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3부 메소포타미아 미술[Mesopotamian art]

草霧 2013. 2. 3. 00:00

 

 

 

 

 

고대 미술 3

 

 

문명의 발달

 

 

3 메소포타미아 미술[Mesopotamian art]

 

 

 

 

문명의 발달

문명(文明)은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문명(civilization)이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키비스(civis:시민)나 키빌리타스(civilitas:도시)에서 유래하였으며,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문명이란 낱말은 18세기쯤에 사용되기 시작한 어휘로서 유럽의 국가 형성과 관련된다. 특히 프랑스에서 식민지 개척 과정 중 유럽과 비유럽의 차별성 혹은 '문명''야만'을 차별성을 두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생긴 옛 나라들의 미술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강의 사이'라는 의미로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에 끼어 있는 비옥한 충적층대(沖積層帶)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류 문화가 발생한 땅으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과 더불어 기원전 5000년에는 원시농경생활이 상류 지역에서 영위되고 있었다.

 

 

 

현재의 이라크 공화국을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가리키는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최고의 문명이 발생한 지역이다. 기원전 6천년경부터 원시농경사회가 출현하고 햇볕으로 말린 벽돌로 지어진 주거가 수십채씩 모인 촌락에서는 밀의 재배와 가축의 샤육이 행해지고 채문토기가 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를 특징지우는 토기는 아나토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출현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초기부터 여라가지 그릇의 형태와 풍부한 장식 모티브를 갖는 채문 토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사마리기,하라후기에 있어서는 바둑문양, 삼각문양, 둥근문양, 지그재그, 체크 등의 기하학적 문양 외에 동물과 인물문양도 더해져 원시농경사회를 증명하고 있다.

 

이라크 국립박물과 소장의 <채문토기 접시>는 하라후기를 대표하는 출토품의 하나이다. 밝은 갈색 바탕 위에 적색과 흑색의 꽃무늬와 체크무늬를 정연하게 배치한 장식법에서 채문 토기문화의 발달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란 서남부에서도 기원전 4천년경이 되면 <채문토기>가 만들어지게 되고, 동물의 머리와 뿔을 극도로 과장한 디자인이 이 지방의 장식 모티브를 특징지우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 사람들

"자신들의 생명과 땅을 빼앗으려 기회만 노리는 억센 유목 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현실에 입각한 사고가 발달하였으며 사냥이나 전투 장면 등 현실적 작품을 제작하였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두 강 사이에 있는 광대하고 비옥한 관개지역에 흩어져 있던 부족들이 신격화된 통치자에 의해 최초로 통합되어 형성된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000년경에 문명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사방이 트여 있어서 여러 도시 국가간의 항쟁과 침입이 서로 교차하는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미술도 일정하지 않지만, 서아시아 고대의 도시 국가의 절대적 군주를 위한 기념적 양식을 띄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남부의 바빌로니아와 북부의 앗시리아로 대별된다. 이집트의 미술이 영원한 저승에의 영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메소포타미아는 자신들의 생명과 땅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억센 유목 민족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현실에 입각한 사고가 발달하였고 죽음을 무서워했으며, 현실의 생에 집착한 강력한 이승의 삶을 위한 양상이 두드러진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수메르 인들은 이집트처럼 체계화된 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많은 지방 신을 갖고 있었다. 이 신들은 국가와 영토 등을 소유하고 천체와 날씨, , 풍년 등을 관장하여 일반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은 그 지역 행정의 중심이 되었고 이 행정적 사항들은 신관에 의해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그래서 이 점토판에는 종교적인 것보다 오히려 생활에 관계된 내용들이 많았다.

 

1. 나람신의 전승비

나람신의 유명한 전승비는 그를 뿔 투구로 상징되는 병사와 적군 위의 산을 오르는 신의 왕으로 서술한다. 비록 비는 엘람에 의해 약탈되어 옮겨질 때 윗 부분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나람수엔의 자존심, 영광과 신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아마 왕이 신으로 서술된 역사의 첫 순간이었다. 비는 6피트 7인치 높이이며 분홍색의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비는 수사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제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나람수엔은 서술하는 흡사한 부조물이 피르휘세인에서 디아르베크르 동북쪽 수마일 지점에서 발견되었다.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기념비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이다.

 

이 비석은 아카드인들이 만들었는데, 왕을 아주 크게 묘사하여 왕의 강인함과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한다. 또한 왕의 발 밑에 사람이 깔려있고 창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새겨놓음으로서, 지배자의 절대권력과 지배당하는 이의 복종이 표현되어 있다.

 

 

 

2. 아카드왕의 두부 (사르곤 왕)

 

 

 

3. 그리핀 (황금팔찌)

그리핀은 사자의 몸 (날개가 있거나 없기도 하다) (독소리)의 머리가 달린 신화적 동물, 7세기초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사산왕조 페르시아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금속 공예 부조 등 페리스아 전통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비잔틴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재의 삶을 위한 기원과 염원이 담긴 세속적인 미술

메소포타미아의 원시농경사회 촌락은 기원전 4천년경이 되면 점차로 그 규모가 커지고 초기 도시단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이곳에는 기원전 4천년 중반경부터 신전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면서 상업이 활발하게 되고, 후에 설형문자로 발달하는 그림문자도 출현한다. 이와 같은 미술문화를 탄생시킨 것이 수메르인이었다.

 

 

 

유프라테스강 왼쪽의 우르에서는 기원전 4천년 중반경부터 도시문화가 번성하였다. 우르의 중심핵을 이루는 성역 이안나에는 신전이 만들어졌다. 이곳에는 벽면과 기둥이 도자기와 같은 재질감의 모자이크 장식 신전이 건설되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리석을 재료로 하는 환조조각도 많이 제작되었으며, <여성두부>는 이 시대의 조각을 대표하는 작품의 예이고, 커다란 눈과 눈썹의 표현에는 수메르인의 민족적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다음 줌데트 나스르기의 신전은 우르기보다 소규모인데 남녀의 예배자상이 많이 출토된다. 그것들은 대리석 입상으로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고, 눈에는 번쩍이는 조개껍질로 상감이 되어 있었다. 한편 머리띠를 두르고 턱수염을 기른 남성상은 수메르 사회의 지도자를 나타낸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성직자가 출현하기 시작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같은 지배자의 출현에 동반해서 수메르는 도시국가로 발전하고 초기왕조시대로 접어든다. 아주 튼튼한 성벽을 두른 도시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궁전도 출현하게 된다. 신전에는 이전 시기의 예배자상과 같은 형식으로 조각상이 만들어졌고, 인간을 대신해서 눈이 커다란 예배자상의 조각들이 신 앞에서 항상 예배를 올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같은 종류의 예배자상은 점차 실물크기의 등신대 조각으로 만들어져 표현영역이 확대되었다. 이것은 우르 왕묘에서 출토된 <성스러운 나무와 숫산양>이 잘 말해주고 있다. 수직기둥을 중심으로 둥근 맛을 주고, 표현이 금, 은 조개껍질 등으로 엎혀진 이 부장품은 사실적인 표현력과 좌우대칭으로 마무리 지은 구성력을 볼 수 있어 수메르 미술의 발달 단계를 볼 수 있다. 같은 부장품으로서 출토된 <우르의 깃발>은 조개껍질과 여러가지 색의 가죽으로 틀에 고정시킨 모자이크이고, 전쟁과 평화라는 국가적 사건의 서술적 표현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 왕조시대의 도시국가가 서로 전쟁을 반족하는 중 서북방으로부터 샘족이 침범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아카드 왕조를 수립한다. 아카드 왕조시대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수메르 미술의 연장선 위에 있으나 보다 자연주의 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아카드왕인 사르공 혹은 나람 신의 초상이라 여겨지는 청동상 두부는 눈꼬리부터 부풀어 오른 볼과 코의 사실적 표현이 뛰어나고, 각진 턱수염과 머리카락에는 권력자에게 알맞는 강한 느낌이 이싿. 또한 <나람 신의 승전비>도 훌륭한 인물 구성과 자연주의적 인물표현으로 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궁정미술이라고도 할 만한 양식을 타나내고 있다.

 

아카드왕조가 멸망한 후에 메소포타미아는 혼란상태에 빠진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계속 번영한 왕조 라가슈의 구데아로 그와 그의 아들 우르 닝길스의 조각상은 메소포타미아 조각의 전통에 장중함과 힘있는 느낌을 부가한 우수한 작품으로 남아있다.

 

기원전 2100년경 우르족은 세력을 확대해서 수메르의 도시국가를 통합하고 우르 제3왕조를 수립했다. 신수메르시대라고도하는 이 시대의 많은 도시에서는 성벽이 재건되고 신전 건축사업이 진행되었으며 지구라트가 건설되었다. 특히 우르의 지구라트는 그 규모와 복잡한 구성에 잇어서 신수메르시대를 대표하는 건축이었다. 도시의 번영과 그것을 증언하는 신전, 궁전 등 건축이 활발하였던 이 시대는 수메르 문화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지만 건축 이외 미술 장르에서의 커다란 발전은 없었다.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하고 다시 혼란기를 맞이한 메소포타미아는 바빌론 제1왕조의 출현에 의해 안정기로 들어간다 . 불행히도 <키르카메슈 서사시> 등 종교문학에 있어서 기념비적 작품이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 분야에서는 <함무라비 법전> 등 몇몇 작품밖에 남아있지 않다. 한편 기원전 20세기부터 기원전 19세기에 걸쳐 번영한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도시인 마리로부터는 많은 미술품이 출토되어졌는데, 예를 들면 <항아리를 든 여신>과 같은 부드러운 느낌의 살이 붙은 조각이 유명하다.

 

이상과 같이 수메르 미술은 성직자를 중심으로한 지배자 계급의 미술이며, 매우 뛰어난 구성과 정교한 기술은 가장 오랜 귀족 미술이라고 칭하기에 적합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성스러운 나무와 숫산양>을 비롯하여 많은 원통형 인장에 나타난 동물의 우화적 표현과 장식적 경향 등은 일반미술로서 사회적 기반의 확대를 엿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티그리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앗시리아는 그 우세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바빌로니아를 점령, 지배한다. 문화가 발달되었던 바빌로니아를 병합함으로써 종교, 언어의 분야에서 앗시리아는 바빌로니아화를 추진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미술 분야에서는 이제까지 없던 장대한 규모의 서술적 부조양식을 확립시켜 앗시리아 고유의 미술을 전개했다.

 

앗시리아의 독자적인 미술양식이 성립된 것은 토우쿨티 니느르타 1세가 재위한 기원전 13세기 후반이다. 이때쯤부터 환조와 부조에 잇어서 웅대하고 막힘이 없는 조형적 표현뿐만 아니라 벽화와 원통형 도장에 있어서도 감동적인 표현이 보여지게 된다. 특히 앗시리아 왕들의 군사원정과 전투를 나타내는 부조는 서술성과 장중한 형상의 사실적 표현으로 앗시리아 미술의 가장 특징적인 분양였다. 니므르에서 출토된<야자나무와 독수리 머리>는 사실적 세부표현으로 힘있는 구성과 얕은 부조로 미묘한 모델링의 양감이 뛰어나 이집트의 부조나 그리스 아티카 묘비의 부조 등과 어깨를 견줄만한 가치를 갖고 있다. 앗시리아 미술은 그 제국의 확대와 함께 메소포타미아 미술을 지중해역에까지 보급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 영향관계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지만 그리스의 동방화 양식에도 자극을 준 것은 확실하다.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 후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한 것은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다. 신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은 공중정원으로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네브카도네자르 왕조에 의해서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로 정비되었다고 전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이슈타르문>과 같은 채유벽돌로 장식된 도시의 외곽 성문이 이때 건설되었으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아카이메네스 왕조에 의해 멸망되면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1. 예배자의 상

아브 신전에서 발굴된 <예배자의 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대의 인물상은 크게 뜬 눈이 특징이다. '영혼의 창'이라고 불리는 눈만 남기고 다른 부분은 대범하게 생략한 이들 조각상안에 신이 깃들여져 있었다고 수메르 인들은 믿었다.

 

 

좌우대칭의 문명

 

1. 수메르인의 쐐기(설형)문자

 

BC 3000

년경부터 약 3,000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고대 오리엔트에서 광범하게 사용된 문자로 5000년 전에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수

메르인들이 인류 최초의 글자 체계를 발명했다. 그들은 쐐기(설형)문자를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하여 점토판에 문자를 새기고,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집을 지었다

 

농경을 도입하고 가축을 길들임으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문명을 세운 이들은 경제활동을 기록하는 것이 거래한 짐승의 수와 농작물의 양을 징표를 사용하여 표시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그림문자를 사용했는데, 곧 복잡한 체계의 상징들로 발전하였으며, 품목들을 하나의 기호로 나타내고 각각의 수량을 다른 기호로 표시했다. 수메르인들의 이 혁신적인 발명은 상업적 용도로만 국한되지 않았고, 상형문자가 아닌 표음문자로도 확장되어 신성과 왕조, 사상과 같은 개념들까지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저부조로 남겨진 문명의 흔적

이 사진은 마리의 통치자 조각상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의 지도자인데 눈 부분은 푸른색 돌을 박아넣었다고 한다. 푸른 돌의 눈이 복원된건지 원본인지 까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눈을 크게 만들고 색이 있는 돌로 강조했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고대인들의 종교관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수메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로 이 시대에 형성된 인류라는 종족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생활양식은 지금까지 이룩된 인류문명의 토대라 한다. 수메르를 멸망시킨 셈계 아카드어족의 일파가 건국한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 왕인 함무라비는 BC 18세기 경에 활동했었는데 주변 지역을 정복전쟁으로 통합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다. 쐐기문자로 석주에 새겨진 282조의 법전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아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일 것이다. 이 법칙을 매우 잔인한 것이라 오해하는데 이는 오히려 보복의 범위를 한정시킴으로써 힘없는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길로틴의 단두대도 인도적인 사형 방식을 위해 고안되었으며 그림 동화의 원형이나 중세 이전의 법전 등을 토대로 유추해볼 때 근대 이전까지 인류가 집단 질서를 위해 또는 개인적인 원한 해결을 위해 동족을 처벌하는 방식은 매우 잔인했다. 오늘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금지된 수많은 끔찍한 고문과 잔인한 처형 방식들의 원형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것들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수메르 법과 아카드 법을 절충하여 보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가 사법 규정들이고 종교적 색채가 적은 실체법이어서 고대 사회의 법들 중에서는 가장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과실과 악의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과 계급에 따른 차별대우 등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현대사회 법리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어 인류 관념체계의 기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한편,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함무라비 법전의 서판을 포함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많은 유물들이 있었는데 세계 경찰임을 자처하는 미군의 점령과정에서 경비가 허술해졌고 이때 많은 것들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한다. 개인적인 망상이지만,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는 비밀 보관실이 있고 실종된 유적들은 거기 다 모여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1. 이슈타르게이트 (바빌로니아)

 

이슈타르는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아세라, 아스다롯, 아데미 등으로 변화되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전쟁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하므로, 네브카드네자르왕의 궁전을 비롯한 성벽 곳곳에 조각했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가장 큰 특색은 성교를 신성시 한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왕이 1년에 한 차례 정도 여사 제나 '이슈타르'(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등장하는 전쟁과 성애의 여신) 같은 사랑의 여신과 성관계를 맺었다. 이유는 풍요롭고 안녕한 한 해 와 왕의 성공적 통치를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이슈타르 문은 오늘날에도 서 있는 12 미터 높이의 성벽과 함께 바빌론에 남아 있는 가장 인상 깊은 유적이다.

 

이 문은, 한 때 각기 돌출한 두 개의 탑을 갖고 있던 2개조의 거대한 문루들이었다. 도시를 방문하는 사람이 눈을 들면 거기에도 또한 성스러운 짐승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 무서운 괴수들의 무리를 콜데바이는 575 마리로 산정하였다.

 

그것들은 다양했으며 청색 땅을 배경으로 하여 빛나고 있었고 도시에 오는 사람들을 매료시켜 이 문의 배후에 있는 황실의 권력이 어떤 것인지, 은연중에 두려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 문은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고 있던 사자가 아니라 기후의 신 라만의 성수인 황소와 시르쉬’- 신들의 지배자인 마르두크의 성수인 용이나 뱀의 모습을 한 그리폰에 해당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시르쉬는 비늘이 달린 긴 발을 가지고 있고 새의 발톱으로 무장한 네 발 동물이었다. 또한 비늘이 있는 몸통에 길죽한 목과 큰 눈을 한 뱀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평평한 머리에는 뿔 하나를 달고 있었다. 이것이 바빌론의 용이었다.

 

 

 

 

2. 초기왕조 우로의 유물(우로의 스탠다드)

우르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메르 최대 예술 목조품 혹은 그 중 하나이자 최조의 왕조 유물로 우르의 스탠다드(Standard)라 불린다. 46cm 정도의 화판으로서 조개껍질과 청금석을 상감하여 사회의 온갖 계급의 사람들을 그린 큰 두루마리 그림이다. 전투 중인 병사와 왕(상단 중앙)에게 연행되는 포로들이 그려져 있다.

 

계획된 도시국가의 질서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태동한다. 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금속이나 나무를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가 남긴 유적 중에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쌓는 기법으로 제작된 고층 건축물을 지구라트라고 부른다. 종교적 의례를 수행하는 차원에서 또는 통치자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같은 목적에서 여러곳에 만들어 졌다. 성서에서 하늘에 가까워 지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는 바벨탑은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모델로 한 것이다.

 

1. 함무라비 법전

 

1901년 발견된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이다. 프랑스와 이란의 합동 발굴팀이 이란의 서남부, 걸프 지역 북쪽에 있는 고대 도시 수사 발굴하였다. 높이 2.25m의 검은 현무암의 돌기둥으로 윗부분은 부조가 새겨져 있고, 아랫부분은 아카드어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다. 설형문자(楔形文字)의 고전기(古典期)의 것으로서,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1000년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법전은 서문·본문 282개조·결문(結文)으로 되어 있다. 고대 법전으로서는 희귀하게 사법(私法)의 영역에서 종교를 떠나 법기술적(法技術的)인 규정을 발달시켰으며, 특히 채권법은 내용적으로 진보된 것이었다. 형법에서는 눈에는 눈으로의 탈리오(應報)의 원칙이 지배하고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거의 원형대로 발견되었으며, 석주(石柱)에 설형문자로 씌어져 있어 설형문자법계의 연구를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12표법(表法)이나 헤브라이법 등 여러 고대법의 비교법사적(比較法史的) 연구를 발달시켰다.

 

 

 

 

 

 

 

 

메소포타미아 미술 연대기

 

수메르문명(기원전3500)

아카드왕조(기원전 2350)

우르왕조(기원전 2150)

바빌로니아 왕국(기원전 2000)

아시리아 제국(기원전 900)

신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612)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38~531)

 

 

1. 수메르아카드(Akkad)

 

 

S. N. 크레마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라고 한 그의 저서의 제목처럼 메소포타미아에는 조직적인 도시문화가 이루어졌으며, 조형활동에 있어서 그들[1]의 미의식(美意識)이 뚜렷한 형태로서 표현되게 된 것은 수메르인에서 비롯하였다. 수메르인이 남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하지만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습윤지(濕潤地)에 막대한 노동력을 모아서[2] 키시·우루크·우르와 같은 도시를 이룩하였다. 도시 형성이 그대로 왕조나 지배자의 거주지가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원전 2900년경부터 제2의 지배민족인 셈족의 사르곤왕이 아카드(Akkad) 왕국을 세워(기원전 2350) 기원전 2100년경에 고()바빌론 왕조가 성립한 시기를 초기왕조시대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초기왕조는 수메르인과 셈인이 세운 아카드 왕조를 포함한다.

 

수메르

(Sumer)는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 지방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 지역이다. 수메르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략 기원전 3500년부터 수메르 지방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기원전 2000년 쯤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아카드지방에 살던 셈족 계통의 아카드 사람들이 수메르 지방을 점령하고 바빌로니아를 세웠다. 수메르 문명이 가장 융성했던 때는 기원전 제3천년기로, 역사학자들은 통상적으로 이 1000년의 기간을 크게 초기 왕조 시대(2900?~2350? BC), 아카드 왕조 시대(2350?~2150? BC), 우르 제3 왕조 시대(2150?~2000? BC)의 세 시대로 구분한다.

 

 

 

 

 

아카드(Akkad)는 메소포타미아 중부 지역의 도시와 그 근방을 이르는 말로서, 고대 제국인 아카드 제국의 수도이며,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유프라테스 강 서안에 시파르(Sippar)와 키시(Kish) 사이에, 현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서 50km 지점으로 추정된다. 사르곤(Sargon) 왕의 통치 이후 기원전 24세기에서 22세기경에 가장 융성하였다.

 

 

아카드인은 아카드 지방의 북부에 선사 시대부터 거주하였으며, 대홍수 이후 기원전 3000년경 최초의 키시(Kish) 왕조를 세우면서 번영하였다. 수메르통치자였던 우루크의 루갈자게시(Lugal-Zage-Si)와 동시대인인 알루사르시드(Alusarsid)(다른 말로 우루무스(Urumus))는 엘람과 바라시(Barahs)를 정복하여 제국의 시초를 세웠다. 사르곤(Sargon)은 처음으로 아카드와 수메르를 통합한 통치자로 알려져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 라가시의 에안나툼(Eannatum), 루갈자게시(Lugal-Zage-Si) , 그 이전의 왕들도 수메르 전체를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솀어족의 아카드어는 기원전 2800년경부터 사용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전 2500년경부터는 완전히 고대 아카드어로만 씌어진 책을 찾을 수도 있다. 고대 아카드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 기간은 사르곤왕 때에(기원전 2350~2330) 경이지만, 그 기간에도 대부분의 행정관련 서판에서는 서기들이 주로 사용하던 수메르어로 씌어져 있다. 겔브(Gelb)와 베스텐홀츠(Westenholz)는 세가지 고대아카드어 방언--사르곤이전, 사르곤시대와 아가데지방, 우르 제3 왕조기--을 구별해 냈다.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대략 1000년정도 (기원전 2800~1800) 지속되다가 결국에는 수메르어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소르킬드 야콥슨(Thorkild Jacobsen)은 사르곤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의 역사적 연속성의 단절이 거의 없다고 보고, 솀어족과 수메르어의 충돌이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적어도 사르곤이 엘람을 정복했을 때 엘람인들에게 아카드어를 잠시동안이나마 강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건축의 유구는 키시·우르·우루크 등 수메르인이 만든 도시가 있으나, 예컨대 키시 궁전의 예와 같이 햇볕에 말린 벽돌과 이긴 흙의 벽이 있고 중정(中庭)의 둘레에 원주(円柱)를 세운 회랑(廻廊)이 둘러져 있는 플랜과, 원주가 특별한 형()의 햇볕에 말린 벽돌로 되어 있다는 것, 벽에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조개껍질을 사용한 상감(象嵌)장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전 건축은 보통 주택의 플랜을 확대하고 호화롭게 한 것인데 직사각형인 중전의 한구석에 있는 소실(小室)에서 예배소로 통하는 가늘고 긴 형식으로 신좌(神座공양대(供養臺관전용(灌奠用)의 수반(水盤) 등을 설비하고 있다. 지상의 유적과 더불어 초기왕조를 대표하는 것은 우르의 왕묘인데 호화롭고 현란한 금과 부장품, 많은 공예 유품의 발굴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묘실은 석회암의 조석(粗石)에 점토를 보충해 벽을 만들고 석회암 또는 소성연와(燒成煉瓦)를 사용하여 까치발 천장, 궁륭천장(穹隆天障), 원통천장(円筒天障)을 만들었고 그 기술의 진보는 후세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또 연와의 형식은 직사각형인 평평한 것으로부터 한편은 평평하지만 한편은 불룩한 철형(凸型)의 연와로 변하여 수메르인이 애호한 형식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아카드 시대의 제왕(諸王)은 외적의 토벌과 반란 진압에 쫓기어 건축 유물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조각 유품에 대하여 수메르인의 조소 유품(遺品)은 적다. 남메소포타미아에는 석재가 나오지 않아서 석조(石彫)는 제작되지 않고 멀리서 가지고 온 석재로 만든 신상(神像) 내지는 왕의 육신 대신으로 신전에 놓인 예배자상(禮拜者像)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들의 조형 의욕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그 기술 습득과 연마할 기회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카파제··아스말·아슈르 등지에서 발굴된 조상(彫像)은 양손을 명치 부분에다 댄 직립상(直立像)으로 상감(象嵌)을 한 이상하게 큰 눈, 곱슬곱슬하고 긴 구레나룻을 단 것이 특색이다. 오히려 아카드 시대의 나람 신의 전승비나 사르곤왕의 두부라 일컫는 청동제의 우수한 작품 <마니스투수왕 입상(立像)>, <구데아 좌상(坐像)> 등 조소에 대한 관조와 조형 기법의 각 단계마다 진보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특히 인체의 사진적(寫眞的) 관조가 일변한 것을 알 수 있다.

 

2. 바빌로니아(Babylonia)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왕국으로, 이전 시대의 수메르 지방과 아카드 지방을 아우른다. '바빌로니아'라는 이름은 수도 였던 바빌론(Babylon)에서 유래하였다. 한글 구약성서에서는 바빌론,바벨론등으로 음역하고 있다. 바빌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3세기경 아카드의 사르곤(Sargon) 왕의 지배에 대한 점토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빌로니아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이 차례로 통치하였다. 경작이 용이하고, 상업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형이어서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건축 유적으로서 유프라테스 하반(河畔)의 우르와 중부 유프라테스 하반에 있는 도시국가인 마리를 들 수 있다. 우르의 도시 유적은 신전을 신역(神域)에 모은 형식을 취하지 않고 넓은 지역에 분산해 있는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 건축으로서는 닌갈 여신을 모신 신전이 주목되며, 240의 부지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싼 경내에는 예배용 제단과 외정(外庭), 제사를 지내는 내진(內陣)과 내정(內庭)을 중심으로 한 신전과 소예배전 및 제사자(祭司者)의 주택 등이 격벽(隔壁)으로 구획되어 있고, 더구나 배수구와 포장한 바닥을 설치하여 수메르 신전 건축의 전통을 잘 전해주고 있다. 일반 주택은 무계획하게 세워져 규모와 방수도 일정치 않다. 발굴에 의하여 이층집의 주택과 빵집·요리점·대장간 등이 발견되었다. 마리의 도시 유적은 1933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그 후 조직적인 발굴로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도시계획은 지상 지배자 권위가 강화되었던 경향을 반영하여 신전 건축보다 궁전의 규모가 컸다. 특히 마리의 대왕궁은 220()로 되어 그 계획은 크레타의 라비린토스의 영향을 받아 미로(迷路)를 구성하고 있다. 벽이 두껍게 포장된 궁전은 타일을 붙인 방과 창고, 24천장의 점토판(粘土板)을 소장한 도서관, 프레스코의 대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신전 건축에는 이스타르 신전, 닌쿠르사그 신전, 다곤 신전과 지구라트의 기단(基壇) 등이 있었는데 거의 함무라비왕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일반 주택도 안뜰을 둘러싼 가늘고 긴 방의 형식으로 혼잡하게 구성되어 그 자연발생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3. 고대 바빌로니아

기원전 20세기경, 우르 제3 왕조에 의한 수메르의 부흥 이후에, 유프라테스 강 서쪽으로부터 온 솀어족의 아모리인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이신(Isin)이 가장 강력한 도시였으나, 아모리인의 도시인 바빌론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결국 첫 번째 바빌로니아 제국을 이루게 된다. 이후 약 300년간을 고대 바빌로니아로 분류한다. 바빌로니아가 일어난 뒤고 대대적인 문예 부흥이 일어났다. 이 첫 번째 바빌론 왕조의 가장 큰 업적은 법전의 편찬이다. 엘람인을 추방하고 왕국이 정착한뒤 함무라비의 지시로 만들어진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으로 불린다. 함무라비 법전의 사본이 수사(Susa)에서 1901년에 발견되었으며 현재는 루브르에 소장되어 있다.

 

바빌로니아 왕조시대의 미술은 함무라비왕이 도읍한 바빌론이 아시리아 제국의 센나케리브왕에 의하여 파괴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활동을 알아볼 작품을 잃었다. 오히려 남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우르·가파제의 유적과 또 도시국가인 마리의 유품에서 그 시대의 미술을 더듬어보는 편이 편리하다.

 

조소(彫塑) 유품은 우르 출토의 <닌갈 여신 의상(倚像)>과 테라코타제()의 이슈타르신, 외눈박이인 괴물을 죽이는 신상 등 부조(浮彫)한 유품에서 특색을 볼 수 있다. <닌갈 여신 의상>은 환조(丸彫)인데 인간의 자태를 훌륭하게 포착한 모델링을 찾을 수 있고 두발이나 머리핀, 섬세한 케이프의 표현, 자세를 바로 하고 양손을 가슴에 잡은 조형 등 수메르시대에 비긴다면 각별한 진보를 엿볼 수 있다. 마리의 유적에서도 신이나 왕 그리고 제사계급(製司階級) 사람들을 환조한 조각과 청동제 사자, 부조의 여신상 등 일품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중에 다곤 신전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자의 상반신은 눈을 돌의 상감으로 하였고 치졸하나 억센 조형 가운데에 이 동물의 특징을 잘 포착한 조형이 인상적이다. <풍요(豊饒) 여신 입상>의 석회암제 환조의 상은 자연에 가까운 프로포션과 사실(寫實)에 입각하여 표현된 온화한 표정 등이 주안점이 되고 있으며, 양손에 가진 앨비얼러스형 항아리는 그 속에서 대좌(台座) 밑의 구멍을 통하여 실제로 물을 뿜어낸 구조라고 생각되어 기술 기교가 진보한 양상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기원전 2000년경 왕위에 오른 함무라비가 만든 함무라비 법전(法典)[5]의 정상부의 태양신 샤마슈와, 함무라비의 부조상으로 수사에서 출토된 섬록암제(閃綠岩製)의 함무라비왕의 두부() 등 유품이 있다. 구데아 모자를 쓴 채 표현되어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 왕의 조형은 뛰어난 것이다. 특히 함무라비왕 두부라고 전해지는 작품은 위엄과 풍격이 넘쳐 셈족풍()의 구레나룻과 표정에 노쇠한 그늘을 보여 날카로운 개성 묘사가 매력있다.

 

이 시대의 회화는 마리 왕국의 프레스코 벽화로서 대표된다. 마리왕 짐리림이 지모신(地母神) 이슈타르로부터 왕권을 수수(授受)하는 그림과 희생봉정도(犧牲奉呈圖) 등 측면 관조(觀照)를 주로 한 조형의 특색을 보여 주며 서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로서 의의가 크다. 이 외에 옹기의 채화(彩畵) 동물도 흥미가 있다. 공예품으로서는 테라코타 신상, 예배자의 상, 거기에 향로·술잔·접시 등의 제기(祭器)와 실린더실(圓筒印章) 등이 발견되고 있다.

 

 

 

건축 유적은 고() 바빌로니아 시대의 우르와 볼시파 등지가 왕조 창시자인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볼시파는 수도의 중심부에 나부·나나·신 세 신전과 지구라트를 세웠고 길은 기준에 정한 방향으로 닦았으며 사방 1.5km의 주위에 호()를 파는 도시계획이었다. 이러한 형식은 앗시리아 도시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대표적인 도시 유적은 바빌론일 것이다. 플랜은 거의 4각형인데 중앙에 유프라테스강이 남북으로 뚫려 흐르고 그 왼편 강가, 즉 도시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최고신(最高神)인 마르두크 신전과 바벨탑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를 포함한 신역(神域)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왕궁과 부속된 요새(要塞) 건축은 북단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다. 왕궁은 중정(中庭)에 연속하는 구성으로 전체적인 플랜은 장방형이었다. 이 성채(城砦)의 동북 구석진 곳에 아치 천장을 가진 다수의 협소한 방이 있는데 이것은 헤로도투스 이래의 유명한 옥상정원(屋上庭園)의 하부구조라 생각되고 있다. 지구라트는 한 변이 90m, 높이 90m에 이를 만큼 거대하고, 마르두크 신전은 각각 80m85m의 규모이며, 특히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예배소의 호화로움으로 미루어 당시의 신전이 얼마나 웅장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길은 왕궁 앞에서 남북으로 마르두크 신전까지의 개선도로(凱旋道路)와 여기에 90도로 교차하는, 성역에서 나온 마르두크 가로는 주요한 도로로서 규칙 바른 형식이었다

 

4. 신바빌로니아

아시리아가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빌로니아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고,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 아시리아는 때로는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하고, 때로는 군사적으로 제압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하였으나, 결국은 기원전 627, 아시리아의 마지막 통치자인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의 죽고 다음 해에 바빌로니아의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가 반란을 일으킨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Medes)인과 함께, 니네베를 파괴하고 제국의 패권은 바빌로니아로 돌아온다.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의 뒤를 이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585년에 페니키아를 정복하는 등, 다시 한 번 바빌론을 문명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의 연대기는 기원전 567년 이집트 공략 등 일부만이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Nabu-na'id), 키로스(Cyrus)에 의한 바빌로니아 정복에 대해서는 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앗시리아제국(帝國)의 말기, 막료의 한 사람인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에서 기병(起兵), 그 후 독립하게 되어 메소포타미아와 패권을 다투어(기원전 626) 탄생한 것이 신바빌로니아 왕조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를 중심으로 약 70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함무라비왕 시대의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후계자로서 메소포타미아 문화를 부흥시켰고, 셈족 최후의 왕조이다.

 

바벨탑을 세운 네부차드네자르가 통치자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아시리아 인들은 석판을 건축 재료로 사용했지만 신바빌로니아인들은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벽돌을 건축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 기법은 원래 아시리아에서 개발된 것인데 이 시기에 와서 훨씬 큰 큐모로 발전하였다.

 

조각의 유품은 마르두크·아파르·잇디냐의 경계석(境界石), 바빌론 출토인 인간을 밟고 선 사자의 미완성 석조 외에 채유연와(彩釉煉瓦) 부조가 대부분이다. 앗시리아 미술의 부조로 실내의 요벽(腰壁)을 장식한 것처럼 바빌론에서는 대로의 양측과 문·성벽을 이용하여 채유연와로써 로제트 무늬의 띠와 사자·황소, 마르두크신의 성수(聖獸)인 드래건(恐龍) 등을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짙은 벽청색(碧靑色)의 벽면에 제법 사실적(寫實的)인 조형 감각으로 포착한 걸어가는 동물을, 황색 신체에 적색의 갈기, 백색의 육신에 황색의 갈기라는 식으로 배색한 사자와 드래건을 표현하고 있다. 이슈타르 문()만 하여도 575마리의 동물이 행렬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연와로 동물을 표현하는 방법은 서아시아의 전통적 공예 수법의 하나로 모자이크 기법의 응용이라 여겨지나 이후의 3채유(彩釉)의 기원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공예의 유품으로서 바빌론에서 출토된 청동제의 용수(龍首)와 벽옥(碧玉)이나 마노(瑪瑙)와 옥수(玉髓)를 비롯한 보석, 많은 원통인장(圓筒印章), 타원형의 스탬프 인장 등이 있다. 원통인장에는 종교의식을 표현한 것, 왕의 알현 광경과 시종들의 모습, 전투 장면 등이 엷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조형 감각은 유연한 균제가 취해진 자태로 인간의 모습이나 동물을 포착하여 앗시리아 시대의 것보다 상당히 진보된 점이 주목된다.

 

벽돌로 만든 이런 부조의 효과는 네부차드네자르의 성소에 있는 [이슈타르 문]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황소와 용을 비롯한 동물의 모습 하나하나를 구워만든 벽돌로 처리하였고 선명한 색상과 장식적인 줄무늬로 구성된 이 벽화는 기품과 즐거움을 동시에 반영한다.

 

5. 앗시리아

서아시아에서 강대한 군사력과 피정복 민족에 대한 참혹·무참한 압정(壓政)으로 광대한 영토에 군림하여 세계제국의 양상을 가진 앗시리아는 기원전 9세기의 전반부터 기원전 6세기 후반까지 350년간에 걸쳐 활동하였다. 고대 아시리아는 중동에서, 기원전에 존재한 강성하였던 나라이다. 히타이트를 물리쳐서 세운 나라라고 본다.

 

 

 

초기에 아시리아라는 말은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말이었으며,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Assur)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나중에는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 이집트, 아나톨리아까지를 지배하는 대 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체 (남부는 바빌로니아)에 해당하며 니네베를 수도로 하였다. 아시리아인의 고향은 티그리스 강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산악지방이며 "아슈르의 산(Mountains of Ashur)"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시리아의 왕들은 세 차례에 걸쳐 역사상 의미있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는데, 각각 고대 아시리아 제국, 중기 아시리아 제국, 신아시리아 제국(제국 또는 기)으로 분류된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알려져 있는 것이 기원전 934~기원전 609년 또는 기원전 911~기원전 612년의 신아시리아 제국이다

 

지리적 조건과 정복한 영토와 민족이 다채로워 이집트·아나톨리아·시리아·서방(西方)이란의 특색 있는 문화미술을 흡수하여 대성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바빌로니아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미술 유산을 남기고 있다.

 

앗시리아 미술에서 정수(精髓)는 조소(彫塑)의 유품이라 하겠다. 단독적인 환조(丸彫)의 상은 적지만 건축 내부의 요벽(腰壁)에 부조한 장식을 가득 메운 것이라든지 외문(外門)이나 내정 입구에 놓인 유익인면사자상(有翼人面獅子像)의 수호신 등 뛰어난 유품이 많다. 님루드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아슈르 나시르 팔 2세 상>은 얼마 안 되는 앗시리아 환조의 상으로는 완벽한 유품인데 두부도 작고 육체를 관조(觀照)한 점도 미숙하지만 앗시리아인에 있어서는 왕자의 이상미(理想美)를 위엄에 넘치고 당당한 자태로써 발휘하였으며, 당시 왕자의 의장 풍속이 모조(毛彫)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고 또 명문(銘文)을 흉부에 전각(鐫刻)하고 있는 등 역사적인 자료의 가치도 많은 작품이다. 이러한 환조의 상에 대하여 이 시대에 부조한 유품은 우수한 기술로 세련된 조형 감각과 관조가 투철한 사실적(寫實的) 능력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을 많이 만들어냈다. 입구에 사자상을 배치하는 전통은 오래 되었고, 아나톨리아 고원이나 시리아에서 그러하였다. 건물에 딸린 문 입구의 수호신의 표현 형식은 히타이트에서 시리아를 거쳐 들어온 영향의 자취라 생각된다. 그러나 앗시리아 유익인면수신(有翼人面獸身)의 수호신상은 조형 감각과 표현 형식의 고도한 예술성으로 히타이트 미술을 훨씬 능가하여 현저한 간격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인면(人面)에 깊이 팬 눈과 코, 그리고 왕관과 장식풍인 말린 머리카락과 구레나룻 등, 날개가 날카로운 끌로서 파낸 명쾌하게 의장화(意匠化)한 조형과 어울려 감상의 요점이 되고 있다. 조형상에서 재미있는 것은 유제류(有蹄類)의 다리 가운데 앞다리 세개를 표현하려 정면이나 측면으로 보아 부자연스럽지 않게 만들어져 앗시리아인의 특유한 합리적인 관조가 작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수호신은 두르 샤르루킨 궁정 입구에서도 발견됐으나 이것은 더욱 조형 표현의 기교와 관조가 진전, 세부까지의 의장화나 추상성이 고도화하여 우수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조형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시대로 계승되어서 페르세폴리스 왕궁에서도 그 유품을 찾아볼 수 있다. 부조의 유품에는 표현 형식과 주제를 다룬 방식으로 전·2기로 나눌 수가 있다. 님루드 북서(北西)에 위치한 왕궁에서 출토된 종교 의식도(儀式圖)나 제전도(祭典圖)는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결된 구도이며 인간에게 이익과 풍요를 가지고 오는 성수(聖樹)가 운하의 물과 칠엽(七葉)의 파메트식()인 대추야자수(棗椰子樹)를 중심으로 하여서 의장화되어, 거기에 화분(花粉)을 수정(受精)하는 조두유익신상(鳥頭有翼神像)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좌우에 왕과 시종을 그린 예도 있다. 그에 대하여 님루드의 서북 궁전의 옥좌(玉座) 사이의 남쪽 벽에 있는 전투도(戰鬪圖)와 동물 수렵도의 부조는 연속 설화(說話) 표현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전자는 벽면 가득히 큰 성수와 인물 및 신상을 상호(相互) 배치하여 장식의 의도(意圖)와 종교의식의 중대함을 암시하고 있는 데에 대하여 수렵도나 전투도도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동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전개해 나간다. 더욱이 수목과 하천의 세밀한 묘사와 성벽이나 배경 무대의 극명(克明)한 표현도 볼 수 있다. 아슈르바니 아플리 2세 때는 이들 전투도와 수렵도는 구성상 화면이 단절되지 않고 두루마리식의 전개를 보여 주며, 특히 때는 다르지만 같은 화면으로 엮은 설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니네베의 아슈르바니 아플리 궁전 S()<사자 사냥>은 그 좋은 예가 된다. 이들 부조 화면의 특색은 인간의 근육과 자태의 정확한 조형, 세부에 이르기까지의 공예 감각이 넘치는 세밀한 표현, 그리고 동물의 형태와 표정까지 극명하고 박력있게 표현한 묘사력 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앗시리아 부조 미술은 고대 서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정점(頂點)을 차지하고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고전 조각의 전형(典型)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회화 유품은 벽면의 극히 작은 것에 불과하며,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가 건립한 시리아의 텔 발시프 궁전의 벽화의 단편과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 옥좌 사이의 벽화 등이 유명하다. 앗시리아 공예의 대표적인 것은 상아 세공인데 시리아이집트 양식을 답습한 작품으로 앗시리아 공예품이라 생각되는 유익신상(有翼神像)과 수렵도, 그리고 님루드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귀부인의 마스크와 침대 장식의 성수 등 뛰어난 작품이 있다. 또 채유연와(彩釉煉瓦)나 채유도기 따위와 청동제품과 글라스 기구 등 당시에 있어서 세계제국적(世界帝國的)인 성격을 보여, 여러 지방에서의 헌납품과 작가와 공예인들이 들어오게 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건축으로서는 앗시리아제국 역대의 왕들이 만든 아슈르·님루드(카라크두르 샤르루킨·니네베 등 북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산재한 도성(都城)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그 모습을 찾아 더듬어본다. 앗시리아의 발상지 아슈르는 아누·아다드 양신의 합사형식(合祀形式)의 신전과, 왕궁이 도성의 북부에 정비되어 왕권의 확대와 전정(專政)에 의한 신장(伸張)과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 도시의 중심지에 위치하는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도성의 성벽은 유례없이 높이 솟고 두꺼워 기원전 706년 구축된 두르 샤르루킨성의 경우 두께가 28m에 이르고 있다. 군사 방위태세의 강화는 피압박 민족의 참혹한 취급에서 오는 불안한 시대상을 반영하여 도시 계획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성문에서 성문으로 가는 가로는 마치 골목처럼 만곡(灣曲)과 교차의 형식을 취하여 조망(眺望)을 방해하고 있다. 건물의 기초에는 북메소포타미아산()의 석재를 풍부하게 사용하고 가옥은 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를 사용하였으며, 내부 장식의 요벽(腰壁)이나 입구에 앨러배스터제()나 동석제(凍石製)로 부조한 화장판이 끼워져 있었다. 도성내의 일반 주택은 웅대·화려한 궁전과 신전에 비하여 빈약하고 검소한 것으로 천막생활까지 했다는 것을 카라크의 테메노스 부근의 발굴로 알려졌다. 귀족의 저택은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방이 사방에 만들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그것을 복잡하게 짠 것이 궁전 건물이었다. 아슈르 나시르 팔 2세가 세운 카라크의 테메노스 궁전은 사무를 취급하는 장소, 옥좌를 포함한 의식 알현(謁見)의 방, 거실 등 세 형식의 건축으로 나뉘어 있다. 이에 대해 두르 샤르루킨의 사르곤 2세의 궁전은 양간(陽乾) 연와를 중심으로 석재와 소성연와로 구축한 높은 기단(基壇) 위에 구축되어 저택의 건축 형식과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홀과 계단의 결합 형식과 중정(中庭)의 배치 등에 특색을 볼 수 있는 한편, 소아시아와 시리아 방면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궁전 형식인 비트 히라니 양식을 채용하였으며 그 후 앗시리아 건축 양식의 기본이 되었다. 신전 건축은 궁전 건축에 부속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측면 출입 양식의 지붕과 전실(前室) 다음에 깊숙한 내진(內陣)을 설치하여 거기에 벽감(壁龕)이 만들어져 있다. 성탑 지구라트는 4단 내지 6단의 정방형 또는 장방형의 탑을 쌓아올린 고탑형식(高塔形式)이 되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다.

 

아시리아 미술은 왕의 정벌 업적을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왕의 모습을 사자 사냥꾼으로 묘사하는 등, 주로 왕의 권력을 찬미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아시리아 제국은 동쪽에서 발흥한 메데스족과 스키타이족의 연합군에 의해 니네베가 함락된 기원전 612년에 종말을 맞았다.

 

6.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동쪽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에 위치했던 페르시아 왕국은 번잡했던 민족의 이동 떄문에 영구적인 기념물이나 문헌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아 죽은자의 시신과 부장품을 분석함으로써 추적할 뿐이다. 나무나 뼈, 금속으로 만든 부장품들은 무기나 말고삐, 혁대, 브로치, 장신구, , 사발 등 유목민이 사용하는 용구로서 휴대 미술이라는 독특한 양식성을 띈다. 유물들은 장식적인 모양새에 치중하고 있는데 [동물 양식] 이라고 알려진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리우스 1세와 크레스크세스 치하에서 가장 번성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자신들이 만든 법의 준엄함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독창적인 기념 미술을 전개하였는데 조로아스터 예언에 기초한 자체적인 신앙 형식을 갖추고, 선과 악의 이원론에 근거한 신앙으로서 아우라마즈다()와 아리만(어둠)으로 상징된다.

 

페르시아 미술은 여러가지 다양한 요소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결합한 결과였으나 장식성만 좋아했던 이유로 제국의 멸망까지 더 이상의 발전없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