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중세미술

중세 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草霧 2013. 2. 20. 14:11

 

 

 

 

 

중세 미술 1

 

 

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

  

.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2

 

 

 

본 연재 글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편에서는 5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 중세의 시작에서는 로마의 분할 이후의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며, “2.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에서는 왕과 교황의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 미술과 도상에서는 특히 중세미술에 나오는 미술 속 도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4.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는 중세미술 전반과 초기 기독교 미술 및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중세의 시작

2.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3. 미술과 도상

4.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2.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권력다툼의 역사, 제권과 교권의 대립

 

1. 제권주의(Imperium)와 교권주의(Sacerdotium)

 

(1) 조화기(392-1059)

64년 로마에 대화재, 네로황제는 기독교도 박해

313년 기독교가 공인, 다락방교구 시작

392년 기독교가 국교, 제권주의와 교권주의와의 갈등이 해소되고 프랑크족의 클로비스가 로마제국을 대신할 보호체를 찾는 교권에 의해 개종함으로써 관계를 형성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나자 교황청은 위기의식, 당시 제권주의와 교권주의와의 관계는 정치적, 무력적 보호와 정신적, 종교적 보호자라는 상호 보완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런 이유에서 교권은 로마제국을 대체할 만한 요소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교황청이 선택한 새로운 제권으로 프랑크 왕국이 되고, 이 양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시키게 된다. 왕은 교황에게 세속영토를 주고, 교황은 왕의 비윤리적인 면도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교황이 왕을 지지하게 되면 당시 기독교 윤리에 도취되어 있는 일반 대중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제권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칼 대제의 800년 대관식

교권주의가 제권주의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고착화, Papal-Caesarism이 형성

 

962년 프랑크 왕국의 뒤를 이을 제권의 대표자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선택하고 교권주의의 우월을 전제로 하여 제관을 오토 1(936-973)에게 수여(962)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대립기(1059-1124)

교권과 제권은 대립하게 되어 성직 임명권을 놓고 결정적으로 주도권 다툼

교황은 자신이 신의 대리자(Vicarius Dei)로서 유럽을 지배한다고 생각했고, 황제는 Regnun Francorum이 모든 세계를 정복해서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왕국이라고 생각했다.

    

11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 7(1073-85)의 개혁, 1073'교황선언'(Dictatus Papal)을 반포

성직의 매관매직 금지

대처 금지

교황은 추기경회의에서 선출

교회의 권위는 확보되어야 한다.

교회 내의 세속군주 세력을 축출한다.

교회의 완전한 독립을 실현한다.

모든 성직자는 교황이 임명하며, 성직자 임명권은 교황에게 있으며 교황은 또한 황제를 폐위시킬 권한이 있다.

 

이 선언으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이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1056-1105)1076년 보름스(Worms) 종교회의 개최로 교황 폐위 오히려 교황이 황제 폐위를 결정

하인리히 4세의 파문 후

카놋사의 굴욕(Gang nach Canosa)에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잘못을 빌어 용서를 받게 된다.(1077), 교권의 우위가 인정

교황청을 공격(1080) 그레고리 7세 축출, 제권의 승리로 이 사건으로 그레고리 7세는 사망하고, 교권은 무력적, 정치적 보호자를 잃음으로써 교권이 몰락해 간다는 전조적 현상을 낳게 된다.

 

성직 임명권(Invetitute)투쟁은 하인리히 5(1106-1125)Calixtus 3(1119-1124)'보름스협약'(Concordat of Worms, 1124)으로 교황은 종교적인 면의 권위자로 인정되고, 황제는 그 임명권에 동의하며 봉건적인 영주의 권위를 갖는다고 합의하였다. 이것은 독일 지역 내의 분쟁 해소만을 의미했다.

 

(3) 교권 전성시대(1124-1309)

보름스 협약 이후 교황파(Giuelf)와 황제파(Ghibelline)라는 두 파가 형성되어서 격렬한 투쟁을 전개

당시 지식 엘리트들은 성직자 계층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이들 중에서도 교황파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교황이 황제를 지배하는 신의 대리자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한다.

 

중세 유럽의 안정과 희랍사조가 유입

유럽인들의 지적 수준 고조, 그 과정 속에서 교부철학 등 당시 피안적인 이론들은 중세의 지배이념이 될 수 없었고, 교황청은 좀 더 완벽한 형태의 신학을 요구하였다.

 

스콜라 철학

이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학적인 이론을 전개하면서 지적 발전을 이룩한 중세인들에게 설득력을 갖추어 나간다. 즉 이 이론은 신학은 계시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무한의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가감적인 세계를 연구하는 철학에 비하여 월등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철학은 신학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파리 대학의 신학이론을 집대성하여 교황청에서 신학대전을 편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현상적인 이론적인 모든 면에서 13세기 100여 년간은 로마교황청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교권지상주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교권의 급속한 성장은 제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의 노력에도 속수무책, 한편 이전까지 교황은 '베드로의 대리자'(Vicarius Petri)라고 여겨져 왔으나, 스콜라 철학이 절정에 이르게 되어 교황파의 힘이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된 시기에 교황 Innocent 3(1198-1216)는 이를 '신의 대리자'라는 생각으로 발전시켜 교황에 의한 정치를 신정이라고까지 칭하게 되었다.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1215-50), 오토 4(1250-54)를 즉위 및 폐위

 

영국의 교황의 사법권 문제

노르만 왕조의 윌리엄 1세가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사법권 소유를 거부, 캔터베리 대주교를 위시한 영국의 대다수의 성직자가 여기에 동의하게 된다. 첫째, 영국왕의 동의 없이 영국 내에 간섭할 수 없다. 둘째, 영국왕의 승인 없이 교황의 교서를 발할 수 없다. 셋째, 영국왕의 협의 없이 영국 사신을 파문할 수 없다는 세 가지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제권 확립에 노력하였다.

 

(4) 제권 우위시대(1309년 이후)

프랑스, 필립 2(1150-1223)의 이혼 문제를 제기로 교황 이노센트 3(1198-1216) 폐위

보니파키우스 8(1294-1303)는 필립 4(1285-1314)와의 영토 내 교회령에 대한 과세문제로 무력충돌

Clement V(1305-14)를 필립 4세가 Avignon 지역으로 이주 (1309, 아비뇽 유폐) 이는 교권과 제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는 큰 전환점이었다. 이후 1378년에 이르러서야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시기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도시, 화폐경제의 발달,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 등 상업이 부흥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에 봉건체제하에서 구축된 교권의 절대성은 불리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파리 신학대학의 기반은 쇠퇴하게 되고 옥스퍼드 대학의 신랄한 공격과 자연과학의 대두로 17세기의 과학혁명의 여명이 싹트기 시작한다.

 

프랑스의 교황 클레멘트 7(1378-1417)를 교황 선출과 로마의 추기경회의에서 우르반 6(1378-1389)가 선출되어 두 명이 교황이 존재하게 되어 서로 파문을 주장하는 '교회의 대분열'(1378-1417)이 일어나게 되었다.

1409년 피사 종교회의로 2명 교황을 파문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출, 두 명의 교황이 응하지 않아 교황은 세 명으로 증가

1414-1417년 콘스탄츠 종교회의, 세 명의 교황을 파면하고 Martin V(1417-1431)를 즉위

이는 결국 중세에 가장 중요한 큰 힘인 교권지상주의가 몰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2. 중세의 철학

1. Augustinus(354-430)신국론’(神國論, De Civitate Dei)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한 목표, 종점으로 인도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역사는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진행은 하나님이 정한 종점을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고 그 종점에서는 최후의 심판에 의해 지상의 역사는 끝이 난다고 보는 역사관이다. 4세기 후반 서고트족의 Alaric이 로마에 침입, 약탈로 사회심리가 불안해진 상황에서 지상에서의 인간의 고통을 합리화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와 같이 신국론은 비록 비현실적이고 황당무계한 면은 있었으나 역사관 형성에 필요한 사고형식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원론적 역사관(Dualismus) : 신의 나라(De Civitate Dei) 대 지상의 나라(De Civitate Terrena)

종말론(Escatologie), 목적론(Teleologie)적 역사관 : 역사를 신의 나라로 가는 과정으로 보았고, 지상의 역사를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난다고 보았다.

변신론(辯神論) : 역사의 시작을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보았고 종말이라는 인위적 종점을 미리 설정했다. 또 역사의 진행을 성서적 교리에 따라 설명하여 인간의 의지, 역할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직선론적 역사관은 고대의 순환론적 역사이해를 극복하게 하였다.

이원론적인 사고는 변증법적 사고의 한 단서가 되었다.

종말론에서는 후속 역사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면에서 미래의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의 궁극은 Das Ervige Reich(영원의 제국)이었는데 헤겔에게서는 자유, 마르크스에게는 계급 없는 사회라는 면으로 부각

 

2. 보편자에 관한 논쟁 _ 이념적 존재 자체의 실재성에 대한 문제

1) 실재론 : St. Anselmus(1033-1109)

올바른 이성적 사고의 전제조건이 되며, 이성이 신앙을 밑받침하는 것은 마치 일반신도가 노래나 기도로 신앙을 밑받침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 철학가는 논리학이나 변증법을 사용하여 신을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Gaunilon(가우닐론), 사유 밖에서 성립하는 존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사유 속에서 성립하는 것을 근거로 할 수 없다.

 

Roscelinus(1050-1120)의 삼신론, 보편개념이 소리의 바람(Flatus vocis)이라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흰색 자체는 성립하지 않고 단지 흰 물건만이 있으며, 지혜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092년 그는 이단으로 선고받았다.

 

종합, Peterus Abelardus(1079-1142), 실재론과 유명론을 조화시켰다. 그는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에 내재하는 개별적인 것을 떠나 따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개별적인 것과 별개로 파악된 보편적인 개념은 인간지성의 추상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그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반대하여 인식론을 전개하였다.

 

3. 스콜라 철학, Thoams Aqiunas

교회에 의하여 지배되던 중세에 있어 대표적인 학문은 신학이었고, 철학은 이에 봉사하는 시녀였다. 중세학문을 대표하는 신학적 철학체계라고 할 스콜라철학은 그것이 주로 주교성당이나 수도원의 부속학교인 Schola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자라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스콜라철학의 기반은 교부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었다. 그러다가 11세기로부터 12세기에 걸쳐 이슬람세계로부터 새로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스콜라철학자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발전하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는 스콜라철학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74)를 중심으로 확립되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주의

신의 존재 증명

국가와 법

    

 

인위적인 법, 자연의 법, 신의 법의 3 가지의 법이 있으며, 신의 법이 가장 상위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다. 인위적인 법이 정도를 걷지 못하고 전제정치가 이루어질 때는 통치자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와 의무가 국민들에게 있다. 그러나 농노는 필요한 제도이며 농노 위에 서 있는 지상의 국가는 더 높은 곳에 있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계급적으로 통일된 사회관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경험적인 영역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세우고, 그 위의 관념계에 대해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겹쳐놓고 그 위에 기독교의 신을 올려놓았던 종합적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의 철학이 당시에 있어서는 여러 신학체계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면서 당대의 모든 중요한 문제를 과감하게 지적으로 검토하면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사실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번거로운 과정을 통하여 논리적으로 사색하는 스콜라철학은 서양의 합리적 사고를 육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이러한 논리적 훈련이 없었던들 근세 이후의 합리적인 철학이 성립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근세 이후의 철학도 어느 정도는 중세의 스콜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할 것이다.

 

4. 중세의 대학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에 걸친 시기에 학생 또는 교사조합(길드)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대학을 가리키는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는 말은 원래 집단적인 의미로의 '전체'라는 뜻이며, 어떤 공통된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에 적용되었고, 실제로 수공업자조합의 회원들에게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의 기원은 기본적으로는 교육을 위한 길드였으며,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에서는 학생길드, 알프스 이북에서는 교사길드였다. 이러한 학생이나 교사의 결합은 국왕이나 군주의 허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기본적인 교과과정은 문법, 수사 및 논리의 3교과(trivium)와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quadrivium)의 이른바 7자유교과(seven liberal arts)였다. 13세기 이후의 중세문화의 일반적인 발전은 대학에 힘입은 바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대학은 12세기 초 법학

파리 대학은 노틀담(Notew Dame)성당학교, 12세기 말 신학연구의 총본산이 되었다.

옥스퍼드 대학

캠브리지 대학

 

컬리지(college, 단과대학)의 출현, 기숙사설립이 기원

1258년에 파리의 소르본느(Sorbonne)대학, 머튼 칼리지와, 벨리올 칼리지

    

중세는 암흑이었는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의 전기를 쓴 Vasari(1511-74)는 중세의 양식을 가리켜 미개하고 야만적인 고딕양식이라 지칭하고, 그러한 야만성을 바로 교회를 파괴한 게르만 족, 즉 고트족 때문이라 혹평한 바 있다.

 

계몽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 발전됨으로써 마침내 중세를 온통 야만시대라 규정하는 견해가 만연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중세기사의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생활이나 중세 농민들의 목가적인 전원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상향을 발견하고 중세를 미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는 프랑스 혁명 이래로 대두한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중세를 민족 형성의 시원이자 찬란한 황금시대였다는 견해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실증주의 사학의 대두, 20세기 초 서구 문명의 위기에 직면하여 19세기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성행함으로써 중세를 재평가 되었다.

 

그러나 중세는 결코 계몽 사상가들이 말하는 암흑시대도 낭만주의자들이 논하는 황금시대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봉건제와 기독교에 입각한 고유의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지니고 발전하는 가운데 그 나름의 활기찬 문화를 꽃피운 시기였을 따름이다. 9세기 초에 카롤링 르네상스를 꽃피웠으며, 이후 중세사회가 기독교와 봉건제라는 새로운 체제 하에서 안정과 번영의 절정에 도달했던 11세기 후반 이후의 200 여 년 동안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세문화의 특징은 스콜라철학과 고딕양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문화와 봉건적 규범에 의해 지배되는 세속 문화의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상호 대립되는 듯하면서도 기묘하게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데 있다.

 

중세의 교회는 중세인들의 출생 시부터 사후까지의 모든 생활을 관장했다. 중세인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나아가 기독교는 학문과 예술 등 유럽인들의 지적 문화적 활동에까지 광범위하게 지배했다. 교회의 진리는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권위를 지녔고, 그것에 어긋나는 그 어떠한 사고도 허용하지 않았다.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신학은 모든 학문의 으뜸이 되었고 철학은 신학을 위한 학문, 즉 신학의 시녀일 따름이었다.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12세기의 고딕양식의 회화나 건축조차도 신의 위대함, 성스러움 등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천국을 향한 중세인들의 염원을 표현한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신앙이 절대적 우위를 점한 스콜라철학의 내부에도 신앙과 이성을 엄격히 구별하여 이성에 의한 과학적 인식의 길을 연

Dunns Scotus(1175-1235)Ockham(1285-1347/9)과 같은 사상가도 존재했던 것이며, 로저 베이컨(Roger Bacon, 1220?-1292)과 같이 실험적인 방법을 내세워 자연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12세기 이후에 창설되기 시작하여 점차 교회나 수도원으로부터 독립한 자치적인 학문연구 기관이자 교육기관으로 성장한 대학도 장차 근대 유럽사회의 발전을 위해 커다란 지적 공헌을 하였다.

    

기독교적 신앙과 더불어 중세 유럽인들의 생활을 지배한 것은 봉건적 규범이었다. 봉건적 규범의 본질은 신분제 사회에 있었고,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 등의 각 신분은 저마다 독특한 생활과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낭만주의자들은 기사도에 의해 대표되는 기사계급의 낭만적이고 영웅적인 생활을 예찬하고, 중세 농민들의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미화하고 있으나 구전되는 중세 기사문학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중세 기사들의 생활이 그렇게 용맹스럽고 정의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른바 기사도로 정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묘한 이중성의 조화 속에서 중세 봉건사회의 안정과 더불어 유럽이 밖으로 팽창해 나갈 수 힘을 가지게 된 11세기 이후 중세문화는 개화하기 시작하고,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을 배경으로 12, 13세기에 중세문화는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와 게르만족의 만남, 중세 유럽의 형성

 

1. 유럽의 어원과 기원   

역사학자 도슨은 Dawson은 유럽이란 지리적 인종적구분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문화적 단위라 평하였다. 유럽의 어원은 소아시아의 셈족이 사용하던 어둠을 뜻하는 말이다:

 

ereb. 페니키아인에게 유럽은 해가 지는 서녘 땅으로 의미하였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북방에 있는 형태를 모르는 피안의 세계'를 유럽으로 여겼다.

 

그리스 극작가 아킬로스(Aeschylus 472 B.C)와 히포클라테스 등은 페르시아전쟁에 관한 언급을 통해 보스포로스, 다다넬스 해협의 서쪽을 유럽이라 칭하였다

 

이소크라테스는 페르시아인과의 구별을 위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인을 유럽인이라 하였다.

 

알렉산더대왕의 이집트 묘비명에는 그는 유럽의 지배자로 각인되었다.

    

유럽의 기원은 실질적으로 게르만의 이동에 따라 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생겨난 개념이다. 따라서 대다수 역사지리학자들은 로마문명이 게르만 야만족과의 융합과정에서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기독교문명과 유럽문명을 동일시하여 소아시아지역과의 지리적 구분을 강조하였다. 특히 6세기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유럽이란 기독교 교리에 의해 로마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지역'으로 선전하였다. 유럽이 최초로 개념화된 것은 칼(샤를르) 마르텔에 의한 아랍과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732Poitier에서의 이슬람세력을 격퇴시킨 마르텔의 군대는 새로운 군사공동체로 부각되었다. 즉 그는 자신의 군대를 유럽공동체:europenses의 군대라 칭하였다.

 

9세기 카롤링왕조 이후 외부 이민족(아바르족, 터키족등)으로부터의 위협받는 지역을 유럽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즉 유럽내부의- 로마카톨릭 세력 및 비잔틴세력의- 힘의 균형과 통일이 파괴될 때도 유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2. 유럽문명의 탄생과 카로링왕조

카롤링왕조의 탄생에서 해체되는 과정에서 특히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는 시기에 (751-962)에 성립발전된 유럽문명은 다른 문명과의 지리적, 종교적 구분을 뚜렸하게 하였다. 이시기 게르만족은 점차적으로 로마화, 라틴화, 카톨릭화되었다. 이러한 결실은 프랑크왕국과 로마교회와의 정치종교적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특히 프랑크왕국의 성립이래-특히 칼 대제(샤를마뉴)의 등장이래- 정복전쟁의 산물로써 미개한 게르만지역은 빠른 속도로 카톨릭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크족 중심의 서유럽 정치적 개편작업은 게르만족이 카토릭세력과 융합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카롤링왕가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휴는 고대로마의 유산과 게르만사회의 구조적, 실체적 접목을 의미하였다. 교황으로부터 샤를마뉴가 로마제국황제의 후계자로 대관된 것은 바로 정치적 통합력으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게르만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실질적으로 서로마제국이 결정적으로 붕괴된 것은 7-8세기 칼 마르텔 궁제 (714-742)시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지중해를 내해화한 이슬람세력을 파리근교 프와티에에서 물리쳤고 (732), 유럽의 중세사회로의 전환을 가속화한 은대지제도등 장원제도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이슬람의 침입과 연관된 카로링조의 성장은 그의 아들 피핀 751-768, , 샤를르대제 768-814를 통하여 완성되었다. 당시 프랑크왕가는 로마교회 즉 교황을 보호하는 군주의 역할을 하는 정치군사적 책임이 중요시 되었고, 반면 교황은 정신적 수장으로 기독교제국의 교회 수장권을 인정받았다.

 

유명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는 그의 저서 '로마적-게르만적 제요인'을 통해 카톨릭적 봉건유럽의 형성과정은 구제국의 와해와 민족이동이 수반한 오랜 혼돈과 분열 및 창조적 재구성의 과정이며. 즉 로마라틴적, 게르만적, 기독교적 요소의 독특한 중세적 융합의 소산이다.”이라 평하였다. 결론적으로 카롤링조의 정치적, 군사적 통합과 이에 따른 유럽의 카톨릭화는 구로마제국의 영토와 변방 서유럽지역의 통합을 가속화시켰다. 따라서 문명사적으로 '유럽은 지중해세계의 일부가 아닌 새롭고 독자적인 사회형성에 직접적인 기초'로 성장하게 되었다.

 

역사학자 H. Pirenne는 카롤링왕조가 중세사회의 핵심적 위치를 찾은 중요한 정치세력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이 없었더라면 프랑크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하메드 없이 칼 대제는 생각 할 수 없다.” 또한 게르만의 침입에도 로마의 로마적 요인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유지된점을 중시하였다. 그는 게르만이 파괴한 것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의 정부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3. 중세 게르만 왕국의 변화

카롤링 왕조의 몰락원인은 무었보다도 9세기 초 -10세기 초 이슬람세력의 증대와 노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3차 게르만의 민족이동에 기인한다. 노르만족은 프랑스와 잉글란드, 지중해지역등 전유럽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을 감행한 반면 이슬람세력은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여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탈리아 지역에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서유럽지역은 두 세력의 침입으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카롤링왕가는 독일에서는 911년까지, 프랑스에서는 987까지 명맥이 유지되었다. 결국 칼대제의 중앙집권적 통일 위업은 사후 50년도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고 실패하게 되었다. 특히 9세기 이후 프랑크왕국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지방분권적 요인이 강력히 대두되여 기존의 봉건적 은대지제도는 변모하였고, 중앙집권을 위한 가신의 지방파견은 성사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4. 중세 게르만 왕국 (11-15세기)

카톨릭 공동체의 유럽과 봉건사회라는 새로운 사회적 틀이 체계화되었다. 역사학자 M. Bloch는 카로링의 해체이후 10세기-14세기까지의 유럽적 상황을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종합하고 있다: “국가기능의 심각한 쇠약화, 토지의존적 사회로의 전환, 낮은 생산성과 전반적 빈곤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무력감과 절망감, 장원화된 개인들의 상호의존적 인간관계.” 한편 이시기 기독교 제국으로써의 유럽은 개념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역사학자 Karl Bosl의 주장에 따르면, 칼대제의 전략적 목표였던 기독교제국으로서의 유럽이라는 정신적 통일과업은 결국 실패하였다. 특히 11세기이후 황제권과 교황권을 상징하던 서임권 투쟁속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유럽은 이후 지리적 개념으로 남았다. 특히 13세기이후 십자군원정과 마르코폴로의 중국여행이후 유럽은 지리적으로 개념화되었다.

 

물론 중세 게르만 왕국은 지역적 왕권( koenigsherrschaft)이 바탕이된 지방영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들은 9세기부터 14세기까지 황제와 교황과의 대립구도안에서 제 3세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한 배경은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의 카놋사의 굴욕과 그레고리 교황의 몰락과 이후 아비뇽의 유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서유럽이 해체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중앙집권적 정치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지방분권세력의 덕택이었다. 사실상 9세기이후 지방영주의 강력한 대두는 유럽봉건세력의 중추세력을 담당한 셈이었다. 이러한 지방세력들은 약화된 중앙정부, 정치권위의 사유화, 봉토의 불입권 ( immunitas)을 토대로 고립된 농촌공동체를 장악하여 예속적 신분의 경작자계층(농노계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분권적 정치질서의 제도화는 주종제(vassalage)의 확립과 농노제에 입각한 장원적 생산체제를 강화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지방영주는 중세유럽의 분권정치와 장원경제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적 현상은 중세 일본에서도 생성되었다. 한편 게르만 왕국의 분권적 봉건제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급진전되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지역에서는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봉건제와 근대 중앙집권적 국가의 성립관계를 살펴볼 때 분권화와 예속화만이 중세유럽사회의 특징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보편적 정치공동체의 이념이었던 로마제국의 이념은 명목을 유지하였다. 게르만 왕국은 962Otto I 대제 (936-973)의 신성로마제국의 대관으로 로마정신은 형식상 유지되었지만 (나폴레옹이 합스부르크제국을 해체하는 1806까지 존속) 실질적인 정신적, 정치적 통일세계의 목표는 이루지 못하였다. 10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은 로마신민으로서의 통일된 국가관으로 무장될 수 없었고, 단지 기독교공화국 또는 기독교 왕국의 정치적인 신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근대적 의미의 중앙집권국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국의 넓은 영토에는 주민들이 분산되여 엷게 정착하였고, 도시는 서부와 남부에 불과 몇 개만 존재하였다. 지금의 도로의 역할은 미약하였고, 흔히 오솔길인 로마길을 따라 사람들이 이동하였다. 당시의 왕은 일정한 성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13세기 까지는 '방랑하는 왕'으로 제국을 평정하였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행정조직과 공무원제도는 실현될 수 없었고, 다만 봉건적으로 개인적인 유대관계에서 국경의 행정과 재정은 유지되어야 만하였다. 토지는 가장 중요한 권력의 상징이었고, 교육을 포함한 교회의 특권은 포기될 수 없었다. 따라서 황제권를 유지할 근대적의미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상비군, 조세제도등은 정착되지 못하였다. 다만 중세적 장원제도에 입각한 철저한 지방분권세력에 의존하여 제국은 통일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치적 의미가 결정적으로 상실된 것은 15세기 종교개혁에 파장에 따라 유럽사회가 분열된 이후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유럽의 정신적 통합은 어느 누구도 관심 밖이 일이었다. 다만 기독교의 분열과 종교적, 교회적 변화만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황제, 교황 및 교회의 보편주의는 결정적으로 붕괴되었고 지방분권적, 민족적 다양성과 관련된 공통의 문화와 문명의식이 성장하게 되었다.

 

중세유럽의 정치문화의 특징은 보편주의와 지방주의의 대립에 있었다.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대립 또는 교권과 속권의 대립은 유럽중세 전반에 걸쳐 유지된 이원적 구조이다. 이러한 이중적 구도는 그리스도교가 대변한 로마,라틴제국의 이념과 왕실 및 봉건영주를 대변한 지방배타주의에서 그 특징적인 상호관련성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두개의 보편주의인 교권과 속권은 상호 대립과 타협을 통해 중세의 역사적인 흐름을 가늠하였다. 역사학자 KohnJ. Huizinga등도 이에 동의 하였다. '기독교적 유럽의 정치적 전개는 이중적 기초위에서 시작되었다. 즉 보편적인 기독교적 세계공동체 이념을 표방하며, 성격에 있어서는 야만적인 게르만적이며, 전통에 있어서 로마적인 여전히 불안정한 권력체계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4. 중세 기독교사회의 유럽문명사적 의미

로마제국의 멸망이후 생성된 분권적인 중세 유럽사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정신적 사회였다.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사회는 서구 문명사적으로 최초로 종교를 앞세운 지식과 의지의 사회를 성립시켰다. 이로써 기독교 문명은 성장 발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제국의 문명체계은 로마시민의 의무를 결속하기위한 강력한 정신적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였다.특히 의무에 대한 교육적 조직체가 전혀 없었다. 또한 전체민중의 공동체의식을 조장하기위한 강력한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가 없었다 . 즉 의지의 사회를 넓히기 위한 지식사회의 폭이 협소하였다. 로마의 지배층은 권력과 재산은 물론 지식을 독점하였고, 전체 민중의 지적수준은 혼란하였다. 특히 로마제국 말기 국가를 지탱할 확고한 종교사상이 없었고 미신이 만연하였다. 결국 로마몰락의 교훈으로 기독교는 종교와 교육의 힘의 공동체로서 민중의 의지를 결합시킬 수 있다는 명제를 남겼다.

    

 

 

로마카톨릭 교회는 로마제국에서 볼 수 없었던 '계통있는 민중설교의 조직' 역할을 담당하였고, 또한 일종의 수십 개의 종합대학을 갖추고 오늘날의 메스컴 역할을 당당케하였다. 따라서 카톨릭사회는 교육에 의해서 통치되는 사회라는 근본적 인식을 가능케 하였다. 특히 -“만인으로 하여금 알아야 한다는 공적 기능의 틀을 제시하였다. 특히 카톨릭교회는 일반 대중에게 끝없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대학과 수도원 학교의 역할 근대교육 국가의 건설의 기틀을 제공한 점을 높이 평가 해야 한다.

    

 

5. 서유럽의 역사적 전개과정

 

476-751,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카롤링왕가의 성립까지

로마적 요소와 게르만적 요소의 혼재와 융합의 복합적 과정. 사회적으로는 게르만적 풍습, 관습의 강화되며 로마적 요소와 혼란과 혼동에서 동화와 융합의 특징. 경제적으로 라티푼디움(대토지소유제)의 해체와 촌락공동체의 형성과 확산. 정치적으로 로마의 조세와 행정 및 사법제도 등의 쇠퇴와 지방영주의 권한강화(지방분권제도의 강화)

    

 

8-10세기, 카롤링왕조의 탄생에서 해체 (751-962년 신성로마제국의 탄생)까지

게르만족의 로마, 라틴화, 카톨릭화의 특징. 프랑크왕국의 정복전쟁의 산물로 게르만왕국의 카톨릭화가 성사. 즉 프랑크족 중심의 서유럽 정치적 개편작업으로 게르만-로마적 요인이 융합과정의 초석 역할을 수행함. 특히 프랑크 왕국의 카로링가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제휴는 고대 로마유산과 게르만사회의 구조적, 실체적 접목을 의미함. Rome-idea: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뜻하는 정치적 이념의 전통을 확립하여 그리스-로마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함. 즉 정치적 통합력으로서의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게르만적 재구성을 의미함.

    

 

로마제국의 결정적 붕괴는 7-8세기로 본다. 지중해를 내해화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유럽은 중세사회로의 전환이 불가피했다. (장원제도 등) 이슬람의 서유럽 침입과 연관된 프랑크족의 카로링가의 성장을 주목하라. 732년 칼 마르텔이 프와티에에서 이슬람세력을 격파시키면서 강국으로 급성장함. 이후 피핀 751-768, 샤를르대제 768-814로 서유럽의 정치적 권력이 집중되었다. 800년 칼 대제의 바티칸에서의 황제등극: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은 게르만족의 로마구제국의 후예자 상속을 뜻함, 황제는 로마교회(교황)를 보호하는 군주의 역할: 정치적 책임과 교황은 정신적 수장으로 황제임명권을 통한 교회 수장권을 인정 받음.

    

 

L. von Ranke “카톨릭적 봉건유럽의 형성과정은 구제국의 와해와 민족이동이 수반한 오랜 혼돈과 분열 및 창조적 재구성의 과정이며. 즉 로마라틴적, 게르만적, 기독교적 요소의 독특한 중세적 융합의 소산이다.”카롤링조의 정치적, 군사적 통합과 이에 따른 유럽의 카톨릭화는 구로마제국의 서유럽지역의 통합을 가능케 한다.

    

문명사적 의미. 유럽의 형성은 이제 지중해세계의 일부가 아닌 새롭고 독자적인 사회형성에 직접적인 기초가 됨. H. Pirenne는 카롤링왕가의 탄생으로 중세사회의 핵심적 위치가 확보되었다고 평가함. “이슬람이 없었더라면 프랑크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모하메드 없이 칼 대제는 생각 할 수 없다.”게르만의 침입에도 로마적 요인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유지되었음을 주목하라. “게르만이 파괴한 것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의 정부이다.

    

 

카롤링가의 쇠퇴이후 - 종교개혁 이전까지 (11-14세기)

카롤링 왕조의 몰락원인은 이슬람세력의 증대와 노르만족의 침입에 따른 결과이다. 3차 게르만의 민족이동은 9세기 초~10세기 초에 있었다.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 지역에 대한 침입으로 인한 결과. 당시 이슬람세력 역시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다.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 이탈리아 지역 포함), 비잔틴제국이 쇠퇴하는 시기이며 서유럽지역은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되었다.

 

 

 

한편 카롤링왕가는 독일에서 911년까지, 프랑스에서 987년 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결국 칼대제(샤를마뉴)의 중앙집권적 통일 위업은 50년도 못가서 한계에 부딪치고 실패하였다. 9세기이후 강화된 지방분권적 요인이 크게 대두하여 봉건적 은대지제도가 정착하고 중앙 가신의 지방 파견의 한계를 경험하였다.

    

 

 

2부 끝. 3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