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의 정신병자/고대미술

1부 미술의 탄생

草霧 2013. 2. 2. 00:00

 

 

 

 

1부 미술의 탄생

 

미술, 태어나다

 

고대 미술

 

미술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1. 미술이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유화, 1913]] 미술(美術)은 시각적(視覺的) 방법 또는 조형적(造形的)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종류라고 말할 수가 있다. 미술이라는 용어는 미()를 재현 또는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러 재주, 또는 기예를 뜻하는 프랑스어 보자르(beaux arts)를 번역한 말로서, 영어의 파인 아트(fine arts)도 같은 뜻이다. 우선 중국 당()시대에는 공예(工藝)라고 불렀고, ·(·) 시대에는 서화(書畵)라는 말이 오늘의 미술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미술이라는 말이 들어오기까지는 역시 서화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서예와 그림 외의 미술 즉 공예(工藝)나 건축이나 조각 같은 것은 지금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미술이 아니고 단순한 공예품·건축물·조각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1960년 전후로 해서 서양의 미학 사상(美學思想)이 들어와 미술의 영토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1800년대에 서양 사람이 생각해 낸 미술을 둘로 구분, 순수 미술(純粹美術)과 응용 미술(應用美術)로 하여 그림·조각은 순수 미술, 공예·건축은 응용 미술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전후해서 미술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자 미술이라는 말이 새로 생긴 미술적 현상을 가리키기에는 너무나 좁고 구식이기에 새로운 용어가 요구되어, 시각 예술(視覺藝術공간 예술(空間藝術) 또는 조형 미술(造形美術)과 같은 말이 생기고 사용되게 되었다. 시각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이 사람의 시각 작용을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에 그렇게 불렀고 공간 예술이라는 것은 미술의 성립이 그 공간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 예술(時間藝術음악·문학 등)과 대치되는 예술로 규정되었고, 조형 예술은 미술이 유형적(有形的)인 조형성을 기본 방법으로 하고 있기에 그렇게 불렀다. 이 새로운 용어들은 과학(科學)의 발달과 생활의 변모에 따라 생기는 새로운 미술현상, 예를 들면 사진(寫眞)이라든가 디자인이라든가, 꽃꽂이 같은 것도 아울러 표현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미 미술이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오늘의 유형 예술의 전부를 가리키기에는 좁은 의미의 내용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예술이란?

원래는 기술과 같은 의미를 지닌 어휘로서, 어떤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능력을 가리켰다. 예술이라는 한자에서 ()’에는 본디 심는다(·)’는 뜻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기능(機能)’ ‘기술(技術)’을 의미하며 고대 동양에서 사대부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였다. 육예(六藝:·····)에서의 는 인간적 결실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기초 교양의 씨를 뿌리고 인격의 꽃을 피우는 수단으로 여겼던 만큼 거기에는 인격도야의 의의도 있다.

 

그리고 ()’은 본디 나라 안의 길[邑中道]’을 의미하며, [·]’은 어떤 곤란한 과제를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는 실행방도(實行方途)로서 역시 기술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와 같은 뜻을 지닌 예술이라는 말은 고대부터 동양에 존재하였으며, 후한서(後漢書)<안제기(安帝紀)>에 이미 백가예술(百家藝術)’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한편 예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nē), 라틴어 아르스(ars), 영어 아트(art), 독일어 쿤스트(Kunst), 프랑스어 아르(art) 등도 일반적으로 일정한 과제를 해결해낼 수 있는 숙련된 능력 또는 활동으로서의 기술을 의미하였던 말로서, 오늘날 미적(美的) 의미에서의 예술이라는 뜻과 함께 수공(手工)’ 또는 효용적 기술의 의미를 포괄한 말이었다. 이러한 기술로서의 예술의 의미가 예술활동의 특수성 때문에 미적 의미로 한정되어 기술일반과 예술을 구별해서 미적 기술(fine art)’이라는 뜻을 지니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_ [출처] 예술 | 두산백과

 

 

 

3. 예술의 본질

예술은 주체적인 개물(個物)을 통하여 보편적인 표현을 하고자 하는 기술인 동시에 지적(知的) 활동이다. 예술가는 보편적인 것을 직관(直觀)하여 그것을 종이·그림물감··소리·기호 따위 물질적 재료에 의하여 표현하고, 이것을 관상자(觀賞者)에게 직관시키고자 한다.

 

 

예술작품으로부터 관상자가 향수(享受)하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 쾌감에서 그치는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작품을 통해서 미()를 추창조(追創造)하는 과정이다. 개성적인 가운데도 보편성이 나타난 예술작품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서이다.

 

 

학문이 개념적·이론적인 것임에 반하여, 예술이 구체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점은 플라톤의 미의 이데아에 관한 에로스설()’을 비롯하여 예로부터 많은 형이상학자(形而上學者)들의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미적인 대상 일반에 관한 고찰들 가운데서도 획기적인 것은 칸트의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예술미(藝術美)의 평가는 자연미에 관한 판단원리의 귀결로써 고찰되어야 하며, 예술에 필요한 것은 독창성이 풍부한 이념이라기보다 구상력이 오성(悟性)의 법칙성(法則性)에 자유로이 부합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하였다.

 

예술은 개개의 인간 및 인류의 생활과 행복에의 발걸음에 없어서는 안 될 인간 상호 간의 교류 수단이요, 모든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통일하는 수단이다. 사람은 예술에 의해 타인의 감정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 덕택으로 감정에 세계에서도 그 이전의 인류가 경험한 일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고, 동시대 사람들이 경험한 감정이나 천년 전의 타인이 맛본 느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자기의 느낌을 타인에게 전할 수도 있는 것이다.

 

 

 

2. 미술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원시 인류는 그런 추상적이고 제도적인 미술 개념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이미지를 그리고, 새겼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 우리가 미술이라 이름 붙인 특정한 문화 형식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문화는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유무형의 것들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거기에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거대한 사회체제부터 최근 유행하는 자잘한 패션 아이템까지 온갖 것들이 속한다. 또 역사와 전통이 켜켜이 누적된 인류문화유산에서 지구상의 어느 조그만 지역에 이제 막 모여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소박한 습속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포괄한다. 우리가 쉽게 보는 듣고 즐기는 그림, 음악, , 연극, 영화, 스포츠도 두말할 것 없이 문화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매우 뿌리 깊고 광범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앞서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란 인간 활동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먼 옛날부터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들의 표시를 원하게 되었고 인류는 여러 가지 생각을 기호로 만들기 시작했다. 즉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한 행위들이 미술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호들은 당연히 시대와 지역차가 나타나고 문자의 발명전부터 메시지를 사용했으며 대표적인 것이 라스코 동굴의 벽화라 할 수 있다. 벽화의 대부분은 천장에 그려져 있다. 매머드 ·토나카이 ·들소 ·사슴 등이 흑 ··갈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생생한 묘사, 아름다운 색채와 입체감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이 벽화를 통하여 당시의 예술 활동 뿐만 아니라 수렵의 방법이나 무기 ·신앙 등을 알 수 있다.

 

. 미술의 기원, 회화조각건축의 뿌리 찾기

 

1. 미술의 기원

최초의 미술가는 누구였을까?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우리는 불확실한 미술의 기원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역사가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들의 축적이라고 할 때 미술사 역시 최초의 미술품과 미술가들의 등장으로 그 이야기가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모순이 있습니다. 예술로서 미술이라는 개념은 사실 근대이후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미술의 기원을 따지는 것은 후대의 잣대를 과거에 소급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넓혀서 우리가 앞으로 십 여 주에 걸쳐서 다룰 '미술'이라는 것을 그때 그때의 사회적인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시각적인 생산물'로 그 범위를 확장해보면 먼 인류의 생활용구나 장신구, 벽에 새긴 부조나 벽화, 그리고 조각에서 인류 미술의 시작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3만년을 즈음하여 예술적인 창조성이 크게 발현되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아프리카나 서유럽에서 크로마뇽인이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하는 기간에 해당하는데, 그들은 인류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모습을 이미지로 표현해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미술의 재현(representation)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발견된 동물형태의 간단한 그림(1)이나 독일 홀란스타인 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3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얼굴을 한 조각상은(2.3) 바로 인류 초기의 미술활동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고대문명들이 발생하기 이전의 미술을 선사시대 혹은 원시미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다시 오랜 빙하기 동안 동굴에서 살면서 채집과 사냥에 의존하였던 구석기 시대와 온화해진 기후에서 농경생활을 하였던 신석기 시대로 크게 나눌 수 있겠습니다.

 

2. 그럼 이런 그림을 왜 그렸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사냥은 생계수단을 이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 이였으며 좀 더 큰 사냥감을 잡기 바라는 마음과 사냥도중 죽은 가족을 기리기 위한 행위, 큰 사냥감을 잡은 것에 대한 자부심들이 벽화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 주술적 행위을 의미한다.

 

스톤헨지> ,B.C2000 ,7평방미터 ,월셔, 영국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Historia Naturalis에서 전한 위 이야기는 회화의 기원소조의 기원을 담은 신화로 일컬어진다. 신화인 만큼 객관성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류가 처음 이미지를 만들었던 동기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대신해서 더 오래 변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어떤 것을 사람들이 원했기 때문에 출현했다는 얘기다. 의미를 좀 더 확장해보자. 비단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인간 존재는 태어나자마자 변화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물론 세상 만물 또한 변전을 거듭하고, 생성과 소멸의 행로를 벗어날 수 없다. 반면 벽에 그린 사람의 얼굴, 돌에 새긴 인간의 몸, 도자나 청동으로 주조한 세계의 이미지는 실재를 대신해 그 자리에 그대로 반영구적인 삶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필멸하는 인간의 조건, 유전(流轉)하는 세계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 인류의 뿌리 깊은 열망을 담고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기원전 만 오천년 경 라스코 동굴벽화가 그려진 이유, 기원전 삼만 년 경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조각된 이유, 고대 이집트의 멤피스가 벽화로 그려지고 금으로 만든 관 속의 미라로 남겨진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 아주 오래된 것들이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우리에게 미적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감동을 선사한다.

 

3. 동굴벽화

 

http://article.joinsmsn.com/news/blognews/article.asp?listid=12146975

 

 

미술을 시대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우리의 먼 조상들이 동굴에 그려놓은 놀라운 형상들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될 지 모릅니다. 1879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처음 벽화를 발견한 사람은 아마튜어 고고학자 돈 마르셀리노 산츠의 어린 딸이었다고 하는군요. 동굴의 낮은 천장에 그려진 아래 도4의 천장화는 아무래도 시선이 낮은 어린아이의 눈에 발견되기 쉬었던 것이겠지요. 천장에 그려진 웅크린 들소들은 하나같이 모두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이어서 흥미로운데, 학자들은 아마 죽어서 땅에 쓰러진 들소들을 묘사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알타미라 벽에 그려진 들소의 모습(5)은 부분적으로 추상화되었으나, 곤두선 털과 우람한 야생의 근육의 특징이 생생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요? 20세기 피카소가 즐겨 그린 황소(6)와 흡사하여 그 시간적인 간격이 더욱 놀랍기만 합니다. 이 놀라운 동굴벽화는 발견된 다음해인 1880년 열렸던 고고학 학회에서 그 진정성이 의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많은 동굴 벽화들도 속속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이 그림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오래 전인 수 만 년 전 구석기인들의 솜씨라는 것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구석기 동굴벽화는 남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역의 여러 석회암 지대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 알려진 것만도 이백여 곳이 넘는다고 합니다.

 

B.C 32천년 프랑스 쇼베 동굴벽화

거대한 동굴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벽화는 오랜 옛날 인류에게 있어서 미술이 어떠한 힘을 가지는 것이었는지,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동굴 벽화 중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 몬티악(Montignac) 근처 라스코 지방의 동굴 벽화를 보도록 합시다(7, 8, 9, 10, 11). 기원전 만 오천 년에서 만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들소, 사슴, 순록, 곰과 같은 동물들의 모습이 아래 도9의 지도에서 보듯이 길게 뻗은 동굴의 길을 따라 빼곡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시간을 초월하여 선사시대의 힘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들소들의 방'으로 불리는 동굴의 넓은 광장의 벽화는 실로 장관을 이룹니다(7). 벽면을 따라 그려진 동물들의 무리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질주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불룩한 배를 한 새끼를 가진 동물(10)도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굴인들이 사냥감의 습성과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울퉁불퉁한 석회암 표면을 이용하여 아주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사슴, 들소, 말 등의 동물들은 때로 검은색 윤곽선만으로 그려지거나, 혹은 내부에 붉은색과 검은색의 색채로 채워져 있군요. 동굴인들은 붉고 검은 색 광물성 안료를 속이 빈 동물의 뼈에 넣고 불어서 윤곽을 그리거나 혹은 다른 매제에 개어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는 어두움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였던 돌로 만든 램프도 발견되었습니다.

 

<>B.C15.000~10.0000년경.동굴벽화. 라스코동굴, 프랑스

 

그러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며, 동굴에서 거주하였던 구석기인들은 왜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현하였던 것일까요. 자신들의 거주지가 멋지게 보이도록 장식 삼아 그렸던 것일까요.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벽화들이 빛이 들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 그것도 자꾸 중첩해서 그린 이유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들소들의 방'만 하더라도 처음부터 일대 사냥장면의 스펙터클을 묘사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을 한꺼번에 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실은 수 천 년에 걸쳐서 이미지를 덧 그린 결과라는 것이지요. 가장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은 선사시대 수렵인들이 두려운 존재인 야생동물을 이미지화하여 그들을 포획하고 지배하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벽화에는 도11처럼 창을 맞고 피를 흘리는 장면을 그리거나 혹은 실제로 그림에 창을 꽂았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야생의 동물들을 그림으로서 그것들을 소유하고 영혼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재현된 이미지가 초자연적인 마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자신의 사진을 쉽게 찢어버리거나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설명이외에도 후대에도 많이 제작되는 반인반수의 토템상과 관련하여 동물조상신을 섬기는 선사시대의 신앙이 반영된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B.C18,500~14,000, 구석기 시대 후기의 벽화 , 알타미라 동굴벽화, 스페인 북부의 칸타프리아 지방

 

 

4. 인류최초의 여성상 _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거대한 규모의 동굴벽화이외에도 구석기인들은 짐승의 뼈나 돌을 깎아 인간이나 동물형상의 부조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12, 13, 14)입니다. 여기 아래 보시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전면에서 뿐 아니라 옆에서 그리고 뒤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높이 11센티미터의 작은 돌 조각으로 머리모양은 둥글둥글한 패턴으로 간략화되어 있고 이목구비는 생략되어 있군요. 특히 왜소한 팔에 비해 가슴과 배, 엉덩이와 같은 여성의 상징은 매우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B.C25,000~20,000, 자연사박물관,

 

서양미술사에서 비너스와 같은 여인의 누드가 매우 빈번하게 그려지고 조각되어 왔던 점을 상기해 볼 때, 구석기 시대 인물조각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여성의 이미지가 많은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뿐 아니라 풍요의 여신을 주제로 삼은 여성상은 도15나 도16에서 보듯이 매우 많습니다. 이는 도19의 라스코 벽화의 한 장면에서 보듯 황소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왜소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된 선사시대의 남성상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구석기 시대 발견되는 여성상들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비너스 상으로 명명되었는데, 신화가 구성되기 훨씬 전에 제작된 여성상에 사랑과 관능의 여신인 비너스의 이름을 붙인 것은 모순되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17과 도18을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는 고대 이래 비너스 상에 투영된 관능의 시선도, 신성(神性)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생산과 다산과 풍요의 기원이 여성의 신체를 이렇게 왜곡하였던 것입니다. 여성의 몸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남성의 신체보다 대상화되기 쉬운 존재였던 것일까요? 풍요의 여성을 나타내는 불룩한 형태의 여성도상이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시기에 걸쳐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동물의 생산성, 대지의 산출력이 인류의 삶과 깊은 연관을 지녔다는 반증이라고 하겠습니다.

 

 

 

. 서양 미술의 열쇠 _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양의 문화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모든 문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탄생시킨 사회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서양 각 나라의 문학은 서양 고대문학을 밑거름으로 해서 발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서양문학의 바탕과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문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 문학과 히브리 문학의 근본 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또는 히브리즘)은 서양 정신사의 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서로 엇바뀌거나 함께 혼합하며 문학사상을 이루어 왔습니다. 헬레니즘이 우세할 때는 고전주의나 사실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헤브라이즘이 우세할 때는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등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 외의 다른 모습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는 모든 주의와 주장은 이 두 큰 줄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서양의 모든 문필가는 이 두 사상에 크든 적든 빚을 지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반도를 의미하는 헬라스(hellas)’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그곳에 사는 민족, 즉 그리스 민족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34년 동방 원정을 이끌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와 그리스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동쪽 인도까지 진출하면서 오리엔트와 그리스 두 세계가 하나로 융합한 신문화가 생겨났는데, 이것을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릅니다.

 

헬레니즘

말하다’, ‘그리스인처럼 행동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hellenizein에서 유래. 그리스 고유의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기보다는 세계화한 그리스 문화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폴리스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난 그리스 문화는 세계제국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헬레니즘은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타니즘)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원자화(집단 속에서 개개인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된 개인을 밑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하여 이루어진 세계주의적인 예술·사상·정신 등을 특징으로 하는 문화대계.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 헬레니즘은 19세기 초 인도의 역사가 J. G. 드로이젠에 의해 정의되었다. 세계사 속에서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원된 독자성을 지닌 역사적 개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 정신에서 그리스화한문화까지 포함한다. [,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와 서아시아 지역으로 널리 퍼져 나간 현상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죽음에서 로마 제국에 의한 이집트 합병(BC 323~30)까지의 대략 3세기에 걸친 기간이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고대 그리스 본토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뒤를 이은 여러 왕들에 의해 점령되고 지배되어 새로이 헬레니즘화한 땅에까지 이른다. 헬레니즘 문화는 한때 에게 해 주변의 전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카르타고 등의 다른 나라에까지 확산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서쪽은 영국, 동쪽은 인도의 펀자브 지방까지 뻗어갔다.

   

B.C 130년에서 100, 밀로의 비너스, 루브르박물관

 

헬레니즘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적인 사유로서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이성적이라는 것과 인간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써서 유명해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이며 아르테미스 여신과는 쌍둥이다. 레토는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질투로 출산할 장소를 찾지 못하다가 델로스 섬으로 도망쳐 가 그곳에서 아폴론을 낳았다고 한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인 동시에 예언의 신이기도 해서 델포이를 중심으로 그의 신전이 세워져, 무녀를 통해 신탁을 받는 일이 성행했다.) 신전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성과 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문시되는 것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서 그 해답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대화하며 새로운 무엇을 이끌어 내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이성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자라는 플라톤의 철학(철학 포스트 참조) 표어 역시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고 현세의 삶을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보통 인간들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약탈하고 잔꾀를 부리기도 하는 인간적 정서를 지닌 신들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사랑했는데 그 예술은 사물의 본질을 형식화해 파악하고자 하는 이성과 결합된 아름다움이며, 예술의 표현 양식에서 조화, 통일, 균형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미술에서는 조각 같은 조형예술을 추구하게 되고, 문학에 있어서는 드라마, 즉 연극이 발전했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14441510)의 비너스의 탄생

 

헤브라이즘이라는 말은 건너온 사람들’, ‘방랑자를 뜻하는 이브리(ibri)’에서 비롯된 말로서 외국인들이 유대인들을 경멸적으로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히브리 민족 특유의 성격, 정신, 문화를 말합니다. 헤브라이즘의 사상은 성서에 요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달리 성서에 나타나는 신은 유일신이며 완전한 인격적 존재여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모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야훼(여호와)가 명한 대로 행하는 것도 그러한 순종과 믿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인간적인 자유주의는 배제되고 신에 대한 경배와 신앙이 앞섭니다. 또한 현세의 삶보다 내세를 중시하기 때문에, 육체 및 욕망은 올바른 행위를 방해하는 것으로 배척되어 금욕적인 경향을 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본질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객관적 세계의 파악은 사물의 형태에서가 아니라 신과의 영적인 교감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비적인 경향도 보입니다.

 

 

헤브라이즘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사상을 형성해 온 중요한 사조(思潮).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구약성서)에 근원을 둔다. 그것은 BC 13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과의 계약이라는 전승(傳承)에서 비롯되며, 이어 야위스트(Yahwist:야훼를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나 엘로히스트(Elohist; 엘로힘을 신의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 등의 역사가와 <신명기(申命記)> 율법의 기자(記者),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활약으로 점차 뚜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특히 BC 6세기 초기에 남왕국(南王國) 유다가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되고 다수의 선량(選良; 뛰어난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포로가 되면서, 그 종교사상은 한층 심화되고, 2이사야의 '고난의 종복'에서의 구제사상(救濟思想)에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구제관(救濟觀)은 나자렛 예수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어,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탄생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서양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인격신(唯一人格神)의 역사적 계시와 이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하고, 여기서 생기는 신에 의한 우주의 창조와 세계사의 주재(主宰), 이 신과의 계약에 의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세계관 및 인간을 영육일체(靈肉一體)로서 파악하는 인간관에서 헬레니즘과 대립된다. 즉 헬레니즘이 우주를 신들로부터의 타락 또는 유출(流出)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헤브라이즘은 우주를 신이 만든 피조계(被造界)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헬레니즘에서처럼 인간의 육체나 물질계는 그 자체가 악()으로 취급되지 않고 피조물의 하나로서 의의가 부여된다. 또한 인간은 운명이나 필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인격적 결단과 책임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역사는 이 인간의 책임과 신의 인도에 의해 명확한 목표(종국)를 향하여 전개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종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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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람들과 달리 히브리 사람들에게 조각 작품이나 회화 작품이 없는 것은 그것들을 우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적 사유에는 대화가 드물며, 완전한 형식을 갖춘 드라마 역시 없으며,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예술이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스인이 예술과 과학과 철학으로 세계 문화에 공헌했다면 히브리인들은 신앙과 도덕으로 공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지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적 사유와 직관적이고 신비적이며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브라이적 사유는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서양 문학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뱀의 유혹과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미켈란젤로 ,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C. 미술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릴까?

미술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미술가들이 무슨 생각으로 작업을 했는지를 알려면, 먼저 미술의 정의가 변화된 과정을 알아야한다. 미술을 비롯하여 우리가 지금 '예술art'이라고 일컫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인 '테크네'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르스ars'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아르스'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의 예술art과 분명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각 시대마다 그 의미는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아르스'는 그리스로마 시대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때까지도 사용된 용어로서, 모든 종류의 기술skill을 의미했다. 즉 각각 고유의 제작규칙을 가지고 있는, 동상, 도자기 등 물품을 만드는 기술 이외에도 전쟁 전략을 세우는 기술, 관중을 사로잡는 변술론, 문법과 논리학 등의 전문지식도 '아르스'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규칙에 얽매임이 없이 뮤즈여신들이 영감으로부터 만들었다고 여겨진 시는 예술로 생각되지 않았다. 플라톤의 말처럼, "비이성적인 작업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예술개념의 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그 변화 중 하나는 학문과 공예가 예술의 영역에서 제외되고 시가 예술의 지위를 획득하게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16세기 중엽에 이탈리아에서 번역, 출간되고 그 뒤를 이어 계속해서 시론들이 발표되면서, 시에도 규칙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게 되어 예술로서의 자격을 취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공예와 학문이 예술의 영역에서 제외된 후 예술로 남은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분야, 즉 오늘날 우리가 순수 예술이라고 부르는 예술의 체계가 이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조 : Wladyslaw Tatarkiewicz, A History of Six Ideas: An Essay in Aesthetics)

 

 

이러한 예술 개념의 변화과정에 의거할 때,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미술은 근대에 이르러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근대 이전의 미술은 오늘날의 미술과는 달리, 실용성이나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30,000년에서 기원전 15,000년경에 제작된 이른바 "Venus"회화나 조각 또는 기원전 20,000년에서 기원전 10,000년경의 구석기 시대에 제작된 AltamiraLascaux 벽화들을 그린 사람들은 미술을 다산과 다량의 사냥감 또는 사냥에서의 안전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통로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이후 중세에 이르면 서양의 중세가 기독교 사회였던 만큼, 미술도 성직자나 왕족의 후원 하에, 일반인에게 성서의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Leonardo da Vinci, Piero della Francesca 등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는 과학자의 시각에서 미술에 접근하게 된다. 즉 그들은 자연이 단지 응시되고 모사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검토되고 이해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이러한 사고의 변화는 표현상의 변화로 이어져, 미술가는 자연의 모든 부분을 하나의 조직적이고 이해 가능하게 화면 위에 옮길 수 있는 원근법, 단축법 등의 방법에 대해 고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면, 정해진 규칙보다는 미술가의 사상, 감정 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미술은 그 진로를 바꾼다. 즉 계몽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시민혁명이 발발하고, 이에 봉건주의 사회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에 19세기의 미술가들은 귀족이나 성직자 등의 후원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미술가들이 궁핍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는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했지만, 한편으로 후원자의 요구에 부득이 응해야하는 속박에서는 풀려나게 되는 긍정적 결과 또한 가져오게 된다. 즉 미술가들이 이제 신화, 역사, 종교 등의 주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감정이나 사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가 보다 용이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서서 한층 두드러진다. 에펠탑이 세워지고 세계 최초의 지하철인 파리지하철이 등장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의 세계는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변화들로 가득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형성된 미술가들의 생각은 무엇에 의해 제한받음없이 그들만의 실험정신으로 표현된 미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Artists Think1930, 40년대에서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사이에 씌여진 글들로 엮어질 것이다. 흔히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인상주의부터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추상미술이고 이러한 추상적 경향이 명확하게 두드러지는 시기부터 시작하자는 의도에 있다. 다시 말해, 혁신성으로 성격지워지는 20세기 미술 중에서도 미술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1945년부터의 미술은 미술자체에 대한 자서전적인 특성을 탐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보이며,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