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 [ Greece Art ] - 2

草霧 2013. 2. 6. 16:12

 

 

  

  

고대 미술 6

 

 

신과 인간의 이상적인 조화

 

 

6부 고대 그리스 미술 [ Greece Art ] - 2

 

 

 

 

본 연제는 고대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된 글입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 1부에 이어 읽으세요.

 

 

 

헬레니즘 양식 _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 질료미, 그 미의 실체

 

 

 

(1)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론(質料論)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순수 이상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 역시 순수 이상보다는 물질적이며 세속적 삶의 운명에 있기에, 물질성 역시 나름의 진실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론이라 한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로서의 정신적 숭고함 뿐 아니라 물질적인 인간 세계 즉 현상의 세계도 예술이 표상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른바 물질적 아름다움 혹은 인간미가 예술에 이입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2) 예술과 자연 : 헬레니즘의 철학적 해석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유명한 정의를 내렸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연의 의미이다. 자연은 첫째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뜻한다. 즉 가시계이다. 둘째는 그 자연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과 근거를 의미한다. 즉 가지계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모든 자연물은 생성소멸의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이 모든 생명의 본질이다. 춘하추동의 계절이라는 자연도 결국 천체의 운행이라는 본질의 현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모든 현상은 그 이면에 존재가치로서의 본질을 감추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의 대상으로 말한 자연은 그 가시적 현상과 이를 가능케 하는 본질로서의 정신적 실상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질료의 세계는 현실이며, 현실은 인간적인 아름다움 즉 세속미나 관능미 등과 연관된 것이다. 예술적 형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적 아름다움이 육감성의 강조로 나타나기도 하고, 감미로운 자태의 여인상이나 격정, 비애, 명상 등을 표현하는 인간적 내면적 감정을 나타내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 철학성을 조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헬레니즘 예술이다.

 

(3)복제술

시학의 원어는 poietike인데 이 말은 그 뜻이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처세술(art of life)과무엇을 만드는 제작술을 뜻하며 제작술에는 건축술, 조선술 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기술(Useful art)과 예술(fin art)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이 시학에서는 모방기술로서의 창작예술에만 국한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모방기술에는 색채와 형태를 매재로해서모방하는 오늘의 조형예술과 소리를 매재로 해서 모방하는 오늘의 음악, 시문학, 무용 등이 있는데, 여기서 논하는 것은 주로 후자인 소리를 매재로 하는 모방기술을 다루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비극시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학에 있어서 ''가 시(문학), 음악, 무용 등을 포함하는 뜻으로 사용된다면 이들 가운데는 공통성과 차이성이 있어야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원리에 의하면 모방의 매재, 대상, 양식에 의거한다. 이들에게 공통되는 요소는 모방의 매재인 소리이며, 이는 율동(rhythm), 언어, 해음(tune)의 셋으로 이루어지며, 이 셋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여러 분야로 분류된다. 율동, 언어, 해음이라는 세 요소는 전부 시간적 계기를 가지고 있어 시간예술을 형성하여 회화나 조각과 같은 공간미술과 구별된다. (창작예술)와 학문을 구별하는 것은 운율의 유무가 아니라 모방의 유무에 있다.

 

예술이 모방기술이라는 정의는 플라톤의 '국가'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에 의하면 감성계의 사물은 진실재(眞實在)'이데아'의 모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예술은 이 모상을 또 모방한 것이다. 여기에 플라톤이 예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가 있다. 예술가는 진실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모산 혹은 영상을 모방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가 모사하는 사물의 민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이처럼 플라톤이 사용한 모방이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도 차용(借用)하고 있으나 그의 스승의 견해와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예술이 모방하는 대상은 감성계의 사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격, 감정과 행동 등의 인간의 마음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모방이 예술의 특색이라고 할 때 모방성이 가장 강한 것은 조형예술이요, 가장 약한 것이 음악이라고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반대로 음악이 모방성이 가장 강하다고 한다. 이 말은 음악이야말로 가장 표현적인 것, 가장 잘 감성을 구상화하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예술가가 느끼거나 상상한 감정에 유사한 감정을 타인의 심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환기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진지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유명한 말도 시의 모방성이 단순한 사진과 같은 복사적인 모방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며, 시의 의도가 개별적 사물의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새로운 구성화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모방이라는 전통적 용어를 빌려 쓰기는 하였으나 플라톤의 의미보다 더 한층 심화된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미술의 성격을 한층 더 깊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의 기원에 대하여 4장에서 논하고 있다. 시의 기원은 원시적인 두 본능, 즉 모방하려는 본능과 타인에 의해 모방된 것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본능에 기인한다고 한다.우리는 모방된 사건이 비록 그 자체에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이에 대하여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비극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시의 종류를 구분하고 그 중에서도 비극을 가장 높이 평가한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요, 쾌적한 장식은 한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되며 서술적 형식이 아니라, 드라마 형식을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고 정의를 한다. 시의 목적 또는 그 효용으로서 그가 내세운 카타르시스(katharsis)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알아보기로 하자.

 

카타르시스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으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없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보아,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의미한다는 윤리적 견해와, '감정의 배설'을 의미한다는 의학적 견해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바로크(barock)시인들과 프랑스 고전주의 시인들과 더불어 레싱이 주장하는 견해이고 후자는 베르나이스가 주장하는 견해이다.

 

플라톤은 모든 존재자는 최고선인 이데아의 실현을 그 궁극 목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예술도 인간의 성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하는 도덕적인 견해를 개표하고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조화와 균형 등이 이루어진 도덕적인 음악 이외에 열광적인 음악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음악의 목적은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광란적인 정열이 있으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감정이 억압을 받는다. 그러나 광란적인 음악을 듣고 자기 속에서 그러한 감정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열광적인 감정이 배설된 것처럼 치유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어떤 양식으로든 배설되어야 하며, 그들의 정신은 경쾌해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배설적 멜로디(purgative melodies)는 인류에게 악기 없는 쾌락을 준다'고 말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도덕적이기보다는 같은 종류의 감정을 자극, 환기시킴으로써 배설하여 경쾌한 정신이 되게 하는 데 그 효용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고대의 자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론(詩人論)', '호메로스 문제', '美論', '음악론(音樂論)', '詩學의 문제' 등의 만은 예술론을 저술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전해지지 않고 다만 그의 '시학(詩學)'이 전해질 뿐인데 그것도 완전한 형태로서 전새진 것이 아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시학'2권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일반적인 서문과 비극론에 해당하는 적은 부분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을 통해 美學史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시학은 시예술의 내용과 언어를 특수하게 다루는 전문적인 저서이며 동시에 미학의 일반적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詩學'이외에도 미학 이론을 담고 있는 저서로는 '정치학' 8, '물리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의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성찰보다도 개별적인 서술을 보여준다. 즉 비극, 서사시, 음악 등을 주로 다루며 일반적인 예술이나 미의 문제에 관해서는 별로 집중하지 않는다.

 

예술개념

고대부터 미학이 다루는 주요한 두 개념은 미 개념과 예술 개념이다. 플라톤은 주로 미 개념을 중시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미개념을 제쳐두고 예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예술이 추상적인 미 개념보다도 그에게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예술 개념이 수세기 동안 타당성을 얻었고 고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는 여기서 독창적인 예술관을 제시했다기보다는 당시 희랍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을 개념화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자연물은 필연성으로부터 발생하나 예술 작품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의 활동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3가지로 구분한다. 연구활동, 작용활동, 장작활동이다. 예술은 창작활동에 속한다. 창작은 그 결과로 하나의 작품을 남겨 놓기 때문에 다른 두 활동과 구분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예술은 하나의 창작이지만 모든 창작이 예술인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하면 '하나의 능력에 기초한 의식적인 창작'이 예술이다. 예술이 속하는 법주가 창작이며 창작의 특징은 하나의 능력에 기초되어 일반적인 법칙을 사용해서 의식적으로 구성하는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하면 단순히 본능이나 일반적인 체험에 의존하는 창작은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규칙, 수단의 의식적인 응용, 일정한 목적의 지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미 예술뿐만 아니고 수공품도 예술이 된다.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구두를 만드는 기술이나 선박의 건축도 예술에 속한다. 예술은 예술가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작품이고 이러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그는 일정한 능력을 가져야하며 이러한 능력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라 물렀다.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규칙을 아는 것이 능력이므로 창작의 근거를 이루는 지식을 그는 또한 예술이라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는 예술에 해당하는 희랍어 techne가 라틴어에서는 ars로 되고 근세에 들어와서 Kunst로 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창작자의 능력을 지칭했고 중세나 근세에서는 만들어진 작품을 지칭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에 대한 특징을 들어보면 첫째, 그는 예술을 동적일 것으로 이해했다. 자연 연구에 뛰어났던 그는 자연을 사물로 보지 않고 발전으로 간주한 것이다. 둘째, 그는 예술의 지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일반적인 규칙이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예술을 심리적인 진전으로 이해했다. 자연이 물질의 산물이라면 과학과 거리가 멀지 않다. 그러나 과학은 존재를 다루는 반면 예술은 변화를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 개념은 오랬동안 유지되다가 근세에 와서 변화를 겪는다. 즉 근세에서는 예술의 개념이 협소하게 규정되고 한정되며 예술은 능력이라기보다도 하나의 산물로 이해된다. 또한 예술에 있어서 지식이나 규칙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적은 일반적인 미학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개별적인 예술 분야를 연구하고 실천적인 응용을 추구한 데 있다. 그는 예술을 항상 그 소재와의 관계에서 파악하려 했다.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예술이 구분된다. 동상에서처럼 소재의 외형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조각에서처럼 소재에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제거할 수도 있고 건축에서처럼 소재의 여러 부분을 결합하거나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예술의 근본 요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실, 숙련, 천부적 재능을 들었다. 지식은 이론적인 지식일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한 지식도 포함한다.

 

모방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으로부터 그의 근본적인 예술 이해, 예술을 구분하는 근거, 개별적인 예술 장르를 정의하는 기초를 얻는다. 그는 모방이라는 개념을 엄밀하게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대상을 사진찍는 것처럼 복사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현실을 모방하는 예술가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더 아름답거나 혹은 더 추하게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다른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모방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혹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대로 또는 그들의 생각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방향에서 표현해야 한다. 있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있어야 할 이상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예술가의 모방은 결코 복사가 아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가들이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즉 전형적인 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그의 모방 이론은 자연주의 예술관과 거리가 멀다. "시는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고 이에 관해 역사 기술은 개별적인 것, 개체적인 것을 서술하기 때문에 문학은 역사 기술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심오하다."

 

예술은 내적인 필연성에 일치하는 것을 표현해야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할 때 현실의 단순한 모방으로 그의 모방 이론이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예술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사건이나 인물이 아니고 그의 전체적인 연관성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연관성은 현실과 비교되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구성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mimesis)이라는 개념은 복사가 아닌 독특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희랍에서 모방이라는 말이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방을 체험의 표현으로 이해했으면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는 활동의 재현으로 이해했다. 플라톤에 와서 비로소 모방은 다른 것을 복사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개념을 플라토의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물론 잘못이다. 모방을 의미하는 독일어는 NAchahmunh이다. 전철 nsch라는 말은 '...처럼''...에 따라서'라는 2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은 결코 '...처럼 만든다'가 아니라 '...에 따라서 만든다'믐 말이다. 모방이라는 말을 그는 주로 비극론에서 사용하는데 배우가 실제 인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모방을 예술의 부정적인 성격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인 특성으로 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하는 예술로서 음악이나 조형 예술뿐만 아니라 서사시, 비극, 희극을 포함하는 문학을 들고 있다. 이렇게 하여 문학이 예술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문학은 예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능력의 소산이 반면 문학은 신들린 광기의 소산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을 타고난 재능의 소산으로 보았으며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고 이러한 학문이 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사용하는 수단, 표현하는 대상, 모방하는 방식에 따라서 예술을 구분했다. 문학과 음악의 수단은 리듬, 언어, 멜로디이다. 예술이 모방하는 대상의 차이가 또한 예술을 구분하는 커다란 요인디 된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하느냐 더 못한 사람을 모방하느냐에 따라서 비극과 희극이 구분된다. 또한 작자가 스스로 예기하느냐 주인공으로 하여금 얘기하게 하느냐의 모방 방식에 따라서 서사 예술이냐 극 예술이냐의 구분이 나타난다.

 

정화의 문제

모방의 개념과 더불어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Katharsis) 개념이 시학의 6항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여기서 나타나는 대사가 작품의 서로 다른 각부분에 따로따로 나타나도록 언어를 선택하며,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고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며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요소가 드러난다. 첫째, 비극은 모방하는 서술이다. 둘째 비극은 언어를 사용한다. 셋째, 비극의 수단은 치장된 언어이다. 넷째 비극의 대상은 신중한 사건이다. 다섯째 모방의 방식은 행동하는 인물들이 텍스트를 말하는 방식이다. 여섯째, 비극은 일정한 길이를 갖는다. 일곱째 비극은 연민과 공포를 일으키는 것을 통해서 작용한다. 여덟째, 비극은 이러한 감정들을 정화시킨다.

 

이 가운데서도 모방의 개념 및 정화의 개념은 미학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예술의 목적과 작용을 규정해 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데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후에 이 카타르시스 문제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논쟁의 대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하는 카타르시스가 감정의 정화인가 아니면 이러한 감정을 승화시키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이러한 감정의 억눌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문제인가이다. 감정을 개선하느냐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느냐이다. 2가지 견해는 서로 엇갈리며 오늘날은 뒤의 해석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즉 비극은 관객의 감정을 완전하게 하고 고상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고, 비극이 이러한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며 관객은 비극을 통하여 스스로를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의 집을 벗어버리고 내면적인 안정을 얻는다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다는 주장이다. 이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종교 의식으로부터 빌려왔느냐 혹은 의학으로부터 빌려왔느냐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다. 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정화''모방'과 결부시킨 점은 종교 의식이나 피타고라스의 예술 이해와 연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통적인 동기를 빌어 스스로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고 할 수 있다.

 

삼정의 배설을 통하여 감정으로부터 정화되는 사실을 그는 심리적, 생물학적 과정으로 파악했다. 피타고라스의 종교관에 따르면 정화는 음악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사상을 밑받침으로 한 것 같다. 그는 음을 윤리적, 실천적, 열광적인 종류로 구분하고 마지막의 것에 감정을 배설하고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정화 작용을 문학에만 국한시키고 조형 예술과 같은 모든 예술에 확대시킨 것은 아니다. 시학에서는 직접 다루어지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반적인 사상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음악, 무용, 문학 등에 정화 작용을 인정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감정의 정화 작용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도 하며 도덕적인 완성을 도와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술은 행복이라는 최고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여하튼 예술은 플라톤에서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유희가 아니고 보다 신중한 위치를 차지한다.

    

 

헬레니즘[Hellenism], 그 미의 실체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로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이다.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 ·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해 이 시대 그리스 문화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광대한 범위로 확대되었으며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 문화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미술에 있어서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에 전파되어 동방문화와 융합, 새로운 양식을 낳았는데 왕조의 보호를 받아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던 이전 양식에 비하여 장대하고 기교적이었으며 미술작품은 지배자의 권력과시나 단순한 감상을 위해 제작되었다.

 

건축

헬레니즘 건축은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는 풍경을 지배하는 장대함을 과시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건축이 페르가몬 건축군이다.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왕가가 번성하였던 기원전 250-150년 사이에 세원진 건축군으로, 건축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만한 자연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극장 꼭대기에서 남서쪽을 바라본 풍경>, 페르가몬, 도시 아래쪽 구역과 주변의 지형이 보인다.

 

독일은 이 페르가몬의 유적을 발굴해 가져와 베를린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데, 실내에 마련되어 있는 이 장엄한 제단은 높이 10미터로 고대를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건이 되어있다. 무엇보다도 이 제단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역시 헬레니즘 문화의 아름다운 건축미를 엿볼 수 있는 이오니아식 기둥과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부조물들이다.

 

 

페르가몬의 제우스 대제단이 있던 자리. 대제단은 위 그림처럼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Altar of Zeus>, 페르가몬 대제단, 기원전 175-150년경, 대리석, 국립박물관, 베를린

 

 

조각

헬레니즘 조각의 특징은 사실주의적인 방식으로 형태의 다양성과 심리 묘사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다양한 집단에 속해있는 젊고 늙은 여러 유형의 대상을 각양 각색의 자세와 동적으로 묘사함에 있어서 일부 사례에서는 희화화될 정도로까지 사실적으로 재현하게 된 데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으로 인해서 그리스 예술가들이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된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보다 앞선 4세기의 위대한 조각가들 프락시텔레스와 스코파스, 리시포스 등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작품의 소재에 있어서는 남성 입상이 여전히 신적인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식적인 기념 조각상 등에서 쓰이고 있었으며, 옷을 입은 여성상들도 계속해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들은 더 이상 조각에서 지배적인 유형이 아니었다. 다양한 변화와 새로운 시도들이 행해지면서 조각가들이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의 범위도 따라서 확장되었다.

 

사실주의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진짜 같은 초상 조각과, 늙은 어부나 술 취한 노파와 같이 개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에 초점을 맞춘 조각상들도 나왔는데, 힘들게 격투를 벌이는 운동 선수와 잠에 취한 사티로스 등이 그 예이다. 에로티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는데, 나체의 아프로디테를 감각적으로 묘사한 조각상들이나 서로 뒤엉켜 있는 사티로스와 님프의 모습, 심지어는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s: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연유한 단어로, 양성 구유자) 등도 소재가 되었으며, 난쟁이와 꼽추를 우습게 묘사한 희화적인 조각상 및 어린아이들의 조각상도 제작되었다.

 

추상적인 개념을 의힝화한 형상들과 알레고리적인 이미지도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연극에 대한 흥미로 인해서 무대가 되는 배경과 함께 연극적으로 조각상을 연출하게 된 것도 당시의 새로운 현상으로, 바위 위에서 잠든 에로스 상이라든지, 바다 위로 높이 치솟은 절벽 위에 수조를 만들고 그 안에 승리를 거둔 전함의 뱃머리에 서 있는 것처럼 니케상을 세워놓았던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인간 감정에 대한 관심은 조각가들로 하여금 고통과 번뇌, 괴로움, 잔인함, 불안함, 환희 등에 빠진 사람들의 격렬한 모습들을 재현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상)>, 로도스 출신 피토크리토스(Pythokritos)의 작품으로 추정,

 기원전 180년경, 대리석, 2.45미터, 루브르, 파리

 

승리를 의인화한 이 조각상은 대리석 원작으로 높이가 2.45미터. 원래는 앞이 환하게 트여 있는 절벽 꼭대기에 자리잡은 성소건물 안에 세워져 있었는데, 조각상의 맏침대는 배의 이물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발굴자들에 따르면 이들 전체가 저수조 내에 위치해 있어서 물위로 상이 비쳐지도록 되어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들쑥날쑥 나온 바위들로 꾸며진 또 하나의 저수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위험으로 가득 찬 바다를 통과할 수 있도록 배 또는 국가를 인도하는 니케의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베리니의 파우누스로 널리 알려진 잠든 사티로스 상>, 로마에서 발견된,

헬레니즘 시대의 원본으로 추정. 기원전 200년경, 대리석, 높이 2.15

 

 

<아프로디테와 파우누스, 에로스>, 델로스 섬에 있는 베리토스(베이루트)의 포세이도니아스트들의회관에서발견, 기원전 100년경, 대리석, 높이 1.32미터, 국립박물관, 아테네 일명슬리퍼로 때리는 여신(Slipper-Slapper). 포세이도니아스트들이란 일종의 상인 조합으로 델로스에서 이들의 회관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원전 166년에 로마인들은 이 건물을 아테네인들에게 주었다.

    

<멜로스의 아프로디테(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50-100년경. 대리석, 높이 2.04미터,

루브르, 파리. 1840년경 멜로스 섬에서 발견

    

<라오콘 군상>, 뱀들을 상대로 몸부림치는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초기복원 후의 상태), 플리니우스는 이 조각상이 로도스 출신의 하게산드로스와 아테네도로스, 폴리도로스의 작품이라고 주장. 기원전 2세기 혹은 서기1세기, 대리석, 1.84미터, 바티칸 박물관, 로마.

 

1506년 로마에서 발견. 트로이의 사제인 라오콘은 트로이인들에게 목마에 대해서 경고하려다가 이를 막으려는 포세이돈 신이 보낸 바닷뱀들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공격을 당한다. 한편 뒤틀리고 변형된 인물들의 자태나 라오콘의 몸에서 보여지는 과장된 근육 표현, 고통과 공포로 가득 찬 표정, 몸부림치는 순간의 극적인 묘사 등으로 인해서 학자들 중에는 이 조각상이 페르가몬의 대제단 프리즈와 제작 연도가 비슷할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1957년 스페를롱가의 한 동굴에서 헬레니즘 바로크 양식에 속하는 조각 작품들이 더 발견되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면들을 묘사한 장대한 구성의 군상들이었다.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 ·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 ·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1. 기하학 시기의 대표작

 

 다필론의 크라테르(항아리), 기하학 무늬, 기원전 8세기경, 높이 108cm, 카이로, 이집트 미술관

 

<난파선>, 이스키어 미술관의 기하학적 양식 항아리 소묘, 기원전 8세기 경

 


2. 고풍적 - 아르카익 - 양식의 시기 작품

 

<서있는 청년(코우로스)>, 기원전 600년경,      <페플로스를 입은 처녀(코레)>,

                  대리석, 높이 186.6cm,            기원전 530년경, 대리석, 높이 120.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3. 고전적 양식의 대표작

 

<디스코볼로스(원반 던지는 사람)>, 기원전           <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 기원전 330년경
452년경(미론의 청동 원작을 로마시대에                (프락시텔레스의 원작을 로마시대에 모작한

모각한 대리석상), 등신대, 로마,                           대리석상), 높이 203.2cm, 로마, 바티칸 미술관

                          테르메 미술관

 

    4. 헬레니즘의 대표작

 


 <사모트라케의 니케>, 기원전 200-190년경,      <로도스 섬의 아게산드로스와 아테노도로스와

대리석, 높이 243.8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폴리도로스, <라오콘 군상>, 기원전 200년,

                                                                    대리석, 높이 243.8cm, 로마 바티칸 미술관  

 


 

 

미술과 건축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미술의 계승이다. 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아한 기능과 감정의 힘은 대개는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건축의 발달은 수학과 공학의 진보와 궤를 같이 했다. 도시계획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상수도·하수도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성벽의 건조와 요새화가 두드러졌다. 건축은 전반적으로 거대한 규모로 축조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 예로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 및 여러 도시의 주랑(柱廊)이 있는 시장 등이 있다.

 

대부분의 조각가는 BC 4세기의 거장들이 걸어온 길을 답습했지만, 새로운 양식도 대폭 발달했다. 동적인 느낌을 살려 사실적인 관능성을 표현했고, 점차 복잡한 군상의 조각이 시도되었다. 조각은 수요가 많았고 고가에 매매되었다. 초상 조각은 이 시대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였다.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상의 리시포스를 들 수 있으며, 그밖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밀로스 섬 출토의 아프로디테 상(루브르 미술관키레네 아프로디테 상(로마 테르메 미술관), 로마에 있는 이른바 영웅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등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여성적 관능미와 근육이 왕성한 남성미를 강조했다. 부조는 한층 더 사실적인 경향을 보였는데,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깊이를 구별한 점, 조각과 회화를 조합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회화에서는 실제로 순수한 헬레니즘 시대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초기 회화의 모사(模寫)로는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로 된 알렉산드로스가 있는데, 강한 힘과 구도의 정교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외의 것으로는 폼페이의 장식 벽화와 프레스코가 있다. 원근법은 빛과 그림자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에 쓰였던 수법이지만, 이른바 색채구성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실례가 아시아 미술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간다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인도의 불상인데, 이 불상에는 확실히 그리스 기원을 나타내는 양식이 있다.

 

    본 연제는 고대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된 글입니다.

 

 

카논(canon) 규범, 법칙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폴뤼클레이토스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이것이 폴리클레이토스의 캐논이다.(7등신 법칙)

 

폴리클레이토스가 캐논을 만든지 1세기후에 리시포스라는 조각가가 새로운 인체의 표준형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8등신 캐논이다. 이 법칙에는 단순한 미취향의 변화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황금분할 법칙이라는 중요한 법칙이 내재해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인들은 모든 자연물들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황금비례라고 하는 가장 이상적인 미의 법칙을 찾아냈던 것이다. 이 리시포스 이후에 오늘날까지 미인의 선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 _ 팔등신의 조형성 - 왜 인간인가?

 

(1) 완전한 아름다움 : 고전 - 조화와 시각적 완결성

우리는 흔히 완전한 가치, 최상의 가치, 인류 역사상 가장 숭고하고 변함없는 가치를 지닌 대상을 고전(古典)이라 한다. 헬레니즘의 대표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몇 가지 특성상 미의 고전이다. 즉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완전한 아름다움 즉 조화와 시각의 완결성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형성을 보인 근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A. 팔등신(八等身)

팔등신은 인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비례를 나타내는 말로 황금비례(Golden section)라고도 한다. 이는 인간의 체형에서 신장(身長)과 머리 길이(머리끝에서 턱밑까지의 길이)의 비가 81이 되는 것을 말한다. 남자의 경우에는 칠등신을 원칙으로 삼는다.

 

<밀로의 비너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의 실체가 팔등신의 비례법이다. 인체 표현의 비례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기원전 5세기 고전기의 조각가 폴리크레이토스(Polycleitos)이다. 그는 인체의 가장 아름다운 비례를 산술적으로 계산하여 카논Canon이라는 이름의 책에 적었는데, 바로 7등신의 비례법이다. 대부분의 남성 입상을 표현하는 비례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이후 기원전 4세기 고전 후기의 조각가 리지푸스(Lysippos)8등신의 카논을 이야기한다. 8등신은 머리가 키의 1/8을 나타내는 비례법으로 폴리클레이토스의 7등신에 비하여 더욱 아름다운 형상을 보인다. 이런 7등신과 8등신의 카논을 수학적 공식으로 명증하게 요약한 사람이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건축이론가인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이다.

 

예를 들면 발꿈치에서 발가락 끝까지는 신장의 1/7이 되어야 한다, 얼굴 길이는 신장의 1/10이 되어야 한다, 손끝에서 팔꿈치까지는 신장의 1/4이 되어야 한다는 등 7등신과 8등신의 현상을 수학적인 비례로 요약한 것이다. 통상 고대 그리스 예술 이래 남성의 육체는 7등신의 비례를 통해서 표현하고, 여체를 표현할 때는 8등신의 비례를 이용하였다. 바로 이 <밀로의 비너스>에 도입된 비례법이 8등신의 비례법으로, 여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당시의 조형적 의도를 확인할 수 있다.

 

팔두신(八頭身)이라고도 한다. 신체의 밸런스를 측정할 때의 기준인 두신지수(頭身指數)의 하나로서 가장 이상적인 타입이라 한다. 미인(美人)의 표준이다. 머리를 기준으로 남성을 팔등신으로 나눌 경우, 길이를 반으로 나눈 4의 지점이 되는 곳이 샅이고, 그곳을 기준으로 다시 반으로 나누어 들어가면 각각 유두와 무릎이 된다. 샅과 무릎의 절반보다 약간 짧은 듯이 팔의 길이를 맞춰주면 된다. 옆모습에서 장딴지는 엉덩이나 어깨선보다 돌출되어 있고, 정강이는 인체의 중심선보다 들어가 있다. 남성의 몸 폭은 2정도이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머리의 크기로 8등신으로 나누었을 때 절반 되는 곳을 몸의 중심으로 삼는데, 머리에서 중심까지의 절반보다 1/3 정도 아래가 유두선이고 턱에서 1/3 정도 아래가 어깨선이다. 유두와 중심선을 기준으로 나눈 선보다 1/4 정도 아래가 배꼽선이다. 여성 몸의 폭은 2등신이고 허리는 1등신, 히프는 등신이다.

 

남자의 가슴 넓이는 여자의 약 1.5, 히프는 여자의 2/3 정도의 크기이다. 남자는 가슴판이 두껍고 히프가 빈약하지만 여자는 가슴판이 얇고 히프가 크다. 남자의 히프가 부드러운 곡선이라면 여자의 히프는 역동적인 곡선이다. 남자는 똑바로 서면 히프가 등보다 뒤로 튀어나오지 않으나, 여자는 똑바로 서도 히프가 뒤쪽으로 튀어나온다.

    

 

B.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와 해부학

이 작품에 나타난 늘씬한 비너스의 몸매가 상당히 율동적이다. 다시 말해 비너스의 코끝으로부터 양쪽 다리의 중간으로 흐르는 선을 기준으로 해서 몸이 S자로 휘어져 있는 것이다. 즉 머리부분과 허리부분을 중심으로 몸이 두 번 꺾인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S자의 커브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비너스가 서있는 태도를 보면 한쪽 다리에 몸무게의 거의 대부분을 싣고 있다. 그래서 한쪽 다리는 힘이 들어가 있고, 무릎이 구부러진 다른 한쪽은 힘이 전혀 가해지지 않았다. S자의 커브는 바로 이런 신체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한쪽 다리에 대부분의 무게가 실려 신체가 S자 곡선의 율동미를 구성하는 포즈를 콘트라포스토라고 한다. 부동의 자세보다 움직이는 율동의 자세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자명한 사실로, 이 포즈의 발견 역시 신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조형적 의도를 보이는 것이다.

 

C. 해부학

또한 <밀로의 비너스>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완벽한 해부학이다. 이목구비와 얼굴의 모습, 머리카락 그리고 목에 표현된 두 선의 주름과 어깨의 폭, 가슴과 그 아래로 흐르는 배 위의 복근구조와 선, 약간 볼록한 아랫배의 모습, 옷 주름과 옷 속의 다리 형태와 길이 등이 완벽한 해부학, 즉 철저한 관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조형성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미를 표현하는 일종의 법칙이다. 이런 기법들을 일컬어 캐논(Canon)이라고 했으며, 이 캐논에 의해 표현된 완전한 아름다움의 실체인 <밀로의 비너스>는 바로 영원한 미의 규범으로서의 고전인 것이다.

 

(2) 작품에 도입된 이중적 철학사상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완전성을 향한 기법을 토대로 표현된 밀로의 비너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우선 플라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곳이 비너스의 상체 즉 허리 윗부분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나타난 곳이 하체 즉 허리 아랫부분이다. 다시 말해 상체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고 하체는 세속성과 관능성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 사상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비너스의 상체에 나타난 조형미

일단 비너스의 상체에서 비너스 얼굴과 표정을 간과할 수 없다. 비너스 얼굴 표정을 보면 우선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코이다. 그 모양새가 단정하고 콧날이 오뚝한 것이 고집스런 내면, 즉 허영과 사치의 조류를 쫓지 않는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얇은 입술의 입은 작고 야무지게 다물어져 있는데, 이 역시 이 여인이 숭고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비너스의 숭고한 내면의 세계가 눈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른바 눈을 마음의 창이라 한다. 비너스의 커다란 눈을 보면 세속적 욕망을 마음에 담지 않은 순수한 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마음의 눈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얼굴이 결코 사치스럽지 않고 단정하게 정리된 머릿결과 합치하고 있다.

 

또한 목을 따라 내려오는 고운 선과 그 선이 머무는 두 가슴의 형태는 정삼각형 구조에 벌어짐과 올려짐의 각도가 그 크기와 아울러 가히 이상적이다. 이런 육체적 형상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범접할 수 없는 격조와 우아함을 보이는 여인으로서 비너스의 고매한 정신 세계가 아니겠는가?

 

특히 이 여인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아주 맑고 조용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을 통해 이 여인이 얼마나 정숙하고 기품이 있는 격조 높은 여인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최상의 아름다운 형식을 통해 여인의 이상적 아름다움 즉 정신의 이데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너스의 하체에 나타난 조형미

 

그러나 이 여인의 허리 아랫부분을 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우리의 기대와 달리 허리가 상당히 굵고 아랫배가 충만하게 발달해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여인들의 신체적 생리적 기능 즉 아이의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 아닌가?. 이 부분은 옷에 가려진 커다란 엉덩이와 굵은 허벅지로 연결되면서, 생명의 잉태와 생산이라는 여인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가시적인 것 뿐 아니라 그 이면의 본질까지도 의미한다고 했던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헬레니즘 시대에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단순히 이지적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현실적 가치, 즉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너스의 아랫배는 실제 우리가 이상적으로 삼는 여인의 유연한 모습보다 더욱 풍만하고 발달되어 있다.

 

또한 허리에서 점차 부풀어 가는 S자 곡선과 풍만한 그리고 관능적으로 보이는 엉덩이와 그에 의한 좀 뒤틀린 동세, 배꼽아래의 부풀고 부드러운 살결, 옷 속에 감추어진 풍만한 육체미, 이런 것들이 여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세속적인 관능과 육체의 가치를 동시에 보여주는 경향인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밀로의 비너스>는 상체와 하체가 서로 다른 이중적 철학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숭고한 여인의 이미지와 관능적 여인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관능적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경직되어진 형상보다는 움직임과 율동이 있는 콘트라포스토의 조형성을 활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 조형적이며 해부학적, 철학적 특성에서 당시의 인간의 육체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시대 열망을 보여준 걸작인 것이며, 이러한 미를 창출한 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으로 헬레니즘의 인간중심적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3) 헬레니즘 시대 미의 실체 : 선의 가치 추구

그렇다면 왜 고대 그리스인들은 가장 완벽한 균형의 신체 표현을 목표로 삼고 이를 조형적으로 형상화시켰는가? 이는 당시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철학적인 경향 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관과도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밀로의 비너스>에 나타난 인간 육체의 형상을 절대미 즉 미의 이데아가 형상화된 것으로 본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지고의 형식미를 통해 숭고한 정신과 사유의 세계를 지니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예술의 아름다움이란 단지 눈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 도덕이라는 인간의 내면 즉 정신과 관련이 있다. 바로 아름다운 그릇에 훌륭한 음식이 담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통해 건전한 정신을 수양했던 것처럼, 조형적 아름다움 역시 인간의 순수하고 고양된 정신체계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정신적 실체인 것이다.

 

진선미 삼위일체

이와 같이 미()가 선()의 관념을 나타낼 때, 즉 아름다움과 도덕성이 서로 통일되어 원만한 조화를 이룰 때, 예술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진()의 가치로서 예술의 진실이란 시각적 아름다움, 이데아의 현시로서의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에게 도덕적 관념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시대의 예술 이념을 진선미의 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형식과 내용의 일치를 목적으로 미의 이데아를 실현한 헬레니즘시대 예술은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예술이 지향하는 아름다움의 전형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전형으로, 영원한 모범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을 고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예술에 있어서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 조금 더 광범위하게 이야기하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예술 정신과 그 작품을 의미하는 것이다.

     

<잠자는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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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시대>

고대 그리스 예술 특히 헬레니즘 예술을 고전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 인해, 예술 이념과 형상이 전혀 다른 중세 1000년을 예술의 암흑기라 부르며, 그 이후 15세기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예술이 고대 그리스 정신을 근거로 삼기에 이를 르네상스(Renaissance)라 부른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재탄생, 부활이라는 의미로, 바로 고대 정신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예술이 가장 이상적인 소재로 삼은 것이 인간의 모습이며, 신들의 모습과 행동거지를 인간 세계와 동일하게 표현한 것, 혹은 예술이나 신화 등을 통해 인간의 정신 즉 도덕을 중시한 것으로 보아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고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인간 중심적 사고가 신중심의 중세를 거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출현하는 것이기에, 이 시기를 르네상스 즉 부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인간중심사상을 좀더 극찬해서 인문주의 혹은 문예부흥으로 기술하기도 한다.

 

또한 그 후 17세기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고전주의, 더 나아가서는 나폴레옹 정권과 함께 태동하는 신고전주의라는 이름 역시 헬레니즘 즉 고전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헬레니즘 문명 (기원전 323~ 146)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고전기 이후의 시대로, 이후 로마가 그리스의 정복지를 지배하게 되면서 로마 시대로 넘어간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도 그리스 문화, 예술, 문학은 로마 사회에 스며들어, 로마의 지도층은 라틴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서남 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대체로 사회 상류층의 실용적인 문화 수용으로 보고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으로는 그리스 식민화가 새롭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그리스 도시를 건설했다. 이들 새 도시는 이전처럼 특정한 일개 '모도시' 출신이 아닌, 그리스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온 그리스 식민자들로 구성되었다. 주된 문화 중심지는 그리스 본토에서 페르가몬, 로도스, 그 밖에 셀레우케이아, 안티오케이아, 알렉산드리아 등 새로운 식민 도시들로 확대되었다.

 

 

헬레니즘이란 용어는 그리스어로 원래 그리스인 자신을 지칭하던 λλην (Héllēn)에서 나온 말이다. 역사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그리스 지역의 그리스 문화와 식민화의 확산을 이컫는 말로 이 용어를 만들었다. 그는 1833년 자신의 저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역사에서 고전 그리스 문화를 동경하던 알렉산드로스가 정복 사업과 더불어 광범위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여, 그리스적 정신과 동방 정신이 융합한 범세계적 문화를 일컬어 그리스적 문화, 즉 헬레니즘 문화라 명명했다.

 

헬레니즘 시대는 명목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은 기원전 323년으로 비정된다. 이전 수십 년간 원정을 수행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복했다. 그리하여 이들 왕국은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대부분 왕조 말기에 이르러 로마에 흡수되기까지 서서히 쇠퇴했다.

 

 

디아도코이(Diadochi)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계승자들을 가리킨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후계자들간에 전쟁를 디아도코이 전쟁으로 부른다. 이들의 경쟁 시기가 그리스 외의 민족과 나라들에게 헬레니즘이 전파되는 시기이다. 다른 말로 에피고노이("후손들"이란 뜻)이라고도 한다. 서로 힘을 합쳐 마케도니아를 장악한 안티고노스 1세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안티고노스는 죽고 각각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로 나뉜다.

    

마케도니아과 그리스 중부의 안티고노스 왕조(안티고노스 1)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 1)

안티오케이아 중심의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셀레우코스 1)

페르가몬 중심의 아나톨리아 아탈로스 왕조(리시마코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 _ 최후의 헬레니즘 국가

이탈리아의 마그나 그라이키아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폰토스, 페르가몬

 

 

 

 

헬레니즘화 (Hellenization)

그리스 문화의 확산을 의미하며, 오랫동안 이에 관한 논쟁이 있어 왔다. 의심할 나위 없이 헬레니즘 왕국들을 통해 그리스의 영향이 퍼졌으나, 그 범위가 얼마 정도였는지, 혹은 이 현상이 의도적인 정책의 산물인지 혹은 그저 문화의 전파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헬레니즘화" 정책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리스 문화를 의도적으로 확대하려는 시도였다면, 아마도 그의 광대한 제국이 제대로 기능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한 실용적인 정책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로써 제국 전역에 그리스의 영향이 확대되었지만, 당초의 목적은 그리스 문화 확대가 아니라 제국의 새로운 신민들을 다스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문명화""지배"의 다른 표현이다. 이 정책은 그리스 문화를 확대하거나 하나의 혼성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나아가 알렉산드로스가 박테리아 공주 록사나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것도 아시아인과 그리스인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왕조를 만들기 위한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알렉산드로스의 정책은 확실히 그리스 문화의 확대를 초래했지만, 새 영토를 다스리기 위한 실용적인 수단이었으며, 다른 자가 아닌 자신이 그리스와 아시아의 두 문화를 이어받았다는 점을 내세운 것도 그런 목적을 위한 부분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

후계자들의 헬레니즘화

후계자들 하에서 그리스 문화의 확산은 적극적인 정책이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 자신이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경우를 보면, 이집트의 첫 헬레니즘 군주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이미 파라오로 묘사되고 있다. 비슷한 경우로, 인도-그리스 왕국에서는 불교로 개종한 왕들도 있다. 이런식으로 혼성 "헬레니즘적" 문화가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헬레니즘 문화

 

 

그리스 폴리스의 쇠퇴와 군주 국가의 성립으로 정치 분위기와 사회적 자유는 위축되었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도시 국가가 발전하다가 독재자의 지배로 쇠퇴하게 된 경우와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는 특히 과거의 유산을 보존한 것이 그러하다. 헬레니즘 시대의 국가들은 과거의 잃어버린 영광에 집착하는 듯 했다.

 

중동과 아시아에 그리스 문화가 확산된 것은 그리스 도시의 발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무역로 상에 자리 잡았던 이란의 아이 카눔같은 도시는 문화의 혼합과 확산이 이루어지는 무대였다. 그러나 지역 문화가 밀려나지는 않았으며, 그리스 문화와 혼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했다. 그리스어와 문학도 옛 페르시아 제국 땅 전역에 퍼졌다. 그리스의 영향력과 언어가 퍼진 것은 코이네의 확산으로도 알 수 있다. 초상화는 더욱 사실적으로 변했으며, 화폐 도안도 신의 형상이나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등 선전적인 성격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식 초상화와 그리스어는 그리스어 사용이 쇠퇴한 파르티아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기원전 30년 이집트를 정복하여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정복당한 그리스는 야만적인 승리자를 정복하고 조야한 라티움에 자신들의 예술을 전해주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로마의 예술과 문학은 헬레니즘의 예에서 많이 차용되었다.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라틴어만큼 유창하게 구사했다.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 시

로도스 섬

안티오케이아

셀레우케이아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는 서양 문화의 원천이다

 

그리스의 역사 가운데 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146년까지의 시대를 일컫는다. 기원전 1100년경은 미노스 문명(3650~1170 BC), 키클라데스 문명(3300~2000 BC), 그리고 미케네 문명(1600~1100 BC)으로 특징지어지는 에게 문명(3650~1100 BC) 즉 그리스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 암흑기(1100~750 BC)가 시작되던 때로, 도리스인의 침입이 있었다고 보는 때이다. 기원전 146년은 코린토스 전투로 고대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때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510~323 BC)를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시대로 본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족 의식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결합을 이루었으나,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는 뜻이 없었고 필요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도시 국가 체제는 당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는 거대한 제국 또는 왕국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다른 그리스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323~146 BC)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보통 고대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기틀을 다지고 서남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전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준 풍부한 문화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스 문화는 로마 제국(27 BC~476/1453 AD)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 그리스 문화를 발전하여 퍼뜨렸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고 이 지역들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이슬람 황금 시대(9~13/15 세기)와 서유럽 르네상스(14~16세기 말)를 촉발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다양한 신고전주의 부활 운동에서도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시대는 현재의 그리스가 아니다 (1100-146 BC)

 

 

 

현대 그리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헬레니즘을 비롯한 그리스 문화가 퍼진 지역을 포괄한다. 일반인들이 보통 '고대 그리스(Ancient Greece)'라고 할 때는 로마의 그리스 정복(146 BC) 이전의 그리스 역사 전반을 이를 때 쓰인다.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150년에 몰락하였는데, 미케네 문명이 그리스어를 쓰고 그리스 본토(Greece proper)에서 일어난 문명이었으나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문화로 대표되는 후대의 그리스 문화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미케네 문명을 고대 그리스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어떤 역사가는 최초의 고대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것으로 기록된 기원전 776년을 고대 그리스의 시작 연대로 잡기도 한다. 미케네 문명의 멸망과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린 시점까지의 시기를 그리스 암흑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문자 기록이 전혀 없으며 고고학 유물도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시기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종식은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으로 보는데, 이때부터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기원전 146년을 고대 그리스 시대가 끝나는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도기 양식과 정치적 사건을 기준으로 네 시대로 세분한다.

 

그리스 암흑기(Greek Dark Ages, 기원전 1100년경 ~ 750년경)

_ 도기에 기하학적 문양을 썼다.

 

그리스 고졸기(Archaic Greece, 기원전 750년경 ~ 480년경)

_ 예술가들이 경직되고 신성한 자세를 취하는 커다란 입상 조각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에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고졸기 미소'(archaic smile)를 보인다. 고졸기의 종식 연대는 종종 아테나이의 마지막 참주 정권이 전복되고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시작된 기원전 510년으로 잡기도 한다.

 

그리스 고전기(Classical Greece, 기원전 500년경 ~ 323)

_ 파르테논 신전처럼 모범이 된다고("고전적이라고 · classical") 평가받는 예술 양식이 보인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Hellenistic Greece, 기원전 323~ 146)

_ 그리스의 문화와 패권이 중동까지 뻗어간 시대. 이 시대의 처음과 끝은 각각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로마의 그리스 정복이 일어난 때에 해당한다.

 

그리스 암흑기(기원전 1200년경~ 기원전 800년경)

도리아인의 침략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부터 미케네 문명이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이르는 고대 그리스 역사상의 한 시대를 일컫는다. 같은 시기에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문명이 붕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그리스 도기의 장식은 단순해졌으며 보통 기하학 무늬를 띄고 있다. 전에는 이 시기에 해외의 문명국과 모든 접촉이 끊기고, 문화 발전도 지체되었다고 여겨졌지만, 에우보이아의 레프칸디 유적에서 나온 유물을 보면 기원전 900년대부터 이 지역이 동방 지역, 특히 레반트 해안과 문화적상업적으로 상당히 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 고졸기(기원전 650~ 480)

 

 

그리스 예술 연구에서 기하학적 예술과 그리스 고전기 예술 사이의 시대에 주로 장식 예술과 조형 예술의 양식을 일컬을 때 쓰던 말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가 그리스 고전기로 가는 과도기이므로, '고졸기(archaic)'라고 여겨졌다. 고졸기는 그리스 암흑기 이후에 등장하였으며, 이전 시기에 잊혀졌던 문자 언어가 재생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 이론에서 큰 진보를 보였으며 민주주의, 철학, 연극, 시가 발전하였다. '고졸기'라는 말은 이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리스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여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비가 약간 오며 춥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각 골짜기나 평지가 하나의 지리적 단위를 이룬다. 이러한 지리 조건이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들어선 주된 요인이다. 이러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듯 자연 환경이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찍이 해외무역에 종사하였다.

 

폴리스의 성립과 성장 (750-500)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는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미케네의 선형 B 문자가 잊혀진 이래 문자가 없었으나, 그리스는 페니키아 문자를 도입하고 이를 수정하여 그리스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부터 문자 기록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스의 지형 때문에 각 자치 공동체는 바다나 산맥에 따라 이웃과 단절되어 각 섬과 계곡, 평야에 각자 독자적인 취락을 이루었다. 정치는 왕정이었으나 임금의 권력은 미약하였으며 토지 소유에서도 미케네와 달리 공유지와 이에 따른 공동체적 규제가 없고, 촌락공동체의 성원은 저마다 클레로스(분배지)를 소유하여 경제적 독립성이 강하였다. 다른 나라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여러 촌락이 지리적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모여들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인 폴리스를 형성하였다.

폴리스(도시 국가)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근린 동맹(Amphictyony)을 맺고, 기타 정치적 군사적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서 기원전 776년부터 4년마다 모든 폴리스가 참여하는 체전을 열고 그 기간 동안은 서로 전쟁을 금지하였다. 이렇듯 그리스 사람들이 동족 의식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결합을 이루었으나, 폴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성이 강하여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려는 의지가 없었고 필요시 여러 폴리스들 간에 동맹을 맺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도시 국가 체제는 당시 세계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는 거대한 제국 또는 왕국이 형성되었던 것과는 다른 그리스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기원전 6세기에 아테나이, 스파르타, 코린토스, 테바이 등 여러 도시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폴리스는 종교적경제적 유대로 결합하고 법에 따라 규제되며,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 공동체로 볼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

아고라 (광장)

렐란토스 전쟁(기원전 710년경 ~ 650년경)

스파르타의 정복정치

메세니아 전쟁

뤼쿠르고스(Λυκοργος)의 개혁

아테나이 (아테네) 귀족정치

솔론의 온건 개혁

살라미스 전쟁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

그리스 식민지 건설 (750-500)

기원전 7,8세기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마그나 그라이키아(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소아시아 혹은 더 멀리 갈리아 남부와 에스파냐 해안까지 이주하여 식민지를 세웠다. 대표적인 식민시로는 프랑스의 마실리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이탈리아의 네아폴리스, 비잔티온 등이 있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식민시를 비롯하여 흑해로부터 서부 지중해에 걸쳐 범 그리스 세계가 생겼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농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었고, 도시의 평민들은 귀족정치에 도전하게 되었다. 평민세력의 대두에는 전술의 변화 또한 못지않게 작용하였다.

 

 

그리스 고전기 (510-323 BC)

 

 

고대 로마와 서구 세계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 정치, 예술 사상, 과학 사상, 문학, 철학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 고전기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 건축, 문화의 측면에서 고전기란 기원전 6세기 대부분, 5세기, 4세기의 시대를 이른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510년에 아테나이의 마지막 참주가 몰락한 시대부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기원전 323년까지의 시대로 잡는다.

    

아테나이 민주주의 (510-338)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종전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관계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나이의 전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20세 이상의 시민권을 가진 성년남자로 구성되는 민회는 500인회의 제안을 토의하여 채택 여부를 결정하고, 사법권은 500인회와 동일한 선출방식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원이 보유하였다. 또한, 에피알테스는 아레이오 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후에 페리클레스의 민주정치시대가 완성된다(기원전 457~429).

귀족정치의 집정관과 아레이오파고스 회의, 도편(도자기 파편) 추방 제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499-450)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를 노렸으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거나, 그들의 후원을 받는 참주지배하의 이오니아 식민시들의 반란으로 본토 진출을 주춤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군은 마라톤에 쳐들어왔다. 아테나이와 적대적인 테바이와 같은 폴리스들은 이를 이용하려 하였고, 스파르타는 구원병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밀티아데스의 선전으로 아테나이는 승리하게 된다. 가죽을 사용한 갑옷 등이 등장하고 가벼운 헬멧의 사용으로 농촌이나 도시의 중산층에서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마라톤의 승리에서는 '달리는 중장보병'의 역할이 컸다.

기원전 480,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시 침입하였다. 적과 내통하는 자로 인해서 큰 타격을 입기도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나이는 대승을 거둔다. 다음해 페르시아군은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이간시키고 재차 아티케를 점령하여 아테나이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에 스파르타도 많은 구원병을 파견하고 각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서 페르시아를 대파함으로 그리스는 승리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 전쟁은 동방의 전제정치에 대한 폴리스의 자유적 승리를 뜻한다. 그리스의 승리는 유럽 역사에서도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이오니아 반란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_ 다리우스의 침공, 린도스 전투 · 낙소스 공성전 · 카리스토스 전투 · 에레트리아 공성전 · 마라톤 전투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_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테르모필레 전투 · 아르테미시온 해전 · 살라미스 해전 · 폰티다이아 공성전 · 올린토스 공성전 · 플라타이아이 전투 · 미칼레 전투

3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_ 델로스 동맹, 세스토스 전투 · 키프로스 전투 · 비잔티움 전투

 

아테나이의 패권 (448-430)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복에 실패했지만 여전히 동방의 전제국가로 건재하였으며, 그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테나이를 맹주로 하는 해상 동맹인 델로스 동맹이 탄생하였다. 규약에 의하면 동맹시는 일정한 병력과 함선을 제공하거나, 그것이 불가능 할때는 자금을 제공하기로 되어 있었다. 동맹을 해체하고 전쟁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해상동맹의 공납금과 해상무역에서 아테나이의 패권은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아테나이 경제 번영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431-404)

기원전 431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404년까지 계속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나이의 패배로 끝을 맺고 그리스의 주도권은 스파르타가 쥐게 된다.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첫 번째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으로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전쟁의 첫 단계는 기원전 421년에 니키아스 조약이 체결되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에서 다시 교전이 일어나 이내 조약의 효력은 약해졌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켈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이 패배로 전쟁은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는데, 보통 '데켈레이아 전쟁' 혹은 '이오니아 전쟁'으로 불린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아테네는 이듬해에 항복하였다.

역사가 투퀴디데스가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 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원래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 문화적 터부를 부수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 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스파르타의 패권 (404-371)

스파르타(스파르테)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의 에우로타스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라코니아 평야 지역 중앙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데 라코니아로 들어가는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산지가 많은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 달리,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어 자급자족할 수 있었던지라 옛부터 바깥과 교류가 적어 폐쇄적인 사회체제가 형성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 말까지는 다른 폴리스와 달리 성벽을 쌓지 않았다. 기원전 650년경부터 스파르타는 이 지역의 군사적 패권국으로 떠올랐으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당시 그리스 연합군의 전체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스파르타 인구의 대부분은 헤일로타이였다.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나이의 주요 적대국이었다. 기원전 362년 그리스 전역에 대한 스파르타의 군사적 패권이 종식되었다. 이후에도 스파르타는 서구 문화에서 매료의 대상이었으며, 스파르타를 동경하는 태도를 라코노필리아라고 한다.

 

라코노필리아

스파르타와 스파르타의 문화, 정치 체제에 대한 애호를 이른다. 스파르타는 당대에 이미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숙적 아테나이에서도 그러했다. 고대에 "아테나이의 고귀하고 훌륭한 여러 사람들은 스파르타를 실제 세계에 구현된 이상 국가에 가까운 나라로 여겼다".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은 스파르타를 돈과 교역에 물들지 않고 강건한 이상 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문예 부흥으로 고전 연구가 되살아 나면서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 라코노필리아도 다시 등장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의 헌정주의자 존 아일머는 "라케다이모니아는 지금까지 있던 나라 중에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나라였다"고 언급하면서 튜더 시대 잉글랜드의 혼합 정체와 스파르타 공화정을 견주었다. 아일머는 스파르타를 잉글랜드의 모범으로 꼽았다. -자크 루소는 '예술과 학문에 대한 담화'에서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를 대조하면서 더욱 교화된 아테나이 문화보다 소박한 스파르타 체제를 더 높게 평가했다.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에서도 스파르타는 사회 정화의 표본이었다.

칼 오트프리트 뮐러는 스파르타의 이상을 스파르타가 속한 도리스인의 인종적 우수성과 연관지어 라코노필리아를 새롭게 해석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스파르타를 찬미하면서 1928년에 독일이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자"를 제한함으로써 스파르타를 모방했다고 밝혔다. 히틀러는 "스파르타는 한때 훌륭한 수단을 가졌다. 스파르타인 6,000명이 헤일로타이 350,000명을 종속케 할 수 있덨던 것은 오로지 스파르타인의 인종적 우수성 덕분이었다"라고 말했다. 스파르타는 "최초의 인종주의 국가"였던 셈이다".

오늘날 "스파르타적"이라는 표현은 단순성, 검소함, 혹은 사치나 편의를 기피함을 이를 때 쓴다. 라코니아식 어법이란 스파르타인의 특징이었던 간결하고 무뚝뚝한 어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레욱트라 전투 (371)

스파르타의 패권이 절정에 달했을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요한 나라들이 복속하였으며, 정예 아테나이 해군을 제압하려 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스파르타는 아테나이 제국과 전쟁을 벌여 격퇴하였으며, 페르시아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코린토스 전쟁(395-387 BC)와 안탈키다스의 화의가 체결로 페르시아는 그리스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으며, 한편 스파르타는 그리스 정치에서 패권국의 위치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테바이의 에파메이논다스 장군에게 대패하면서 오랜 쇠퇴기에 빠지게 된다. 이 전투는 처음으로 스파르타 군대가 전병력을 동원하고도 육전에서 패배한 사례였다.

 

 

 

테바이의 패권 (371-362/338)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보이오티아의 도시국가로, 보이오티아와 아티케 지방을 가르는 키타이론 산맥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쪽 끄트머리를 이룬 곳이다. 이 도시는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카드모스, 오이디푸스, 디오뉘소스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보이오티아 연맹의 맹주였다. 아테나이의 주요 적수였으며,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페르시아 편에 섰다.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가 지휘한 테바이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시 스파르타의 패권을 몰락시켰다. 테바이 신성대는 기원전 338년에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패배하였다.

카이로네이아 전투 (338)

보이오티아의 카이로네이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아테나이-테바이 연합군을 상대로 싸워 압도적으로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테살리아, 에페이로스, 아이톨리아, 북부 포키스, 에피네미디아 로크리스 등과 동맹을 맺어 아테나이와 테바이의 연합군을 물리쳐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의 주도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아테나이군과 테바이군은 전열의 중앙에 배치되었다.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군의 우익을 지휘하고, 당시 18살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좌익을 지휘하였다. 유명한 기병대 헤타이로이는 마케도니아군 후위에 배치되었다.

 

카이로네아 전투 이후 테바이의 군사력은 붕괴되었으며 300명의 정예 부대로 이루어진 테바이의 신성대 대부분이 전사하였다. 아테나이 군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신성대의 용맹함을 확인한 필리포스는 이들의 용맹과 자기 희생적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자의 상을 세우는 것을 허가하였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국왕 필리포스 2세는 18살 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아테나이로 보내 협상을 하고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 아테나이가 창시한 델로스 동맹이나 스파르타가 창시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유사한 코린토스 동맹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코린토스 동맹은 이전까지 그리스 폴리스들이 구성했던 어떤 동맹들보다도 성공적이고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하여 코린토스 동맹은 일종의 국가적 실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델로스 동맹이나 펠로폰네소스 동맹처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경쟁으로 인하여 동맹이 해체될 것을 우려하여 필리포스는 마케도니아로부터 대표를 파견하여 각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하였다. 코린토스 동맹을 창설한 후에 필리포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마케도니아의 패권 (338-323)

그리스 반도의 최북방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서쪽으로는 에페이로스, 북쪽으로는 파이오니아, 동쪽으로는 트라케(트라키아), 남쪽으로는 테살리아 지방과 접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비롯하여 인더스 강까지 진출하면서, 마케도니아는 짧은 기간 동안 고대 근동에서 헬라스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그리스 역사의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된다.

 

마케도니아 제국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는 물론이고 이집트를 비롯한 페르시아 제국에다가 동쪽으로 인도 접경까지 진출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당한 땅의 정치 형태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 사후, 결국 제국은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 리시마코스 왕조로 분열되었다.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294, 안티파트로스 왕조는 안티파트로스와 아들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였으나, 안티고노스 3세는 그리스 지역에 마케도니아의 패권을 다시 확립하였다. 또한, 마케도니아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나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처럼 신격화되지 않았다. 기원전 197년에 필리포스 5세가, 기원전 168년에는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대패하였다.

기원전 149년 로마에 패배하고, 속주가 설치되었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는 신흥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흡수 된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으며,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 오스만 제국의 지배 (비잔틴 제국의 경우 공용어가 그리스어였으며 민족도 그리스인이 많다)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323-146 BC)

 

고대 그리스의 예술, 건축, 문화면에서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기원전 323년에서 고전기 그리스의 심장부가 로마에 병합된 기원전 146년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이후 로마 제국의 지배는 헬레니즘 사회와 문화를 단절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가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기 전까지 그 본질을 유지해왔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독립은 이때 종식된다.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어권 세계에서 그리스 본토의 중요성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도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케이아로, 각각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의 도읍이었다. 페르가몬, 에페소스, 로도스, 셀레우키아같은 도시들도 중요했으며, 이 시기에 동부 지중해에서 도시화가 진전되었다.

 

기원전 212년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98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91년 테르모퓔라이 전투 _ 아파마이아 화의(기원전 188)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146 BC-330 AD)

 

그리스 시대에서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한 이래 기원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뷔잔티온을 새 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을 때까지 시대를 이른다.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가 로마 속주로 편입되면서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그리스 남부는 마케도니아 행정관의 감독을 받았다. 그러나 기원전 133년에 로마령에 편입된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이 반도를 아카이아 속주로 지정한다. 로마 문화가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이 지역은 제국의 중요한 동부 속주였다.

아테네의 아고라에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아그리페이아(Agrippeia), 티투스 플라비우스 판타이누스 도서관, 바람의 탑 등이 있다. 그리스 문화는 로마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가령 호라티우스는 "정복된 그리스가 자신의 정복자(로마)를 정복했다"고 말한 바 있다. 호메로스 서사시는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쓰는 데 영감을 주었으며, 소 세네카같은 작가들은 그리스풍으로 글을 썼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같은 로마의 전쟁 영웅들은 철학을 공부하고 그리스 문화와 과학을 높이 샀던데 반해, 이들의 정적이었던 로마의 귀족들은 그리스인을 경멸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의 동부 지역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본 연제는 고대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된 글입니다.

 

 

 

 

 

그리스 미술 연대기

 

 

청동기 시대

(3650-1100 BC)

 

키클라데스 문명 (3300-2000 BC)

에게 미술 참조

미노스 문명 (3650-1170 BC)

미케네 문명 (1600-1100 BC)

 

 

 

 

고대 그리스

(1100-146 BC)

그리스 암흑기 (1100-750 BC / 1200-800 BC)

그리스 고졸기 (800/750/650-480 BC)

폴리스의 성립과 성장 (750-500)

그리스 식민지 건설 (750-500)

 

 

 

그리스 고전기 (510-323 BC)

아테나이 민주주의 (510-338)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499-450)

아테나이의 패권 (448-430)

펠로폰네소스 전쟁 (431-404)

스파르타의 패권 (404-371)

레욱트라 전투 (371)

테바이의 패권 (371-362/338)

카이로네이아 전투 (338)

마케도니아의 패권 (338-323)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323-146 BC)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146 BC-330 AD)

중세

(330-1821 AD)

비잔티움 제국 (330-1453)

프랑크인의 지배 (1204-1797)

오스만 제국 시대의 그리스 (1453-1821)

근대 그리스

(1821 AD-현재)

 

그리스 독립 전쟁 (1821-1829)

그리스 왕국 (1832-1924, 1935-41, 1944-74)

그리스 제2공화국 (1924-1935)

84일 체제 (1936-1941)

추축국 점령기의 그리스 (1941-1944/1945)

그리스 내전 (1946-1949)

그리스 군사 정권 (1967-1974)

그리스 제3공화국 (1974-현재)

 

 

본 연제는 고대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된 글입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 2부 끝.

 

 

고대미술 - 7부 로마미술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