 화가가 유명했는데,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카롤링거 왕조 필사본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회화 양식을 개발했으며, 상세하고 부드럽게 모델링한 인물들을 정확하게 계산된 배경에 배치했다. 그의 제자들은 밝은 빛을 받은 인물들이 황금색 바탕과 색띠를 배경으로 초자연적인 장중함을 나타내는 일련의 장식본들을 제작하기도 했다.

 

10세기 중반과 11세기 초에 걸친 오토 대제의 시대에 독일은 미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예술에서도 유럽의 지도적인 국가로 부상했는데, 초기에는 미술과 정치면에서 카롤링거의 전통을 부활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후에는 새롭고 독창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게로의 십자가 책형]을 보면 알 수 있다.

    

 

[게로의 십자가 책형]

 

지금까지의 서양미술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책형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힘차게 느껴지는 둥근 형태로 새겨진 이 조각은 크기도 크지만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깊은 동정심이 충만하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앞으로 불쑥 솟아난 배의 아랫배의 형상인데, 이는 긴장된 팔과 어깨의 근육을 한층 현실감 있게 보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십자가 책형도는 표현성이 강한 사실주의를 따름으로서 이러한 사실주의 성향은 독일 미술에서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꾸중을 듣는 아담과 이브]

 

1015년경 독일 힐데스하임의 성미카엘 성당을 위해 제작한 청동 문에 조각된 부조의 일부분이다. 이 청동으로 만든 문의 부조는 한쪽에 8개씩 16개의 사각형 안에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인간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꾸중과 변명을 하는 배역이 확실한 극적인 장면을 구성하고 있는데 의미를 갖는 사물들을 강조하여 인물상이 한층 더 뚜렷하게 부각되도록 의도하여 제작되었다. 이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주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인물들의 비례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은 점이라던가 아담과 이브의 육체가 아름답지 않다는 점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작품은 표현주의에서 나타나는 오토 왕조의 미술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E. 켈트 미술 (Celtic art)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6, 7세기경에 수도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수도원 내의 공방에서 필사본들이 정교한 양식으로 복제·장식되었다(스크립토리움). 영국 제도의 화가들은 교차되어 엮어진 때와 뒤섞인 동물, 그리고 크게 확대시켜 그린 머리글자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보통 '카펫 페이지'라고 불리는 풍부한 장식기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필사본들은 켈트족의 전통과 6세기경 영국에 정착한 앵글로색슨족이 가져온 금속 제련기술의 전통, 그리고 지중해 전통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독특한 장식체계를 갖게 되었다.

 

켈트인은 거석문화를 이루어 놓은 중부·북부 유럽의 선주 민족이었다. 그 조형의 특질은 지중해민족이 지니고 있던 자연주의적인 사실법(寫實法)에 대해 직선과 곡선의 조합이나 나란히 배열하는 추상적 장식표현이었다. S자무늬, 나선문(螺線紋), 와문(渦紋), 꽈배기무늬는 그 대표적인 모티프였다. 이 무늬들은 원래 장식인 동시에 어떤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가 그들의 고장에 전파되었을 때 이러한 토착적 장식요소는 그 종교적 의미와 더불어 기독교 미술에 흡수되었다. 또한 켈트 미술의 모티프에는 그 외에 라틴 민족에게 없는 동물무늬와 괴수무늬가 있다.

 

스크립토리움 [scriptorium], 장식사본

 

초기 중세의 켈트 미술의 특질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기독교 미술과의 결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일랜드와 북잉글랜드의 수도원에서 제작된 장식사본(miniature)의 예술이다. 이 지방은 5세기 중엽쯤에 기독교에 귀의하고, 대륙보다도 빨리 수도원 활동이 활발해졌다. 성전사본(聖典寫本)은 둘레와 특히 두문자(頭文字)를 복잡하게 짜넣은 장식문자로 아로새겨서 두 문자만으로 한 페이지 전체를 채우고 있는 경우도 있다.

    

가장 복잡한 모양을 나타내고 있는 <켈스의 책>(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소장)의 모노그램 속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리스어()3(), XPI가 바탕이 되어 있는 배경 부분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적 무늬나 와문·식물·조수(鳥獸), 도안화된 인물 등으로 그려져 있다. 북부 영국에서 만들어진 <린디스판의 복음서>(8세기, 대영박물관 소장)는 사물의 양식화(樣式化)가 전자(前者) 같지는 않지만 같은 계열에 속하는 걸작이다.

 

그 외에 <다로우의 복음서>(8세기), 트리니티 칼리지 소장) <() 갈렌 복음서>(8세기) 등은 대표작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전(聖典)을 장식하는 것은 신의 말씀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었다. 지나칠 만큼 장식요소를 사용하여 힘찬 느낌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 켈트인의 풍부한 감성을 엿볼 수 있다. 잉글랜드를 점령한 앵글로 색슨인이 기독교로 개종하자, 이곳을 거쳐 아일랜드의 수도사들은 78세기에 북프랑스로부터 스위스에 걸쳐서 활발한 포교를 했기 때문에 아일랜드켈트의 미술, 특히 장식사본의 양식이 이들 지방에 전해져 켈트미술의 제2의 영향이 대륙에 나타났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그 감화를 다분히 받았다. 또한 사본(寫本)을 장식 두문자로 시작하는 습관은 전유럽에 보급되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1s3715b014 중세초기회화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Celtic_art?uselang=ko 겔트 미술

 

 

F. 중세 초기 건축

현존하는 소수의 당시의 건축 유적 중,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아헨의 궁정 예배당이다. 라벤나의 성 비탈레 사원을 본따서 만들어진 팔각당 형식의 이 건물은 석재를 써서 만든 큰 돔을 이용하여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다. 로마 말기에 동방제국에서 해결되었던 돔의 공법은 서구권에서는 아직 생소한 것이었다.

 

아헨 사원은 단지 웅장한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돔 시공(施工) 기술의 곤란성을 고려에 넣는다면, 궁정에서의 미술정책을 토대로 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었던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교회나 수도원은 바실리카 형식으로 메로빙거 왕조 이래의 공법을 계승하고 있음이 기록과 초석의 연구로 규명되어 있다.

 

건축물의 내부는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에 의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모자이크가 남아 있는 예는 생 제르맹 데 프레 사원을 들 수 있을 뿐으로 비잔틴 풍의 힘찬 것이었다. 오세르의 성 제르만 교회의 벽화에는 고대풍의 모습을 한 성자상이 그려져, 구상적인 종교 도상의 표현을 거부해 오던 종래의 게르만 미술에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중세미술의 시작 수도원

 

313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허용한 밀라노 칙령, 395년 동서로 나누어진 로마 제국, 게르만족의 대이동 그리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로서 고대는 막을 내리고 앞으로 천 년간 지속될 중세가 시작되었다. 중간에 있는 시대라는 뜻의 중세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들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인문주의자들 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시대를 새로운 시대로 이해하였고 문화적으로 찬란했던 고대를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와 구시대를 구별함과 동시에 고대와 단절된 이 시대를 폄하하여 중세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중세는 약 500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한 1400년까지의 기간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서유럽 전체는 중세라는 하나의 문화사적 개념으로 통칭 되어 지는데 이것이 가능한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이념이 그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리귀제 (Liguge)의 수도원 ()과 마르무티에르 (Marmoutier)의 수도원 ()

 

초기 중세 미술을 설명하기위해 우선 수도원이라는 공간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수도원이 중세시대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수도원은 고행수덕생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일찍이 이집트의 사막에서 홀로 은수 생활을 시작한 성 안토니우스 (251-346)를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수도원의 기원으로 오늘날 터키의 카파토키아에 최초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서방의 교회들은 이를 본받아 수도원 제도를 발달시켰다. 프랑스 뚜르의 마르티노 주교는 361년 리귀제 (Liguge)라는 마을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372년 인근 마을인 마르무티에르 (Marmoutier)에도 수도원을 창립한다. 5세기경 오늘날 프랑스 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갈리아에서만 238개에 달하는 수도원이 지어졌으며,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규율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수도원은 양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지만 동시에 수 많은 부작용도 낳게 된다.

    

몬테 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

수도원들은 자연스럽게 일정한 규정과 규율을 찾게 되었는데, 로마 근교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트가 529년 몬테 카시노 (Monte Cassino)에 설립한 베네딕트 수도원이 수도원 규율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 수도회가 따르는 규칙서는 이상에만 치우치지 않고 현실을 감안한 매우 실질적인 규칙이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율은 Ora et labore , 기도하고 일하라는 말로 요약된다. 육체적 나태함을 철저하게 금하고 기도와 성서를 읽기에 힘쓰라는 것이 베네딕트 수도회가 지키고 있는 중요한 규율이다.

    

수도사들이 속세에서 벗어나 신앙에 정진하기 위해 공동 생활을 하던 수도원이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수도원들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직 종이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동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책들은 아주 값비싼 물건이었고, 이러한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을 가진 수도원에서 학문적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였던 당시 책들은 수도사들이 일일이 손으로 직접 배껴쓴 필사본이었고, 필사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수도원의 스크립토리움 이었다. 당시의 책들은 특히 복음서 혹은 기도서들과 같은 성서 필사본들은 화려한 문양 그리고 세밀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iambologna&logNo=50159509404 수도원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ds0627&logNo=20028620542 중세 초기건축

 

 

로마 바실리카가, 중세 초기 바실라카식 교회로 탈바꿈하다.

 

재료나 구조에 있어서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지 못하여 로마의 건축양식을 계승. 로마에서 사용되었던 두 가지 구조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한다.

 기둥과 보에 의한 가구식 구조

기둥과 아치에 의한 아케이드 구법이다.

 

특히, 기독교 건축의 발달로 장축형 평면구성, 입구로부터 계단에 이르는 장축 주축으로 하여 평면을 구성, 수평축에 의한 방향성 강조, 종교적인 존엄성 추구, 긴열주의 반복으로 인한 집중성과 투시효과 추구,교회내부는 신랑, 측랑, 후진, 수랑등으로 구성했다.

 

 

 

실내장식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모자이크를 널리 사용했고, 바닥, 벽면, 천장에 모자이크 사용, 바닥에는 대리석 모자이크. , 천장에는 초자(硝子) 모자이크 사용, 성자나 사도 등의 그림을 모자이크로 그림이 있다. 주두장식에서 주두는 펼쳐진 방체, 식물이나 기하학적 문양이 조각되어있다. 장식문양은 새로운 장식 문양은 성서에서 유래되어, 포도송이나 줄기, 감람나무의 가지, , 비둘기, 물고기 등과 기독교의 상징문자 등의 조합문자가 쓰였다.

 

   

 

교회 건축양식의 정립

-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이었던 바실리카를 교회건물로 전용

- 급속한 교세확장에 비해 교회재정이 빈약하여 새로운 건물의 건설이 곤란

- 교회에서 요구되는 집회공간, 제단, 사제것 등의 기능과 기존의 바실리카의 기능이 상호 유사

- 바실리카식 교회는 중세 교회 건축의 원형으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고딕양식에 이르러 완성됨

- 로마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두가지 구조방식을 계승하여 이용

- 좁은 간격의 열주와 엔타블레춰에 의해 가구식 구조

- 다소 넓은 간격의 열주와 아치에 의한 아케이드 구조

- 지붕은 간단한 목조트러스 구조

- 동서를 주축으로 하여 건물을 배치

- 서측입구를 통해 사방이 열주량으로 둘러쌓인 중정에 진입

 

- 중정에서 전실을 통과하여 교회내부로 진입

- 신랑

-측랑

-수랑

-영광의 문

- 신랑의 측면벽은 상부로부터 고측창, 트리포리움, 열주 순으로 구성

- 고측창

- 트리포리움의 벽면을 성화, 코니스 등으로 장식

- 열주은 아케이드의 아치 또는 엔타블레춰를 통해 상부의 트리포리움을 지지

- 바실라카식 교회의 장축형 평면은 내부공간에서 입구와 후진을 연결하는 수평축을 형성

- 수평축에 의한 방향성

- 내부공간의 입구로부터 신랑을 거텨 제단에 이르는 긴 수평축에 의한 방향성은 중세 교회건축의 본질적, 핵심적 요소

                              

 

성 피터 바실리카(S. Pietro), 로마, 249-324.

구 성 베드로 성당, 349년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첫 번째 거대한 바실리카 건설, 15세기 - 건물 무너져 내림,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새 교회를 짓기 시작 완성 100여년이 넘게 걸림, 5랑식의 건물, 트랍셉트 부분은 라틴 크로스로 돌출, 건물 정면에 열주랑에 의한 전정(arttrium)이 있음, 장식과 빛을 강조

    

성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로마, (S. Paolo Fuori Le Mura), 380, 1828년 복원

5랑식 대성당, 80개의 열주(4열의 20열주), 화강암의 코린트 양식, 내부는 모자이크의 그림으로 장식, 지붕은 목조 트러스(truss)로 벽은 얇은 편, 네이브의 폭은 넓은데 비해 천정이 낮음, 웅장한 감을 줌

 

성 사비나 성당(St. Sabina), 로마, 425

초기 그리스도교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내부공간을 지님, 3랑식 건물, 코린트 기둥, 아치가 주두와 직접 연결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성당(S. Apollinare in Classe), 라벤나, 493-525

트란셉트(transept)가 없음, 앱스-내부는 반원형, 외부는 다각형으로 구성, 기둥의 주두 위에 부주두 사용, 내벽은 얇은 벽돌로 치장, 외벽은 장식이 없음, 내부의 아름다움에 비하여 외관은 매우 단순

 

성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 (S. Maria Maggiore), 로마, 432

가장 표준적인 바실리카식 성당, 내부는 대리석의 이오니아식 오더의 열주에 의한 고전적인 구성, 격자천장의 네이브, 초기 교회의 실내모습을 잘 반영

    

원형, 집중식 건물

원형 건물의 형식은 바실리카식 교회와 같은 구조법으로 얇은 벽, 목조의 지붕, 기둥에 의하여 내부가 원형으로 됨, (dome) 형식으로 벽체는 두터우나 돔이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 원형의 평면은 교회당으로서는 적절하지 못함, 제대 부분을 원형의 중심부에 두지 않고 커다란 니치(niche)를 만들어 그 속에 둠으로서 교회기능에 만족되는 공간을 만든다. 내부는 원형의 열주에 의해 네이브(nave)와 아일(aisle)의 공간구획이 이루어졌다.

 

 

 

세례당(Baptistery)

회당 밖에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짐, 1도시에 1개의 세례당이 만들어짐, 전정(atrium) 옆이나 트란셉트(transept) 측면에 위치, 평면은 로마의 원형, 다각형 신전에서 발전된 형식, 열주에 의해 네이브와 아일이 구분, 클리어스토리에서 채광, 노세라의 세레당, 콘스탄틴의 세레당이 있다.

 

성 콘스탄자(S. Constanza) 영묘, 로마, 330

성 니에제 교회에 부속, 콘스탄틴 황제의 2녀를 위해 만들어짐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 (Church of the Holy Sepulcher), 345

예수가 죽임을 당하고 묻힌 장소(골고다 언덕 아래)에 지어진 전통적 돔(dome) 형태의 원형건물

    

성 스테파노 로툰다 교회, 482

목조 지붕, 얇은 벽, 기둥에 의해 네이브와 아일로 구분, 중앙부분은 직경 23m의 원형 홀, 22개의 이오니아식의 원형 열주, 동서남북에 따라 4개의 제실과 4개의 중정이 있음

 

카타콤(Catacomb) : 1-5세기

그리스도교가 최초로 만든 건축, 지하분묘, 기독교 박해시대에 신도들의 비밀 집회소, 피난소로 사용, 지하 통로와 소실로 연결된 형식, 지면에서 수직으로 난 개구부를 통해 채광과 환기, 내부의 벽에는 사자의 이름이나 기호가 새겨져 있음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

 

4세기 경부터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르는 비잔틴 제국의 예술품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용어이다. 비잔틴의 미술은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宮廷)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비잔틴제국은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로마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비잔틴제국의 전사(前史)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로운 국면(局面)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숭배(聖像崇拜)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한때 재흥기(再興期)가 있었다. 그 문화권에는 동지중해, 발칸반도, 러시아가 포함되었다.

    

제국 자체는 13세기에 계속되는 터키인의 침입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의해 약체화되고 붕괴되었으나, 그 미술의 영향은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동유럽(특히 정교권) 문화의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다.

 

산 비탈레 성당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 장식사본

 

모자이크

 

이콘

 

 

 

로마네스크 미술 (Romanesque art)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서유럽의 미술을 가리킨다.

 

10세기부터 12세기(지역에 따라서는 13세기 전반까지)경까지를 로마네스크 시대라 부르며, 11세기에서 12세기 초에 걸쳐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잉글랜드의 로마네스크 건축은 노르만 건축이라고도 불린다.

 

로마네스크란 원래 건축사상의 용어였다. 두꺼운 석조의 벽체(壁體), 아치, 돔을 가진 건축에 끼친 고대로마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 로마네스크(로마풍)라는 호칭을 붙였으나, 그 후 개념의 변화가 생겨 고대 로마의 전통을 가미하고 에스파냐를 거쳐 전해진 사라센 양식(樣式)이나, 활발해진 수도원 상호간의 교류, 십자군, 성지 순례 등을 통하여 전래된 동방 여러 지역의 양식 또는 카롤링거 양식, 비잔틴 양식 등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겨난 중세 중기의 양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다양한 지방양식에도 불구하고 일괄된 공통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은 서유럽에 착실하게 뿌리를 박아가는 기독교 신앙이다.

 

권위의 상징이었던 종교미술은 수도승의 손으로 구현되어 점차 그림을 통한 교의 해설, '그림으로 보는 성서'로서의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신앙의 대중화(大衆化)로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작은 마을에서는 성상(聖像)으로 꾸미고 가꾼 교회가 세워졌다.

    

육중한 특질, 두꺼운 벽, 둥근 아치, 튼튼한 기둥, 그로인 볼트, 큰 탑과 장식적인 아케이드(늘어선 기둥 아래의 공간)로 잘 알려져 있다. 모든 건물은 명확히 정의된 형태를 가지고 상당수가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평면을 가진다. 그래서 전체적인 외관은 그 뒤를 잇는 고딕 건축에 비교하면 단조로워 보인다. 현재도 흔히 쓰이는 거대한 수도원 교회이다.

 

 

장식사본

 

금공(金工)과 칠보(七寶)

 

벽화

 

로마네스크 복고

 

 

 

 

 

 

 

 

 

 

 

고딕미술(gothic art)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달한 중세 미술 운동이다. 이는 고딕 건축이 함께 발전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미술은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다.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의 전 운동이 되었다.

 

12세기에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그리고 16세기로 접어들면서, 고딕 건축은 양식에 있어서 모욕이라고 여겨지는 르네상스의 후반부 동안 고딕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하면서, "프랑스 양식" 작품으로 그 기간 동안 알려져 있었다. 이의 특징은 첨두 아치, 리브 볼트, 그리고 플라잉 버트레스을 포함하고 있다.

 

고딕(Gothic)의 어원은 번족(蕃族)인 고트에서 나온 것으로, 전화(轉化)하여 '야만적'의 의미로 쓰였으나 르네상스시대에는 중세미술은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날에는 중세후기를 나타내는 고유명사로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트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 단어가 1530년대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할 때에는 조야하고 야만적이라고 생각되는 문화를 묘사하기 위한 경멸적인 단어였다.

 

로마네스크의 그것보다 한층 조각적(彫刻的)이며, 건축에 대해서는 비종속적이다. 고딕 건축은 유럽의 지역 교회들과 대수도원, 그리고 수많은 대성당의 건축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많은 성, 궁전, 마을 회관, 협회, 종합대학, 그리고 주택까지 이러한 건축 양식이 쓰인다.

 

 

 

큰 교회와 성당, 그리고 고딕 양식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된 수많은 시민 건물들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감정에 호소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교회 건물들은 이때부터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것도 자주 건축학적으로 구별되는 구조물들이다. 반면, 많은 큰 교회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작품으로 여겨지며 세계 유산 지역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고딕 건축의 연구는 크게 보면 성당과 교회의 연구이다.

고딕 복고 양식이 영국에서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19세기를 걸쳐 유럽에 퍼져 20세기에 교회와 종합대학 구조물로까지 이어졌다.

 

 

스테인드글라스

 

국제 고딕 양식 (International Gothic)

    

 

 

 

 

 

 

 

 

 

 

 

4부 끝. 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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