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2

草霧 2013. 2. 13. 18:01

 

 

 

 

 

 

 

 

 

 

 

 

 

 

 

 

 

 

 

 

2013년 계사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대 미술 8

 

 

신화와 기독교의 교차로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2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로마(Nova Roma)",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또는 이스탄불(İstanbul) 불리며, 터키의 도시 이스탄불의 옛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꾸기 전의 원 이름은 비잔티움(Byzantium)이었다. 현재 터키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터키 서부에 위치해있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운데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에 걸쳐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렀으며 오스만 제국 때까지 수도로 존속하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1923년 이후로는 앙카라가 터키의 수도가 되었다. 2010년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2012년 유럽의 스포츠 수도로 지정되었다. 1985년 유네스코는 이스탄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이다. 기원전 667년 고대 그리스의 메가라의 주민들이 식민지 도시로 건설한 뒤, 비잔티움이라 불렸다. 후대에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란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뒤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메가라 출신의 비자스(Byzas)라는 사람이 창건했다고 하며,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초기 비잔티움이란 이름은, 비자스의 이름에서 따왔다고한다.

로마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결과 선정된 도시가 비잔티움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으로 상업과 교역이 발달했으며 다뉴브 강과 흑해 너머의 이민족들, 또 동방에서 맹위를 떨치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공격에 신속하게 대응하기에도 알맞았다. 마침내 324년부터 330년에 걸친 공사로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정해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한 "새로운 로마(Nova Roma)" 라고 불렀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별칭, 혹은 애칭이었다.

330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선포한 이래, 이슬람화이전까지 기독교(동방정교회)문화의 꽃이 피어서 지금도 정교회 성 소피아 성당에는 화려한 성화(이콘)들이 남아 있다. 그 후 1204,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었다가 1261년 미카엘 8세에 의해 탈환되었다. 1453529일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이 도시를 함락시킨 술탄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다. 오스만투르크 치하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이스탄불이 모두 사용되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그리스가 침공에 터키공화국 초대대통령이 되는 무스타파 케말의 방어로 저지되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겨졌다. 제국인들이 세계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라 불리는 도시로 상업이 발전하고 전성기때는 교외까지 약 10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금각만(Golden Horn)

이스탄불을 끼고도는 해협어귀의 이름이다. 마르마라 해와 함께 이스탄불 곶을 둘러싸고 있다. 천혜의 항구이자 자연적인 방어 요충지로 비잔티움 제국의 해군선단의 본부가 위치하고 있었고 해안선을 따라 성벽이 세워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보호하고 있었다.

 

보스포루스 해협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해협이다. 해협 양쪽으로 이스탄불 시가 자리잡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330 BC ~ 1453, ‘the Byzantine Empire’,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로마 제국의 뒤를 이은 제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였고 로마 황제를 직계한 황제가 다스렸다. 이 나라는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 부르기도 했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주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로운 로마’)으로 천도한 서기 324년이 중요한 분수령이다.

서기 306년경부터 1453년까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이 나라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 등 외적의 침략을 받아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의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했다. 그러나 1071년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는다.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죽은 뒤 제국은 다시 쇠퇴기로 접어든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제국 영토가 비잔티움 그리스인과 라틴인의 각축장이 되면서 제국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수도를 수복하고 제국을 제건했으나, 14세기의 내전으로 비잔티움은 국력을 소진했다.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다.

   

 

 

공의회 (公議會, ecumenical councils)

 

 

 

 

교리와 의식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 규정하기 위하여 '전체 교회'의 주교와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진행하는 기독교의 종교 회의인데, '전체 교회'의 의미는 교파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의 경우 로마의 주교와 상통관계가 있는 신자들을 일컫는다. 많은 교파들로부터 두루 받아들여지는 공의회는 처음 일곱 개다.

 

 

첫 일곱 공의회

1차 니케아 공의회(325)로부터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에 이르는 기간을 "일곱 공의회 기간"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1. 1차 니케아 공의회 (325):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영원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니케아 신경을 작성했다.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는 교파들은 이 공의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공회에서는 최초의 교회분열인 동서교회 분열이전의 교리를 따르기 때문에, 니케아공의회에서 작성한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오신조, 사도신조를 교회의 신조로 이해한다.

 

2.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 니케아 신경을 개정했다.

 

3. 에페소스 공의회 (431): 사람으로서의 예수와 신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네스토리안주의를 배격하였다.

 

4. 칼케돈 공의회 (451): 예수에게는 신성 밖에 없었다는 단성설을 배격하고, 예수는 완전한 하느님이며, 사람이라는 칼케돈 신조를 작성하였다.

 

5.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 기존 공의회 결정들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형태의 아리안주의, 네스토리안주의, 단성설을 정죄하였다.

 

6.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681): 단의론을 배격하고 그리스도에게 사람과 신으로서의 뜻이 다 있었다고 정하였다. 퀴니섹스트 공의회 (692): 트룰로 공의회라고도 함. 2·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와 관련된 교회법 102개조 공포. 동방교회는 찬성하였으나 로마 교황은 거부함.

 

7. 2차 니케아 공의회 (787): 성화상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을 부활시켰다. 많은 개신교 교파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대신 성화상에 존경을 표하는 것을 정죄한 754년에 있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존중한다.

 

초기

예루살렘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1차 니케아 공의회 (325)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381) ·에페소스 공의회 (431) ·칼케돈 공의회 (451) ·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680-81) ·퀴니섹스툼 공의회 (692) ·2차 니케아 공의회 (787) ·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879-80)

동방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5) ·예루살렘 교회회의

로마 가톨릭교회

수트리 ·라테란 (1) ·라테란 (2) ·라테란 (3) ·라테란 (4) ·리용 (1) ·리용 (2) ··피사 ·콘스탄츠 ·시에나 ·바젤 ·라테란 (5) ·트리엔트 ·바티칸 (1) ·바티칸 (2)

 

 

비잔티움해석

 

비잔티움이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에서 나온 말이다.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로마 제국’‘’, ‘’‘로마인들의 제국’, ’‘로마니아’‘, ’‘로마 공화국’‘, ‘’‘그라이키아’‘, ‘’‘로마이스’‘’라고 불렀다. 그리스-로마 전통을 이어받은 나라로 이 나라를 대개 ‘’‘그리스인들의 제국’‘’이란 표현이 쓰였다. 오늘날,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보통 '동로마 제국'이라고 쓰는데,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서방 세계에서는 '그리스인들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는 데는 이 나라가 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거부

교황 레오 3세가 서기 800년에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 거행,

로마의 여황 아테네의 에이레네 시대 때 동로마 제국이 로마의 계승국이라는 주장은 전면적으로 도전

'로마인들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

1648'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과 '비잔티움' 대중화

일반적인 용어으로 굳어진 것은 19세기

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대진(大秦)국 또한 불림(拂菻)’으로도 불렸다.

 

 

비잔틴 제국 연대기

 

 

A. 로마 제국의 분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 지배 체제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황조 세습 체제, 콘스탄티누스 왕조 (306-363)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

솔리두스 금화

기독교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

추후,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맡았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364-383)

테오도시우스 2세의 테오도시우스 황조(379~457)

서로마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서부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

 

이탈리아를 회복하기 위하여 제노 황제, 레오 왕조(457~518)

'이탈리아 군부 총감'(magister militum per Italiam)

493년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 통치와 서방 영토에 대한 최소한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

491년 아나스타시우스 1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 완성 또 세금 제도 개혁

   

 

 

B. 서방 영토 재정복,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602)

 

 

 

 

527, 유스티니아누스 1( 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527년부터 565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교회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동방정교회로부터 성인의 칭호와 함께 대제(大帝, megas)’라는 칭호를 받았다. 오랜 숙원인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에 이르기까지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함으로써 위대한 비잔티움의 황금기를 구가하였고 비잔티움 제국민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영토는 급격히 무너졌다.

명장군 벨리사리우스를 기용

테오도라 황후와 결혼 스캔들

니카의 반란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

능력위주의 행정과 정복활동

단성론 문제와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하기아 소피아 건축

북아프리카 원정 (533534)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535540)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 (540562)

두 번째 이탈리아 원정(544552)

동서 교회의 통합 노력 ( 아카키우스 분열)

그리스도 단성론의 문제(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교황 비질리오와 충돌

성탄절과 공현절의 공식 날짜를 확인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C. 줄어드는 영토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헤라클리우스 왕조 (610-711)

610년 포카스 '폭군'의 폐위

헤라클레이오스

614년에 사산조 황제 호스로 2세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 성십자가(True Cross) 탈취

헤라클레이오스의 반격은 성전의 성격으로 629년에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 이 전쟁으로 두 제국 모두 국력을 소진

그리스의 불

618년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629년에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

테마 제도

콘스탄티노스 4

유스티니아노스 2세의 공포 정치

 

이사우리아인 왕조(717-802)에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까지

이사우리아인 레온 3

콘스탄티노스 5

863년 랄라카온 전투

 

 

 

 

 

 

 

8,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 

이콘 금지,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의 반란

에이레네 황후와 787년 제2차 니카이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도록 정했다.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의 도움으로 이콘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데도 영향, 포티오스 논쟁으로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 승격

니케포루스 왕조 (802-813)

아모리아 왕조 (820-867)

 

 

 

 

 

 

D. 마케도니아 황조(867-1056)와 제국의 최전성기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867년에 동방 재정복 전쟁을 개시

904, 트리폴리의 레온, 테살로니키 약탈

911, 크레테 수복 실패

907, 비잔티움 제국이 바랑인과 외교 조약와 요한네스 쿠르쿠아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963~969년 재위)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969~976)

바실레이오스 1

바실레이오스 2

    

불가리아와 제국의 전쟁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간의 해묵은 갈등으로 불가리아에서 두 세력의 종교적 수위권 충돌

894년에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 1세와 불가로피곤 전투(896)패배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의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와 실패

바실레이오스 2(976~1025)의 불가리아 원정대와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 패배, 도나우 강 국경선 확보

 

키예프 루시와 제국의 관계

850년에서 1100년까지 키예프 공국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와 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와 루시가 기독교화

비잔티움 문화가 전파

바랑인 근위대

 

 

 

절정

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의 칼라브리아에 이르렀다. 제국은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케이아 바깥에서 이집트 침략군을 궤멸시켰다. 11세기에는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6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중에 교황 특사 세 사람이 성 소피아 성당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 교황 칙서를 놓으면서 동서 교회의 분리의 분수령이 되었다.

 

위기와 분열

바실레이오스 2세 사망

노르만족 1069년에 침공

1065년과 1067년에 셀주크 튀르크 원정으로 1071, 로마노스 디오게네스(재위:1068~1071)의 만지케르트 전투 패배와 생포로 이 패전으로 소아시아는 투르크인이 점령하게 되었고, 후에 오스만 제국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미카엘 두카스(제위 1071년부터 1078년까지) 정변

두카스 왕조 (1059-1081)

    

 

 

 

 

 

 

E. 콤네노스 황조(1081-1185)와 십자군

    

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이사키오스 1(1057~1059년 재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Alexius I Comnenus, 재위 : 10811118)

1차 십자군 (10961099)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등 쟁쟁한 군웅들을 앞세우고, 총사령관으로는 명목상이긴 하지만 아데마르 주교가 있었고 은자 피에르도 따라갔다. 1099년 십자군은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한다. 십자군의 승리와 예루살렘 왕국(십자군 국가의 성립)을 세운다.

 

1090년 경 알렉시오스는 1054년 교회의 대분열 이후 소원하던 서방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교섭을 통해 서방의 군대를 끌어들여 아나톨리아에서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교황의 지지를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호소했다.

 

1095년 교황은 피아젠차에서 프랑스의 클레르몽으로 여행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고 대()무슬림 전투에 참가하는 자들은 죄를 방면해주겠다고 선동하였다. 이 호소에 힘입어 서방의 왕들과 주교, 기사들은 대군을 조직하고 준비하였는데 이는 알렉시오스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알렉시오스는 서방의 무법자들이 제국을 거쳐 성지로 원정을 떠나는데 제국이 입을 피해를 걱정하였다. 알렉시오스의 현명한 대처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알렉시오스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 니케아와 몇몇 소아시아 도시들이 다시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나중에 거의 대부분 서약을 깨고 알렉시오스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 같은 유서깊은 제국의 도시가 영토가 오만한 노르만족인 타란토의 보에몽의 수중에 넘어갔고 보에몽은 안티오크 공국을 세웠다. 스스로 안티오케이아 공작임을 선언하고 곧장 비잔티움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으나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에 따라 알렉시오스의 봉신이 되는데 합의한다.

 

다른 십자군 장군들도 제국을 적대시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회복했고, 또한 보에몽을 견제해 타우루스 남동부 지방으로 진출해 아다나와 타르수스 주변의 비옥한 해안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아울러 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진군했다.

 

러나 십자군이 세운 작은 십자군 국가들에 대해 영구적인 통제권을 확립할 수 없었고, 1107년 보에몽이 그리스 서부의 아블로나를 침공했을때 이에 맞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이때부터 수십 년간 노르만인들은 비잔티움의 최대 적수가 된다.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1118년 요한네스 2세 콤네노스(재위 : 11181143)

안티오키아의 수복, 십자군 국가들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 칼로얀니스 (아름다운 요한네스)라는 별칭, 비잔티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불렸다. 베로이아 전투, 비잔티움 제국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임을 보여주고자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국가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했다. 십자군 동맹들의 배반으로 좌절되었다.

    

 

마누엘 1세 콤네노스 (재위:11431180)

 

 

2차 십자군과 연합하여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켰고 발칸 반도 및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했다. 아들 알렉시우스와 프랑스의 루이 7세의 딸 아녜스 공주를 결혼시켰다. 십자군 국가들의 종주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강화했으며, 안티오케이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과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맺어 패권을 확보했다.

이탈리아 원정 실패

시르미움 전투와 헝가리 침공

 

2차 십자군 (11471148)

1차 십자군 원정 이후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와 기독교 도시 등은 이슬람교도가 공존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서유럽에서는 위기감이 조성되어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명성 높은 설교가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참가를 선동했고,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중심으로 많은 참가자들이 출정하였다.

 

그러나 소아시아 등지에서 이슬람 군에게 패배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누르 앗 딘에게 패하고 다마스쿠스 공격에 실패하여,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군은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으나, 대립하던 다마스쿠스와 누르 앗 딘을 협력하게 만들어, 후에 누르 앗 딘이 다마스쿠스를 얻어 시리아를 통일하게 되어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게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리스본을 탈취하여 레콘키스타에 공헌했다. 서양에서는 이 실패로 에우제니오 3세와 베르나르도가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호소하지만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었다.

   

 

레콘키스타( Reconquista, 718년부터 1492년까지 )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 북부의 로마 가톨릭 왕국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축출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회복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재정복", '국토 회복 운동'으로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정복에 의해 상실하였던 기독교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1249년에 아폰수 3세가 알가르브를 점령하였을 때 완료되었다.

 

아폰수 3세는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쓴 최초의 포르투갈 군주였다.

 

1492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스페인 연합왕국이 마지막 남은 이슬람 점령지인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는 마무리된다.

    

 

 

12세기의 부흥

알렉시오스, 요한네스, 마누엘의 공세적인 요새화 정책 덕분에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소아시아에서 국경의 안정을 강화하고, 유럽 국경에서도 안정을 확보했다. 1081년경부터 1180년경 사이에 콤네노스 황조의 군대는 제국의 안보를 확립하여 비잔티움 문명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덕분에 경제 부흥을 이루어 12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무역도 번성하여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이 에게 해의 항구와 이어져 십자군 왕국과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서 서방으로 물자를 실어날랐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교역했다.

예술 분야에서도 모자이크화가 부흥하고, 지역 건축 학파들이 여러 독특한 양식을 창조하여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을 퍼뜨렸다. 12세기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고전 시대 저자들에 대한 관심이 소생하면서 초기 인본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비잔티움의 가장 특징적인 인본주의를 보여준다.

    

 

 

F. 쇠퇴와 분열

    

앙겔로스 황조 (1185-1204)

1180년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의 무능

1182년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재위기간: 1183-1185) 정변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와 공포 정치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재위 1195년부터 1203년까지 )

2차 불가리아 제국

"그리스에 뿌리를 둔 앙겔로스 황조는 이미 약해지고 분열되던 제국의 황폐화를 가속화했다"

   

3차 십자군 (1189~1192)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이자 '이슬람의 옹호자'라고 알려진 살라흐 앗 딘(살라딘)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 예루살렘을 유럽의 크리스트교 여러 나라가 탈환하기 위해 시작한 군사원정을 말한다.

 

1187년 예루살렘이 항복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붕괴되고, 예루살렘의 함락소식이 유럽에 전해졌을 때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교황 우르바노 3세는 그 충격으로 죽었고 뒤를 이은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성지탈환을 목표로 새로운 십자군 파견을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호소했다.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존엄왕 필리프 2세는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종결하고, 쌍방은 국내에서 [사라덴세()]을 부과하여 십자군 편성을 위한 자금을 모았다. 그러나 양국간의 전쟁은 곧 재개되고, 게다가 잉글랜드 국내에서는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가 국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람라 조약에는 비무장한 크리스트교도의 순례자가 예루살렘을 방문할 수 있는것을 허락한다는 조건도 더해졌다.

 

아크레 공방전

예루살렘은 탈환되지 않았으나, 하틴 전투 이후 살라흐 앗 딘의 파죽지세가 멈추었고, 해안지역의 도시들을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아콘을 탈환하고 키프로스를 점령한 것으로 인해, 레반트 교역을 유지하여 이후 약 100년 넘게 라틴 기독교 세력은 해안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키프로스 왕국이 창설된다. 비잔티움 제국의 십자군에 대한 비협력과 십자군측의 키프로스 점령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측의 균열이 한층 더 심해졌다. 로마 교황은 각 국왕이 주체가 된 십자군에 실망하여 다시 제1차 십자군처럼 제후십자군을 원하게 되었다. 십자군 종료 후에도 아콘에 남아있던 독일인들은 후에 튜튼 기사단의 기초가 되는 야전병원을 창설하였다. 살라흐 앗 딘은 이 전투에서 병을 얻게 되어, 1193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하고, 아이유브 왕조는 동생 알아딜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4차 십자군(1202~1204)

황 인노첸시오 3세의 촉구로 원래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기획되고 예루살렘이 아닌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략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종교적·신앙적 동기보다는 세속적, 경제적 목적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여 이슬람이 아닌 같은 기독교국가인 동방 정교회의 비잔티움 제국을 목표로 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한 이 십자군은 1204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처참하고 무자비하게 이 도시를 유린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약탈과 파괴는 단일 사건으로 역사상 최대의 문명적 재앙을 낳았다.

 

12세기초 유럽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노르만족의 시칠리아를 접수했고 잉글랜드 왕국은 사자심왕 리처드가 죽은 이후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은 내전에 휩싸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을 다시 주장했고 1201년 샹파뉴의 원수인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베네치아를 방문, 베네치아 공화국과 합의하에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이 십자군에 참가한 기독교 세력은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발루아, 신성로마제국 및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십자군은 1202년 기독교 왕국인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였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한 십자군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십자군 전체를 파문해 버렸다. 한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제4차 십자군의 대표인 보니파치오를 만나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제위를 다시 되찾기 위한 제안을 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베네치아로서는 동방무역의 독점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점령이 중요했고 십자군은 모두 전쟁과 약탈로 한몫을 챙기기 위해 당시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를 약탈할 기회가 되었다. 이미 파문까지 당한 십자군에게 기독교적 대의명분이나 성지를 회복한다는 성전의 개념은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

첫 번째 공격

알렉시우스 3세 도주와 알렉시우스 4세와 이사키우스 2세 제위

 

두 번째 약탈

1204년 베네치아의 게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폭동이으로 알렉시우스, 이사키우스 황제 살해, 알렉시우스 5세 무르주플루스가 제위와 도주, 십자군 약탈은 사흘간 계속되었고 약탈이 끝나자 십자군은 약탈품을 나누었다.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을 선출되어, 라틴 제국이 건국하였다.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

니케타스 코니아테스

 

4차 십자군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은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베네치아는 직접적인 영토와 재물을 얻은 것은 물론 무역 경쟁자인 제노바와 피사를 완전히 따돌리고 친 베네치아 황제를 세움으로써 동 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독점할 수 있었다.

 

 

급조된 라틴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뒤를 이어 약 60년간 존속하지만 다시는 비잔티움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비잔티움은 계속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정치적으로 서유럽은 오스만등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어막을 잃게 되는 것이고 문화적으로도 그리스-로마의 고대 유산이 보존되어 잇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산들이 파괴되어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에 의한 동방 정교회의 파괴와 약탈로 기독교계의 대분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각지에 망명 정권을 수립했다. 니카이아 제국-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 에페이로스 공국, 트라페주스 제국-가장 오래 존속한 망명 정권.(1461년 멸망)

    

 

G. 멸망

 

망명 정권

니카이아 제국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

라스카리스 왕조 (니카이아 제국, 1204-1261),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

4차 십자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한 국가들 중에 가장 큰 계승국이었다. 1204년부터 1261년까지 존속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 1259-1453)

비잔티움의 부활

1261년 제노바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에페이로스 공국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라틴 제국의 성립에 반기를 든 두카스 가문의 영도 아래 정비된 세력이 세운 나라이다. 12302대 군주 테오도로스 콤네노스 두카스가 불가리아와의 클로코드니차 전투에서 포로가 된 이후 둘로 나뉘었고 1338년 비잔티움 제국의 유능한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에페이로스 공국을 멸망시키고 비잔틴 제국에 병합하기에 이른다. 이후 1479년 멸망했다.

콤네누스-두카스 가 (1204 - 1318)

오르시니 가문 (1318 - 1338)

네마니치 가 (1359 - 1385)

부온델몬티 가 (1385 - 1411)

토코 가 (1411 1479)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1024~1261)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워진 십자군의 제국을 말한다. 1204년에 제4차 십자군 원정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주를 받고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제국을 세웠다.

 

십자군은 1204516일 플랑드르 백작인 보두앵 1세를 초대 황제로 세웠고 이후 57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배했다.

 

라틴 제국의 황제가 직접적으로 통치한 지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연안으로 국한 되지만, 그리스 연안과 에게해지역에 여러 봉국을 두었다.

 

아테네 공국등의 라틴 제국의 봉국들 또한 넓은 의미에서 라틴 제국의 일부로 여겨진다. 라틴 제국의 앙리는 이코니움의 셀주크 술탄 카이코루스와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의 후계 국가들중 니케아 제국을 견제했다.

    

트라페주스 제국-가장 오래 존속한 망명 정권.(1461년 멸망)

비잔티움 제국의 세 후계국 가운데 하나로서 1204년에 창건되었다. 트라페주스를 수도로 삼았다. 비잔티움 제국 콤네노스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의 손자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12044월 트라페주스를 점령해 건국했으며, 콤네노스 황조의 주류를 계승하는 것으로서 대() 콤네노스 가()라 칭하였다.

1461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할 때까지 약 250년간 존속해 역사상 마지막 비잔티움계 국가가 되었다. 별로 강대한 국가는 아니었으며 그 범위도 흑해 남부 연안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동서 교역로의 도상에 위치하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이 나라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었고, 주변의 조지아나 아르메니아 등 기독교 문화권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라스카리스 황조가 세운 니카이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았으며, 에페이로스를 무찔렀다.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 부흥

안드로니코스 2_ 카탈루냐 용병대

안드로니코스 3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354년에 갈리폴리 지진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 _ 오스만 용병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발칸 정복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

술탄 메메드 2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정교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통합을 조건으로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도한 바대로 성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1054년 동방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교회의 대분열이후 로마 가톨릭은 끊임없이 동방과의 재통합을 추구, 요한네스 8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와 통합 협상을 시도하였고 1439년 통합선언문 작성을 위한 위원회가 피렌체에서 열렸다. 그러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의 통합반대 여론이 빗발치고 연일 시위가 벌어지면서 국론은 분열되었다.

1204,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라틴인들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에서부터 촉발된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들간의 오래된 민족감정이 결국 중요한 역할을 하여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은 레콩키스타, 독일 내전, 헝가리와 폴란드는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한 상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453529일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존재해왔던 비잔티움 제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의 동지중해 및 발칸 반도로의 진출과 지배권 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고전학 연구 학자들이 대거 서유럽으로 망명하고 결국 서유럽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천년 넘게 그리스-로마의 문화를 간직해온 비잔티움의 멸망으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 도시를 떠나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그들이 가져온 지식과 문서들,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이 이슬람에 의해 연구된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이 서유럽으로 대거 유입되게 된 것은 분명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이 시점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145342,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공성전과 총공격

술탄 메메드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통하여 공성전, 이것이 바로 공성용 우르반 "대포"가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메메드의 함선의 금각만 통과와 제노바의 공급선 저지

제국의 요하네스 그란트라의 역 터널 공격

 

 

524일 개기월식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

529일 술탄의 총공격

바시-바주크에 의한 1차 공세

정규군에 의한 2차 공세

예니체리 군단의 3차 공세

용병대장 지우스티니아니 부상

메메드 2세는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건물에는 미리 호위병을 보내어 파괴를 막았다. 그는 이 도시를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하기아 소피아는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미스트라스의 모레아 요새 붕괴

1461년에는 트라페주스 제국이 패망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다. 1448년부터 치세가 시작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때 전사하였다.

 

"당신에게 도시를 넘겨줄 권리는 나에게도, 이 곳에 사는 그 누구에게도 없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상호간의 이해에 따라, 우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자유 의지에 따라 죽을 것이오."

 

"성은 함락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당시 천사들이 내려와 콘스탄티누스 11세를 구하여 대리석상으로 만들었으며, 투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다.'라는 전설

 

 

 

 

 

 

H. 멸망 이후

 

 

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주스 제국을 정복하여 그리스인 세력을 모두 멸망시켰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라이올로고스는 이미 소멸된 비잔티움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아 1465년부터 1503년 죽을 때까지 지녔다.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부 지역에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여겼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써 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는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하였으며, 이들의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었다.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지지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관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살아남았다.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오리엔탈 정교회 _ 시리아와 인도의 "시리아 정교회",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아르메니아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 에티오피아의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등을 들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주의 _ 아시리아 동방 교회

아리우스주의

조지프 라야는 "비잔티움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정교 세계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소아시아와 발칸 영토의 대주교는 그 예하에 있었으며, 비잔티움을 잃은 지금에도 카프카스와 러시아, 리투아니아도 이에 종속되어 있다. 정교회는 비잔티움 제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요소였다. 또한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와 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

 

 

 

 

 

비잔틴 제국 미술 연대기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키클라데스 문명 (3300-2000 BC)

에게 미술

미노스 문명 (3650-1170 BC)

미케네 문명 (1600-1100 BC)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그리스 암흑기 (1100-750 BC · 1200-800 BC)

 

 

 

고대 그리스 미술 1

고대 그리스 미술 2

 

 

그리스 고졸기 (800·750·650-480 BC)

그리스 고전기 (510-323 BC)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323-146 BC)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146 BC-330 AD)

고대 로마

(753~476 BC)

로마 왕정기 (753~509 BC)

로마 황제 연대표

고대 로마 미술 1

고대 로마 미술 - 2

로마 공화정기 (508~27 BC)

로마 제정기 (27 BC~476 AC)

비잔틴 제국

(476BC-1453)

 

로마 제국의 분할 (AC 293)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십자군 연대표

동방 정교회

라틴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 (306-363)

테오도시우스 황조(379~457)

레오 왕조(457~518)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518-602)

서방 영토 재정복 (527)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610-711)

이사우리아인 왕조 (717-802)

아모리아 왕조 (820-867)

마케도니아 황조 (867-1056)

두카스 왕조 (1059-1081)

콤네노스 황조 (1081-1185)

알렉시오스 1

1차 십자군(1096- 1099)

요한네스 2세 마누엘

2차 십자군(1147- 1148)

앙겔로스 황조 (1185-1204)

3차 십자군 (1189~1192)

4차 십자군(1202~1204)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1204)

라틴제국 (1204~1261)

망명 정권 (1204~1261)

니카이아 제국 (1204-1261) _ 라스카리스 왕조

에페이로스 공국(1204~1479)

트라페주스 제국(1204~1461)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1259-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1261)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145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453)

오스만 제국 (1299~1922)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 2부 끝.

 

    

 

고대미술 - 8부 아메리카 미술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