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6부 고대 로마 미술 [ Roma Art ] - 1

草霧 2013. 2. 7. 15:18

 

 

 

 

 

 

 

 

 

 

 

 

 

 

 

 

 

 

 

 

2013년 계사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대 미술 7

 

 

복제와 변형 속에서 피어난 실용적 경향

 

 

6부 고대 로마 미술 [ Roma Art ] - 1

 

    

 

본 연재 글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유산의 응용과 변형

 

 

 

그리스 미술을 계승하여 실용적인 건축물과 사실적인 표현의 초상조각등을 남겼고 그들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미술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예술은 대부분 그리스 예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강력한 정치 권력 아래 그리스의 예술품과 예술가들이 로마로 유입된 것이다. 기원전 32세기에 이르는 전쟁 시기, 로마는 그리스와 헬레니즘 세계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오랜 전쟁이 가져온 정신 세계의 변화는 예술을 더 이상 즐거움의 도구로 여기지 않게 했다. 예술은 더욱 신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였으며, 대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로마 예술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공공의 성격을 띠는 공식적인 예술이 발달하게 된다.

    

 

로마의 철학은 능률적이고 조직력이 강하며 실제적이었다. 이런 철학에 따라 주로 발전한 부분은 건축 공학쪽이었다. 대표적 미술품은 모자이크. 사실적인 벽화, 이상화된 공식 조각상이 있으며 판테온이 유명하다.

 

로마 제국 (BC 27 395)

서로마제국(285-476)

비잔티움제국(330 1453)

 

 

그리스, 로마 미술에 대하여 (기원전 1400~395)

 

 

 

 

 

그리스

 

로마

승리 기념으로 신전 건축

열주 형태의 건축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신화 중심)

신 조각 발달

회화의 원작은 거의 소실

 

 

승리 기념으로 개선문과 기념비 건축

아치형 건축

싸우는 장면 묘사(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초상 조각의 발달

                          많이 남겨짐 (폼페이 벽화)

 

 

 

 

 

로마인들의 그리스 정복은 그리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의 미술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로마인들은 그들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미술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의 문화와 미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유사해 보이는 것은 바로 로마 시대에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스 출신이거나,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하고 모방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그리스 미술의 형식을 변형 발전시키며 자신들의 것으로 구축해 나갔다. 결국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스 미술의 맥을 이으며 서양미술의 모태가 된 것이다.

로마조각은 황제나 장군 등의 초상 조각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성격이 특색이다. (원래 그리스에는 초상조각 이란 것이 없었다. 그리스 조각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화된 인간상을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정이 확립되면서 사실적인 초상 조각에 변화가 생겼다. 황제 개인을 위한 기념물들이 성대히 만들어지면서 로마 조각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이상화의 경향을 띠게 된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로마의 조각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형식주의 조각으로 변하여 간다. 아우구스투스상, 카라카라, 아그리파, 케사르가 대표적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마상이 대표작이다.

 

회화는 그리스 미술과는 달리 선으로만 처리된 것이 아니라 색채나 명암, 모델링을 이용해 사물을 묘사하였다. 그들은 헬레니즘 미술가들이 쌓아 놓은 업적을 토대로 인물과 풍경, 정물 등을 자연스럽게 그렸다. 원근과 명암을 표현한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기법이 발달하였고 폼페이 벽화가 대표적이다.

 

건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띤 공공 건축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설립되었다. 로마 건축 역시 그리스의 건축을 계승시킨 것이어서 그리스 식의 열주식 건축과 에투루리아적인 아아치형, 사라렌적인 도움형을 융합시켰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콜로세움의 원형경기장, 바실리카 공회당, 콘스탄티누스 기념문등이 있다.

 

로마의 미술은 각지에 영향을 미쳤다. 사실 헬레니즘 문화를 제국의 각지에 널리 퍼뜨린 시기는 헬레니즘 시대가 아닌 로마 시대였다. 제국의 각 지역에서는 헬레니즘 양식에다 지역적 특성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들이 만들어졌는데 이집트에서는 미이라에 초상화가 그려졌고, 인도에서는 간다라 양식이 탄생하였다. 또한 로마의 이야기 나열식 부조는 기독교 미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적인 성격

색채와 명암으로 처리

 

 

그리스 지배했던 '로마'가 문화·예술은 정복당했다?

 

 

로마제국의 서막을 연 아우구스투스 황제(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내가 발견한 로마는 진흙으로 돼 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돼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 위용을 자랑하는 로마의 공공 건축물을 보면 그의 말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특히 공공건축, 공공미술, 실용미술, 선전미술이 발달했다. 건축 공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공회당, 목욕탕, 원형경기장, 바실리카 등이 전에 없던 대규모로 로마제국의 지배지 곳곳에 지어졌다. 이러한 건축공학과 토목공학 기술의 발달은 로마제국은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리스문화를 계승해 응용·변형시킨 로마문화

로마 건축물은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다. 황제의 위엄, 정치인의 공적, 군사적 영광을 묘사한 실용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완벽한 건축미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인류 최초로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제국 전체에 걸쳐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군사적 기념비와 공공시설물을 세웠다.

 

로마문화는 그리스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둔다. 선진문화인 그리스문화에 압도당해 무조건 모방하며 계승했고, 이어 응용·변형 과정으로 나아갔다. 그리스 미술을 복제하고 변형하던 과정에 로마인의 실용적 경향이 더해졌고, 이러한 로마문화는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로마가 정치·군사적으로는 그리스를 지배했으나, 문화·예술 면에서는 오히려 정복을 당한 셈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건물 입구나 창문에 쓰인 반원 모양의 '궁륭형 아치(Vault Arch)'. 로마는 그리스가 제시한 원과 삼각형의 기하학 개념을 활용해 아치 형태의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고, 우주를 상징하는 반구형 돔(Dorm) 지붕을 개발했다. 아치와 돔 지붕 양식에 석축으로 벽을 세우는 견고한 건축양식을 개발해 최초로 거대한 실내 공간을 받침대 없이 덮을 수 있게 됐다. 천장은 위로 높이 솟게 하여 넓은 내부 공간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그리스건축의 기하학을 더 발전시켜 원형, 타원형, 직사각형으로 구성된 복합적이고 곡선적인 건축 구성미를 추구했다. 이렇게 그리스건축을 변형해 만든 로마 건축물의 결정체가 바로 '판테온(Pantheon)' 신전이다.

 

판테온 신전, 기원후 118~126, 로마, 이탈리아.

 

로마미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판테온 신전

기원후 118~126년에 지어진 판테온 신전은 지금도 예배장소로 사용되는 고전시대의 유일한 신전이다. 높이 솟은 로툰다(반구형 지붕으로 덮힌 원형 홀)가 있으며,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로마의 구조적 창의력과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아그리파가 지었던 신전을 대신해 하드리아누스 황제(기원후 117~138)가 건립했다. 그리스문화에 사로잡힌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고전의 부활'을 강조하며 그리스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다. 지은 지 1900년이 지났어도 그 위용을 자랑하는 판테온 신전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인간이 아니라 천사의 디자인"이라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판테온 신전을 지은 로마인은 공학적으로 매우 과감한 시도를 했다. 총 무게가 5000톤에 이르는 둥근 돔 천정의 하중을 610두께의 벽이 지탱한다. 43m인 돔의 폭은 정확하게 원통형 벽체의 높이와 일치해 완벽한 조화와 비례감이 돋보인다. 원형과 정사각형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내부는 궁륭형 천정과 꼭대기에 하늘을 볼 수 있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어 창문이 하나도 없어도 위로부터 풍부하고 고른 빛을 받는다.

 

태양빛이 환하게 비추는 판테온의 실내는 경이로움과 따스함이 온전히 전해진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판테온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또 한명의 거장, 라파엘로가 묻혀 있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로 인기를 끌었지만, 자신의 천재성을 다 펼치지 못하고 아깝게 요절한 라파엘로의 흉상과 그 아래의 무덤이 조용히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대욕탕·수로·도로로마 건축기술이 발달한 배경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한 로마의 건국신화는 테베레 강에 버려졌으나 암컷 늑대가 젖을 먹여 키웠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시조로 한다. 지금도 로마 시의 상징은 이 암컷 늑대상이다. 건국신화를 기초로 볼 때, 전설상의 로마 건국 기원은 기원전 753421일이다. 이후 기원전 509년에 의회정치인 로마 공화정이 시작됐다. 기원전 44년에 로마 집정관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가 암살 당하고, 기원 전 27년에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기원후 14)라는 이름으로 초대 황제가 되면서 로마제국 시대가 열렸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150년간 로마제국은 평화로운 황금기를 누렸다.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 남쪽으로는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로마제국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아시아, 러시아 남부까지 정복하면서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미 기원전 3세기경부터 그리스와 교류했으며,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275년부터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맹주가 됐다. 기원전 146년에 서양문명의 근원이라 불리는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그리스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받았다.

 

기원전 27년에 세워진 로마제국은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됐다. 455년 고트족의 침입을 받은 다음, 동로마제국은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등극하면서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게 됐다. 비잔틴 제국은 1453,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함락되면서 멸망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메트 2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라 일컬었으나, 세계사에서는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콘스탄티누스 11세로 보고 있다.

 

'로마제국의 역사적 종말은 언제인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395년에 동서로마로 분할돼 서로마제국이 쇠퇴하고 비잔틴 제국이 성립된 476년으로 보는 견해와, 로마제국에 뿌리를 두고 로마 황제로 명맥을 유지했던 비잔틴 제국이 완전히 멸망한 1453년으로 보는 견해이다. 실질적으로는 330년에 로마제국 최초의 기독교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기면서 영광스런 로마시대는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천년의 제국'으로 불리는 로마제국은 전성기 동안 영토 전체에 걸쳐 거대한 정치적, 종교적 기념비나 공공시설물을 세우면서, 세계 곳곳에 로마 문화를 전파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 귀족과 시민들은 더할 나위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들의 화려한 생활모습은 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인 21세기에도 부러움을 살 만하다. 전 세계에 걸친 정복지에서 풍족한 물자가 공급됐기에 로마인들의 의식주 생활은 풍요를 넘어 사치스러웠다. 매일 밤 연회가 베풀어졌고 정복지 노예들의 시중을 받으며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기 위해 일부러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먹은 음식을 토해냈을 정도이다. 콜로세움에서 벌어지는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다. 또 로마인들은 목욕을 즐겨했는데, 공공목욕탕 시설을 지은 것도 로마제국의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354년 무렵, 로마에는 952개의 공공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가르의 수도교(Pont du Gard)’, 로마제국 시대, 기원전 25년경, 석조, 프랑스 님므

 

그 중 가장 유명한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탕'은 다양한 온도의 탕 속에서 1600명이 동시에 목욕할 수 있는 '대욕탕'이었다. 냉탕, 온탕, 한증탕(사우나), 체력 연마실, 마사지실도 있었던 복합시설로, 미술관, 실내 정원, 도서관, 강의실, 회의실, 오락실, 음식점, 상점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문화생활까지 제공하던 곳이다.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던 로마는 이러한 공공목욕탕 외에도 귀족들의 빌라 정원에 있는 분수와 인공호수, 해상 쇼를 위해 하루 2억 갤런의 물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로마에서 100나 떨어진 곳으로부터 수로를 건설해 중력에 의한 낙차를 이용해 물을 공급받았다.

 

기원전 312년에 로마인들은 세계 최초로 수로와 도로를 건설했다. 기원전 25년경 프랑스 님므 지방에 만들어진 '가르의 수도교(Pont du Gard)'는 로마 건축 공학 기술의 경이로움을 대변한다. '가르의 수도교'40밖에서 물을 끌어 오는 데 중력의 힘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아치 길이가 25m, 강바닥에 닿아 지지대 역할을 하는 아치는 2톤 무게의 블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49m에 이르는 3개 층의 석조 아치로 구성됐으며, 각 층의 아치는 크기 비례를 다르게 하고 있다. 위층으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실제로 물을 나르는 맨 꼭대기에는 작은 아치가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실용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공건축물 공사에 있어서도 미학적인 완벽한 건축미를 추구한 로마의 건축적 특징이 돋보인다.

    

 

 

그리스미술을 바탕으로 실용성과 현실성 중시한 미술의 특징이 로마다

 

 

 

그리스 문화의 계승

 

그리스는 로마에 정복당했으나 로마의 문화는 그 전부를 그리스에서 배웠다.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의 문화와 미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실증주의

 

자신들의 현실적 실용주의를 그리스에서 물려받은 예술 유산 속에 접목시켜 이른바 `실증주의`라는 양식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실제 존재했던 인물의 정확한 사실적 묘사와 웅장한 건축물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마 말기(4세기)부터 사실적 묘사 거부(중세 미술의 핵심을 잉태하기 시작)

 

로마의 건축

 

a. 로마 미술을 가장 적절히 표현 _ 파테론(만신전), 콜로세움, 개선문, 대중목욕탕, 거대함, 기념비적 비종교적 건축물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b. 건축공학 _ 공리성, 규모의 장대함, 아치, 둥근볼트, 건축자재

c. 실용적인 토목공학 _ 포장도로, 다리, 터널, 하수구, 운하

d. 실용성을 중시 _ 거주성에 기초를 두고 내부 공간에 충실하였다. 기둥과 들보로 이루어진 그리스 건축과 에트루리아의 분묘나 성문에 사용한 아치형식 또는 궁륭식(穹式)을 채용함으로써 수많은 기념비적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조각

 

 

 

조각은 그리스의 영향이 특히 뚜렷한데 BC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파시테레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의 조각가가 로마에 초대되어 이곳에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로마의 평화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조각, 예컨대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공적인 미술이며 비너스의 돌고래에 큐 피트가 올라타고 황제의 공식 초상 옆에 따라붙은 것은 아우구스투스야 말로 카이사르의 적통을 이어받은 율리우스 가문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속뜻이 숨어 있다. (바티칸미술관 소장)

    

아우구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업적과 평화의 상징하며 공공 조각으로 등장했다.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의 부조(浮彫) 은아우구스트가 갈리아와 스페인 원정에서 승리한후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원로원이bc13년에 시작 4년 뒤에 완공 제단과 비슷하며 그리스의 고전적 단정함과 로마의 사실성을 융합한 초기의 걸작이다.

 

 

 

 

 

 

 

Aqueducts(tnfh)

 

로마인의 정교한 솜씨를 볼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과거 이곳은 세고비아로 먹을 수 있는 물을 전달해주는 중요한 수로였음이 분명하다. 중요했던 만큼 로마 수로교는 폭우이나, 지진, 태풍에도 견딜수 있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20,400개의 돌벽돌을 쌓아 올려진 것으로 순수한 돌로 석회 성분이나 콘크리트 성분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돌벽돌은 완벽한 평형을 이루어 쌓여 있어서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스스로 유지해온 것이다. 길이는 약 800m, 높이는 30m이며 167개의 아치로 되어있다.

 

로마 조각의 경이적인 분야는 초상조각이다. 초상에서는 입상(立像)과 더불어 새로이 흉상·기마상·묘비상이 제작되었으나, 이것들은 모두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개개 인물의 성격을 예리하게 추구하였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키케로, 카이사르의 흉상,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입상,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 등이 있다.

 

트라이아누스 기념주

 

 

로마인은 또한 기념주를 만들어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부조로 새겼다. 높이가 40m에 달하는 거대한 기둥이다. 기둥표면을 나사모양으로 둘러가며 띠를 형성하였는데 200m에 달하는 이 띠엔 트라이아누스가 수행한 전쟁의 기록을 부조로 묘사하였다.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면서 반인반수나 거인족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적을 암시한 것과는 달리 로마인은 황제가 다치아와 직접 싸우는 장면을 묘사하였으니, 이는 신화보다 인간의 역사를 중요시 여기는 결과일 것이다.

    

 

콜로세움 

 

 

 

공공의 행사장소로 5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콜로세움은 거대한 원형의 단일 건물이다. 아치 사이에 그리스 식의 기둥이 있지만 건축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단지 장식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내부는 현대의 운동 경기장같이 스타디움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티투스 개선문

 

 

그들이 예루살렘 점령 후 전리품을 들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부조를 새기고, 아치 안에는 독수리로 로마황제를 상징하였다. 로마인에게는 승리와 개선이 최고의 명예였다. 티투스의 신격화

 

 

 

실라초상

기원전 82년부터 4년 간 로마를 통치하였던 독재자 실라의 초상이다. 독재자로서의 권위보다 마른 얼굴에 집요한 성격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어서, 그리스의 인물상과는 매우 다른 로마의 초상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초상 

 

 

섬세한 얼굴에 예민한 성격의 개인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지만 주름까지 나타내던 이전의 로마초상과 달리 얼굴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어 미화시키고 있다. 국가를 황제체제의 로마의 평화시기로 정립시키는 시기에 그리스방식을 적용시킴으로써 황제를 정통화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상화켜 우아하고 세련된 헬레니즘 양식으로 잘 포장되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2세기 후반부터 로마는 그들이 정복한 변방의 민족들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리고 이 시대의 미술엔 특히 이러한 비참함이 강하게 배어있다. 눈동자와 머리칼, 그리고 옷자락을 깊게 파는 표현주의적인 조각기법은 참담함을 나타내는데 적절한 새로운 양식이 되었다.

 

헤라클레스 모습의 콤모두스황제 

 

 

콤모두스 황제는 변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원로원이 경기장에서 세월을 보내어 국가를 더욱 위기에 빠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더욱 강한 황제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헤라클레스에 비유하였다.

 

콘스탄티누스황제 초상중 두상부분 

 

 

4세기 전반, 황제는 절대자가 되어갔다. 황제상은 더 이상 특정 인물을 닮은 초상이 아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초상은 높이가 2.6m에 달하는 실로 큰 두상이지만 이 또한 거대한 좌상의 일부이니 실제의 황제상은 거의 12m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황제상은 인간의 상이기보다 숭배의 상이 된 것이다.

 

바실리카

 

 

로마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 집회장으로 사용된 건물이며 교회건축 형식의 기조를 이루었고 로마네스크와 고딕식 성당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에서의 교회당 형식으로 로마 건축에서의 바실리카 형식이 옴겨져 후일까지 도교 교회의 형식으로 계속되었다.

   

 

로마신화(Roman mythology)은 그리스 신화와 왜, 같이 다루어지나?

 

 

그리스 신화 신화 · 신비 가르침 · 신플라톤주의에서 그대로 옮긴 것과 신화 · 태양신 숭배 · 황제 숭배 · 미트라교종교적인 성격이 짙은 기능을 수행한다. 로마 사람들의 이러한 그리스 문화 숭상주의는 그리스가 쇠퇴하여 망하게 된 후에도 그리스 문화와 신화가 로마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흡수되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로마가 그리스의 신화를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레 신화라는 이름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토속신화와 합쳐지고 신들의 이름만을 바꿔 로마만의 신들 이야기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부분 신들의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던 그리스 신화는 로마의 토속신화와 합쳐지며 많은 부분에서 인간 위주의 사건에 신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는 신화로 변질되게 된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자 옛날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이 불었고 이 운동의 여파로 그리스와 로마의 시대를 공부하자는 열기가 불붙게 된다. 이후,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명화들을 비롯하여 문학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의 스토리와 탄생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연히 그리스와 로마신화를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이는 그리스와 로마신화를 전세계로 수출하는데 일등공신의 역할을 한다.

 

 

 

 http://ko.wikibooks.org/wiki/%EA%B7%B8%EB%A6%AC%EC%8A%A4_%EB%A1%9C%EB%A7%88_%EC%8B%A0%ED%99%94

   

 

그레코로만으로 승화 된 실용주의, 로마

 

 

 

 

기원전 8세기경부터, 북방의 에트루리아 미술과 반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싹이 트고 발전한 것이다. 로마는 현실적·행동적인 요소를 에트루리아인으로부터 받아 계승하면서 그리스적 형식을 모방했다. 로마의 미술에서 보여지는 리얼리즘의 형태는, 신전 건축과 조각·회화 등에 있어서 그 형식을 그리스에서 찾으면서도, 그 정신에 있어서는 에트루리아적이다. 처음에는 에트루리아의 영향에서 출발했지만 공화정 말기 이후 헬레니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얻은 그리스의 영향은 로마 세계를 풍미하고 소위 '그레코로만(Greco­Romna) 시대'를 가져오게 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를 정복한 이래, 매우 많은 수의 그리스 조각이 로마로 운반되었다. 다수의 그리스 예술가가 로마에 초빙되어 그리스 명작을 모방했다. 청동의 원작은 대리석에 되새겼고, 그것들은 로마인의 취미나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주의적인 경향으로 약간 변경되어 갔다. 회화에 있어서도 이 경향은 같아서, 폼페이의 벽화에도 헬레니즘 회화의 모방과 비속화가 눈에 띈다. 로마시대에 개성적인 초상 조각이 발달하고, 거대하고 실용적인 공공 건축이 서로 이어서 건조된 것도 헬레니즘시대 정신과 에트루리아적 정신과의 융합의 결과이다. 로마 미술은 이 두개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한 것으로서, 그 특징으로는 국가 권력에 수반하는 지리적 확대에 상응한 규모의 크기, 주제의 다양성, 사실성 등을 들 수 있다.

    

 

로마 건축

기둥과 들보로 되는 그리스 건축의 구성과, 에트루리아의 성문이나 분묘에 쓰이고 있는 아치형을 채용함으로써 기념비적인 건축을 건조했다. 그리스의 도리아·이오니아·코린트식 외에 이오니아식 주두와 콘크트식 주두를 합친 콤포지트(composite) 양식, 도리아 양식의 변형으로서 주초가 있고 홈을 새기지 않은 토스카나 양식이 생겨났다. 외관상의 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 달라서, 로마 건축은 내부 공간의 충실을 기하고 있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인은 내부의 거주성에 중점을 두고, 내부를 넓게 하기 위하여 벽돌로써 아치형을 사용했다.

 

대표하는 거대한 건축으로는 콜로세움·판테온·수도(水道목욕장 등이 있다. 콜로세움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원 72년에 기공하고, 그 아들 티투스제가 80년에 완성한 타원형의 대투기장이다. 로마 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판테온은 고대 로마 최대의 원개 건축이다. 현존하는 신전은 기원 120년경까지 하드리아누스제()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외관은 극히 간소하여, 충실한 내부의 아름다운 공간과는 대조적이다.

 

로마 건축에 있어서의 모뉴먼털리티는 실용성과, 주제의 다양성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 카라칼라 황제의 욕장,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탑, 가르드의 다리 등이 알려져 있다.

    

 

로마 조각

그리스 미술의 영향에서 출발, 그것을 로마인 특유의 현실적인 소질과 조형 의욕 속에 동화시키고, 점차로 로마 조각이라는 독자적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기원전 1세기경은, 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여서 미술사상 그레코로만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를 그었다.

    

 

 

초기 조각은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그리스를 정복 후, 고전의 명작을 모방시켰다. <로마의 웅변가>(루브르 미술관)의 상 _ 클레오메네스 작이 있다. 또한 초상 조각에는 로마 조각의 훌륭한 독창성이 보이는데, 그것은 단순한 용모의 모방이 아니라 성격 묘사의 교묘한 점인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티투스 황제, 카라칼라 황제와 같은 역대의 황제 초상에서는, 거친 풍모 속에 잔인한 성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재위 전 2714) 시대의 조각은, 극단적인 것이나 추악한 것까지도 추구한 헬레니즘 예술에 대한 반성으로서, 단정하고 고전적인 양식으로 복귀하려는 현상이었다. <프라마 포즈타의 아우구스투스 상>(바티칸 미술관), <아라 파키스>(평화의 제단)의 부조(테르메 미술관), <아우구스투스 상>(루브르 미술관) 등은 그리스의 고전적인 단정함과 로마적 사실성을 교묘히 융합시킨 초기의 걸작이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기념문(315)이나 트라야누스 기념탑(113114)은 대표적이다.

    

로마 시대의 부조는 그리스의 조소성과는 달리 회화성이 강조되고, 빛과 깊은 그림자로써 격정적인 표현 효과를 추구했다. 후기의 부조에는 특히 이 경향이 강하여, <루도비시의 석관(石棺)>(테르메 미술관)이나 <가라테아인() 석관>(카피톨리노 미술관)의 부조는 동방적 정신에 영향받은 중세적 표현에 가깝다.

    

로마 회화

헬레니즘 회화의 수용에서부터 시작한다. 폼페이 및 헤르쿨라네움에 남아 있는 벽화를 통하여 헬레니즘 시대 및 로마 시대의 회화를 알아낼 수가 있다. 프레스코 및 모자이크에 의한 그들의 화풍은 헬레니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감각적이며 신비적이고 산문적인 주제가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 화가인 필록세노스의 걸작 <잇소스의 전쟁>을 모자이크로 한 작품이 있는데 이것은 고전 말기의 양식을 전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프레스코로 된 유명한 <디오니소스의 밀의(密儀)>(폼페이)<텔레포스의 유아(幼兒)>(나폴리 미술관)는 헬레니즘 시대의 양식에, 이탈리아적인 취미를 가미한 새로운 양식이었다. 디오니소스의 밀의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믿었던 밀교인데, 화려하고 붉은 색의 배경에 신앙생활의 신비적인 경향이 묻어나 있다. 그리고 <텔레포스의 유아>에서는 아르카디아를 상징한 거대한 여신의 발 밑에서 텔레포스가 무심하게 사슴의 젖을 마시는 자태와 그의 아버지 헤라클레스의 강인한 자태가, 인간적 감정을 혼입하여 회화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또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에 있어서는 대개 생각할 수 없는 풍경화·정물화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가 이 시대에 탄생했다.

1양식은 벽면이 대리석으로서 중앙부와 소벽, 벽의 아래 부분에 둘러댄 판자의 세가지로 되어 있는 듯이 보이는 방법인데, 원근법을 쓰고 있기 때문에 벽면이 부각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2양식은 공화제 시대 로마에서 많이 쓰인 양식이다. 이것은 제1양식을 다시 복잡하게 하고, 이오니아식이나 코린트식의 기둥을 사용하여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고, 어디까지나 거기에 다른 방이 잇달아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키도록 그려져 있다.

 

3양식은 이른바 제정 초기 양식이라고도 불리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시기에 널리 사용된 양식으로서, 좌우에 배치된 기둥 사이에서는 중정이 보이고, 멀리 아름다운 건물을 그리는 등 그 위에 복잡한 원근법을 써서, 세부의 장식은 더욱 화려하게 하였다. 이 양식의 특징은 그 모티프에 사발이나 영락이나 당초 등 이집트의 모티프를 많이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취미는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 로마인 사이에서 유행하고, 모자이크의 정물화나 풍경화에도 자주 쓰이고 있다.

 

4양식은 63년의 지진 이후의 건축에 흔히 보이는 양식인데, 환상적인 표현을 지닌다.

 

로마 공예

도자기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23세기에 걸쳐서 제작된 알레츠오 도자기이다. 이것은 신들이나 영웅의 이야기를 틀에 눌러서 만든 부조로 나타내고, 그것에 적갈색의 유약을 바른 도자기이다.

    

 

유리그릇

유명한 <포르트란드의 바즈>와 같은 기술의 정치를 극한 카메오 유리(대영 박물관) 등은, 귀족 사이에서 애용된 것인 듯하다.

    

 

카메오

줄무늬의 마노 처럼 반투명한 상층에 암색의 색층으로 된 보석에 인물이나 그 밖의 것을 부조한 것이다. 그 중에는 <생트 사페르의 카메오>(파리 카베네 데 메다용), <아우구스투스의 카메오>(비엔나 미술사 박물관)가 특히 이름 높다.

    

금공품, 청동제품은 우미한 곡선이나 공상적 동물·식물 등에 의하여 장식되어 있는 예가 많고, 당시 로마인의 호사와 화려한 것을 즐기는 생활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보여지는 지나친 장식품은 우상을 부정한 중세 미술에 있어서 한층 고조되어 간다.

 

 

 

 

 

고대 로마 미술 1부 끝. 2부 계속

 

       

  

 

 

2013년 계사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