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1

草霧 2013. 2. 13. 18:44

 

 

 

 

 

 

 

 

 

 

 

 

 

 

 

 

 

 

 

 

 

 

2013년 계사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대 미술 8

 

 

신화와 기독교의 교차로

 

 

7부 비잔틴 미술 [ Byzantine Art ] - 1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 (476-1453)비잔티움’(Byzantium)

 

서로마 제국이 붕괴할 무렵인 5세기에,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던 동로마 제국은 파괴된 제국을 복구하였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빼앗고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하였으며, 반달족으로부터는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으로부터는 히스파니아를 되찾았다. 61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로마에서 예전의 로마적인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결국 610년대 이후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에 들어갔으며, 이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를 함락시키자, 동로마 제국은 그 명맥이 끊어졌다.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었지만, 이는 불완전한 회복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위상은 이후로 되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할 때인 1453년까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 불렀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Caesar of Rome / Kayser-i Rum)라 일컬었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 ·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비잔티움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 그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통해 유지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비잔티움의 학문은 고대 철학과 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 "비잔티움 르네상스"로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된 기여를 하였다.

 

비잔티움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종교적 표현과 관련이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보자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적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잔티움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비잔티움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확산되었다.

비잔티움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기독교, 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비잔티움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 수필, 세속 시문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비잔티움 제국의 세속 문학이 가장 발달한시기는 9~12세기경이며, 종교 문학은 훨씬 이전인 로마노스 시대에 발달하였다.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또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에 큰 자극을 주었다고도 한다.

'비잔티움적',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퇴,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종교정치철학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입장을 정의하는 표현이다.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

 

 

신화와 기독교의 교차로

 

 

 

 

보이지 않는 세계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살리며 영을 살찌게 만들고 소생시키는 영원한 부활의 세계를 추구하는 미술의 세계가 곧 기독교 미술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바라는 비밀 지하집회장소에 모여 기도하며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상징인 물고기와 비둘기, 돛과 닻이 있는 배 등을 카타콤바의 천정과 벽면에 프레스코화로 그려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며 박해로부터의 자유를 꿈꿔왔으며,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313년 기독교의 공인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못 이겨 330년에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로마의 권위와 문화를 인계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이스탐불)에 도읍한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게 망할 때까지(1000) 게르만, 로마세계 및 이슬람세계와 정립하였다. 이 시기의 미술을 비잔틴 미술이라 일컬으며 성화상이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일어난 성상파괴운동을 기점으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초기는 성상파괴운동이 시작되는 8세기까지이며 이 시기에는 동양의 사실주의와 헬레니즘적 양식이 그 흐름을 장식하고 있으며 회화 부분에서의 특징은 거친 터치, 크고 무의미한 눈빛, 구성의 견고성, 상징적 요소들의 빈번한 사용 등이다.

 

성상파괴운동의 해제와 함께 중기 비잔틴미술은 예배를 거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새로운 도상학을 맞이하게 되며 내용은 예수의 지상세계에서의 삶을 강조한 것들이다. 11세기의 비잔틴 미술은 후기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휴머니즘적인 사상이 싹트게 되는데 미술의 묘사에 있어서도 훨씬 부드러워지며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휴머니즘은 12세기의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며 회화와 모자이크에 대한 새로운 공감을 야기 시켰다. 즉 후기 비잔틴 미술은 15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과 연결되며 본격적인 서양미술의 기초가 된 것이다.

 

동로마제국은 그리스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에 비잔틴제국 또는 그리스제국이라고도 불리워졌는데, 그 중심에는 그리스 문화권인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기에 동방적 요소들과 융합된 비잔틴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 된다. 동방적 성격은 비잔틴미술에 종교적, 신비적 성향을 불어 넣었으며 초월적 세계의 계시나 정신적 차원의 존재를 확립했다.

 

비잔틴미술의 제1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기(527-565)에는 그의 후원 하에 새로운 그리스도교 미술과 건축이 성숙기를 맞게 되며 종교적 또는 세속적 건축물, 모자이크와 금속공예, 상아조각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미술품들이 유행하였다. 조각가들은 고전주의 시대에서 다루어지던 방법을 사용하면서 당대의 시대성을 잘 반영시킨 뛰어난 상아작품들을 제작하였는데, 이러한 상아조각들은 당대의 시대성을 잘 반영시킨 탁월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상아 조각품 중에는 고전적인 주제와 우아함이 가미된 양식의 이교도적 신화의 주제들을 다룬 작품도 많았으며, 인도미술을 암시하는 관능적인 표현을 사용한 작품들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성행하였다.종교적인 주제를 지닌 상아의 경우는 그 장식이 나일강의 우화나 스핑크스와 같은 이집트적인 요소들이며 성인 메나스와 관련된 주제의 작은 상자이 있는데, 상아미술의 기원은 알렉산드리아로 보고 있다. 상아부조 작품 중 무라노(Murano)에서 제작된 제단화1)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다섯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동방 기독교미술의 전통을 답습한 것이며 아폴로를 모델로 한 모습 등에서 동방미술에서의 전래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모자이크화에서도 보여지는데, 라벤나 산 아폴리네르 누오보 교회, 측랑의 프리즈(frieze)의 모자이크화에서는 한쪽으로 열을 지어가는 성녀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의 주제가 고전기의 위인전을 답습하고 있는 상태이나, 인물은 배경과 분리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그림이 이스탄불 박물관 소장의 인도의 화신을 묘사한 은접시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6세기를 전후로 많이 생산되어지던 상아조각, 돌조각, 벽토세공 등은 7세기에 회교도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작되어진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재료들을 사용한 조각이나 상아 따위보다도 더욱 보편적인 분야는 역시 회화였다. 이 시기의 회화는 알렉산드리아와 연관되는 세련된 양식과 건물내부에 그려진 조잡한 콥트양식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회화는 대부분 소멸되었으나 셉튜어진트(Septuagint)라고 일컬어지는 구약의 삽화가 사본필경인들을 고무시켰기에 근거를 찾을 수는 있었다. 최근에 시나이산 의 성 캐더린(St Catherine)수도원에서 발견된 패널화나 성화상들은 초기에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렇듯 초기의 비잔틴미술은 동양적인 주제들과 이교도적 요소가 가미된 동방적 신비감을 풍기는 요소들이 대부분의 미술품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건축가들은 교회의 건축에 있어 장방형, 정방형, 십자가형 평면도상에 돔(Dome)을 얹는 집중식 건축을 시도하였으며 종종 바실리카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성 소피아 대성당이며 이후 비잔틴 세계도처에 이 양식은 보편화 되었다. 중세의 세계는 전능하신 하느님에 의해 통제된 일종의 직사각형 상자로 비유되었으며 그러한 사상은 당연히 교회건축에도 연결되었고 교회내부의 장식도 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하느님이 세계를 지배함을 묘사하기 위해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중앙 돔의 위치에 그려 넣었고 그 주변에는 4명의 대천사와 그보다 많은 천사들, 그 아래에는 사도들을 묘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베들레헴을 연상시키며, 세례장면은 요르단강을, 성모영보는 나자렛을, 나자로의 부활은 베다니아를 연상 시키는 성당안의 회화는 교회가 정한 규칙을 충실히 지켜야 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러한 원칙들을 지킬 수 있는 모자이크, 이콘, 미니어쳐 등의 제작이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그 후 새롭고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7세기에 속하는 대규모 작품들 중 가장 돋보이는 모자이크양식으로 살로니카에 있는 성 데메트리우스(St Demetrius)를 꼽는다. 이 교회는 5세기에 건립되었으나 629-634년 사이의 화재사건 이후 다시 재건되었는데, 실제로 그 교회의 모든 모자이크는 교회가 복구된 이후부터 성상파괴운동의 초기인 730년 사이에 제작된 것들이다. 여기에 나타난 인물들은 각각 화재 이후 건물을 재건한 요한 주교와 그 교회를 처음 설립했던 레온티우스(Leontius)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모자이크들은 제국의 명령을 따라 종교미술에서 성인이나 신의 묘사가 금지된 726년부터 843년까지의 비잔틴미술의 주된 성향을 이룬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이러한 금지령은 모든 공식적인 예술에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형상이 없는 장식으로 대체되었다. 성상파괴운동이 끝나자마자 바질1(Basil ,867-886)를 위해 제작된 유명한 설교집 중 두장에서도 이러한 장식이 나타나며, 성상파괴자들의 금지령이 폐지됨과 동시에 거의가 형상적인 장식으로 대체된다.

 

비잔틴미술의 제2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 왕조시기(867-1055)는 여러 면에서 비잔틴문명의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에는 전적으로 비잔틴양식을 추구하는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으며, 예술에 있어서 고전주의의 유산은 동방의 것과 밀착되어왔고 특히 성상파괴운동 기간 중에는 동방의 영향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게 되며 위대한 모자이크 양식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모자이크 화법은 그 신비성이 동방적 조형방법에서 터득된 것으로 장식적 기능 뿐만 아니라 敎義圖解로서 교화적 목적을 가장 유효하고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음에 많이 사용되었다.

 

회화분야에서는 훌륭하게 장식된 필사본과 탁월한 상아조각품들이 황제의 대궁정을 배경으로 제작되었으며 그들은 길드를 조직하여 독점적인 운영을 하였다. 또한 족자, 교회용 직물, 집이나 의복 등에 중요했던 실크를 훌륭하게 짜냈으며, 때로 실크직물은 서방세계의 성인이나 군주, 또는 주교의 성물함에 보관되기도 하였고 장식을 위한 모델로도 사용되었다. 대궁정의 제작소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기법은 바로 금속세공과 칠보기술이었는데 대성당의 보고에 있는 성찬배, 성반, 복음서 덮개, 성골함 등은 11세기의 가장 훌륭했던 콘스탄티노폴리탄의 작품들 등에서 발견되고 있다.

 

후기의 비잔틴미술은 정치적으로는 제국의 국경지역이 크게 제한되고 도 감소되었지만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은 여전히 교회의 원리에 의거하여 제작된다.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약11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다프니 교회의 전능자 그리스도의 거대한 흉상이다. 여기에서 보면 모자이크용 각석의 엄격한 평행선 모양과 중요한 부분의 엄숙한 장식 등이 이 시대의 모자이크의 규칙을 잘 설명하고 있다. 11세기 예술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선적인 외양은 두드러진 형식주의적 경향과 대조를 이루어 또 다른 양식으로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 부드러움과 친근감의 묘사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양식으로의 탄생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최초로 암시하는 작품은 성요한 크리소스톰(St John Chrysostom)의 설교집 필사본의 세밀화로 이 작품은 1078년에 니케포러스 보티니아테스(Nicephorus Botiniates)황제를 위하여 제작되었다.

 

한쪽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성요한과 대천사 미카엘 사이에 서있는 황제에서 보면, 일종의 초상화로 종전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권위적인 접근법이라기보다는 대체적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으며, 대천사는 부드럽고 인정미 넘치는 인상을 풍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상아작품에서도 더욱 섬세하고 다양한 표정이 연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현재 베를린에 있는 40명의 순교자와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 소장의 성요한과 사도 필립, 스테판, 앤드루, 도마작품 등에서 12세기 미술의 신선한 특징들이 발견된다. 이 새로운 양식을 반영한 블라디미르의 성모상은 발견된 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비잔틴 미술의 회화분야를 정리해 보면, 성화상 파괴 논쟁 이전에는 대체로 초기 그리스도적인 주제들이 비잔틴 회화의 대부분을 장식했고, 논쟁이 종식된 이후에는 전적으로 도그마의 설명적 묘사가 행해졌으며, 도상학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한 모자이크용 각석은 엄격한 평행선 모양으로 되고 인물의 묘사는 엄격하게 정면을 취한 포즈로 구성되어졌다. 그러나 12세기 초에는 그와 대조적으로 친근감이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휴머니즘의 탄생을 예고하는 소재로 탈바꿈하여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로마네스크, 고딕 및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000여년의 긴 역사를 차지하고 있는 비잔틴 미술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미술이었으며 궁정미술 이었다. 중세에 있어서 미술의 주체는 오로지 기독교 신학사상이며 기독교적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종교적이며, 우아한 Byzantine Art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중심으로 56세기부터 제국이 멸망한 15세기 중엽까지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에 펼쳐진 중세 미술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을 계승한 비잔틴 문화권은 유럽에서 아시아·북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미술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차분한 우아함, 감정의 절제, 얼어붙은 듯한 권위에 찬 경건함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성경말씀이 하나의 생생한 현실로 적용됨에 따라 단순히 진리를 전하는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 바를 보여주길 원했고 일종의 예술적인 생략법으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니아누스대제 때 최초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고대 말기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이미 동서 지중해 세계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볼 수 있는데, 동방 그리스도교 미술이 그 독특한 양식을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6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그 뒤에 성상파괴운동(聖像破壞運動)이 끝난 때인 843년까지를 제1, 마케도니아왕조와 콤네누스왕조기인 912세기를 제2, 팔레올로구스왕조기인 1315세기를 후기에 해당하는 제3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비잔틴제국의 미술은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의 자연주의 양식과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고대 동방 미술의 엄격한 정신성에 뿌리를 내린 추상적 양식과의 융합에서 탄생하였다.

 

교회 건축, 모자이크나 프레스코기법에 의한 벽화, 납화 기법의 종교화이콘(icon), 채색사본삽화, 상아나 금은의 세공, 칠보 등의 공예품 분야에 화려한 중세 미술을 구축한 이 그리스도교 미술의 본질은 신학이론을 기초로 한 절대적인 신에 대한 찬미에 있다.

 

1

 

 

유스티니아누스대제 때부터 성상파괴운동 종결까지인 이 시대의 대표적 기념 건축물로서는 먼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하기아 소피아대성당을 들 수 있다. 바실리카형 교회에 돔을 올리는 그리스도교 건축의 꿈을 실현한 것인데, 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의 대부분이 9세기 이후의 것이다.

 

6세기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 벽화는 북이탈리아 라벤나의 여러 교회에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 그리스 테살로니카의 여러 교회, 시나이산의 하기아 카타리나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이집트의 사카라와 바위티의 수도원들의 프레스코 벽화 등이 제국 영토 내의 각지에 현존한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안티카교회의 프레스코 벽화도 이 시기 비잔틴 양식 회화의 귀중한 작품이다. 비잔틴 회화에서 제2의 중요한 장르인 이콘도 시나이산의 작품처럼 6세기의 것이있다. 이콘은 비잔틴 미술의 성자 숭배에 얽힌 독특한 형식의 종교화로서 그 뒤 화려하게 전개되었다.

 

2

 

 

성상의 표현을 우상 숭배로서 금지하여 100여 년 동안 비잔틴제국을 뒤흔든 성상파괴운동이 종결된 뒤, 앞 시대의 미술을 재흡수하면서 진정한 비잔틴 양식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미술이 확립되었다. 마케도니아왕조(8681057)에서 콤네누스왕조(10571185)에 걸친 시대이다.

 

건축에서는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에 돔을 올린 교회당이 910세기에 성립되었다. 비잔틴 교회 미술은 실로 신의 영광찬미에 바쳐진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전형적인 교회 및 벽화는 그리스의 다프니수도원 교회, 호시오스 루카스수도원 교회, 키오스섬의 네아모니수도원 교회 등에 보인다.

 

또 이 시대는 슬라브 제국(諸國)의 그리스도교화()에 따라 비잔틴 미술양식이 제국 주변으로 퍼진 시기로 마케도니아·세르비아·불가리아·러시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시칠리아섬에는 지금도 훌륭한 벽화가 있는 교회당들이 남아 있다. 이콘도 성상파괴운동 이후 특히 융성했다. 이 시기의 벽화·이콘·사본삽화에서도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인 자연주의적 양식과 추상적인 동방 양식 또는 민족적 지방 양식의 융합이라는 비잔틴 회화의 일관된 과제를 볼 수 있다.

 

3

 

 

1204년 이후 57년 동안 계속된 제4차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거가 끝나자 비잔틴미술은 팔레올로구스왕조기(12611453)에 최후의 꽃을 피웠다. 정밀한 기법에 의한 부드럽고 우아한 정신이 감도는 이 시기의 벽화는 실로 중세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일대 종말을 알리는 아름다움을 가진다.

 

이미 터키인의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린 제국은 쇠약해지고, 문화의 중심도 점차 지방으로 분산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미술이 마지막까지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하기아 소피아대성당과 코라수도원 교회의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 벽화가 보여주고 있다.

 

1·2기의 장중하고 위대한 양식은 모습을 감추고, 조심스러우며 세련된 섬세한 감정 표현이 나타난다. 또 그리스의 미스트라, 소아시아의 트라브존(트레비존드),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여러 지역에서도 어느 정도 지방 양식화된 이 시기의 여러 벽화가 남아 있다. 비잔틴 미술은 제국 멸망과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다. 아토스산을 비롯하여 각지의 수도원이 그리스정교와 함께 그 미술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비잔틴의 꽃, 모자이크

 

 

 

 

 

 

 

모자이크란 돌.유리.조가비 등 각종 재료의 조그만 조각으로 무늬나 회화를 구성하여 건축물 또는 공예품 표면에 접착제로 붙인 것을 말한다. 그리이스 , 로마 시대에는 대리석 모자이크로 마루 바닥이나 벽면 장식에 사용되다가 이것을 회화로서의 위치로 끌어올린 것이 비잔틴 미술이다.

 

모자이크는 입체감이나 미세한 뉘앙스까지 표현하기는 힘들지만,비잔틴적인 추상세계를 표현하는 데는 적합한 것이었는데 비잔틴에서는 유약, 유리를 주로 하고 조가비와 금박 . 은박을 적당히 섞어 사용하여, 광선의 반사작용으로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공간의 확대감을 주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값비싼 예술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프레스코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깨알같은 우아함, 장식미술

 

이 시기에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되었다.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으며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고대로마제국의 황제숭배가 기독교를 만나다. Icon 이콘

 

 

이콘(icon)은 성모 마리아나 아기 그리스도 또는 성인들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그림을 성화(聖畵), 조각을 성상(聖像)이라 한다.

 

 

 

 

 

교회역사 속의 성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화는 기원후 1세기에 처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8세기 동방교회의 기독교인들은 성화 문제에 대하여 우상숭배냐, 아니냐라는 신학논쟁이 벌였다. 이 문제는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게 아니므로, 성화 공경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현재 성화를 제작하는 기독교 종파로는 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이 있다.

 

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소아시아의 도시인 니케아(현재의 터키의 이즈니크)에서 열린 통산 일곱 번째 공의회를 말한다. 이 공의회에서는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이루어진 성화상에 대한 성상 박해를 끝내고 성상 공경의 전통이 다시 복원됨을 결의하였다. 교회의 대분열 이전 통산 7번째 공의회이므로 제7차 공의회라고도 부른다.

787년에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의 황후이자 비잔티움의 여제 이레네가 주도하여 이루어진 이 공의회에서 교회는 "성화에 바치는 공경은 성화에 그려진 성인들에 대한 것이지, 성화를 숭배하는게 아니므로, 성화 공경은 절대 우상숭배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비잔틴 미술의 핵, 성당 건축물

 

 

 

 

 

 

 

비잔틴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었다. 건축 양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형식과 동방의 전통적인 팔각당(원당) 형식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것들은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에서 집중형 돔형식으로 변화되고 돔 안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졌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등이 있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휴대 가능한 나무판에 그려진 그림), 즉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특히 황제의 선물로 사용되기 위해 디자인된 이콘들은 값비싼 금속과 애나멜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졌다.

 

 

       

          

          비잔틴 미술의 초고 걸작, 성 소피아 대성당 (Sancta Sophia)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이라 불리며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이스탄불에 있는 정교회 대성당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현대식으로 보자면 이슬람교와 관련이 크다.

       

 

 

A. 비잔티움 제국 시대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교회는 360,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교회 대성당이 이때부터 하기아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다. 최초의 정교회 대성당은 목조 지붕을 가진 바실리카였던 것 같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40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크리스소톰)를 추방과 난동으로 소실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415년에 축성

5321월 니카의 반란으로 소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 후 재건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B. 오스만 제국 시대

1453529,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메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C. 터키 공화국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중세미술의 황금기, 비잔틴 미술 (4세기~15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후일 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긴 후 330년경부터 1453년 멸망 전까지 지속되었던 지중해 동부 지방의 예술이다. 비잔티움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이 특징인 그리스 취향의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켜 복잡한 형식으로 발전하였기에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의미의 [비잔틴]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로마가 동, 서로 나뉘면서 동쪽에서는 비잔티움을 중심으로 미술이 발달하는데 그것이 바로 비잔티 미술입니다. 비잔티 미술은 당시에는 영적인 세계를 중시했고, 중후하고 훌륭한 양신과 선명한 색체, 화려한 장식을 볼 수있으며, 그리스 취향의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고대 로마가 둘로 분열된 후 점차 쇠퇴되고 있던 서(西)로마 중심의 라틴 미술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급속한 발달을 보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는 기독교 용인령을 공포하여(그 후 얼마 안 있어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는 공인되었다) 비잔틴의 미술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宮廷)의 지지를 배후에 업은 기독교 미술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비잔틴제국은 기독교의 원천이 된 유대교의 신앙 지역이나 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등의 그리스 문명의 유산을 보존하는 헬레니즘 문명의 중심지, 또는 동(東)로마제국을 자주 위협하는 강적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인접해 있는 이질문명이 비잔틴제국의 전사(前史)를 이룬 로마적 지중해 문명과 융합되어 동방적 요소와 라틴적 요소를 가미하면서 헬레니즘의 전통 위에 새로운 국면(局面)을 더한 형태로 전개되는 것이 비잔틴의 예술이다.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최초의 전성기를 맞아 갖가지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나, 8∼9세기에 걸쳐서 성상숭배(聖像崇拜)에 관한 논쟁과 사라센인의 침입이 겹쳐 문화적으로는 혼미한 상태에 있었다. 그 후 10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한때 재흥기(再興期)가 있었다. 그 문화권에는 동지중해, 발칸반도, 러시아가 포함되었다. 제국 자체는 13세기에 계속되는 터키인의 침입과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 의해 약체화되고 붕괴되었으나, 그 미술의 영향은 중세를 통해 서유럽에 대해서도 강력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도록 동유럽(특히 정교권) 문화의 기본적인 것을 형성하고 있다.

 

1. 비잔틴 모자이크

초기 기독교 미술의 모자이크는 로마 모자이크를 따라 채색된 대리석 조각을 사용하였지만 비잔틴 모자이크는 이와는 다른 특징을 갖는다.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사용하고 표면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빛을 받으면 많이 반짝이며, 인조 유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색이 매우 다양하고, 양식화된 디자인을 사용하기 위해 모자이크 조각이 큼직한 편이며, 배경에는 하늘색과 금색을 사용하고 추상적인 것이 특징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수행자들

 

테오도라 황후와 시종들

 

테오도라의 흉상

 

위 모자이크는 비잔틴 모자이크 예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산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쌍의 모자이크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써 교회의 우두머리 사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금관을 쓰고 금빛 그릇에 하느님께 바치는 빵을 들고 있는 모습이며 산비탈레 성당의 주교인 막시미아누스는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황제와 황후의 머리 위 둥근 후광은 교회의 성자임을 상징하고 어깨의 견장은 세속의 권위를 상징한다.

 

비잔틴미술 시기에는 반짝이는 유리조각을 많이 이용하였으며 표면이 울퉁불통해 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특징을 가지고있습니다. 또한 인조유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색이 다양할 뿐더러 그당시에는 교회의 돔과 제단 뒤, 천장 장식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화려한 미술을 많이 볼수 있습니다.

 

테오도라 황후의 일화

비잔티움의 유명한 곡마단에서 가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황제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여인인데,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귀족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이었으나 황제가 사랑에 눈이 멀어 법률을 폐지하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2. 성상화 (이코노그래피)

비잔틴 회화는 성상화를 제외할 수 없는데 그림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어서 어떤 것은 눈물을 흘렸다고도 하고 어떤 것은 향기를 풍기기도 한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기도 하여 독실한 신자들은 성상화를 전쟁터에 가져가거나 키스를 너무 많이 해 성상의 외형이 닳아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성상에 대한 숭배가 너무 강하게 퍼지자 726-843년에는 우상숭배라고 금지를 시키기도 하였다.

 

 

 

 

3.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장대한 교회를 건설하고자 마음먹고 이를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와 미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라는 두 수학자에게 일임하였다. 그들은 황제의 야심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건축물을 구상하였고 비잔틴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건축물이 탄생하였다.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는 터기 이스탄불에 있으며 현재는 무종교의 박물관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양식 건축물입니다. 그 위대한 예술적 가치는 모자이크, 대리석 기둥, 돔을 통해 확인 할수 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명령으로 세워진 유명한 돔은 비잔틴건축의 전형으로 여겨지며 '건축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찬사를 듣고있습니다.

 

 

 

성 소피아 사원은 소(小)아시아 출신인 두 사람의 그리스 건축가의 손으로 완성을 본 것이다. 대(大) 돔으로 덮여져 있는 정방형의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대(大) 돔을 받치고 소(小) 돔을 세 방향으로 배설(配設)하여 그 중압(重壓)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 크고 작은 돔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면서 바실리카 형식을 구성하고 있다. 이 공법은 가공할 때 돔의 중량을 역학적으로 분산·배분하는 훌륭한 역학계산(力學計算)을 근거로 성립되어 과학과 미(美)의 결합을 훌륭하게 처리하고 있다. 이 형식의 특색은 오늘날의 건축에서 말하는 셸 구조와도 공통되며, 내관과 외관이 전적으로 일치하고, 모든 공간을 유효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점에 있다. 단지 선(線)의 강조에 치우치기 쉬운 서방(西方)의 바실리카식에 대해서 돔-바실리카식을 완성케 한 비잔틴 건축은 항상 기둥의 직선과 돔, 아치의 곡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4. 산 비탈레 성당 (Basilica di San Vitale)

 로마 가톨릭교회의 중앙집중식 성당으로 이탈리아라벤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면서 서유럽비잔티움 미술과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 건축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여덟 개의 라벤나 건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잃었던 로마 제국의 땅을 회복하는 정책을 썼는데 라벤나는 되찾아야할 땅 첫번째 순위였습니다. 그는 라벤나를 제국의 영토로 만든 후 그곳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를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그게 바로 산 비탈레 성당입니다. 이 성당에서 가장 주목되는 미는 바로 벽면 모자이크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은 콘스탄티노플에 많은 사원을 건립하며 웅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또 베들레헴의 성탄사원(聖誕寺院) 건립 등의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비잔틴 건축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건립된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과 그즈음 재건(콘스탄티누스 황제 창건, 3세기 소실)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다. 전자는 성(聖) 세르기우스 사원, 갈라플라시디아의 묘당(廟堂)과 더불어 팔각당 형식을 취하는 집중식이다. 다수인이 모여 제례의식을 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원(圓)에 외접(外接)하는 8각(角) 또는 방형(方形)의 플랜 위에도 돔(円蓋)을 씌운 형식으로 된 것이다. 이 형식은 그때까지의 지중해 양식에서는 전혀 볼 수 없던 형식인데, 방형 플랜에 몇 개의 아치를 써서 돔을 얹는 식의 공법은 3세기 이래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궁정에서 채용되고 있다.

모자이크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 패널화

 

5. 성 마르코 성당

13세기에 지어진 성 마르코 성당은 자그레브를 대표하는 건물중 하나로서 지붕의 왼쪽에는 크로아티아 문장, 오른쪽에는 자그레브 시 문장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있습니다. 화려한 벽화와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로 유명합니다.

   

 

 

6. 비잔틴 건축 (Byzantine architecture)

비잔틴 건축은 바닥은 대리석의 모자이크, 벽면에도 색대리석판(色大理石板)이 붙여진다. 색대리석의 이용은 로마 시대 이래의 전통이었으나 대리석 자체의 반문(斑紋)을 이용한 구성적인 도양(圖樣)을 만들게 된 것은 처음 있은 일이었다. 벽의 위쪽, 아치·돔·천장 등은 금색을 바탕으로 하는 다채로운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또 힘차고 우아한 공예품으로 빈틈없이 메워져 있다. 집중식에 알맞는 돔 공법(工法)과 장방형의 바실리카식과의 융합은 주로 돔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에 반원통형을 붙이는 그리스-크로스형(正十字形) 플랜으로 시공되고 사방을 소돔으로 둘러싸는 방법도 쓰였다. 후자의 좋은 예로서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사원이 있다. 비잔틴의 건축은 석재축조(石材築造)보다는 연와축조(煉瓦築造)로 된 것이 많고 11세기 이후는 사라센의 영향도 있어 유약(釉藥)을 칠한 색(色) 타일이나 색연와(色煉瓦)도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7. 비잔틴 회화

비잔틴 시대의 회화는 모자이크가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자이크는 작은 각추대형(角錐臺型)으로 자른 색대리석을 석회벽 위에 줄 맞춰 끼워 넣어 회화나 도안을 그려내는 일종의 공예기술이다. 이미 폼페이 등에서도 우수한 예를 볼 수 있으나 고전기(古典期) 작품의 예(例)가 주로 방치장의 장식인 데 대하여, 비잔틴의 그것은 궁정과 관계가 있는 사원에 장엄함을 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비잔틴의 것은 색대리석뿐만 아니라 뒷면을 도금한 유리, 색유리, 도자기 등의 소재도,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광택이 나며 색의 대비효과·표현효과 등 매우 화려하고 숭고함을 갖춘 것이었다. 비잔틴식(式)의 장려(壯麗)한 모자이크 기법의 성립은 6세기 초라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당시의 주요한 대사원은 대부분이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사원은 오래되고 총합적 완성미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으나, 15세기 터키인에게 점렴당하여 회교사원(回敎寺院)으로 개축될 때 두꺼운 석회질 벽으로 고쳐지는 바람에, 오늘에 와서는 일부밖에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오늘날 비잔틴 모자이크의 모습을 간직한 가장 좋은 예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있는 아리우스파 세례당(洗禮堂)의 <그리스도의 세례>, <열두사도>, 성 비탈레 사원의 <유스티니아누스와 그 종신(從臣)들>, <테오도라 왕비와 그 종신들>, <아브라함의 이야기>, 성(聖) 아폴리나레 인 누오브 사원의 <그리스도 일대기(一代記)>, 성 아폴리나레인 클라세 사원의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등은 모두 6∼7세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소재의 제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색의 선과 색면(色面)과의 대비, 금색의 바탕, 조형(造形) 등이 훌륭한 장식미를 낳고 있다.

 

여기에서 도상(圖像)면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성서의 도양(圖樣)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헤브라이인은 설화성(說話性)이나 서술적 창조성에 뛰어났지만 그들은 그것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천분(天分)을 결여하고 있다. 한편 라틴인의 자연주의적 사실, 소(小)아시아인의 세련된 공예기술 특히 금·은 세공에 보이는 감각, 또는 소아시아를 넘어서 멀리 중앙아시아로부터 전래된 것이라고도 생각되는 선적(線的)·추상적 묘사가 비잔틴이란 지점에서 합류, 일체화되어, 기독교 미술은 이 시대에 비로소 풍부한 설화로서의 성전(聖典)·성자(聖者)의 도상화(圖像化)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모자이크는 제작비가 많이 들므로 지방에서는 프레스코에 의한 벽화가 보급되었다. 표현 방식은 모자이크와 마찬가지이며, 다분히 동방적으로 도식화(圖式化)된 것으로서 그 유례(類例)는 오늘의 유고슬라비아의 마케도니아 지방과 아드리아 해안에 잘 보존된 상태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8. 비잔틴 장식사본

이즈음부터 각지의 수도원에서 수많은 사본류(寫本類)가 제작되게 되었다. 각국어로 만들어진 사본류의 장식은 다른 분야와 같이 동방적인 것과 라틴적인 것이 합류되어 성립한 것이었으나 후대의 유럽에 있어서 사본류의 원형이 되었다.

 

비잔틴 미술, 산 비탈레 교회와 하기아 소피아 성당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짐)으로 옮긴 때(330년경)부터 이 도시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1453)까지 지속되었던 지중해 동부지방의 예술이다. 로마가 게르만에 의해 멸망되어 잿더미에 파묻혀 있는 동안 비잔티움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을 띤 동방 그리스 취향의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문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이콘(성상화), 모자이크, 돔 건축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

 

1. 이콘(Icons)

그리스도, 성모, 성인을 판에 그린 성화(聖畵)를 말한다. 성상화는 통상적으로 나무판에 그려서 만들었으나 상아나 에나멜 등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보통 엄숙하게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큰 눈을 하고, 후광을 두르고 있다. 사람들은 이 성상에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어진다. 독실한 신자들은 성상을 전쟁터에 부적으로 가져가기도 했고, 키스를 많이 하여 성상의 얼굴이 닳아 버린 것을 간직하고 다니기도 했다. 병이 나거나 다쳤을 때는 영험 있는 이콘을 환부에 대고 치유를 빌었다. 그려진 성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도 제작 연대가 6세기나 7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상에 대한 숭배가 너무도 강하게 퍼지자 우상숭배라고 금지시킨 시절(황제 레오 3, 아이코노클래즘, 우상파괴운동, 726~843)도 있었다.

 

결국, 형태 있는 것을 예배하고 싶어 하는 많은 신자와 하급 성직자의 욕구가 승리를 거두어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평면적이고 극도로 사실적이 아닌 벽화까지는 허용하는 형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보존된 가장 많은 성상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지금의 이집트에 속하는 시나이 사막의 성 카테리나 수도원으로 27개의 성상을 보존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제작 연대가 6세기나 7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유명한 것은 아기 그리스도를 무릎에 안은 신의 어머니를 묘사한 성상이다.

 

보통 그리스 정교 교회의 회중석 정면에는 목조와 석조의 칸막이가 있고, 제단은 그 배후에 있어 회중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 칸막이를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 聖畵璧)라고 하며, 거기에는 크고 작은 이콘이 여러 장 걸려 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것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이코노스타시스이다. 경건한 신자들은 예배시간 이외에도 혼자서 교회에 찾아와 이코노스타시스 앞에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하고 이코노스타시스에 걸려 있는 여러 이콘에 죄다 기도를 드리고 입을 맞추고 가기도 한다. 지금도 그리스와 정교의 신앙이 성한 곳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나 반드시 이콘이 안치되어 있다.

 

중세 전반기 미술의 황금기는 라벤나에서 이루어졌다. 5~6세기 라벤나는 서양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다. 이곳은 동·서 제국 물류의 중간 집산지였다. 이곳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 가장 성당이 많았던 곳이다. 400~750년경 그 도시에 60개 이상의 성당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라벤나에 현존하는 주요성당들은 갈라 플라키디아 여제와 관련이 있다. 고트족에게 인질로 잡힌 데부터 시작된 그녀의 생애는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비잔틴 미술에 기여한 것은 5세기 전반 라벤나의 성당 건축을 후원한 데 있었다. 갈라 플라키디아가 창건한 건축물들의 스케일은 거대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내부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들이다. 그녀는 죽어서 묻힌 마우솔레움의 모자이크까지 불멸의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2. 모자이크

그리스도교를 보다 널리 전파하기 위해 종교를 주제로 제작되었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표현되었다. 당시의 모자이크는 반짝이는 황금의 배경과 후광에 둘러싸인 성자들을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점이 두드러진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주교의 입장>(547년경, 산 비탈레, 라벤나)<테오도라 황후와 그녀의 시종들>의 두 작품은 비잔틴 모자이크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 교황주의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앞의 작품은 비잔틴 교회의 우두머리 사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금관을 쓰고 금빛 그릇에 하느님께 바치는 빵을 들고 있다.황제의 머리 위 둥근 후광은 그가 교회의 성자임을 상징하고 어깨의 큰 견장은 세속의 권위를 말한다. 마주 보이는 벽에는 황후 테오도라와 시녀들이 황제를 따라 교회에 입장하기 위해 커튼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황후는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담은 커다란 황금빛 그릇을 들고 있으며 역시 머리에는 성자의 표시인 후광이 그려져 있다. 두 모자이크에서 황제와 황후는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와 유사하게 보여지도록 표현되어 있다. (12명의 시종들은 12사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두 모자이크 사이에는 지구의(地球儀) 위의 그리스도를 표현한 모자이크가 자리 잡고 있다.

 

3. 돔 건축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긴 통치기간 중 초기인 532~7년의 기간 동안 하기아 소피아(성스러운 지혜)성당을 착공하였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도시임을 자랑했던 콘스탄티노플에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장대한 교회를 건설하고자 마음먹고 이 임무를 안테미우스와 이시도루스라는 두 수학자에게 맡겼다. 그들은 황제의 야심에 부응하는 혁신적인 건축물을 구상하였다. 그 결과로 로마 건물의 거대한 스케일과 동방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융합시킨 건물이 등장했다. 이 건물은 로마의 직사각형 바실리카 위에 거대한 돔을 올려놓은 형태다.

 

처음부터 이 건물은 거대한 돔의 왕관이 씌워진 곡선과 원들이 현실화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 본래 성 소피아는 거대하고 약간 평평한 돔이, 돔 그 자체보다는 더 큰 중앙 공간을 덮고 있으며, 양쪽 측면은 2개의 반 돔으로 에워싸여 있다. 그리고 대부분 원통형의 둥근 천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 다른 돔으로 덮인 접합부에 의해 떠받쳐진 거대한 집중적 구조가, 곡선이라는 테마를 살리기 위해 세워져 있고 외부는 아케이드로 둘러쳐져 있다. 이처럼 돔을 이용해 공간을 메우는 방식은, 반원형 아치 안으로 우뚝 솟은 내부 창문 사이의 벽으로 정의되는, 삼각 궁륭의 발명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 소피아는 로마 판테온의 경우처럼 하나의 거대한 돔 대신, 하나의 중심 돔과 여러 돔으로 구성된 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돔 복합체 구조가 비잔틴 시대 교회건축의 기준 양식으로 모든 주요 건물에 사용되었다.

   

 

초기 기독교 미술 (B.C 1세기 ~A.D 4세기)

 

 

기독교 미술은 로마제국의 심한 박해를 피해가면서 '카타콤'이라는 지하묘지에서 은밀히 시작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가 정식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은것은 313년이었습니다. 미술에는 로마인의 눈을 속이기위해 성경의 말씀을 간접적인 모습으로 들어내고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예수를 의미하며 양은 신자를 의미하도록 표현하였습니다. 이 당시 시대로 볼때 미술은 암흑시대라고도 말할수있습니다. 과학적인 부분은 쇠퇴하고 종교 중심으로 미술은 발달하였습니다. 또한 로마시대의 인체에 대한 비례, 공간적 깊이, 원근법등을 무시하고 단순화 경향을 보였습니다.

 

카타콤

이곳이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기독교 정신을 나타내었던 지하묘지 '카타콤'입니다. 벽과 무덤판 어디에서도 익숙한 그리스도교 상징들을 볼 수있습니다.

    

 

 

바실리카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교회건축 형식을 이루었고 나중에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성당건축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실리카라는 글씨는 그리스어로 왕궁을 의미하며, 바실리카식 성당은 4세기 이후 로마의 바실리카 형식과 구조를 기초로 하여, 카타콤 안의 예배소나 로마인의 저택 일부등을 도입하여 성립되었습니다. 리스시대에 세워진 최초의 공화당으로, 로마시대에는 주로 도시마다 세워졌다고 합니다. 건물의 양식은 서유럽 교회건축을 기본으로 한다. 로마에는 4대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성당이있습니다. 라테라노, 성바오로 성당, 성베드로 성당,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을 가르킨다.

    

 

모자이크

B.C3천년경 수메르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리스, 로마인들이 대리석조각을 이용하여 미술로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미술에 모자이크가 이용되었으며 나중에 비잔틴시대에 꽃을 피우게 됩니다.

 

 

카타콤의 물고기 그림과 바실리카

 

 

 

그리스도교 박해의 시기에 그리스도교도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이 광신적인 이교도이며 황제를 신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아주 야만적인 폭도라고 단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네로, 트라야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치하에서 수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신앙의 대가로 처형을 당했다. 마침내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를 억압으로부터 해방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박해시기의 미술과 그 이후 공인시기의 미술로 구분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1. 박해시기 미술

그리스도교도들은 개인주택과 카타콤(지하묘지)에 설치된 예배소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신앙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카타콤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지하에 비밀리에 만든 시신 안치소를 가리킨다. 로마시의 지하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토굴과 매장실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거의 600만에 가까운 시신들이 안치되었다. 카타콤의 복도는 암반을 뚫어 만들었으며 그 벽에 벽감을 파서 시신을 안치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들은 벽감을 깍아낸 곳에 아주 작은 예배소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거나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반원형으로 생긴 카타콤 예배소의 천장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이자 영원성의 상징인 십자가가 몇 개의 원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가운데 원에는 예수가 선한 목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십자가로 연결된 4개의 반원에는 요나 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려졌다. 반원 사이에는 인물들이 두 팔을 위로 벌려 들고 기도하는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이 자세를 가리켜 오란스orans’라고 부르며, 이 말은 기도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인 오라레orare’에서 유래했다. 구원에 대한 희망은 오란테스(Orantes, 라틴어로 기도하는 자’) 모티프로 표현하였다. 기도하는 자는 팔을 높이 들고 고대의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 인물로 표현되는데, 어떤 인물은 마리아와 동일시되기도 했다.

    

로마 당국이 체제전복적인 종파라고 여겼던 그리스도교를 억압하려는 조치들을 취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상징들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그리스도교도들은 은밀한 상징으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징들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물고기였다. 물고기는 성스런 의미가 깃들어 있는 피조물이었다. 그것은 고대부터 희랍어 ichthus로 불렸다. 이 단어는 신의 아들이자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Son of God our Savior)의 약어가 되는 말이다. 이 의미는 3세기 초에 널리 알려졌다. 이 상징이 이용되었던 것은, 인간을 낚는 어부들로서의 사도적 역할, 예수가 물고기로 5천 명을 먹인 일, 성찬식 만찬, 그리고 , 큰 고기의 배 속에서 요나가 머문 일과 같은, 그리스도의 매장과 부활과 연관된 예언으로 해석되는 구약의 에피소드들과의 연관성 때문이다.

 

다른 것들은, 고대 세계에서 재생의 상징으로 여겨진 금잔화(the marigold, 金盞花), 희생의 산 제물인 어린 양(the lamb), 평화의 상징이자, 성령(the Holy Spirit)을 상징하게 되었던 비둘기(the dove), 그 살이 썩을 것 같지 않게 여겨져 부활의 이상적인 상징이 된 공작(the peacock), 최후의 만찬에서 이용되었던, 구원의 잔을 의미하는 와인 잔(wine-chalice, the cantharus), (디오니소스 Dionysius의 그리스 로마적 상징에서 채택한) 포도나무 덩굴의 소용돌이 무늬, 그리고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등이다. 로마시 남쪽 성 요한 교회 아래, 구 비아 아피아의 출발점에 소재한 산칼리스토 카타콤에서 이 상징들을 다수 찾아 볼 수 있다. 박해기에 이 상징들은 로마인들의 의심과 처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 미술의 핵심적인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 ‘공인시기미술

그들은 그리스 신전에서 비롯된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직사각형이 너무도 아름답고 견고해서 로마인은 신전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공공건물에도 이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대관식을 행하기도 하고, 정부의 상위 집무실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지상의 존재를 회복한 초기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신성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설계한 교회를, 속세의 왕을 위해 지어진 건물들의 예를 참조하여 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바실리카 양식을 채택한 것은 그리스도교도들을 해방시켰던 콘스탄티누스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는 주교들에게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황제 주권을 되찾는 데 협력하도록 했다. 그가 교회 건물을 바실리카 유형으로 결정한 것은 교회를 관청의 의미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인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바실리카는 영적 경험을 체득하게 되는 종교 건축의 형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330년 짓기 시작한 <산 피에트로 성당>의 원형, <산 조반니 라테란>, 380년경의 <성 바오로 성당> 등 로마 소재의 초기 기독교 성당은 예외 없이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의 기본 구조는 로마 라테라노 언덕에 있는 <산 조반니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로마시 내부에만 31개의 바실리카 성당이 있으며, 성벽 너머에는 더 많았다. 이것들은 모두 크고 중요한 성당이지만, 원래 형태는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360년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가 로마 최초의 마리아 교회로 세워졌다. 교회 내부의 모자이크(440년경 추가)<출애급> 등 구약 성서의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네이브(nave)와 앱스(apse) 사이에 선 승리의 아치는 <수태고지>, <동방박사의 경배> 등 특정 장면들을 보여주는데, 그 일부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마리아로 의인화된 알레고리적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런 그림은 3세기 이래 마리아가 테오토코스’(Theotokos, 그리스어로 신을 낳은 여인’)로 널리 알려진 데 근거를 둔다.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교리로 승인되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곧 다양한 형상 프로그램을 장려하고 나아가 강요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형상 프로그램에서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신과 동일하다는 교리가 확정되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으며, 사도들은 주교들의 선구자로, 순교자들은 성인이나 후견인,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신약성서의 장면들 가운데 제자들을 부르심, 예수의 기적들과 승천 및 최후의 심판을 위한 재림과 같은 주제들은 예수의 수난 주제보다 상위에 있었다.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는 범우주적인 상징으로서 라벤나의 <갈라 플라치디아 마우솔레움>의 궁륭 천장을 장식하고 있다.

 

수없는 보수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성당은 베들레헴의 <탄생 성당 (Church of the Nativity)>이다. 이 성당은 역시 330년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착공되었다. 이 건물은 4, 5, 6세기에 시리아에 세워진 수많은 바실리카식 성당 중 하나이다. 이 지방의 성당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양식을 창출해냈다. 직사각형이지만 입구의 측면에는 두 탑이 서 있고, 내부에는 기둥 위에 세워진 석조 아치가 있으며, 동쪽 끄트머리는 반원 모양으로 구성된 양식이다. 여기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의 곡선과 선, , 돔의 조합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스인이 직사각형과 곡선을 생각해냈을 때, 로마인은 로마의 정부와 종교가 동방에 알려지기 전부터 이미 곡선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집트인과 고전 시대의 그리스인은 돔이 정통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싫어했다. 미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반전 중 하나는 고전주의 시대 그리스의 직사각형 신전이 그리스 정교의 돔과 원으로 대체되었을 때 일어났다. 로마인은 콘크리트를 통해 돔을 만들 수 있었다. 콘크리트를 사용함으로써 판테온과 같이 거대한 공간 위에 돔을 짓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시절 이후, 하기아 소피아같은 원형 혹은 돔형의 성당들이 비잔티움에, 그리고 수도에서 제국의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카를 잇는 주요 도로였던 비아 이그나티아 주변에 다수 지어졌다.

 

 

기독교 미술과 문화,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과 비잔틴 미술

 

 

1. 기독교 미술의 시원 : 카타콤의 벽화와 초기 기독교의 상징 미술

최초의 기독교 미술은 유대교 미술의 형식을 받아서 발전시켰다. 특히, 두라 유로포스(Dura Europos)(사진) 유대교 회당이 보여 주는 그림의 형식은 앞으로 전개될 기독교 미술의 향방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교회 건축으로서 'Domus Ecclesia(가정집 교회)'는 초기 기독교의 제의적 공간 의식을 반영한다. 가정집 교회는 신도들이 모이는 단순한 공간과 기독교 제의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세례를 위한 세례당이 접목된 형태였다. 이 형식은 이후에 복잡한 건축 구성을 지닌 교회로 발전하는 중에도 지켜져야 할 원칙이 되었다.

 

그리스어로 교회를 의미하는 'Ecclesia'는 원래 신자들의 '회합'을 의미했다. 이 작고 소박한 건축물(가정집 교회)은 기독교가 아직 종교의 자유를 얻지 못했던 4세기 이전에 신도들의 제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4세기 초반부터는 교회는 제국의 공식적인 숭배의 장소로서 비교할 수 없는 규모와 체계화된 형식으로 지어진다.

 

초기 기독교 미술은 주로 카타콤(catacomb)(사진)이라는 지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어로 'cata'는 아래 혹은 지하를, 'comba'는 무덤을 의미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도시 내에 매장을 했던 고대 로마인들은 점차 묘지의 부족과 환경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대안이 땅을 파고 지하 묘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기독교도들과 이교도인들이 혼재되어 매장되었으나, 점차 기독교 인구의 증가와 그들의 결속성은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지하 무덤을 형성해 나갔다. 특히, 초기부터 나타난 성인 숭배는 성자들의 묘소를 중심으로 카타콤이 만들어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카타콤은 지하의 복도를 두고 양 벽에 시신을 안치하는 형식의 무덤이다. 이 벽을 육면체로 파들어 간 간단한 묘를 로쿨루스(Loculus)라고 하며, 방의 형식을 가진 묘실을 쿠비쿨라(Cubicula)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개의 로쿨리(Loculi, 로쿨루스의 복수형)가 있다. 개별적인 무덤은 시신을 안치한 후 벽돌을 쌓아 입구를 막고 회벽을 쳤다. 혹은 대리석과 같은 고급 마감재로 입구를 봉인하기도 하였다.

 

대체로 카타콤에서 발견되는 초기 기독교의 미술은 조악하고 단순한 형태를 가진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혹은 비둘기나 물고기와 같은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3세기경에 이르면 구약의 내용을 가진 서사적인 그림들도 출현하였다. 예를들면, 요나와 다니엘과 같이 순교를 의미하는 인물이나 그 인물에 관련된 서사적인 내용이 그렇다. , 예수와 제자들이 만찬을 하는 장면이 마치 로마 귀족들의 만찬처럼 그려지기도 하였다. 가장 주목받는 것은 신자나 성인들의 초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 즉 오란테(Orante, 라틴어로 기도하는 자)(사진)로서 묘사되어 나타났다.

 

카타콤의 미술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당대의 고급 미술과는 달랐다. 우선 기독교인들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이러한 미술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실제적인 이유 외에도, 양식사적으로 후기 로마 시대의 미술의 낙후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카타콤 미술은 나름대로 강한 표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당시의 종교적 상황이 지닌 처절했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또 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했던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미감에 부응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이 점에 착안해 기독교 미술이 지닌 다른 성격을 부각시키고, 그것을 시대 정신으로 바라보았다.

 

 

2. 국교 공인 이후의 기독교 미술

콘스탄티누스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316년에는 국교로서 공인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종교의 수장으로서 신정 일치의 막대한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후 기독교 미술은 왕실과 귀족들의 종교로서 화려한 치장을 얻었고, 형상적이고 재현적인 표현에서도 자유를 얻는다.

 

황제와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이제 거대한 성전을 지으면서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최초의 공식적인 교회는 라테라노 성당(사진)(오늘날에는 산 조바니 인 라테라노(S. Giovanni in Laterano)라고 불린다)이다.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당시 교황이었던 밀티아데스(Miltiades, 311~314)에게 선사한 것이며, 구원의 주체인 그리스도에게 봉헌하였다. 이 성당의 건축적인 양식은 바실리카(Basilica)(사전)이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건물 형식인데, 주로 관공서나 시장, 그리고 왕의 전실로서 사용되었다.

 

아마도 기독교는 그리스의 신전 건축의 이교도적인 형태를 철저히 배제하였고, 또 신도들의 모임인 교회(Ecclesia)에 상응하는 공간 건축을 기존의 바실리카에서 찾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장 등 실용적인 바실리카보다는 왕의 전실이나 대관식장과 같은 보다 권위적이고 제의의 품격에 알맞은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모시는 주인, 즉 그리스도가 왕(Basileus)으로서, 더 나아가 왕 중의 왕(Pambasileus=Pantokrator)이라는 개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는 신도들에게 황제로 모셔졌다. 이와 함께 성당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돌출된 앱스(Apse)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모자이크나 벽화로 그려졌고, 의상이나 자세도 로마의 황제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교회를 주관하는 주교의 권한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한층 강조되었다.

 

라테라노 성당보다 더 큰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성당은 성 베드로 성당이다. 대략 320년경에 이 성당은 이전 네로의 경마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성 베드로 성당은 최초의 성묘 교회, 성인(베드로)의 묘소 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신약의 약속을 지키려는 황제의 의도가 숨어 있는 건축물이다. 마태복음 16장에서 그리스도는 어부 시몬을 베드로(암산)라 개칭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교회를 지으리라고 약속하였다. , 성 베드로 성당의 건립은 신약을 현실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은 라테라노 성당과 같은 바실리카 형식을 취했지만, 규모면에서는 후자를 능가하였다. , 바실리카 성당이 갖추어야 될 모범적인 형식을 완성하였다. 실내는 5개의 복도, 1개의 신랑과 양편에 각 2개의 측랑을 가지고 있으며, 이 복도들은 앱스가 있는 부분에서 익랑과 교차하게 된다. 이로써 마치 십자가나 사람의 형상이 건물 평면 위에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 되었고, 머리가 되는 앱스는 당연히 제단과 성소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 성 베드로 성당은 1150년의 긴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성당으로 개축되기 전까지 중세의 중심 교회로서 존재했었다.

 

3. 제국의 분립과 비잔틴 미술의 역사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50년경에 이제 피폐해진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보스포러스 해협에 위치한 옛 그리스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하였다. 원래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그래서 현재 사람들은 동로마 제국이라는 명칭보다는 비잔틴이라는 애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로마 제국을 양분하게 된다.

 

400년경 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방 민족들에 의한 침입과 내부 정치적인 갈등으로 소멸되어 갔던 서로마 제국에 비해 비잔틴은 이제 막 융성한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후예임을 잊지 않았으며, 스스로 로마이오이(Romaioi, 로마인)라 부르며,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다. ,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고전주의와 인본주의의 문화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기독교 문화와 미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정치적인 면에서, 그리스 정교를 정치, 종교적 체제로 삼은 황제는 정교일치의 황제 교황주의(Caesaropapism)의 권력을 계승하며, 제국의 부활을 이끌어 갔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제위기는 비잔틴의 역사상 전성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지어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사진)과 콘스탄티노플의 궁전 교회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사진)은 유스티니아누스가 남긴 거대한 종교 유산에 속한다. 이 성당은 천년의 동로마 제국에서 제국의 심장이었으며, 대주교의 성당이었으며, 동시에 궁정 교회였다. 교회와 황제의 권력이 결합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이었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이름을 가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서로마 제국의 바실리카와는 다른 형태를 보여 준다. 이 교회는 커다란 돔을 가지고 있으며, 평면 구조도 정방형에 가깝다. 그러므로 중앙 집중형 건축물의 이념 속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들을 모으는 장소로서 이러한 형태를 보유한 성당은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원래 4세기에 지어진 교회가 있었던 곳에 지어졌다. 이 교회는 대략 410년경 나카의 반란으로 소실되었다. 이곳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트랄레스의 안테미오스와 밀레토스에서 온 이시도로스라는 두 건축가로 하여금 일찍이 없었던 대성당의 공사를 의뢰하였다.

    

532년부터 착공되어 5371227일 이 성당은 봉헌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자체 중량을 견디지 못한 돔은 무너져 내렸고, 현재의 모습으로 562년에 재봉헌되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후 지금까지 이 성당은 모스크로서 이용되었다. 성당의 외부의 거대한 부벽과 4개의 미나렛은 이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교회의 길이는 80.9m이고, 너비는 69.7m이다. 돔의 지름은 33m이다. 이 돔은 펜던티브(Pendentive)(사진)라고 불리는 건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사각형의 평면을 가진 건축을 기준으로 각 모서리를 비스듬한 아치로 연결하고 그 아치들이 원형의 기반을 형성한 후에 돔을 얹는 거의 신기원에 가까운 건축술이다. 돔의 중량은 그래서 네 부분의 모서리에 조성된 반구형 아치로 전달되고, 이것은 다시금 네 벽에 의해 지지된다.

 

펜던티브 건축의 특성은 건축의 물질적인 중량감을 없애고 보다 경쾌한 공간성을 제공한다. 돔의 아래 면에 띠처럼 둘러진 40개의 창문은 마치 빛의 링을 만들고 둥근 원반으로 보이는 돔의 내부 천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의 띠에 의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효과는 물론 기독교 건축이 추구했던 상징적이며 보다 초월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에 기인한다. 돔과 그것을 받치는 반구형 돔, 그리고 아치형 벽과 그 밑에 있는 아케이드 층은 이 놀라운 건축물이 중력에 관계없이 구축된 듯한 인상을 준다. 다시 말해, 비물질적인 건축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4.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

황금기를 구가하던 동로마 제국의 미술은 8세기에 황제에 의한 성상 숭배 금지령을 맞이하면서 급속도로 침체되었다. 기독교 미술은 그 탄생부터 모순을 안고 있었다. 유대교의 교리를 이어받은 기독교는 물질로 시각화된 형상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초기 기독교의 대부들도 마찬가지로 로고스(하나님의 말씀) 중심주의적 신학에 근거하여 미술상의 표현을 자제하거나 금기시하기를 원했다.

 

이러한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민간에서 자신들의 신앙심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었고,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교부들에 의해 문맹의 신자들을 위한 배려 측면에서 권장되었다. 6세기의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신상을 만드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미술이 좋은 교육 수단임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문제의 발단은 미술이 숭배의 대상이 되고 그것으로부터 종교적 교리와 모순된 사회적 현상이 확산되고, 또 이것을 통해 발생되었던 이해관계 덕분이었다.

 

레오 3세는 730년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성상의 당위성에 대한 신학적 논쟁 끝에 제국 내에 종교 미술을 금지시켰다. 이것이 성상 파괴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치적, 군사적 해결책을 사용하였다. 비록 신학적인 판단으로 붉어진 성상 파괴 운동이었지만, 배후에는 다른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황제는 국내외의 혼란에 대해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했으며, 종교와 정치로 분할된 권력을 집중화하려고 했다. 종교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에 성상 금지와 파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 수도원들이 지니고 있었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하는 것이었다. 성상 파괴 운동은 레오 3세 이후 4대에 걸쳐 간헐적인 휴지기를 보이면서 계속되었다.

    

120년간의 성상 파괴 운동은 성상 숭배론자 및 성상 옹호론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 비잔틴의 종교 미술은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5. 후기 비잔틴 미술의 휴머니즘과 그리스 고전주의의 부활

성상 파괴 운동을 뒤로 한 후 비잔틴 제국은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적으로 침체기에 빠졌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그리고 그다지 큰 후속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문화의 중흥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성상 파괴 운동이 성상 숭배론자의 승리로 결말을 맺었다는 점과 그리스의 전통적인 문화가 기독교 문화에 흡수되면서 비교적 인본주의적인 미술로 그 경향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9세기의 마케도니아 왕조나 이후의 팔라이로구스 왕조 등에서 그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나타난 교회 건축의 특징은 그리스 십자가의 형상을 띤 평면 구조와 그 중심에 돔을 가진 십자형--교회(Cross-dome-church)였다. 때론 중앙의 돔에 4개의 작은 돔이 부가되기도 하였다. 이 형식의 교회는 또한 내부를 빈틈없이 장식하는 벽화들로 유명하다. 특히, 성상 옹호론자들이 근거로 삼았던 그리스도의 육화(Incarnation)와 그것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는 내용의 그림들로서 양식적으로도 평면적이고 서술적이었던 과거의 기독교 미술과는 달리 보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서정성과 표현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참고  

 

비잔틴 카테고리

http://search.daum.net/search?w=tot&DA=UMEF&t__nil_searchbox=suggest&sug=&q=%EB%B9%84%EC%9E%94%ED%8B%B4+%EB%AF%B8%EC%88%A0

 

 

비잔틴 미술

 http://ko.wikipedia.org/wiki/%EB%B9%84%EC%9E%94%ED%8B%B4_%EB%AF%B8%EC%88%A0

 

 

비잔틴 예술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art?uselang=ko

 

 

비잔틴 모자이크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mosaics?uselang=ko

 

 

비잔틴 회화

 http://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Byzantine_paintings?uselang=ko

 

 

기독교 미술

 http://ko.wikipedia.org/wiki/%EA%B8%B0%EB%8F%85%EA%B5%90_%EB%AF%B8%EC%88%A0

 

 

 

비잔틴 미술 1부 끝.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