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미술 2
문명의 시작
2부 원시 미술[primitive art, 原始美術]
문명이 시작되다.
원시라는 말에는 시원(始原)·태고(太古)라는 뜻과 미개(未開)라는 2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시원의 의미로 쓰인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사회에 앞서 먼 옛날에 존재하였던 태고(太古) 사회와 근대에 존재하는 미개사회 등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태고의 원시사회에서 이루어졌던 미술이다. 수십만 년이나 계속된 이 원시시대는 다시 그것을 몇 개의 작은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이 수렵 ·채집 ·어로를 생업으로 삼았던 획득경제시대(시원시대)이며, 다음은 유치한 농경 ·목축에 종사했던 초기 생산경제시대이다. 그리고 시원시대는 다시 전기(BC 60만∼BC 35만 년경) ·중기(BC 35만∼BC 8만 년경) ·후기(BC 8만∼BC 7000년경)로 세분할 수 있다. 미술의 싹은 이미 시원시대 중기에 작품으로 인정될 만한 것이 나타나지만, 인간이 미술다운 미술을 제작한 것은 그 후기에 접어들면서 부터이며, 특히 서유럽의 오리냐크 문화 ·마들렌 문화 ·러시아 남부의 코스티엥키 문화 등은 뛰어난 미술을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시미술은 현대미술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20세기 초의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등은 오지의 토인조각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의 많은 화가들은 메커니즘을 거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원시미술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였다. P.고갱은 아프리카 흑인예술에서 자극을 받고 타히티섬으로 갔으며, H.루소는 ‘나이브 아트’라는 독특한 미술양식을 창조했는데, 이는 원시미술의 한 전형이다. 시원시대와 초기 생산경제시대의 원시미술은 오늘날 사실주의나 갖가지 신경과민적인 표현양식에 싫증을 느낀 현대인들에게 자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입체파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동기에는 흑인조각의 영향이 있다. 흑인조각의 힘에 깊게 감명받은 모딜리아니의 작품(오른쪽)과 흑인조각(왼쪽)이 닮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표현했다.
동굴은 인간이 집이라는 건축적인 구조를 만들기 전에 살았던 주거환경이었다. 여기서 원시인들의 삶의 흔적이 흔히 발견되곤 하였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에서 발견된 동굴 벽화들은 우리가 오늘날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오히려 미술이라기보다는 주술적 행위와 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알타미라와 라스코 등의 동굴에 그려진 벽화들은 당시 인간들의 생존과 그것과 절실하게 결부된 종교적인 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동굴에는 수없이 많은 동물, 특히 그들의 의식주의 근간을 이루는 초식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모습은 마치 장대한 동물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 동물 그림들은 단순한 재현이나 유희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라 생존과 결부된 매우 절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동물들의 형상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 동물을 직접 사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억한 것을 그려 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의 형상에 대한 기억력은 매우 뛰어났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단순히 그것은 그들이 지녔던 재현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긴박했던 생존 의지와도 연관하여 설명이 가능하다. 야생의 맹수들은 자신들의 사냥감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사냥은 사냥감에 대한 면밀한 정보가 없으면 안된다. 맹수들의 발달된 감각 기관도 그런 관찰력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구석기의 수렵인들은 그들의 사냥감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런 것들이 사실적인 재현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실성에 대한 다른 이유는 그들이 염원했던 사냥감을 보다 구체적이며 사실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그 대상을 포획하기 이전에 이미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인 확신이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현대 인간들의 유전자 속에도 원시 시대의 이미지에 대한 경외심이나 존재와 이미지의 일체감이 살아 있다. 이미지는 그들에게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실재였고, 우리는 아직도 그런 관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누가 자신의 이미지를 칼로 난도질한다면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또, 그 행위의 당사자도 그런 행위에서 단순히 이미지에 가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미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유전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원시인들에게 이미지는 사물과 같거나 혹은 더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미지는 단순히 재현된 부산물이 아니라 그 대상과 일치하는 자율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간의 시각은 오래 전부터 의식화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그것이 사실적이든 상징적인 모습을 가졌든 상관없이 그 대상을 대리하게 되었다. 미술품은 이제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영과 혼을 지닌 사물이 되었고, 원시 시대 주술에서부터 현대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과 모성에 대한 경외심에서 미술은 시작된다.
자연 속에서 삶을 누렸던 인간은 자연에 자신들의 감사와 공포를 표하고, 그것을 미술로 반영하였다. 언급하였듯이 원시인들은 자신들의 먹거리가 되었던 동물들에게도 그런 종교성을 부여하였다. 동물 숭배(토템 사상)는 이러한 기초적인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단군 신화에서 나타난 곰과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도 당시의 토템 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외에도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자연 정령 사상)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원시 종교의 흔적들이다.
조금 더 발전한 종교적인 형상성을 찾아본다면, <빌렌도르프(Willendorf)의 비너스>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은 조각상은 그 크기(높이 11.1cm)로 인하여 휴대가 가능했던 일종의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이 형상은 가슴이나 여성의 성기 부분이 강조되어 있고, 비만한 여성의 신체를 보여 주고 있어서 풍요와 다산을 기원했던 원시인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여신상인 이유는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추상화 된 얼굴이 그렇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에 인간의 구체적인 형상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의미로 비추어지며,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이후의 종교적인 미술에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 여신상의 몸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혹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신체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래서 이 상이 신상이라는 것을 반증하게 한다. 더 나아가 이 풍요와 다산의 여신상은 당시의 모계 사회를 보여 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모계로 중심을 이루는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와 신격화는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신화에서 남편을 부활시키고 또한 새로운 신을 잉태하는 이시스(Isis) 여신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나타나는 땅의 여신 가이아,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데메테르나 페르세포네, 더 나아가 가톨릭에서의 성모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모성에 대한 숭배는 원시인들의 자연관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상이다.
그들의 도구에 나타난 미적 감각은 추상적 미술과 상통한다.
신석기의 미술은 체계적이고 관행적이며, 또 양식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러한 조형 감각의 변화는 실제적으로 시대의 경제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수렵에서 농경제로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농경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관념 속에서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며, 지식과 행동, 그리고 관습의 체계라는 것을 배우고 익혔다.
우선 농경은 기후나 토지 등의 환경에 대한 지식이 요구되며, 또 농사를 짓기 위한 다양한 방식을 발전시켜야 했다. 함께 등장한 목축에 있어서도 구석기 사냥꾼의 예리한 관찰 능력이 아니라 개체 수에 대한 파악과 상시적인 관리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인간의 지각의 변화뿐만 아니라 미의식의 변화도 함께 초래했다. 즉, 신석기의 농업 경제 사회는 추상미, 더 자세히는 기하학적 미감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신석기 농경 사회의 대표적인 미술은 토기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그릇은 인간이 고안해 낸 매우 관념적인, 하지만 보다 실용적인 산물이자 미술품이었다. 토기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얻은 혹은 생산한 것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다시 말해 잉여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 토기에 나타난 질서의 패턴들 초기의 미적 감각은 인간에게 부여된 예술성이라는 특권, 도구의 사용에서 도구의 미화를 의미한다.
토기에 나타난 문양은 인간이 고안해 낸 형태이다. 이 형태는 자연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방의 형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인간의 심미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 낸 창조물이 된다. 이 문양들의 특징은 반복에 있다. 어떤 선이나 점 혹은 면이 반복하고 이것이 하나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 반복의 미이며, 여기에는 어떤 특정한 질서가 요구된다. 같은 간격, 동일한 리듬 혹은 변화의 주기 등이 그렇다. 이러한 반복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생산 경제 속에서 인간이 터득한 조형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밭고랑의 형태가 빗살무늬와 유사한 것이 그런 예이며, 또 동물의 추상적 형상이 반복되는 것도 목축에서 동물의 세세한 형상보다는 개체 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인간의 인식 변화가 조형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 원리는 이제 추상적인 미술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추상적인 조형 원리는 건축이나 기념 조형물에서 조금 더 확대된 의미로 발전한다. 형태 뿐만 아니라 크기가 주는 위압감과 경외심, 그리고 그 배치에서 오는 공간성과 방향성 등이 이제 보는 인간에게 특정한 메시지와 정서를 전달하게 된다.
그들의 집단화된 권력이 거석문화을 탄생시킨다.
신석기인들은 부락과 촌을 구성하고 커진 공동 운명체 속에 살게 되었고, 개인은 점차 사회라는 집단에 소속된 존재로서 인식되어졌다. 또, 직업의 분화와 더불어 계급의 분화도 나타났으며, 종교의 이념이나 제의도 복잡해져 갔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물리적이고 또한 관념적인 힘의 결합체인 권력의 탄생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조형물로 시각화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사진)이 그것인데, 거석의 돌무덤(dolmen)으로서 거인족들이 만들었을 것 같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인간의 욕망이나 요구가 선행했을 것이라는 점과 그것이 일종의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즉, 큰 돌을 쌓고 세울 수 있었던 권력을 보유했던 존재로서 다른 이들에게 인식되게끔 했던 요구였고, 이러한 선례는 점차 경쟁적으로 다른 부족이나 공동체로 확산되어 나갔을 것이다.
영국에 있는 스톤헨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거석문화의 유산이다. 이 대규모 석조 조형물은 기원전 3100년 무렵부터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오랜 기간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거석이 세워진 시기는 대략 기원전 2100년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적의 중심부에는 청석이라 불리는 4톤짜리 화성암 기둥이 2중의 동심원 형태로 세워졌다. 놀랍게도 이 돌은 약 385km 떨어진 웨일즈 지방에서 강이나 바다 혹은 육로를 통해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최초로 세운 청석의 입구는 하지에 해가 뜨는 방향에 맞추어 배치되었고, 스톤헨지에 가장 가까운 통로도 같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게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톤헨지를 만든 선사인들이 천체의 운동을 지상에서 반영하려고 했다는 점과 그것을 종교적인 제의로서, 그리고 그것을 세운 종족의 권력을 상징화하는 것으로서 사용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축을 1년 중 중요한 날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배치한 사실은 스톤헨지가 하늘을 숭배하던 사원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혹은 현대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기념 조형물 등은 이러한 원시적인 조형물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그것을 만들었던 이데올로기나 사회 체제는 달라졌지만, 외부적으로 어떤 특정한 권력을 보여 주려는 욕망과 의지는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과 현대인이 교류하다.
원시 미술의 특징은 생존과 결부되어 가장 직접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때론 편진성이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형상을, 때론 추상화된 기호로서 표현하고 있지만, 원시인들의 미술은 그들의 삶과 생활 방식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며, 그들의 기대와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드러난 조형적 원리나 현상들은 제도화되었던 서구 미술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선사 미술은 원시 미술 혹은 미개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사회에 소개되었고, 이런 미술이 지닌 직접적이고 강렬한 표현 양식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헨리 무어의 두 개의 좌상 '왕과 왕비'(왼쪽)는 초기 그리스 또는 이집트 18왕조의 좌상 '네브 센과 그의 처'(오른쪽)가 지닌 곧은 정면을 향한 얼굴의 엄격함과 같은 근본적인 단순함을 지니고 있다
20세기 원시주의(Primitivism)로 개념화된 원시 혹은 미개 미술의 부활과 현대 미술에 대한 영향력을 살펴보는 것은 단순히 원시 미술이 시대의 미감에 상응했다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현대인들이 잊고 있었던 원시적 조형성에 대한 유전자를 스스로 재발견하고, 역사 시대를 통해 꾸준히 제도화되었던 미술의 형식을 탈피하고자 했던 현대 미술의 의지와도 잘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현대 미술의 거장들은 이 원시 미술에서 자신들의 작품에 활력을 주는 생명성을 찾았다. 원시 미술 혹은 미개 미술이 지닌 생명주의(Vitalism)는 모더니즘 미술이 찾았던 가장 원초적이고 원리적인 조형성이었다.
원시문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
1907년 피카소가 그린 최초의 입체파 회화인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원시인들이 쓰던 가면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비례나 유형을 통해 미화했던 이전의 서구 미술의 눈에는 추한 것으로 비추어졌지만, 피카소의 여인들은 적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인간의 깊은 아픔을 느끼게 해 주었다. 피카소와 비견되는 야수파의 화가 마티스의 <댄스>(사진) 또한 발가벗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원시적인 군무를 추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독일의 표현주의의 작가들은 원시적인 조상을 모방하여 현대인들의 소외와 상실감을 보여 주었다.
선사 미술은 우리에게 미술의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인 재현과 추상을 미리 보여 주었으며, 생존과 관련된 직접적인 표현으로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그래서 이미지와 현실 간의 간극을 넘어서는 미술을 창조했었다. 비록 형식이나 기술적인 부분, 그리고 제도적인 면에서 그들의 미술은 엉성하고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그들에게 미술은 무엇보다 생존의 산물이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현대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자유로운 선과 색채의 기호적 언어로 표현한 클레의 작품 '세네시오'(오른쪽)는 서아프리카 가나에서 출토된 목조 '풍요의 여신'(왼쪽)과 상징적 이미지가 매우 유사하다.
그들은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다.
시원문화의 회화은 이탈리아와 우랄 지방에도 존재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 남부에서 에스파냐 북부에 걸쳐 분포하는 동굴벽화다. 이것은 프랑코-칸타브리아 미술이라 불리며 오리냐크 문화와 마들렌 문화에 비정(比定)된다. 이 그림들은 동굴 깊숙한 곳에 있는 성소(聖所)의 벽면이나 천장에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이상의 물감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종교적인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프랑스의 라스코, 퐁 드 곰을 비롯하여 에스파냐의 알타미라 등 동굴군(洞窟群)의 그림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특색은 ① 대상이 거의 엽수(獵獸)에 한정되어 주술사인 듯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② 개개의 동물이 독자적으로 묘사되어 전체적으로 정리된 구도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점, ③ 동물들이 한결같이 동적인 자세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 ④ 사실화가 아닌 인상화적인 수법이 동원되는 등 그 화법에서 갖가지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한편, 동(東)에스파냐군(群)으로 호칭되는 회화는 암벽이나 바위 뒤 같은 곳에 그려진 단채화(單彩畵)로서 수렵 ·무용 ·투쟁 등을 짜임새있는 구도로 묘사하였는데 마치 그것은 실루엣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연대는 시원시대 말기의 카프사 문화기에서 초기 생산경제시대에 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에스파냐군에 속하는 회화는 아프리카 북부와 사하라 지방에 많은 영향을 끼쳐 아프리카에서는 전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유럽 서부와 동부에 분포하는 시원미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부조(浮彫)의 경우 주로 동굴 입구 또는 깊숙한 곳에 있는 성소(聖所)에 나체의 여인상이나 짐승의 모양을 새겨놓은 것이 많다. 각화(刻畵)는 작은 돌, 순록의 뿔, 뼈조각, 매머드 상아 등에 선각(線刻)으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인데, 장중한 느낌의 벽화와는 달리 그 수법은 활달한 데생화를 연상케 하는 친근감 넘치는 작품이 적지 않다. 조상(彫像) 중에서 매머드 상아, 돌 ·점토 등을 재료로 동물의 모양을 나타낸 것도 있으나, 비너스상이라고 불리는 나부상(裸婦像)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부상의 조각수법은 얼굴 ·팔 ·다리 등이 생략 표현된 반면, 유방이나 둔부가 과장 표현된 점이 특색이다. 그 밖에 주목되는 공예품으로는 순록의 뿔로 만든 지휘봉을 들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시원미술의 전체적인 특징은 ①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② 비사실적이며 인상주의적 수법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회화나 조각상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준다는 점, ③ 자손의 번영과 사냥의 대상이 되는 짐승의 번식, 그리고 풍성한 사냥의 수확 등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신앙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 등이다.
인간은 농경 ·목축의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고 다음 시대의 약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초기 농경문화)의 미술은 BC 6000경부터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재출발하였다. 초기 농경문화의 미술은 구대륙뿐만 아니라 신대륙에까지 널리 분포하였다. 가장 선진적이었던 오리엔트 미술을 살펴보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가지무늬토기[彩文土器]이고, 다음이 대모신(大母神)의 조각상과 금은 공예품들이었다. 그러나 가지무늬토기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그 수법이 대체로 고졸(古拙)한 편이었다. 한편, 벽돌 굽는 방법이 발명됨으로써 건축은 착실한 발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초기 농경문화의 미술 역시 종교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슷한 단계에 있는 근대의 미개사회 미술과 비교할 때 그것은 그로테스크성(性)과 번잡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그들의 바이탈리즘(애니머티즘 animatism)이란?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그림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생각하며 그렸다기 보다는 생활상의 필수적인 필요에 의해 제작으로 구석기시대인의 바이탈리즘을 알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형태의 표현을 통해서 차차 기술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소박한 사실적인 바이탈리즘은 중석기,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면서 극단적인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돌연변이 한다.
원시미술의 세계
구석기시대의 동굴화는 19세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단순하지만 운동감과 생생한 느낌을 준다. 동물들은 설명적 의미 없이 개별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무리지어져 보이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차츰 겹쳐 그려졌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에는 인간보다 동물의 형상이 많이 나타나며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독창력이 우선시되었던 듯하다. 중석기시대의 동굴화는 구석기와 유사하나 최초로 설명적 의미가 나타나고 결국 인간은 서로 협동하는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집단이 살아 남고 번영하려면 사회적 단결이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했으나 오히려 대형 벽화가 없는 대신 인간과 동물 형상이 가끔 나타나는 칠도기를 제작했다.
고석기 시대(Eolithic 석기시대의 여명기 1,000,000 - 500,000 B.C 쟈바인, 북경인)
구석기 시대(Paleolithic 500,000 - 20,000 B.C)
셸기 _ 필트다운인, 하이델베르크인.
무스테르기(Le Moustier유적) _ 네안데르탈인
오리냑기(Aurignac) _ 크로마뇽인
솔뤼트레기(Solutre)
마들렌기(Le Madeleine) _미술다운 유품의 최초의 것은 오리냑기와 마들렌기의 기원전 2만년경에나 볼 수 있다. 불의 발명
중석기 20,000 - 12,000 B.C (Mesolithic)
신석기 12,000 - 3,000 B.C (Neolithic)
청동기 3,000 - 1,000 B.C
철기 1,000 – A.D - 3~6시기
1.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
BC 30000~9500년의 미술로서 오리냐크(Aurignac) 문화, 솔류트레(Solutré) 문화, 마들렌(Madeleine) 문화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미술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수렵인들이 그들의 임시주거지에 남긴 작은 물건들이고, 또 하나는 암석주거지나 깊은 동굴에 그려진 벽화이다. 소형미술품에는 동물이나 여인의 입상, 자연에서 모방한 물상(物象)이나 도식적 문양을 새겨넣은 뼛조각과 상아 및 돌, 섬세하게 장식된 여러 가지 도구 등이 있다. 물론 이들 외에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미술품들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것들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소멸되었다. 벽화들은 일광이 비치는 암석주거지에 있는 부조(浮彫) 또는 조각과 좀더 깊숙한 동굴 속에서 발견되는 조각과 회화가 있다. 안료로는 망간·탄소·오커(ocher : 황토색을 내는 안료) 등이 쓰였으며 색깔은 검정색·붉은색·갈색·노란색, 그리고 드물게 자주색 등이 채색되었다. 벽화에서도 자연적 물상이나 도식적 문양의 제재(題材)가 등장하는데 자연적 물상에는 거의 배타적으로 동물, 특히 말·아메리카들소·매머드 같은 초식동물들이 등장하며, 도식적 문양에는 기호가 나타난다. 이 시기 미술의 특징은 동질성과 일정 방식에 대한 계속적인 고수(固守)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이들 미술품이 생산되던 시기의 사회적 안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미술은 스페인·프랑스·스위스 등을 포함하는 서부 문화지역과 이탈리아, 중부 유럽, 유럽에 면한 러시아, 시베리아 등이 속하는 동부 문화지역으로 대별된다.
동산미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Venus of Willendorf]
현재 동부·중앙·서부 유럽에는 소형미술품을 상당량 출토한 장소가 각각 14, 18, 71곳이 있으며 서부 유럽에는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는 장식동굴이 80개 이상, 또 그보다 중요성이 좀 떨어지는 동굴이 역시 80여 개 정도 있다. 소형미술품은 동부와 서부 문화지역에서 모두 산출되는데 중부 유럽과 유럽에 면한 러시아에서는 출토 장소는 적지만 내용은 풍부하다. 비너스들은 여기에서 출토된 가장 유명한 미술품으로 돌이나 상아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채 8㎝도 못 되는 벌거벗은 여성입상이다. 이것들은 가슴·배·엉덩이가 커다란 반면 손, 발, 얼굴 모양 등은 표현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 비너스가 가장 전형적인데 모든 비너스가 뚱뚱하고 또 여자인 것은 아니다. 체크 브르노(Brno)의 성인(成人) 무덤에서 발견된 비너스는 상아로 만든 남자였다. 비너스들은 종종 집안의 노변(爐邊)에 위치하거나 한쪽에 나열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거주와 관련이 있으며 성적(性的)인 상징이라기보다 집의 수호자로 기능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마들렌 문화기에는 많은 벽화와 소형미술품이 제작되었는데 이때의 동물상을 통해 기후가 한랭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형미술품이 풍부하게 출토된 지역들의 대부분은 프랑스 피레네의 산기슭 주위에 위치하며 스페인 북부의 엘발레(El Valle)와 엘펜도(El Pendo)에서도 많은 유물이 나왔다. 소형미술품이 단지 주거지역에서만 발견되는 데 비해, 벽화는 물론 그곳에서도 가끔 발견되지만 동굴 깊은 곳에 성소(聖所)를 만들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동굴벽화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나눈다. 먼저 프랑코, 칸타브리아 문화는 서남프랑-도르도뉴, 피레네(동물들의 단독상으로 생생히 묘사)과 북스페인-칸타브리아 지방이 있다. 그에 반하여, 카프사 문화는 동스페인, 북아프리카로 분리된다. 회화들의 특징은 선은 지극히 간략하며 색도 흑,갈,적,황 등 한정된 범위의 것. 주술적 의도에서 그려진다. 중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중간양식을 보이며, 인간과 동물떼를 보다 집단적인 시점에서 파악한 암굴벽화와 유적지가 발견된다. 프랑스의 라스코를 흔히 연상하는데 이것은 동굴이 한 단위로 장식된 것으로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대부분의 동굴벽화에서는 그림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있지 않으며, 그림이 동굴의 눈에 안 띄는 한구석에 그려지고 동물그림도 겹쳐지거나 미완성이거나 거꾸로인 경우가 많다. 동굴벽화에 그려진 동물 중에는 말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아메리카들소·황소·매머드·사슴·아이벡스(ibex)·육식동물 등이 있다. 물고기는 드물며 조류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랑스의 브뢰이으(Breuil)를 비롯한 동시대인들은 동굴벽화가 사냥을 위한 유감주술이라고 해석했는데 오늘날에는 이 해석에 대해 몇 가지 설득력 있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프랑스 라스코 기원전 15000 - 10000 년경
스페인 알타미라 기원전 15000년 - 12000년경
2. 신석기시대의 미술
선사시대는 농경사회의 초기단계로서 이란에서는 BC 8000년경에, 영국에서는 BC 4000여 년에 시작되었으며 근동에서는 BC 3500년까지, 유럽에서는 BC 2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통념과는 달리 수렵시대보다 더 여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당시의 예술은 여가시간에 발휘된 창조적 본능이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기술적·신화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신석기시대의 미술은 주로 가정의 도안이나 장식분야에서 발현되었으며 아북극(亞北極) 상록침엽수림대의 어로인·수렵인들을 제외하면 사실적이지 않고 기하학적이다. 그것은 도기의 장식에서 잘 드러난다. 도기는 항상 손으로 만들어지는데 남동 유럽, 남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지에서는 채색되고 그외의 지역에서는 칼로 금을 긋거나, 눌러 흔적을 남기거나, 틀로 찍은 무늬로 장식되었다. 도기의 도안은 바구니나 가죽 또는 여타 재료로 만든 용기와 유사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부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황토지대 및 발칸 지역에서는 나선형이나 뇌문(雷紋)이 더 선호되었다.
3. 레반트 미술
스페인 동부에서 발견되는 벽화미술로서, BC 10000 년에 나타나 BC 3000년에 소멸한 중석기시대의 수렵채취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적색 또는 흑색의 단채색으로 그려진 회화의 주제는 인물과 소·말·거미·꿀벌·파리 등이며 크기는 동물상이 75㎝, 인물상이 30㎝를 넘는 것이 드물다. 인물들의 단독상은 없고 활을 들고 수렵·전투·무용·봉밀채집(蜂密採集) 등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4. 극북미술(極北美術)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러시아에 분포된 암면각화로 BC 5000~1600년에 수렵인·어로인에 의해 제작되었다. 주제는 순록·사슴·바다표범·고래·연어·곰 등의 동물상과 도식화된 인물상들이며 표현기법은 1줄의 선에 의한 묘사와 고타법(敲打法)에 의한 각화가 있다. 동물의 교미장면 및 화살을 몸에 맞은 동물 등이 그려진 이들 암면화의 목적은 동물의 번식 기원과 사냥을 위한 유감주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거석문화
지중해의 섬들로부터 대서양의 연안지역, 덴마크, 북부 독일, 남스칸디나비아 등지에 구축된 거석기념물들로서 제작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른데 스페인은 BC 2400년경, 프랑스와 독일은 BC 2000년 전반기로 추정된다.
스톤헨즈
멘히르
크롬렉흐
알리뉴망
돌멘
6. 아프리카의 원시미술
사하라·리비아·수단의 각 사막 주변에서 방대하게 발견되는 암면채화(彩畵)와 각화(刻畵)로서 사하라의 기후가 습윤(濕潤)했던 중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 대부분 제작되었다. 고졸시대(古拙時代)는 코끼리·물소·영양 등이 단독으로 새겨진 중석기시대의 각화이다. 수렵인시대는 둥근머리의 인물이 등장하는 신석기시대의 암면화로서 흑인의 조상들이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소[牛]의 시대는 대규모 목축이 행해지던 때의 벽화로서 주제는 소나 양의 방목, 수렵, 무용, 가사 등의 일상생활이다. BC 3500~1500년에 제작되었으며 작자는 플라니족으로 추정된다. 말[馬]의 시대는 BC 12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다시 전차시대(戰車時代)·기마인시대(騎馬人時代)·낙타시대로 분류된다. 전차시대의 미술에는 소, 코끼리, 야생 양, 가축화된 개, 전차, 창, 방패, 단도(短刀)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분포는 과거의 사하라 횡단 무역로와 일치한다. 기마인시대는 전차를 이용한 말의 조정에서 직접 기마로 전이했음을 보여주는데 이때까지 전차는 계속 이용되고 있었다. 낙타시대는 BC 700년경에 도입되었으며 이즈음 소는 매우 드물어졌다. 처음에는 창만이 묘사되다가 뒤에 칼과 소형화기가 등장하는데 양식은 무척 도식적이다. 이밖의 원시미술로서 부시먼에 의해 그려진 남부 아프리카 각지의 암면화, 인도 마리야프라데시 주 주변의 거대한 암벽화군, 종교적 주제가 짙은 오세아니아의 암면채화와 각화, 미국 서부와 남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암면각화 등이 있다.
7. 현대미술에 미친 영향
1903년경 상징주의는 쇠퇴하고, 새로운 화가들은 원시성에서 미술의 원천을 찾고자 했다. 앙리 루소의 그림의 순진성은 그림에 착상의 대담성을 부여했다. 고갱은 만년에 원시미술의 예언자적 존재가 되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은 거칠고 조야한 양식으로, 마티스는 보다 신중한 태도로 원시미술에 접근했다. 1905년에 이 3명의 화가는 '야수파'라고 불리게 된다. 파블로 피카소는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원시미술의 영향으로 유럽 미술의 전통을 변혁시켰다. 독일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태평양제도의 미술을 발견하여 야수파와 비슷한 원시주의적 회화를 그렸다. 20세기초에는 '예술은 표현'이라는 사고가 프랑스와 독일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마티스는 표현을 조화로운 화면구성으로 보았고 키르히너는 이것을 불안한 감정의 표출로 보았다.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8037
원시미술 근원적 이미지 - 생명력의 이미지
주술적 이미지와 기억에 의한 상징성
고갱과 원시성
야수파와 원시성
입체파와 흑인 조각
초현실파와 원시성
추상미술과 원시성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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