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4부 이집트 미술 [ Egyptian art ]

草霧 2013. 2. 4. 16:10

 

 

고대 미술 4

 

 

 

영원을 위한 예술

 

 

4부 이집트 미술 [ Egyptian art ]

 

 

 

 

왕의 부활을 꿈꾸며 영원을 위한 예술 (B.C 3500-500)

 

이집트의 미술품은 우리가 말하는 현대의 미술작품은 아니다. 신전(神殿)'신의 영원한 집'이며, 회화는 현실세계를 재현하는 수단이며, 조각은 신이나 인간의 영혼이 깃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대 이집트의 미술은 실효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이 정한 법칙이 있는 한 거기에는 엄연하고 일정한 형식이 성립하여 예술가의 개성은 훨씬 뒤로 물러선다. 이집트의 미술품이 일정한 양식을 고수하고 제작자의 이름이 표시되지 않는 까닭이다. 모두 국왕의 보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예술활동의 역사는 왕조 흥망의 역사와 일치한다. 미술 제작에 종사하는 자는 곧 국왕을 섬기는 관리였다.

 

() 프타는 본디 창조의 신이었다. 이 신이 창조한 질서는 모든 예술에 공통되어 건축도 회화(繪畵)도 조각도 그 근저(根底)에는 이 법칙이 흐르고 있었고, 특히 조형 예술은 우주 만물의 조화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술의 발전과정은 대체로 그 나라의 정치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아울러 뿌리 깊은 이집트적 사회제도의 산물이기도 했다. 공식적인 종교에 의해 지탱되는 위계적 사회구조는 권위주의적 법률에 순종할 것과 강제적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집트 미술은 아마도 다른 어느 나라의 예술보다도 한층 더 권력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강력한 선전도구로써 기존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일강의 풍요가 예술을 낳다

 

이집트 미술의 특성을 낳는 데는 지리적 요소가 주요한 작용을 했다. 나일 강은 유망한 농업적 조건을 이집트에 선사함으로써 미술과 공예가 발전하기에 좋은 안정된 생활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아울러 사막과 바다는 사방에서 이집트를 보호하여 거의 2,000년 동안 외세의 큰 침략 없이 그 같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한 사막의 구릉에는 광물과 좋은 석재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어 미술가들과 공예가들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다만 좋은 목재가 부족했는데 그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레바논과 소말리아로, 그리고 중개인들을 통해 열대 아프리카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 전반적으로 유용하고 귀중한 물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대외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집트의 물질문명을 풍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대 이집트 미술은 이집트 문화의 종교적 신앙을 반영하여 지상의 삶은 내세의 영생에 비하면 잠시 지나가는 막간극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했다. 신분과 계급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내세에 자신들이 지니고 갈 유용한 장식물을 수집했으며 자신들의 매장지에 대해 최대한의 관심을 쏟았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고대의 무덤과 결부된 것들이다.

 

예술은 곧, 종교이고, 왕은 곧 신이다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 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 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은 누린다고 믿었다. 이러한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 덕택에 이집트의 미술은 초시간적, 영속적 기능을 하게 된다.

 

또한 죽은 자를 위한 미술이므로 아름다움보다는 미술작품에 영원성을 담으려 했다. 예로 파라오 왕이 죽은 후에도 생전과 같은 절대 권력의 소유와 승천을 돕기 위한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명확하고 완전한 묘사를 위해 특징적인 각도와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했는데, 주인은 종보다 큰 점, 좌상의 경우 두 손은 무릎 위에 놓는 점, 남성의 피부색이 여성보다 검은 점, 모든 인물이 어떤 기저선상에 놓이는 점 등이 예라 할 수 있다.

 

3000년간 지속된 이집트 미술은 비교적 정확한 부분묘사와 균형 있는 신체비례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의 질서감각과 기하학적 규칙성을 보여준다. 이집트 미술의 기능은 초시간적, 영속적 기능이다. 목적은 아름다움보다 미술작품에 영원성을 담는 것이다. 특징은 전형적인 상황을 묘사며 특징적인 각도에서 그린다는 점이다.

 

절대적 왕권과 영혼 불멸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이 만들어지며, 이집트 미술은 한마디로 죽은 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미술이다

 

 

 

정면성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현실의 생동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사후세계의 영원한 삶이었기에 그들은 인체가 좌우로 평형을 이루는 부동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인체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기에 이를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상화

대상을 표현하는데 있어 세부의 상세한 표현보다는 대상의 본질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어서 얼굴표현(나중에 카가 돌아와서 식별할 수 있도록)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략해 버렸다.

 

종합성

이집트 인들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데로의 묘사보다는 대상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 결과 하나의 고정된 시점 보다는 여러 시점으로 대상을 파악하였다. 보통 인물묘사시 눈과 몸통은 정면이며 얼굴, , 다리 등은 측면인데 이는 최대한 인물의 특징을 잘 살릴수 있는 부분을 각각 떼어서 다시 종합시킨 것이다.

 

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

고대 이집트의 돌이나 나무에 새긴 상형문자를 지칭하는 낱말로서, 고대 그리스어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Hieroglyphica grammata: "신성하게 새긴 말")의 줄인 말이다. "능력의 말"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메두 네테르"(Medu Neter)를 번역한 데서 온 이 용어는 기원전 약 4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신성 문자는 서기의 신인 토트가 발명하여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 전해진다. 더러는 마야 문명·아스테카 문명의 문자 등 기타 상형문자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히에로글리프 이외에 두가지 다른 문자들(신관 문자, 민중 문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는 로제타석의 발견과 더불어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되었다.

 

신성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의 세 가지 방법으로 기록된다. 문자에 등장하는 사람, 동물, 새의 머리는 언제나 글이 시작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으므로 문자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작하면 된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읽는 법은 없다. 모아쓰기가 이루어지는데 한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아쓰기된 글자들은 원래 읽는 방향대로 차례로 읽어가면 된다. 왕의 이름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카르투슈(Cartouche)라고 한다. 이것이 로제타 돌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

 

로제타석(Rosetta)

기원전 196년에 고대 이집트에서 제작된 같은 내용의 글이 이집트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문자, 고대 그리스어 등 세 가지 문자로 번역되어 쓰여 있는 화강암이다. 이 돌이 있어서 장프랑수아 샹폴리옹과 토머스 영은 잘 알려진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1814년 영국인 토마스 영이 이집트 민중문자의 해독을 끝냈고, 이집트 상형문자 해석을 시작했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이 일을 확장하여, 로제타 돌을 해석하였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그것부터 해석하였고, 테두리가 둘러진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냈다. 그것은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형문자쪽의 테두리가 둘러진 단어를 주시했다.

 

 

 

아크나톤(Akhnaton, 아멘호테프 4)의 아마르나 (Amarna) 미술와 파라오(Pharaoh)

이크나톤의 종교개혁에 의하여, 예술 방면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그 때까지의 유형적 · 정신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원근법에 기초한 선화법을 취한 사실적·동적인 묘사를 개척했다. 아마르나 왕국의 벽이나 묘지에 조각, 채색된 왕·가족의 초상·왕비 네페르타이트의 채색된 흉상 조각. 투트 안크 아멘 왕릉 속의 유품 호렘헤브의 유품 등은 아마르나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8왕조 아크나톤 치하의 독특한 풍조와 미술인데 새로 도읍한 이크나톤의 현 지명인 아마르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아톤 신() 신앙의 종교개혁을 단행한 정신과 병행하여 예술계에도 종래의 고정화한 양식에서 탈출을 시도하여 조각과 회화에 개성을 존중하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이집트 미술사상 매우 특이한 한 시기를 이룬 것이며, 이크나톤 자신에 의한 별종의 양식화라고도 생각된다.

이집트 화가의 사명은 사물의 형태나 본성이나 특징을 묘사하는 일이어서 회화는 신이 정한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현존하는 자료는 거의 모두가 묘의 벽화이고 그것은사자(使者)의 영원한 생명이 생활하기 위하여 묘실 내에 현세를 재현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부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집트 회화의 특징은 원근법의 결여와 물체 묘사에 있어서 측면도와 정면도의 혼용이다.

 

특히 인체에서 머리는 항상 측면이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이며 허리에서 아래 부분은 다시 측면이 되고, 얼굴의 정면도는 예외였다. 동물은 기본적으로 측면이다. 이 형식은 왕조문화의 발생과 동시에 결정되었다. 벽화는 진흙 연와의 벽이나 바위 벽에 정제한 점토 또는 석고질의 모르타르를 바른 위에 그려진 것이었다. 이집트 회화사의 성쇠는 정치적 번영의 역사와 일치한다. 선왕조시대에는 암벽화나 토기 표면의 장식이 있고 그 말기인 히에라콘폴리스 벽화에는 권력자의 도상 표현에 있어서 이집트 양식의 기초를 볼 수 있다. 초기왕조시대의 분묘에는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가 있을 뿐 형상적인 회화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고왕국 시대에는 <메이둠의 오리>(4왕조)가 나왔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마 진흙 연와벽이 파손되기 쉽고 작품의 대부분은 소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부조의 밑그림에는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중왕국 시대의 회화는 베니하산의 암굴분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데생은 진보하지 않았으나 화려한 채색을 보였다.

 

신왕국 시대, 특히 제18왕조는 황금기이다. 전반 토트메스 3세 시대까지는 전통적인 아르카이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후반에는 감수성이 풍부한 선과 정묘한 색채로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크트와 멘나의 묘에 있는 벽화는 이집트 회화 전성기를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아마르나 양식은 조각만큼은 영향을 주지 않았다. 19왕조에는 기교에 치우쳐 조방하게 되었고, 20왕조 이후에는 서서히 회화활동이 침체되어 겨우 파피루스 문서의 삽화 등에 그 전통을 남겼을 뿐이었다.

 

안료(顔料)

()은 그을음, ()은 구리 계통의 유질(釉質)의 분말, ()은 공작석(孔雀石)이나 녹색 글레이즈의 분말, ()은 자토, 황은 황토(黃土), 백은 석회 등이 사용되었다. 또 이집트인에게는 독특한 종교적 색채 상징관념이 있어서 각기의 색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백은 기쁨, 흑은 재생(再生), 적은 악마, 황은 신성, 녹은 활력을 의미하여 그러한 법칙에 따라서 종교적인 공예품의 채색이 결정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적인 회화는 화가가 관찰한 대로 자연스럽게 채색되었다.

 

부조(浮彫)

통상적으로 양각(陽刻)과 음각(陰刻)이 있다. ()왕조시대에는 상아의 세공에도 보였지만 왕조시대에 들어서면 묘나 신전의 벽면에 그려졌다. 도상(圖像)의 표현법은 거의 회화와 같이 채색되었다. 5왕조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중왕국시대에는 그것을 답습하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궁정 아틀리에의 제작품을 제외하고는 조잡하게 이루어졌다. 신전에는 거대한 구도가 채용(採用)되어 그 외벽면(外壁面)에는 음각을 하였고 내면은 양각을 하였다. 사이스 시대에는 고왕국시대의 양식으로 돌아가려는 복고운동이 있었다.

 

생명의 모형을 만드는 사람,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He-Who-Keeps-Alive)‘

 

 

이집트 조각사의 사명은 명제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도록 충실하게 조각하는 것이었다. 조각의 종류에는 신상·왕상·개인상·풍속상 및 동물상 등인데 묘에 안치된다든지 신전에 모셔 두었으며, 그 크기도 20m 이상의 거상에서 몇 cm의 소상에 이르렀고, ·나무·금속·상아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왕조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상 등의 토제나 상아 조각이 있었으나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석회암·화강암·편암 등의 조각이 출현하여 이미 이집트 조각의 시조적인 모형이 형성되었다. 고왕국 시대는 조각 사상의 고전기로 되어 이집트 양식이 완성되었다.

 

4왕조의 카프라왕의 섬록암상, 라호테프 부처상, 카이페르 목상, 페피 1세 동상 등이 대표작이다. 목상과 석회암상은 채색되어 있다. 형식은 입상 · 의좌상 · 호좌서기상 등이 있고, 개인의 단신상 외에 부부나 가족 군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왕상은 신전에 두었고 일반인의 인물상은 묘의 세르다브에 안치되는 이른바 '카 상'이었다. 옥안을 붙인 예도 많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실적 기법에서 출발하였고 일종의 이상화에 성공한 멤피스파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중왕국시대에는 이것에 테베파의 사실주의가 가하여져서 특히 인물의 개성 표현이 특징이었고, 대표작은 제12왕조 제왕의 초상이다.

 

신왕국시대의 경향은 당초 제18왕조에 현저하게 이상화되어 우아함이 가해졌으나 얼마간 유형적이었다. 그러나 신상과 석비(石碑)를 받드는 신형식이 출현하여 중왕국시대에 그 조형을 보았던 안 바케가 더욱 형상화되었다. 19왕조 이후는 왕상의 거대성이 증대되었으나 대체로 조잡·형식·추종에 빠져 버렸다. 이 사이의 이크나톤과 네페르티이트상을 절정으로 하는 아마르나 양식의 자연주의는 특이한 존재이다. 목조(木彫)에는 제 나라의 것과 남방의 흑단,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후기왕조시대에는 제25왕조에서의 사실주의의 부활, 26왕조의 고왕조시대 양식을 지향하는 복고 운동이 있었고, 한편 청동조각에 의한 인물상 외에 특히 소형의 주동신상이 성행하고 목조나 석조는 점차 쇠퇴하였다. 특정한 인물의 표현이 아닌 풍속상은, 고왕국시대에는 석조의 노동자나 시종의 상이 있었지만 중왕국시대 이후에는 생활의 각 분야를 표현한 채색 목조의 군집상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예술적인 것은 많지 않다.

 

"부름에 응하는 자" 우샤브티 (Ushabti)

미라형의 소상으로 가슴에 모은 양손에 괭이를 잡고 등에 바구니를 지고 동부에 <사자(死者)의 서()> 6장의 일부가 쓰인 조각이다. 이집트의 종교에는 죽은 사람은 오시리스신()이 지배하는 저 세상에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 되고 우샤브티는 그날그날의 노동을 사자를 대신해 하는 것으로 미라와 같이 부장되었다. 파이안스··나무··구리 등으로 만들었고 정교하여 예술적인 것도 많다. 고대 이집트의 유품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인 것의 하나이다.

 

 

석제용기

실용·비실용을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용기로서 보급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신석기시대의 현무암 제품이고 선왕조시대 말기에는 많이 제작되어 난형의 항아리가 일반적이며 석재는 석회암·알라바스터·편암·화강암·각력암·반암 등이 사용되었다. 1왕조경부터 기형도 다양화하여 경도가 높은 섬록암·석영·흑요석도 사용되었다. 사카라의 제세르왕의 피라미드에서는 3천개 이상의 석제 용기가 발견되었다. 항아리나 병의 성형(成形)에는 드릴을 사용한 듯하다.

 

이집트의 토기

일반적으로 조잡한 제품이고 질이 좋은 것은 상()이집트에 한정되었다. 선왕조 시대에는 흑정토기와 채문토기 및 적·흑색 마연토기 등이 현저하였으며 녹로는 초기 왕조시대부터 사용되었다. 왕조시대에는 기술이 침체하고 문양은 단순 또는 소멸하여 실용기화됨으로써 파이안스에 그 주역을 넘겨 주게 되었다. 용기 외에 인물이나 동물에 흡사한 조형적인 것도 있다. 토기에 광택을 내는 방법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시작되었다.

 

파이안스(faience)

유럽과는 달리 석영 분립을 성형한 태에 시유한 것인데, 색은 적··흑 등도 있으나 터키석이나 유리석을 모방한 청과 녹이 일반적이었다. 선왕조시대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세르왕의 피라미드 내부 벽면 타일과 같이 제3왕조경부터 성하게 만들어졌다. 제품은 비즈·부적·소조각·상안·용기·장식품 등 여러 종류로 감청의 것은 이집샨블루로서 현재에도 애호가가 많다.

 

이집트에서는 귀석의 대용으로 유리(glass) 공예가 발달했기 때문에 투명한 유리는 인기가 없었고 모두 색()글라스로 청···녹색이 애호되었다. 원료는 모두 이집트에 많은 석영 및 천연의 소다로 이미 선왕조시대부터 만들어져 신왕조시대 이후에 크게 발달하였다. 제품은 소형인 것이 많고 파상선문이 붙는 샌드코아로서 만든 향수병이 특징적이어서 수출된 것도 있다. 후기에는 파테 두 바르 제품도 출현하게 되었다.

금속공예의 주류는 전통적인 동제품이다. 고왕조시대부터 기술이 발달하였으나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원료를 국외에 의존하게 되었다. 청동은 중왕국시대 이후 제련되었다. 동제품으로는 무기·이기·용기, 건축 부분품이나 가구·장신구 외에 조각에도 제6왕조 페피 1세의 주상과 같은 대형과, 말기왕조시대에는 소형이 잘 만들어졌고 납형기법도 고도로 발전하였다. 제동 공작 과정은 가끔 묘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제철기술은 기원전 1000년경에 도입되었으나 보급되지 않았다.

 

귀금속에는 금··엘렉트람이 있다. 금은 선왕조시대에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왕조시대에는 태양신의 육체로서 성스럽게 여기게 되어 23금 정도의 것도 정련되었다. 제단, 신이나 왕의 상, 의장품·장식품·부적 등의 재료가 되었으며 중왕국시대의 공작 기술은 최고에 달하였다. 은은 당초 금보다 희소가치가 높았으며 엘렉트람은 양자의 합금으로 다량으로 제련되어 오벨리스크 표피에도 사용하였다. 금은 상()이집트와 누비아에서 채취하고 은은 해외에서 수입한 듯하다.

 

장석·벽옥·홍옥·마노·녹주석·유리석·수정·터키석·석류석 등을 사용하였을 뿐 진짜 보석은 없었다. 중왕국시대에 최고의 기술에 달하여 신왕국시대 이후에 보급하였다. 귀금속과 같이 가공한 경우가 많고 옷깃 장식, 목걸이·팔찌·가락지, 장식대, 가슴 장식, 부적 및 상안의 조각 등을 만들었다. 글라스나 파이안스의 대용품도 많다. 1왕조 제르왕, 다하슐과 리쉬트 출토품, 투탕카멘왕의 것이 유명하다.

 

부적(符籍)

마력을 가진다고 믿어진 소형의 조형물로 일상 패용(佩用)하거나, 미라를 감는 권포(卷布) 사이나 옷깃 장식에서 발견된다. ···석제 등이 있었으나 파이안스제()가 일반적이다. 종류도 많고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 것도 적지 않으나 <사자(死者)의 서()> 등 종교 문서에 명기된 경우도 있다. 안크는 생명, 파피루스주()는 활력, 스카라브는 생성(生成), 제드주()는 안정, 티트는 인스 여신의 가호, 우자트(호루스의 눈)는 사악한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스카라브(scarab) 또는 스카라베우스 사크르

곤충의 이름으로서 통상적으로 이 벌레를 본딴 소형의 조각을 가리킨다. 부적 또는 인장(印章)으로 사용되었고 아랫면은 평평하여 여기에 왕명·신명·공직명 또는 성문(聖文)이 새겨져 있으며 왕의 기념적 사건을 기록한 것도 있다. 또 스카라베(scarabee)'생성(生成)'을 상징하여 케프리신(Khepri)이 되어 상승하는 태양을 의미하였으며 미라의 심장부에 놓인 것도 있다. 파이안스··동제품이 일반적이고 후세의 모조품도 많다.

 

이집트에는 목재가 적었으나 목공 기술은 크게 발달하였다. 보통의 소형 제품은 토산의 시카모아와 아카시아를 사용하였고 대형·고귀한 것에는 레바논 삼나무를 사용하였다. 주로 가구를 만들었고 관() 또는 조각도 만들었다. 가구는 고왕국시대에 있어서는 단순한 침대나 의자 정도였지만 신왕국시대부터 정교·화려하게 되어 보석상자와 함도 만들었다. 장식법은 채색 채문(彩紋), 보석류, 글라스·상아 등의 상감(象嵌)과 금도금 따위가 있다. 접합부는 촉엮음 또는 목침을 사용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상아를 세공의 좋은 재료로 삼고 있었다. 원료는 누비아·푼트 그리고 아프리카 내륙지방에서 수입한 것인데 작은 함·팔찌·귀걸이··비녀·거울·부채의 손잡이·화장품 용기와 부적 등 그 밖에 부조(浮彫)한 파넬, 가구나 기타 목공품의 상감용(象嵌用) 등 여러 갈래로 사용되었고, 작은 예이기는 하나 조각품도 있다. 부조로 판 상아는 가끔 적색과 흑색으로 착색한 것도 있다.

 

왕조시대를 통하여 아마(亞麻)가 거의 유일한 원료로서 선왕조시대부터 짜여졌다. 일반적으로 평직기(平織機)가 있었고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수직기(垂織機)도 나오게 되었다. 옷감, 미라의 포대(包帶), 배의 범포(帆布), 침대 덮개를 만들었고 철직(綴織)의 기술도 발달하였다. 고급품은 흰색으로 얇고 정교한 마포이며 염색도 하여 인디고나 꼭두서니 같은 식물성 염료를 사용하였다. 목면(木綿)의 기록은 기원전 6세기에 있으나 코프트 시대에 보급되었으며 양모는 이집트인이 싫어하였다. 그리고 마포(麻布)는 수출하기도 하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미술

풍부한 석재(石材)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였으나 제2왕조 이후 왕릉(王陵, 피라미드)과 신전(神殿)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고 요소에 화강암이 사용되었다. 왕궁과 주택은 왕조시대를 통하여 벽돌과 목재를 썼다. 석재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투르의 석회암, 시르시라의 사암(砂岩), 하트느바의 알라바스터 등이 특히 유명하고 목재는 레바논의 삼나무를 즐겨 썼다.

 

()왕조시대에 있어서 각 지방의 신전은 간단한 오두막을 짓는 식인 듯하였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이 되고 후에 석재를 주재로 하고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카르나크의 아멘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축도, 기본적으로 정면 입구의 탑문(塔門)과 중정(中庭), 전실(前室) 및 지성소(至聖所)로 되어 있고, 여기에 성지(聖地)와 나일강 수량계 및 후기 왕조에는 특히 탄생전이 부설되고 경내(境內)를 연와(煉瓦)벽으로 둘러쌌다. 탑문 앞에 왕조의 거상과 오벨리스크가 각각 한 쌍씩 세워지고 벽면 전체에는 신에 대한 숭배와 왕의 업적을 표시하는 채색부조가 되어 있으며 앞칸은 다주실(多柱室)로 되어 있다. 장제전은 특정한 왕의 장례와 제사를 위한 것으로서 신()왕국 시대에 성행하였으나 구조적으로는 일반신전과 큰 차이가 없다. 하트솁수트(18왕조) 여왕의 장제전은 테라스식()인데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암굴 신전은 절벽을 이용하여 파서 만든 것으로 누비아의 아부심벨 신전이 대표적이다.

 

건축용 기둥에는 목재도 사용하였으나 현존하는 것은 모두 석재이다. 거의 모두가 식물을 모형으로 했는데 야자수형 기둥은 연 줄기 묶음의 기둥에 꽃의 봉오리나 활짝 핀 꽃의 기둥머리를 붙인 것이며 파피루스형 기둥도 그와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이르면 이러한 복합형도 열 종류가 있다. 주두에 하트홀 여신 얼굴의 주두를 붙인 것도 있다. 화강암·석회암·사암이 주로 사용되었고, 한개만으로 된 돌 기둥이나 드럼형의 돌을 쌓아올린 기둥도 있고 비문을 파서 채색한 경우도 있다.

 

오벨리스크(obelisk)

신전(神殿)의 탑문(塔門) 앞에 좌우 일기(一基)마다 설치된, 약간 끝이 가는 4각형의 거대한 석주로, 끝은 4각추(四角錐)이며 기둥의 표면에는 히에로글리프비()가 있다. 헬리오폴리스 태양신 숭배에서 기원한다고 말해진다. 통상적으로 아스완의 화강암을 끓어 낸 것으로서 하트솁수트 여왕의 것은 높이가 30m, 300t 이상에 달한다. 지금까지 50기 이상이 침입자의 기념품으로 해외에 가지고 나가게 되어 원위치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영혼 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은 묘, 즉 영원한 집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왕조시대에는 원() 또는 타원형의 수혈(竪穴)이었으나 제1왕조경부터 마스타바분(mastaba)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직 4각형 평면의 피라미드를 단두(斷頭)한 모양인데 기와나 석회암으로 만들어지고,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사당(祠堂)은 지상에 설치하였다. 초기 왕조의 묘도 이 형식이다. 사당의 방 벽면은 각종의 광경이 부조로 덮여 있으며, 맨 안쪽에 영혼이 출입하는 위문(僞門)을 만들어 두었다. 3왕조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묘(王墓)가 되어 제17왕조까지 답습되었다.

 

18왕조로부터 왕묘는 인적이 드문 산중의 암굴분(岩窟墳)이 되고, 신전은 분리하여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귀족의 묘도 단애(斷崖)나 경사진 사면을 이용한 암굴분이 되어 입구 위쪽으로 피라미드를 구축한 예도 있다. 벽면은 회화 또는 부조로 덮여 있어 회화사(繪畵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왕묘의 경우에는 긴 종교문서 비문(碑文)을 새겨 두었다. 정중한 장례가 당시의 풍속이었기 때문에 부장품은 다량에 이르러 이집트 미술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피라미드(pyramid)

 

3왕조부터 출현한 왕릉의 한 형식이다. 완성을 본 것은 제4왕조 쿠푸왕의, 높이 약 147m의 석축(石築)으로, 거대한 4각추형의 본체와 상·하 신전과 참도(參道) 등의 복합으로서 현실은 본체 내부나 또는 지하에 설치되어 있다. ()왕국시대에는 석재 대신으로 햇볕에 말린 벽돌도 사용되었으며 신왕국시대 이후에는 귀족의 분묘에도 규모가 작은 것을 받아들여 나파타·메로에서의 왕묘 형식으로 이어져 갔고 로마에도 이것을 모방한 묘가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릉의 하나. 초기 왕조 시대의 왕릉은 벽돌이나 돌을 사용했는데 윗부분의 구조가 사다리 모양의 벤치(마스타바)와 비슷해서 일반적으로 마스타바 분묘라고 부른다. 3왕조의 제세르가 자기의 마스타바를 여러 번에 걸쳐 개축한 결과, 삭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4왕조의 스네프루는 다하수르에 굴절(屈折) 피라미드를 세웠으며, 쿠푸에 이르러 사면체(四面體)의 피라미드가 건조되었다.쿠푸의 피라미드의 밑면은 한 변이 230m 이상이고, 높이는 152m이며, 각 면은 동서남북으로 향해 있으며, 표면에는 매끈하게 갈고 닦아 낸 화강암이 붙여져 있다. 상부 구조의 내부에 만들어진 현실은 아무나 찾지 못하도록 미로(迷路)로 지키게 했다. 쿠푸의 피라미드 가까이에는, 카프라와 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건조되었다. 피라미드의 지하나 그 주위에는 신전이나 작은 피라미드군(), 귀족의 분묘가 만들어졌다. 피라미드는 제5왕조 이후에도 만들어졌으나 차차 소형이 되었으며, 신왕국 시대에는 왕릉이 암굴형의 무덤으로 변하여 갔다. 그러나 누비아에 있어서는 메로에를 중심으로 서기 350년경까지 피라미드가 건조되었다.

 

스핑크스(sphinx)

 

사자의 몸뚱이에 사람의 머리를 붙인 동물로 왕권의 상징, 선한 자의 보호신 역할을 하였다. 가장 오래되고 최대의 것은 제3왕조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에 부설되어 있고, 길이 80m에 달하여 이것이 신왕국시대에는 하르마키스 신[5]으로서 숭배되었다. 카르나크 신전 등의 참도(參道) 양측의 스핑크스는 아몬 신의 신수(神獸)인 양의 머리를 붙여 '두 개의 지평선(영토)'의 수호신으로 하였다. 그리스 신화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동체를 가지고 있으며, 왕자(王者)의 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신전과 왕궁·분묘 등지에서 발견된다. 문 양쪽에 세우거나 건조물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모두 날개 돋친 상으로 수호신적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뿐 아니라 오리엔트 각지에서 만들어져, 궁전이나 신전의 입구나 참배로에 고정시켜 놓거나 혹은 작은 부적처럼 만들어진 것도 있다. 기제(Gizeh)에 있는 카프라왕의 피라미드의 참배로에 있는 스핑크스는 특히 유명하다.

 

이집트에서는 신전이나 묘는 석재이기 때문에 유적으로서 많이 남아 있으나 주택의 예는 적다. 이것은 건축 재료가 소멸되기 쉬운 볕에 말린 벽돌이나 나무 또는 갈대 등이었고 택지도 현대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르나 유적이나 묘의 벽화, 그리고 가옥의 모형(부장품) 등으로 대략은 알 수 있다. 즉 대저택은 연와(煉瓦)[6]로 담을 둘러싼 정원에 못을 파고 수목를 심었다. 건물은 이층으로 방이 열개 이상인 것도 있으며 원주(圓柱)가 있는 파브리크의 방으로 나누어져서 시중들의 방·부엌·욕실·변조 등이 부속되어 있었다. 가구는 침대·의자·작은 탁자·장궤(長櫃) 등이고 벽걸이와 일종의 양탄자 같은 것도 애호되었다. 창문은 천장 가까이에 작게 만들어져서 외부의 열을 차단하였다. 부지내에 성당(聖堂)을 세우고 담벼락에 연하여 가축의 우리나 사일로를 설치하였다. 일반의 가옥은 훨씬 간단하여 현대의 농가와 유사하고 이층집의 경우에는 아래층이 창고가 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북쪽에 시원한 바람을 쏘일 테라스를 붙이고 있다. 묘를 파는 인부 등은 방이 이어달린 긴 집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이집트 문학

고대 이집트 문학은 그림문자로부터 발달했다. 그림문자는 사물의 특징을 간략히 그린 것이다. 그림문자로부터 표의문자·표음문자가 생겨났다. 표음문자에는 음철문자(2음 이상으로 구성)와 알파벳(11)이 있다. 이들 문자에 결정사가 붙여진 것이 이집트 문자이다.

 

파피루스(papyrus)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종이와 비슷한 매체로, 같은 이름의 갈대과의 식물 잎으로 만든다. 파피루스 식물의 학명은 Cyperus papyrus으로서 보통 2~3m의 크기로 자란다. 파피루스 줄기를 세로로 얇게 잘라 만든 일종의 종이 대용품으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각종 문서 작성에 이용하였다. 나일강 삼각주에는 이 식물이 풍성하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인들이 최소한 초대 왕조 이전에 발명했다.

 

이집트의 제5왕조 시대부터 시작하여 약 3000년 이상 쓰였으며, 사용문자도 신관문자(神官文字)와 민중문자(民衆文字), 초기 아라비아 문자, 라틴 문자, 콥트(Copt) 문자 등 다양하다. 이집트어로 된 파피루스 문서는 피라미드의 왕조 고분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파피루스 문서로는 의학서, 연대록, 사자(死者)의 서(시문(詩文) 등 이집트 문화와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파피루스를 매개로 한 고대의 문서로 책의 이전 형태인 코덱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러한 고대의 문서들도 파피루스라 부른다.

 

 

미라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처리로 오랫동안 원형(原形)에 가까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인간 또는 동물의 시체. 고대 이집트·잉카 등에서 성행한 풍습으로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600년경부터 기독교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내세에 영혼이 잠들 육체가 있어야 한다는 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집트에서 특히 성행했으며 그 밖의 고대 민족이나 근대 미개사회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세계적으로 분포되고 있다. 고대의 미라는 현대의 미라와는 달리 뛰어난 영술(靈術주력(呪力위력(威力무력(武力) 등을 가졌던 자의 시체를 보존하면 그의 힘이 사후에도 머물러 있게 되어 자기들을 보호한다고 하는 신앙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든 토착신앙이 미라를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이집트의 미라 제작은 30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제2 왕조시대의 미라이다. 그 후 고왕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작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내장을 처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또한 중왕조시대부터는 고인의 얼굴 모습을 전하기 위하여 얼굴모양을 본뜬 마스크를 만들어 두부에 부착시켰다.

 

완성된 미라에는 개구의식(開口儀式)이 행해졌는데, 이러한 의식으로 눈···수족 등의 기능이 되살아난다고 생각했다. 그 밖에도 이집트에서는 성수숭배사상(聖獸崇拜思想)이 성하여 개·고양이····학 등 그들이 신성시하는 조수(鳥獸)나 물고기 등을 미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래되어 이집트의 고유종교가 쇠퇴함과 더불어 3세기 이후에는 이러한 풍습이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의 미라로는 타림 분지의 고대국가 미라가 발견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육조시대(六朝時代) 이래 많은 승려가 미라화되었는데 이러한 기록은 고승전(高僧專)에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미라를 진신(眞身) 또는 육신(肉身)이라고 불렀는데 초기의 미라는 거의가 인공을 가하지 않았으나 수당시대(隋唐時代)에 들어와서는 시체에 칠을 발라 마포(麻布)로 감싼 미라를 만들었다. 중국의 미라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미륵신앙이 일본에 전해짐과 함께 일본에서도 미라의 제작이 나타났다.

 

사자의 서

고대 이집트시대 관 속의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안내서. 파피루스나 피혁에 교훈이나 주문(呪文) 등을 상형문자로 기록한 것이다. 고왕국 시대 왕은 내세에 있어서도 최고신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현실(玄室)과 벽에, 주문과 부적을 새긴 것을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한다. 중왕국 시대에는 귀족이나 부자의 관 속에 죽은 후의 행복에 관하여 기록한 관구문(棺構文, 코핀텍스트)’이 쓰여졌다. 신왕국 시대에는 주문에 의지하여 내세의 행복한 생활을 얻으려 했으나, 현세에서 선행을 쌓지 않으면 내세에 갈 수 없다는 사상이 나타나 죽은 이에게 이 사실을 가르칠 문구를 파피루스에 표하여 관에 넣은 것이 사자의 서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내세관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데르 엘 바하리

테베의 서쪽, 나일강 대안의 유적. 왼편에는 제11왕조 멘투헤테프 3세의 장제전(葬祭殿)이 있다. 돌벽의 기울어진 면에 줄지은 기둥을 가진 3층의 구조물이 지어졌는데, 2층 원형의 넓은 방 위에는 피라미드가 놓였다. 각층은 기울어진 길로 연결되었다. 이 건물의 오른편에는 이 건물의 구조를 보고 만든 제18왕조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이 있다. 오른편 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왕릉의 골짜기

테베 서쪽의 협곡(峽谷)에 있는 왕의 문()이라 불리는 장소. 2 중간기의 혼란에 의한 피라미드의 약탈이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는 암굴릉(岩窟陵)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지었다. 그 후 신왕국의 왕들은 이 부근 수백 m에 걸쳐 암굴묘를 팠다. 그러나 단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왕릉은 약탈되고, 재보(財寶)도 도둑맞았다.

 

투탕카멘의 왕묘

1922년 영국인 카터와 카나본 백작은 왕릉 골짜기에서 거의 도굴당하지 않은 제18왕조의 투탕카멘의 왕묘를 발굴했다. 왕묘의 전실과 현실에서 삼중의 관 속에 누워 있는 황금 마스크를 한 왕의 미라와 귀금속·귀석·아라바스타 등으로 만든 용상(龍床)과 집기·장식품 등이 출토됐다. 이것은 아마르나 예술의 대표 작품이다.

 

콥트 미술 [Coptic art]

3~12세기경에 이집트에서 그리스어와 이집트어를 사용하며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콥트인들의 미술로 부조 석상과 목판화 및 이집트 수도원들의 벽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목적과 관련이 없는 콥트 직물과 같은 분야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콥트 미술의 양식은 이집트의 후기 고대 미술에서 발전했다. 좀더 자유롭고 대중적인 미술 양식이 출현한 데는 경제적인 조건이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기념비적인 미술을 강조하고 값비싼 재료를 쓰지 않으며 풍부한 수련을 받은 숙련된 장인이 부족한 점 등 콥트 미술의 여러 양상을 보면 광범위한 후원제도가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콥트 미술의 평면적인 양식은 그것이 인간의 모습과 특징 및 동물과 식물의 장식성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는 것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형태의 윤곽선 및 세부묘사는 단순화되었고 모티프도 제한되어 있다.

 

이집트 신화와 예술

 

 

고대 이집트사람들이 첫 왕조부터 기독교 유입기까지 약 3천 년 넘게 믿던 다양한 신앙과 장례 의식을 포함하는 종교이다. 현재는 신앙이 더는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흔히 이집트 신화(-神話)라 부른다. 이 믿음의 중심에는 온갖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다양한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이집트 제18왕조에 들어서서는 한 신이 다양한 인격체를 포함함으로써 현재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는 삼위일체의 기원이 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집트의 신들은 각 가정집이나 지역의 중심 신전에서 재물 봉납과 기도로 숭배되었는데, 각 이집트의 왕조마다 몇몇 신들이 두드러지게 숭배되거나 신들이 연합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각 왕조의 파라오 이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종교는 다양한 신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령 파라오의 신성과 같은 교리는 이집트의 정치적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사후 세계와 같은 신앙은 미라나 피라미드와 같은 독특한 매장방식을 탄생하게 하였다.

 

이집트 신화는 지중해 연안 나라들과 유대 민족의 종교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일컬어지며 로마 문자 또한 고대 이집트의 신화와 역사를 서술할 때 쓰이던 신성 문자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신교

신들 간의 조합

이집트 종교의 일신교 풍조

아톤주의

우주론과 창조론

신성한 파라오

사후세계

 

 

 

 

 

 

 

 

이집트 종교의 역사

 

1. 선왕조

고대 이집트는 고고학적 연구가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고고학적 발견으로 말미암아 이집트의 종교는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 선왕조시대 장례 매장 방식은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의 초기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동시대에 매장된 동물들은 후기 이집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물형태 신들의 기원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초기 이집트시대에는 사람이나 신의 모습을 재현한 토우들도 발견되었고,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동물 형태의 신들보다는 사람 모습을 한 신들의 출현이 더 늦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자들은 초기 이집트의 종교는 지역마다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 작은 지역들이 서로 정복하고 정복되면서 서로의 신들이 각각의 신화에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이론은 고대 이집트 종교가 복잡한 다신론적인 종교로써 어떻게 지역의 수호신들이 전국의 보편적인 신으로 자리 잡게 되는지 설명해준다.

 

그런 와중에 약 기원적 3000년경에 상·하 이집트가 통일되면서 초기왕조가 들어섰다. 새로운 왕조에서 특정 신이 국가 중요의 신으로 부각 되고 파라오가 신격화되는 등 이집트 종교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집트 제1왕조의 파라오들과 같은 초기의 왕들은 막대한 돈과 인원이 투입된 무덤에 매장되었는데, 당시에는 사후세계에서 왕의 시중을 들어줄 사람을 같이 매장하는는 순장제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매장방식은 왕족의 장례의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설명한다.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은 하급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2. 고왕국과 중왕국

고왕국 시대를 통하여 주요 신들의 사제들은 각각의 다른 신화와 문화를 가진 여러 신을 단체로 묶어 조직화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헬리오폴리스와 헤르모폴리스, 멤피스의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이 시대에 혼합주의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고왕국 시대에는 중요한 왕족이 아닌 귀족들이 여전히 석실 분묘에 묻혔지만, 파라오들은 피라미드들이 석실 분묘를 대신하게 되었다. 피라미드들은 거대한 장례 신전의 집합체로써, 이집트의 신전 건축 개발에 굉장한 역할을 하였으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왕국 시대에는 헬리오폴리스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종교 도시가 되었고 그 도시의 수호신인 라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4왕조는 기존 계단식 피라미드를 태양 광선을 상징하는 정방형 피라미드와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5왕조에 의해서 태양신 라는 왕권과 사후세계와 관련되어 국가적 신으로 추앙받았다. 동시대에는 오시리스 또한 사후세계의 주요한 신이 되었다.

 

5왕조 말에 파라오들은 그들의 무덤에 피라미드텍스트를 새겨 놓기 시작하였다. 이 기록들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태양과 오시리스식의 사후세계 개념뿐만 아니라 선왕조시대의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도 포함하였다. 그래서 피라미드 텍스트는 고왕조와 그전 시대의 이집트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기원전 22세기에 고왕조는 몰락하여 고왕조 시대 동안 발전했던 이집트 종교의 결과물들과 함께 무질서적인 제1중간기에 진입하였다. 고왕조시대에는 사후세계에서의 부활을 왕족에 제한하였었지만, 1중간기에 들어 사회적 계층의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모든 이집트인이 "사후세계의 민주화"라 불리는, 모든 이들에게 맞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오시리스식의 관점은 일반인들에게 더욱 매력 있어졌고, 그 때문에 오시리스는 가장 중요한 신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집트를 재통일한 중왕국의 새 왕조는 테베에 기반을 둠에 따라, 그들의 수호신인 몬수가 국가적 신으로 숭배되었다. 하지만, 중왕국 후반에 들어 이 신앙은 테베의 새로운 수호신이 된 아문의 부상과 함께 빛을 잃었다.

 

 

3. 신왕국

 

기원전 1872년 중왕국의 마지막 왕조인 제12왕조가 몰락한 이후, 2중간기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다시 기원전 1570년경에 신왕국의 첫 파라오인 테베의 지배자들에 의하여 재연합되었다. 18왕조는 테베의 수호신인 아문을 강력한 신으로 증진시키고 오랫동안 왕권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진 태양신 라와 융합시켰다. 테베에 있는 아문-라의 카르낙 신전은 이집트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이집트가 외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게 되면서, 많은 근동의 신들도 흡수하게 되었다. 신왕국시대에 정복된 누비아에서도 그 지역의 신들이 이집트로 흡수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아문신의 특징에도 영향을 끼쳤다.

 

신왕국의 종교적 전통은 기원전 1350년에 아멘호테프 4세가 파라오가 되면서 깨졌는데, 당시 왕권을 지나치게 간섭하던 테베의 신관들을 견제하고자 그는 아톤이라는 유일신으로 아문의 신적 지위를 교체하였고 자신의 이름도 '아톤의 종'이라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그는 이집트의 수도를 새로 지은 아마르나로 천도하였다. 고고학자들과 미술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크나톤은 전례가 없는, 아톤의 외관으로써 태양 그 자체를 숭배의 유일한 매개자로 섬겨 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아톤주의는 발전한 신화 관이나 신학 바탕도 없었고 비 인격성과 그로 인한 거리감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감흥을 끌지 못했다[158].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여전히 비밀리에 기존의 신앙을 믿고 있었다[159]. 그럼에도, 고대 이집트 정부는 이집트 사회의 기반이 되는 다른 신들에 대한 금전적 지원과 투자를 중단하였다[160]. 민중의 지지가 없었던 아텐주의 신앙은 결국 아크나톤의 사후, 아크나톤의 후계자인 투탕카멘이 모든 아텐주의 기념물을 파괴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부활시킴으로써 끝을 맺었다.

 

아마르나 시대의 결과물들을 후대의 파라오들이 제거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장기간에 걸쳐 파라오의 종교에 영향을 끼치며 쇠퇴하였다. 아톤주의 신앙이 끝난 후 그에 대한 사회적 반동 때문에 대중들은 평상시에도 더욱 직접적인 방법으로 신들을 믿었고, 그로 인하여 파라오의 신성은 줄고 인간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더군다나 아몬 신앙의 부활로 말미암아 테베 사제들의 권력은 더욱 신장하였고 이는 신왕국이 몰락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제국

 

기원전 1000년경부터 매우 쇠약해진 이집트는, 외부에서 침입한 리비아인과 누비아 인들과 같은 외국인들에게 점령당하여 혼란스러운 제3중간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는 정권의 불안정과 외국문화의 영향 등으로, 이집트 숭배 형태의 특징으로서 동물숭배가 대중화되었다. 특히 제3중간기에는 여신 이시스가 더욱 대중화되었고,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여신으로 숭배받게 되었다.

 

기원전 4세기에 이집트는 제32왕조라고도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치하에서 주로 전통적인 종교와 건물을 건설하고 많은 신전을 복구하면서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웠다. 그리스에서 유래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존 이집트 종교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화를 결합시키기 위하여 두 문명의 신들을 세라피스(오시리스와 아피스)와 같이 혼합하였다. 그럼에도 두 종교의 특징 대부분은 각자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가 기원전 30년에 자살한 이후, 로마의 황제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왕좌를 대신하여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면서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교 제도는 이집트가 사실상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변하게 되었다. 이시스 숭배의식은 그리스와 로마를 비롯한 해외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헬레니즘 문명화되어 로마 제국 전체에 걸쳐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정작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종교의 신학과 신앙을 비롯한 교세는 신전이 있는 섬과 지역에 한정되는 소규모로 점점 축소되었다.

 

이집트 종교는 결국 기원후 1세기에 배타주의적 일신교인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더욱 쇠퇴하였으며, 서기 383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고, 이집트를 비롯한 모든 로마 제국의 영토에 있는 이집트 종교 관련 신전은 이교도로 취급되어 강제로 폐쇄되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집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으나 사실상 죽은 종교가 되었다.

 

5. 영향

 

이집트 종교는 고대 이집트 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기념물인 수 많은 신전들과 무덤들을 생산하였으며 수 많은 문화들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다.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와 태양 원반등을 비롯한 다양한 상징과 기호들은 지중해와 근동을 넘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리스인들의 엘리시온의 발상은 이집트의 사후 세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많은 학자들은 유대교 또한 이집트의 아텐주의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후기에 시작된 기독교의 지옥에 대한 개념 역시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두아트와 닮은 점이 많으며 성모마리아 또한 이시스와 호루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이집트 종교는 영지주의의 탄생과 개념화에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는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비밀스러운 마법 지식과 혼합된 토트 신앙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신앙의 자취는 현대의 이집트 민족 문화속에서도 남아있다. 특히 1798년 프랑스가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면서 이집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서구 문명은 처음으로 고대 이집트 종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집트 종교의 다양한 내용을 서양 예술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이집트 종교는 대중 문화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신이교주의 운동과 함께 '케네티즘'이라는 이름으로 재발생하였다.

 

 

< 헤지레의 초상 >헤지레의 초상은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보이는 모든 걸 표현하려는 '엄격한 형식' 과 개념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형식적이며 딱딱한 이집트 미술입니다

< 네페르티티 왕비 > 이집트 미술 중 거의 유일하게, 엄격한 형식을 지키지 않은 한 작품입니다. '네페르티티 왕비' 자는 조각 작품은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실감나게 인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 람세스 2세와 아부심벨 신전 >이집트 미술의 큰 규모와 인위적인 높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집트 왕조의 웅장함을 잘 표현했씁니다.

<나르메르왕의 파레트>  BC 3000년경 히에라콘폴리스 출토

<라 헤테프 왕자와 그의 아내 네페르트>

<마이세리우스 왕과 왕비>

<아크나톤의 두 딸과 네페르티티>

<아크나톤 왕>

<네페르티아벳 공주의 기념비> BC 2590, 석재, 37.5 x 52.5cm>
<서기관, 5대왕조 석재, 높이 49cm>

<앉아 있는 모습의 서기관, BC 2620∼2350, 석재, 53.7 x 44 x 35cm>

<카프라 왕, 고대 이집트 고왕국 시대 제 4왕조 B.C 2700년경 /섬록암 / 높이 168cm>

<스핑크스> BC 2620, 석재, 183 x 480cm

<투탕크아멘의 제 2의 관 KING TUTANKHAMEN'S SECOND COFFIN>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 제 18왕조 B.C. 1300년경 금 귀석류의 유리 파이앙스 204×68×78.5cm / 이집트 테베 출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소장

<무릎꿇고 있는 페피, BC 595-589년(26왕조), 석재 15.2 x 4.6 x 9cm>

<투이>BC 1400년(18 왕조), 나무 33.3 x 7cm

<아토르여신과   세티1세>BC 1303∼1290, 226.5 x 105cm, 석재

http://art2me.org/images-art/08-gamsang/02-godae/01-egypt/index.html

 

 

 

이집트시대 미술 연대기 (B.C.3000 ~ 300)

 

 

선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BC왕조이전 ~ 3200) 선사시대 ~ 1왕조전

 

이집트 제1왕조가 성립하기 이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암벽화·무늬토기·점토인형·화장용구 등 선왕조시대(~BC 2925)의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구리와 동석(凍石)은 매우 일찍부터 장신구 재료로 쓰여왔다. 도기는 이 시기의 특유한 산물로서 세련된 기법과 대담한 장식기술의 발전을 보여준다. 단단한 석재를 이용한 작업은 선왕조시대 후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각은 작은 동물상 조각이라든가 석판 팔레트(원래 눈화장 용구)의 부조장식 따위에서 출발했다. 기본적인 드로잉 및 회화 기법은 상()이집트 암벽화에 나오는 동물화라든가 배 타는 장면, 사냥장면과 아울러 더욱 세련된 히에라콘폴리스의 무덤벽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목재가 귀했기 때문에 건축에는 나일 강의 진흙과 갈대를 이용하다가 이후에 햇빛에 말려 만든 벽돌을 사용했다.

 

왕조시대 이집트 미술

 

1. 초기 왕조:(BC 3100 ~2686) 1 ~ 2왕조 _ 나르메르에 의해 하나의 왕국 탄생 - 피라미드, 신전등 거대 건축물 축조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통합(BC 3100)을 계기로 이집트 문화의 다양한 흐름이 하나로 모여 풍요한 단일문화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왕조시대(BC 2925~2575)의 가장 유명한 미술품은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로서 나르메르 왕이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을 묘사하여 이집트의 통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개별장면을 선명하게 처리하고 파라오를 신성하게 묘사한 점에서 오랜 기간 이집트 미술에서 나타나는 인물표현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는 옆모습으로 그렸으나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며, 어깨가 정면을 향한 반면 상반신은 절반 정도 옆으로 기울었고, 다리는 또다시 옆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린 미술가의 주된 의도는 가능한 한 많은 세부묘사를 담는 데 있었다. 즉 한 시점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가 알고 있는 모습들을 모두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여 형식적 통일성을 부여했으며 인물들의 크기를 달리해 상대적인 신분의 차이를 표현했다. 문화의 응집성이 전반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예술적 관행은 BC 2000년대말에 이른바 아마르나 양식이 등장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고왕국 시대 (BC 2686 ~ 2186) 3 ~ 10왕조

 

고왕국시대(BC 2575~2130) 이래로 무덤(죽은 자의 영주지)과 신전(신의 영주지)에 석재가 쓰이기 시작했다. 진흙벽돌은 여전히 가장 흔한 일상적 건축재료로서 왕국을 짓는 데도 쓰였고 요새라든가 신전 경내와 도시의 성벽, 신전 주변의 부속건물 등을 짓는 데도 쓰였다. 고대 이집트의 성읍도시는 대부분 나일 강 계곡의 범람원인 경작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편 신전과 무덤은 대체로 나일강의 홍수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 지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따라서 이집트 건축에 대한 연구는 어쩔 수 없이 장례 및 종교 건축물에 비중을 두게 된다. 하지만 자연이나 사람의 손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진흙벽돌 구조물은 이집트의 건조하고 더운 기후 덕분에 약간은 남아 있다.

 

이집트의 묘소 건축은 크게 발전했으며 대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대규모 피라미드를 짓고 그 안에 군주의 시신을 보관하는 매장실을 두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무덤과 신전으로 이루어진 건물군을 배치했다. 사카라에 있는 제3왕조의 2대왕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이다. 이 최초의 석재 건축물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는 6층의 계단을 포개 올린 디자인과 방대한 규모(544×277m)의 경내시설이 볼 만하다. 경내시설은 양질의 석회석을 붙인 사각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멤피스의 왕궁과 연관된 구조물을 나타내는 듯한 일련의 '모조' 건축물을 지어놓은 것이다. 기자에 있는 유명한 대건축물들은 피라미드 건축의 고전적 형태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제4왕조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가 가장 걸작이다

 

토대를 이루는 정4각형의 4(四面)5.3의 면적을 포괄하면서도 각 변의 길이가 거의 비슷해 서로 30이상의 오차가 나지 않는다. 피라미드의 4면방향도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에 일치한다. 완공 당시의 피라미드 높이는 146.7m였다. 그밖의 다른 특징들도 이 건축물이 두드러져 보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받침돌을 대어 높이 올린 대열주(大列柱)와 압력을 줄이기 위해 위층에 5개의 빈 칸막이방을 올린 화강암 왕실(王室)이 그것이다. 왕의 두상 아래 사자의 몸통 형상으로 조각된 대형 스핑크스는 카프레의 피라미드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신전은 죽은 파라오와 이집트의 여러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지은 것들이다. 무덤 안에는 가구와 장신구 그밖의 공예품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보존되어왔다.

 

귀족들의 무덤은 왕의 피라미드와는 약간 달리 진흙벽돌이나 석재로 지은 꼭대기가 평평한 직4각형의 구조물이었다. 사카라에 있는 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가 알려진 가장 최초의 것이다. 19세기에 고고학적 발굴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이들 무덤에 마스타바(아랍어로 '긴 의자'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대한 상부구조물에는 많은 창고가 마련되어 죽은 사람을 위한 식량과 비품을 저장해놓았고, 그 시신은 땅 밑에 있는 직4각형의 매장실에 안치했다. 또한 상부구조물 안에는 항상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흙을 쌓아올린 낮은 봉분이 있는데, 어쩌면 고대의 원시적인 분묘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고왕국의 석조무덤과 신전은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밝은 채색의 부조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벽장식 조각 가운데 특히 뛰어난 것은 평부조 작품으로 제5왕조의 왕실무덤 건축물과 멤피스 묘역의 제5·6왕조시대 개인무덤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부지르에 있는 네우세레 왕의 태양신전 부조와 사카라의 프타호테프 및 티이 왕 무덤에 새긴 일상생활 장면도 뛰어나다. 목재나 석재로 조각된 크고 작은 조상들은 사자의 초상을 뚜렷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시기에 조각 인물상을 묘사하는 규범이 세워져 정확한 비례와 자세, 세부의 배치 등이 상세하게 규정되었다. 군주와 관리들은 항상 그들의 지위에 걸맞게 위엄 있는 태도로 묘사되었다. 하인과 일꾼들은 각기 자신들의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는 모습으로 보다 자유롭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각규범은 양식의 지속성과 기법의 고도성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3. 중왕국 시대 (10BC 2040 ~ 1786) 11 ~ 17왕조 _ 맨투호테프에 의해 재차 통일

 

고왕국 말기에 내란과 전반적인 경제침체로 정교한 무덤건축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적 질이 저하되었다. 예술의 부흥이 이루어진 것은 중왕국시대(BC 1938~1600)에 좀더 안정된 정치적 풍토가 조성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왕들의 초상조각이 주목을 끄는데 고왕국시대 인물상의 위엄있는 무표정과는 대조적으로 근심이나 비애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파이윰 오아시스 부근에 지은 왕실의 장례용 피라미드와 신전들은 이 시기에 더 규모가 작아졌고 주로 말린 벽돌과 석재포장을 사용했다. 특히 부조와 회화는 높은 수준의 예술적 기량과 정확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멤피스의 전통을 되살린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부조작품은 테베의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과 카르나크에 있는 세소스트리스의 작은 사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인물과 문구를 배치하는 데서 여백을 능숙하게 사용하여 조각의 세련미를 크게 높이고 있다.

 

4. 신왕국 시대 (BC 1567 ~ 1085) 18 ~ 25왕조 _ 아모스의 수복

 

1차례 정치적 격변기를 거친 뒤 번창하는 신왕국(BC 1567~1085)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예술의 개화기가 도래했다. 신전·사당·암벽무덤·명문비석 등이 나일 강 계곡을 따라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 건립되었다. 웅장한 피라미드는 왕권의 유력한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도굴꾼들의 확실한 표적이 되기도 했다. 신왕국시대에는 왕실무덤의 도굴과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닮은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테베의 궁벽한 골짜기에 무덤을 한데 모아놓았다. 그곳의 이른바 '왕들의 계곡'에는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어 아무런 외부 구조물 없이 다만 무덤입구의 암벽표면에만 표시를 새겨놓았다. 또한 암벽무덤은 귀족계급에서도 흔히 매장실로 사용했다. 그 대부분은 아주 단순한 하나의 공간을 이용하여 마스타바 무덤의 복잡한 방들이 하는 역할을 모두 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일부는 상당한 건축적 노력을 기울여 지은 것도 있었다. 아스완에 있는 거대한 회랑들은 종종 이리저리 얽혀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는데 일부는 바위를 공들여 깎아 기둥을 만드는 등 정식으로 지은 것이지만 일부는 대충 깎아 만든 것이다. 회랑 내부에는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었다. 때로는 정면 현관에 주랑을 설치하고 명문을 새겨 웅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신전건축은 크게 예배용 신전과 장례용 신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일상적인 예배의 대상인 신상을 모셔놓은 곳이고, 후자는 죽은 왕들의 제사를 행하는 사당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전의 내부시설과 웅장한 크기는 제사장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음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전건축은 거대한 현관과 열주가 늘어서 있는 마당, 많은 기둥이 있는 회랑, 감실(龕室), 여러 예배당을 포함했다. 신전 내부의 깊숙한 곳은 파라오와 대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기둥과 받침대의 디자인은 종려라든가 파피루스 같은 식물모양을 본떴으며 벽도 식물무늬로 장식했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신상과 군주의 조상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했다. 주신전 건물 바깥으로는 호수가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우물이 있어 제례에 쓰는 물을 공급했다. 후기에는 탄생실을 두어 왕의 거룩한 출생을 기리기도 했다. 부속건물을 망라한 전체 신전은 진흙벽돌로 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예배용 신전은 오랜 세기에 걸쳐 테베에 세워진 대성전들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형식을 이룩했다. 그 가운데 건축학적으로 가장 만족스럽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자면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착공한 룩소르 신전이다. 위대한 건축가인 람세스 2세가 지은 가장 볼만한 대건축물로는 아부심벨 신전을 들 수 있다. 천연의 암석을 파서 만든 이 신전은 전반적으로 보통 이집트 신전의 설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신전 정면은 거대한 좌상이 자리잡았으며 기둥 있는 회랑이 2개 잇닿아 현관으로 통하고 감실에는 람세스 자신의 조상을 포함해 4개의 신상이 비치되어 있다. 또한 제21·22왕조의 왕들이 아몬 레 신에게 봉헌한 삼각주지대 타니스의 대신전에 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신전은 거대한 조상과 10여 개의 오벨리스크를 비롯한 석재의 대부분을 이집트의 다른 신전들에서 차용해왔기 때문에 앞선 시기의 건축물들을 집대성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신전은 예배용 신전일 뿐 아니라 경내에 매장되는 왕들을 위한 장례용 신전이기도 했다. 그밖에 볼 만한 예배용 신전의 유적으로는 카르나크·아비도스·아마르나 등지의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신왕국시대의 장례용 신전은 대부분 서부 테베의 변두리 사막지대를 따라 건축되었다(색인 : 장제전). 1가지 예외를 꼽는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하트솁수트 여왕의 신전으로서, 다이르알바리의 멘투호테프 2세의 무덤 부근에 있다. 관례에 따라 설계된 장례용 신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이었던 것 같다. 이는 주로 오늘날 남아 있는 석영암으로 만든 2개의 멤논의 거상으로 미루어 판단한 것이다. 신전의 뜰과 회랑의 유적에서 발견된 이 거상들을 비롯한 그밖의 왕실조각상들은 오늘날에는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웅장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신전의 설계와 석재의 대부분은 람세스 2세가 자신의 신전인 라메세움을 짓는 데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장례용 신전 외벽의 벽장식은 주로 왕들의 군사활동을 다루었으며 내부의 장면은 주로 제례적인 의의를 갖는 것들이었다.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보물들은 왕실과 그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위해 만든 다양한 사치품들의 전형이다. 회화는 이 시기에 독립적인 예술로 자리잡았고 공예는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제18왕조에 이르러 회화와 조각은 우아미와 세련미를 보였으며 고전적인 표현규범을 좀더 자유롭게 적용했다. 인물상은 가볍고 부드럽게 처리되었고 세부묘사는 더욱 정밀해졌다. 부조미술의 전통은 테베에서 부활되었고 다이르알바리에 있는 하트솁수트 신전의 조각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왕실부조는 테베와 사카라의 개인 무덤에 있는 것과 쌍벽을 이룬다. 이집트 회화는 테베에 있는 귀족들의 무덤장식에서 최고수준에 달했다. 장식매체의 특성과 외견상 더욱 확대된 예술적 자유로 오락적인 내용을 담은 작은 세밀화가 표준화되었다. 메나와 나크트의 작은 무덤들에는 그와 같은 재미있는 소품들이 가득하다. 레크미레 같은 큰 무덤들의 회화는 좀더 형식적이지만 이 역시 이례적으로 세부묘사가 풍부하다. 테베와 텔엘아마르나의 왕궁과 주택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천장화의 단편들은 풀밭과 정원을 배경으로 한 상류계급 일상생활의 일면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이 시기에 부각된 아마르나 양식은 아크나톤 왕(아멘호테프 4)의 치세와 더불어 등장했다. 이 양식은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왕실가문의 성원들도 비공식적인 일상생활 속의 모습으로 철저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비록 람세스 2세 치하에서 거상(巨橡) 조각이 절정에 달하고 뒤이어 아크나톤 치하에서 관능적 사실주의가 번창했지만 이집트 조각은 람세스 2세 시대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시대 이후 왕실 인물상은 대체로 인습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며 때때로 조각가가 예외적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예컨대 사자를 데리고 리비아인 포로를 옆에 끌고 가는 람세스 6세의 특이한 인물상(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같은 것이 그렇다. 말기 왕조들의 왕실 조각과 민간 조각에서는 복고풍이 특히 두드러진다. 25왕조의 누비아 왕들의 인물상은 제12왕조의 왕실 조각을 많이 본뜬 것 같은 야성적인 사실주의를 보여준다. 중왕국과 제18왕조 시대 조각상의 유형이 부활되었으며 많은 걸작이 제작되었다. 테베 시장 몬템하트의 조각상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은 풍부한 다양성과 뛰어난 기법, 때로는 획기적인 사실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후기시대 작품들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조각적 특성을 고찰할 때 대부분의 이집트 조각이 갖는 1차적 목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집트 조각은 기본적으로 죽은 사람을 오시리스 앞에 재현하거나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대신전의 신들 앞에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문에 조각상은 단지 물리적 재현일 뿐만 아니라 거기 부합하는 문서를 담는 도구이기도 했고 그리하여 아름답게 조각된 표면에 어울리지 않게 문서를 새겨넣기도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도기는 예술성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도기는 대부분이 암포라 형태의 단순한 물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제18·19왕조에 이르러 화려하게 꽃무늬가 채색된 고급 기물이 등장했다. 파이앙스(광택이 있는 석영가루의 합성물)가 전반적으로 도기를 대신할 조형재료로 등장해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작은 동물상과 인물상 등의 재료로 널리 쓰였다. 가장 두드러진 예로 중왕국시대의 푸른 광택이 나는 하마상이 있다. 특히 후기시대에 파이앙스로 만든 부적과 작은 신상이 크게 발달했다. 그밖에 다양한 색상의 파이앙스 타일도 널리 쓰였다. 유리는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선왕조시대 초기부터 유약의 형태로 알려졌으나 제18왕조 때까지는 독립적인 재료로 쓰이지 않았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유리는 항상 사치의 상징으로서 부적·구슬·상감·술잔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이집트 금속공예의 장인들은 구리·청동·금을 많이 사용했다. 초기에 대부분의 용기는 금속덩어리(잉고트)를 나무로 된 모루 위에 놓고 두들겨 부풀려서 만들었다. 뒤에는 주물이 지배적으로 쓰였다. 대형 청동상 주물은 신왕국 말기에 제25왕조 때까지 절정에 다다랐다. 이 시기의 걸작으로는 카로마마상(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있다. 이 여인상의 유례없이 우아한 조형미는 겉옷의 깃털무늬와 정교한 꽃무늬, 옷깃을 이루는 금은 상감에 의해 더 한층 돋보인다. 이집트에서는 금이 은보다 구하기가 쉬웠다. 금은 이집트의 장신구를 풍부하게 만들었다(색인 : 금세공품). 그것은 상감과 칠보세공·목걸이·구슬 등에 쓰였다. 보석은 쓰이지 않았지만 홍옥수, 자수정, 석류석, 붉은색과 노란색 벽옥, 청색 유리, 장석, 터키옥, 마노 등 다양한 준()보석이 널리 쓰였다. 18왕조 초기의 아호테프 여왕과 함께 매장된 대량의 장신구들(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가운데는 디자인이 특이한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특히 사슬 모양의 금목걸이가 걸작이다. 18왕조 시대의 것으로 멋진 장신구가 많이 전해오지만 어느 것도 투탕카멘의 장신구(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에는 못미친다. 이 대량의 수집품은 금세공과 보석세공사들의 모든 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나무와 상아, 동물의 뼈를 사용한 조각은 왕조시대 전기간에 걸쳐 높은 수준의 기예를 보이고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굴된 화장용구와 그밖의 장식물들이 특히 볼만하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왕의 매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식탁·평걸상·침대·옷장 등 조각과 상감을 새겨넣은 수많은 가구류이다.

 

5. 후기왕조(BC 661 ~ 332) 26 ~ 30왕조

 

 

프롤메마이오스 왕조(BC 305 ~ 30)

 

로마.비잔틴 이집트(BC 30 ~ AD641)

 

BC 332~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한 이후 엄밀한 의미에서 파라오의 독립적인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의 통치 아래 미술과 건축은 심각한 변화를 맞이했다(색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장례용 신전은 여전히 고대의 모형을 따랐지만 갈수록 그리스의 영향이 크게 나타났으며 때로는 추하게 보이기도 했다. 누비아에서는 토착적인 미술전통이 로마 시대 이집트의 전통과 융합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로마 시대 이집트(BC 30~AD 642)의 관에 쓰인 초상화는 이집트 특유의 예술적 양식을 낳았으며 이로부터 새로운 회화양식이 생겨나 비잔틴 성상(聖像)으로 이어졌다.

 

 

 

 

5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