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제1코스, 청운 효자동 1-2

草霧 2012. 12. 24. 18:31

 

600년 옛 도시 종로의 코스를 걷다.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문화양념통

 

1코스, 청운 효자동 (정신 · 문화 여행길)

 

 

 

멋과 여유는 충효의 뿌리, 미로미로 창성동 한옥마을

500년 선비들의 '삶과 사상', 청운효자동의 길을 묻다.

그곳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말 수화그리고 만지는 글, 아름기억 점자세계로 여행을 떠나본다.

 

 

 

 

역사 체험 코스 1-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수화그리고 만지는 글, 아름기억 점자세계

 

 

 

 

3호선 경복궁역 이상범 가옥 및 화실 박노수 가옥

 

우당 기념관 국립서울 농맹학교 담장벽화 선희궁 터

 

송강 정철 집터 및 시비 백세청풍 바위 및 김상용 집터

 

 

 

 

자하문로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대로변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시인 이상의 옛집과 근대 한국화의 대가인 이상범 화백의 가옥 및 화실이 있다. 대오서점은 80세의 권오남 할머니가 6·25 때 이사 온 후 60년째 서촌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서점이다.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파는 가게와 공방들도 볼 수 있다.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부터 전쟁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생겨난 재래시장인데 가게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꾸민 장식이 독특하다. 서울 농맹학교 맞은 편의 우당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희영 선생과 형제 및 애국지사들을 기념하는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

참여연대

 

 

이상범 가옥

화실

 

 

 

1930년대에 경복궁 서쪽 지역에 형성되었던 문화예술인들의 도시한옥형 주거 단지에 세워졌던 건물들이다. 이곳은 동양화가 청전 이상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간 지내며 작품 활동을 하던 화싱과 집이다. 화실은 일본식 목조 건물로 남쪽으로 큰 창을 내어 실내를 밝게 하였다. 이 건물들은 서울 도심의 주거건축 변형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인물사적 가치가 큰 유산이다.

박노수 가옥

   

 

 

비 개방

 

조선 후기 문신 윤덕영(18731940)이 그의 딸을 위해 세운 집이다. 윤덕영은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이완용과 함께 한일합방 조인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의정부찬정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938년대에 지은 이 집은 2층 벽돌집이다. 1층은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2층은 마루방 구조로 되어 있다. 한옥과 양옥의 건축기법 외에 중국식 수법이 섞여 있고 안쪽에 벽난로를 3개나 설치하는 등 호사스럽게 꾸며 놓았다.

 

우당 기념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 끝에 순국한 이회영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우당은 이회영의 호이다. 198510월 우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9909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192-10번지에 우당기념관을 준공하였고, 2001615일 지금의 위치에 기념관을 신축, 이전하여 개관하였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취를 기념하는 전시관은 모두 6개 코너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물은 이회영의 흉상과 사진, 연보를 비롯하여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망명 직전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신채호·조완구·김좌진·이동녕 등 애국지사 34명의 초상화, 망명 전에 소장하였던 장서들, 이회영이 그린 묵란(墨蘭),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문, 이상설·이준·이위종이 가지고 간 고종의 신임장, 백범 김구(金九)가 쓴 민족정기 휘호, 이회영이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혁명열사 증명서, 이회영이 직접 조각한 낙관과 도장, 대한독립단의 모금 영수증, 아나키스트 운동 관련 자료, 독립운동 활동 사진 등이다. 의복과 모자, 신발 등의 유품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서울

농맹학교

담장벽화

 

 

 

 

260년은행나무

 

거리를 미술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 되었으며, 농학교와 맹학교 담장 200M에 양각 점자벽화와 소망을 담은 그림 타일이 붙여져 있다. '수화', 만지는 글 '점자' 세계를 주제로 이곳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고 있다.

 

선희궁 터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왕실의 사묘인 선희궁이 있던 자리이다.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모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사묘라고 한다.

 

처음에는 의열묘라 불렀으나 영빈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대우를 높여서 선희궁이라 이름을 고쳤다. 현재 영빈의 신주는 육상궁에 모시고 있는데, 융희 2(1908)에 옮긴 것이다. 앞면 3·옆면 2칸 규모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벽은 벽돌로 쌓았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엄숙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나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송강 정철 집터

시비

 

 

 

, 청운초등학교

서울 장의동(청운동)에서 4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정치가인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현재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정철 선생 나신 곳' 표지석이 있고 그의 대표작 사미인곡 성산별곡과 관동별곡 등의 시비가 있다.

 

백세청풍바위

김상용 집터

 

   

 

 

기린교

 

 

 

 

 

 

 

서울 청운동 김상용의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 글씨로 원래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 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주택을 지으며 대명일월은 훼손되고 백세청풍만 남아있다. 대명일월 백세청풍은 세세년년 명나라에 절개를 지키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존주양이(尊周攘夷) 사상은 조선후기사회를 지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체험 이야기

 

 

경복궁 옆 서촌 세종마을

 

 

 

 인왕산서 몽유도원도 속 풍경 발견한 안평대군, 무계정사 지었는데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입니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일번지, 문학 일번지, 그림 일번지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간추립니다.

 

인왕산 왕기설

서촌은 오늘날의 사직동·체부동·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 등에 해당한다. 서촌의 역사가 시작된 건 조선의 개국과 함께한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이다. 백악의 우백호인 서쪽 인왕산은 높고 우람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차천로(1556~1615)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무학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전설처럼 민중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온 인왕산 왕기설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퍼졌다. 광해군 대에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과 인경궁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가 됐다. 세종이나 영조의 탄생지도 서촌에 있었다. 인왕산은 경치도 좋고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주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임에 비해 이름난 정자는 많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안견, 몽유도원도, 1477, 비단에 먹과 채색, 그림(38.7×106.2) 부분,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는 그림 부분과 발문을 포함해 두 개의 두루마리(11.2m, 8.57m 길이)로 돼 있다. 안평대군·신숙주·정인지 등 세종시대 22명이 각각 친필로 쓴 글 23편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선, 독서여가, 1740, 비단에 채색, 24×16.8, 간송미술관 소장.

1447420일 밤 안평대군(1418~53)이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오는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것이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 이듬해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풍경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초청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며 아뢴 죄목 중 첫 번째가 그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왕권 탈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도 김종서·이개·성삼문·신숙주·정인지·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1명이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들의 운명은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다. 성삼문·이개·박팽년 등 사육신은 3년 뒤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부암동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터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 살림집 근처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지금은 철거된 옥인동 옥인아파트 9동 옆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인왕제색도’vs‘인왕산도

 

 

정선, 인왕제색도, 1751, 종이에 수묵, 79.2×138.2, 호암미술관 소장.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1738~84 이전)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객관적인 시각에 충실한 그림이다. 인왕산 골짜기를 자세히 파악해 가옥과 지형의 특징을 표현했고, 도성의 성벽과 능선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희언은 특이하게도 여느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채색했다.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감 관원이었던 그는 하늘도 그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 국도팔영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청풍계·반송지·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이상(1910~37)의 집

이상은 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의 하숙집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며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등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섰다.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1908)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

당초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고교 교사 별관 뒤편 높은 암벽의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다.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하고, 그 후손인 이유원(1814~88)의 글씨라 전하기도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 서산(西山), 즉 인왕산을 뜻한다.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

 

통의동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통의방(通儀坊)으로 바뀐데서 유래된다. 통의방은 태조5(1396) 4월 한성부에 명하여 한성5부의 각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할 때 북부 10방 중 하나로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 의통방이 곧 지금의 통의동을 중심한 지역이었다. 의통이란 방명은 그 후 500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관제와 지방구역의 개정이 있으면서 종래 5(五部)5(五署)로 고치고 방동명(坊洞名)의 일부 개정이 있을 때 종전의 의통방이 통의방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의 동명 제정으로 종전 통의방을 중심지역으로 한 동명으로 바꾸어졌다.

 

통의동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는 흰 소나무가 있다해서 통의동 35번지 일대를 흰소나뭇골, 백송동(白松洞)으로 부르고, 효자동과 통의동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다. 원래 창의문(彰義門)이 있으므로 해서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밖에 있는 마을은 매짓골 혹은 매동(梅洞)이라 부르고 창성동과 통의동 사이에는 띠()를 만드는 집이 있다 해서 띳골·대동(帶洞)으로 불렀다. 또 영추문과 마주보는 곳, 매동의 아랫쪽은 서문동(西門洞)으로 불렀다.

 

현재 통의동은 북으로 창성동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효자로를 경계로 세종로의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적선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체부동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의 동쪽에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있으므로 궁궐과는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영조의 잠저인 통의동 35번지 창의궁자리는 동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1910년 이후 도시계획에 따라 비교적 반듯반듯하게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자하문길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가로변에 상업지대가 구성되어 있다.

김정희(金正喜)선생 나신 곳 (통의동백송부근)

서근다리터

창의궁(彰義宮)

 

통인동

조선시대 이곳 옛 마을의 하나인 한성부 북북 준수방 통곡과 인왕산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 데서 유래되었다. 193641일 서울의 동명을 일제식의 정()으로 일원화 하면서 통동(通洞)에서 통인정(通仁町)으로 바뀌어 졌다. 이는 이웃해 있던 통의동(通義洞)1914년의 동명 개정 때 통의방(通義坊)의 방명(坊名)을 그대로 따서 동명으로 삼은데 비해 통인동은 이곳을 이룬 옛 자연부락인 통곡(通谷)의 이름을 따서 통동이라 하다가 1936년 동명 개칭 때 이웃한 동의 이름을 유교의 기본 덕목이 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두 번째인를 사용한 대신 통동은 그 첫째 근본이 되는을 넣어 통인정으로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인의동, 예지동의 동명을 들 수 있다. 통인동을 이룬 자연부락 가운데 통곡은 통골이라고도 하며 사포서(司圃署)가 있는 마을은 사포동,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옥동(玉洞) 혹은 옥류동(玉流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통인동은 동으로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창성동·통의동과 마주하며 남쪽에는 체부동, 서쪽에는 누하동이 있으며 북쪽에 옥인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잡은 통인동은 궁궐이 가까웠던 만큼 이와 관련된 관청이 여럿 있었고 관청 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통인동은 지금도 주택가로는 으뜸으로 꼽고 있으며 이곳 주민들도 서울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히 높다.

세종대왕(世宗大王)나신 곳 (남산부인과앞)

이상(李箱)집터

내시부터

 

창성동 한옥마을

 

 

 

오래된 골목길, 서촌 나들이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동쪽 사이, 즉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다. 마을 동쪽은 효자로와 창의문로, 서쪽은 인왕산로, 남쪽은 사직로, 북쪽은 부암동 경계선과 창의문이다. 이곳은 오래된 골목들이 많고 골목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동네다. 이정표도 친절하지 않다. 서촌을 둘러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종로구청에서 추천한 '동네골목길 탐방코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종로구청 문화관광 사이트(http://tour.jongno.go.kr)를 방문하면 자세한 안내가 있다. 이곳에서 '정신/문화여행길'이라 불리는 청운효자동 1코스와 '오솔길'로 불리는 사직동 2코스를 찾으면 된다.

 

 

창성동

갑오개혁 때 북서 순화방관하에 사재감상패계 창성동(昌成洞)'()'자와 순화방내 사재감하패계의 동명중에 장성동(長城洞)이라는 동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장성' 또는 '창성'으로 이름하는 옛날의 고성지(古城址)라고 있는 데에서 온 것은 아닌가 생각되나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 중에서 그러한 고성의 유지(遺址)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성지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청송당(聽松堂)이 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하여 창성동(昌城洞)으로 변하고 성과의 관련이 없는 창성(昌城)이 무의미하는 점에서 다시 글자의 음이 같은 '()'자로 바꾸어서 창성동(昌成洞)으로 아화(雅化)되어 유래된 것 같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가운데 옥정동(玉井洞)은 일명 더운우물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달아서 옥로수(玉露水)와 같다 하여 옥정(玉井)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帶洞)을 창성동과 통의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서 띠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어졌고 띳골이라고도 하였다. 백구동(白拘洞)은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흰개를 많이 길렀으므로 흰갯골이라 하였다. 간곡(間谷)은 창성동 117번지 서쪽에서 67번지 옆으로 통한 사잇길에 있는 마을로 샛골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범숫골이란 마을이 백구동(흰갯골) 서쪽에 있었는데 수목이 많아서 범이 소를 많이 잡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창성동은 동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세종로와 마주 보며 남쪽은 통의동과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접해 있고 북쪽은 효자동에 이어졌다. 지금의 자하문길은 당초의 창성동쪽 1/3가량이 도로였고, 통인동쪽 1/3은 하천이었던 것을 복개, 확장하여 동의 서쪽 경계선이 되었다. 동 면적의 1/3가량 진명여자중·고등학교와 국민대학 부지였으나 진명여중·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종로경찰서에서 사용하며 국민대학부지는 정릉으로 대학이 이전한 후 지금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서에서 사용하고 있다. 동쪽의 효자로를 사이로 경복궁의 옆에 있으므로 맑은 공기와 함께 효자로를 따라 심어놓은 은행나무의 가로수가 매우 운치있는 곳이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은행잎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물드는 곳이 창성동쪽의 효자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가로수이다.

체신관리양성소(遞信管理養成所)

 

 

누하동

남척동(南隻洞), 송목동(松木洞), 장성동(長成洞), 오거리(五巨里), 유목동(柳木洞), 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랫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이 가운데 누하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누각동의 지명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표시되어 있다.

 

누각은 연산군 때 지었던 정자가 아니고 광해군(光海軍) 때 건축한 인경궁(仁慶宮)으로 증·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이후 빈집으로 두자 황폐되어 빗물이 새는 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누각골에 사는 사람들도 양반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아닌 서리(胥吏)들임을 보더라도 퇴락한 궁궐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에 걸쳐있는 누각동에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집집마다 담배 쌈지와 갓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위에 시렁을 얹고 쌈지와갓을 널어 말렸으므로 "누각골 색시는 쌈지 접는 데로 다간다"는 노래가 있었다.

 

남척동은 누각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납작하므로 납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남척동이라 표기하였고, 유목동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졌으며 버드나뭇골 이라고도 한다. 복정동은 물이 맑고 차서 삼복 더위도 물리친다는 복우물이 있기 때문에 복우물골이라 했고 한자로 쓴 것이 복정동(福井洞)이다.

 

송목동은 소나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장성동은 담이 성처럼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도 인경궁의 담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성동(水聲洞)은 누하동 뒤쪽으로 누상동과 경계되는 곳의 지명인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성동에는 기린교(麒麟橋)가 있었는데 석교(石橋)였다.

 

현재의 누하동은 동으로 통인동, 체부동이 남으로는 필운동, 서쪽의 누상동과 북쪽은 옥인동이 에워싸고 있으며 전형적인 집단 주택지역이다.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누하동에서 옛날의 아름답던 계곡과 바위들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서울을 전형적 주택지임을 동의 초입에서부터 느낄 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비를 맞으며 수성동에 와 이런 시를 남겨놓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집터

 

신교동

신교동 70번지 신교소방관 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이름뿐 복개시설로 인하여 다리의 형체를 볼 수는 없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景福宮)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大東地志)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중종조의 문인 눌재(訥齋) 박상(朴詳)청송당시(聽松堂詩)오가는 가교에는 외나무 건너놓였고, 허송하다 심은 버들 일만실이 드리웠네라는 싯구가 말하는 것처럼, 옛날에 있어서 거의 성시(城市)와 떨어진 느낌조차 있다. 이 유심(幽深)한 지역에 정작 다리다운 이름있는 다리가 가설되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고종조, 이곳에 새 다리가 놓이고 동명도 이 다리의 가칭인 새다리 그대로 부르던 때에, 동리의 구역은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서 지금의 신교동 일원은 물론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등의 지역이 신교라는 동 안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신교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은 자하문 길을 경계로 궁정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은 옥인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19592월에 종로소방서 관할 신교소방관 파출소가 설치되어 화재예방과 소방관계 민원사항을 담당하고 있으며, 서울맹학교와 선희학교가 신교동의 약45%를 차지하고 그외 나머지는 주택가로 형성된 서울의 전형적인 북촌(北村)이다.

선희궁지(宣禧宮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

 

궁정동

19144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자와 온정동, 박정동의 자를 따서 궁정동이라 하였다. 궁정동의 동명과 함께 지금도 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육상궁(毓祥宮)의 건물이다. 지금 청와대 서쪽, 바로 북악밑에 자리잡은 육상궁은 처음 영조가 그의 생모인 최씨를 위하여 세웠던 사묘(祠廟)였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東谷)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박정동(朴井洞)이라고도 한다. 박우물은 깊이가 그다지 깊지않아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었으므로 바가지우물이라 하던 것이 박우물로 변하였는데 박과 음이 같은 박()으로 바뀌어졌다.

 

육상골은 육상궁동이라고도 하는데 육상궁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또한 194610원 일부지역에서 임의적으로 동회제도가 실시될 때 궁정동은 신설된 경무동회(景武洞會)에 소속되었는데 이때의 동명은 경복궁 비원에 있는 과장(科場)이며, 열무장소(閱武場所)와 성역(聖域)으로 사용되던 경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의 궁정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으로는 세종로, 남쪽은 효자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신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청운동의 관할지역 가운데 가장 작은 면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이면도로가 동의 한 가운데를 종횡으로 지나고 있다.

육상궁(毓祥宮) (사적 제149)

대은암(大隱岩)

세심대(洗心臺)

송익필(宋翼弼)탄생지

백악신사(白嶽神祠)

궁정동의 회화나무 (서울시 보호수 제3)

 

청운동

이곳에 원래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글자를 따온 데서 유래된다. 동명이 유래된 청풍계와 백운동은 도성 북쪽 인왕산과 백악사이 자하문(창의문)고개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 맑은 수석이 청풍과 함꼐 항상 백운으로 덮여 있었다. 백운동에는 조선 초기 중추부 이의념(李義念)이 살자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성의 서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도 높지 않고 골짜기도 그렇게 깊지 않지만 푸른 송림과 등라덩굴 사이로 맑은 냇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맑은 하늘에는 아침 저녁으로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이 아름다워 주변의 경관과 함께 어우러지므로 옛날부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은거소창(隱居消暢)하던 곳이었다.

 

그 중에도 지금 청운국민학교 뒤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었던 청풍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든 시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게되어 많은 문인들이 청풍계 백운동을 노래하였다.

 

청운동에는 여러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123번지의 청운국민학교 앞에 있었던 우물은 크고 수량도 많아 바가지로 푸게 되었으므로 박우물이라 하였고 마을을 박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박정동(朴井洞)이라 불렀으며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당인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유난동(幽蘭洞)은 경기상업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마을로 바위에 幽蘭洞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자핫골은 청운동 일대를 통칭하는 말로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선경(仙境)에 비하며, 또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창의동(彰義洞)은 청운동 일대를 일컫는데 창의문 안쪽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으로 불렀으며 줄여서 장동(壯洞)이라고도 한다. 근처에 김상헌상용 형제의 후손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들을 壯洞金氏라고도 불렀다.

 

청운동 일대를 중심으로 서리(胥吏)들의 마을이 있어 상대(上臺) 또는 웃대라 하였다. 경복고등학교(청운동 89 - 1)가 있는 곳은 조선말에 효곡(孝谷) 또는 쌍효자거리, 쌍효자가(雙孝子街)로 불렀는데 오늘날 효자동의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기상업고등학교(청운동 89번지)에 있던 청송당(廳松堂)부근은 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기 때문에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를 정도였고 도성안의 사람들이 봄철 놀이장소로 손꼽던 곳이었다.

 

현재의 청운동은 동으로 삼청동세종로와 남쪽은 궁정동신교동옥인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과 북쪽은 부암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청운동은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동전체의 절반 가량이 임야지대로 되어 있다. 동의 서쪽에는 인왕산길이 중앙의 남북으로는 자하문길과 창의문길이 통과하며 북악산의 중간을 지나는 청운터널이 부암동과 청운동을 이어주므로 교통이 편리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정철(鄭澈)집터(청운초등학교 정문앞)

조원(趙瑗)집터(경복고등학교 내)

백세청풍(百世淸風)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경기상업고등학교 내)

청운동의 느티나무 (서울시 보호수 제114)

 

정철 (鄭澈, 1536년 음력 126~ 1593년 음력 1218)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이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沉)의 아들[1]이며,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인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기대승(奇大升) ·임석천 ·송순(宋純김인후(金隣厚)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송강 정철(1536~1593)은 서울 장의동(청운동)에서 4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정치가인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가사문학은 율문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장르,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명종 17(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1584)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여 파직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충청·전라의 3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정철은 정치가로서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붕당 싸움에 말려 반대당의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현재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정철 선생 나신 곳' 표지석이 있고 그의 대표작 사미인곡 성산별곡과 관동별곡 등의 시비가 있다.

정철생가터

 

 

 

육상궁 (毓祥宮)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사적 제149호이다.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淑嬪廟)라 했으나 영조 29(1753)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고쳤다. 육상궁 건물 등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숙빈 최씨는 현종 11(1670) 116일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출생,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출산하였다. 숙종 44(1718) 3949세로 별세하자, 무덤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모시고 묘호(墓號)를 소령원(사적 제358)이라 하였다.

 

육상궁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육상궁을 비롯한 5채의 사당에 조선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궁으로 육상궁 건물에 숙빈 최씨와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인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궁(神宮)이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궁이다. 선희궁은 역시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신궁이고,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궁이며, 이들 두 신위는 한 건물에 모셔져 있다.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신위를 모신 신궁이다.

 

육상궁 건물은 고종 19(1882)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버린 것을 그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정면 3,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며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을 두고 나즈막한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육상궁덕안궁경우궁선희궁대빈궁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冷泉亭),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전통적인 한국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며 경복궁 권역이 축소되어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던 중 19681월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34년간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오다가, 200111월말부터 부분적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칠궁

 

 

대한민국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사적 제149호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나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영조가 후궁 출신인 모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역대 왕 또는 왕으로 추존되는 분의 생모인 후궁의 묘를 옮겨와 합사하게 된 것으로 원래는 1724(영조 원년)에 지은 육상궁만 있던 터였으나 1908(순종 2)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이 되었다. 칠궁 합사는 봉사된 법모와 아울러 사친, 즉 생모에 대한 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저경궁 (儲慶宮)

대빈궁 (大嬪宮)

육상궁 (毓祥宮)

연호궁 (延祜宮)

선희궁 (宣禧宮)

경우궁 (景祐宮)

덕안궁 (德安宮)

 

선희궁 터 (宣禧宮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

 

 

사도세자 생모 영빈이씨 祠廟, 선희궁 터는 조선 제21대 영조(17241776 재위)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 李氏, ?1764)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사묘(祠廟)인 선희궁(宣禧宮)이 있던 곳이다. 사묘라는 것은 조선시대 정실(正室)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 태어난 임금이 그의 모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영조 6(1730) 영빈(暎嬪)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아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영조 11(1735) 왕자(뒤의 사도세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영조 38(1762) 사도세자가 폐위 당하고 죽는 와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영조 40(1764)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게 하였고, 다음해 7월에 시호(諡號)를 의열(義烈)이라 추존하였다. 아울러 북부 순화방(현재 신교동)에 묘를 세우고 묘호를 의열묘(義烈廟)라 하였으며, 정조 12(1788)에 선희(宣禧)라 고쳤다. 그 이후 선희궁이란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묘()를 궁()으로도 승격하여 호칭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선희궁은 계속 존속되다가 고종 7(1870)에 일시 육상궁(毓祥宮)에 옮겨 모시다가, 건양(建陽) 2(1897) 육상궁으로부터 다시 옛 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 절차는 궁내부(宮內府)에서 택일 거행케 하였는데, 고종은 선희궁 이건시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 전관검사과장(專管檢査課長) 이인유(李寅裕)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라고 독촉하는 조서를 내렸으며, 625일에 환안제(還安祭)는 궁내부 대신을 보내어 거행하게 하였다.

 

광무 3(1899)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과 동시에 궁내에 평락정(平樂亭)을 짓고 정조·순조·익조·헌종·철종의 어진(御眞)을 옮겨 모시고, 또 영빈의 시호를 소유(昭裕), 원호(園號)를 수경(綏慶)으로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융희 2(1908)에는 다시 신위를 육상궁으로 옮기고, 평락정에 봉안하였던 어진은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선희궁 터는 현재 신교동 맹아학교가 있다. 그리고 영빈 이씨의 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의 무덤이나 후궁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자를 낳은 사람의 무덤)은 원래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었으나, 19709월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되었고, 옛 수경원터가 있던 연세대학교 자리에는 홍살문과 제각 건물이 남아 있다.

 

청전 이상범 (李象範, 1897~ 1972)

 

 

 

 

http://blog.daum.net/do2522/11700

 

 

 

한국의 화가이다. 아호는 청전(靑田)이다. 김은호와 함께 대한민국 동양화 분야의 토대를 닦은 거장이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옛 조선 왕가에 부설된 미술 교육 기관인 조선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사사하고 1918년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뒤 동양화가로 활동했다. 1925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 연속 특선을 차지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는 미술 담당 기자로 근무하던 1938,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는 이길용의 일장기 말소 제안에 동조하여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처음 삭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가담하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국방헌금을 모금하기 위한 국책 기획전에 참가하여 친일 행위를 한 바 있다. 매일신보에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며 기고한 삽화 나팔수등 친일 작품도 남아 있다. 광복 후 조선미술협회에 참여해 우익 미술인으로 활동했으며,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내면서 동양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963년에는 3·1문화상을 수상했다.

 

 

그의 화풍은 초기에는 안중식의 산수화 중 남북종을 절충한 형태와 유사했으나, 차츰 독특한 구도를 선보이는 등 독자적인 세계로 진입했다. 흔히 고요한 향토색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표현하며, 변관식과 함께 한국적인 산수화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황량한 분위기나 짧은 붓질이 일본의 남화풍과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부문에 월북 화가인 장남 이건영과 함께 선정되었다.

 

 

이상범 가옥 및 화실

 

 

 

남정 박노수(朴魯壽, 1927217~ )

 

 

 

 

대한민국의 동양화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는 남정(藍丁)이다.

 

 

충청남도 연기 출생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다. 최초의 수상은 1953년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것이다. 1958년부터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 교수로 출강하였다. 여성 영화배우 이민정은 그의 외손녀이다.

 

 

박노수 가옥 (비개방)

 

 

집은 안내판과 같이 친일파의 한사람으로 인근에 프랑스식 별장이었던 벽수산장의 주인인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어 살도록 한 집으로 일부 한식, 일식, 양식이 섞여있는 절충식 주택이고, 집 뒷편에는 딸 집과의 왕래를 위해서 벽수산장과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내부는 알 수 없으나, 외부는 비교적 양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창천 이상범화백의 제자이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 음력 317~ 19321117)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1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관련 시설의 파괴, 암살을 지휘하였으나 193211월 상하이 항구에서 한인 교포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고려, 조선의 양반가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익재 이제현과, 조선 선조조의 정승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7형제 중 넷째 아들이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형이다. 해공 신익희와는 사돈간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였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해공 신익희의 여섯째 형 신재희의 부인 경주이씨는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7형제의 친 여동생이기도 했다. 이회영을 밀고한 사람들 중의 한사람인 이규서는 형 이석영의 아들이었다. 이규서의 형이자 그의 조카인 이규준은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암살자 중 한사람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일제의 밀정인 김달하를 암살했으나, 후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을 암살하기도 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잘못된 서술이다. 이규준의 사망연도는 1927년이고, 박용만의 사망일시는 19281017일이다. 뿐만아니라 박용만 암살사건의 범인은 이구연(이해명)(사건현장에서 도주) 2이고, 현장에서 검거된 이구연의 재판과정에서도 이규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김홍집 가문 역시 그의 인척으로 동생 이시영의 첫 부인의 친정아버지였다. 국회의원인 이종걸의 부친인 이규동 선생은 이회영 선생의 자녀들 중 현재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다.

 

 

개화, 계몽 운동

독립 운동 준비 계획

만주 시찰과 망명

신흥무관학교 활동

고종 망명계획 시도와 실패

임정 탈퇴와 아나키즘 활동, 아나키스트 운동,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와 최후

 

 

우당 기념관

 

백세청풍바위

 

 

야트막하지만 육중하고 우람한 바위의 위용을 뽐내면서 서울 도심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는 인왕산은 조선시대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서산(西山)이라 하였고, 비록 중국 사신이 개명한 이름이지만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하는 산이라 하여 필운산(弼雲山)이라 하였으며, 홍재전서(弘齋典書)』 「국도팔영(國都八詠)에 정조(正祖)는 서쪽의 세력을 진압하는 산으로 진서산(鎭西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 덧붙여서 인왕산은 한양 도성안의 경승지(景勝地)였다. 듬직하고 다채로운 산세와 더불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계곡을 통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가을이면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단풍이 멋있는 산이었기에 시인과 문인(文人)을 자처하는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기에 더없는 장소였다. 인왕산은 특히 18세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달을 이끌어낸 서울의 주산(主山)으로서, 조선 후기 서울을 그린 진경산수화 중 상당수가 인왕산 그림이었다. 산과 계곡과 물이 좋으니 경치가 좋은 곳이었을 것이고 그만큼 관련 유적이 즐비하였을텐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각자(刻字)이다.

 

백세청풍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왕산 청풍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인왕산 아래 계곡인 청풍계는 현재 종로구 자하문로 33(청운동 52번지) 일대에 있었다. 청풍계에 대한 문헌 기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청풍계는 장의동(壯義洞)에 있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옛 집이 있고 태고정(太古亭)이 있으며 선원의 사당에는 늠연당(凜然堂)이라는 현판이 있다. 청풍계 위 바위에는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이라는 각자(刻字)가 있다(한경지략(漢京識略)) 청풍계가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천석(泉石)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놀며 즐길만하다. 김상용의 집 안에 태고정이 있고 늠연당이 있어 선원의 초상화를 모시었다. 후손들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창의동 김씨라 한다.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 ‘백세청풍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동국여지비고)

 

이와 더불어 성현(成俔, 14391504)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한성 도성 안에 경치좋고 노닐만한 곳으로 삼청동이 가장 좋고 인왕동이 다음이며, 쌍계동, 백운동, 청학동이 또 그 다음이라 하였다. 인왕동과 백운동이 인왕산 자락에 있으므로 인왕산 인근이 조선 초기부터 경관이 뛰어난 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옥류동과 백운동 사이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청풍계(현재 청운동은 청풍계의 청과 백운동의 운을 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는 인왕산 절경 중의 절경으로 한양 도성 사람들의 대표적인 휴양지이자 풍류 놀이터였다. 17세기 이후 창의동 김씨라 칭하는 안동 김씨 일문이 대를 이어 사는 곳이 되었다. 특히 백세청풍 바위글씨가 있는 곳은 바로 창의동 김씨 일가이자 선조와 광해군, 인조 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시기인 인조 14(1636) 강화도에서 순절한 선원 김상용(15611637)의 집이었다. 이 집 안의 시냇물 위 바위에 대명일월 백세청풍바위글씨를 새겨 놓은 것이다.

 

 

 

그런데 왜 김상용의 집에 이 글자를 새겼을까? 백세청풍은 오랜 후세까지 맑고 깨끗한 바람이 분다는 뜻으로 중국 은()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숙제(叔齊)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고 있다. 중국에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는데 그 앞뜰에 백세청풍을 비석에 새겨놓았다는 데서 유래하며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평가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백세청풍을 충신들의 고택(古宅)에 현판으로 걸거나, 혹은 거주지의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다.

 

 

 

실제로 황해도 해주시(海州市) 광석동(廣石洞)에 이 백세청풍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백세청풍은 부귀영화의 세속적인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仁義)의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의리를 중시하고 대의명분이 엄격하였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신과 자세를 의미하고 있는데 김상용이야말로 선비 정신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던 것이다. 인왕산 자락의 계곡을 청풍계라 불렀던 배경에는 곧 백세청풍에서 유래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한말 이후 청풍계에는 민가들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 때 김상용의 집은 일본인 소유가 되었으며 계곡의 물길이 복개되는 등 원형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특히 대명일월네 글자는 일제강점기 때 훼손되어 없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백세청풍네 글자만 남아있다. 청풍계가 위치하였을 청운동 52번지 일대는 인왕산 기슭의 마을로 그 옛날 푸르른 계곡은 이제 간 데 없고 다만 몇 채의 한옥만 남아 있을 뿐 콘크리트 건물만 잔뜩 들어서 있다. 백세청풍은 청운 초교 뒤 골목길로 오르면 현대청운아파트가 나오는데 그 맞은편 길가 철제 펜스 안 바위에 새겨져 있다. 자하문로3348(청운동 52-58)에 위치하고 있다.

 

 

 

 

선원 김상용 (金尙容, 1561~ 1637122)

 

 

 

 

http://blog.daum.net/aroma-may/10922722

 

 

 

조선시대 중·후기의 문인, 시인, 정치가, 서예가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작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병자호란시 강화도에서 순절하였다.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이다.사후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좌의정 청음 김상헌, 장단부사 김상관, 경주부윤 청백리 김상복(金尙宓)의 형이며, 효종비 인선왕후의 외조부이다. 본관 안동(장동김씨), 호 선원(仙源풍계(楓溪), 김상헌(金尙憲)의 형이다. 선조 23(15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의정에 이르렀다. 인조 11(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란하였는데,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이에 문충(文忠)이란 시호가 내려졌으며 순절한 강화도에 순절비석이 세워지는 등 오래도록 충신으로서 추앙되었다.

 

 

 

정선(鄭敾) 그림청풍계(淸風溪)1

영조 6(1730),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서울역사박물관·고려대학교박물관, 서울하늘사람, 2002, 132면 전재(轉載).

청풍계 그림은 김상용의 집을 포함한 청풍계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 의하면 그림의 맨 위 건물이 늠연사(凜然祠)이고 그 뒤 절벽은 청풍대(淸風臺), 아래 건물은 태고정(太古亭)이며, 맨 아래 측면 건물은 청풍지각(淸楓池閣)이다.

 

청풍계첩淸楓契帖에 실린 그림청풍계

청풍계첩은 인왕산 청풍계 계곡에 있는 김상용의 집에서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 1572~1657),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 판돈녕부사 민형남(閔馨男: 1564~1659), 예조판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 최희남(崔喜男), 형조판서 이경전(李慶全: 1567~1644), 이필영(李必榮: 1573~?) 7인이 상춘(賞春: 봄을 감상)과 시회(詩會)를 즐기는 계모임을 한 뒤 김신국이 지은 발문(跋文)과 당시 참석한 일곱 사람이 지은 14편의 시문, 그리고 청풍계 일대를 그린 그림 등을 모아 만든 시화첩(詩畵帖)이다.

 

이 계모임은 김상용의 집에서 가졌으나 김상용은 당시 외직으로 나가 있어서 참석하지 않았다. 청풍계 그림은 계회도(契會圖: 문인의 계회 광경을 그린 그림) 형식이지만 별도의 좌목(座目: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 시화첩 제목을 통하여도 청풍계는 본래 단풍과 관련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 청풍계첩은 이상의(李尙毅)의 후손 가문에 전래되었는데, 특히 후손 가운데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지은성호전서(星湖全書)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 공손히 청풍계첩 뒤에 글씨를 씀)에는 그림이 떨어져 나가 영조 12(1736)년 원본(原本)을 똑같이 베꼈다고 나온다. 이 그림에서 맨 뒷산은 좌측이 인왕산이고 우측은 백악산이며 인왕산 아래를 감싸고 흐르는 개울은 청풍계다.

 

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와 비교하며 이 그림에 나타나는 건물과 시설 등은 아래와 같이 설정할 수 있다. 먼저 청풍계 옆의 모정(茅亭: 띠를 지붕에 인 정자)은 태고정(太古亭)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인물이 곁들여져 있어 계회를 연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주변에는 돌을 빙둘러 만든 3개의 연못이 있는데, 위로부터 조심지(照心池), 함벽지(涵碧池), 척금지(滌衿池)이다. 우측 건물은 청풍지각(淸楓池閣)과 소오헌(嘯傲軒), 와유암(臥遊菴) 등으로 추정된다

 

 

 

청풍계淸風溪와 태고정 터太古亭址

청풍계는 인왕산 아래 종로구 청운동 일부 계곡을 포함한 지명으로 오늘날 대부분은 주택가로 변하였다. 조선시대 청풍계淸風溪에는 충신의 대명사로 추앙받은 김상용이 살던 집과 사당 등의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청풍계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 이곳은 단풍이 유명하였던지풍계楓溪라고도 불렸다. 이는 김상용의 또 다른 호풍계風溪와 이곳에 지은청풍지각淸楓池閣’, 김양근이 지은풍계집승기楓溪集勝記에서풍계를 일명청풍계라고 부른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의 지명이 단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정조가 지은 시국도팔영國都八詠청계간풍(淸溪澗楓: 청계 계곡에 있는 산골 물의 단풍)’을 통하여도 알 수 있다.

 

김상용이 인왕산 기슭 청풍계에서 살았던 집은태고정太古亭또는선원고택仙源古宅으로 불렸다. 태고정은 집터에 있었던 정자 이름이고, 선원고택은 김상용 사후死後자손 및 후학들이 부른 이름이다. 그런데 이 집의 터는 본래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제수弟嫂인 강릉김씨江陵金氏, 즉 그의 막내 아우인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처를 위하여 정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조대사가 집 터를 정하여 주었다는 이야기는 이 책의 앞에서 소개한김상헌 집터에서도 나온다.

 

 

 

일찍 과부가 되었던 강릉김씨는 슬하에 아들 3형제(장남 영, 차남 번, 삼남 순이 있었음)를 두었다. 이 가운데 장남 김영金瑛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를 지낸 바 있는데 호는 삼당三塘또는 낙재樂齋. 여기서 삼당이란 호는 그의 청풍계의 집에 있던 세 연못에서 유래한 것이다.

 

김영의 11대손인 동야東野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지은풍계집승기에는 그의 선조 김영이 살았던 청풍계의 김상용 집 터에 관하여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 부분은청풍계는 우리 선세(先世: 선조)의 옛 터전인데 근래에는 선원(仙源: 김상용의 호) 선생의 후손이 주인이 되었다. 경성 장의동 서북쪽에 있으니 순화방 인왕산 기슭이다이다. 김번金璠의 현손玄孫인 김상용은 47세 때인 선조 40(1607)(일설에 의하면 선조 41)부터 이곳에 거주하였다. 즉 김영의 손자인 김기보金箕報가 경상도 안동의 풍산으로 낙향할 때 이 집 터를 김상용에게 물려준 것이라 한다.

 

김상용은 이후 건물은 물론 집 안팎의 못, , 바위와 골짜기 등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풍계집승기를 통하여 재구성하면, 집 뒤쪽의 주산主山 이름은 반룡강蟠龍崗 또는 와룡강臥龍崗이다. 그 앞은 창옥봉蒼玉峯이며 그 서쪽으로 10보쯤 떨어진 시냇가에 초가로 된 태고정太古亭이 있었다. 태고정 옆의 청풍지각淸楓池閣은 김상용이 집을 넘겨받으면서 이를 기념하며 꾸민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의 현액은 명필 석봉石峯한호(韓濩: 1543~1605)가 썼고 대들보에는 선조의 어필인청풍계淸楓溪라는 글씨가 비단에 싸여 걸려 있었다. 또한 청풍지각 인근에는 여러 부속 건물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도연명의 시에서 취한 소오헌嘯傲軒이 있고, 그 동쪽에 종소문(宗少文: 소문은 중국 남조 송나라의 문인 종병宗炳의자)에서 뜻을 취한 와유암臥遊庵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젊은 시절 소현세자가 청풍지각에 구경와서창에 임하니 끊어진 개울에 물소리 들리는데, 객이 이르니 외로운 봉우리가 구름을 쓸고 있네라는 한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소오헌 남쪽에 걸려 있었다.

 

 

또한 김상용의 집에는 앞서 언급한 세 연못이 있었는데 모두 돌을 다듬어 네모지게 쌓았다. 연못은 태고정 북쪽으로부터 구멍을 뚫어 개울물을 끌어들여 바위 아래로 흐르게 하여 못 하나가 다 차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못이 차례로 차게 되어 있다. 이 못의 이름은 제일 위의 것을 조심(照心: 마음을 비춤), 가운데는 함벽(涵碧: 푸르름을 머금음), 제일 아래는 척금(滌衿: 옷깃을 씻음)이라고 하였다.

 

그밖에한경지략의 청풍계에도 김상용의 옛 집 태고정과 사당 늠연당凜然堂 등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늠연당은 숙종 34(1708)년에 청풍계에 건립한 김상용의 사당 늠연사凜然祠를 다르게 표기한 것이다. 늠연사는 태고정의 서쪽에 위치한 회심대會心臺 좌우의 돌길에 있었으며 늠연사를 세우는데 적극 관여한 송시열은 그 앞 큰 바위 천유대天遊臺대명일월大明日月이란 각자를 남겼다.

 

정조는 정조 14(1790)년 육상궁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 연호궁·선희궁을 참배하고 나서 인근에 있는 태고정에도 행차하였다. 이 때 정조는 김상용의 봉사손(奉祀孫: 제사를 받드는 후손)을 불러 만나보고, 이조에 명하여 관직을 내려주도록 하였으며, 호조에 명하여 그 집을 수리하게 한 바 있다. 이 책의 뒤에서 언급하듯 매동초등학교의 전신인 장동관립소학교壯洞官立小學校는 고종 32(1895)9월 김상용의 옛 집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1911년에 작성된경성부시가도(지도 14)에 나오는청풍학교가 이 장동관립소학교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용의 집터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부와 결탁한 일본 재벌회사인 미쓰이三井 물산 주식회사가 차지하면서 계곡을 메우고 암석을 떼어내며 터를 넓혀 새로 집을 짓게 되었다. 이 공사 과정에서 태고정 한 칸만 남아 인부들의 숙소가 되었으나 지금은 그마저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1917년에 작성한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청운동 50번지 4,743(1,435)53번지 1,752(530)는 미쓰이물산주식회사 소유이고, 52번지 1,642는 창덕궁, 그리고 기타 작은 면적의 지번은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나온다. 이 가운데 창덕궁은 이왕가李王家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다.

 

조선 중기의 천민신분으로서 천재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유희경劉希慶은 이곳 태고정 경치를 아래와 같이 읊었다.

청풍계 납시다가 태고정에 올랐네. 뜨락에 구름을 쓰는 사람 없는데, 시냇물 소리는 많이 와서 듣는다. 가느다란 댓줄기 처마에 닿아 서늘한데 늙은 소나무 그늘 골짜기 가득 푸르구나. 어느 때나 티끌세상 떠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거나.

 

또한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도 아래와 같이 청풍계를 시로 남겼다. “청풍계 위의 태고정(太古亭)은 우리 집의 큰 형님이 지어 놓은 곳. 숲과 골짝 의연히도 수묵도(水墨圖)와 같거니와, 바위 절벽 절로 푸른 옥병풍(玉屛風)을 이루었네. 우리 부자 형제들이 한 집에 앉아서, 바람과 달과 거문고와 술로 사시사철을 즐기었네. 그 좋던 일 지금 와선 다시 할 수 없거니와, 이러한 때 이런 정을 어떤 이가 알 것인가.” 김상헌,청음집(淸陰集),근가십영(近家十詠) () 청풍계(淸風溪)

 

 

 

백세청풍百世淸風과 대명일월大明日月 각자刻字

풍계집승기에서 청풍계 늠연사의 앞 청풍대라는 이름의 바위에 있는 각자 <백세청풍>은 주자(朱子)의 글씨이며, 곁에 천유대(天遊臺)라는 우뚝 솟은 절벽 위에 있는 각자 <대명일월>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길이길이 오랜 세월동안 밝고 곧은 절개라는 뜻을 가진 <백세청풍> 각자만 전하고 있다. ‘백세청풍은 고죽국(孤竹國: 은나라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의 왕자 백이(伯夷)숙제(叔弟) 형제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백세청풍을 충신들의 고택에 현판으로 걸거나, 혹은 거주지의 바위나 비석에 새겨 기념하였다. 조선이 청나라보다는 명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뜻을 담은 <대명일월> 각자는 일제 강점기 때 훼손되어 없어졌다.

 

 

 

김상용 집터

 

 

 

국립서울 농맹학교 담장벽화

 

 

 

 

 '디자인도시 서울' 서울시 도시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된 것으로 학교 담장에 점자벽화와 소망을 담은 그림타일이 붙여져 있다. '수화''점자'는 그 어느 언어와 글보다 더 아름답다. 거리를 미술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서울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 일환으로 추진 되었으며, 농학교와 맹학교 담장 200M에 양각 점자벽화와 소망을 담은 그림 타일이 붙여져 있다. '수화', 만지는 글 '점자' 세계를 주제로 이곳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을 담고 있다.

 

 

 

국립서울맹학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시각장애인 특수 교육학교다. 191341일에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98번지에서 제생원濟生院맹아부 설치로부터 시작하여 193141일 현재 장소로 이전하였다. 교육과정은 유치부,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가 있다.

 

국립서울농학교

 

 

청각장애자의 교육을 위한 특수학교다. 191341일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98번지에서 제생원 맹아부 설치로부터 시작하여 193141일 현재 장소로 이전 후 195941일 맹학교와 분리되었다. 교육과정은 유치부,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