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6부 고대 그리스 미술 [ Greece Art ] - 1

草霧 2013. 2. 6. 15:32

 

 

 

 

고대 미술 6

  

신과 인간의 이상적인 조화

  

6부 고대 그리스 미술 [ Greece Art ] - 1

   

 

 

 

고대 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됩니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출발했다.

 

그리스 미술은 광의로 해석하면 선사시대의 크레타와 미케네의 미술을 포함하며, 보통 그리스 미술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아르카이크 시기 이후부터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는 미술을 가리킨다.

    

이 미술은 선사시대에 속하는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그 후의 시대인 그리스 미술과 비교하여 미적 감각이나 미술상의 양식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것이며,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반드시 그리스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은 극히 조소적(彫塑的)이며, 간소하고 또한 장중(莊重)한 데 대하여, 에게 해 미술은 현저하게 회화적·공예적이어서, 기념비적인 조각은 근소한 예외를 빼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미술은 기원전 12세기경 갑자기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여 들어온 새로운 민족이, 원주 민족이 쌓은 미케네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후 잦은 이동과 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이 낳은 미술이다.

 

이 새로 온 민족은 그리스어의 도리아 방언을 쓴 연유에서 도리아인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의 침입에 의하여, 그들보다 먼저 이주하여 있던 아카이아인이나 이오니아인의 대부분은 에게 해의 섬들 및 소아시아 서해안에 이주했다. 여러 세기에 걸친 신구 종족의 재편성이라고 하는 혼란과 이동이 있은 후 그리스인은 기원전 10세기 말경부터 겨우 안정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여, 각지에 공동의 정치 체제로써 폴리스를 수립하고, 공통의 신들을 섬기고, 그들의 새롭고 독자적인 문화의 초석을 쌓았다.

 

원시시대의 그리스 조각도 다른 원시 미개의 민족처럼, 제물 숭배의 시대를 거쳐서 점차로 조각 본래부터의 모양을 갖추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옛 문헌에 따르면 초기시대에 있어서 크소아논이라 불린 최초의 조각상은 나무를 잘라서 소박한 조형(造形)을 시도하여 신상(神像)으로서 신전이나 성지에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양식은 극히 경직된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곧 이어 목조(木彫) 신상은 석상으로 바뀌고 후에 대()조각으로 발전해 갔다.

 

조각은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작품으로는 신전 본당(本堂)에 안치되어 있던 신상, 성지에 세워져 있던 신들이나 영웅상(英雄像), 봉납상(奉納像), 신전 건축의 장식 조각, 묘지에 놓여 있던 사자(死者)의 상, 묘비 부조(墓碑浮彫)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비종교적인 상으로서는 봉납자(奉納者) 자신의 상, 운동 경기의 승리자 상, 저명한 인물의 상 등이 있으나, 이것도 대부분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성지에 놓여진 것으로서, 종교적 목적과 무관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후대 예술가에게 영감의 대상, 그리스 신화

 

고대 그리스의 신과 영웅, 우주관, 그리고 그리스 고유의 종교 의례와 의식 행위의 기원 및 의미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한 부분을 이루었으며, 현대 그리스와 전 세계에 알려진 헬레니스모스 종교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현대 고전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신화를 토대로 한 연구를 통하여 고대 그리스의 종교와 정치 제도를 파악하고, 이러한 요소들이 신화로 만들어지게 된 생성 원리를 탐구한다.

도기 그림이나 봉헌물과 같은 구상 예술 작품에서도 내재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는 세계의 기원과 신, 여신, 영웅과 같은 다양한 인물의 삶과 모험, 전설의 생물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구비 전승을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오늘날에는 그리스 신화를 그리스 문학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문학의 근원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 호메로스와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었던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쓴 두 서사시 신통기, 노동과 나날에서 세계의 기원, 신들의 왕과 인간 시대의 변천, 인간이 겪는 불행과 제물 의식의 기원을 설명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서사시권에서 서사시의 일부인 호메로스 찬가, 서정시, 기원전 5세기의 비극 작품, 고전학자의 문서와 헬레니즘 시대의 시, 플루타르코스와 파우사니아스와 같은 로마 제국 시대의 저술가가 쓴 원문으로도 이어져 왔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드러난 여러 유물의 장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과 영웅들은 그리스 신화의 설명에 주요한 출처가 된다. 예를 들어 기원전 8세기경에 만들어진 기하학적 모양의 도자기에는 트로이아권과 헤라클레스의 모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고졸기, 고전기,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호메로스 시가와 다양한 신화적 장면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을 보충 설명하는 증거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명의 문화, 예술,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서양의 문화 유산과 언어 일부에도 그 영향이 남아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신화의 주제가 동시대에 갖는 의미 및 관련성을 찾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된 기독교는 신화의 유행을 제약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고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극작가, 음악가, 예술가들의 창조력과 영감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르네상스 초기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예술가들은 그리스 신화의 이교적인 주제를 전통적인 기독교적 주제와 나란히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그리스 신화는 라틴 매체와 오비디우스 작품의 유입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단테와 같은 중세 르네상스 시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북부 유럽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시각 예술의 주제로 채용하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그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에 영향을 받은 영국인의 예술적 창조력은 초서와 존 밀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즈를 통해 계속되었다. 프랑스의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고대 신화를 개작하면서 그리스 연극을 부활시켰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에 그리스 신화에 대한 저항이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신화는 극작가들에게 여전히 천연 그대로의 중요한 소재였으며, 헨델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는 리브레토로 쓰여지기도 했다.

    

18세기 말에 와서는 낭만주의가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그리스 문화의 뜨거운 열풍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에서는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 작품의 새로운 번역물이 출간되면서 동시대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키츠, 바이런, 셸리 등)과 화가 (프레드릭 레이튼, 로렌스 앨머 태디마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토프 글루크, 리차드 스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는 음악에 그리스 신화적 주제를 심어두기도 하였다. 토머스 불핀치와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영미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고전 신화의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최근에 와서는,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과 같은 극작가와 제임스 조이스 앙드레 지드와 같은 소설가에 의해 고전적 주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졌다.

    

문학적 근원

고고학적 근원

신들의 시대

우주 생성론과 우주론

그리스 판테온

신들과 인간의 시대

영웅의 시대

헤라클레스와 헤라클레이다이

아르고나우타이

아트레우스 왕가와 테바이권

트로이아 전쟁과 여파

철학과 신화

헬레니즘과 로마 합리주의

로마신화로 융화하는 경향

비교와 정신 분석적 접근 _비교 신화학

기원론 _ 로마와 그리스, 에르투리아 신화의 유사성

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의 주제

 

 

예술은 철학인가?

 

그리스 시대는 그들은 예술을 테크네(techne), 즉 합리적 규칙에 따르는 자기표현의 추진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예술은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합리적 제작규칙을 가진 모든 활동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의자나 가구를 만드는 수공업을 비롯하여 학문 활동도 예술에 포함되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테크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배후에 있는 기법과 이론을 연구하며, 창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 안에 있는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술은 단순히 제작하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정신적, 상징적 의미도 함축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진 예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유희 기원설에 기반한 예술은 한가한 시간에 유희를 즐기는 활동이었고, 노동기원설에 기반한 예술은 노동에서 기원한 활동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주술적 신앙에 기반한 예술은 동굴벽화에 그려진 제사장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기도하고 소망하는 활동이었다. 이처럼 예술은 모든 지식, 정신적, 신체적 준비와 훈련이 집약된 모습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생활환경에 맞춰서 이집트인들과 다른 형태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이집트인들은 광활한 사막이 있는 척박한 곳에 살면서 내적 불안감을 많이 느껴서, 그들의 그림은 여러 각도에서 보았던 시각적 정보를 분석해 사물의 본질적 특징을 드러냈다. 즉 이집트인들은 정면성의 법칙에 따라 여러 시점으로 사물들을 정면으로 그려 인간의 모습을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은 형태로 남기고자 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이 우연적이며 일시적인 인물의 동작이나 자세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았고, 추상적이며 기하학적 양식을 추구한 것에서 읽을 수 있다.

    

초기에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추상적 양식을 따랐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쳐 경제적, 정치적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또한 이집트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축복받은 땅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리스인의 그림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범신론적 친화관계를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철학을 배경으로 발전했다. 이 사상은 이성적인 회의와 현상유지에 대한 도전을 강조했던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결합해 지적이고 예술적이며 창조력이 넘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창조력이 넘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 미술은 시기에 따라서 다양한 양식을 선보였다. 초기 그리스 미술은 이집트의 영향으로 동물과 인간을 단순화하고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 기하학적 양식을 따랐다. 이것은 사실적 비례를 추구하는 아르카익 미술(Archaic)의 출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르카익 미술에서 젊은 남성 누드상인 코우로스와 옷 입은 소녀상인 코레는 인체를 조각한 초기 환조로 이집트의 경직스러움을 그리스적인 아르카익 미소로 표현했다.

 

이후 고전주의 미술과 헬레니즘 미술을 거치면서, 그리스 미술은 형식과 조화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를 강조하듯, 그리스 미술은 균형미를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리스 미술 작품은 없으나, 문헌들을 통해서 그리스 미술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당시에 위대한 조각가인 페이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의 조형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했다. 그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파르테논 신상 안치실에 놓여 있던 금과 상아로 장식된 아테나상, 제우스상 등 거대한 청동상 등을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 미술이 추구한 회화의 사실적 세부 묘사는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도기화의 주된 주제는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 전쟁이나 잔치 같은 현세적인 주제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도기화의 제작에 쓰인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리스 도기화는 제작 방식에 따라서 흑색상 기법의 도자기와 적색상 기법의 도자기로 나뉜다. 초기에 흑색상 기법의 도자기가 유행했다. 이 기법은 인물 그림들을 대담하고 뚜렷하게 보이기 위해서 처음에 실루엣으로 그린 후 내부 표시점을 새겼고, 새김선을 따라 검은색 물감을 주입해 윤곽선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기법은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시작했으나, 새로운 기법이 출현하면서 퇴조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전통적인 색채도식 방법인 흑색상 기법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들은 인물들을 점토의 자연색으로 남겨 두고 배경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적색상 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 기법은 색채 사이의 강한 장식적 대비효과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붓을 사용해 큰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해부학적 묘사는 더욱 생생해졌고, 의복의 선은 더욱 부드러워져 도기화 내 그림들은 여유를 느끼게 했다.

 

특히 그리스 미술에서 과학의 의미는 신화적 요소가 결부되어 표현되었다. 주물 작업을 묘사한 그리스의 도자기 그림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스의 신, 헤라이스토스(로마신화에서 불카누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절름발이였는데, 금이나 놋쇠로 물건을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였기 때문에 땅의 창자에서 불을 빼와 금속을 녹였다. 또한 헤파이토스는 제우스의 번개와 벼락을 제공하는 키클롭스를 조수로 삼아 금속을 벼리던 대장장이의 신이었다. 도자기 그림은 최고의 대장장이(헤파이토스)와 아프로디테(비너스)가 서로 결합하는 모습을 통해서 과학과 미의 결합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스 미술은 예술의 의미처럼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으로 과학을 표현했고, 과학은 신화속 인물을 통해서 미와 결합했다. 그것은 창의로운 사고에 기반한 과학과 미, 즉 과학과 예술이 하나임을 상징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곧 정신의 아름다움인가?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한 작품입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인이 지향했던 예술의 목표가 가장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과 연관이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인체란 가장 아름다운 인체를 말하겠지요.....그리스인들이 지극히 조화롭고 균형잡힌 아름다운 육체를 지향했다는 것은 그들의 사고 방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아름다운 육체란 곧 건강한 신체를 의미하며, 건강한 신체란 곧 건전한 정신을 갖기 위한 필수 요소였기에 그들은 늘 건강한 신체를 갖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다양한 육상 운동을 일상화하고, 도시마다 혹은 국가적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육상 경기를 벌였습니다. 이 육상 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이 바로 예술 작품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미론Myron원반 던지는 사람이나 폴리클레이토스Polycleitos창을 든 남자혹은 헬멧을 쓴 사람(기원전 440년경) 등의 모델이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육상을 통해 추구했던 목표는 단순히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면의 정신을 수련하는 데 있었습니다. 건강한 신체를 통해 건전한 정신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됩니다. 

 

 

 

몸과 예술, 그리스는 알고 있다.

 

 

 

 

쉴러의 말대로 "아직 신들이 더 인간적이었을 때, 인간들은 더 신적이었다." 그리스의 대리석 신상들 속에서 인간의 신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미의 이데아)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렸다. 서구 예술에서 신체란 다른 여러 가지 속에 섞여 있는 하나의 제재에 불과한 게 아니다. 신체의 이상적 아름다움의 창조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적어도 현대예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구예술의 중심적 과제였다. 흔히 예술을 "자연의 모방"이라 할 때, '자연'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몸을 가리킨다. 그리스 조각은 그 자체가 인간이 자기 몸에 보내는 자화자찬의 감각적 표현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신인동성동형설. 헤브라이즘에도 신과 닮은 인간의 관념이 존재한다.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의 기독교는 신과 인간의 간극을 넓혀놓았다. 신은 더 높아졌고, 인간은 더 낮아졌다. 신적으로 되려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존재미학은 포기되고, 이와 연관된 이상적 신체의 찬미도 사라진다. 하지만 중세 후기 고딕예술에 이르면 다시 신과 인간의 거리가 좁아져 신은 더 인간적으로 된다. 범접할 수 없는 신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리스도는 이제 그 옆의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취급되고, 엄격한 최후의 심판자였던 그가 심지어 채찍에 맞아 만신창이 된 몸뚱이가 된다.

 

르네상스에 이르면 한때 신에게 겸손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던 인간은 이제 다시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리기로 결심한다. "육체의 완전성은 정신적 완전성의 모상으로, 나체는 순결과 진실의 모상으로 받아들여진다."(제들마이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인간의 신체가 그것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신적인 아름다움, 한 마디로 신이 된 인간의 몸이다. 하지만 그것은 글자 그대로 한갓 몸뚱이가 아니다. 르네상스적 신체에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이상'이라 불리는 정신의 아름다움이었다.

    

바로크 시대에 이르면 정신화되지 않은 신체, 성스럽지 않은 동물적인 몸이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회화에 등장하는 잔혹한 처형의 장면 속에서 순교자들은 더 이상 찬란한 신앙의 승리자가 아니라 죽음의 고통 속에서 신음소리를 내고 비명을 내지르는 가련한 동물의 몸뚱이다. 바로크의 몸은 에로틱한 몸이다. 상상 속에서 성자나 천사 혹은 그리스도를 만나 신성한 엑스타시에 빠진 성녀들의 표정은 오르가즘에 빠진 여인의 그것이다. 베르니니의 조각에서 첫 성(/)경험을 한 테레사의 몸의 진동과 전율은 옷자락을 타고 흘러내린다.

 

빙켈만이 '라오콘 군상'의 특징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인간의 육체의 표현에서 동물적인 것을 억누르려고 했던 것이다. 바다뱀에 온 몸이 휘감겨 죽음을 맞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끝내 평정함을 잃지 않는 그의 영혼의 위대함은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고전주의로 이어지는 신체의 이상미는 그저 형식적인 비례의 산물, 즉 프락시텔레스가 '카논'이라 불렀던 완전한 인체비례의 산물이 아니라, 육체의 동물성을 제압하고 그 육체의 곳곳에 정신성이 빛나는 현상이었다.

 

서구의 고전주의자들이 상찬하던 육체는 실은 자신들의 몸이 아니었다. 빙켈만에게 신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몸을 가진 것은 '근대인'이 아니라 '고대인'들이었다. 육체를 함부로 다루는 근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섭생과 육체적 단련으로 늘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가꾸며 살았다. 질병을 앓아도 그들은 신체의 왜곡을 가져오는 병은 앓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들에게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아무 변별력도 갖지 못했다. 모두들 하나 같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인 '자연의 모방'은 곧 아름다운 신체의 모방이었고, 모방해야 할 그 아름다운 신체는 고대인들의 신체였고, 고대인들의 신체를 보여주는 유일한 자료는 그들이 남긴 조각상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이상적 신체는 실제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에 속하는 몸이다. 실제의 인간의 몸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대부분의 인간의 벗은 몸은 외려 ''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바라볼 때 외려 역겨움을 준다. 19세기 사실주의 예술에서 인간의 몸은 드디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예술 속에 등장하는 몸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갖춘 신의 몸도 아니고, 고대의 칼로카가티아를 구현한 영웅의 몸도 아니고, 일상의 권태에 찌들고 노동의 힘겨움에 왜곡된 서민들의 추한 몸이다.

 

근대인들의 몸은 추하다. 기계 문명에 찌든 서구인의 몸은 이미 오래 전에 원시적인 건강함을 잃어버렸고, 이제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질 수도 없게 되었다. 이 잃어버린 몸을 찾아 고갱은 타이티로 떠났다. 그가 남국의 섬나라로 떠난 것은 곧 몸에 대한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의 도피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남성우월주의 미학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고대에서 근대 고전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몸이란 주로 백인 남성의 몸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갱은 타이티의 여인들을 그렸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인들은 오랫동안 서구의 예술을 지탱해 왔던 미의 이상을 잃어버렸다.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신념, 그 신념 없이는 인간의 이념은 확보될 수 없다." 한스 제들마이어의 말이다. 이 때문인지 현대예술은 비인간화된다. 이제 인간의 몸은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초현실주의에서 인간의 신체는 리비도에 가득 찬 동물의 수준으로 퇴화하고, 미래파의 예술에서 인간의 몸은 유기물도 아닌 '기계'로 전락하고, 입체주의에서 그것은 그나마 유기적 전체성마저 잃고 통일성이 없는 파편들로 해체되어 버린다. 이로써 '신을 닮은 인간의 몸'은 미술사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여기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바로 고대를 모방한 나치 예술이다. 나치들은 인간의 신체를 인간이 아닌 것으로 전락시킨 현대예술을 "퇴폐예술"이라 부르며 배척하고, 20세기에 느닷없이 고대의 인간상을 예술의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서 있는 나치의 조각상은 신을 닮은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그저 호전적인 고대 정복국가의 전사들의 상일 뿐이다. 제들마이어는 현대예술의 비인간화를 통탄하며 "인간의 영원한 상을 확립하고 재형성"할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오늘날 가능할까? 그 보수적인 견해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가 바로 나치 예술이 아니었던가?

    

오늘날 예술에서 '고전적 이상미'를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몸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외려 현대의 예술가들은 바로 그 고전적인 미의 이상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몸들을 의제화하는 경향이 있다. 일찍이 프랜시스 고야는 이성의 시대에 주변화된 광인들의 얼굴을 그린 바 있다. 아일랜드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마치 부화되다가 만 상태에서 깨진 달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이는 "기관없는 신체"를 그렸다. 이 신체 체험은 편집증, 분열증, 마조히스트, 마약중독자들의 것이라고 한다. 이 신체는 문명과 권력의 억압적인 코드가 기입되기 이전의 인간의 몸으로, 예술적 창조성의 바탕이 되는 원초적인 신체다.

 

 

이와 아울러 최근의 미술에서 ''에 대해 활발한 관심을 갖는 것은 페미니즘 계열의 예술이다. 과거에 몸의 아름다움은 남자의 몸의 아름다움이었다. 과거에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자의 눈으로 훔쳐 본 여체의 아름다움이었다. 식민통치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최후의 식민지로 남아 있는 여성들의 몸. 페미니즘 작가들은 고전적인 이상미에 내포된 남성우월주의에 반대하여 자기의 몸에 대한 여성들의 주권을 예술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가령 "내 몸은 전쟁터"라고 했던 바바라 크루거, 남자의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을 통해서 본 여자의 몸을 주제화한 신디 셔먼을 생각해 보라.                                                 _ 진중권

    

1. 에로스

플라톤 <향연>

미셸 푸코 <쾌락의 활용>

 

2. 타나토스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노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진중권 <춤추는 죽음>

 

3. 감각

플라톤 <티마이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4. 정념

르네 데카르트 <정념론>

스피노자 <에티카>

앨버트 허쉬먼 <열정과 이해관계>

데이비드 흄 <정념에 관하여>

 

5. 신체

노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미셸 푸코 <자기의 테크놀로지>

 

6. 미디어

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폴 비릴리오 <정보과학의 폭탄>

 

 

 

그리스 남성에 나타난 누드와 세계관

 

기원전 7~4C중반 세계관·미학 산물

 

서양미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누드 미술의 기원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주로 남성을 누드로 표현했다. 헬레니즘기(기원전 4세기 중반~2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좀 달라지지만, 그보다 이른 아르카익기(기원전 7~6세기)와 고전기(기원전 5세기~4세기 중반)의 그리스에서는 남성을 표현할 때는 누드로, 여성을 표현할 때는 코스튬(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남자를 옷 입은 상태로 표현하거나 여자를 옷 벗은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둘 다 매우 낯설고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다.

    

 

벌거벗은 남자들을 보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이 추잡하고 우습게 생각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라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대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때까지 그리스 남성들이 일상에서도 벌거벗고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성 누드는 예술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일상의 관습으로도 빈번히 나타났다.

 

그리스 남성들이 운동을 할 때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체육장(김나시온, gymnasion, 영어·라틴어로는 gymnasium)이라는 말이 벌거벗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김노스(gymnos)로부터 왔다는 데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김나시온에서 그리스 남성들은 알몸으로 체력을 연마하며 그들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뽐내고 감상했다. 올림픽 경기에서도 선수들은 나체로 경기에 임했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리스인들의 이런 풍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반에 모든 정신을 집중한 남자는 그 정신과 육체의 하나 됨으로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격렬한 찰나의 동작이 수정같이 투명한 영원으로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원반을 던지는 이도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깊이 감탄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슴에 품게 된다. 왜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남성 누드만을 고집했을까?

 

왜 여성을 누드로 표현하기를 꺼렸을까? 여성 누드가 지닌 지고의 아름다움은 꼭 가르쳐주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에서 누드 미술이 남성 중심으로 펼쳐진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특유의 인간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가 맞물려 생겨난 독특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본질적인 대상은 인간, 나아가 인간의 선()이라고 했다. 이렇게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한 까닭에 그리스인들은 모든 자연 대상 가운데 인간, 특히 벌거벗음으로써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인체를 조형의 백미로 추구했다. 문제는 그리스가 남성만을 그 인간의 범주에 넣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원천적으로 그 기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가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시민 자격이 성인 남성에 게만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테네의 가옥은 남자의 방과 여자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소녀는 공적인 교육 대상에서 제외됐다. 장을 보는 것도 남자 일이어서 여성이 외출을 하려면 남자 노예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홀로 다니는 것은 흉이 됐다. 이런 위상이 시사하듯 여성은 남성이 되다가 만 사람’, 곧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인간으로 취급됐다.

    

여성이 미술에서 누드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완전하지 않은 그들의 벗은 몸을 드러내 그 불완전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처럼 여성들은 그렇게 미숙한 존재였고, 주체로 설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 더구나 남성들의 입장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몸은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자연의 무질서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여성 누드는 문명의 빛을 흐리게 하고 야만의 기운을 불러올 촉매로 기능할 우려가 있었다.

 

여성도 가끔은 누드의 형태로 표현되곤 했는데, 그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창부나 무희,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자가 그들이다. 모두 남성과 문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소외된 여성들이다. 여성 누드는 이처럼 여성의 객체성, 수동성을 강조할 때 표현됐다. 그마저 워낙 적었으므로 남성 누드와는 결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보면 그리스의 남성 누드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위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남성이라는 관념이 더해져 탄생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미학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미술사학자 빙켈만, 헤겔 등 18~19세기의 인문학자들이 그리스의 누드를 가리켜 인간을 시간과 공간, 특수성, 사멸 위로 고양시키려는 시도라고 평했을 때 그 인간은 이렇듯 오로지 남성이었다. 서양 미술 속의 누드는 시작부터 철저히 성차별적인 미의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 기원이 어떠하든, 이런 그리스 누드의 남성 중심주의를 높은 미학적 완성도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 <벨베데레의 아폴론>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남성상,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남성상을 만나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조각을 로마 시대에 모각한 이 작품은, 아폴론이 적(아마도 뱀처럼 생긴 괴물인 퓌톤)에게 화살을 쏜 뒤 쓰러진 과녁을 보며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수영선수처럼 매끈하게 잘 다져진 몸매에 고양된 의식과 자부심이 담긴 얼굴은 아폴론을 해같이 빛나게 한다. 이 누드 어디에서도 부끄러움과 주저,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을 지배하러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빙켈만이 이 작품에 대해 자연과 예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칭송한 이유를 알 만하다. 만약 이 조각이 누드가 아니라 코스튬이었다면 이 정도로 완전하고 고귀한 존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그리스 미술에서 남성들이 벌거벗은 것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육체를 통해 이렇듯 인간 존재의 위대성, 남성 존재의 완전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출처>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서구 문명의 기원 된 네가지 양식

 

그리스 미술은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 시켰다. 사람 중심으로 생겨난 문명, 즉 헬레니즘 문명이 그리스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리스의 미술은 오늘날의 예술과는 달랐는데 그 시대 그리스에서는 예술을 회화, 조각, 건축 같은 시각예술만 예술이라 하였다. 그리스에서 예술은 감성의 영역이 아니라 합리적 법식 에따른 이성의 영역이였다.

 

빙켈만에 의하면, 그리스 예술도 초기엔 이른바 영원에 대한 관심을 표현 함으로써 부동의 형상을 추구했던 이집트예술의 영향을 받아 딱딱한 기하학적 양식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이시기를 아르카이크 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의 조각상을 보면 얼굴 부분의 입가만 제외하고는 신체 부분들 사이에 기하학적 대칭을 중시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엄격하고 딱딱하다.

    

 

1. 기하학적 양식(The Geometric Art) - 기원전 약 10세기 말6세기 중엽의 예술경향

1양식 고대 양식그 특징을 엄격함과 딱딱함으로 규정했다.

 

2. 고풍적 양식(The Archaic Art) - 기원전 700480년까지의 예술경향

2양식 숭고 양식이시기 조각가들의 양식은 신들의 위대함에 있었기 때문에 작품의 크기가 대부분 크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묘사하기위해 이상미를 실현 하려 했던 것이다.

 

3. 고전적 양식(The Classical Art) - 기원전 448432년까지의 예술경향

3양식 아름다운 양식빙켈만은 이 양식을 아름답고 유연한 우미(優美) 로 톡징 짓고 이 시기를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로 본다.

 

4. 헬레니즘 양식(The Hellenistic Art) - 기원전 323서기 30년에 이르는 시기의 예술과 사상

4양식 모방자의 양식그리스 말기 및 로마시대의 그리스 미술,빙켈만은 이시대의 <라오쿤 군상> 이라는 작품에서 그리스 예술의 본질적 특징을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로 규정햇다.

 

기하학적 양식과 고풍적 양식은 인체의 좌우 대칭미와 부동의 자세를 묘사한 특성을 보인다. 반면 고전적 양식과 헬레니즘 양식은 율동미와 완전한 비례법을 통해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양상을 보인다. 특히 반나체의 여인상이 헬레니즘 시대의 주된 양식이었다. 특히 아름다움의 전형을 고전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고전기 시대에 미의 전형이 만들어진 것이며, 그 아름다움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파악한 아름다움이며, 그 아름다움을 이성적 사고를 통해 재현한 것이 바로 헬레니즘 예술이다.

 

따라서 헬레니즘(Hellenism)이라는 말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반면 중세시대를 의미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은 신중심적 세계관을 말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란 인간이 파악한 세상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조형적으로도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미를 의미하는 것이다.

 

 

건축의 기둥에 철학을 입히다

 

그리스 건축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신전이며, 또 그리스 건축의 구성의 아름다움과 특색이 특히 신전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리스 신전의 가장 오래된 형식은 그 원형을 메가론이라 불리는 미케네 시대의 주택에서 딴 것이다. 그리스 신전은 신상을 안치하고, 여기에 봉납된 보물 등을 저장하기 위한 집이며, 신자들이 모여 제식을 행하는 장소는 아니다. 기독교 교회당에서는 갖가지의 양식이 시대에 따라 정면과 내부가 서로 관련해서 발전하고, 또 흔히 내부의 장식이 주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 신전은 중점이 주로 외부의 형성에 있다. 주택처럼 신전도 최초에는 목재·점토·생벽돌 등을 재료로 해서 세워졌다. 이어 석조와 목조를 혼합한 방식으로 변하고, 마지막에 순전한 석조로 발달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처음에는 전체의 비례나 개개의 부분의 형식이 각각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에 처음으로 엄격하고 때로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건축 방식이 만들어졌다. 그리스 신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건축의 구조상으로 보아 기둥 및 그 위에 얹히는 수평 부재, 즉 엔태블러처(entablature)이다. 이것을 주범 양식(오더)이라고 부른다. 주범 양식은 각부의 비율이나 형태의 차이에 따라 도리아식은 장중하고 이오니아식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코린트식은 화려하다

 

1> 도리스식 건축

오늘날에 남아 있는 도리스식 신전의 가장 오래된 예는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으로서, 건축 연대는 기원전 7세기의 전반이라고 추측된다. 기원전 6세기에 속한다는 셀리논태(고대의 셀리누스) 소위 C·D·F·G 제 신전, 페스툼(고대의 포세이도니아)의 이른바 <바실리카> <케레스 신전> 등의 중후한 형식,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에기나의 <아파이아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페스툼의 <포세이돈 신전> 등을 거쳐,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세워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혹은 같은 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헤파이스토스 신전(일반적으로 테세이온) 피갈리아 부근의 바사이의 <아폴로 신전> 등에 의해 달성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아식 신전의 궁극의 완성품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건축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걸작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기원전 5세기 중엽, 아네테는 이오니아적인 특성과 도리아적인 특성의 중간을 차지하는 아테네의 지위가 확립된 것이다. 즉 아테네 건축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도리아 양식이 이오니아 정신과 접촉함에 따라서 미적 세련의 극치에 달했다. 장중·간소한 도리아 정신이 우아·미려·온아한 이오니아 정신을 어느 모양으로 활용하게 되었는가는, 파르테논 신전 건축 전체의 절묘한 효과가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2> 이오니아식 건축

옛 이오니아 양식의 중요한 건축으로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나 사모스의 헤라 신전의 유적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기원전 435년 내지 425년에는, 이오니아 양식의 아테나니케 신전이 아테네아크로폴리스의 프로필라이아 남쪽에 치우쳐 세워졌다. 이것은 전후 양면에 네 기둥을 갖는 양향배식 신전이다. 도리아식과 달라서 기둥에 주춧돌이 놓여 있다. 특히 눈에 띄는 특징은 기둥머리의 형태이다. 즉 기둥머리의 양끝은 전후 양면으로 소용돌이 모양을 만들고, 이것을 측면에서 보면 장구 혹은 베개와 같은 형태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는 에레크테이온 축조에 의해서 이오니아식 건축의 예술적 완성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보아 여상이 무거운 들보를 지탱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워 안정감이 결여된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엔태블러처를 낮고 좁게 하여, 중압감을 될수록 적게 하는 구조로써 되어 있으므로 그러한 불안한 느낌도 거의 없다. 더구나 각 상의 교묘한 구성으로 전체의 균형을 잘 보전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순 이오니아식의 대건축이 소아시아에 있어서 부흥했다. 특히 신 아르테미스 신전은 외관도 장려(壯麗)함이 극한 건축답게 당시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프리에네의 아테나 폴리아스 신전은 아르테미스 신전에 비해 면적이 작다. 마우솔레움은 카리아의 왕 마우솔로스의 분묘 건축이다.

 

3> 코린트식 건축

기원전 5세기 중엽부터 4세기 중엽에 걸쳐서 코린트 양식도 생겨났다. 코린트 양식은 이오니아 양식의 일종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좋다. 코린트식 기둥머리의 유품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유적에서 발견된 한 보기이다. 그러나 기둥머리에 어캔더스 잎을 2단으로 겹쳐서 부각(浮刻)하여 나타내고, 도리아식이나 이오니아식보다도 훨씬 장식적이다. 이 양식은 그리스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속하기까지는 충분한 발전을 이룩하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 말경, 마케도니아의 위세 아래에 이오니아에 있어서 코린트 양식이 비교적 자유로이 응용되었다고 해도, 이 양식만으로 된 중요한 신전의 건축은 드물다. 코린트 양식은 로마인에게 계승되어서 그들의 호사스런 취미에 맞추어 다시 화려하고 매우 정교한 것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기원전 400년 경에 세워진 델포이의 원당은 그 외부에는 20개의 도리아식 기둥이 있고, 내부에는 10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마주보는 두 소용돌이 모양은 바사이의 경우와 같아 낮은 위치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델포이의 기둥머리에 있어서는 소용돌이 모양이 재차 감아 올려지고, 애버커스의 모퉁이를 떠받치는 고사리 모양의 소용돌이에 연결하고 있다.

코린트식 기둥머리가 충분히 발전한 형식은 에피다우로스의 원당(기원전 360330)이나 아테네의 유명한 리시크라테스의 기념비(기원전 334년경)는 현존하는 코린트식 기념비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고 또 가장 아름답다.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제우스 올림피오스 신전)이 로마의 건축가 코스티우스에 의하여 페이시스트라토스 시대의 옛 부지에 다시 건축될 때에 새로운 코린트 양식이 쓰였다.

    

 

극장

지붕이 없는 갖가지 건조물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극장으로, 그리스인들이 공회를 위해 이용했다. 정규의 그리스 극장은 큰 원형 오케스트라와 보통 반원보다 약간 큰 관람석(테아트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극장은 아테네의 이오니소스 극장으로, 기원전 5세기에 세워졌다.

 

스케네(skene)

배우가 분장을 하는 곳으로 쉽게 등장과 퇴장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건물이다.

스타디온

 

오데이온

페리클레스의 감독 아래 오데이온, 즉 음악당이 건조되었다. 이 건물은 옛 화폐에 나타난 도안으로부터 원형일 것이라고 상상되어왔다. 기원후 161년경 아테네의 오데이온은 보존 상태가 좋다. 형태는 작은 극장과 흡사하다.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주로 연극을 위해 쓰인 듯하다.

 

김나지온

운동경기 연습을 하는 체육관이다. 델포이에서 발견된 체육관 유적은 기원전 4세기의 것으로 특히 훌륭한 예이다.

올림피아의 필라이스트라

운동장을 도리아식 주랑으로 둘러싸고, 주랑의 바깥쪽으로 크고 작은 갖가지의 방이 운동장을 중심으로 둘려 있다.

 

스토아

그리스인들이 좋아한 건축물 중 하나이다. 이것은 바깥쪽으로 열주를 가진 회랑식의 단순한 건물이다. 사람들에게 비를 피하게 하고 햇빛을 가리어 주는 장소로 제공된다. 사모스섬의 헤라의 신역에 잔존한다.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키레는, 폴리그노토스와 미콘이 그린 벽화로 유명해졌다.

 

불레우테리온

특수한 목적을 위한 회랑 중 하나로, 그리스 도시의 대의원의 회의장으로 쓰였다. 특히 올림피아의 불레우테리온이다.

 

프리타네이온

프리타네이온은 행정기관의 본부이다. 행정 사무에 종사하는 관리들의 집회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관리나 공적인 방문객들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숙박도 했다.

 

텔레스테리온

지붕이 있는 건물로서 거의 극장과 흡사한 형식을 취한 흥미있는 건축로 기원전 6세기 후반 엘레우시스의 텔레스테리온, 즉 밀의)를 하는 집의 제2차 설계이다. 원래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에게 드리는 농업적 제사였으나 후에 디오니소스나 오르페우스에 결합되어 밀교적 의식이 된 것이다.

 

테르실리온

집회를 위해 만든 건조물로서 기원전 4세기의 전반 메갈로폴리스에 축조된 테르실리온이다. 이 회당은 장방형이지만 폭이 정면에서의 깊이의 길이보다 넓다. 대집회를 위하여 만든 이런 종류의 건축은 헬레니즘 시대의 공통적 형태였다.

프리에네의 에크클레시아 스테이온 _ 기원전 200년경 민회의 회의장

 

밀레투스의 불레우테리온

   

 

 

아름다운 그릇에 훌륭한 음식이 담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향했던 예술의 목표는 가장 이상적인 인체의 모습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이는 인체를 미와 진리의 근원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사상에 근원을 둔 것으로, 대부분 나체 형상을 취하고 있다. 나체 형상의 추구는 근원적미를 파악하려는 그리스인들의 조형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인들은 왜 완전하고 아름다운 인체의 미를 표현하고자 했는가? 이들에게 아름다운 육체란 곧 건강한 신체를 의미하며, 건강한 신체란 곧 건전한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건강한 신체를 갖기 위해 육상 등의 운동을 일상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단련한 육체를 선보이기 위해 정기적으로 육상경기를 벌였다. 이런 육상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은 예술작품의 모델이라는 영광이 주어졌다. 예를 들어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이나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맨 남자>의 모델이 바로 경기의 우승자들이다.

 

이런 아름다운 육체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미의 추구가 아니라, 단련의 과정을 통한 정신의 수련과 연관이 있다. 바로 건강한 신체를 통해 건전한 정신을 지니는 것으로, 완벽한 균형과 조화를 지닌 육체의 모습이 온건한 정신의 조화를 의미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체의 아름다움이 곧 정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으로, 아름다운 그릇에 훌륭한 음식이 담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육체를 통해 정신을 단련한다는 숭고한 의지의 결산이 바로 그 누구도 그리스의 승리를 예견하지 못했던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전쟁일 것이다. 그래서 이 전쟁을 우리는 그리스인의 정신의 승리다라고 이야기하며, 헤겔은 정신의 우위가 물질의 우위를 누른 인류 최초의 전쟁이라고 말하였다.

 

바로 이 전쟁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한 병사가 마라톤 광야에서 약 40km를 달려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노라고 외치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지 않았는가? 오늘날 행하는 마라톤 경주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이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함으로써 아테네의 문화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테네의 번영은 예술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기의 예술이 헬레니즘 예술로, 인간의 육체를 소재로 했던 고대 그리스 예술사상 전성기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형식미를 구사했던 헬레니즘 예술의 목표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다. 첫째는 가장 완전한 이상미를 추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관능미 혹은 세속미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상적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그리스의 미술은 조각과 건축으로 역사를 이야기한다.

 

 

선사시대에 속하는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그 후의 시대인 그리스 미술과 비교하여 미적 감각이나 미술상의 양식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것이며, 크레타·미케네의 미술이 반드시 그리스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스 미술은 극히 조소적(彫塑的)이며, 간소하고 또한 장중(莊重)한 데 대하여, 에게 해 미술은 현저하게 회화적·공예적이어서, 기념비적인 조각은 근소한 예외를 빼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 미술은 기원전 12세기경 갑자기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여 들어온 새로운 민족이, 원주 민족이 쌓은 미케네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후 잦은 이동과 혼란의 시대를 거쳐 새로이 낳은 미술이다. 이 새로 온 민족은 그리스어의 도리아 방언을 쓴 연유에서 도리아인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의 침입에 의하여, 그들보다 먼저 이주하여 있던 아카이아인이나 이오니아인의 대부분은 에게 해의 섬들 및 소아시아 서해안에 이주했다. 여러 세기에 걸친 신구 종족의 재편성이라고 하는 혼란과 이동이 있은 후 그리스인은 기원전 10세기 말경부터 겨우 안정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여, 각지에 공동의 정치 체제로써 폴리스를 수립하고, 공통의 신들을 섬기고, 그들의 새롭고 독자적인 문화의 초석을 쌓았다.

 

원시시대의 그리스 조각도 다른 원시 미개의 민족처럼, 제물 숭배의 시대를 거쳐서 점차로 조각 본래부터의 모양을 갖추어 온 것으로 보인다. 옛 문헌에 따르면 초기시대에 있어서 크소아논이라 불린 최초의 조각상은 나무를 잘라서 소박한 조형(造形)을 시도하여 신상(神像)으로서 신전이나 성지에 보존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양식은 극히 경직된 기하학적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나, 곧 이어 목조(木彫) 신상은 석상으로 바뀌고 후에 대()조각으로 발전해 갔다.

 

조각은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작품으로는 신전 본당(本堂)에 안치되어 있던 신상, 성지에 세워져 있던 신들이나 영웅상(英雄像), 봉납상(奉納像), 신전 건축의 장식 조각, 묘지에 놓여 있던 사자(死者)의 상, 묘비 부조(墓碑浮彫)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비종교적인 상으로서는 봉납자(奉納者) 자신의 상, 운동 경기의 승리자 상, 저명한 인물의 상 등이 있으나, 이것도 대부분 신에게 바치기 위하여 성지에 놓여진 것으로서, 종교적 목적과 무관하다고는 하기 어렵다.

 

 

고전적 양식 _ 플라톤의 이데아와 조형미

    

 

 

플라톤의 이데아(Idea)

이 세계에는 눈에 보이는 현상 - 가시계(可視界) - 과 그 현상을 존재 가능하게 하는 본질로서의 실상 - 가지계(可知界) - 이 있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세계는 진실이 아닌 거짓이라고 한다. 진실의 세계는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세계로, 정신과 마음을 통해서만이 존재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진실로서의 정신적 세계를 절대’, ‘완전혹은 순수의 세계라 하는데,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Idea)라 불렀다. 그리하여 이런 플라톤의 사상을 이데아론이라 한다. 이 사상에 따르면 가시계의 현상은 모두 진실인 가지계의 그림자이자 모방인 것이다.

 

조형예술은 가시적인 형상을 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장에 의하면 그 형상은 최대한 절대로서의 이데아를 닮아야 하며, 그렇기에 그 형상은 순수하고 지고한 이상적 아름다움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바로 절대미’, ‘이상미혹은 숭고미를 의미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제자의 삼각형에 관한 일화

어느 날 플라톤의 제자가 이데아가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그에 대한 대답 대신 플라톤은 완전한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지를 묻고는, 완전한 삼각형을 그리라고 했다. 제자는 스승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뾰쪽한 연필과 반듯한 자를 준비했다. 그리고는 삼각형이란 서로 다른 점을 지나는 세 점을 직선으로 연결한 도형이며, 내각의 합이 180도인만큼, 정성들여 삼각형을 그렸다.

 

그리고는 그 삼각형을 스승에게 제출하였다. 플라톤은 그 삼각형을 받고는 이 삼각형이 완전한가 라고 물었다. 제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플라톤은 그 삼각형이 삼각형의 이데아인가라고 되물었다. 대답이 궁색해진 제자는 이데아는 아니지만 이데아의 닮은꼴이라고 했다. 이 말에 플라톤은 네 말이 맞다라고 했다.

 

이 일화에서 볼 때, 삼각형의 이데아는 삼각형에 대한 정의이다. 그리고 최대한 그 정의에 맞게 표현된 삼각형은 이데아의 닮은꼴이며, 닮은꼴이기에 순수인 원형의 모방으로서의 이상적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론에 따른 이상적 조형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이론에 의하면 예술적으로 표현된 아름다움은 실제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 즉 실제보다 더욱 이상적이고 숭고하게 표현된 것을 의미한다. 바로 고대 그리스의 고전기 예술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입각한 것이다.

 

관념, 개념의 세상이다

현상의 세계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즉 "감각계"가 존재하며, 감각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오로지 이성으로만 알 수 있는 "가지계"가 있다.

 

"가지계"를 플라톤은 "이데아"라 표현했으며, 이는 "관념, 개념의 세상이다" 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즉 감각계는 시간의 흐름에 치우쳐 변화의 유동적 측면이 강조되지만 이데아의 세상은 영원성,불변성 그리고 유일성이 강조된다. 현상 속에서 본질이 있고 "현상은 바뀌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를 보았을 때 그녀의 이쁜 얼굴과 늘씬한 몸매에 우리는 먼저 아름답다 표현할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 예쁜 여자가 지적이며 영혼조차 맑고 순수하다면 우리는 육체적 아름다움보다 한단계 더 높은 아름다움의 소유자, 완벽한 아름다움의 소유자라고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보다 한차원 더 높은 단계 미의 이데아적 아름다움이 있다고 보았다.

 

즉 미의 본질은 정신으로 하여금 감각적 찌거기의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현상적 세계의 속박을 탈피하여 영원한 존재와의 완전한조화, 근본적 통일을 달성하도록 하는 작용에 있다.

 

당시의 시대상으로 예술(art)은 전문숙련기술 즉 테크네(techne)의 범주의 개념이 강했다. 현상에서 이데아의 본질을 구현하는 길은 "척도와 비례"라고 단언했을 정도로 수학적 직관에 미의 가치를 두었던 플라톤은 합리적인 지식과 규칙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조형예술을 회화보다 높게 치부하였다.

 

따라서 회화는 모방의 모방으로 이데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중모방이 되는, 그 가치를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을 그렸다고 보았을 경우 그림속의 칼은 칼의 외양만 모방하게 되는 것이다. 화가가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모델로 그림을 그릴지라도, 칼의 속성을 결여하고 있는 그림 속의 칼은 무 하나도 벨 수가 없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는 현실계보다 한단계 아래에 있고, 즉 이데아의 세계보다는 두단계나 떨어져 있어, 존재론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있게된다. 그러므로 심각하게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객관적 관념론 이데아

플라톤의 철학에서 기초가 되는 것이 그의 유명한 이데아론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구분하는 2원론을 내세운다. 더욱이 참되고 영원하며 보편적인 것이 이데아이고 현상계는 가상의 세계로서 이데아계를 모방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플라톤의 철학은 철저한 객관적 관념론을 대표한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료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자에 앞서서 보편자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러한 이데아를 불완전한 개별자가 모방하는 관계에 있다. '국가' 7권에서 플라톤이 비유한 것처럼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현상계는 동굴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은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가 불완전하므로 완전한 것을 지향해서 나아간다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에서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이 완전한 것이 막연한 하나의 이상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 플라톤 철학의 특색과 동시에 한계가 있다. 이데아가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 많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플라톤은 대화록으로 구성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미와 예술에 대한 문제가 많은 저서에서 언급되지만 그의 다른 철학처럼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단편적으로 나타난 플라톤의 미학에서 2개의 주요한 문제가 드러난다. 미의 개념과 예술의 개념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미의 개념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미()를 관찰하는 것이다."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말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미를 칭찬할 때 이 미의 개념은 오늘날과 다르다. ·형식·멜로디 같은 것은 플라톤이나 희랍인에게는 미의 영역 가운데 일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미는 물리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대상도 포함한다. 감각 기관을 즐겁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것도 포함한다. 대화록 '위대한 히피아스'에서 플라톤은 미의 개념을 정의하려 한다.

 

우선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이 등장해서 그든 나름대로의 미를 정의한다. 플라톤은 미를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 미의 영역이 선()의 영역과 일치된다. 미의 항목 아래 선이 다루어지고 선의 항목아래 미가 다루어진다. 희랍에서 통용되었던 미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명료하지 않으며 항상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 일치된다는 생각은 플라톤의 주장일 뿐만 아니라 고대 희랍의 일반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물론 미를 달리 해석하려는 시도도 나타났었다. 즉 소피스트들은 미를 감각기관에 유쾌한 자극을 주는 어떤 것으로 해석했다. 소크라테스는 미를 합목적적인 것으로 파악하려 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미 개념을 반박하고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미 개념 대신에 객관적인 미 개념을 대치시키려 했다. 즉 미 자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플라톤의 관심사였다. 이렇게 하여 플라톤은 미의 이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보다 더 완전하며 이데아는 육체나 영혼보다 더 완전하다. 이러한 철학을 밑받침으로 플라톤은 미를 육체와 연관시키려 하지 않았다. 미는 영혼이나 이데아의 성경을 가녀야 하며 영혼이나 이데아의 미가 육체의 미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플라톤은 그의 관념론적인 철학을 밑받침으로 미를 이념화시켰으며 미학을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사고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 최고의 미는 결국 이데아 속에 있으며 이데아만이 '미자체(美自體)'이다. 미는 소멸하지만 미의 이데아는 영원하다. 플라톤은 미를 이데아의 영역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첫째, 희랍에 통용되었던 넓은 의미의 미 개념이 훨씬 더 확충되어 미의 영역 속에 경험을 넘어서는 추상적인 대상이 포함되었으며 둘째, 현실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미가 현상계에 속하는 어떤 것으로 가치가 하락되었으며 셋째, 미의 척도가 미의 이데아라는 관점에서 새로이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피스트들은 주관적인 미성을 강조했고 피타고라스 학파는 객관적인 형식을 강조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미의 기능을 강조한 반면 플라톤은 완전한 미의 이념을 내세운 것이다. 플라톤의 미학은 관념론적인 색채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색채도 지니고 있다. 미와 선을 일치시키려 한다. 보통 미가 선으로 간주되는 반면에 플라톤은 선을 미로 간주하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예술개념

플라톤의 예술론은 그의 철학 및 그의 미론과 결부된다. 가장 위대한 미를 그는 예술 속에서가 아니라 우주 혹은 이데아 속에서 찾았다. 일반적으로 희랍에 통용되었던 것처럼 예술은 그는 목적과 연관된 기능으로 보았다. 물론 이때 그는 시학과 예술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는 예술을 유용한 예술, 생산적인 예술, 모방하는 예술로 구분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예술을 모방으로 해석했다. 예술이 현실을 모방한다는 생각은 희랍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에 있어서는 그러나 현실 자체가 이데아의 모방이므로 예술은 결국 모방한 것을 모방하는 더 낮은 단계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면 플라톤에서 예술은 어떤 과제를 갖는가? 효용성과 정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효용성이란 인간의 성격을 도야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인 효용성을 말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두 번째로 우주의 질서나 세계의 법칙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즉 정당성을 지녀야 한다. 정당성을 부증해 주는 것이 계산과 척도이다. 이것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좋은 예술의 척도는 세계의 법칙과 일치하는 데 있는 정당성과 성격을 잘 도야시키는 데 있는 효용성이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우주의 법칙과 일치되어야 하고 동시에 인간의 성격을 구성하는 선의 이념과도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상계를 모방하는 예술을 적대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가 제시하는 이상국가속에 예술가나 시인의 역할이 제시되지 않는다. 자기 시대의 예술을 바라보면서 그는 예술이란 옳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유용하지도 않다고 비난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간을 오도하여 현실의 그릇된 상()을 보여주며 이와 더불어 인간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예술이 현실을 모방하면서 현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현실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플라톤의 철학에 의하면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그릇된 모습을 만든다. 예술이 인간을 타락시키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유도되어야 한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예술은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인간의 성격을 약화시키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경계심을 나태하게 만든다. 조형 예술은 사물의 형태를 왜곡시키며 시()와 음악(音樂)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퇴화시킨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의 철학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별로 납득할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이 관찰한 사물의 특성이 존재의 참된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며, 시민을 교육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서 그가 생각한 유일한 하나의 방법만이 정당하다는 그의 편견이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 그의 예술론은 그의 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모방하는 예술은 다만 장난일 뿐이며 그들에게서 신중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다만 즐기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모방이란 결국시간을 보내기 위한 유희이며 인간을 고귀한 과제로부터 어긋나게 만드는 것이다.

 

철학과 예술

고대 희랍에서는 예술과 철학이 각각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은 예술 특히 문학에 지식의 원천을 인정해 주려는 태도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진리로 나아가는 길은 유일하며 그것은 철학의 길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속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타난다. "시인은 마치 성인이나 예언자와 같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그들은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면서도 그들의 시() 때문에 다른 영역에서도 가장 영리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동시에 알아차렸다."

 

 플라톤은 철학과 문학을 이렇게 대치시키고 철학자의 승리로 결말 짓는다. 호메로스가 제시한 국가가 너무 분망하고 무질서하고 정열이 난무하는 것은 결국 선택 없이 모방하는 예술에 책임이 있으며, 이에 반해 자신의 이상국가는 모방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 근거를 두는 좋은 국가라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선택 없이 모방하는 예술에 책임이 있으며, 이에 반해 자신의 이상국가는 모방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 근거를 두는 좋은 국가라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소피스트이고 철학자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즉 예술이 도덕이나 인식의 아래에 있어야 하고 예술은 다만 정치적·윤리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줄 때만 필요한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연약하게 만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예술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미술은 총 2편으로 연재됩니다.

 

 

고대 그리스 미술 1부 끝. 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