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제2코스, 사직동 (오솔길)

草霧 2012. 12. 27. 21:31

 

600년 옛 도시 종로의 코스를 걷다.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문화양념통

 

 

2코스, 사직동 (오솔길)

 

 

국왕은 백성의 복을 빌다. 좌묘우사(左廟右社) 사직단의 여명을 꿈꾸며,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 통의동 한옥마을 그속에 숨겨진 통의동 백송 나무사랑 이야기 그리고, 도심속 오아시스황학정가는 길에서 평범속의 비범을 찾으로 떠나는 긴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걷다보면, '()' 문화공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림미술관과 성곡미술관 그리고 작은 겔러리 등 치열한 예술혼 세계로 여행을 떠나본다.

 

 

 

역사 체험 코스 2

 

 

 

 

사직동 오솔길

 

 

 

 

 

5호선 광화문역 대림미술관 통의동 백송 터 통의동 한옥마을

 

홍종문 가옥 배화여자학교 및 백사 이항복 집터

 

사직단 황학정 단군성전 오솔길 성곡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신문로1

 

 

 

 

정감 어린 서울의 숨겨진 옛 골목 서촌, 조선시대 중인계급과 근대 문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경복궁 서쪽 한옥마을 코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을 따라 옛 문인들의 정취와 근현대 소시민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서촌은 화려하고 눈에 띄는 곳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소박한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코스입니다. 주저앉은 묵은 기와 지붕과 바스라져 내리는 시멘트 담벼락의 골목길.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던 터, 사직단이 있는 이곳엔 늘 노인의 체취가 고여있는 것 같다. 말캉한 것, 세련된 것, 풋풋한 것의 반대 편에서 곱게 늙은 동네다. 햇볕 따가운 날 오후의 산책길, 능소화 핀 골목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살갑다.

 

 

5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

 

광화문광장

 

대림

 

미술관

 

 

 

대림그룹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1996년 대전에 대림미술관을 설립하였다가 2002년 서울 종로로 이전하였다.대림미술관은 사진적 시각으로 현대미술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으로,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한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통의동

 

백송 터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백송은 우리나라 백송 중에서 가장 크고 수형이 아름다워 19621213일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가 19907월 태풍으로 인해 고사하였다. 현재는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고 고사한 나무 밑둥만 남아 있다.

 

창의궁 터

조선의 21대왕 영조의 잠저였던 곳으로 원래는 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옛집이었는데 숙종이 사서 그의 아들 연잉군에게 주었다. 숙빈 최씨가 말년에 이곳 아들집에 와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영조의 세자 효장세자와 화순옹주가 탄생한 곳인 만큼 영조와 관련이 많은 곳이다.

 

추사 김정희 집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통의동

 

한옥마을

 

 

 

 

인시장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서촌의 한옥마을.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서촌 주민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서촌 한옥 대부분은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 한옥이다.

 

 

홍종문

 

가옥

 

 

 

 

비 개방

773평의 넓은 대지에 연못과 정원을 갖춘 3동의 한옥으로 (이 중 한옥 2동이 문화재로 지정) 일제시대인 1910년대에 지은 것으로 고유의 멋을 잘 간직하고 있다 한다. 건축부재의 사용과 기단 처리에 있어서 이 시기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통소로를 사용한 점 및 기단 장대석의 처리 등과 또한 평면 형식에 있어서는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서울시 종로구 체부동 홍종문 가옥의 안채는 대지의 북쪽에 동남향으로 자리잡았고 앞에 정자가 있으며, 안채 안마당의 동북쪽으로 광이 있다. 조선시대 석등을 갖춘 정원이 안채 남쪽에 일부 남아 있고, 정자 앞쪽에는 담을 끼고 작은 연못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전퇴를 갖춘 안방이 있고, 안방 오른쪽에 부엌이 붙어 앞으로 꺾여 나왔으며, 안방과 부엌 뒤로 마루와 방이 있다.

 

대청 왼쪽 뒤로는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뒤로는 몸채와 직교하며 돌출한 방이 있다. 화장실 앞으로도 몸채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방과 서재가 차례로 있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여나가 다시 방이 있는데 원래 사랑채였다. 세벌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건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배화여자

 

학교

 

 

 

 

백사

 

이항복 집터

 

 

 

 

 

 

 

 

 

 

 

 

 

 

배화학당

 

배화여자학교

종로구 필운동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배화여고는 1898년에 설립된 배화학당을 계승하고 있는 학교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학교 생활관은 1916년에 현재의 자리로 배화학당이 이전해 온 해에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 한다. 현재 배화여고가 있는 자리는 이 곳은 필운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백사 이항복의 집터와 '필운대'라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있다. 조선시대 중인들의 많이 거주했던 인왕산 자락 아래 웃대라고 불리우던 마을에서 이정표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배화여고 생활관

고 육영수 여사의 모교로 유명한 배화여고 내에 있는 건물로 20세기 초 서양 선교사 숙소 건축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로, 선교사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반지하와 다락방이 있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외관은 붉은 벽돌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붕은 한옥의 기와지붕을 사용하고 있어 서양 건축물과 한옥의 주택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하고 있다. 배화여고에는 동시대에 지어진 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양식으로 본관을 비롯하여 여러동이 건물이 있다. 생활관 뒷편에는 이 학교 설립자를 기념하는 흉상과 기념비를 볼 수 있다.

 

 

백사 이항복 집터 (필운대)

백사 이항복의 집터가 있었던 자리에는 배화여고 본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생활관 건물과 비슷한 양식을 하고 있지만 후대에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본관 건물 뒷편에는 '필운대'라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이 곳이 백사 이항복의 집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이항복의 호중 대표적인 호가 弼雲白沙 인데, 그의 호 필운에서 필운동이라는 동네명이 생겼다. 그외 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이라는 호를 썼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정치가이자 시인 작가 그리고 재담가였기에 그에 맞는 호를 많이 썼던 모양이다.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됐다. 인왕산 자락 아래는 조선시대 중앙 관서에서 일하던 하급관리들을 중심으로 중인계층을 형성했던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웃대라 불리웠던 마을이다.

 

 

사직단

 

 

 

 

 

 

 

 

 

 

 

사직단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한 시설로 법궁(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세운다. 2개로 사단은 동쪽, 직단은 서쪽에 위치한다. 종묘와 함께 왕조의 정통을 상징한다. 중앙의 회색 방형 안의 2개의 단 중 위()쪽이 직단, 아래()쪽은 사단이다. 두겹의 담장에 둘러쌓여 있고 사방으로 홍살문이 있다

 

사직공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395년 한양으로 천도한 뒤 종묘와 함께 만든 사직단이 있는 공원이다. 면적은 168000제곱미터. 사직단은 4개의 대제, 중제, 풍년기곡제, 기우제, 천신제, 고유제를 올렸던 곳이다. 보물 제177호인 사직단 정문부터 단군 성전, 황학정 등 도심 속 자연에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공간이다. 사직단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서울을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든 것이다. 태조 3(1394)에 고려의 예를 따라 토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각각 북쪽에 모시었다. 1897년 고종이 황제위에 오르자 이곳을 태사. 태직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는데, 이 사직을 종묘와 함께 중하게 여겨 중춘과 중추와 납일(동지후 세번째 되는 개날)을 택하여 1년에 세번 제사를 지냈다. 1985년 시행한 고증발굴조사를 기초로 198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사적 제121

 

사직단정문(社稷壇正門)

보물 제 177, 1395년 세워진 후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8세기 말 중건. 사직단 정문은 신이 드나드는 방위인 북쪽에 세워졌으나 18세기 말에 복구하는 과정에서 동쪽으로 바뀌었다. 1962년 사직로를 만들면서 원 위치에서 14m물러난 현 위치로 옮겼다. 사직단 정문은 문이 나란히 3개인 평삼문에 맞배지붕이다.

 

 

황학정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진 궁술연습을 하던 사정(활터에 있는 정자)이다. 고종 광무 2(1898) 지어졌으며,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앞면 4·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원래 이 자리는 오사정의 하나인 등과정이 있던 자리이다. 오사정이란 도성 안 서쪽에 세워진 다섯 개의 활터에 세워진 정자로, 옥동의 등룡정·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누상동의 풍소정·필운동의 등과정이 그것이다. 지금은 오사정이 모두 없어졌으나, 이곳에서는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에 있던 등용정 ·삼청동의 운용정 ·사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 오사정이라고 불렸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도 파손되고 활쏘기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단군성전

 

 

 

 

사직공원 내 단군성전은 대종교 단군성전이아니라 대한민국최초의 공공건물(서울시 소유)로 세워진 단군성전이며, 봉안된 단군영정은 정부 표준단군영정(문공부심의번호 77-27과 성상은 정부지정 국민경모상 문공부심의번호 77-16)임을 알려드리며, 용도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교육과 국가홍보에 사용 되고 있습니다. 관리는 사단법인 현정회(02-736-6375)에사 하고 있습니다

 

 

오솔길

 

 

 

 

사직동 주민센터에서 출발해 사직터널 쪽인 오솔길과 연결된다. 가는 길에는 단군성전과 사직단, 성곽 등 유적지를 만날 수 있고 인접동인 교남동의 딜쿠샤, 홍난파 가옥과도 연결돼 있어 근현대사를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사직터널 바로 위로 나있는 연결로는 대단한 매력을 뽐낸다. 붉은 단풍이 바위 틈으로 살짜기 보이면서 한폭의 그림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오솔길에는 일본인이 옛날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적상가옥이 일부 남아 한옥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성곡

 

미술관

 

 

 

 

쌍용그룹 창업자 성곡 김성곤 선생의 기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정신을 미술 문화로 구현하고자 설립된 순수 공익단체로서 1995년에 개관하였다. 우리의 전통적인 얼과 정신, 우리의 정서와 미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개최한다.

 

 

서울

 

역사박물관

 

 

 

 

서울 신문로변 경희궁터 98,466가운데 경희궁 유적이 발굴되지 않은 22,809부지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서울역사박물관이 2002521일 개관했다.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의 중심무대였던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하여 서울시민들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또한, 월드컵을 계기로 세계적인 대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고 문화유산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여, 서울시민 개개인에게는 자긍심과 소속감을, 외국인에게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서울

 

시립미술관

 

 

 

 

경희궁 옛터에 자리잡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은 총 300여평에 달하는 6개의 전시실과 야외 조각공원을 갖추고 있는 종합적인 문화예술공간이다. 1988년 전시전용 공간으로 문을 연 서울시립미술관은 경희궁이라는 살아있는 역사와 미술, 조각이라는 문화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수준높은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경희궁

 

 

 

 

일제가 경희궁을 헐어내고 뜯어냈기 때문에 지금의 경희궁 자리에는 오직 흥화문이란 문루 하나만 서 있었다. 그럼 불운했던 광해군주와 경희궁의 창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 경희궁은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사적 제 271호인 이 궁은 조선시대 별궁으로 광해군 때 건축되어 270여년간 궁으로써 사용되었다. 원래 '경덕궁'이라 불렸던 이궁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다해서 '서궐'이라고도 불렀다. 경희궁의 창건당시 규모는 자그마치 15백칸에 이르렀으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거의 폐허가 되어버렸다.

 

광해군은 창덕궁이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흉궁인데다 경희궁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풍수의 말을 믿고 그것을 누르기 위해 새로이 경덕궁을 짓기 시작한다. 광해군이 즉위 초부터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인 이유는 후궁 소생인 자신의 왕통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왕으로서 권위를 과시하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잡음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공사는 진행된다고 볼 수가 있다. 원래 경희궁 자리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던 정원군 소유지였는데 이를 빼앗은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끝내 경희궁에는 입궐해 보지도 못하고 폐위되고 만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경운궁(현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경덕궁(현 경희궁)으로 모시고 자신도 경희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후에 숙종과 경종이 경희궁에서 태어났고 정조. 헌종. 철종이 경희궁에서 즉위하였다.

 

 

신문로1

 

 

 

 

흥국생명 앞 조형물 '해머링 맨(Hammering man·망치질하는 사람)’

 

동명은 서대문의 속칭인 새문을 한자로 적은데서 유래한다. 길가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서대문의 원래 이름이 돈의문이었는데 그 자리가 몇 번 변경됨에 따라 서전문, 신문, 새문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번잡한 곳이었다. 지금의 광화문 빌딩 일대에 있던 동령골, 세종문화회관 부근의 애주갯골,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 사이로 광화문 방향 새문안길 좌우에 신문내, 경희궁 남쪽에 있던 함춘원골 등 여러 마을들이 합쳐져 신문로를 형성하였다. 경희궁 흥화문(서울유형문화재 19), 경의궁지(사적 257) 등이, 주요 기관 및 시설로는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성곡미술관, 경희궁공원,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등이 있다.

 

 

 

 

역사체험 이야기

 

 

 

 

 

대림미술관

 

 

 

대림미술관은 대림그룹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1996년 대전에 대림미술관을 설립하였다가 2002년 서울 종로로 이전하였다.대림미술관은 사진적 시각으로 현대미술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미술관으로, 사진 매체를 중심으로한 기획 전시를 열고 있다. 미술관 컬렉션 역시 기획전과 같은 컨셉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창의력과 집념을 가지고 연구하고 노력하는 예술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아 새로운 문화 예술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격려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술관 건물은 유서깊은 경복궁과 접해 있는 통의동 주택가에 위치해 있으며, 예전에는 한 가족의 보금자리였던 것을 프랑스의 건축가 뱅상 코르뉴씨가 개조를 위한 디자인과 설계를, 한국의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아 20025월말 개관하였다.

 

 

1층은 정원과 주차장을 포함해 리셉션, 수장고, 회의실 등이 있고, 2층과 3층은 각각 작고 넓은 방들과 긴 갤러리, 그리고 천정이 높은 방 등으로 이루어진 180평의 전시실과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4층은 120명 수용 규모의 세미나실과 아름다운 전망의 발코니가 있다. 세미나실 전면의 발코니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을 안고 있고, 한국 전통 보자기를 본 뜬 스테인드 글라스 파사드가 눈길을 끌며, 정원을 향해 둘러있는 2층과 3층의 베란다는 관람객들을 위한 아름다운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온도와 습도, 그리고 빛에 예민한 사진작품을 위한 설계가 고려된 전문미술관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421 (통의동)

문의/안내02-720-0667

10:00~18:00 (매표마감 17:30)

 

 

 

통의동 백송 터

 

 

 

 

서울 통의동의 백송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4호 이었던 백송으로, 바람에 쓰러져서 지정에서 해제되었다. 1990717일 폭우를 동반한 돌풍에 쓰러져 줄기가 부러졌다. 719일 문화재관리국에서 대책 회의를 열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하려 했지만, 청와대에 가까이 있는 나무가 죽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라는 소문이 돌자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나무를 살려내라고 지시했다. 서울시는 '백송회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보호하여 살리기로 하고 경찰관을 3교대 근무로 배치하여 보호했다.

 

1991년 봄 새싹이 나는 등 살아날 조짐을 보였지만, 목재를 탐내는 사람들이 몰래 제초제를 뿌리는 사고가 발생하여 상태가 악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그해 513일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나무의 키는 16미터였다. 나무의 나이는 600여 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나무가 쓰러진 뒤인 1994년에 분석한 결과 1690년 경부터 자라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가장 오래된 백송이었으며, 지금은 서울 재동의 백송이 가장 오래된 백송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성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다.

 

 

 

백송(pinus bungeana)은 중국 원산으로 우리 나라에 자라고 있는 큰 나무는 그 숫자가 극히 적고 10그루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종자로 묘목이 양성되어 식재를 보고 있고 창경원 구내에서는 상당한 크기의 것도 볼 수 있다. 그간 우리 나라 백송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것이 서울시 통의동의 백송이었고 수고 약 16m, 나이는 약 600년생으로 추정되었다.

 

 이 백송은 줄기가 지면부터 두 갈래로 갈라지고 그 중 남쪽 줄기는 가슴높이 줄기둘레가 1m쯤 되고 높이 2.5m에서 다시 네 갈래로 갈라졌다. 동쪽 줄기는 비스듬히 누워 옆 집 울타리를 넘어서 10m 가량 자라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0717일 강풍을 동반한 폭우로 이 나무는 넘어졌다. 동쪽 줄기는 동쪽으로 넘어져 옆 집 담 위에, 남쪽 줄기는 남쪽으로 넘어져 역시 담장 위에 줄기가 걸쳐지고 지면의 줄기 부분은 거의 절단되다시피 하고 일부 수피가 남아 있었으나 압착에 의한 심한 상처를 받았다.

 

 

 

이틀이 지난 719일에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때 이 백송이 소생될 가망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지정해제를 하기로 했다. 그러던 것이 724일에 청와대에 근접해 있는 이 나무가 죽는다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돌면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이 나무의 회생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서울시는 그날 회생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방안의 하나로 이 나무를 쓰러진 상태로 두고 살리기로 했다.

 

그 뒤 수간주사, 망사피음, 지면을 담요로 덮어주기 등을 하고 718일부터는 동직원 2명을 상시 배치하고 724일부터는 경찰관을 배치하면서 24시간 3교대 근무로 현장보호에 임했다. 무당을 초대해서 멋진 한바탕 굿을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돼지머리에 돈을 끼우고 회생을 간구했으나 백약무효로 600년의 생애는 끝나고 말았다. 쓰러진지 210개월 뒤 1993513일 줄기는 잘렸다. 터주신목을 퇴장시키는 의식으로 융숭한 젯상을 차려놓고 고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창의궁 터

 

 

 

창의궁은 조선의 21대왕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곳으로 원래는 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옛집이었는데 숙종이 사서 그의 아들 연잉군에게 주었다. 숙빈 최씨가 말년에 이곳 아들집에 와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영조의 세자 효장세자와 화순옹주가 탄생한 곳인 만큼 영조와 관련이 많은 곳이다. 화순옹주는 월성위에게 하가하여 적선동 월성위궁에 살았다.

 

 

 

1754년에는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의 사당인 의소묘를 짓고, 1870년에는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를 안국방에서 창의궁으로 이봉하였다. 1900년 의소묘와 문희묘를 영희전으로 옮기고 1908년 신위를 매장함으로써 창의궁은 폐궁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건물 등이 팔려나가 동양척식회사 사택 등이 들어섰다.

 

또한 천연기념물 4호인 통의동 백송이 있었으나 1990년 벼락을 맞아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고 지금은 묘목들이 자라고 있다. 영조의 가족들이 살았고, 사당이 있었으며, 경복궁 바로 옆에 있으면서 영조가 자주 출입하였던 창의궁에는 영조의 친필 현판들이 있었는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월성위 김한신(경주 김씨, 1720~1758)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화순옹주 역시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공주 중에서 유일하게 열녀문이 내려진 여인이다. 영조는 화순옹주를 특별히 총애하여 비어있는 창의궁을 쓰게 하였거나 인근에 월성위궁을 지어준 것 같다. 영조가 월성위궁에 자신이 아끼는 백송을 심게 했다고 하는데, 통의동 백송이 바로 그 백송이다.

 

월성위 김한신은 바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로서, 추사는 젊은시절 이곳에서 살았다. 백송을 보고 자란 그는 24세에 사신이 된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갔다가 백송 씨앗을 구해 예산 고향에 심었다고 한다. 충남 예산에는 지금도 그때 심은 백송이 자라고 있다. 영조의 잠저인 창의궁은 원래 효종의 넷째 공주인 숙휘공주(淑徽公主: 1642~1696)와 부마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 1642~1662)의 집이었다고 한다.

 

숙종의 아들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가 됨)은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과 숙종 30(1704)221일 혼인하였으나 사저私邸가 없어 출궁하지 못하였다. 이에 숙종은 1707829일 이 집을 구입하여 사저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연잉군은 숙종 38(1712)212일 출궁하여 사저로 이사하였다. 숙종은 연잉군 사저의 서재에 양성헌養性軒이란 이름을 하사하였고 또 직접 지은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연잉군 사저에 걸게 하였다.

 

연잉군, 즉 영조는 이 사저에서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다. 그들은 영조가 즉위한 후 왕자 경의군敬義君이 되었다가 첫 세자가 된 효장세자(孝章世子: 1719~1728)와 일찍 요절한 큰 딸, 그리고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이다.

 

연잉군은 경종 1(1721)820일 경종의 세제世弟가 되어 사저를 떠나 경덕궁(慶德宮: 영조 36년 경희궁으로 고침)으로 들어갔다. 화순옹주의 양자 김이주(金頤柱: 1730~1797)가 지은 화순옹주의가장家狀에 의하면 연잉군은 경종 19월 세제에 올라 입궐하였으며 다음달 옹주가 효장세자와 함께 왕궁으로 따라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잉군은 이후 경종의 뒤를 이어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에 왕자 때 살았던 사저는 잠저潛邸가 되므로 그 이름을 창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영조 1(1725)810, 영조는 창의궁에 잠저 때의 자신의 호적을 보관시켰다. 이는 왕의 호적이 존귀하므로 한성부 창고에 다른 호적과 함께 그대로 보관할 수 없다는 점과, 조선 태조와 인조가 잠저 때 작성된 호적을 찾아 본궁本宮에 각각 보관하였다는 전례를 따른 것이다.

 

영조 7(1731)13일에는 전년 1116일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신위를 창의궁 안에 지은 효장궁孝章宮에 안치하였다. 이 효장궁은 이후 효장묘로 바뀌었다. 영조 28(1752)82일에는 같은 해 34일에 죽은 의소세손(懿昭世孫: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의 신위를 창의궁 안에 지은 의소묘에 안치하였다. 영조 41(1765)1118일 창의궁 안에 장보각藏譜閣을 완성하고 영조의 어진 2본과 어필유서 등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자신의 잠저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큰 아들과 큰 손자를 제사지내는 사당이 있는 창의궁을 자주 찾았다. 특히 영조 47(1771)년에는 창의궁에서 여러 날을 묵었고 정사를 돌보기도 하였다. 영조는 창의궁에 친필로 된 각종 시액詩額과 현판을 걸게 하였고 때로는 창의궁 안과 이웃 사람들을 초청하여 쌀을 비롯한 선물을 하사하거나 품계를 올려주었다. 영조는 이렇듯 창의궁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영조의 명령으로 백부伯父인 효장세자의 대를 이었다. 정조는 즉위(1776)319일 영조가 남긴 뜻에 따라 양부 효장세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창의궁 안 효장세자 즉 진종대왕의 신위는 같은 해 812일 창경궁 연복전延福殿으로 옮겼으며, 옛 신주는 매안함으로써 효장묘는 없어지게 되었다.(이후 진종의 신위는 종묘 안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날 의소세손의 신위를 효장묘 건물에 이전하여 의소묘로 삼았다. 사도세자의 신위는 정조의 명령으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수리하던 정조 즉위(1776)4월과 8월 사이에 창의궁에 옮겨왔다가 돌아간 바 있다.

 

순조 30(1830)56일에 죽은 효명세자(孝明世子: 순조의 아들)의 사당 문호묘文祜廟를 다음해 829일 창의궁 안에 완성하였고, 순조 3277일 효명세자의 신위를 문호묘에 안치하였다. 이후 효명세자의 아들이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으로 즉위하자 효명세자는 헌종 즉위(1834)1119일 추존되어 익종대왕翼宗大王이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5월 효명세자의 신위는 왕궁 안 효화전(孝和殿: 익종의 혼전 이름)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종묘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창의궁 안에 문호묘는 없어졌다.

 

고종 7(1870)12일에는 한성부 북부 안국방에 있었던 문희묘文禧廟 안의 문효세자(文孝世子: 정조의 아들)의 신위를 창의궁 내 의소묘 안 별묘로 옮겼고 다음날 의소묘에서 의소세손의 신위를 들어내 매안하였다. 같은 해 1210일 의소묘 이름은 영소묘永昭廟로 고쳤다.

 

그런데고종실록36(1899)823일 기록에는 창의궁 안에 있던 영소묘가 창의궁에 그대로 남아 있고, 같은 책 37530일 기록에는 의소묘와 문희묘를 영희전永禧殿 옛 터로 옮겨짓는 일을 궁내부에 지시하고 있다. 또 같은 책 930일 기록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이전 비용에 대하여 의논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이 무렵 창의궁에서 영소묘와 문희묘를 영희전 옛 터로 이전함을 알 수 있다.

 

 

영희전은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 현재 서울시 중구 수표다릿길 102(저동 262번지) 중부경찰서 부근에 있었다. 본래 세조의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저택이 있었고, 중종 때는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옮겨 살게 하였으며, 광해군 2(1617)년에는 묘사廟祠로 꾸며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신위를 모신 바 있었다. 이후 조선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낸 왕실의 사당으로 이어졌다. 이후 영희전이 고종 36, 광무 3(1899)11월 옛 경모궁 자리로 이전하자 빈 곳으로 남아 있었다(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있었던 경모궁은 사도세자의 사당이다. 사도세자가 고종 36, 광무 3(1899)년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자 경모궁에 있던 장헌세자의 신위를 종묘로 옮김에 따라 비게 된 결과 영희전이 이사 온 것이다.) 따라서 영소묘와 문희묘 등 황실 사당이 모두 떠나간 창의궁 터는 다른 대부분의 황실 사당과 마찬가지로 국유화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19081230일 일제가 조선의 경제수탈을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의 소유가 되었는데, 1911년에 작성된경성부시가도(지도 14)에서는 이 창의궁 터를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舍宅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7년 작성된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서도 통의동 35번지 21,094(6,381)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15광복 이후가 되어서야 창의궁 터는 귀속재산(흔히 적산으로 표기)으로 접수분할되어 현재와 같이 여러 주택이 들어섰다.

 

1908723일 고종의 명령으로 개정한 제사 제도 칙령에 따라 여러 황실 사당의 신위를 매안埋安하였다. 이 때 창의궁에서 옛 영희전 터로 이전하여 간 영소묘, 문희묘의 신위도 땅에 묻었다. 그리고 사당이 있었던 옛 영희전 터도 다른 예와 마찬가지로 황실 땅에서 나라의 땅으로 전환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 1856) 집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흥선대원군 역시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위,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통인시장

 

 

 

통의동 한옥마을

 

 

 

 

통의동에서 영의정처럼 놀아보라

 

 

포화상태 인사동·삼청동 대안으로 떠올라들머리 효자로 영추문 솔바람길, 영리보다는 공동체 지향 공간들 

 

통의동은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을 마주 본다. 바로 위쪽인 청와대 들머리의 효자동, 창성동과 더불어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공존해온 곳이다. 요즘도 효자로 등의 큰길 들머리는 촛불시위에 대비한 전경버스의 살벌한 행렬이 이어진다. 반면, 미로처럼 막다른 골목길이 얽힌 안쪽에는 70년대 서민 주택가 특유의 푸근한 운치와 향수가 서려 있기도 하다. 청와대와 경복궁의 권력장 틈바구니에서 수백 년 동안 질긴 삶을 꾸려온 이 동네가 새삼 각광받고 있다. 한적했던 거리와 골목길에 화랑과 디자인 공방, 찻집, 레스토랑, 출판사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주말엔 관람객들 발길이 몰리는 문화촌으로 풍광이 바뀌고 있다. 문화, 소비 시설들이 포화상태에 이른 인사동, 삼청동의 대안으로 통의동을 꼽는 이들도 늘었다.

 

그 변화의 중심은 통의동과 창성동의 경계인 영추문길이다. 3년여 전부터 길가 양쪽에 갤러리 쿤스트독, 브레인팩토리, 갤러리팩토리 등 젊은 작가들의 대안공간이 들어서더니, 지난해부터 디자인 공방 워크룸과 갤러리 카페, 소화랑들이 잇따라 생겨났다. 효자로에서 영추문길로 꺾어드는 길목인 옛 보안여관 건물과 일제 적산가옥, 한옥 골목길 등지에는 재력가들이 참여한 2~3개 미술관 건립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워크룸 공방 맞은편에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있다. 국내 미술판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소장한 기록전문가 김달진씨의 아카이브 전시관으로 9월 정식 개관전을 열고 미술인들을 끌어들일 참이다.

 

 

이 일대를 출퇴근로로 삼았던 옛사람들

전경의 단골 경비 구역인 남쪽의 경복궁역 동네 들머리도 풍광이 바뀌었다. 바로 위쪽 건물에는 갤러리 차가 두 달 전에 입주해 젊은 신예작가들의 작품전을 벌이는 중이다. 뒤이어 기존 건물인 대림미술관과 통의동의 터줏대감인 진화랑이 있고, 옛 열린책들 사옥(현 씨네마서비스 사옥)도 자리잡고 있다. 자연스럽게 들머리부터 효자로와 영추문, 솔바람길을 따라 문화시설의 동선 축이 형성된 셈이다. 하지만 이 지역이 지닌 독특한 문화적 전통과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다.

 

 

원래 통의동, 창성동 지역은 조선시대 중·후기 왕궁에 고기, 소금, 땔감 등의 생필품을 대던 사재감이 있었다. 경복궁 서쪽에 궁궐의 관료 행정기구인 궐내각사가 있었기 때문에 고위급 관료들은 영추문으로 출퇴근하면서 통의동 일대를 출퇴근로로 삼아 생활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자연히 이를 다루는 중인과 공방 사람들의 생업 터전으로 활기를 띠었던 곳이다. 조선 중·후기 중인들이 시사 모임을 결성하며 꽃피웠던 여항(閭巷)문화의 본산지도 바로 이곳 통의동과 옆의 옥인동 일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문화촌 형성 과정은 삼청동, 인사동과는 다분히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새로 들어서는 문화시설들이 상업 화랑 등의 영리시설보다는 미술관이나 문화인들의 모임터를 겸한 자영 화랑, 갤러리를 겸한 카페 등을 주로 지향한다. 문화공간끼리 공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공동 활동을 벌이는 점도 눈에 띈다.

 

 

통의동은 왕궁의 주요 물산과 인력이 오가는 출입 공간으로 번영했지만, 일제시대 동양척식회사의 사택터로 무단 개발되면서 역사성을 단절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최근의 변모가 통의동의 역사성,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진척될지 지켜볼 일이다.

 

 

박근혜 당선인 집무실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유력

당선인 인수위 삼청동 금융연수원으로 확정집무실은 통의동

 

 

 

사직동(社稷洞)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사직동은 정부종합청사 등 주요행정기관, 금융기관 및 상가 빌딩이 밀집해 있는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도, 과거 왕조시대에 가장 중요한 국가시설의 하나인 사직단과 서궐로 불렸던 경희궁 등 많은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인왕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현대와 전통 그리고 자연히 함께 어우러져 있다.

 

내수동

옛날 내수사(內需司)라는 관청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14년에 동명을 개정할 때에는 영빈동(英嬪洞), 누정동(樓井洞), 승전교(承傳橋), 내수사전동(內需司前洞), 내수사와 사직동(社稷洞), 박정동(朴井洞), 종교(宗橋), 대창동(大昌洞), 북문동(北門洞)의 각 일부를 합하여 수창동(需昌洞)으로 이름하였다가 뒤에 내수동으로 고쳤다. 옛날에는 이곳이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내에 속하였다.

 

내수사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궁내에서 쓰는 미곡, 포백(布帛), 잡물과 노비 등의 수요를 공급하는 것을 임무로 하였다. 궁중의 수용(需用)도 물론 정상적인 경용(經用)은 호조나 탁지부에서 공급하였던 만큼, 본사(本司)에서 공급하는 것은 그러한 정상적인 경용 외에 사용지수(私用之需)였던 것이다.

 

내수동을 이룩한 자연부락으로는 내수사(內需司)가 있었다. 내수사가 있음으로 해서 내수삿골·내수사동이라고 했으며 줄여서 내수사라고도 하였다. 이 내수사 앞에 있는 마을을 내수사앞골 혹은 내수사전동이라 하였다. 또 내수동 145번지에 있던 협성여자상업고등학교의 서쪽에 있는 마을은 다락우물이 있으므로 누정동(樓井洞) 혹은 다락우물골·신정우물이라 하였다.

 

내수동과 당주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대창동(大昌洞), 내수동 6번지와 7번지 사이 곧 도렴동 정우빌딩 맞은 편을 도깨비골이라 하는데 골목이 좁고 음산해서 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수동 244~250번지 일대는 북문골이라 하는데 당주동 128번지에 있는 봉상사(奉常寺)의 북문이 있는 곳에 해당되기 때문이며 북문동(北門洞)이라고도 불렀다. 승전교(承傳橋)가 있어서 승전빗다릿골 혹은 승전교라 불렀던 마을이 있었고 숙종의 후궁 영빈김씨(寧嬪金氏)가 살았던 마을을 영빈골, 영빈께, 영빈동이라 하였다. 종침교(琮琛橋)가 있는 근방의 마을을 종침다릿골·종교동이라 부르던 곳은 내자동길을 지나는 곳으로 내수동과 도렴동의 경계지역이다.

 

현재의 내수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내자동길이 있는데 종합청사 남단으로부터 내수동을 거쳐 사직공원에 이르는 가로명으로 폭20m, 연장 700m의 길이다. 세종로와 사직로를 연결하고 있는 이 길은 일찍이 조선시대 때 광화문 앞 6조거리에서 사직단으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내수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해서 내자동과 마주보고 동쪽은 도렴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남쪽은 신문로지구 재개발사업이 비교적 완료되어 고청빌딩군()을 이루고 있는 당주동과 이웃하며 서쪽은 신문로2가와 접하고 있는 반달모양으로 지형이 생긴 동이다.

 

 

당주동

19144월 경성부제 실시하면서 서울의 동리를 폐합 조정할 때에 종래의 봉상사전(奉常司前), 내섬동(內贍洞), 남문동(南門洞), 창례동(昌禮洞), 북문동(北門洞), 대창동(大昌洞), 훈조동(燻造洞), 야주현(夜珠峴), 당피동(唐皮洞)의 각 일부를 합한 동인데 종래의 동명 중 당피동의 자와 야주현의 자를 따서 붙인 동명이다.

 

당주동을 이룬 여러 개의 자연부락의 유래를 보면 내섬시가 있어 붙여진 내섬동은 내섬삿골이라고도 하며, 봉상사 앞에 있는 마을은 봉상사전동 혹은 봉상사 앞골이라 했다. 남문동은 봉상사의 남문이 있으므로 붙여진 동명으로 남문골이라 했고, 북문이 있는 곳을 북문골 혹은 북문동이라 하며 내수동과의 경계에 걸쳐 있다.

 

대창동과 훈조동에 걸쳐 있던 마을은 창례동, 봉사사의 대청이 있는 마을은 대청동 혹은 대청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해서 대창동으로 되었으며, 대창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은 아래 대청골이라 불렀다. 또한 당주동과 신문로1가의 세문안교회터에 걸쳐 있던 마을은 훈조동이라 불렀는데 메주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며 메주가맛골이라고도 하였다.

 

당주동의 동명이 된 당피동 혹은 당핏골은 중국 의원 피씨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야주현은 야주개로 불리워졌으며, 이 고개에 서면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현판이 명필이어서 밤에도 거리를 비치기 때문에 그 앞의 지명을 야조가(夜照街)라 하였고 야주현(夜晝峴)의 주()가 같은 음의 주()로 바뀌어졌다.

 

내수동과 당주동, 도렴동의 경계 부근에는 승전빗다리 혹은 승전교(承傳橋), 승전색교(承傳色橋)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승전빗아치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북악산 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운동, 효자동을 거쳐 세종로 쪽으로 모여 들었던 조선시대의 당주동 풍경은 얕으막한 동산과 작은 개천들이 함께 어우러졌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당주동은 북으로 내수동, 동으로 도렴동, 남쪽은 신문로1, 서쪽은 신문로2가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치 부채를 활짝 편 것과 같은 지형이다. 1970년대말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 지역으로 비교적 일찍 정비가 시작된 까닭에 동의 동서와 남북간을 폭 10m 이상의 도로가 통과하고 있는 전형적인 도심의 구조형태를 이루고 있다.

 

 

도렴동

조선초기에 도렴서(都染署)라는 관아가 있었다고 하여 이름한 것이다. 조선왕조에서 처음 도렴서를 설치한 것은 태조 원년(1392)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아직도 고려왕조의 옛도읍 개성에 있을 때의 일이요, 이곳 지금 도렴동에 도렴서가 설치되었던 것은 태조 3년에 한양천도가 실현되고 이듬해에 경복궁이 준공된 다음 즉 태조 4·5년경의 일일 것으로 보여진다.

 

동국여지비고1 혁파공서조(革罷公署條)를 보면, 도렴서라는 관아는 조선에서 창설한 것이 아니요, 이미 고려왕조 때부터 있던 관제를 그대로 인존(因尊)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도렴서는 그 관부명이 표시하는 것처럼 주로 궁중진헌용 직조물의 염색을 맡았던 관청으로서, 고려의 제11대 문종 때에 정8품의 영1, 9품의 승2인 외에 다시 사()4, 기관(記官) 2인을 두어서 그 일을 맡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충렬왕 34년에는 잡직서라는 관청과 병합하여 직염국으로 개편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 2(1310)에 다시 도렴서로 복원하여 말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고려시대의 직제, 임무 등을 그대로 계승하여 한양천도 후에 도렴서를 궁궐에서 가까운 이곳에 설치하였고, 70여년은 지나서 세조 6(1460)에는 중부수진방(壽進坊)에 있는 제용감(濟用監)에 병합되었다.

 

1914년 동리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도렴서가 있는 일대의 마을인 도렴동, 공조(工曺)의 뒤가 되므로 붙여진 공후동(工後洞) 혹은 공조뒷골, 적선동 170번지에 궁중에서 필요한 술과 감주를 공급하는 관아가 있었고, 그 주변의 부락은 사온동( ) 혹은 사온섯골, 의영고가 있던 주변의 마을은 의영곳골 혹은 의영동(義盈洞)의 구역을 합하여 도렴동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른다.

 

현재의 도렴동은 북으로 내자동길을 경계로 하여 적선동과 남으로는 당주동, 서쪽으로 내수동, 동쪽은 세종로로 둘러싸인 삼각형 모양의 지형이다. () 면적의 60%이상이 세종문화회관의 주차장과 경희궁 시민공원 등으로 되어 있고 실제 생활주거 면적은 30% 정도밖에 안된다. 도렴동 45번지에는 교통방송국이 위치해 있다.

 

 

사직동

사직동의 동명이 보이는 것은 퍽 오래 전부터의 일로서 영조 27(1751) 9월에 왕이 성내 시민의 도성수호에 대한 절차 등을 윤음으로 반포하는 중에도 사직동계의 명칭이 보인다. 그리고 1914년 경성부제의 실시와 함께 동리간의 구역을 재조정할 때에는 옛 사직동의 일부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무덕문골 혹은 줄여서 무덕동이라는 마을로서 무덕문은 사직동에서 신문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경희궁의 북문이었다. 그리고 사직동과 내수동에 걸쳐 박우물이 있다하여 박우물골 또는 박정동(朴井洞)이라는 마을과 도정궁(都正宮) 앞 등 너머에는 너멍골이, 사직동 서쪽에는 창평동(昌平洞)을 합하여 사직동으로 하였는데, 동명은 사직단(社稷壇)이 있음으로 해서 유래되었다.

 

사직동 동명 유래가 되는 사직단은 사직동 1 -28에 위치한다. 원래 사직의 연원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사()는 토신(土神), ()은 곡신(穀神)을 의미한 것인데 토신은 곧 국토를 주재하여 관리하는 신으로, 곡신은 농작의 풍흉(豊凶)을 좌우하는 신이라 보았던 만큼 농업을 주산업으로 하던 고대 농본(農本)국가에서는 왕신의 조선(祖先)을 모신 종묘와 함께 가장 중시하던 시설이었다. 따라서 근대에 와서는 국왕이나 대신은 종묘사직과 사생(死生), 존망(存亡)을 같이 할 의무를 느끼기도 하였으며 또 사직은 국가를 의미하는 말로 쓰기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에 사직단이 처음 설치되어 그 제사(祭祀)가 국가 사전(祀典)에 의하여 거행되었고 고려 때는 성종 10년부터 왕의 교지(敎旨)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뒤이어 사직단의 제사의식 등이 상정되고 국가에서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왕이 사직단에 나아가서 직접 제사를 드렸다.

 

한편 조선에서는 태조 2년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종묘는 당시 왕궁인 경복궁의 동쪽인 동부 연화방에 두고 사직은 왕궁의 서쪽인 서부 인달방 즉 지금의 사직공원 안에 설치하였는에 태조 4(1395)에 조영되었으며 단이 완성되자 주변에 동서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19077월 이후부터 제사가 폐지되면서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공원에는 신사임당(19701014일 건립), 이율곡(196988일 건립)의 동상과 김동인문학비(197610월 건립)와 공원안 언덕쪽에는 시립종로도서관이 있고 사직동 1 - 48번지에는 국내유일의 어린이 전용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황학정 근처에는 사직노인정이 외로운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사직동은 북으로 누상동, 필운동이 서쪽은 무악동, 행촌동 남쪽은 홍파동, 송월동, 신문로2가와 동쪽에 내수동, 내자동이 둘러싸고 있다. 인왕산의 정상에서 동쪽과 남쪽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그 산록에 자리잡은 사직동은 공원지구와 주택단지가 어우러져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사직동은 행정관할 면적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세종로

세종로는 우리나라의 정치중심지로 역대 제왕중 업적이 가장 뛰어난 세종대왕의 정치를 본받으라는 뜻에서 그 묘호(廟號)를 따서 붙여진 동명이다. 세종로는 비각에서 세종문화회관을 거쳐 광화문까지의 구간으로서 광화문통이라 부르던 것을 1946년에 개명한 것이다. 이 거리를 세종로로 변경했던 것은 그것이 옛날의 왕궁인 경복궁의 앞거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 거리는 세종대왕의 탄생지인 준수방(俊秀坊)에서 멀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세종로동은 조선시대 옛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그에 관계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세종로와 도렴동이 이어지는 세종로 81-3번지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토목·건축·산림 및 하천관리를 담당했던 공조(工曹)가 있었으므로 그 뒤쪽 동네는 공후동(工後洞공조뒷골이라 하였다. 신문로11번지와 세종로 202번지 사이에는 광제교(廣濟橋)가 있었으므로 인근의 마을은 광제교, 중구 태평로1가와 연결되는 광화문지하도 광화문빌딩쪽 출입구는 구서부동(舊西部洞구서붓골이라 하였다. 191번지 현대빌딩의 당주동쪽은 당피동(唐皮洞당핏골, 도렴동 12번지와 이웃한 세종로쪽은 도렴서가 있다 하여 도렴서동(都染署洞도렴섯골, 세종로 202번지 일대는 동령동(東嶺洞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다 하여 구리색의 누런 빛이 나는 고개의 의미로 동령동(銅嶺洞)이라던 것이 변하여 동령동(東嶺洞)으로 되었다.

 

현 동아일보사가 있는 곳은 조선시대에 주석전이 있었으므로 교보빌딩 뒤쪽을 주석전골·두석동(豆錫洞)이라 하였고, 세종로 150번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는 노예(奴隸)의 부적(賦籍) 및 송사(訟事)를 맡은 장예원이 있었는데 1764년에 보민사(保民司)로 고쳤으므로 그 일대를 보민동(保民洞보민삿골로 불렀다. 사온동( )은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 )가 있었으므로 인근을 사온섯골·사온동이라 하였는데 정부종합청사 후문쪽 일부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구 태평로 60~61번지에는 조선시대 중등교육과정인 사학(四學) 가운데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었고, 이 근처에는 얕으막한 고개가 있었으므로 이를 서학현(西學峴서학재라 하였는데 태평로1가와 세종로의 경계부분에 해당된다.

 

신문로123번지에는 송기교(松杞橋)가 있었으므로 그 인근의 부락을 송기교·송기다리라 하였는데 근방에 가죽을 파는 송기전(松杞廛)이 있었으므로 다리이름이 유래되었다. 하방교(下芳橋)는 하방골·아래방골이라고도 하는데 신문로1가와 세종로 사이에 걸쳐있는 다리의 이름이 하방교이므로 인근의 마을은 하방골이라고도 하였다.

 

문화부와 미대사관이 있는 곳은 조선 초기에 손님 접대와 연향(宴享) 및 종재(宗宰)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관청인 예빈사(禮賓寺)가 있었으므로 예빈싯골, 예빈동(禮賓洞)이라 하였다. 이 예빈시는 현재의 중구 태평로2가로 옮겼다가 1778년에 소공동의 남별궁자리로, 다시 중구 북창동으로 옮겼다. 송기다리 동북쪽에서는 이간우물이 있으므로 인근의 마을을 이간정동(二間井洞이간동(二間洞이간우물골이라 불렀다. 지금의 광화문로타리는 황토가 많은 얕으막한 고개로 되어있으므로 황토마루라 하였고 이 고개를 중심으로 세종로·신문로1·태평로1가 이름에 있는 마을을 황토마을 황토현(黃土峴)이라 불렀다.

 

한편 청운동쪽의 물이 흘러내려 광화문 앞을 지나 중학동에서 삼청동쪽에서 흘러내린 물과 합쳐지므로 세종로에는 여러 개의 교량이 있었다. 붕어다리는 어교(魚橋)라고도 부르는데 광화문 동쪽에 서쪽에 놓여진 다리를 말한다. 동쪽은 동붕어교, 서쪽은 서붕어교라고 하는데 어교(御橋)라던 것이 변하여 어교(魚橋)가 되고 다시 와전되어 붕어다리라고 했던 것 같다. 동십자각 옆에 있는 다리는 십자교(十字橋)라 하였다.

 

현재의 세종로는 북으로 경복궁과 청운동, 동쪽은 중학동과 종로1, 2가동, 남쪽은 서린동, 중구 정동, 무교동과 서쪽은 적선동, 도렴동, 신문로1가로 둘러 싸여 있으며 노폭 100m, 총연장 600m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며, 심장에 해당하는 지역이자, 주요도로이다.

 

신문로1

신문로1가의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쳐있는 마을을 동령동(東嶺洞) 혹은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화문빌딩(국제극장)일대가 해당된다.

 

원동(園洞)은 동산(東山) 혹은 동산말이라고 하는데 동령동에서 이어지는 곳으로 얕으막한 함춘원(含春苑)의 동산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삿골은 신문로259번지에 비변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새문안길을 따라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까지였다.

 

신문로1169번지에는 선공감(繕工監)이 있었으므로 주변의 부락을 선공동 혹은 선공감골이라 하였고 43번지 일대는 염정동(廉井洞) 혹은 염정골·염정수골이라 불렀는데 철종의 가짜 외숙 염정수(廉井洙)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새방골은 전 세종로 동사무소가 있던 일대로 관기(官妓)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방골·하방교 또는 아랫방골이라 부르는 곳은 신문로1가와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지도에 교량 표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궁에서 가까운 순서로 하방교(下芳橋중방교(中芳橋상방교(上芳橋)로 생각되며 다리의 부근 부락을 아랫방골·중방골·웃방골이라 하였다.

 

동산말 동쪽에는 우물이 있다 해서 우물골 혹은 정동(井洞)이라 불렀으며 염정숫골 서쪽의 마을은 창림정동(昌林井洞)으로 불렀다. 당주동과 이어지는 세종문화회관 사잇길을 야주개·야주현 혹은 애주갯골로, 새문안길 남쪽으로 신문로1가와 2가 사이에 형성된 부락은 오궁동(五宮洞)으로 불렸다. 러시아영사관 동북방향으로 구러시아영사관 일부 부지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빼곡하게 민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새문안교회 동쪽에서 당주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관청 납품용 메주를 쑤는 곳이 있다해서 붙여진 메주가맛골·훈조동(燻造洞)이 있었다.

 

신문로223번지에 있었던 다리를 송교(宋橋), 옛전 경기여고를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백목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놓여있던 석교를 백목전다리(白木橋)라 하였다. 현재의 신문로1가는 동으로 세종로와 남으로 중구 정동, 서쪽은 신문로2, 북쪽에 당주동이 있으며 동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새문안길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신문로2

신문로2가의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랏골이라고도 하는데 순라청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신문내(新門內)는 새문안이라 하는데 현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세종 때 돈의문을 새로 세웠으므로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의 명칭이다.

 

오궁골은 오군골·오궁동·오중터라고도 하는데 피어선빌딩이 있는 일대이다. 세조 때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살았는데 극배(克培극감(克堪극증(克增극돈(克墩극균(克均)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공신으로서 모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오군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오궁골이 되었다.

 

장생동(長生洞)은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도상(圖像)과 관재(管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보관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생전은 1395년에 경복궁 서쪽 사직단 근방에 지어 공신의 도상을 모셔두었으며 1411년에 이를 수리해서 사훈각(思勳閣)으로 개칭하고 태조와 개국공신의 도상을 모셨다. 1433년에 북부 관광방으로 옮겨 지은 후 장생전으로 환원하였고 1504년에 혜안전후동(惠安殿後洞)으로 옮겼다. 장생전의 관원은 도제조(都提調) 1, 제조(提調) 3, 낭청(郎廳) 3명이 있었는데 모두 겸직으로 도제조는 영의정, 제조는 호조·예조·공조판서가, 낭청은 호조·예조·공조낭관으로 임명되었다.

 

함춘원(含春苑)골은 경희궁 남쪽에 있는 동산으로 담을 둘러쌓고 나무를 기른 함춘원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지리적으로 보아 경희궁 맞은 편 새문안길 남쪽에 접한 지역으로 추축된다. 홍화문골은 홍화문동(弘化門洞)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현재의 신문로2가는 동으로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와 남쪽으로 평동, 중구 정동, 충정로 서쪽은 송월동, 홍파동, 행촌동이 있으며 북으로 사직동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동 전체 면적의 약 절반은 경희궁 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적선동

적선동의 동명 유래는 이 지역이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 적선방이었기 ?문에 지명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원래 왕가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웃하고 또 의정부를 위시한 중요 관청과도 인접하여 있었기 ?문에 특별히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는 옛 글귀의 뜻을 취하여 이곳은 적선, 그 남쪽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 남측 일대는 여경이라 하였다. 적선동은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서부 인달방과 적선방에 걸친 지역이었다.

 

적선동은 여러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으며 경복궁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관아명칭에 따른 동명이 많았다. 월궁동(月宮洞)은 월성위궁골이라고도 하는데 여조의 둘째부마(月城尉) 김한신(1720~1758)이 살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김한신의 자는 유보(幼輔)인데 13세 때 영조의 제2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오위도총부 도총관제용감제조를 지냈으며 8법의 글씨를 다 잘 써서 애시책문(哀諡冊文)을 자주 썼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붕어다릿골은 붕어다리가 있다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한자로는 어교(魚橋)라 하였다. 적선동 77번지 정부종합청사 부근 효자동쪽 입구에 있었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북어교(北御橋)로 되어 있다. 북어교에서 붕어교로, 다시 어교(魚橋)로 변하였다.

 

십자교(十字橋)는 서십자각(西十字閣) 서쪽에 형성된 마을로 서십자각다리가 있기 때문에 십자교라 하였고, 내자동 71번지와 적선동 사이에는 종침교(琮琛橋)가 걸쳐 있었으므로 부근의 마을은 종교동(宗橋洞) 혹은 종침다릿골로 불려졌다.

 

내자동과 적선동 경계 부근에는 장흥고(長興庫)가 있었다. 설치 당시에는 남부 호현방으로 지금의 충무로1·회현동1·남대문로3가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장흥고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장흥고동·장흥동·장흥곳골로 불렸다.

 

한편 장흥고동에 대해서 한경지략에 고 일대를 설명하였다. "장흥동에는 옛날에 장흥고가 이곳에 있었고 읍취헌( 翠軒) 박은(朴誾)의 옛 집터이며 또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의 집으로 그가 손수 심은 소나무 한그루가 일찍부터 있다. 일찍이 좌상(左相) 김광국(金光國)의 집으로 쓰여지기도 했는데 김광국의 집은 새로 지은 것으로 구조가 너무 사치스럽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황폐하여 말썽이 되었던 옛집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사은동( )은 사온섯골이라 하는데 적선동 170번지에 사온서( )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근의 적선동·세종로·도렴동에 걸쳐있는 마을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적선동은 북으로 통의동, 동쪽은 세종로, 남쪽에 도렴동이, 서쪽에 내자동으로 연접되어 있으며 사직로가 동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사 위를 지나는 사직로를 경계로 북쪽은 주택지구, 남쪽은 재개발된 상업업무중심지구로 확연한 구분이 되어있다.

 

통의동

통의동의 동명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통의방(通儀坊)으로 바뀐데서 유래된다. 통의방은 태조5(1396) 4월 한성부에 명하여 한성5부의 각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할 때 북부 10방 중 하나로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 의통방이 곧 지금의 통의동을 중심한 지역이었다. 의통이란 방명은 그 후 500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관제와 지방구역의 개정이 있으면서 종래 5(五部)5(五署)로 고치고 방동명(坊洞名)의 일부 개정이 있을 때 종전의 의통방이 통의방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의 동명 제정으로 종전 통의방을 중심지역으로 한 동명으로 바꾸어졌다.

 

통의동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는 흰 소나무가 있다해서 통의동 35번지 일대를 흰소나뭇골, 백송동(白松洞)으로 부르고, 효자동과 통의동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다. 원래 창의문(彰義門)이 있으므로 해서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밖에 있는 마을은 매짓골 혹은 매동(梅洞)이라 부르고 창성동과 통의동 사이에는 띠()를 만드는 집이 있다 해서 띳골·대동(帶洞)으로 불렀다. 또 영추문과 마주보는 곳, 매동의 아랫쪽은 서문동(西門洞)으로 불렀다.

 

현재 통의동은 북으로 창성동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효자로를 경계로 세종로의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적선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체부동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의 동쪽에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있으므로 궁궐과는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영조의 잠저인 통의동 35번지 창의궁자리는 동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1910년 이후 도시계획에 따라 비교적 반듯반듯하게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자하문길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가로변에 상업지대가 구성되어 있다.

김정희(金正喜)선생 나신 곳:통의동35-5번지 (통의동백송부근)

서근다리터:통의동7번지

창의궁(彰義宮):통의동35번지

 

내자동

유래된 내자사(內資寺)는 호조(戶曹)소속 관서이다. 고려 때부터 있어왔던 의성고(義成庫)를 태종 3(1403)에 내자시로 고쳤는데 궁내에 미(), (), (), (), (), (), (), (), 내연(內宴), 직조(織造)등의 공급을 담당하였다. 고려사에는 내자시나 의성고가 보이지 않는 대신 내방고(內房庫)가 있다. 충선왕(忠宣王) 원년(1309)에 운진창(雲臻倉)을 부흥창(富興倉)에 합하고 의성창(義成倉)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2년에는 내방고로 고쳤다. 여기에 보이는 의성창 또는 내방고가 내자시의 전신인 의성고와 같은 관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자시의 위치에 대하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서부 인달방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처음 창설 때부터 조선말기에 폐지될 때까지 같은 장소인 지금의 내자동역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동국여지비고의 내자시조의 기사(記事)말미에 모두 금폐(今廢)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적어도 고종이전에 페지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동국여지비고에는 금폐라는 기사 아래 유권초각(有捲草閣)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이때에 내자시는 폐지되었지만, 그 청사건물 중의 하나인 권초각만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전일 내자시의 역사를 말하여 주고 있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자시의 관장업무도 여지승람이나 한경지략등에서 모두 동국여지비고의 기사와 같은 내용을 기입하여 그 변동이 없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내자시의 관원은 조선초에 정(3), 부정(4), 첨정(4), 판관(5), 주부(6), 직장(7), 봉사(8) 1명씩을 두었으나 조선후기에 와서 감축되다가 고종 19(1882)에 내자시가 폐지된 후에 이 일을 사옹원(司甕院)에서 장악하게 되었다.

 

내자동을 이룬 부락으로는 고간동·곡정동·남정동·전립동·사직동·은행동·장흥동·종교동·창렴동이 있었다. 고간동(古澗洞)은 장흥교의 곳간이 있으므로 곳간골이라고도 하였다. 남정문(南正門)골은 내자동과 필운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남정문재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혹은 남정동이라 하였다. 남정문재는 내자동 277번지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남정문이 있어 남정문재, 한자명으로 南正峴(南征峴)이라 하였다. 전립동(戰笠洞)은 벙거지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벙거짓골이라고도 하였다. 곡정동은 금천교 쪽에 있는 마을로 굽은 우물이 있어서 붙여졌다. 사직동쪽의 마을은 사직골, 은행나무가 있던 부락을 으능나뭇골 혹은 은행동이라 불렀으며 내수동과 연결되는 곳에 있는 마을은 종침다릿골이라 하였다. 또 옛날 도렴동계(都染洞契)와 대창동계(大昌洞契)가 있던 부분의 부락은 창렴동이라 불렀다.

 

내자동은 북으로 체부동, 동쪽으로는 적선동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내자동길을 경계로 내수동과 마주보고, 서쪽은 필운동과 이웃하고 있다. 사직로(社稷路)가 동 북쪽 3/4지점을 동서로 관통하고 있는 내자동은 비교적 주거지역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내자동을 통과하는 가로는 사직로와 내자동길이 있다. 사직로는 동십자각에서 사직공원을 거쳐 독립문에 이르는 폭 30, 연장1,500m로 율곡로·세종로·의주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내자동길은 종합청사 남단으로부터 내수동을 거쳐 사직공원에 이르는 가로명으로 폭20m, 연장700m로 세종로와 사직로를 연결한다. 내자동은 세종로(世宗路)와 연이은 중심지로서 상업지구와 주거지역이 혼재해 있는 지역이다.

 

체부동

북쪽으로는 통인동(通仁洞), 동쪽으로는 통의동(通義洞), 남쪽으로는 내자동(內資洞), 서쪽으로는 필운동(弼雲洞)과 접해 있다. 조선 초기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順化坊), 1751(영조 27)에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재감계(司宰監契)에 속하였다.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한성부 북서(北署) 순화방 하패계(下牌契) 구곡동(九曲洞체부동(體付洞누각동(樓閣洞) 등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한성부 북서 순화방 하패계 구곡동·체부동과 누각동 일부가 통합되어 체부동이 되었다. 1936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됨에 따라 체부정이 되었으며, 1943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체부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이 동()으로 바뀔 때 체부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체부동은 행정동인 사직동(社稷洞) 관할하에 있다. 체부란 지명은 체찰사부 또는 체부청이 있었다는 데 연유한다.

 

구곡동, 누각동 등의 자연마을과 다리인 금천교(禁川橋)가 있었다. 구곡이란 명칭은 마을이 아홉 굽이나 꾸불꾸불한 곳에 있다는 데 연유하며, 금천교는 고려시대 충숙왕 때 가설된 적선동(積善洞), 통의동, 내자동 등으로 통하는 십자로에 있던 돌다리이었는데, 도로공사로 매몰되었다.

체부동홍종문가(서울민속자료 제29)

 

필운동

북쪽으로는 누상동(樓上洞누하동, 동쪽으로는 체부동(體府洞내자동(內資洞), 남쪽과 서쪽으로는 사직동(社稷洞)과 접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 관할지역이었으며, 1894(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인달방 내수사계(內需司契) 도가동(都家洞), 사직동계 사직동, 수성궁계(壽城宮契) 송목동(松木洞도가동·남정현(南征峴), 분선공계(分繕工契) 전정동(塡井洞필운대·구동(龜洞)이 필운동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9144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가동, 사직동, 송목동, 도가동, 전정동(塡井洞), 필운대, 구동, 대구도가동(大口都家洞) 등이 통합되어 필운동이 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출장소 제도 신설로 경성부 서부출장소 필운동이 되었다. 19364월 동명이 일본식 지명인 필운정이 되었으며, 1943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필운정이 되었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이 동()으로 바뀔 때 필운동이 되었다. 법정동인 필운동은 행정동인 사직동(社稷洞) 관할하에 있다. 필운이란 지명은 필운대 이름에서 연유한다.

 

거북골(일명 龜洞), 남정동, 도가동, 대구도가동, 송목동 등의 옛마을이 있었다. 거북골은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가, 남정동은 남정문이, 도가동은 물건을 제조·판매하는 도가집이, 대구도가동은 대구를 파는 도가집이, 송목동(일명 소나무골)은 소나무가 많았다는 데 명칭이 연유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포함한 지역에 인경궁(仁慶宮)이 있었다. 인경궁은 1676(광해군 9)~1682년에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하였다. 1692(인조 11)에 일부를 철거하여 창경궁(사적 123) 건립에 사용하였고 나머지 전각들은 효종 때까지 남아 있었다가 숙종과 영조 때 없어지고 민가들이 들어섰다. 12번지에는 대한제국 당시 궁내부대신을 역임한 심상원(沈相源)의 집터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배화여자대학,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중학교, 매동초등학교 등이 있다. 기념관으로는 육영수여사기념관이 있으며, 사회복지시설로는 1997년에 설립된 아나율의 집이 있다.

도정궁(都正宮):사직동 262-82, 86번지 일대

김가진(金嘉鎭)집터:사직동45번지

허견(許堅)집터:사직동309번지

 

 

홍종문 가옥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된 가옥이다. 이 가옥은 안채의 상량문에 의하여 1913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말기 대감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권태환(權泰煥)1922년 구입한 것을 1946년 김태순(金泰淳), 정두양(鄭斗陽)에게 전매되었다가 1956년 대한독립단회장 등을 역임한 해사(海史) 이원순(李元淳)이 구입하여 살다가 1962년 대한테니스협회장을 역임한 홍종문이 매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가옥은 넓은 정원에 자리잡은 한옥 안채정자현대식 양옥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되고 한국 고유의 건축미를 간직하고 있는 안채와 광한옥 2동이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안채는 대지의 북쪽에 동남향으로 자리잡았고, 그 앞으로 정자가 있으며, 안채 안마당의 동북쪽으로 광이 있다. 양옥은 안채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가옥에는 조선시대 석등을 갖춘 정원이 안채 남쪽에 일부 남아 있고, 정자 앞쪽에는 담을 끼고 작은 연못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전퇴를 갖춘 안방이 있고, 안방 오른쪽에 부엌이 붙어 앞으로 꺾여 나왔으며, 안방과 부엌 뒤로 마루와 방이 있다. 대청 왼쪽 뒤로는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뒤로는 몸채와 직교하며 돌출한 방이 있다. 화장실 앞으로도 몸채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방과 서재가 차례로 있고 거기서 왼쪽으로 꺾여나가 다시 방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사랑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세벌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사각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건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이 가옥은 사랑채가 안채에서 분리되지 않은 평면 구성을 한 점, 기단을 장대석으로 조성한 점, 통소로를 사용한 점 등에서 1910년대 당시 전통한옥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화여자학교(培花女子高等學校)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12번지에 있는 일반계 사립 여자 고등학교로, 1898102일 미국의 남감리교 신도이자 교사인 조세핀 필 캠벨(Mrs.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에 의해 한성부에 설립되었다. 처음 이름은 캐롤라이나 학당(Carolina 學堂)이었으나 1909년 윤치호에 의해 배화로 교명을 바꾸게 된다. 1977년 육영수 여사 기념관을 준공했고,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본관교사 개관식을 열었다. 8대 이덕봉부터 한국인이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1898102일 미국 남감리교의 선교사 조세핀 필 캠벨(Mrs.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선교사가 한성부 종로방 고간동 (경성부로 개칭)에 캐롤라이나 학당을 창설, 개교 (당시 학생수는 여학생 2, 남학생 3)

1909년말 교명 변경을 추진할 때 윤치호는 케롤라이나 학당의 이름을 배화라고 지어주었다. '배화'는 윤치호가 꽃을 기른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는 배화여중, 배화여고, 배화여자대학의 교명으로 이어졌다.

 

191042일 캐롤라이나 학당 명칭을 배화학당이라고 개칭, 인가하였다.

1925327일 교명을 배화여자 고등 보통학교로 개칭(25.4.30 인가)

192612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설립자 조세핀 필 캠벨을 기념하는 캠벨 기념관(현 본관)을 신축

1938320일 학교 명칭을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교로 개칭

1945928일 경성여자 배화학교를 개교 36년 만에 폐교,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에 전출

194641일 교명을 배화여자중학교(6년제)로 개칭

1951517일 한국전쟁으로 부산 초량동 612번지로 피난, 가교사를 신축개교

1951518일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자중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

 

 

배화학당 설립자 J.P 캠벨

 

 

1852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캠벨은 21세에 캠벨 목사와 결혼하여 11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27세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한 캠벨은 곧 두 자녀도 병으로 잃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녀는 일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학교를 졸업합니다. 졸업 후 33세 되던 해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상해와 소주에서 10년 동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189744세 때 남 감리교회의 첫 번 째 여성선교사로서 중국인 양녀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여성 지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98102, 그녀는 지금의 종로구 내자동에 여성들 대상의 캐롤라이나 학당(배화학당 전신)을 설립했습니다. 1900415일 부활 주일에 캐롤라이나 학당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90312월 학교 이름을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내는 배움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배화학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캠벨은 미국인 루이스 워커의 기부금으로 예배당을 신축하였는데, 정기예배는 이곳에서 지속되었습니다. 정기예배는 시간이 흐르면서 한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종교교회로, 또 다른 모임은 자하교 근처에서 자교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한국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던 캠벨은 191865세 때 안식년을 얻어 미국으로 돌아가다가 그만 신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식년이 끝난 후, 그녀는 신병과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시간의 뱃길을 통해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192011126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장례식은 192011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그의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습니다

 

배화여고 생활관(등록문화재 93), 서울 종로구 필운동 12-3

 

 

배화학당은 기독교 선교와 여성 계몽을 위하여 1898년에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다. 배화여고 생활관은 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온 1916년에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1971년부터는 배화여고의 생활관과 동창회관, 1997년부터는 동창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서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제일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하였다. 내부에는 중앙에 홀과 계단실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방이 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지붕은 한옥의 기와지붕을 사용하여 서양식과 한국식이 섞이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선교사 주택을 통해 근대 서양의 주택기술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특히 이 집은 서양의 주택문화와 우리의 전통 주택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흥미로운 예다. <출처:서울시청>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년 음력 513)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정치가·시인·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우정 이야기(오성과 한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임금을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양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와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젊어서 기생을 좋아했으나 끊은 후 다시는 성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가 있는 40년 동안 항상 붕당 정치에서 초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항복은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다.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되어 중풍 재발로 거기서 죽게되었다. 광해군은 관작을 회복시켜 주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예를 잘 갖춘 장례를 지낸 그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에 있다.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이항복의 저서 :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등 문집 15권이 남아 있다.

 

 

오성과 한음 일화

광해군 정권의 혼란과 유배

 

필운대 -정조의 필운화류

 

 

본래는 그의 장인인 권율장군의 집이 있었는데, 권장군은 경치가 좋은 그집을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권율장군의 집도 바로 이웃해 있었다고도 한다. 백사가 살았던 서울 인왕산 줄기의 필운대(弼雲臺)에는 암각서와 함께 후손인 귤산 이유원(1814-1888)의 제시가 남아 있다. 현 배화여고 뒤뜰 암벽이다. 이 주변에는 생가터와 옹달샘 정자터 등이 남아 있다. 이항복의 호중 대표적인 호가 弼雲白沙 인데, 그의 호 필운에서 필운동이라는 동네명이 생겼다. 그외 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이라는 호를 썼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정치가이자 시인 작가 그리고 재담가였기에 그에 맞는 호를 많이 썼던 모양이다.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됐다.

 

 

 

암벽 가운데 시구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 이유원이 고종 10(1873) 이곳에 들러서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였던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남산 아래 남창동 마을엔 이항복의 정자 홍엽정(紅葉亭)이 있었는데 9대손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홍엽정을 물려받아 별서(別墅)로 살면서 남쪽 산에 사는 나무란 뜻의 귤산(橘山)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두었다.

 

 

 

9대손인 이유원의 예서

우리 조상님 사시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는데,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는 흰구름만 깊이 잠겼도다.

백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遺風은 가시지 않아

옛조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암벽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10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원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미상이라고 한다. 아래 안내글에는 공사를 맡은 감독자들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유원과 같이 와서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들인 모양이다.

 

 

 

필운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집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 하는데 먼저 여기를 손꼽고, 또한 거리 사람들도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 날마다 모여들곤 하는 명승이었다. 필운대 아래 마을은 도성의 꽃시장에 내다 팔았을 화초 재배단지였다고도 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의 관심은 필운대 근처에 모여 꽃놀이 하는 선비들이었다. 정선과 그 벗들이 필운대풍월 누리는 한 장면이었으므로 여기엔 농부도 꽃밭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정선과 같은 시대 살아간 중인 정래교(鄭來僑1681-1759)의 눈에는 이 땅에 살아가는 한양토박이들 모습이 보여 <<완암집(浣巖集)>>가난한 집 출신으로 유식(遊食)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봄꽃하면, 필운대의 살구꽃 무리가 가장 유명했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도 필운대 꽃구경 를 지었다고 한다. 백단령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시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정조의 필운화류 뒷부분)

 

 

서울 사직단(社稷壇)

 

 

 

 

조선 시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를 정하면서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경복궁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배치하였다.

 

 

사직단은 두 겹의 담장 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의 사방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단(社壇)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배치했으며, 단의 형태는 '하늘을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의해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만들었다. 단의 둘레에는 3층의 돌계단을 사방으로 둘렀으며, 단 위에는 각 방위에 따라 황색, 청색, 백색, 적색, 흑색 등 다섯 가지 빛깔의 흙을 덮었다.

 

처음 조성 시 단 주변에 동북쪽 산기슭을 따라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을 두었는데, 임진왜란 때 신실 등은 모두 소실되었다. 선조 말년에서야 수복되고 역대에 걸쳐 수리가 계속되었다. 신문(神門)은 정면 3,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있다.

 

일제(日帝)가 조선의 사직을 끊기 위해 사직단의 격을 낮추어 공원으로 삼으면서 크게 훼손되었고, 도시 계획 등을 거치면서 면적이 축소되었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사직단 정비 사업이 추진되어 단과 그 주변이 일부 복원되었다.

 

 문화재 보호시설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직접 출입이나 왕래는 할 수 없고 대신 사직단 홍살문이나 돌담 너머를 통해서 제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직 공원(社稷公園)

 

조선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1921년 사직단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사직단은 태조3(1394)에 고려의 예를 따라 토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을 동쪽에, 곡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북쪽에 모셔 만들어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 입구에 있는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3, 측면 2, 건평 17.4평으로 단층맞배지붕이다. 또 사직 공원 내에는 단군성전, 시립종로도서관이 있으며 매년 전국 규모의 활쏘기 대회가 열리는 황학정이 있다.

 

 

 

황학정(黃鶴亭)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로 고종 광무2(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에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한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마지막 궁술연습장이었던 황학정은 건평 59에 정면 4,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우측으로부터 2칸 추녀 밑에 황학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고종황제도 청--3국의 3파전을 근심해 이곳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다.

 

원래 광무 2(1898) 고종의 어명으로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었다. --3국의 3파전에 근심하던 고종황제는 이곳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다.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이를 받아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등과정은 경복궁 서편 인왕산 기슭 옥동(玉洞)에 있던 등용정(登龍亭삼청동의 운용정(雲龍亭사직동의 대송정(大松亭, 太極亭누상동의 풍소정(風嘯亭, 白虎亭)과 함께 인왕산 아래 서촌(西村) 오사정(五射亭)이라고 불렸다. 오사정을 비롯한 서울에 있던 이름 있는 활터는 일제 때에 전통 무술을 금지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황학정의 활터는 전국에서 유명하였으며 광복 후에 계속 사용되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도 파손되고 활쏘기도 중단되었다가 다시 중수되어 활터로 사용되고 있다. 과녁은 전방 약 145m 지점에 있으며, 1977년 일부 보수공사를 하였다.

 

 

황학정은 인왕산 동쪽 기슭 언덕 위에 동남향을 하고 자리잡았다. 정면에서 보아 4칸 중에서 동쪽 1칸은 서쪽의 3칸보다 한 단 높게 누마루를 꾸몄고, 동쪽 끝 초석은 장초석으로 처리되었다. 건물 정면 서쪽에서 2번째 칸 되는 추녀 밑에 '황학정' 현판이 걸려 있다. 북쪽 끝 1칸 양통은 온돌이며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주간 거리는 건물 정면의 서쪽에서 오른쪽으로 2,763mm, 3,051mm, 2,820mm, 2,793mm 이며, 측면은 정면에서 뒤로 2,787mm, 2,820mm 이다. 초석의 높이는 290mm, 장초석의 높이는 970mm이고, 대들보까지 기둥의 높이는 2,670mm 이다.

 

 

건물은 외벌 장대석 기단 위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동쪽 측면 기둥에는 칠언 절구의 주련(柱聯)을 걸었다. 정면 외부 기둥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달았으며, 내부는 우물마루와 연등천장으로 되었다. 건물은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무고주(無高柱) 5량가이며,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정자로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건물이나 간결하고 소박하게 구조로 조영되었다. 건물 서남쪽 뒤로는 샘이 있고 그 뒤 바위에 황학정 팔경을 노래한 시를 음각하였으며, 건물 오른쪽인 동북쪽으로는 사모지붕의 한옥 한천각(閒天閣)이 있고, 그 서쪽 뒤로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사우회관(射友會館)이 있다.

 

 

 

 

단군성전

 

 

 

일제강점기 때 일제(日帝)가 사직단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세웠던 사찰이 있던 곳을 해방 후 한옥으로 신축개장한 성전으로 이 곳에는 단군왕검(檀君王檢) 모형상과 영정이 있고 매년 103일 개천절을 기념해 이 곳에서 단군에 대한 차례의식 행사가 열린다.

 

사직동의 단군을 모신 대종교 신전, 대종교는 단군(檀君)숭배를 기초로 하는 민족종교이다. 근본 교리는 성() ·() ·()의 삼진귀일(三眞歸一)과 지() ·(調) ·()3법이다. 대종교는 종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시기가 바로 일제(日帝)가 한국을 강점(强占)할 때였으므로, 종교로서보다는 항일독립운동에 더 많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교조(敎祖) 나철(羅喆:18631916)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간섭과 강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항의하고자 3차에 걸쳐 도일(渡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여 구국운동이 몇 사람의 애국정객만으로는 이룩될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보고, 1909년 재동(齋洞)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공포함으로써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이후 700년간 단절되었던 국조 단군을 숭앙하는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이 건국될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 입니다.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은 다른 곳에서 이주한 선진문물을 가지고 있는 이주민들을 이끄는 부족이며, 곰과 호랑이는 강력한 토착세력을 지닌 원주민들을 대표하는 것 입니다. 호랑이와 곰이 사람이 되기를 원한 다고 했을 때 환웅이 준것은 쑥과 마늘 입니다. 환웅이 거느리고 있는 신은 비의 신 우사(雨師), 바람의 신 풍백(風伯), 구름의 신 운사(雲師)로 구름쑥과 마늘에서 고조선사회가 농경사회이며,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 100일동안에 동굴에 있으면서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기를 기달리는 것은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 간의 세력 다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곰 부족이 승리하고 호랑이 부족이 패함으로써 곰부족은 선진 문물을 가진 이주민세력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것 입니다

 

 

 

사직공원내 단군성전은 대종교 단군성전이아니라 대한민국최초의 공공건물(서울시 소유)로 세워진 단군성전이며, 봉안된 단군영정은 정부 표준단군영정(문공부심의번호 77-27과 성상은 정부지정 국민경모상 문공부심의번호 77-16)임을 알려드리며, 용도는 종교를 초월한 국민교육과 국가홍보에 사용 되고 있습니다.관리는 사단법인 현정회(02-736-6375)에사 하고 있습니다 (출처- tankun tankun )

 

오솔길

 

 

성곡미술관

 

 

 

 

 쌍용그룹 창업자 성곡 김성곤 선생의 기업을 통한 사회봉사의 정신을 미술 문화로 구현하고자 설립된 순수 공익단체로서 1995년에 개관하였다. 우리의 전통적인 얼과 정신, 우리의 정서와 미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개최한다. 전시 사업은 물론 "성곡미술대상", "내일의 작가상" 을 통해 신인 미술가를 발굴하고 지원한다. 본관, 별관과 조각공원이 있으며, 부대시설로는 찻집과 아트샵이 있다.

 

성곡미술문화재단(이사장 김석원)은 쌍용그룹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 선생의 기업을 통한사회 봉사의 정신을 미술문화로 구현하고자 설립된 순수 공익 단체입니다. 성곡 미술관(관장 박문순)은 쌍용이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과 우리나라 미술문화 진흥을 위해 1995년에 설립한 성곡 미술문화 재단의 첫 사업으로 1995118일 문을 열었습니다.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성곡 김성곤 선생의 옛자택 자리에 문을 연 성곡 미술관은 우리의 전통적인 얼과 정신 , 우리의 정서와 미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기획전을 집중적으로 개최함으로써,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우리 미술을 세계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 현대 미술의 정체성 확립과 국제 미술 교류를 통한 한국미술의 자생성 창출을 성곡 미술관의 운영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한국현대 미술 현장 중심의 주제전과젊은 작가지원을 위한 개인전 그리고 미술문화의 저변 확대를 위한 기획전 및 해외 미술흐름을 잃을 수있는 국제전 등 연 15회 이상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습니다.성곡 미술관은 앞으로도 우리 미술을 현대화 하고세계화 하는 작업과 더불어 신진작가 발굴, 중견작가 지원등을 통하여 우리 미술이 나아갈 지표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성곡미술문화재단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희궁길 42 (신문로2)

문의/안내 02-737-7650

10:0018:00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하절기(4~9) 매주목요일 10:00~20:00

쉬는날/ 매주 월요일

 

 

 

서울 역사박물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도시역사박물관으로 2002521일 개관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수집·보존·연구·전시·교육을 통해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시민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기관으로, 한성백제와 조선왕조의 수도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발전해온 서울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시정 홍보

 

문화재 훼손 우려

 

서울역사박물관이 있는 자리는 본디 경희궁에 속한 건물이 있던 자리로, 박물관의 부지가 이곳으로 결정되자 문화재의 훼손에 대한 우려를 낳았으며, 이후 우려가 현실이 되며 크나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경희궁 터 안에 만들어진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날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든다. 또한 경희궁 안쪽에 있던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이후에 세워진 서울시립미술관의 경희궁 분관 역시도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전시장이다. 일본의 대법원 터에 세워진 덕수궁 옆의 서울시립미술관 역시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이곳은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가장 파괴가 심한 곳이 바로 경희궁이기 때문이다.

 

경희궁은 처음에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화문, 황학정 등의 건물이 함께 있었으나 융복전과 집경당은 일본의 권력자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졌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 귀족들의 자제들을 위해 설립된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또 다시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회상전은 남산의 일본 절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남산의 박문사 정문으로 갔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오랫동안 쓰이다가 겨우 경희궁의 정문으로 그 위치를 옮겨왔다. 정부와 서울시가 발굴 조사를 계속하여 복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장시간 동안 정부 기관인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원, 서울시교육청 등이 들어서 있어 복원의 의지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동국대 안의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는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옮겨오지 못하고 원래의 설계대로 복원이 된 건물이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는 미술관. 1988819일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경희궁지 내 서울고등학교 건물을 보수하여 개관하였다가 20025월 이전하여 새로이 재개관하였다. 서울 도심 한복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길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파사드 (Facade 전면부)만 그대로 보존한 채 신축하였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하고,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미술을 일반 시민들에게 알리며, 다양한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미술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밖에도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연구, 조사하고, 다양한 출판 활동과 작가지원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본관 외에도 사당동 내 위치한 남서울 분관과 대관전 위주의 경희궁 분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작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서 난지창작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미술관 본관 1, 2, 3층에는 총 6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이 중 1개는 상설전시실로 [천경자의 혼]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의실과 세미나실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미술관은 각 예술분야의 자료를 소장한 자료실을 갖추고 있으며, 전시도록과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과 카페테리아 등의 편의시설도 운영되고 있다.

 

 

경희궁분관은 경희궁 자리에 1994'서울정도 600년 기념관' 을 신축하여 운영한 뒤 1995년부터 미술관 본관 건물로 쓰이다가 현재의 위치로 본관이 옮겨간 후 20037월 분관으로 개관하였다.

 

남서울분관은 구 벨기에 영사관을 리모델링하여 200492일 개관하였다. 구 벨기에 영사관은 원래 우리은행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에 무상임대하였다

 

 

* 서소문 본관

하절기(3~10) : ~10:00~21:00 / ,,공휴일 10:00~19:00

동절기(11~2) : ~10:00~21:00 / ,,공휴일 10:00~18:00

* 남서울 분관 (관악구 남현동)

~10:00~20:00 / ,,공휴일 10:00~18:00

* 경희궁 분관 (종로구 신문로)

~10:00~18:00

서울시립미술관 : TEL. 02-2124-8800

 

 

경희궁 (慶熙宮)

 

 

 

 

 서울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10(1623)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2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심하게 훼손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 시립 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영조 36)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리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광해군 6)~1623(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영조, 순조가 승하하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2] 경희궁은 순조 29(1829)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다.

 

일제가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궁궐의 서쪽에 세우면서, 경희궁의 많은 전각들은 헐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계양문:남문)로 다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건설에 매각되었다. 그 뒤 서울특별시에서 이 터를 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으나,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공사는 중지되었다.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창건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경희궁지였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측된다.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3]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족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흥화문

금천교

숭정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경희궁 방공호

황학정

 

신문로1

 

 

 

 

 

동명은 서대문의 속칭인 새문을 한자로 적은데서 유래한다. 길가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서대문의 원래 이름이 돈의문이었는데 그 자리가 몇 번 변경됨에 따라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렀다. 조선 초기에 서부 적선방, 여경방 등에 속하다가 1894년 중부 서린방, 서서 인달방 등에 소속하였다. 1911년 경성부 서부 인달방, 여경방 등으로 고쳤다. 1915년 경성부 서대문 일정목, 이정목 등으로 개칭되었다. 1943년 종로구 서대문 일정목, 이정목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종로구 신문로1가와 신문로2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문로는 조선시대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번잡한 곳이었다. 지금의 광화문 빌딩 일대에 있던 동령골, 세종문화회관 부근의 애주갯골,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 사이로 광화문 방향 새문안길 좌우에 신문내(新門內), 경희궁 남쪽에 있던 함춘원골 등 여러 마을들이 합쳐져 신문로를 형성하였다. 경희궁 흥화문(서울유형문화재 19), 경의궁지(사적 257) 등이, 주요 기관 및 시설로는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성곡미술관, 경희궁공원,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등이 있다.

 

신문로1

 

신문로1가의 동명은 서대문(西大門)의 속칭이 새문이므로 이를 한자로 옮겨 적은데서 유래된다. 신문로라는 지명은 길가 서쪽 언덕위에 도성(都成) 4대문의 하나인 서대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서대문은 원명이 돈의문이었으며, 또 그 위치가 몇번 변경됨에 따라서 서전문(西箭門), 신문(新門), 새문으로도 불렸다. 1914년 서대문정이 형성되기 전에도 이 부근에는 신문내라는 동리가 있었으며, 그 곳을 새문안 그 지역내에 있는 교회를 새문안교회로 부르는 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문로1가는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번잡한 곳에 속하였다. 따라서 여러부락이 합쳐져서 신문로1가를 형성하였는데 세종로와 신문로1가에 걸쳐있는 마을을 동령동(東嶺洞) 혹은 동령골이라 했는데 동쪽에 황토마루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광화문빌딩(국제극장)일대가 해당된다. 원동(園洞)은 동산(東山) 혹은 동산말이라고 하는데 동령동에서 이어지는 곳으로 얕으막한 함춘원(含春苑)의 동산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삿골은 신문로259번지에 비변사가 있었기 때문이며 새문안길을 따라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까지였다.

 

신문로1169번지에는 선공감(繕工監)이 있었으므로 주변의 부락을 선공동 혹은 선공감골이라 하였고 43번지 일대는 염정동(廉井洞) 혹은 염정골·염정수골이라 불렀는데 철종의 가짜 외숙 염정수(廉井洙)가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새방골은 전 세종로 동사무소가 있던 일대로 관기(官妓)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방골·하방교 또는 아랫방골이라 부르는 곳은 신문로1가와 세종로에 걸쳐있는 마을인데 수선전도(首善全圖)서울지도에 교량 표시만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희궁에서 가까운 순서로 하방교(下芳橋중방교(中芳橋상방교(上芳橋)로 생각되며 다리의 부근 부락을 아랫방골·중방골·웃방골이라 하였다.

 

동산말 동쪽에는 우물이 있다 해서 우물골 혹은 정동(井洞)이라 불렀으며 염정숫골 서쪽의 마을은 창림정동(昌林井洞)으로 불렀다. 당주동과 이어지는 세종문화회관 사잇길을 야주개·야주현 혹은 애주갯골로, 새문안길 남쪽으로 신문로1가와 2가 사이에 형성된 부락은 오궁동(五宮洞)으로 불렸다. 러시아영사관 동북방향으로 구러시아영사관 일부 부지도 포함되었으나 지금은 빼곡하게 민가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새문안교회 동쪽에서 당주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관청 납품용 메주를 쑤는 곳이 있다해서 붙여진 메주가맛골·훈조동(燻造洞)이 있었다.

 

신문로223번지에 있었던 다리를 송교(宋橋), 옛전 경기여고를 들어가는 골목입구에 백목전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놓여있던 석교를 백목전다리(白木橋)라 하였다. 현재의 신문로1가는 동으로 세종로와 남으로 중구 정동, 서쪽은 신문로2, 북쪽에 당주동이 있으며 동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새문안길이 동서로 길게 뻗어있다.

 

흥화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 신문로11번지

흥화문(興化門): 신문로158-1

훈련도감(訓鍊都監): 신문로158-1 (구세군회관건물 우측변)

원각사(圓覺寺): 신문로142번지

선공감(繕工監): 신문로1169번지

무관학교(武官學校): 지금은 구세관회관과 새문안교회가 있는 곳일대

함춘원(含春苑)

새문안교회 : 신문로143번지

구세군회관 : 신문로158번지

 

 

신문로2

 

신문로2가의 동명은 돈의문(敦義門)을 새로 지은 성문이라는 뜻을 한자로 옮긴 것에서 비롯된다. 신문로2가는 경희궁과 돈의문이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옛지명이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농포동(農圃洞)은 농포안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 밖 신문로27번지 일대에 채소를 가꾸는 농포가 있고 내관(內官)들이 관리했으므로 농포가 있던 일대를 일컫는 명칭이다.

 

새문동(塞門洞)은 태조 때 건축한 서대문인 서전문(西箭門)을 세종 때 폐지하고 그 남쪽에 새로 돈의문(敦義門)은 세웠으므로 서전문을 막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전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사직터널 근방으로 추측되는데 사직동쪽 신문로21번지 일대가 새문동에 해당된다.

 

순라동(巡邏洞)은 술랫골 혹은 순랏골이라고도 하는데 순라청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었다. 신문내(新門內)는 새문안이라 하는데 현 고려병원과 문화방송국 사이에 세종 때 돈의문을 새로 세웠으므로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의 명칭이다. 오궁골은 오군골·오궁동·오중터라고도 하는데 피어선빌딩이 있는 일대이다. 세조 때 이인손(李仁孫)이 이곳에 살았는데 극배(克培극감(克堪극증(克增극돈(克墩극균(克均)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공신으로서 모두 봉군(封君)되었으므로 오군골이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오궁골이 되었다.

 

장생동(長生洞)은 조선시대 공신(功臣)의 도상(圖像)과 관재(管材)인 동원비기(東園秘器)를 보관하던 장생전(長生殿)이 있었기 때문에 명칭이 유래되었다. 장생전은 1395년에 경복궁 서쪽 사직단 근방에 지어 공신의 도상을 모셔두었으며 1411년에 이를 수리해서 사훈각(思勳閣)으로 개칭하고 태조와 개국공신의 도상을 모셨다. 1433년에 북부 관광방으로 옮겨 지은 후 장생전으로 환원하였고 1504년에 혜안전후동(惠安殿後洞)으로 옮겼다. 장생전의 관원은 도제조(都提調) 1, 제조(提調) 3, 낭청(郎廳) 3명이 있었는데 모두 겸직으로 도제조는 영의정, 제조는 호조·예조·공조판서가, 낭청은 호조·예조·공조낭관으로 임명되었다.

 

함춘원(含春苑)골은 경희궁 남쪽에 있는 동산으로 담을 둘러쌓고 나무를 기른 함춘원이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지리적으로 보아 경희궁 맞은 편 새문안길 남쪽에 접한 지역으로 추축된다. 홍화문골은 홍화문동(弘化門洞)이라고도 하는데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으므로 붙여진 지명이다.

 

현재의 신문로2가는 동으로 내수동, 당주동, 신문로1가와 남쪽으로 평동, 중구 정동, 충정로 서쪽은 송월동, 홍파동, 행촌동이 있으며 북으로 사직동으로 둘러 쌓여있으며, 동 전체 면적의 약 절반은 경희궁 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경희궁지(慶熙宮址) : 사적제271, 신문로21번지

돈의문(敦義門): 신문로2가 강원연탄건너보도

이인손(李仁孫)집터 : 신문로289-27일대

비변사(備邊司): 신문로259번지

이숙번(李叔蕃)집터 : 신문로2

 

조형물 '해머링 맨(Hammering man·망치질하는 사람)’

 

 

미국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가 만든 키 22m 몸무게 50t의 이 거인이 117초 간격으로 느릿느릿 내려치는 망치는 오늘 하루도 기분좋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해머링 맨은 수공업자일 뿐 아니라, 광부, 컴퓨터 오퍼레이터, 농부 또는 항공우주 종사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상품을 만드는 일꾼들을 기념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보로프스키의 설명이 굳이 필요없다. 일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묵묵히, 힘있게 가르쳐준다. 보면 안다. 그게 예술의 힘이다.

 

그러나 서대문에서 광화문쪽으로 올 경우 머리의 일부분과 망치밖에 볼 수 없어 아쉬웠는데 해머링맨이 한 걸음 불쑥 걸어나왔다. 지난 4월부터 발걸음을 떼기 시작, 지난달 20일 드디어 많은 사람의 축하속에 보도쪽으로 4.8m 걸어 나온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 만큼 힘을 더욱 내 1분에 한번씩 망치질하고 있으며, 앞으로 40초까지 기록을 단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