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미술 5
유럽 문명의 시발점
5부 에게 미술 [ Aegean Art ]
에게 해에서 문명이 싹트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신권사회에서 미술은 어느시대 보다 장엄하게만들어졌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정형화된 형태가 쉽게 변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현재의 그리스 지역에서 발달한 에게 미술은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지역은 그리스 동남쪽의 키클라데스 제도, 크레타 섬 그리고 그리스 본토인 미케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고분을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속적인 즐거움이 묻어있는 미술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서구의 고대신화가 펼쳐지고 서양 미술의 고전을 이루는 그리스라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B.C 3천 3백년경 에게해(그리스, 소아시아 반도의 서해안 및 크레타 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바다)에 있는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군도, 트로이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미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지역 중에서도 크레타 섬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달했고, 그로인해 교통의 발달과 함께 자연스럽게 미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이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를 통한 상업 활동에 집중하였고, 상업 활동에 쓰이는 도자기류와 같은 미술작품들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의 미술 작품의 특징은 밝고 화려한 느낌을 줍니다.
또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어서 미술작품들도 단지 보고 즐기기 위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크레타는 기원전 1400년경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또 그리스 고대 도시인 미케네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러나 크레타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미케네에 의해 계속 발전하게 되고, 미케네 미술은 후에 그리스 미술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그리스 미술이 서양 미술의 기초가 되므로 크레타 미술, 크게 보면 에게 미술은 서양미술의 모체가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미노스왕의 미궁’이 깨워나다 에게문명의 세계는 과수재배와 해상교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것이었으며,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오리엔트와 그리스, 즉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그 존재는 19세기 중엽까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독일의 고고학자 H.슐리만에 의한 트로이 ·미케네의 발굴과 영국의 고고학자 A.J.에번스에 의한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의 발굴 등에 의하여 차차 명확하게 되었다.
그리스와 에게 해에 있었던 청동기 시대 문명이다. 에게 문명은 서로 교류하던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 세 개별 지역의 문명을 이르는 말이다. 청동기 시대 초기에 크레타 섬에 미노스 문명—크레타 문명이라고도 한다—이 들어섰으며, 키클라데스 제도와 그리스 본토에는 각자 고유한 문화가 있었다. 초기 헬라딕 시대에 키클라데스 문명은 그리스 본토까지, 그리고 중기 미노스 시대에는 크레타 섬도 그 영향권이었다. 기원전 1450년(후기 헬라딕, 후기 미노스 시대)부터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이 크레타에 진출하였다.
19세기 중엽만해도 전설 속에 묻혀있던 에게 문명을 1870년 하인리히 슐리만이 소아시아 서북부에 있는 트로이아로 지목되는 곳을 비롯하여 9개의 성채와 도시를 발견했다. 이에 1900년부터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는 크레타 섬 북부에서 크노소스를 발굴하여 '미노스왕의 미궁'으로 알려진 궁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트로이아 전쟁의 사실성이 확실해지고 그리스 문화보다 앞선 시기에 에게 해 주변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성립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에반스는 크레타 섬 발굴에서 선형 문자(線上 文字)가 기록된 여러 점토판 문서(土版 文書)를 발견하였다. 1952년 벤틀리스는 선형 B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여 미케네 문명에 관한 연구가 획기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에게 문명은 미노스 문명과 그리스와 트로이를 포함한 미케네 문명으로 크게 구분한다.
서양문화의 싹, 키클라데스 미술 (Cycladic civilization, 3300-2000 BC)
이집트의 고왕국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기원전 2700년 경 에게해 동쪽의 작은 섬들에서는 청동기 문명이 독자적으로 꽃피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키클라데스 또는 시클라데스 제도 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아래 조각품 같은 단순하고 우아한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눈, 코, 입의 구체적인 형태없이 코 부분만 조금 높이거나, 사각형의 상체에 단순한 선각 만으로 팔을 나타낸 절제된 미감이 실로 돋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추상화되어 있는 이 우상들은 20세기의 추상조각, 특히 브랑쿠지의 조각형태를 생각나게 한다.
크레타섬, 키클라데스제도, 그리스 본토의 남부,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치는데, 크레타로 대표되는 남방계의 도서문화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의 본토문화로 나눠진다. 이 지방은 다도해(多島海)로서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기후도 온난하여, 포도 ·올리브 등의 천연산물이 풍부하므로 인간의 정착 지역으로 적합하였다.
특히 선진사회인 오리엔트문화권과 해상교통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일찍이 개화되어 고도의 문명이 성립되었다. 인종적으로는 비(非)아리아계의 소아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혼성민족이었으나, 민족이동의 결과로 아리아계도 섞이게 되었고 지역에 따라 인종이 달랐다.
미노타오르스의 고향, 미노스 미술(Minoan civilization, 기원전 3650~기원전 1170)
또는 크레타 문명은 키클라데스 바로 남쪽에 있는 크레테 섬에서는 훨씬 세련되고 평화로운 문명이 발전합니다. 전설적인 왕인 미노스를 본따 미노스라 불리는 이 문명은 지중해 동쪽 전 지역을 포괄하며 번창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전의 시대를 말해주는 이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구전문학을 통해 신화로만 전해져왔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레이만이 미케네와 트로이를 발굴해 냄으로써 허구로만 받아들여졌던 호머의 서사시가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크레테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중앙집중식의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이 곳에서 발굴된 크노소스 궁전만 보더라도 이집트의 고분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외관의 일관성을 찾기는 힘듭니다. 도4의 도면을 보면 미로처럼 작게 구획된 방들이 겹겹이 싸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서는 이 곳을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으로 묘사했는지도 모릅니다.
생활공간 보다 사후세계의 무덤을 더 크게 지은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중요시 여긴 반면, 크레테인들은 궁전을 아름답게 지어 현세를 즐겼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회랑은 건물 내부공간과 외부를 원활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하여서 사계절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의 생활방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회랑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면 방들은 경쾌한 프레스코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옥좌의 방>은 아마도 왕의 집권실이었겠지요. 옥좌 양쪽엔 그리핀(griffin: 반은 사자, 반은 새 모습의 환상적인 동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여 옥좌를 더욱 권위있게 하였습니다. 환상적인 동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주제2에서 살펴 보았듯이 메소포타미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왕을 보호한다는 암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왕후의 메가론>이라 불러 온 방은 아마도 중요한 방문객을 맞이하였던 접견실이었다고 짐작됩니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는 돌고래의 모습이 아주 경쾌하죠? 궁전 내부를 자신들과 친숙한 소재로 이렇게 밝게 장식한 민족은 미술의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듯 싶습니다.
그럼 궁이 아닌 집들은 어떠했을까요. 크레테 섬 북쪽에 있는 테라섬(Thera, 현재의 Santorini)에서는 당시의 집 몇 채가 그대로 발굴되어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집은 기원전 2000년대의 중반에 일어난 화산폭발에 의해 화산재로 덮여 있다가 1976년에 발굴되었습니다. 기원 후 79년에 화산재로 덮였다가 19세기에 발굴 된 로마시대의 도시 폼페이처럼 말입니다.
프레스코 벽화가 시대를 증언한다
이 집의 한 방은 도10과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방에 남아있는 벽화를 한번 봅시다. 낚은 고기들을 엮어서 들고 가는 소년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제단(방 왼쪽 코너)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들은 생선을 봉헌물로 바치고 있는 듯 합니다. 잠시 양식을 볼까요? 이집트 벽화의 인물같이 이들도 측면의 얼굴, 정면의 어깨, 측면의 발을 하고 있어서 이 시대의 이집트와 에게는 공통의 양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지요? 이집트 인물은 엄격한 법칙에 의해 그려진데 비해서 이 소년은 윤곽선이 좀 더 자유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도10의 왼쪽 소년은 정 측면으로 그려지기도 하였습니다.
프레스코 벽화는 방 남쪽 벽 윗 부분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니 어떻습니까? 항구도시의 활발한 모습이 생생하지요. 벽돌로 쌓아 지은 집들은 굴곡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슴들이 사자에게 쫓기고 있군요.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는 돌고래가 튀어 오르고, 마을 앞 바다에는 배가 두 척 보입니다. 줄 지어 노를 젓는 가운데 배와 짐과 카노피가 있는 왼쪽의 배, 작은 함대라고 추정되는 이 배들에 탄 사람들은 화면 왼쪽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을의 사람들도 집 앞의 문이나, 옥상에서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함대의 행렬이나 볼 만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크레타 문명의 또 한가지 특징은 거대한 신상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발견되는 것은 뱀을 들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 정도입니다. 이는 아마도 여사제를 형상화한 도기라고 추측됩니다. 또한 에게 미술에서는 소가 자주 등장합니다. 황소 등을 타고 넘는 곡예의 장면을 보면 황소가 무섭기 보다 마치 인간이 동물과 함께 즐기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이 조각으로도 많이 제작된 사실에서 미루어 보건데 이는 일종의 의식이었던 듯 싶습니다.
에게 미술의 규모는 이집트나 서아시아 지역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지역의 미술이 따뜻하고 자유분방하여 인간의 평화로운 삶을 느끼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7의 도기 전면을 휘감은 문어의 모습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유롭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도18 도기의 <추수>장면을 보면 수확을 하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농부들의 즐거워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이처럼 세련되고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 드러났던 크레테 문명은 기원전 1400년경에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습니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화산폭발이나 지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황소 예술, 크레타 문명
거대한 신상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에게 미술에서는 소가 자주 등장하는데, <황소 위로 뛰어오르는 곡예사>나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 내에 있는 <황소와 곡예>라는 벽화에서도 친숙한 황소를 볼 수 있습니다. 등장하는 황소가 무섭게 표현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 제사나 의식을 위한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에게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이 유명하며, 크노소스 궁전 내에 있는 <황소와 곡예> 벽화, <황소 위로 뛰어오르는 곡예사>, 그리고 뱀을 들고 가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는 <뱀을 든 여신>상도 있습니다.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 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말이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한사람의 꿈으로 깨어난 문명, 크레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이 한번 들어가면 두번 다시 나올 수 없는 미궁을 지어서 거기에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두었다고 한다. 신화의 세계에서만 있었던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이라고도한다)은 1900년에 시작된 그 리스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의 발굴에 의해 역사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에게해 문명 은 크노소스와 산토리니 섬의 발굴에 의해 좀더 명화해 지고 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등 고대 그리스의 신화가 탄생하다, 미케네 미술 (1600-1100 BC) 평화롭고 경쾌한 크레테 섬의 미노스 미술과 비교해 볼 때 그리스 본토에서 전개된 미케네 미술은 훨씬 경직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항아리의 변형이라 볼 수 있는 문양을 보면 같은 문어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살아 꿈틀대는 듯 하던 문어는 좌우 대칭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변해 있습니다. 도20의 입이 넓은 항아리도 미케네의 군사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미노스 미술과 미케네 미술에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민족성의 탓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 경계해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미케네 미술의 대부분은 크노소스 왕궁보다 800년이나 지난 기원전 8세기경에 제작된 것이었으니까 시대적 변화라는 측면도 고려해야겠습니다.
사자문 미케네 미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자문>은 성벽의 한쪽 문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1250년 경에 성벽을 재확대하면서 놓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리스 본토는 북방민족의 침입이 잦아 성벽이 발달했는데 성문 위에 이러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설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자국민과 이민족 모두에게 향한 군사적 과시이니까요.
이 <사자문>은 지난 세기 동안 고고학자들에게 큰 관심이 되어왔습니다. 미케네에서 보기 드문, 거의 예외적인 조각이라는 점, 성벽은 거친 돌인데 반해 이 조각만 유독 고운 대리석이라는 점, 그리고 동물이 양쪽에 대칭적으로 있는 이러한 모티브의 출처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동물이 대칭으로 있는 모티브는 분명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원 기둥은 크노소스궁전의 원기둥과 매우 흡사합니다. 아마도 왕궁의 기둥으로 신성함을 나타내고 힘의 상징인 사자가 이를 받치게 함으로써 통치자의 합법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미케네 지역에 있는 <사자문>이 미노스와 메소포타미아의 특징을 공동으로 지니고 있음에서 보았듯이 지중해 동쪽은 문물의 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터키부근에서 침몰된 배는 도자기를 가득 채워 운반하고 있으며, 사이프러스에서 발굴된 도자기는 우리가 크노소스왕궁과 미케네의 <사자문>에서 본 좌우대칭 동물 모티브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한 매우 특징적인 분묘문화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래 납골당은 오랫동안 미케네 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돔형의 고분으로, 기둥없이 지어진 건축형태입니다.
마케네의 소 숭상 이 묘를 처음으로 발견한 슐리만은 이곳을 '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라고 이름하였습니다. 황금으로 만든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렇게 믿고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곳에서 발굴된 컵과 매장용 마스크를 봅시다. 물론 일상에서 쓰던 잔은 아니며 특히 소로 밭을 가는 모습과 투우를 벌이는 모습은 소와 관계된 의식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단축법을 사용하여 좁은 공간에 효율적으로 재현한 생동감 있는 모습이죠. 도29의 황금가면 역시 금을 두드려서 만든 것입니다.
죽은 이의 얼굴에 씌웠던 가면
여러가면이 서로 다른 얼굴 모습인 점에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죽은이와 닮게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케네 문명은 기원전 8세기 즈음 북쪽에서 남하한 도리아인들에게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본토로 상륙한 해양문명 특유의 현실적이면서도 낙천적인 기질은 그대로 그리스 미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전설 미노스와 그리스 본토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원전 15세기 중엽에는 미케네가 크노소스를 지배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미노스 문명이 몰락한 뒤에는 미케네가 에게 해의 패자가 되었다.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240~30; 일설에는 기원전 1260경)은 전설과는 달리 강대해진 그리스 본토의 소왕국들이 미케네를 맹주로 결합하여 소아시아로 진출한 대원정이었다. 미케네는 기원전 12세기에 결국 그리스인의 마지막 이주자인 도리아인에 침략을 받고 몰락하였다.
오리엔트 사회와 그리스 사회의 중간 단계 미케네는 미노스와는 달리 상무적이며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다. 정치적으로 공납제를 기초로 한 왕정으로 호메로스에 나오는 그리스의 여러 임금에 비하여 약한 편이었다. 공유지와 사유지가 공존하였는데, 공유지가 있다는 것은 즉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하다는 것을 말하며, 사유지가 있음은 평민이 경제적 자립을 누리고 있으며 미케네의 국왕이 오리엔트적 전제군주화하는 것을 억제한 요인임을 보여준다. 미케네 사람들도 제우스나 포세이돈 등의 후대 그리스 사람이 믿었던 신들을 믿었으나 미노스인들이 믿었던 뱀의 여신을 더 신봉했던 것 같다. 미케네의 사회구조는 국왕 밑에 귀족적인 전사계급이 있었고 다음에 관료인 서기, 그 밑에 상인과 농민이 있었으며 최하층에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는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렇듯 미케네 사회는 오리엔트 사회와 그리스 사회의 중간 단계였다.
상업활동이 향락적인 주술문화를 꽃피다 크레타 (미노스), 키클라데스.헬레딕(미케네) 문화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양 문화를 발달시켰다. 에게 문명 중 제일 먼저 발달했던 문명은 크레타였다. 크레타는 고대 오리엔트 지역과 가장 가까이에 있어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이들의 그림은 오리엔트 미술과 같이 권위적이지 않았다. 크레타의 벽화들은 밝고 화려하고 자유롭고 감각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현실적인 민족답게 이들의 그림은 단지 보고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BC1450년 대지진으로 크레타의 대부분이 파괴된 후, 미케네인은 지배자가 되면서 미케네 식으로 변형시켜 갔다. 이 들이 남긴 황금 가면이나 사자 머리 황금 술잔, 칼 장식 등은 자유롭고 역동적이었던 크레타 미술과는 대조적으로 형식과 주술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투우사> BC17~15세기 .크놋소스프레스코화 크레타(우아하고 역동적인 장식무늬) _ 미노스 궁전(크노소스 궁전),뱀의 여신, 항아리 등 키클라데스(단정함): 우상(풍요의 여신) 헬라딕(최초 그리스인 종족) _ 황금가면, 사자문, 세 여신, 사자머리 황금잔 등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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