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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미술 7
복제와 변형 속에서 피어난 실용적 경향
6부 고대 로마 미술 [ Roma Art ] - 2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양 최초의 제국, 세계를 표용한 로마 제국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이다.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고대 로마 문명은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하였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평민 계급은 자신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귀족과 투쟁을 벌여, 로마 사람들은 200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이루었다. 내부에서 신분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로마는 바깥의 침입에 맞서 주변 지역을 복속하였으며, 기원전 272년경 로마 공화정은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남단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한 동맹 체제를 이끌었다. 그 뒤 로마는 150여 년 동안 여러 전쟁을 치르면서 갈리아, 삼니움, 카르타고와 같은 강적을 무찌르고 점차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전역을 침략하여 정복하였다.
기원전 1세기 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 시대를 열었다.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강력한 패권을 바탕으로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으며, 라틴어 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제국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여, 그 패권이 스코틀랜드에서 수단까지,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캅카스 지방까지 미쳤는데, 이 영역은 오늘날 미국 영토 면적의 2/3에 해당하고, 인구는 연구에 따르면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칠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측된다.[1] 하나의 세계를 이룬 이 거대한 제국 안에서,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등 고대 세계의 여러 문화가 융화되고 다시 확산되었다.[1] 고대 로마는 서구 세계의 법,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로마 제국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며,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고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진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외침을 막아내면서 계속 존속하였는데, 중세 시대의 동부 제국은 보통 비잔티움 제국으로 칭한다.
1> 로마 왕정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왕정 시대는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기원전 75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창건자 로물루스 이래 왕정은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들어서기까지 이어졌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는 건국 이래 기원전 500년경까지 일곱 명의 왕이 통치했다고 전한다.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앙쿠스 마르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종종 일인정 혹은 왕정 시기라 불린다.
로마의 기원은 트로이아 전쟁에서 트로이아가 멸망할 때 거기서 피해 수년간 방랑하다 라티움에 정착했다는 트로이아의 영웅 아이네아스(Aeneas)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그곳의 왕 라비누스를 만났고, 그의 딸 라비니아에게 구애하던 선주민과 전쟁을 벌인 끝에 그녀와 결혼했으며, 새 아내를 기려 라비니움이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이 후 아들 아스카니우스(Ascanius, 혹은 Iulus)는 알바 롱가를 건설했다. 아스카니우스 이후 열두 번째 알바 왕인 프로카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였다. 이 둘은 왕위 계승을 놓고 암투를 벌였고 승리한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를 감옥에 가두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Rhea silvia, 또는 Ilia)를 독신으로 살아야하는 여사제로 만든다. 하지만 그는 마르스에 의해 잉태되었고 두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낳았다.
이 소식은 아물리우스의 귀에 들어갔고 처녀로써 지내야할 여사제인 레아 실비아의 출산에 그는 분노하여 두 쌍둥이를 티베리스 강에 내버려지게 하였다. 둘은 로마 땅 근처에서 암늑대에 발견되어 젖을 먹여 그들을 키웠다. 그런 뒤 목동 파우스툴루스가 이들을 데려다 키웠다.
이 둘은 목동의 아들로 성장하며 주변 양치기의 리더가 되었고 우연히 왕위 계승에 밀려난 누미토르를 만나 그와 혈연임을 알게 된다. 누미토르의 사주로 이들은 아물리우스를 죽이고 누미토르는 알비롱가의 왕이 된다. 그 뒤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이 두 사람은 그들의 무리와 함께 7개의 언덕에 있는 로마에 정착하여 도시를 세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각각의 언덕 위에 정착하였으나 둘은 말다툼을 벌이다 로물루스가 레무스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죽이고 유일한 통치자가 된다. 로물루스의 통치하에 군대를 조직한 신생 도시 로마는 아내감이 부족해지자 사비니인 마을에서 여자들을 약탈하여 자기네 새 도시의 대를 잇게 된다.
고대 전승에서는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전제적인 통치를 일삼고, 그의 아들이 다른 남자의 정숙한 아내 루크레티아를 겁탈하여, 수치심에 루크레티아가 자결하자 폭력 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었다고 전한다.
파밀리아
(familia)
원로원(Senatus)
민회 _ 쿠리아회(comitia curiata)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2>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8년 – 기원전 27년)
고대 로마 시대에서 기원전 510년경 왕정을 폐지하고 이후 450여 년간 로마 정치를 이끌었던 공화정 정체(政體)와 그 정부를 일컫는다.로 마 공화정은 권력의 분리와 견제와 균형 원칙에 중점을 둔 복합적인 정치 체제였다. 오랜 세월 귀족과 그 밖에 명문가 출신이 아닌 평민이 정치 투쟁을 벌이면서 공화정은 발전했다. 공화정 초기에 로마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둔 귀족들이 통치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귀족이 정부를 장악할 수 있게끔 한 법이 철폐되었으며, 그 결과 신귀족이 출현했다.
공화정이 출범하고 처음 2세기 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영토를 넓혔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갈리아 남부까지 정복했다. 이후 2세기 동안 로마는 오리엔트의 상당한 지역과 갈리아까지 지배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공화정 체제는 제국주의로 변질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에 오른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기원전 31년, 로마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특별한 권력을 부여한 기원전 27년 등을 공화정이 종식된 시점이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집정관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5세기 중엽쯤에는 공화정의 고위 정무관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 집정관은 원래 귀족들의 자문 회의였던 원로원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 조영관, 재무관이 있었다. 정무관직은 원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 공화정의 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가 이룬 수많은 법률 및 입법 제도는 유럽을 비롯한 세계 전역의 근대 국민 국가와 국제 기구에 그 자취를 남겼다. 또 로마의 라틴어는 유럽 여러 지역의 문법과 어휘에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 (senatus)
민회 _ 쿠리아회(comitia curiata), 켄투리아회(comitia centuriata), 트리부스 인민회'(comitia tributa populi), 트리부스 평민회(concilium plebis tributum)
정무관의 권한과 견제 수단
집정관, 법무관, 감찰관, 조영관, 재무관, 호민관, 독재관
⑴공화정 초기 시기
①신분 투쟁
집정관(consul)와 민회 켄투리아회
로마가 승리를 거듭하면서 귀족과 평민의 알력은 점점 커져갔는데 그 이유는 전리품의 배분에 있어서 귀족들이 평민들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였다. 또한 평민들은 자영농들이 대부분이였는데 이들이 전쟁을 하는 동안 그들의 농지는 황폐화되었고 이를 다시 개간하기 위해서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귀족들은 이를 이용해 고리로 돈을 빌려주었으며 이러한 고리와 원금을 갚을 능력이 없는 평민들은 귀족들의 노예가 되는 신세를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471년 아벤티누스 언덕으로 철수 투쟁(secessio)
민회인 트리부스 평민회
호민관
로마법 12표법
민회인 트리부스 인민회
카눌레이우스 법
기원전 376년에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leges Liviniae Sextiae)
기원전 326년에 포이텔리우스법(lex Poetelia Papiria)으로 부채노예제 폐지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 법(lex Hortensia)
②이탈리아 정복
기원전 493년, 라티움 전쟁 _ 라티움 동맹과 카시우스 조약
기원전 343년부터 약 기원전 290년까지 삼니움 전쟁
1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3년 ~ 기원전 341년)
2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26~304)
3차 삼니움 전쟁
기원전 340년 로마의 라티움 동맹 해체
퓌로스 전쟁 (기원전 280년~ 기원전 275년) "피로스의 승리“로 이탈리아 반도를 재패
⑵ 공화정 중기 시기
①지중해 정복
일리리아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
시리아 전쟁
포에니 전쟁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41년) _ 지중해 장악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 (기원전 218년~기원전 202년) _지중해 서부의 패권
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년~기원전 146년) _ 카르타고 멸망과 지중해 패권 장악
②정복의 영향
로마의 세계 정복과 확장은 로마의 경제, 사회, 정치에 혁명적인 파급 효과를 끼쳤으며, 이후 공화정 자체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로마의 해외 팽창으로 풍부한 자본과 토지, 노예 노동력이 유입되고 해외 시장이 확대되면서 로마와 이탈리아의 귀족의 사유지에서 라티푼디움(대농장, latifundium)이라는 대규모 자본집약적 영농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큉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처럼 전쟁 영웅이 정계에서 부상하여 개인에 막강한 권력과 독립성이 부여되어 로마의 공화정 전통을 위협했다.
⑶ 공화정 말기 시기
①그라쿠스 형제 (Gracchi)의 농지법(lex agraria) 좌절
기원전 133년 ~ 기원전 121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와 곡물법(lex frumentaria)에 대하여 반대하는 원로원 세력에 살해당하여 공화정 사상 최초의 정치 폭력이 발생하였다. 원로원 귀족는 원로원의 전통적인 벌족파(optimates)와 민중파(populares)로 분열되었다.
②마리우스와 술라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으로 사병화
기원전 107년에 군대 복무를 위한 시민의 재산 자격을 철폐하고 무산자들이 군대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토지 분배 법안을 통과시켜 퇴역병을 정착시켰다. 병사들은 국가보다는 자신의 군사령관에세 의지하고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이는 로마 군단병이 군사령관에 의해 사병화가 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동맹국 전쟁으로 시민권 확대
기원전 92년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루스는 이탈리아 동맹국 시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와 반대로, 드루수스 암살로 로마 시민권을 기대하던 이탈리아 동맹국은 로마에 대항하여 동맹국 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로마는 모든 동맹국의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허용하여 로마 시민권이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종신 독재관의 독재
마리우스파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에 권력 투쟁이 전면적인 내란이 일어났다. 기원전 83년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한 술라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하여 종신 독재관이 되어, 공화정 헌정 질서를 복구하고자 했다.
③권력의 불안과 내전
기원전 78년 집정관 마르쿠스 레피두스 반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
기원전 63년에 카틸리나의 모반
기원전 67년의 가비니우스 법(lex gabinia)은 폼페이우스에게 비상시 명령권(imperium)을 부여
삼두 정치
1차 삼두정치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사이에 맺어진 비공식적 협약으로 기원전 60년, 벌족파 세력에 맞서 폼페이우스와 대중적 정치 지도자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체결하였다. 기원전 60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자신을 반대하는 원로원에 맞서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다. 크라수스도 협력관계에 끌어들였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협약에 따라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농지법을 개혁하고 원로원을 약화를 꾀했다. 그러나 기원전 54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와 전쟁 중 카르하이 전투에서 전사하자 삼두정치는 위기를 맞았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로써 제1차 삼두정치는 종결되었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정적이 되었다.
제2차 삼두정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사이에 맺어진 공식적 협약으로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43년 당시 로마의 유력자인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결성한 일종의 정치, 군사적 협약을 말한다. 기원전 33년을 마지막으로 파기되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원로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제2차 삼두정치는 공인된 형태를 취했고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고 제정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사건중에 하나가 되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퇴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각각 분담하여 복구한다며 나누어 통치했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화려한 궁정생활을 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안토니우스의 동생가 반란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진압되는 일이 일어났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고 옥타비아와 이혼했다. 이후 제2차 삼두 정치도 깨지는데 다른 집정관이었던 레피두스는 유배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진 뒤 자살하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또는 102년 7월 13일 ~ 44년 3월 15일)의 독재
갈리아 전쟁 -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갈리아 속주의 총독에 임명되어 기원전 58년에 시작해 기원전 51년까지 9년간 갈리아를 정복했다.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의 내전 _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루비콘 강>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사망과 종신 독재관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_ 기원전 44년 암살
아우구스투스(IMPERATOR·CÆSAR·DIVI·FILIVS·AVGVSTVS,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서기 14년 8월 19일)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의 초대 황제 ‘존엄자’(아우구스투스), “호민관 권한”(tribunitia potestas)
로마의 평화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여섯 번째 달"(Sextilis)을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어 불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
로마 혁명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전쟁
안토니우스와의 전쟁
옥타비아누스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존엄한 자”
황제 아우구스투스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 '프린켑스’
아우구스투스 영묘
아우구스투스 업적록 (Res Gestae Divi Augusti)
8월 (Augustus)
건설 사업은 코린토스 양식으로 “나는 진흙으로 된 로마를 물려받았고, 대리석의 로마를 물려줬다.”
3> 로마 제정 시대 (기원전 27년 – 기원후 476년)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지배 체제 혹은 원수정(principatus)을 사실상 시작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 제정 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①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후의 아우구스투스) 간에 로마의 패권을 두고 겨룬 해전으로 옥타비아누스 측의 승리로 끝났다. 지휘관의 무능함이 전술적 패배와 전략적 패배를 동시에 불러올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전투로서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른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②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지정 된 아우구스투스 시대 (기원전 27년–서기 14년)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 재정, 정치 전반에 걸친 대규모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종신 독재관직에 올랐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를 뜻하는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수여한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③ 5현제 시대 (티베리우스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까지, 14년–235년)
A.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Julius Claudius)
로마 제국 최초의 세습 왕조이다. 그 이름은 왕조의 처음 두 황제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씨족명에서 유래했다. 총 5명의 황제들을 배출하였으며, 기원전 27년부터 68년까지 약 100년간 제국을 다스리다가 마지막 황제인 네로가 자살하면서 맥이 끊어졌다.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서기 14년)
티베리우스 (재위 14년~37년)
칼리굴라 _ 정신병
클라우디우스
네로 _ 원로원으로부터 “국가의 적”으로 선고로 자살
B. 네 명의 황제의 해
네로 황제의 죽음 이후의 혼란기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최후 승자로 플라비우스 황조를 창시한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_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
C. 플라비우스 왕조
기원후 69년부터 96년까지로 기원후 96년 9월 18일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끝난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플라비우스 도미티아누스 _ 공포정치(89~96)
D. 오현제 시대 (네르바-안토니누스 황조에서 콤모두스 재위 이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부터 콤모두스까지 이르는 로마 황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중 실정을 거듭한 콤모두스를 제외한 네르바 보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다섯 명의 황제를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오현제)라고도 부른다. 이들 다섯 명의 황제는 로마 제국을 팽창시켜 최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말년에 콤모두스가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네르바 (Marcus Cocceius Nerva) (95년 - 98년)
트라이아누스 (Marcus Ulpius Nerva Traianus) (98년 - 117년)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Traianus Hadrianus) (117년 -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138년 - 161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161년 – 180년)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161년 - 169년)
콤모두스 (Marc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180년 – 193년) - 암살
E. 난립기
F. 세베루스 왕조
세베루스 1세가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서 성립되어, 235년에 세베루스 2세가 살해당하면서 소멸한 로마 제국의 왕조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Lucius Septimius Severus) (193년 - 211년)
카라칼라 (Marcus Aurelius Antoninus, Caracalla) (211년 - 217년) 공동황제 게타 (Geta) (211년 - 212년)
마크리누스 (Marcus Opellius Macrinus) (217년 - 218년)
엘라가발루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Heliogabalus) (218년 - 222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222년 - 235년)
G. 군인황제 시대
④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의 분열 (235년–395년)
3세기의 위기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년 ~ 305년)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재위 284년 ~ 305년)
제3세기의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다.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다. 그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탄압했다. 하지만 이런 사두정치체제로 인해 카리칼라부터 파탄나기 시작한 국가 재정이 더욱 망가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로마제국의 개혁
기독교 박해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Herculius 재위 286년~305년)
사두 정치 체제
사두 정치 체제 또는 테트라키아(Tetrarchia)는 국가 권력이나 왕좌를 네 명이 나누어 통치하는 정치 체제를 말한다. 293년에서 시작하여 약 20여 년간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창안한 사두 정치제가 가장 유명하다. 이는 이른바 3세기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겨졌고 이후 로마 제국의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사두 정치 체제의 시작은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하면서부터 시작된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그러다가 점차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문제가 더욱 힘들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동의하에 그 제도를 확장하여 각각 정제의 책임 아래 부제를 두게 된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정제로 옹립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 재위 306년 – 337년)
흔히 기독교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대) 콘스탄티누스(Sanctus Constantinus Magna)로 호칭한다.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죽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인 로마 군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치세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끝내고 사실상 정식 종교로 공인했다. 그는 또한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헬레나와 함께 5월 21일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특히 라바룸을 처음 사용한 것,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세운 것, 그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에 대한 수많은 전설 등을 볼 때 그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로마(Nova Roma)’로 공표하고 330년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했고, 세계 최초의 기독교 도시로서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의 권좌는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에게 이어졌다.
서방정제
32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로마의 패권을 놓고 격돌 후 단독황제
정치 개혁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 또는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로마 황제의 칙령문서로 중세 유럽의 유명한 사기 문서로 간주된다. 이 조작된 칙령문서는 중세기간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기독교로 교화하고 세례를 베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교황은 황제보다 더 우위에 있으며 신성한 권력의 대표자로 교황이 세속의 황제를 결정하고 심지어 교체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그 영토는 이후 약 11세기 동안 지속된 교황령의 기초가 되었다. 16세기 중반까지 금서목록에 포함했으나 결국 교회도 위조된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교황권의 우위
1440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는 조작문서의 폭로
313년 밀라노 칙령 (313년, Edict of Milan)과 기독교 공인
종교적인 예배나 제의에 대해 로마 제국이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다. 이로써 로마 제국에서 신앙을 가지는 것,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방해물이 제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는 311년 갈레리우스가 내린 칙령에 의해 이미 합법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밀라노 칙령은 311년의 칙령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에서 적극적 의미의 기독교 보호 내지는 '장려'를 의미하게 되었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기독교는 탄압받는 입장에서 로마 황제의 비호를 받는 입장으로 크게 격상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기독교를 장려한 최초의 로마 황제가 되었다. 현재 칙령 문서 자체는 내려오지 않으며, 금석문 형태로도 남아있지 않다. 1차 사료로는 유일하게 락탄티우스의 '박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에 동방황제 리키니우스가 휘하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의 형태로 실려 있다.
313년 2월에 로마의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누스 1세와 제국의 동방을 다스리던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협의한 정치조약의 결과였다. 그 내용으로는 첫째,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도 공인되었다. 로마 제국내의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해 주고 기독교인에게 교회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주며, 둘째로는 기독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했다.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Concilium Nicaenum Primum)
325년 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터키의 이스탄불) 근교의 고대 그리스의 작은 식민도시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공의회이다. 니케아 공회의, 제1회 세계회의 또는 제1회 니케아 공회의라고도 한다. 기독교 최초의 세계적 회의(동서 양교회의 총회의)이라고도 하는 시각이 있으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첫 공의회또한 최초의 기독교 전체의 회의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국가통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으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전 교회의 사교(司敎)·사제(司祭) 약 300명을 니케아에 소집하여 대회의를 열었다. 회의 내용은 주로 아리우스 논쟁, 즉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어떠냐는 것이었다. 의사내용(議事內容)은 아리우스파, 알렉산드로스파, 중간파(오리게네스 주의파)의 3파로 나뉘어 논의되었는데, 난항을 거듭한 결과 아버지와 아들을 동질(호모우시오스)로 보는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어 아버지와 아들을 이질로 보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삼아 일단 결말을 보았다.
공의회의 쟁점과 교파
니케아신조와 삼위일체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330년)
콘스탄티누스 왕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시조로 하는 황제 가문의 계통에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대략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 부터 363년 마지막 율리아누스 황제 가 죽을 때까지의 로마 황제를 지낸 가문을 말하며 가장유명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름에서 따왔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훈족[흉노족]의 침입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378년, 로마-고트족)
378년 8월 9일 동로마의 황제 발렌스와 고트족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황제 발렌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고트족은 로마군에게서 승리를 거두었다. 역사적으로 이 전투의 패배로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전투의 패배는 로마인에게 아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로마의 게르만화는 더 이상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발렌스의 뒤를 이어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고 그는 계속해서 밀려오는 고트족을 결국 로마 영토 안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 (또는 테오도시우스 대제, Flavius Theodosius, 379년~395년 )
그라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다스릴 것을 임명받은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죽은 후,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완전히 분리가 고착화 되어 다시는 합쳐지지 않았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국교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독교 부흥 정책과 국교화 때문에 그는 기독교 역사가들로부터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았다.
고트족을 승인하다
니케아 기독교의 국교화 _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믿는 사람들만 보편적 기독교인(가톨릭)으로 인정되었다. 가톨릭이라는 호칭이 문서에 등장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주교 암브로시우스와의 대립 _ 현실의 최고권력자인 황제가 일개 교회의 성직자에게 굴복한 사건으로, 기독교 내에서 교권과 속권과의 첫 대립으로서, 이후 종교와 권력의 관계를 암시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이러한 추세는 강화되어 1077년에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테오도시우스 왕조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왕조였다. 스페인 출신 가문으로 379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황제로 임명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이었으나 이후 동서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455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과 함께 왕조가 끝이 났으며, 동로마 제국은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죽은 457년에 끝이 나고 레오 왕조로 대체된다.
제국의 분열 (395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은 이로써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395년부터 408)
호노리우스(재위 395년~ 423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아르카디우스의 동생)
⑤ 서로마 제국의 쇠퇴 (395년–476년)와 멸망 (476년)
서로마 제국(Imperium Romanum Occidentale)
285년부터 476년까지 유럽에 존재하던 제국이다. 395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완전 분할되어, 생겨난 옛 로마 제국의 서부를 통치하였다. 그러나 황제에게는 실권이 없었고 게르만족 군인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이상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국을 동서로 나눠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는데, 서로마 제국은 이때 만들어졌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오도아케르에게 이양하고 476년 결국 멸망한다. 이 사건으로 고대 로마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의 붕괴 요인으로는 군사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이 로마 붕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Romulus Augustus,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Odoacer,이탈리아의 왕. 재위 480-493)
SPQR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한다)
이 말은 주화, 그리고 돌이나 금속으로 된 국가 비문에 끝부분, 공공 사업이나 기념물의 헌정문, 로마 군단의 군단기에 나온다. 이 문구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연설문이나 티투스 리비우스의 역사서 등 로마의 정치, 법, 역사 문헌에서도 수없이 등장한다. 오늘날 로마 시의 모토이며, 이 곳의 도시 문장, 시내의 수많은 공공 건물, 공공 분수, 맨홀 뚜껑에서도 보인다.
⑥ 비잔티움 제국 (476년-1453년) 과 멸망 (1453년)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린다.)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한다. 61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로마에서 예전의 로마적인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내에서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특히 그리스어를 정부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라틴 문화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610년대 이후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에 들어갔으며, 이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를 함락시키자, 동로마 제국은 그 명맥이 끊어졌다.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가톨릭 세력을 몰아냈다.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할 때인 1453년까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 불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Caesar of Rome / Kayser-i Rum)라 일컬었으나,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이다.
로마 제국의 분할
서방 영토 재정복
줄어드는 영토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이사우리아인 왕조에서 바실레이오스 1세 즉위까지
마케도니아 황조와 제국의 최전성기
무슬림과 제국의 전쟁
불가리아와 제국의 전쟁
키예프 루시와 제국의 관계
콤네노스 황조와 십자군
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요한네스 2세 마누엘과 제2차 십자군
12세기의 부흥
쇠퇴와 분열
앙겔로스 황조
제4차 십자군
망명 정권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http://ko.wikipedia.org/wiki/%EA%B3%A0%EB%8C%80_%EB%A1%9C%EB%A7%88 고대로마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EC%A0%9C%EA%B5%AD 로마제국
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_%EB%AF%B8%EC%88%A0 로마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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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미술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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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3650-1100 BC)
| 키클라데스 문명 (3300-2000 BC) | 에게 미술 참조 | ||
미노스 문명 (3650-1170 BC) | ||||
미케네 문명 (1600-1100 BC) | ||||
고대 그리스 (1100-146 BC)
| 그리스 암흑기 (1100-750 BC · 1200-800 BC) | 참조 | ||
그리스 고졸기 (800·750·650-480 BC) | 폴리스의 성립과 성장 (750-500) | |||
그리스 식민지 건설 (750-500) | ||||
그리스 고전기 (510-323 BC)
| 아테나이 민주주의 (510-338) |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499-450) | ||||
아테나이의 패권 (448-430) | ||||
펠로폰네소스 전쟁 (431-404) | ||||
스파르타의 패권 (404-371) | ||||
레욱트라 전투 (371) | ||||
테바이의 패권 (371-362/338) | ||||
카이로네이아 전투 (338) | ||||
마케도니아의 패권 (338-323) | ||||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323-146 BC) | ||||
로마 제국 시대의 그리스 (146 BC-330 AD) | ||||
고대 로마 (753~476 BC)
| 로마 왕정기 (753~509 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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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기 (508~27 BC) | 공화정 초기 | |||
공화정 중기 | ||||
공화정 말기 | ||||
로마 제정기 (27 BC~476 AC) |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서기 14) | |||
티베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4–235) | ||||
제국의 분열 (235–395) | ||||
서로마 제국의 쇠퇴 (395–476) | ||||
비잔틴 제국 (476BC-1453)
| 비잔티움 제국 (476-1453)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14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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