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 제3코스, 삼청동 눈길 발길 머무는 길 2

草霧 2013. 1. 4. 21:24

 

 

 

역사체험 이야기

 

 

1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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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안국역 윤보선가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화개길 벽화골목 세계장신구박물관 삼청동 전망대

기기국 번사창 삼청공원칠보사 삼청동 카페길

'팔판길 · 판서길감고당 길 안동별궁 터 · 담장길

 

 


 

 

 

북촌 한옥마을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서울의 전통 한옥 거주 지역이다. 조선 왕조의 두 궁궐 사이에 위치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현재의 가회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계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시대 당시에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권문세가들의 주거지구였으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개화파들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 일대의 대규모 한옥 가옥들은 구한말에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서민들을 위한 소규모의 택지들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형태의 어깨를 맞댄 한옥들은 주로 1930년도를 전후하여 생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통 주거 지역으로써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이 지역이 1983년 제4종미관지구로 지정되고 본격적인 한옥보존정책이 시행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건축 기준의 완화로 한옥 마을로써의 경관이 많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주민들의 의사에 기초하는 한옥 등록제를 위주로 하는 새로운 보존 정책을 시행한 이래 한옥 자체의 재건축 및 고급화와 보존 노력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전통과 근대성이 혼재한 독특한 형태의 건축사적 의의로써도 재조명되게 된다.

 

그리고 주변의 인사동, 삼청동 거리가 전통 문화 및 예술의 거리로 부각됨에 따라 전통 한옥 마을의 명성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조선 시대와 구한말 이래의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가회동 한씨 가옥, 윤보선 가옥, 이준구 가옥 등은 민속 및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전통 공방이 많이 있으며, 서울시에서 33채의 한옥을 구입하여 주로 전통장인에게 장소를 임대하여 주고 있기도 하다. 그밖에 내외국인을 위한 전통 숙소, 게스트하우스 들이 있다.

 

 

 

 

가회동, 한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나무길

 

 

가회동의 동명은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가회방에서 유래된다. 가회동을 이룬 조선시대의 자연부락 중 홍현은 정독도서관의 남쪽에 있던 고개로 붉은 흙이 많아서 붉은재라 하였으며, 동곡은 가회동·재동·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붉은 재의 동쪽이 되므로 동골이라 한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또한 맹현은 홍현의 북쪽에 있는 고개로 세종 때에 유명하던 맹사성과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도, 충청감사를 지낸 맹만택이 살았으므로 맹감사고개또는 맹동산이라 하였다. 현재의 가회동은 동쪽으로 계동, 서쪽은 화동, 남쪽은 재동, 북쪽은 삼청동으로 둘러싸인 동으로 전통적인 한옥 가옥들이 많아 서울 도심지 속에 비교적 조용한 주택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가회동31번지

북촌에서 특히 뛰어난 한옥들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키 큰 회나무집을 돌아올라 가면 나타나는 골목길이 정겹다. 이 길에서 한옥 지붕 사이로 펼쳐지는 서울 시내의 풍경은 단연 북촌 산책의 백미이다.

 

가회동11번지

한옥의 내부를 감상할 수 있는 개방형 한옥이 많은 지역이다. 가회 민화공방, 동림매듭공방, 한상수자수공방 등에서 한옥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북촌문화의 현장을 만날 수 있다.

 

가회동 김형태 가옥| 민속자료 제30

김형태 가옥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세워진 건물로 추정된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사랑채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 | 민속자료 제22

고종 11, 한상룡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 크게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와 안채는 일반적인 서울지방 상류주택들과 달리 한 동으로 이어져 있다.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좋고 사랑마당으로 들어서는 대문과 안마당쪽 담의 꾸밈이 눈길을 끈다.

 

안국동 윤보선가 | 사적 제 438

윤보선 전 대통령이 거주한 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의 집무실로서, 근대 정치의 중심지였다. 한옥의 양식과 생활의 편리함을 위한 서양식 생활가구와 세부장식이 절충되어 있어 근대 주택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가회동 한씨 가옥 (嘉會洞韓氏家屋)

1920년대에 지어진 개량 한옥이다.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4호로 북촌 한옥마을 근처 재동초등학교 북쪽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재단법인 연강학술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7317일 지정되었다. 가회동 산업은행관리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이 집의 소유주는 한상룡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전통가옥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과 일본식 생활의 영향을 받은 평면 구성을 한 점, 사랑채와 안채를 복도로 연결하여 한 채로 처리한 점, 포치와 현관을 설치한 점, 서양식의 '()'자형 유리창문을 만든 점 등에서 당시 부유층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시대 초기 사이에 지은 개량한옥으로, 행랑대문채와 본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사랑채 부분과 건넌방 부분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 부분은 왼쪽에 현관과 홀을 내었고 서남쪽에 대청을 두어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대청왼쪽에는 온돌방을, 그 앞쪽에는 주인실을 배치하고 툇마루를 돌렸다. 현관홀 뒤쪽에는 온돌방 2칸을 두어 객실로 쓰고 있으며 복도를 통하여 안청 대마루에 이른다. 안청 대마루 오른쪽에는 안방을 두고 그 위쪽에 부엌을 마련하였다. 안방 뒤쪽에는 골방이 달려 있고, 부엌 오른쪽에는 마루를 두어 찬마루를 쓰고 있다. 부엌 동쪽에는 외부 출입문을 두었고 건넌방 뒤쪽에는 뒷방을 두어 툇마루로 연결하고 있다. 서양과 일본풍의 현대식 생활기능을 도입하여 지은 평면식 한옥으로 개량주택의 과도기적인 집이라 할 수 있다.

 

이준구 가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북촌 한옥마을 골목 언덕 위에 위치한 가옥이다.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이 가옥은 약간 동쪽으로 틀어 남향을 하였다. 대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대문을 들어서면 계단이 나오고, 이 계단을 오르면 서북쪽으로 몸채가 자리잡았고, 몸채의 동쪽과 서쪽으로는 각각 석등과 석탑이 있는 넓은 정원이 조성되었다. 건물은 2층 규모이고, 현관은 건물 정면 중앙에 내었으며, 박공지붕 아래에도 방이 있다. 개성 송악의 신돌인 화강암과 프랑스 기와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이른바 '개화기' 상류계층의 양옥으로 설계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원수와 석탑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1991528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북촌미술관

북촌미술관은 전통 고미술부터 현대미술까지 폭넓은 예술적 관점과 해석이 자유롭게 소통될 수 있는 미술 전시공간을 마련하고 북촌의 역사문화유적지와 더불어 편안한 문화 쉼터의 역할을 하고자 지난 20051월 개관하였다. 한국과 중국의 고미술, 현대미술의 테마 전시 및 동아시아와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하여 국내외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선정하여 기획전을 마련함으로써 미술문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다원화된 미술시장을 선보임으로써 일반인들에게는 예술적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고, 국내외 문화예술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고 예술사적 연구 자료를 제공함으로서 미술사학 연구자들에게는 미술관의 기본적 기능 및 목적의식을 분명히 하게 한다.

 

서울재동초등학교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북촌 한옥마을 근처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이다. 갑오개혁이후 서울에 설립되기 시작한 최초의 근대식 초등 교육기관 중 하나이다. 1895830일에 재동 소학교라는 이름으로 100명의 학생으로써 개교하였다. 1945924일에 우리 나라 국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이듬해 1946928일에 서울재동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1996년 교육부의 '초등학교' 명칭 도입에 따라, 서울재동초등학교로 변경되었다. 1969년에 부설로 평생교육기관인 서울재동지역사회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86년에 병설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최근에는 도심 공동화 현상 및 저출산으로 폐교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삼청동, 아기자기한 재치가 넘치는 산책길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삼청동의 동명은 도교의 삼청전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삼청동은 도성의 북쪽지구에 해당되면서 경복궁의 동북지역인데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의 삼청이 되었다. 삼청동의 동명은 도교(道敎)의 삼청전(三淸殿)이 있어서 유래되었다. 삼청동은 도성(都城)의 북쪽지구에 해당되면서 경복궁의 동북지역인데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의 삼청(三淸)이 되었다.

 

 

삼청동은 옛날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맑은 계곡물이 흘러 내려 도심인의 몸과 마음을 맑게 해주었으므로 바위나 다리, 우물, 골짜기 등에 얽힌 이야기와 이름도 많이 남아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떠나기가 싫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서 뛰어가 보고 싶은 것이 삼청동의 맑고 깨끗하고 그윽한 경치이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명사(名士)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었는데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북촌(北村)의 시장은 거리와 잇따르고, 무성한 가을숲은 성곽을 뒤덮었네.

삼청보전(三淸寶殿)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한번 종소리 울리니 궐문(闕門)을 닫네.

흐르는 물은 바위 아래로 떨어지고, 이슬 젖은 풀사이로 반딧불 날아드네.

멀고 먼 세상근심 이제야 잊고자, 밤 이미 깊었지만 돌아갈 줄 모르네.

 

사간동

중학동 북동쪽 경복궁담의 동쪽 일대를 옛날부터 간동(諫洞) 또는 사간동으로 불러 오는데, 그것은 이곳 경복궁 건춘문(建春門)의 길 건너편에 사간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던데에 연유한 것이다. 한말까지 중학동(中學洞), 송현(松峴), 벽동(碧洞), 간동(諫洞)이 모두 관광방(觀光方) 중학계(中學契) 안에 있었는데 1914년 부제 실시 때 옛 간동에 다시 벽동의 일부를 포함하여 사간동으로 개편하였다.

 

사간동의 동명유래가 된 사간원은 왕에 대한 충고기관으로 왕의 과실이나 여러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간쟁(諫諍), 논박(論駁)하는 일을 맡았다. 사간동은 사간원이 있던 간동과 송현동, 중학동, 사간동 사이에 걸쳐 형성된 벽동으로 이루어졌다.

 

벽동은 다락골 혹은 벽장골이라고도 하는데 사간동 91, 97-2번지와 송현동의 미대사관저 서쪽 그리고 율곡로가 지나고 있는 중학동 북쪽 일대가 된다. 벽장처럼 동 사이에 길게 끼어서 이루어진 부락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현재의 사간동은 북으로 소격동, 동으로 송현동, 남으로 중학동이 있으며 서쪽으로 삼청동길을 경계로 세종로와 마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북촌지역이었던 사간동은 세종로의 경복궁과 길 하나로 마주보고 있고 노폭이 넓은 삼청동길에 이어져 있으나 전형적 주택지구의 특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간동 118번지는 196841일 개관된 불란서 문화회관이 있고, 바깥 벽면을 장식한 훈민정음 동판이 출판인들의 회관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한출판문화회관이 사간동 105-2에 위치하고 있다.

 

삼청동

 

소격동

소격동의 동명은 삼청전(三淸殿)의 삼청성진(三淸星辰)의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昭格署)가 있었다하여 유래되었다. 소격동은 소격서가 있던 곳인데 일설에는 화동24번지라고 하나 오히려 소격동 24번지가 맞다. 이는 소격서가 삼청전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관청인 만큼 삼청전 입구에 있어야 했고 지금의 삼청동길이 원래 개천이었던 데다가 이 근방에 소격서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증명된다.

 

더구나 소격동의 이전 명칭이 오래전부터 소격서동(昭格署洞)이었고 삼청동의 동명 역시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도가류(道家類)의 수도·기도의 전당인 삼청전은 산수가 깨끗하고 수려하여 동곡(洞谷)이 깊은 곳에 있었지만, 정부에서 임명한 관원들의 일상적 집무처인 소격서는 삼청동 입구인 소격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소격동을 이룬 옛 부락으로 대안동(大安洞)은 큰 안동(安洞)이라고 하며 송현동·안국동·소격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소격동 국군서울지구병원 동쪽의 동네가 해당된다. 화개동(花開洞)은 장원서의 화초 재배지가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화동(花洞)이라고도 하며 소격동과 화동이 인접한 곳, 대안동의 북쪽이 해당된다.

 

현재의 소격동은 동으로 화동과 안국동, 남쪽에 송현동과 사간동 , 서쪽은 삼청동길을 경계로 하여 세종로 1번지와 마주 보며 북쪽은 팔판동으로 싸여 있다. 동면적의 약 절반 가량이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점유하여 나머지 거의 모든 면적은 주거전용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안국동

안국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초기부터 있어오던 북부 10방 중의 하나인 안국방의 방명을 그대로 동명으로 한데서 유래된다. 대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의 지역을 차지하였던 북부의 여러 방은 북악, 인왕의 두 산아래에는 비록 인구는 희소할 망정 연적이 넓고 경치가 좋은 곳도 많았지만, 그 이남 즉 경복궁 동서쪽의 지역에는 방리의 면적이 그리 넓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한 방내의동, 계도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 안국방도 다른 경복궁 동측에 자리잡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방(嘉會坊)등과 같이 영조 때의 기록에서도 방명을 그대로 동명, 계명으로 한 안국동계(安國洞契)하나 만이 보인다.

 

이러한 안국방, 안국동이 갑오개혁때에 이르러서는 많이 발전하였던 모양으로 안국방 계, 동명중 소안동계(小安洞契)에 속한 동리로 소안동, 홍현(紅峴), 안현(安峴) 등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1914년 동리 구역을 조정 개편할 때에는 안현과 소안동, 재동의 일부를 합하여 안국동으로 지금에 이른다.

 

안국동이 형성된 자연부락으로 대안동(大安洞)은 소격동과 덕성여중고, 풍문여고 일원에 걸쳐 있는 마을이고 소안동(小安洞)은 대안동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작은 안동이라고도 한다. 잿골은 재동(齋洞)이라고도 하여 안국동과 재동에 걸쳐 있는 부락을 말하고 붉은 잿골은 붉은 재 혹은 홍현(紅峴)이라 하며 화동과 안국동에 걸쳐 부락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주택가로 손꼽혀 오고 있는 안국동은 북으로화동, 동쪽으로 재동, 남쪽으로 안국로를 경계로 종로 1,2가동과 서쪽은 송현동이 있다. 교육기관으로 덕성여중고등학교, 풍문여자고등학교가 있으며 안국동169번지에는 1969년에 건립된 걸스카우트회관이 있다.

 

팔판동

조선시대에 이곳에 여덟명의 판서가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저술된 한경지략(漢京識略)2 각동조(各洞條)에도 팔판동의 유래가 되었던 8명의 판서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있다. 단지 팔판동은 서울에서도 자연 지리적 조건이 좋기로 유명한 곳인 만큼 8명의 판서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전설(傳說)에 그친 것이 아닐 것 같다. 이곳은 옛부터 팔판서골이라 하던 곳으로 아마도 주요 관아가 경복궁 남쪽에 위치해 있어 직주(職住)근거리의 편의성에 따라 경복궁 동북쪽에 인근하여 있는 이곳에 판서들이 주거지를 택하였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복개된 삼청동길이 삼청동 계곡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개천이면서 경복궁의 바로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벼슬길에 오른 양반들의 집단거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북촌(北村) 양반골을 형성했던 이곳에 판서 8명이 살았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 맥락은 지금도 이어져 삼청동 총리공관이 팔판동의 북쪽 끝지역과 이어져 있고 팔판동의 서쪽길은 청와대 앞으로 통하는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삼청동 157번지와 팔판동 115번지가 서로 연이어 있기 때문에 이 일대에 조선시대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곳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현재의 팔판동은 종로구의 북부지역으로 경복궁 동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 및 북동쪽으로는 삼청동, 서쪽으로는 청운동과 세종로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소격동, 남동쪽으로는 화동과 인접해 있다. 또한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을 거쳐 삼청터널에 이르는 삼청동길이 팔판동의 동남부를 지나고 있다. 이 길은 율곡로와 사직로에서 성북동길과 이어지는 서울의 남북길로서 옛부터 서울의 명소인 삼청동 계곡을 찾는 길이며, 숙청문을 지나 성북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화동

조선시대 이곳에 있던 화개동(花開洞)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화개동은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다는 설과 함께 화유( ), 화과(花果)의 일을 담당하는 장원서(掌苑署)가 화동 23번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꽃을 기르고 있으므로 글자 그대로 화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줄여서 화동(花洞)으로도 불렀다. 화개동은 화기동(火器洞)이었던 것이 변하여 화개동으로 되었다고도 하는데 원래 이곳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화기동이 되다가 음이 비슷한 화개동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화동을 이룬 자연부락으로 동곡(東谷) 혹은 동골이라 부르는 곳은 가회동과 연접되는 정독도서관 동남쪽이며 붉은 잿골은 화동, 안국동, 재동에 걸친 마을로 붉은 재가 있어서 이를 한자로 옮겨 홍현(紅峴)이라 하였다. 소안동(小安洞)은 작은 안동으로 화동의 남쪽과 안국동의 북쪽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또한 화동 1- 7번지 정독도서관 뒤 언덕배기 일대는 일찍이 맹현(孟峴)이라 불리던 곳으로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맹사성과 그의 후손으로 숙종 때 황해동,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맹만택(孟萬澤)이 살았으므로 맹감사고개 혹은 맹동산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의 화동은 정독도서관 일대로 종로구의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삼청동, 북서쪽으로는 팔판동, 동쪽으로는 가회동, 남서쪽으로는 소격동, 남쪽으로는 안국동과 인접해 있다. 동 면적의 약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정독도서관은 경기고등학교였는데 1976220일 강남구 삼성동 74번지로 이전한 뒤 주변을 조경하여 시립정독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송현동

솔고개(松峴)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송현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송현은 솔고개, 솔재라고도 부르는데 지금의 중학동 한국일보사와 건너편 미대사관저 사이에 있던 고개로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으므로 송현이라 불렀다. 이에 대하여는 태조실록(太祖實錄)74월 임진조(壬辰條)에도 경복궁 좌강(左岡)의 송()이 고()하여서 근강인가를 철할 것을 명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경복궁 좌강이란 송현과 그 내맥(來脈)의 소나무가 고고(枯槁)하므로 근처의 인가를 철거케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곳에는 조선 초 무렵에 송목이 많았고 그 송목은 국가에서 보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목의 보호는 물론 산맥을 보전하기 위한 것이였을 것이다.

 

또한 조선 초의 소위 정도전(鄭道傳)의 난을 들 수 있는 바 태조실록 78월 기사조에 의하면 정도전·남합(南闔심효생(沈孝生) 등이 송현에 있는 남합처가에서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할 모의를 하다가 정안군(靖安君 : 태종) 당의 습격을 받아 복주(伏誅)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초부터 있었던 송현이란 지명은 조선후기에는 영조 때의 도성지도에서 표시되고 있으며, 일제 강점 초기까지도 그 현의 이름이 칭용되다가 지금은 동명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수송동과 송현동 사이 송현으로 이어지는 곳의 고개는 비가 오면 질퍽하여 걷기가 힘들어서 박석( )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 박석현이라 불렀고, 덕성여중고가 있는 부근의 우물은 깊어서 두레박을 고리에 매달아 물을 퍼올렸으므로 고리우물이라 하였고 인근의 부락을 고리우물골, 한자로 고리정동(古里井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송현동은 북으로 소격동, 동으로 안국동, 남쪽으로는 율곡로를 사이에 두고 중학동과 수송동, 서쪽을 사간동이 둘러싸고 있는 종()모양으로 생긴 지형이다. 광복과 함께 이 땅에 진주한 동서 양대 세력의 상징이 된 미대사관저(美大使館邸)가 동 면적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복정길

방긋 웃고 있는 목욕탕의 굴뚝을 향해 올라가면, 빼곡한 한옥들의 지붕과 경복궁, 인왕산, 청와대의 조망이 펼쳐진다. 이 언덕길이 복정길인데, 복정(福井)은 예전에 이 곳에 있던 우물이다. 이 우물은 조선시대에 궁중에서만 사용했는데, 대보름에 이 물로 밥을 지어 먹으면 일년 내내 복이 따른다고 해서 일반인에게도 물을 길을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삼청동길과 사간동길

감고당길

삼청공원

기기국 번사창

정독도서관

경복궁

 

계동, 소박한 일상을 엿볼수 있는 골목길

 

 

 

계동은 원래 계동, 가회동, 원서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 이 지역에 제생원(濟生院)이 있어서 제생동이라 하다가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 되었는데 1914년 동명제정시 계생동의 명칭이 기생동(妓生洞)과 비슷하다 하여 계동으로 줄여서 고쳤다. 영조27(1751)에 간인(刊印) 배포한 수성책자(守城冊子)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북부 양덕방(陽德坊) 관내의 계생동이 대개 현위치에 기입되어 있음으로 보아서 영조 때 또는 그 이전부터 이 곳이 계생동으로 칭호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 순조 말기의 편자로 인정되는 한경지략(漢京識略)각동조(各洞條)에서는 계생동에는 제생원이 있으므로 제생동이라도 칭하였는데 후에 음이 변하여 계생동이 되었다. 또 계생동에는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옛집이 있었다라 하고 궐외각사조(闕外各司條) 제생원에 보면 지금 북부 계생동을 살펴보면 곧 옛날 제생원이 이곳에 있었던고로 제생동이라 불려졌으며 제와 계의 음이 서로 혼용되는 까닭에 계동이라 칭한다 하였다. 여기에 의하여 계생동의 원명은 제생동이요, 그 제생동이라는 동명의 기원은 제생동이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되었으며 제와 계의 한자음이 서로 혼동됨으로 하여 나중에는 제생동이 계생동으로 전칭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계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제생원은 태종 6(1397) 조준(趙浚)의 건의에 의해 지방의 향약재(鄕藥材)를 수납하여 혜민국(惠民局), 동서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같이 궁민(窮民)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다. 현재의 계동은 동으로 원서동, 서쪽은 가회동과 재동이, 북으로는 삼청동과 서로 닿아있고 남으로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계동길

현대사옥에서 시작해 중앙고등학교에서 끝을 맺는 소박한 길이다.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 작은 길을 메우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풍경이 언제나 풋풋함을 더한다. 또한 이 길에는 수퍼마켓, 미용실, 목욕탕, 가게, 분식집 등 소규모의 근린상업 시설들이 즐비해 있어 주민들의 정다운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계동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북촌문화센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박물관 표지와 마주하게 된다. 또한 학교근처의 문방구며 튀김집, 요즘 보기 힘들 옛날 목욕탕과 이발관들 사이로 작은 공방들이 하나둘 생겼다. 한옥을 이용한 게스트하우스들 역시 계동길 주변에 다수 들어서 있다.

 

계동길에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은 계동길 안쪽에 있는 작은 골목들이다. 계동길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들어선 벽돌건물 뒤쪽으로 아직까지 많은 한옥들이 남아있다. 계동길에는 많은 역사적 장소가 숨어 있다. 계동 골목 끝에 있는 중앙고등학교는 198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 치하 당시 중앙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송진우 현상윤 선생 등은 이 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을 위한 준비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만해 한용운이 1918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했던 유심사터, 중앙고보의 주인이자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세운 인촌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김성수 옛집도 있다.

 

중앙고등학교 | 본관-사적 제281, 서관-사적 제282, 동관-사적 제283, 계동 1번지

3.1운동의 거사 준비는 19191,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고보(중앙고교) 숙직실로 교사 현상윤을 방문해, 교장 송진우와 함께 한 자리에서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초안을 전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학교의 앞마당에는 당시 모습대로 복원된 숙직실이 3.1운동이 배태된 장소로서 기념되고 있다.

 

석정보름우물터 | 계동 55번지 앞

돌로 되어 있는 이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해서 보름우물이라고 불려졌다. 외국인 최초의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숨어 살면서 선교를 할 당시 이 우물에서 길어낸 물로 영세를 주었다고 한다.

 

김성수 옛집 | 계동 128-3

인촌 김성수는 중앙고보의 주인이자, 경성방직, 동아일보와 고려대학을 세운 민족 지도자였다. 김성수의 거처는 3.1운동을 위해 기독교, 천도교계, 불교계가 규합을 합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김성수 옛집에는 김성수 부자가 살았던 대저택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북촌문화센터 | 계동길 37(계동 105번지) , 02-3707-8270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북촌문화센터는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국악, 다례, 천연염색, 매듭공예 등 전통문화 강좌를 운영하고 있으며, 북촌 도보 관광지도 및 전통문화체험 등의 북촌관련 자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원서동, 고즈넉한 향기가 있는 창덕궁 옆 돌담길

 

 

 

원서동의 동명은 글자 그대로 창덕궁의 후원 서쪽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서동의 동명이 이루어지기 전의 이 지역의 동명은 원동(苑洞)이요, 또 그 이전의 동명은 원동과 같은 우리말 음인 원동(院洞)으 로서 그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다. 이 곳에서 원동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고종 31년 갑오개혁 때의 기록에서 부터이며 1914년에는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원서동 206번지 일대를 관상감골 혹은 관동(觀洞), 제생원이 있던 계동 140-2번지 현재의 원서공원 일대는 계동(桂洞) 혹은 제생동(濟生洞), 창덕궁 요금문(曜金門) 밖에 함춘원(含春苑)이 있었으므로 일대를 원골 혹은 원동(苑洞)의 일부를 합하여 원동으로 하였으며, 1936년 서울의 동리명을 모두 일본식 정()으로 고칠 때에 원서정(苑西町)으로 고쳤던 것이 광복후 정을 동으로 고쳐서 지금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창덕궁 밖에 정업원(淨業院)이 있었기 때문에 관동(館洞)과 대비, 원동(院洞)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원동(苑洞)이 되었다고도 전한다. 정업원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여승들의 수도처를 의미하는 명칭이다. 조선의 한양천도와 함께 창덕궁에서 가까운 곳에 정업원을 설치하였는데, 승려의 입성을 금지하는 조선사회에서도 왕궁 지척의 장소에 자리잡은 이 정업원만은 예외로 왕실의 비호와 원조를 받는 유일한 불교의 전당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곳 정업원의 성종 때 노예가 180여구에 이르렀으며 명종 때에는 많은 인력, 물력을 동원하여 인수궁(仁壽宮)을 정업원 경내에 짓기도 하였다. 정업원이 있었던만큼 이곳의 동명을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이 있던 지역의 동명 관동과 대비하는 원동(院洞) 또는 정업원동이라 하였다.

 

현재의 원서동은 창경궁의 서쪽에 위치함으로써 명칭이 유래된 원서동은 동으로 와룡동, 서쪽은 계동, 북쪽에 청운동이 있으며 남쪽은 율곡로를 경계로 운니동과 마주보고 있다. 창덕궁 담을 새로로 길게 형성된 전형적인 주택지구이다.

 

창덕궁길

창덕궁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에는 각종 공방, 궁중음식연구원, 백홍범가 등 왕실의 일을 돌보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창덕궁 담장을 끼고 이어지는 창덕궁길은 처음 한옥보존지구가 해지되면서 지어진 다세대 건물들로 한옥골목으로서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최근 한옥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전통공방 등의 형식으로 낡은 한옥이 고쳐지거나, 다세대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한옥을 새로 짓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창덕궁길을 걷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41년간 기거했다는 고희동가옥이 나타난다. 고희동이 직접 한옥의 밑그림을 그려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집은 한때 철거 위기에 놓였으나, 현재는 서울시가 매입하여 복원이 논의 중에 있다(등록문화재 84). 창덕궁길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갖가지 전통공방과 궁중음식연구원 등의 교육 및 전시공간들이 위치해 있다. 그리고 궁중음식연구원을 지나 창덕궁 서쪽 담 막다른 곳에 이르면 빨래터를 만나게 된다. 신선원전의 담장과 닿아 있는 이곳은 궁궐에서 나온 물을 이용해 빨래를 했다고 하는 옛날 민가 여인들의 세탁공간이자 놀이공간이었던 장소이다.

 

신선원전 | 창덕궁 안

신선원전은 조선시대에 역대 국왕의 어진(초상화)을 모셔 둔 궁전이다. 어진은 6.25 전쟁 때, 부산으로 옮겨졌었으나 화재로 인해 불타버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빨래터 | 신선원전 담 아래

창덕궁의 서쪽 담을 따라 걷다가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창덕궁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볼 수 있다. 궁궐에서 여인이 세수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 쌀겨나 조두 등을 사용해서 물이 뿌연 색을 띠었는데, 이런 물에서 빨래를 하면 때가 잘 진다고 해서 이곳이 빨래터가 되었다고 한다.

 

원서동 백홍범 가옥 | 서울시 민속자료 제 13, 원서동 9-5

원서동 언덕 막바지, 비원 담 밖에 있는 이 집은 흔히 장희빈 집터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상궁이던 여성이 대궐을 나왔을 때, 기거하던 집이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 | 등록문화재 84, 원서동 9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집으로, 그가 죽기 전 6년을 제외하고 41년간 기거한 곳이다. 이 집의 외부는 한옥의 모양이지만, 내부는 양식과 일본식이 적당히 섞여 있는데, 고희동이 직접 한옥의 밑그림을 그려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덕문화원 | 원서동 129

원불교에서 마련한 이 공간은 북촌의 열린 공간으로서 사사로운 인정과 대화의 방에서 시작해, 생명과 사랑과 원불교의 정신을 잇겠다는 포부로 완성한 곳이다. 한편에 마련한 김지하 시인의 '싸롱 마고'는 차를 마시며 담론을 펼치는 문화사랑방으로 운영된다.

 

창덕궁

태종5,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정궁 역할을 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재동에 가면 문화양념통이 보인다.

 

 

 

잿골을 한자로 옮긴 데서 유래된다. 잿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왕위 계승의 뜻을 품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심복인 권람(權覽)의 추천으로 한명회(韓明會)를 만나 단종7(1453) 단종이 누이 혜경공주(惠敬公主) 즉 영양위(寧陽慰) 정종(鄭淙)의 집에 행차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사들을 매복시키고, 어린 단종을 성실히 보필하는 황보인( )등을 유인하여다가 참살할 때 이들이 흘린 피로 내를 이루고 비린내가 나므로 사람들이 집안에 있는 초목회(草木灰) 즉 재를 모두 가지고 나와서 붉은 피를 덮으니 동중은 온통 회()로 덮였다. 그 후부터 이곳을 잿골 즉 회동으로 부르게 된 것인데 그 회동의 잿골이 재동의 잿골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재동을 이룬 옛부락은 잿골 또는 회동(灰洞)으로 부르는 재동과 동곡(東谷) 홍현(紅峴)이 있다. 동곡은 가회동, 재동, 화동에 걸쳐있는 마을로 홍현 동쪽이 되므로 이름이 붙여졌고 동골이라고도 불렀다. 홍현은 붉은 재라고도 하는데 붉은 흙이 많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정독도서관 남쪽, 재동과의 지점부근이다.

 

현재의 재동은 동으로 계동과 접하고 남으로 율곡로를 경계로 하여 경운동과 마주한다. 서쪽은 안국동, 북쪽은 가회동과 연접해 있고, 헌법재판소가 위치한 83번지를 제외한 재동의 대부분 지역은 조선시대 이래 전형적인 양반집단 부락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주택가로 형성되어 있어 서울의 전통마을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이다.

 

재동 백송

천연기념물 8, 헌법재판소, 600년 된 나무다. 높이가 15m, 서쪽 가지는 8m나 된다. 나무껍질이 큰 비늘처럼 벗겨져서 밋밋하고 흰빛이 돌아 백송(白松)이라고 한다. 백송은 가꾸는 이의 권력과 부귀에 따라 그 껍질이 하얘졌다 덜해졌다 한다는 얘기가 있다. 재동 백송이 가장 하얗게 되었던 때는 풍양 조씨 세력이 쟁쟁했던 헌종, 철종 시기였고, 가장 흰빛을 띈 때는 철종이 병으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때였다.

 

이런 재동 백송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권 과정을 지켜 본 나무가 된다. 자신의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조 대비와 은밀한 계획을 세운 것이 바로 이 재동백송이 지켜보는 사랑채였으며, 이 무렵 백송 밑동이 별나게 희어져서 흥선군은 계획이 성공할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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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남산골 한옥마을 (南山韓屋마을)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의 남산골공원에 있는 한옥 마을이다. 1989년 남산골의 제모습 찾기사업으로 각지의 한옥을 모아 마을을 조성, 1998년에 문을 열었다. 좌표위치는 37°3333N 126°5938E이다. 본래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부지로 군사보호구역이었던 곳이었으나 1989년 남산 제모습 찾기사업에 따라 서울시가 수방사와 합의하에 이 부지를 인수하고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되면서 서울시 민속자료와 한옥 5개동을 복원하여 1998년 공식 개장하였다. 매년 명절마다 세시풍속 및 전통 민속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있던 곳이다. 또한 청학이 노닐었다고 하여 청학동으로도 불렸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하였다.

 

수도권 전철 3호선과 수도권 전철 4호선이 만나는 충무로역과 가깝다. 관람료는 무료, 매주 화요일에는 쉰다.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전통공예관

서울 1000년 타임캡슐

 

 

 


 

 

안국동 윤보선 가옥 (安國洞尹潽善家)

 

 

 

종로구 안국동과 가회동이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였다. 2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의 저택으로도 유명한 이 집은 1870년대에 민대감이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종이 이 집을 사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금릉위 박영효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윤보선 전 대통령 선친인 윤치소가 매입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넓은 대지에 대문간채사랑채안채안사랑채별당채기타 광채들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안채안사랑채는 각각 따로 담장을 둘러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들의 구조 역시 건실하고 치밀하다.

 

대지의 서쪽에 위치한 솟을대문간을 들어서면 나오는 행랑마당 동남쪽에 사랑채가, 서북쪽에 안사랑채안채별당채가 자리잡고 있다. 솟을대문간채는 ''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었고, 중앙에 대문을 두었으며 옆으로 출입할 수 있는 협문을 내었다. ''자로 꺾인 곳에 차고가 자리잡고 있으며, 대문 밖 북쪽으로는 노둣돌이 놓여 있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 7(1870)에 건립되어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친 치소(致昭)공이 1910년경 매입한 것이다. 윤보선 전대통령은 78세경에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집무를 하였다. 이 집은 1910년 이후에 박영효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서울의 상류민가로서 비교적 넓은 대지 안에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대문 및 행랑채, 창고 등을 갖추고 있다. 각 건물은 외형상으로는 한옥같이 보이나 세부적인 것은 중국 청나라 말기 수법을 보인다. 이는 윤보선 전대통령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중국에서 보고 느낀 중국적인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거주 당시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실내장식 및 가구는 중국이나 영국 등지에서 경험한 것을 기본으로 실생활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서양식 가구임에도 전통기법을 가미하여 새로운 의장으로 개선하였다. 바깥사랑채의 현판인 남청헌은 순조가 쓴 것으로 생각되며 김옥균이 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현판도 걸려 있는 등 각 건물에는 어필이나 유명인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 뒤뜰에는 연못이 있고 매화, 향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전통 조경은 아니지만 19세기 말 새롭게 조성된 근대조경의 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가옥은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산실 역할을 한 장소이고 19501970년대 야당의 사무실 겸 회의실로 사용되었으며 민주운동의 본부이자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한 한국정치사적 의의가 큰 곳이다. 140여년 전의 양반가옥으로 목조 한와지붕은 전통 건축으로 하고 세부장식과 생활가구 등은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한 이 집은 구한말 세도가의 위용과 건축양식 및 주거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어 건축 문화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정치사적으로도 한국 최초의 민주정당의 산실 역할을 한 장소로서의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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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尹潽善, 1897826~ 1990718)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제4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공무원, 정당인, 사회운동가이다. 국회의원과 19481215일부터 194965일까지 서울 시장을 지냈고,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1960813~ 1962323)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일시적으로 참여하였고, 신규식의 권고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의 야당 정치인이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의 비서관과 서울특별시장, 상공부 장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거쳐 제2공화국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5·16군사정변 이후 대통령 사퇴성명을 발표했다가 민주당 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부에서 대통령직에 있어달라는 요구를 수락, 사퇴성명을 번복했다.

 

 

19623월 하야 이후부터는 반독재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박정희를 군부 내 좌익 프락치라고 규정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5대 대통령 선거과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민주회복국민선언, 명동구국선언 등에 참여하였으며,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기소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인인 윤두수의 후손으로 대한제국의 관료 윤웅렬의 종손이며 윤치호의 종질이다. 윤치왕, 윤치창은 그의 당숙이었고, 윤치영은 그의 숙부였으며 영선군의 사위 윤원선은 그의 동생이었다. 윤일선, 윤영선 등은 그의 사촌이었다.

 

 

그는 임시의정원의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고, 허정, 이갑성과 함께 3.1절과 광복절 기념식 때 늦게까지 초대된 독립운동가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5·16 군사 정변 협력 논란이 양립하고 있다. 5·16 군사 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으나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중 박정희의 라이벌이었으며, 3공과 유신시절 내내 민권투쟁에 앞장섰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김영삼·김대중이 등장하기 전까지 야당을 이끌었으며 '선명야당'을 강조하였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는 경천(敬天), ()는 해위(海葦)이다. 해위 라는 호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스승인 신규식이 지어준 것으로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칭타칭 '정신적 대통령', '영국 신사', '재야 대통령'으로도 불렸다.

 


 

정독도서관 (正讀圖書館)

 

197714일 개관한 서울시립도서관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548 (화동 2)에 위치했던 경기고등학교 건물을 197714일 인수해 개관하였으며, 52만여 권의 장서와 1,200여 종의 연속간행물, 15,500여 점의 시청각자료, 12,800여 점 이상의 교육사료를 보유하고 있다. 관내에는 구 경기고등학교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건축 당시 스팀난방시설을 갖춘 최신식 학교건축으로서, 보존 가치가 뛰어나다고 판단되어 건물 중 오래된 4개 동(사료관동, 도서관 1·2, 휴게실동)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휴관일은 매월 1,3째 수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한 법정공휴일, 그리고 도서관이 정하는 임시 휴관일이다.

 

 

정문으로 들어간 뒤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종친부 건물이 있다. 원래 소격동 165번지 구 기무사 부지 내에 있던 것을 1981년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정문 옆에 서울교육박물관이 인접하여 위치해 있다. 내부에 한국의 교육제도 및 과정, 내용, 기관, 활동 등에 관한 유물과 사진자료를 시대별로 전시, 운영하고 있다.

 

성산문 집터

 

정독도서관 입구 좌측에 표석에 이 있다. 태어나려고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하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들려와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 성삼문의 일화는 유명하다. 집현전 학자로 세종을 가까이 모시면서 좋은 건의를 많이 올렸고, 글씨와 문장 솜씨에도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다. 정독도서관의 표석은 1986년 서울시가 그를 기념하기 위해 놓았다.

 

조선 초기 문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昌寧).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생.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도총관 승()의 아들이다. 1438(세종 20)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4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42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이를 도왔으며, ()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고 돌아와 469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공헌하였다. 54년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 예조참의를 거쳐 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수양대군(首陽大君;뒤의 세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하여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56(세조 2) 6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원래는 아버지 승을 비롯한 무신들에게 운검(雲劒)으로 세조의 뒤에 섰다가 세조를 제거하도록 계획하였으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侍立)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취소되고, 훗날 세조가 친히 거둥(임금의 나들이) 하는 관가(觀稼) 때로 미루어졌다.

 

이와 같이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하들의 불충을 꾸짖었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뒤 1691(숙종 17) 신원되고, 1758(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무덤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고 장릉(莊陵;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매죽헌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 집터는 정독도서관 입구에 있다.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의 주요인물인 김옥균이 살았던 곳이다. 또한 종친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입구 좌측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사육신의 한 사람 성삼문 표석이 있고, 도서관 뒤편 언덕배기에는 맹사성이 살았기 때문에 맹현(孟峴)’으로 불렸다. 가회동, 화동, 청운동은 거의 이어진 마을이고 가회동에서 삼청동으로 넘어가는 막바지에 (가회동 1번지)취운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 정독도서관을 중심으로 화동 1번지 일대에는 광해군에 의해 설치되어 총포를 만들던 화기도감 터가 있다.

 

조선 말기의 정치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 는 충달(忠達). 본관은 안동. 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교리·정언 등 을 역임하였다. 81년에 일본을 시찰하고, 이듬해에 다시 수신사 박영효 (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어 국가 제도의 개혁을 꾀할 것을 결심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10여 년 동안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가, 94년 상하이上海에서 홍종우(洪鍾 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을 통해서 본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 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저서로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종로·화동 106번지 정독도서관 구내 동남쪽에 있다. 갑신정변의 주 역 김옥균이 살던 집으로, 정변 실패후 국가에 몰수되어 1900년 한성중학 교(경기고 전신)가 설립되면서 그 부지가 됐다.

 

 

서재필 집터

 

 

화기도감 터

 

정독도서관 입구, 1613년 광해군이 청나라 누르하치의 기마병을 보면서 화포의 중요성을 깨닫고 총포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임시관청이다. 화기도감에서 만든 무기는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외곽수비를 담당하는 치영(緇營)과 각 진영에 배치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광해군 14(1622)에는 조총 900여 정과 화포 90문을 포함한 많은 무기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기술에 소홀하게 된다.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 기념비

 

조선 후기 화가 정선(鄭敾) 이 그린 산수화. 세로 79.2, 가로 138.2. 종이 바탕에 수묵화이다. 1751(영조 27), 여름날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인왕산(仁王山) 경치를 그린 것이다. 인왕산 바위를 원경 가득히 배치하고 안개와 수목을 아래에 그려 넣어 단순하면서 대담한 구도를 이룬다. 전경은 부감법(俯瞰法)으로, 원경은 고원법(高遠法)으로 처리하여 앞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느낌을 주고 있다. 안개와 능선은 엷게 하고 바위와 수목은 짙게 처리하여 흑백대비로 산의 굴곡을 효과적으로 처리했다. 특히 비에 젖은 암벽의 중량감이 강렬하게 돋보인다.

 

비가 지나간 뒤 인왕산의 인상적인 분위기가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는데, 금강전도(金剛全圖)와 함께 정선의 회화세계와 기량을 보여주는 걸작일 뿐 아니라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오른쪽 위 여백에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仁王霽色辛未閏月下浣)>이라 묵서되어 있고 정선과 원백(元伯)이라는 방형(方形)의 주인(朱印)이 있다. 국보 제216. 호암미술관 소장. 정독도서관 정원 한 가운데에 인왕제색도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인왕제색도>는 겸재가 76세 때 그림입니다. 겸재의 대표작들은 대부분이시기에 그려졌는데 <금강전도><계상정거도>76세 때 그린 그림이니 겸재의 실력이 절정에 올랐을 때 그린 그림이며 개인적으로 정선의 그림 중 제일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인왕(仁王)은 서울에 있는 인왕산을 말하는 것이고 제색(霽色)이란 큰 비가 온 뒤 맑게 갠 모습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비 개인 인왕산 그림인데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백색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바위산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백색화강암을 그리려면 흰색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온통 진한 묵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붓으로 저렇게 그리려면 붓을 옆으로 뉘어 빗자루를 쓸어내리듯 그려야 하는데 그것을 묵찰법(묵색 쇄찰법)이라고 합니다. 깎아지른 절벽 등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부벽준과 비슷하지만 그려놓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그런 묵찰법을 한번이 아닌 몇 번을 반복하여 그렸기에 바위의 묵중한 중량감이 더욱 살아났습니다.

 

또 백색암석을 진한 묵으로 그려도 원래 색은 백색임을 느낄 수 있으니 만년의 겸재의 묵법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왕산을 직접 가까이에서 보면 백색바위가 백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바위가 비에 젖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솟구친 백색 화강암봉들의 독특한 색감은 이런 묵색 쇄찰법으로 쓸어내려야만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겸재는 인왕산 밑 인곡정사에서 살면서 수백 번, 수천 번의 연습과 실험에서 터득한 진경산수의 백미로 꼽힐만한 표현입니다. 버드나무, 소나무 등 갖가지 나무의 표현도 기교와 세밀한 표현을 배재한 채 속도감 있게 그려내 거친듯하면서도 기품 있고 장대한 우리나라 수목의 특징을 살려 진경산수의 맛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양 옆과 특히 인왕산 정상의 윗부분을 의도적으로 과감하게 잘라 산의 웅장함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좁은 종이에서 벗어나 더 높게 뻗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여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부터 의도된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이 그림의 상단에는 순조때 영의정까지 지낸 만포 심환지(1730~1802)의 칠언절구 제시가 있었습니다. 겸재 그림을 좋아하여 그림을 소장하면서 제시를 적어두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그런지 죽어서 초상화 하나 마련하지 못하여 심환지 후손들이 초상화 대신 조상의 글씨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이 나서 그런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팔려 이리저리 주인이 바뀔 때 제시는 없어졌고 그때 그림의 상단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다보면 감상자의 시선이 어느덧 자연스럽게 우측 앞에 있는 조그마한 집으로 모아집니다. 그림 감상에서 시선이 모아진다면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분명 화가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림의 주제이자 목적입니다. 최완수 선생은 그림을 그린 때가 작품관지에서 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 신미년윤달 5월 하순' 에 그렸는데 정선의 60년 지기인 사천(槎川) 이 병연(李秉淵1671~1751)529일에 죽었다는걸 밝혀냈습니다.

 

그 후 오주석교수가 [승정원일기]에서 이 병연 사망 전후의 날씨를 확인했는데 19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줄 곳 비가 내렸고 25일 오후에 비로소 비가 완전히 개었다 는걸 밝혀냈습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이 병연이 죽기 4일전 25일 비가 개인 오후에 그렸다 는걸 증명한 것이고 기와집은 육상궁 뒷담 쪽에 있던 사천 이병연의 집(취록헌)임을 고증한 것입니다.

 

 

서울교육박물관

 

우리나라 교육을 선도해 온 서울교육의 위상을 정립하고 21세기의 주역이 될 후손들에게 우리 교육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우리나라 교육의 발전 모습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교육제도, 교육과정, 교육내용, 교육기관, 교육활동 등에 관한 유물과 사진 등 각종 자료들을 시대별로 전시하여 지난 1995615일에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는 교육전문박물관입니다.

 

 

 

 

중등교육발상지 기념비

 

경기고등학교는 1900103일에 설립된 학교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이다. 1909(광무 4)에 공포된 '중학교 규칙'에 의거하여, 현재의 종로구 화동에 교사를 짓고 85명의 입학생을 선발했다.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었으나,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었고, 일본인 오카모토 스케[岡元輔]가 교장으로 취임했다. 1921년에는 교육연한이 4년제에서 5년제로 바뀌고 관립학교에서 공립학교로 개편됨으로써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되었다.

 

1938년 경기공립중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었다. 1951년 교육법 개정이 시행되자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로 분리되어 다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70년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라네타륨 및 천체망원경을 설치했다. 1971년 중학교를 폐소하고 1974년 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를 개교했다. 문교부의 학교 이전 결정에 따라 1976년 강남 삼성동으로 옮겼다.

 

 

 

 

옛 경기중고교 터 (花洞 舊 京畿高校)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옛 경기고등학교의 건물이며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2호이다. 현재 정독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과 서재필 등의 집터였다. 1899년에 칙령 제11호에 의해 신학제가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1900년에 관립중학교가 설립되어 조선 정부에 몰수된 개화파 관료들의 집터에 개교하였다.

 

이후 교명이 관립한성고등학교(1906), 경성고등보통학교(1911),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1921),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1922), 경기공립중학교(1938)로 변경되었다. 해방 이후 1951년에 경기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가, 1971년에 중학교는 폐쇄되었다. 한국 전쟁시 미군 통신부대로 사용되다가 1956년에 반환되었다.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1977년부터 정독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료관동은 1927년에 건립되었고, 도서관과 휴게실동은 1938년에 건립되었다. 건축 당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벽 구조,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최신식 학교 건물이었다. 철근 콘크리트 3층 건물로 좌우대칭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중앙에 포치가 돌출되고 상부를 높이 쌓았다. 창호 역시 좁고 긴 형태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였다.

 

 

 

종친부 경근당(宗親府敬近堂)과 옥첩당 (玉牒堂)

 

 

종친부(宗親府)는 조선 시대 국왕을 지낸 이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인 왕가·종실·제군의 계급과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이들간의 다툼 등에 관한 문제를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인 정독도서관 관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때 제군부를 세종 15년에 고친 이름으로 조선말 1905년 종부사로 이름을 고쳤으나 2년 후에 폐지되어 그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종친부 건물은 조선 시대 관아 건축에 해당한다. 원래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 맞은 편 옛 수도육군병원 후원인, 한성부 북부 관광방에 그 일부분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1년 현 위치로 옮겼다. 종친부가 이곳에 위치했던 것은 종신과 외척 및 부마·인척, 그 외에 궁에서 일을 보는 상궁들만 건춘문으로 드나들게 했던 궁궐의 제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친부 옆에는 의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가 있었다. 의빈이란 왕의 부마, 즉 왕비의 소생인 공주와 후궁의 소생인 옹주의 남편 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들 의빈들도 왕족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들이 모여 의논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곳으로 종친부 옆에 의빈부가 마련되었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 조선시대 종실제군(宗室諸君)의 봉작(封爵승습(承襲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보던 관서이다. 조선 역대 제왕의 어보(御譜)와 어진(御眞)을 보관하고, 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며, 선원제파(璿源諸派)의 인사 문제와 종친간의 분규같은 것을 의논하고 감독하였다. 종친부는 1430(세종 12) 제군부(諸君府)를 고친 이름으로서 1864(고종 1) 종부시(宗簿寺)를 합하여 사무를 인계 받았고, 1894(고종 31)에 종정부(宗正府)에서 다시 종정원(宗正院)으로 개편되었다. 1905년에는 종부시로 개칭되었다가 1907년에 폐지되고, 사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종친부에는 대군(大君왕자군·제군(諸君영종정경(領宗正卿판종정경(判宗正卿지종정경(知宗正卿종정경·도정(都正·부정·(부수·(부령·() 등의 계층이 있었는데 어느 계층이고 정해진 인원은 없었다. 조관(朝官)으로 전첨(典籤전부(典簿주부(主簿직장(直長참봉(參奉) 등이 배치되었다. 이중 유사당상(有司堂上) 3인은 1품과 2품의 종반(宗班)으로 임명하는 데 종친관계 사무를 통솔하였다. 조선시대 종친을 우대하는 데는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인 소목(昭穆)으로 했으며, 대수(代數)가 다하면 그치고 녹(祿)과 품질(品秩)도 대를 내려갈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숙종은 종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율시를 지어 현판을 만들어 걸게 하였다.

 

또한, 영조는 종친을 불러 활쏘기를 시험하고 역시 종친부에 현판을 써서 걸게 하였다. 종친부 건물은 원래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1981년종로구 화동 1번지의 현 위치로 옮겼다. 19725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옛 종친부의 관아건물 중 일부에 해당하는 중당(中堂) 63.45평과 왼쪽 익사(翼舍) 32.84평이 남아있으며, 국유로 관리되고 있다. 원래 중당의 오른쪽에도 왼쪽과 같은 익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당은 화강석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7, 측면 5칸의 2익 공계 양식의 겹처마로 되어 있다.

 

구조는 2중량(二重樑) 7량가(七樑架)이며 파련대공(波蓮臺工)에 팔작지붕이다. 익사는 중당보다 격을 낮추었고 규모가 작아서 정면 5, 측면 3칸으로 평면을 잡고 익공계 양식으로 공포(栱包)를 짰다. 한편 종친부 옆에는 부마의 인사 문제를 관장하는 의빈부(儀賓府)가 있어 종실의 사무를 편하게 했으며, 다같이 종실과 외척 및 부마의 출입문인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가까이에 위치하였다.

 

우물

 

 경기고등학교 초기에는 지금의 우물돌이 있는 자리(정독도서관 1동 자리)가 구한말 을사오적중 한 사람인 박제순의 집터였다. 당시 박제순은 자신의 저택 정원에 있던 현재의 우물돌을 발견하고는 한 편의 시를 지어 돌에 새겼는데 그 뜻을 번역하여 보면 < 둥근 우물돌인데, 아마 전조(고려시대나 오래되었다는 뜻)때 쓰던 것 같다. 샘은 메어져 흔적이 없고, 다만 돌만 우뚝 서 있구나. 광무 4(1900) 겨울 평제(박제순의 호) > 이라고 되어있다. 현재는 정독도서관 1동과 2동사이에 있다.

 

 

 

 

 

종친부터우물 (宗親府 터 우물)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3, 조선시대에 종친부가 있던 터에 위치한 이 우물은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상부에 네 귀가 조출(彫出)되어 있다. 내부는 자연석을 둥글게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는 이 우물의 원래의 형태가 아니고 1984년에 기무사에서 뜰 공사 도중 지하 3m에서 우물돌을 발견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옮겨 새로 조성한 것이다. 물받이 돌로 사용되었을 구조물 1점을 현재 이 우물 내부에 놓여져 있다. 네 귀가 조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우물과 같이 화강암 두 덩이를 원형으로 이어 붙인 특징을 갖는 우물은 창덕궁과 운현궁 이로당 후원에도 있다.

 

이 우물은 원위치에서 옮겨져 원형은 잃어 버렸으나 표면 풍화상태로 보건대 개화기 이전에 조성된 상당히 연조가 있는 작품으로 판단되고 또한 그것이 위치한 곳이 경복궁 동편의 역대 관청 건물지인 것으로 보아 조선 관청 우물의 형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맹사성 집터

조선조 청백리로 소를 타고 출근하며 피리를 즐겨 불었다고 전한다. 태조부터 세종시대까지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맹사성은 검소하고 조용하여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대문 밖에 나가 맞이하고 윗자리에 앉히며, 돌아갈 때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가희동 주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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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헌 성산문(成三問, 1418~ 14566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생육신인 성담수, 성담년은 그와 6촌간이며 이기, 이행 등은 외종질이다. 그의 남계 친족은 모두 몰살당했고, 외손 박호의 후손, 외손 엄찬의 후손과 유자미[1]의 며느리가 된 손녀딸의 후손만이 현전한다. 성종 때부터 복권 여론이 나타났으나 숙종 때 가서 복권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이후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추앙받게 된다.

 

 

김옥균(金玉均, 1851년 음력 123~ 1894328)

 

 

조선후기의 문신, 정치인, 작가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우(古遇), 별호는 고균(古筠)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안동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1870(고종 8) 초부터 유대치, 박규수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고종 1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급진개화파로서 1884(고종 22)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고종 32)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서재필 (徐載弼, 186417~ 195115)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882(고종 20) 과거에 급제, 교서관부정자(校書館副正字)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 망명 생활을 했다. 후에 귀국하여 독립 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參政權)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8964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후일 이 신문의 창간을 기념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47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하였다.

 

그의 개화 계몽 사상을 견제하던 고종에 의해 강제 출국된 뒤 미국에 체류하며 대학을 다니며 의사로 활약했다. 이후 문구점과 상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박용만, 안창호 등과 함께 재미한국인 교민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3.1 운동 전후,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하면서 생계에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병원에 의사로 취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검사관으로 봉사하여 19451월 미 의회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장관 존 하지 등의 주선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역을 역임하다가 1948년 출국 후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였다. 18906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라 하여 그의 두 형과 부모는 자결했고, 옥에 갇힌 그의 본처 역시 자결했다. 당시 군대에 있던 그의 동생 서재창과 동생 서재우 역시 처형되었다. 그때 그의 맏형 서재춘의 아들 중 살아남은 조카들이 혈통을 이어 그 후손이 현존하고 있다. 또한 시집간 큰누나와 누군가에 의해 구출된 여동생 서기석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이라고도 자칭했다. 이는 그의 이름 서재필의 글자 순서를 거꾸로 한 필재서를 음역한 것이다. 필명은 오시아(N. H. Osia)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고 본가는 충청남도에 있었으므로 충남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그는 한국인 출신 최초의 의학박사이기도 했다. 김성근(金聲根)의 문인이다.

 

 

겸재 정선 (鄭歚, 1676~ 1759)

 

 

 

조선후기의 화가, 문신이다. 본관은 광주,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겸초(兼艸난곡(蘭谷)이다.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20세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했으나 30세를 전후하여 한국 산수화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산수사생(山水寫生)의 진경(眞景)으로 전환하여 동방 진경산수화의 종화(宗畵)가 되었다.

 

 

여행을 즐겨 금강산 등의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심사정(沈師正), 조영석(趙榮祏)과 함께 삼재(三齋)라고 불렀다.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主調)로 하여 암벽(岩壁)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그의 화풍은 일대에 그쳤다. 문재(文才)가 없었던 탓으로 다만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落款)만이 화폭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는 것이 이채롭다.

 

 

 

을사오적 평제 박제순 집터 (朴齊純, 1858127~ 1916620)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과거 급제 후 외교관과 이조, 호조의 참의, 이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청나라, 일본 등과 협력하며 농민군 진압에 기여하였다. 대한제국에서 총리 대신을 두 번 역임했고 외무 대신과 내무 대신을 역임했다.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며, 을사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며 한일 합방 당시에는 내무 대신이었다. 호는 평재(平齋). 본관은 반남이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박부양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초기의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삼청동 화개길 벽화골목

 

 

서울 종로구에 속한 삼청동은 동십자각 앞에서 삼청터널에 이르는 제법 큰 동네다. 사간, 소격, 팔판, 안국, 송현, 가회, 화동 등과 살을 맞대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경복궁이 자리한다. ‘산 맑고, 물 맑고, 사람 또한 맑다해서 삼청(三淸)이다. 삼청동 일대는 이른바 북촌’(北村)이라고 불린다. 북촌은 사대부들의 주거지였던 곳으로 현재까지도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삼청동으로 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청동길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삼청동길은 분명 삼청동을 한가운데로 가로지르는 큰길이지만, 그것이 삼청동의 속살을 보여준다고는 할 수 없다.

 

삼청동의 진면목은 삼청동길 오른쪽으로 난 화개길과 북촌한옥길에 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로 나가 정독도서관 방면으로 올라가면 화개길을 만난다. 삼청동길안내센터가 있고, 그곳에서 순례는 시작된다. 이 길에는 티벳박물관, 세계장신구박물관, 실크로드박물관, 북촌생활사박물관, 동양문화박물관 등 주제도 다양한 사립박물관들이 여럿 있다. 주제를 박물관투어로 잡아도 좋을 정도다

 

가장 먼저 만나는 티벳박물관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세계장신구박물관을 끼고 오른편으로 돌아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티벳박물관은 소격동, 세계장신구박물관은 화동에 속한다. 그러나 명확히 나누기가 모호해 삼청동 문화권으로 포함시킨다.

 

세계장신구박물관을 지나자 왼쪽으로 화개1길이 시작되는데, 이 길은 곧 화개2, 화개6길 등을 낳는다. 2길은 코리아다이어트센터 아래를 스치면서 삼청동길로 연결된다. 6길은 정독도서관 쪽으로 내려온다. 삼청동에서는 2008년 말부터 20092월 중순까지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인사이드아웃사이드가 진행됐다. 우리말로 삼청동의 안과 밖쯤이 될 텐데, 좁고 고불고불한 골목은 주민들의 공간으로 이 될 것이고, 방문자들이 즐겨 찾는 곳들은 이 될 것이다. ‘이었던 공간과 이었던 공간 곳곳에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이 설치되면서 그 나눔은 무의미해졌다. ‘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열어놓고 방문객들이 찾는 소통의 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개6길 담벼락에는 반쪽짜리 화분이, 코리아다이어트센터 앞쪽에는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만든 만지는 삼청동 지도가 설치돼 있다. 그렇게 화개길 골목을 누비다보면 벽면의 그림동화를 비롯해 시화 같은 작품들도 볼 수 있다.

 

코리아다이어트센터에서 길은 계속 뻗는다. 왼쪽으로 삼청동길이 흐르고 그 사이에 한옥들이 한 치의 공간도 비우지 않고 지붕을 맞대고 있다. 길은 언덕을 향해 오른다. 가파른 편은 아니다. 실크로드박물관 쪽에 이르자 전망이 훤하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북촌생활사박물관이 나온다.

 

북촌생활사박물관을 지나면서 북촌한옥길로 이어진다. 좌우로 잘 보수된 한옥과 깔끔한 길이 드러난다. ‘북촌이다. 이 길을 경계로 삼청동과 가회동이 갈린다. 왼쪽이 가회동이고, 오른쪽이 삼청동이다. 길을 내려오는데, 왼쪽에 막 새로 지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동양문화박물관이다. 한국, 중국, 티벳 등의 골동품들이 가득 찬 곳이다. 길은 한옥1·2·3·화개4길 등을 만나며 걸음의 방향을 바꾸도록 유도하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 아래로 내겨가면 정독도서관 앞 원점으로 회귀한다.

 

삼청동은 옛날에 궁과 고위관리들의 마을 사이에 있던 완충지역으로서 궁의 꽃과 과일을 담당하던 장원서, 총포를 담당하던 화기도감, 그림을 담당하던 도화서 등 궁과 관련된 중인들의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완충지역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삼청동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다양한 시공간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런 독특한 특성을 살려 도시와 전통, 삼청동 주민들과 방문객의 관계를 어어주는 매개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서울시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인 <인사이드 아웃사이드(insideoutside)>의 프로젝트는 정독도서관 앞에서부터 정독도서관 왼편으로 난 화개길을 중심으로 '적재적소' '인왕제색' '삼청동문' '소로화랑' '의사소통' 등 다섯 프로젝트로 작업이 되었어요. 벽화나 설치물들이 골목길에 보석처럼 박혀있어요.

 

개성 뚜렷한 '수제 패션' 골목

'멀티쌀집'의 주전부리 열전

오카리나·뜨개질열띤 취미 교실

탄산 커피·떡볶이 와플 등 카페마다 '개성 한가득'

변화 속에서 전통을 고수하다

화개길 구두거리

발끝에 꽃처럼 핀 길이어라

화개길에서는 누구나 슈어홀릭

 


 

세계장신구박물관

 

 

세계 장신구 박물관(World Jewellery Museum)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장신구 박물관이다. 인근에 부엉이박물관과 티베트 박물관, 실크로드 박물관 등이 위치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라틴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수많은 국가의 장신구를 소장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고대 장신구와 수단에 거주하는 한 부족의 상아 장신구, 에티오피아의 십자가 장신구 콜렉션, 중국의 소수민족이자 가장 다양한 장신구로 유명한 묘족의 은 장신구를 비롯해 모로코, 캄보디아, 몽골, 에리트레아, 인도, 벨기에 등 세계 각국의 전시물이 있다. 상설전시는 1층에서 열리며 특별 전시회는 2층에서 열린다.

 

장신구는 문명이 꽃 피웠던 곳에서 늘 발견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동반자입니다. 이미 4만여 년 전부터 우리 조상님들은 사냥에서 얻은 짐승의 가죽, 이빨, 뼈 등으로 훌륭한 장신구를 만들어 사용할 만큼 장신구 사랑은 강도 높은 것이었습니다. 북촌 심장부에 위치한 세계장신구 박물관은 시인이자 수필가인 이강원 관장이 외교관의 아내로 브라질, 에티오피아, 독일, 콜롬비아 등 9개국에서 살았던 삶의 기록이자 다양한 민족의 역사와 세월의 힘이 배어있는 전통 장신구 1000여점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20045월에 개관한 이래 북촌의 별이란 애칭까지 얻었는데 이는 아직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전통 장신구의 집결지라는 큰 의미 위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물과 전시기법 때문일 것입니다.

 


 

삼청동 전망대

 

http://blog.samsungfire.com/1664

 

 

3호선 안국역 , 1번 출구, 광화문 방향으로 10여 분 도보

3호선 경복궁역 , 4번 출구, 경복궁 방향으로 10여 분 도보

5호선 광화문역 , 교보문고 건물 3번출구,마을버스 이용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