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미술 1
비잔틴ㆍ로마네스크ㆍ고딕
Ⅰ. 서양에서 중세란 무엇인가?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 1
본 연재 글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세미술, 2부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편에서는 5편으로 나누워 연재됩니다. “1부. 중세의 시작”에서는 로마의 분할 이후의 유럽의 역사를 설명하며,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에서는 왕과 교황의 관계와 갈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3부. 미술과 도상”에서는 특히 중세미술에 나오는 미술 속 도상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추후, 기회가 되면 구체적으로 설명 하고자 한다.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는 중세미술 전반과 초기 기독교 미술 및 비잔틴미술, 로마네스크 미술, 고딕미술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부. 중세의 시작 2부. 제권과 교권의 대립의 역사 3부. 미술과 도상 4부. 중세 미술이 무엇인가? 5부. 중세의 미술 양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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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중세의 시작
새로운 역사의 시작, 로마의 분할과 중세의 시작
1. 제정의 붕괴와 로마의 몰락
(1) 군인 황제 시대
로마의 평화 이후 계속된 군인황제 시대는 한 마디로 혼란의 시대였다. 그리하여 3세기에 로마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혼란과 무질서를 수습하고 개혁을 통하여 제국의 재편성을 시도한 것이 Diocletianus(284-305)와 Constantinus(306-337) 황제였다.
(2)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제(帝) 통치
그는 두 사람의 황제(Augustus)와 그 밑에 각기 한 사람씩 부황제(Caesar)를 두어 제국을 행정적으로 구분하여 통치하되 자신이 최고권을 장악하고 유고시에는 부황제가 그를 계승하여 황제 선출에 군대의 개입을 방지하려 하였다. 이를 4제통치(Tetrarchy)라 한다. 그는 점차 동방의 신적인 전제군주의 기풍을 답습하고 궁정의 예식도 점차 동방식으로 변하였다. 또한, 행정과 군대 개혁으로 군대의 정치개입을 방지하였다.
(3)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부흥
그는 단일 황제가 되어, 기독교를 공인(밀라노 칙령 313),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옮겨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더욱 강화하여 동방적인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2. 로마제국의 몰락과 기독교의 성장
375 : 게르만 이동, 훈족의 압박으로 서고트족이 발칸반도 진입
378 : 아드리아노플에서 발렌스 황제, 게르만족과 전투 중 전사
379-395 테오도시우스 황제 : 기독교 국교(380), 제국양분 양속
410 : Alaric의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
451 : 로마 장군 아에티우스는 게르만의 도움으로 앗틸라 격퇴
455 : 반달족, 로마 약탈
476 : Romulus Augustulus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의해 폐위되어 서로마제국의 멸망
(1) 로마는 이질적인 오리엔트와 미개발지역인 유럽대륙을 포섭하여 제국을 건설하고 강력한 황제권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이 황제권은 오랜 전통을 지닌 기능적인 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제적인 권력의 원천은 광대한 황제령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에 있었다.
특히 3C 군인 황제시대에는 황제권의 기반인 군대가 제위 계승에 개입하여 황제 옹립을 위한 내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는 황제권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중앙의 통제권의 약화와 더불어 제국의 분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Diocletianus는 동방적인 전제군주제인 4제(帝)통치를 도입하였으나 지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Constantinus 사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군대의 질적 변화로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복전쟁의 종식으로 Colonus제라는 토지에 결박된 예속적인 소작제로 변화해 갔다. 페스트(166)의 유행과 내란으로 인구가 감소로 Colonus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개혁의 부작용으로 세금징수의 책임은 도시의 참사회와 상인, 선주, 수공업자 조합에 부과되었고 이들의 직업과 신분은 고정되고 세습화되었다. 로마의 경제적 번영은 정복사업의 결과이나, 정복사업의 한계로 번영 지속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제정후기에 접어들면서 오리엔트의 비의(秘儀) 종교가 로마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또한, 크리스트의 새로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2) 기독교는 313년 Constantinus 황제는 Milano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고 Nicea 공의회(公議會)를 통해 Arius파의 크리스트의 신성(神性) 부정설을 이단으로 정하고 아나타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삼았다. 그 뒤 Theodosius 황제에 의해 380년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세기의 시대, 봉건사회 태동
1. 중세유럽의 형성
375년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5-6세기 서유럽의 형성기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세 시작으로다룬다. 그러나 중세의 형성은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로마제국의 유민들은 자유를 상실하였다. 또 다신교 사회에서 기독교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392년 로마의 국교 후, 로마의 교황청은 서유럽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 방법에의 가르침대로 구현하려 하였다. 당시 유럽의 로마제국 몰락의 혼란과 게르만족의 이동에 따른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결국 유럽인의 정서에 기독교는 크게 호응을 받았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통해서만이 안녕, 질서,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 게르만족의 이동(V lkerwanderung L'invision germanique)
375년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이들은 용병, 노예 등으로 고용되어, 뒤에 이동을 시작한 게르만족과 이들 사이에 동족간의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후의 4세기경 Volga 강의 범람으로(373년), 몽고족의 침입(375년) 게르만족이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서로마 제국 내에 여러 부족국가가 생성되었다.
375년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9세기 노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의 민족이동은 끝맺게 된다. 이들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당시의 유럽의 중심세력이던 프랑크제국의 Charlemagne(742-814) 대제가 사망하고 프랑크제국이 붕괴되어 Gaul-Gallia 지방에 노르만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한편, 당시 로마 국경의 수비가 매우 허술하였고, 질병, 기아로 인하여 인력 공급의 축소로 인한 군사력의 약화, 그리고 로마군의 주요군사 장비는 산악지대였던 동부 국경 라인 강 지방에서는 무용하였다. 또한 기독교의 힘이 급격히 성장하여 종교적인 명상에 몰두하였고 경제활동에서의 직업상실도 당시로서는 한 원인이었다.
375년 Moesia interior 지방의 동고트족과 맹방관계를 수립하였다. 로마가 이렇게 대처한 이유는 당시 종교, 문화, 경제의 중심 인재들이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한 데에 있다. 결국 서로마제국은 이렇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동한 게르만족 중 프랑크족만이 계속 유지되면서 중세 서양 봉건사회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가톨릭 개종(496년) 서양 중세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정복활동으로 서유럽을 차츰 기독교화했다.
(2) 복합 세계의 형성( Romanumus + Germanismus + Celtismus )
(3) 이슬람 문화권 (8세기~)
(4) Greek East 문화권 (11~12세기)
2. 중세 형성기 유럽 (1차 봉건시대)
(1) 프랑크 왕국 (5 세기 말에 Clovis(481-511)
발전과정에서 로마 교황권과 결합하였다는 것과 게르만 부족들을 통합하였다는 것, 또 중세 유럽의 법제들과 경제조직의 한 원천이 되었다는 것 등으로 말미암아 중세문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2) 클로비스(466?-511)의 메로빙(Merobingian) 왕조
496년 12월 25일 클로비스 왕가의 가톨릭교회의 세례 사건은 유럽의 종교사뿐만 아니라 문화사와 정치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그의 개종으로 게르만 국가와 로마 교회는 공식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다. 즉 로마교회는 교황권(Sacerdotium)을 중심으로 서방의 종교적, 정신적인 지주로서 공인되고, 프랑크 왕국은 왕권을 중심으로 서방의 정치적, 무력적 지주가 되어 상호 의존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511년 클로비스 사망
샤를 마르텔(Charles Martel, 714-741) 시대에는 이슬람교도의 침략 (732)과 격퇴
(3) 페팽(Pipin the Short, 741-768)의 카롤링 (Carolinger) 왕조
교황 Zacharius(차카리우스, 741-752)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교황권과 왕권의 협조관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교회의 종교적인 권위와 왕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4) 샤를마뉴 대제 (Karl der Grosse, 771-814)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였다. 그의 왕국은 옛 로마제국의 판도를 재건하는 듯하였다. 특히 영토를 확대 과정에서 서유럽 주변의 이교도들은 기독교로 개종시키거나 추방함으로써 서유럽에서의 로마교회의 세력을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레오 3세(Leo III, 795-816)는 800년 샤를마뉴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씌워주기에 이르렀다. 문화부흥 정책과 수도원의 고전 연구가 활발해 졌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Carlolingian Renaissance)라 한다.
(5) 샤를마뉴 대제 사망 (814)
베르덩 조약(843)과 메르센 조약(870)으로 동서 프랑크와 이탈리아의 3 왕국으로 분할되었다. 이 3 왕국은 후일의 독일과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터전이 되었다.
(6) 프랑크 왕국이 해체
카롤링거 왕조의 붕괴와 소왕국의 출현 (880)
동프랑크의 Otto(재위 962-973) 대제, 교황에게 세속권 위임, 962년 신성로마제국의 제관을 수여
봉건적 사회질서와 보편적 기독교 질서에 기초한 중세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발전기를 통해, 왕권과 로마 가톨릭 교권과의 제휴가 성립함으로써 물질적, 세속적 세계를 지배한 속권과 나란히 정신적, 종교적 지배자로서 군림한 기독교 세력의 기반이 다져졌으며, 후기 카롤링 왕조의 혼란기를 통해 게르만적 요소가 강하게 각인된 봉건제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봉건적 사회질서의 윤곽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그 첫째는 우상 문제를 둘러싸고 동로마제국과 결별한 채(726) 이민족의 위협으로부터 로마교회를 구원함으로써 왕국과 가톨릭교회 간의 제휴가 급진전되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수행된 병제 개혁, 즉 보병제도로부터 기사제도로의 전환을 계기로 古 게르만 시대의 주종제도와 은대제 간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이는 왕국이 분열하고 외세의 침입에 시달린 카롤링 왕조의 혼란기에 이르러 봉토에 부여된 불입권(Immunity)과 함께 널리 보급됨으로써 중세의 봉건적 사회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프랑크인들이 로마 가톨릭사회와 제휴하여 서로마 제국을 부흥시킴으로써 서유럽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마련해 주고 게르만문화와 로마문화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묶음으로써 새로운 유럽 문화를 이룩할 바탕으로 마련했다.
클로비스와 교회
샤를 마르텔과 교회 (732)
페펭과 로마 교회 (751), 로마교황령의 기원 (754)
샤를마뉴와 로마 교회, 서로마 제국의 제관 (800),샤를마뉴의 대관식,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전개되는 교권과 제권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7) 무슬림의 위협
8세기 아랍인들은 아프리카를 정복, 스페인 진출한 이래 피레네 산맥을 넘다
732년 Poitiers를 함락
페펭 小帝는 752년 Nimes, Maguelonne, Bezier를 수복
759년 서고트족은 Narbonne에서 격퇴
(8) 노르만의 침입
조선술의 발전, 일부다처제로 인한 관습화, 원정의 목적은 정주지 획득이 아니라 전리품 약탈, 근친복수(Vendetta)
카롤링거 왕조의 약화와 영주들의 지배권이 성립되게 된다.
787년 바이킹의 침략
834년 전후
850-851년 대규모
878년 영국 에딩턴 싸움에서 노르만에 승리
911년 노르만의 롤로(Rollo)는 노르망디 영주로 귀속
영국에 덴마크인의 왕국이 수립
프랑스에 노르만의 국가가 수립
(9) Magyars 인의 침입
833년 이동
895년 전후 다뉴브강 중류
899년 이탈리아를 공략
903년 작센 침입
926년 하인리히 1세의 독일은 헝가리에게 조공
933년 하인리히 말기에 운스트루트에서 승리
955년 오토 1세에 의해 '레히 대첩'에서 승리
3. 봉건제도의 성립
(1) Feudalism
봉건제란 한 자유인(가신)의 다른 자유인(주군)에 대한 복종과 봉사의 의무와 주군의 가신에 대한 보호와 부양의 의무를 창출하는 일단의 제도를 가리킨다. 즉 종사제와 은대지제와의 결합에 의해 성립된 제도를 말한다. 이는 자유로운 신분을 바탕으로 주군과 가신 간에 맺어진 복종, 봉사와 보호, 부양의 쌍무적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물적 관계의 결합으로서의 봉건제이다. 농노제를 봉건제와 동일시한다.
① 농민층의 종속 ② 봉급제 대신에 봉사보유지(봉토제)의 채택 ③ 전문적 전사계급의 우월한 지위 ④ 가신제 속에 나타난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⑤ 권력의 세분화 ⑥ 유럽 봉건사회는 위계제 사회라기보다는 불평등사회였고, 귀족 사회였다기보다는 우두머리의 사회였고, 노예제 사회라기보다는 농노제 사회였다.
(2) 봉건제
주종제도의 한 측면인 개인적 보호관계는 로마사회의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인 Clientage에서 볼 수 있으며, 이 보다 주종제도에 더 유사한 것은 종사제(從士制, 게르만 사회)였다.
또한 봉토(封土)의 중요한 속성의 하나인 토지의 불완전한 소유, 즉 완전한 소유가 아니라 지대(地代)를 비롯한 일정한 의무수행을 조건으로 토지의 용익권(用益權)을 갖는 것은 로마사회의 Precarium 을 들 수 있으며 프랑크 왕국의 은대지제도(恩貸地制度, Benefice)와도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러나 봉건제도가 완성되는 것은 Charlemagne 제국이 무너지고, 노르만의 침입, 사라센의 공격, 마자르족의 침입 등이 격심했던 9세기로부터 10세기에 걸친 시기였다. a) 극도의 혼란과 무정부 상태, 국가의 무력화와 국가 공권의 해체라고 할 정도의 약화와 분산, 지방 내지 작은 영역단위의 방어의 필요성 등이었다.
사회 경제적인 국면 또한 봉건사회의 성립을 촉진시켰다. 로마 말기부터 시작되어 민족이동 후 가속화되고, 사라센의 팽창으로 유럽이 지중해를 상실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농촌화와 자연경제로의 후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결국 싸울 줄 아는 전사와 토지의 소유자가 사회의 지배층으로서 군림하게 되고, 나머지 일반인이나 무력한 자는 전사계층의 보호 밑에서 그들의 토지를 경작하는 예속적인 존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중세 유럽의 특징적인 사회제도인 봉건제도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의 Charles Martel
9세기 feudum (봉토)
(3) 장원제도
장원은 전사이며 토지 소유자인 봉건적 지배층의 토지를 말하는데 이들은 장원 영주로서 비자유 농민인 농노를 지배하였다. 장원제도는 주종제도의 사회경제적 기반으로서 봉건사회의 핵심을 이루고 있어 이 양자는 구조적인 연관을 가진다. 3포제를 채택하여 춘경지, 추경지, 휴경지로 3분하여 경작하였다.
신분적으로 부자유하였던 농민들은 토지에 결박되어 이동의 자유가 없었으며, 농민은 부자유한 신분의 표시로서 인두세를 납부하였고, 혼인의 자유도 제한되어 타 영주 소속의 농민의 딸과 결혼할 때에는 혼인세를 납부해야 했다. 또 농민이 자기에게 할당된 보유지를 상속할 때는 상속세를 물었으며, 상속자가 없는 경우 토지는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영주권과 더불어, 다른 장원의 특징은 그것의 공동체적 성격이라 하겠다. 장원의 공동체적 성격은 그것의 공동체적 규제와 권리로 나타나는바 그것은 농업기술상의 제약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중세 말에 장원제도가 붕괴되면서 농노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할 때 영주제적인 촌락 속에서 풀려나 인신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와 함께 위와 같은 공동체적 권리로부터도 이탈한다는 측면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중요한 사회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농민
영주권
4. 만약 게르만족이 야만족이었다면 어떻게 로마 내의 기존 사상을 수용, 발전시켰겠는가?
단절설(Kultur Katastrophentheorie)
문화 연속설(Kultur Kontinuit itstheorie)
(1) 기독교
중세는 가톨릭이 유럽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다. 특히 11세기-13세기에는 교권이 절대적이었고, 그러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한 주교, 추기경, 교황 중에는 게르만족 출신이 다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 자체 내의 기존 가톨릭을 신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듯 중세의 중심인 크리스트교의 형성이 라틴족 보다는 게르만족에 의해 고취되었다는 점이 이 논거의 요점이다. 한편 이것을 바탕으로 하는 모든 학문, 문화에서 고대와 중세의 연결점이 발견된다. 즉 게르만족에 의한 종교적 연속성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삼위일체(trinit t)을 주장하는 Athanasius(295?-373)파와 아리우스파의 교리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교리로 채택
13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포르투갈과 스칸디나비아 제국(諸國)의 가톨릭 개종
(2) 신학사상
중세는 교권, 왕권, 인민주권이 공유되는 시대였다. 11세기에서 13세기에서와 같이 교권이 절대적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의 원동력은 신학사상의 뒷받침이라 할 수 있다.
신학사상의 출발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철학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고, 교회 존재의 가치, 종교가 세속학문 즉 철학을 능가한다는 점과 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점 등을 제시하고 종교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 속에서 확립되고 체계화된 것으로서 이는 중세에 전달되어 게르만족과 라틴족에 의해 더욱 발전된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교황권도 대학의 자유, 독립, 선구자, 낭만주의 등 4대 정신에는 굴복하였다.
첫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둘째, 계시의 세계는 무한하다는 점이다.
셋째, 신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이론이다. '로마교황은 신의 대리자이다(Vicarius Dei)'라는 사고 아래 절대 권력의 합리성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교부철학과 스콜라철학 등 신학사상이 교권의 지상권을 가능케 했다. 또한 교부철학은 플라톤에게서, 스콜라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고대의 사상이 중세의 신학사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신학사상은 연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헤브라이즘의 편협성을 벗어나서 범민족적인 세계주의로 발전하는 데는 헬레니즘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가 중세의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헬레니즘적인 요소와의 결합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만약 이러한 사상적 결합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기독교의 광범위한 교세 확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결합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5.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신성로마제국
(1) 프랑크왕국의 분열
샤를마뉴 대제가 814년 사망
프랑크 왕국을 분열
루이 경건왕(Louis I le D bonnaire, the Pious, 814-840))의 영토의 상속 문제 (817)
장남 Lothair(840-855)에게는 독일의 Aachen 지방에서 로마에 이르는 왕국의 중심부와 프랑크왕국의 제권
페펭에게는 프랑크의 서방
셋째 루이 독일왕((Louis the Short, 843-876)에게는 프랑크의 동쪽
샤를 대머리왕(843-877)도 영토 요구
교황청의 843년에 Verdun조약을 중재와 중단
855년 장남 Lothair가 사망으로 샤를 대머리왕과 루이 독일왕 사이에 영토분할을 요구
교황청의 870년 Mersen조약 체결로 Lothair의 영토를 루이 단구왕에게 동쪽(동프랑크, 신성로마제국의 기초)을, 샤를 대머리왕에게 서쪽(서프랑크)을 상속
(2) 신성로마제국의 형성
카롤링거 왕조가 동. 서 프랑크로 분열되어, 동프랑크 지역에는 신성로마제국이, 서프랑크 지역에서는 Capet 왕조가 생긴다.
동프랑크 왕국
루드비히(Ludvig das Kind, 900-911)가 911년 폐위되고 Konrad 1세(911-918)가 왕위계승, 독일 민족의 독일국가, 즉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당시 독일의 Franken, Bayern, Schwaben, Sachen은 분할주의가 대두하고 있었고, 왕 선거제도로 선출된 세습군주는 아니었다. 이 후 계속적으로 상호 선거로 왕을 선출하는 형태는 계속되고 제권(帝權), 명령권은 실질적 권한보다는 상징성이 매우 강했다.
콘라드 1세
하인리히 1세(Heinlich I, 919-936)의 작센왕조 '대 동방 중시정책'(Drang nach Osten)의 포교, 기독교화
Otto I세(오토 대제)의 개혁
로마 교황청, 요하네스 12세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도록 제관(帝冠)을 줌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을 형성(962년 2월 2일)
1806년 나폴레옹의 독일지역 정벌 시까지 형식적 유지
전체 유럽의 테두리에서 교황청과 독일 각 지역의 군주들은 언제나 로마교황이 주가 되고 있었고, 중세 법상으로도 유럽이 하나님이 땅이라는 사고가 팽배했음으로 현실의 지배자들은 교황청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종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당시 독일 영토 내의 종교인, 즉 주교들은 제권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프랑크 왕국
987년 카롤링거 왕조 최후의 왕, 루이 5세 사망
Hugh Capet 왕조가 성립
유럽 전체 내의 속성은 Christainity라는 종교적인 측면과 Greco-Romanus라는 문화적인 측면이 인문주의라는 형태로 양자가 공존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계속적으로 전통사회가 유지되면서 현재의 유럽연합의 형성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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