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옛 도시 종로의 코스를 걷다.
멋과 여유는 충효의 뿌리, 미로미로 창성동 한옥마을
500년 선비들의 '삶과 사상', 청운효자동의 길을 묻다.
그곳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말 ‘수화’ 그리고 만지는 글, 아름기억 ‘점자’ 세계로 여행을 떠나본다.
역사 체험 코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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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수화’ 그리고 만지는 글, 아름기억 ‘점자’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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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경복궁역 → 옛 청와대, 보안여관 → 창성동 한옥마을 →
쌍홍문 터 → 해공 신익희 가옥 → 청와대 사랑채 →
무궁화동산 → 육상궁 → 창의문로 → 청운공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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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청와대 보안여관은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장기 투숙하는 곳으로 80년 가까이 효자동을 지키고 있다. 창성동 한옥마을과 쌍홍문터를 지나 효자로를 따라 걷다보면 청와대 사랑채와 무궁화동산을 볼 수 있다. 서울의 벚꽃 명소 중 한 곳이기도 한 청와대길에 자리한 청와대 사랑채는 역대 대통령들의 발자취와 서울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관이다. 창의문은 49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울 성곽 4소문 중 하나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서촌 전체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이 코스는 곳곳에 숨어있는 현대적인 까페와 갤러리를 감상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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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선 경복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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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출구 | |
옛 청와대, 보안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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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 미당 서정주의 문학인생을 기록한 ‘서정주 문학전집’ 3권 ‘천지유정’의 한 대목이다. 75년 전 문학청년이 ‘기거하던’ 그 여관이 지금의 이곳이다. 1936년 서울 종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시인부락을 만듦, 새로운 문화예술이 투숙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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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동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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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효자로를 사이로 경복궁의 옆에 있으므로 맑은 공기와 함께 효자로를 따라 심어놓은 은행나무의 가로수가 매우 운치있는 곳이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은행잎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물드는 곳이 창성동쪽의 효자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가로수이다. 체신관리양성소터, 국민대학교 터,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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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홍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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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아들이 효자라서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으며 효자동의 이름이 유래된 효자동의 어원이 된 쌍홍문이 있던 장소로 효성이 지극한 임천조씨(林川趙氏) 가문의 조원(趙瑗)을 기려 나라에서 정문을 세웠던 터이다. 그의 아들 희신과 희철 형제도 이름난 효자에서 쌍홍문이라 했고, 효자동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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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개방 / 신분증 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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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 신익희 가옥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3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64-2번지에 위치한 이집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 살던 곳이다. 그는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1954년 8월부터,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선거 유세 도중에 갑자기 숨진 1956년 5월까지, 약 1년 9개월 동안 이집에서 살았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으로 넓지 않은 땅에 소박한 구성을 보여준다. 이 집은 두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ㄱ자형 사랑채와 ㄴ자형 안채가 만나 ㅁ자형의 안마당을 이루고 있다. 2003년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 사업회에서 이 가옥을 사들였고, 2005년에는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안채와 사랑채를 보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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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랑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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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랑채는 본래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이 통행 금지된 후 오랫동안 이 지역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며 국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로 개조하여 '효자동 사랑방'으로 개관하였다. 기존의 효자동 사랑방을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개축하여 '청와대 사랑채'로 2010년 1월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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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동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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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집 터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화의를 반대하였으며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르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후 풀려나기도 하였다.
무궁화가 많이 피는 '무궁화 동산'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던 '궁정동 안가' 자리입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안가를 헐고 공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습니다 '궁정동 안가의 총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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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궁 (칠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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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궁은 사적 제149호로 공식 명칭은 '육상궁'이다. 칠궁은 조선조 500여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 등을 모셔 놓은 사당이다. 1968년 1·21 김신조 등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일반인 관람이 금지되었다가 33년 만인 2001년 11월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칠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해 저경궁(儲經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을 일컫는 것.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왕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왕진종의 생모)와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엄씨(영친왕의 생모)를 각각 모셔 놓았다. 칠궁 권역에는 원래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영조때 육상궁으로 개칭)만 있었으나 1908년 서울 주변에 흩어진 여러 사친묘(私親廟.임금의 생모가 된 빈의 사당)을 합치면서 육궁이 됐다. 이어 1929년 고종의 후궁인 엄씨의 덕안궁을 옮겨 오면서 지금과 같은 칠궁이 됐다.
청와대 경계 서쪽과 맞닿아 있는 칠궁권역은 7천8백평의 사적지에 묘궁 5개동을 포함해 24개동의 건물이 있으며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廟祠)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 자료다. 또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의 우물 '냉천(冷泉)'과 정자 '냉천정(冷泉亭)' 및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자 '냉천정'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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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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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彰義門) 북문(北門) 또는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四小門)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門名)을 얻었다. 북한(北漢) ·양주(楊州)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門樓)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최규식 경무관 동상 최규식 경무관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124군 특수부대 청와대 기습당시 자하문에서 공비와 교전중 전사하였다. 이 당시 서울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은 청와대로 진입하던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을 가로막고 검문을 벌이다 공비들의 총격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청계천 발원지 | |
청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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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울시 종로구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는 한국인이 제일 사랑하는 윤동주의 서정적 시상을 떠 올린 인왕산 자락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여 동양의 목마르뜨 언덕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서시정
윤동주 문학관 1974년부터 2008년까지 사용하다 용도 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레노베이션한 건물이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 윤동주의 시가 우리 영혼을 자극해 다시 세차게 흐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적이다.
석파정(石坡亭)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원래는 김흥근의 소유였던 것을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이 사용하였다. 한국전쟁 후 고아원·병원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개인소유 건물이다. 정자의 앞산이 모두 바위라 대원군이 ‘석파정(石坡亭)’이라 이름지었으며 삼계동 정자라 하기도 한다. 커다란 바위와 바위산에서 흐르는 시냇물, 뜰에 서 있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석파정은 매우 아름답다.
반계 윤웅렬 별장 높은 터 위에 행랑대문채가 있고 그 안에 사랑채와 안채가 있는 집이다. 대문채는 一자형으로 오른쪽 둘째 칸은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고, 사랑채는 방과 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툇마루를 달았다. 안채는 행랑대문채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넌방과 안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의 남쪽에 부엌과 방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의 옆면 뒷쪽에는 정원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내칸을 두었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안채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전통 한옥건물에서 조금씩 현대화해가는 초기 과정의 특색을 보이고 있는 집이다. |
역사체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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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서 몽유도원도 속 풍경 발견한 안평대군, 무계정사 지었는데…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입니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일번지, 문학 일번지, 그림 일번지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간추립니다.
인왕산 왕기설 서촌은 오늘날의 사직동·체부동·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 등에 해당한다. 서촌의 역사가 시작된 건 조선의 개국과 함께한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이다. 백악의 우백호인 서쪽 인왕산은 높고 우람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차천로(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무학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전설처럼 민중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온 인왕산 왕기설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퍼졌다. 광해군 대에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과 인경궁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가 됐다. 세종이나 영조의 탄생지도 서촌에 있었다. 인왕산은 경치도 좋고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주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임에 비해 이름난 정자는 많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안견, 몽유도원도, 1477년, 비단에 먹과 채색, 그림(38.7×106.2㎝) 부분,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는 그림 부분과 발문을 포함해 두 개의 두루마리(각 11.2m, 8.57m 길이)로 돼 있다. 안평대군·신숙주·정인지 등 세종시대 22명이 각각 친필로 쓴 글 23편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선, 독서여가, 1740년, 비단에 채색, 24×16.8㎝, 간송미술관 소장. 1447년 4월 20일 밤 안평대군(1418~53)이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오는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것이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 이듬해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풍경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초청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며 아뢴 죄목 중 첫 번째가 그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왕권 탈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도 김종서·이개·성삼문·신숙주·정인지·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1명이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들의 운명은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다. 성삼문·이개·박팽년 등 사육신은 3년 뒤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부암동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터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 살림집 근처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지금은 철거된 옥인동 옥인아파트 9동 옆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인왕제색도’vs‘인왕산도’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 호암미술관 소장.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1738~84 이전)의 ‘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년(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객관적인 시각에 충실한 그림이다. 인왕산 골짜기를 자세히 파악해 가옥과 지형의 특징을 표현했고, 도성의 성벽과 능선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희언은 특이하게도 여느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채색했다.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감 관원이었던 그는 하늘도 그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 국도팔영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에 “(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청풍계·반송지·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이상(1910~37)의 집 이상은 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의 하숙집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며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섰다.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년(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년(1908년)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 당초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고교 교사 별관 뒤편 높은 암벽의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다.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하고, 그 후손인 이유원(1814~88)의 글씨라 전하기도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 서산(西山), 즉 인왕산을 뜻한다.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호)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호)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호)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호)
통의동 조선시대에 이곳이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이었다가 갑오개혁 때 통의방(通儀坊)으로 바뀐데서 유래된다. 통의방은 태조5년(1396) 4월 한성부에 명하여 한성5부의 각 방명표(坊名標)를 세우게 할 때 북부 10방 중 하나로 처음 기록에 나타나는데 이 의통방이 곧 지금의 통의동을 중심한 지역이었다. 의통이란 방명은 그 후 500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관제와 지방구역의 개정이 있으면서 종래 5부(五部)를 5서(五署)로 고치고 방동명(坊洞名)의 일부 개정이 있을 때 종전의 의통방이 통의방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의 동명 제정으로 종전 통의방을 중심지역으로 한 동명으로 바꾸어졌다.
통의동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로는 흰 소나무가 있다해서 통의동 35번지 일대를 흰소나뭇골, 백송동(白松洞)으로 부르고, 효자동과 통의동 사이에 형성된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다. 원래 창의문(彰義門)이 있으므로 해서 창의동이라 하던 것이 변해서 장의동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었다. 경복궁 영추문(迎秋門)밖에 있는 마을은 매짓골 혹은 매동(梅洞)이라 부르고 창성동과 통의동 사이에는 띠(帶)를 만드는 집이 있다 해서 띳골·대동(帶洞)으로 불렀다. 또 영추문과 마주보는 곳, 매동의 아랫쪽은 서문동(西門洞)으로 불렀다.
현재 통의동은 북으로 창성동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은 효자로를 경계로 세종로의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다. 남쪽은 적선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체부동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동의 동쪽에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이 있으므로 궁궐과는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영조의 잠저인 통의동 35번지 창의궁자리는 동면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1910년 이후 도시계획에 따라 비교적 반듯반듯하게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다. 자하문길을 중심으로 한 일부 가로변에 상업지대가 구성되어 있다. 김정희(金正喜)선생 나신 곳 (통의동백송부근) 서근다리터 창의궁(彰義宮)터
통인동 조선시대 이곳 옛 마을의 하나인 한성부 북북 준수방 통곡과 인왕산의 글자를 각각 한자씩 따온 데서 유래되었다. 1936년 4월 1일 서울의 동명을 일제식의 정(町)으로 일원화 하면서 통동(通洞)에서 통인정(通仁町)으로 바뀌어 졌다. 이는 이웃해 있던 통의동(通義洞)이 1914년의 동명 개정 때 통의방(通義坊)의 방명(坊名)을 그대로 따서 동명으로 삼은데 비해 통인동은 이곳을 이룬 옛 자연부락인 통곡(通谷)의 이름을 따서 통동이라 하다가 1936년 동명 개칭 때 이웃한 동의 이름을 유교의 기본 덕목이 되는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두 번째인「의」를 사용한 대신 통동은 그 첫째 근본이 되는「인」을 넣어 통인정으로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인의동, 예지동의 동명을 들 수 있다. 통인동을 이룬 자연부락 가운데 통곡은 통골이라고도 하며 사포서(司圃署)가 있는 마을은 사포동, 옥인동과 통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옥동(玉洞) 혹은 옥류동(玉流洞)이라 하였다.
현재의 통인동은 동으로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창성동·통의동과 마주하며 남쪽에는 체부동, 서쪽에는 누하동이 있으며 북쪽에 옥인동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잡은 통인동은 궁궐이 가까웠던 만큼 이와 관련된 관청이 여럿 있었고 관청 출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통인동은 지금도 주택가로는 으뜸으로 꼽고 있으며 이곳 주민들도 서울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히 높다. 세종대왕(世宗大王)나신 곳 (남산부인과앞) 이상(李箱)집터 내시부터
창성동 한옥마을
오래된 골목길, 서촌 나들이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동쪽 사이, 즉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다. 마을 동쪽은 효자로와 창의문로, 서쪽은 인왕산로, 남쪽은 사직로, 북쪽은 부암동 경계선과 창의문이다. 이곳은 오래된 골목들이 많고 골목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동네다. 이정표도 친절하지 않다. 서촌을 둘러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종로구청에서 추천한 '동네골목길 탐방코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종로구청 문화관광 사이트(http://tour.jongno.go.kr)를 방문하면 자세한 안내가 있다. 이곳에서 '정신/문화여행길'이라 불리는 청운효자동 1코스와 '오솔길'로 불리는 사직동 2코스를 찾으면 된다.
창성동 갑오개혁 때 북서 순화방관하에 사재감상패계 창성동(昌成洞)의 '성(城)'자와 순화방내 사재감하패계의 동명중에 장성동(長城洞)이라는 동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장성' 또는 '창성'으로 이름하는 옛날의 고성지(古城址)라고 있는 데에서 온 것은 아닌가 생각되나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지리서 중에서 그러한 고성의 유지(遺址)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성지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고 「청송당(聽松堂)」이 음이 서로 비슷한 관계로 하여 창성동(昌城洞)으로 변하고 성과의 관련이 없는 창성(昌城)이 무의미하는 점에서 다시 글자의 음이 같은 '성(成)'자로 바꾸어서 「창성동(昌成洞)」으로 아화(雅化)되어 유래된 것 같다.
창성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부락 가운데 옥정동(玉井洞)은 일명 더운우물골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에 우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맑고 달아서 옥로수(玉露水)와 같다 하여 옥정(玉井)이라고도 하였다. 대동(帶洞)을 창성동과 통의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서 띠를 만드는 집이 있으므로 이름이 붙어졌고 띳골이라고도 하였다. 백구동(白拘洞)은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흰개를 많이 길렀으므로 흰갯골이라 하였다. 간곡(間谷)은 창성동 117번지 서쪽에서 67번지 옆으로 통한 사잇길에 있는 마을로 샛골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범숫골이란 마을이 백구동(흰갯골) 서쪽에 있었는데 수목이 많아서 범이 소를 많이 잡아 먹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의 창성동은 동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세종로와 마주 보며 남쪽은 통의동과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통인동과 접해 있고 북쪽은 효자동에 이어졌다. 지금의 자하문길은 당초의 창성동쪽 1/3가량이 도로였고, 통인동쪽 1/3은 하천이었던 것을 복개, 확장하여 동의 서쪽 경계선이 되었다. 동 면적의 1/3가량 진명여자중·고등학교와 국민대학 부지였으나 진명여중·고는 1989년 양천구 목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종로경찰서에서 사용하며 국민대학부지는 정릉으로 대학이 이전한 후 지금은 총무처 정부기록보존서에서 사용하고 있다. 동쪽의 효자로를 사이로 경복궁의 옆에 있으므로 맑은 공기와 함께 효자로를 따라 심어놓은 은행나무의 가로수가 매우 운치있는 곳이며, 서울 시내에서 가장 은행잎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물드는 곳이 창성동쪽의 효자로를 따라 심어져 있는 가로수이다. 체신관리양성소(遞信管理養成所)터
누하동 남척동(南隻洞), 송목동(松木洞), 장성동(長成洞), 오거리(五巨里), 유목동(柳木洞), 누각동(樓閣洞) 일부를 합쳐 누각동 아랫쪽에 있으므로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이다. 이 가운데 누하동의 동명 유래가 되는 누각동의 지명은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표시되어 있다.
누각은 연산군 때 지었던 정자가 아니고 광해군(光海軍) 때 건축한 인경궁(仁慶宮)으로 증·개축하여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됨에 따라 이후 빈집으로 두자 황폐되어 빗물이 새는 누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누각골에 사는 사람들도 양반 사대부가(士大夫家)가 아닌 서리(胥吏)들임을 보더라도 퇴락한 궁궐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상동, 누하동, 체부동에 걸쳐있는 누각동에 사는 사람들은 옛부터 집집마다 담배 쌈지와 갓을 만들었는데 용마루 위에 시렁을 얹고 쌈지와갓을 널어 말렸으므로 "누각골 색시는 쌈지 접는 데로 다간다"는 노래가 있었다.
남척동은 누각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납작하므로 납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남척동이라 표기하였고, 유목동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졌으며 버드나뭇골 이라고도 한다. 복정동은 물이 맑고 차서 삼복 더위도 물리친다는 복우물이 있기 때문에 복우물골이라 했고 한자로 쓴 것이 복정동(福井洞)이다.
송목동은 소나우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장성동은 담이 성처럼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도 인경궁의 담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성동(水聲洞)은 누하동 뒤쪽으로 누상동과 경계되는 곳의 지명인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성동에는 기린교(麒麟橋)가 있었는데 석교(石橋)였다.
현재의 누하동은 동으로 통인동, 체부동이 남으로는 필운동, 서쪽의 누상동과 북쪽은 옥인동이 에워싸고 있으며 전형적인 집단 주택지역이다.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누하동에서 옛날의 아름답던 계곡과 바위들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서울을 전형적 주택지임을 동의 초입에서부터 느낄 수가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비를 맞으며 수성동에 와 이런 시를 남겨놓았다. 안평대군(安平大君)집터
신교동 신교동 70번지 신교소방관 파출소와 궁정동 9번지 사이를 연결해주던 새 다리가 있었던 동(洞)이라 하여 이를 한자로 옮긴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이름뿐 복개시설로 인하여 다리의 형체를 볼 수는 없다. 경우궁(景祐宮)과 경복궁(景福宮)사이를 흐르던 냇가의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신교는 「대동지지(大東地志)」와 「수선전도(首善全圖)」에도 표시가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인왕산 아래 백운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동남으로 흘러 자수궁교(慈壽宮橋)와 금청교(禁淸橋)를 지난다」라고만 표기되고 신교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므로『한경지략』이 저술된 1830년부터 「대동지지」가 제작된 1864년 사이에 신교가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중종조의 문인 눌재(訥齋) 박상(朴詳)의 「청송당시(聽松堂詩)」의 「오가는 가교에는 외나무 건너놓였고, 허송하다 심은 버들 일만실이 드리웠네」라는 싯구가 말하는 것처럼, 옛날에 있어서 거의 성시(城市)와 떨어진 느낌조차 있다. 이 유심(幽深)한 지역에 정작 다리다운 이름있는 다리가 가설되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고종조, 이곳에 새 다리가 놓이고 동명도 이 다리의 가칭인 새다리 그대로 부르던 때에, 동리의 구역은 상당히 넓었던 것으로서 지금의 신교동 일원은 물론 청운동, 궁정동, 효자동 등의 지역이 「신교」라는 동 안에 포함되었다.
현재의 신교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은 자하문 길을 경계로 궁정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과 서쪽은 옥인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1959년 2월에 종로소방서 관할 신교소방관 파출소가 설치되어 화재예방과 소방관계 민원사항을 담당하고 있으며, 서울맹학교와 선희학교가 신교동의 약45%를 차지하고 그외 나머지는 주택가로 형성된 서울의 전형적인 북촌(北村)이다. 선희궁지(宣禧宮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
궁정동 1914년 4월 1일 동명 개정에 따라 이전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동, 동곡, 온정동, 신교, 박정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육상궁의 「궁」자와 온정동, 박정동의 「정」자를 따서 궁정동이라 하였다. 궁정동의 동명과 함께 지금도 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육상궁(毓祥宮)의 건물이다. 지금 청와대 서쪽, 바로 북악밑에 자리잡은 육상궁은 처음 영조가 그의 생모인 최씨를 위하여 세웠던 사묘(祠廟)였다.
궁정동을 이룬 자연부락인 동골은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육상궁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동곡(東谷)이라고도 한다. 박우물골은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박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인데 박정동(朴井洞)이라고도 한다. 박우물은 깊이가 그다지 깊지않아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었으므로 바가지우물이라 하던 것이 박우물로 변하였는데 박과 음이 같은 박(朴)으로 바뀌어졌다.
육상골은 육상궁동이라고도 하는데 육상궁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으로 궁정동과 효자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또한 1946년 10원 일부지역에서 임의적으로 동회제도가 실시될 때 궁정동은 신설된 경무동회(景武洞會)에 소속되었는데 이때의 동명은 경복궁 비원에 있는 과장(科場)이며, 열무장소(閱武場所)와 성역(聖域)으로 사용되던 경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현재의 궁정동은 북으로 청운동, 동쪽으로는 세종로, 남쪽은 효자동, 서쪽은 자하문길을 경계로 하여 신교동과 마주보고 있다. 청운동의 관할지역 가운데 가장 작은 면적이지만 비교적 넓은 이면도로가 동의 한 가운데를 종횡으로 지나고 있다. 육상궁(毓祥宮) (사적 제149호) 대은암(大隱岩)터 세심대(洗心臺) 송익필(宋翼弼)탄생지 백악신사(白嶽神祠)터 궁정동의 회화나무 (서울시 보호수 제3호)
청운동 이곳에 원래 있던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의 첫글자를 따온 데서 유래된다. 동명이 유래된 청풍계와 백운동은 도성 북쪽 인왕산과 백악사이 자하문(창의문)고개의 남쪽에 있다. 이곳은 깊숙하고 그윽한 계곡에 맑은 수석이 청풍과 함꼐 항상 백운으로 덮여 있었다. 백운동에는 조선 초기 중추부 이의념(李義念)이 살자 그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성의 서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백운동은 산도 높지 않고 골짜기도 그렇게 깊지 않지만 푸른 송림과 등라덩굴 사이로 맑은 냇물이 소리내어 흐르고 맑은 하늘에는 아침 저녁으로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이 아름다워 주변의 경관과 함께 어우러지므로 옛날부터 많은 문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은거소창(隱居消暢)하던 곳이었다.
그 중에도 지금 청운국민학교 뒤쪽 일대는 임진왜란 후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청절대신(淸節大臣)으로 유명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복거지(卜居地)가 되었던 청풍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 오면 누구든 시 한수를 읊지 않을 수 없게되어 많은 문인들이 청풍계 백운동을 노래하였다.
청운동에는 여러개의 자연부락이 있었다. 123번지의 청운국민학교 앞에 있었던 우물은 크고 수량도 많아 바가지로 푸게 되었으므로 박우물이라 하였고 마을을 박우물골 또는 한자명으로 박정동(朴井洞)이라 불렀으며 청운동과 궁정동에 걸쳐 있었다. 신교(新橋)는 신교동 70번지와 청운동 108번지를 이어주는 다리로 장조(사도세자)의 생모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사당인 선희궁을 만든 후 그 동편에 새로 놓았는데 새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유난동(幽蘭洞)은 경기상업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마을로 바위에 「幽蘭洞」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자핫골은 청운동 일대를 통칭하는 말로 골이 깊고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선경(仙境)에 비하며, 또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창의동(彰義洞)은 청운동 일대를 일컫는데 창의문 안쪽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고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으로 불렀으며 줄여서 장동(壯洞)이라고도 한다. 근처에 김상헌ㆍ상용 형제의 후손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들을 「壯洞金氏」라고도 불렀다.
청운동 일대를 중심으로 서리(胥吏)들의 마을이 있어 상대(上臺) 또는 웃대라 하였다. 경복고등학교(청운동 89 - 1)가 있는 곳은 조선말에 효곡(孝谷) 또는 쌍효자거리, 쌍효자가(雙孝子街)로 불렀는데 오늘날 효자동의 동명이 유래되었다. 조선 순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경기상업고등학교(청운동 89번지)에 있던 청송당(廳松堂)부근은 많은 종류의 꽃이 있었기 때문에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를 정도였고 도성안의 사람들이 봄철 놀이장소로 손꼽던 곳이었다.
현재의 청운동은 동으로 삼청동ㆍ세종로와 남쪽은 궁정동ㆍ신교동ㆍ옥인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과 북쪽은 부암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법정동과 행정동이 일치하는 청운동은 북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동전체의 절반 가량이 임야지대로 되어 있다. 동의 서쪽에는 인왕산길이 중앙의 남북으로는 자하문길과 창의문길이 통과하며 북악산의 중간을 지나는 청운터널이 부암동과 청운동을 이어주므로 교통이 편리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을 이루고 있다. 정철(鄭澈)집터(청운초등학교 정문앞) 조원(趙瑗)집터(경복고등학교 내) 백세청풍(百世淸風) 청송당유지(聽松堂遺址) (경기상업고등학교 내) 청운동의 느티나무 (서울시 보호수 제114호)
쌍홍문雙紅門이란 임천조씨林川趙氏 가문의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가 임진왜란 때 모친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나라에서 내린 두 개의 홍문紅門을 말한다.
홍문이란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며 왕(나라)이 내리는 문으로 형태는 위쪽의 나무판이 붉은색이고 또 대문 전체를 대개 붉게 칠하므로 붙인 이름이다.‘정문旌門’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깃발을 건 문’이라는 뜻으로, 깃발은 충신, 효자, 열녀의 이름과 내린 벼슬 등을 새긴 나무판 로 되어 있다.
『동국여지비고』에서“이 두 사람으로 인해 마을을‘쌍효자 거리’라고 부른다”고 하였듯이 이들로 인하여 오늘날 종로구 효자동이란 지명이 생겼다.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의 구체적인 효행 사실과 이들과 관련된다는 효자동에 대한 유래에 대하여『종로구지(하권)』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효자동의 동명이 유래된 효곡은 조선 선조 때 효자로 이름난 조원의 아들 희정과 희철 형제가 효자동 100번지에 살았으므로 비롯되었다. 이를 표창하는 쌍홍문, 즉 두 개의 정문이 세워져 있어서 효자동 쌍효잣골로 불리었다. 1956년 3월 3일 경복고등학교는 효곡의 내력에 관한 효자유지비(孝子遺址碑)를 교정에 세워 조희정 형제의 효성을 본받아 효를 본받도록 권하고 있다.
조희정과 희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와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피신할 때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두 형제가 잘 받들어 강화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후 얼마되지 않았는데 들이닥친 왜적으로 인하여 그들의 모친이 능멸을 당하려 하자 이를 맨손으로 제지하던 큰아들 희정이 왜적의 칼에 맞아 숨졌다. 곧 이어 작은아들 희철이 달려들어 왜적이 들고 있던 창과 칼을 뺏아 꺾어버린 후 왜적과 싸워 이기고 모친을 죽음 직전에 구하여 산속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굶어가며 초근목피로 봉양을 하였으나 왜적과 싸우다 생긴 상처 부위의 악화와 굶주림으로 죽었다. 주변 사람들은 희정과 희철의 순절에 대해 칭송을 하며 조정에 효자문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들의 갸륵한 효행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운강대 조원의 본가 앞에 쌍홍문을 세웠다. 『종로구지(하권)』, 966-967면
효자동 원래의 자연부락 효곡(孝谷)에서 유래되었다. 효곡은 고종31년 갑오개혁때에도 동명중의 하나로 보이는 것으로서 그 유래가 오래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동명은 원래 이곳에 임천조씨(林川趙氏)의 쌍효자가 나서 유명하였기 때문에 「쌍효잣골」「효잣골」로 불러온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쌍효자란 조원(趙瑗)의 아들 희정(希正)과 희철(希哲) 형제를 말함이며 나라에서 이들에게 내린 정문(旌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이래로 다른 동리들의 일부까지 포함하여 「효자동」으로 불러오게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효에 대한 새로운 일식을 이야기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윤리의 관념이 많이 변천된 오늘에 있어서도 효자동의 동명은 새삼 옛날의 윤리관과 가정미담을 다시금 상기하게도 한다. 효자동을 이룬 자연부락은 효자동과 궁정동에 걸쳐있는 곳에는 더운 우물이 있어서 더운 우물골 혹은 온정동(溫井洞)으로 불렀다. 궁정동(宮井洞)의 육상궁(毓祥宮) 동쪽에 해당되는 효자동 138~145번지일대는 동곡(東谷), 동골이라 하였고, 육상궁 동쪽 동네라는 뜻이다. 동골의 좌측에 있는 동네는 육상궁동, 육상굴이라 하였다.
효자동, 창성동, 통의동에 걸쳐 있는 마을은 장동(壯洞)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창의동(彰義洞)이라 하다가 변해서 장의동(壯義洞)이 되고 다시 장동으로 줄여서 불렀는데 지금의 효자로를 따라 서쪽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다. 효자동과 창성동에 걸쳐있는 마을은 흰갯골 혹은 백구동(白拘洞)으로 불렀는데 경복궁 가까이에 있던 이 동네에서는 흰털을 가진 개를 많이 길렀기 때문이다.
현재의 효자동은 동쪽으로 효자로를 사이에 두고 세종로의 경복궁과 접하고 북쪽으로 궁정동과 인접하고 서쪽은 옥인동과 남으로는 창성동과 이웃하고 있으며, 종로구의 북부지역에 위지해 있다.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효자동은 조선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러 번성했던 곳이며 일제 때에도 비교적 한국인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다. 지금의 주택가도 일제 초에 대부분 구획정리된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전차노선이 효자로에 개설되면서부터 1968년 전차궤도가 철거되기까지, 서민, 학생들이 세검정계곡의 맑은물과 능금, 자두 등의 꽃구경 또는 과일을 맛보기 위해 효자동 종점에서 내려서 걸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효자동을 통과하였다. 한때 효자로는 한적한 길이었으나 1993년 2월 25일 청와대주변 개방이후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 길을 이용하고 있다. 쌍홍문(雙紅門)터 환관(宦官)집단거주지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204028013
일제감정기인 1936년 서울 종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뜻을 같이한 이들의 집필활동이 학자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평가한다. 젊음의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론하던 보안여관은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투숙하는 공간이었다. 현재 80여년동안 투숙객들의 '머뭄'과 '떠남'의 공간이던 <통의동 보안여관>은 이제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우리시대의 담론이 생산되고 새로운 문화예술이 투숙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종로구 통의동에 가면 낡은 여관 하나가 보인다. 보안여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여관은 1930년대부터 2006년까지 80년 넘게 숙박시설로 운영된, 현존하는 것으로는 한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관일 것이다. 그러나 보안여관에는 단순한 숙박시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이던 1936년, 시인 서정주는 그의 나이 22살에 경복궁 근처 허름한 여관이던 이곳에 짐을 풀었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같은 시인과 화가 이중섭 등 문학청년들이 모여들면서 이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생겼다. 서정주는 여기서 만난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서정주의 책 <예술언어>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중략) 시인부락이라는 시인 동인지를 꾸며내게 된다." 훗날 학자들이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평가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젊은이의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 등을 토론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신문사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작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전에 장기 투숙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 보안여관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주고객층의 변화를 목도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이 머물거나 경호원 가족의 면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 이 때문에 지금도 보안여관을 ‘청와대 기숙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80년을 버텨오던 여관은 2006년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만다. 그 후 매각되어 건물이 헐릴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여관을 인수한 일맥문화재단이 건물 외벽은 그대로 살리고 내부는 실험적이고 기발한 예술인들의 작품으로 채워나가기로 결정하면서 보안여관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여관방은 갤러리로 변신했고, 1층에는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라는 문화프로젝트 숍이 들어섰다.
보안여관에 들어가보고 옛 여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놀랐다.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흰색 바탕의 파란 글자를 보고 있으면 이곳만 세월이 멈춘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숙박요금 8천원이란 글씨와 거울에 새겨진 ‘일상의 다섯 가지 고마움’이라는 옛글도 그대로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삐걱거리고 방구석마다 거미줄이 매달려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은 보안여관을 가장 기묘하고 매력적인 21세기적인 전시공간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 전시된 작품에 후광이 되어주고 있다. 갤러리(http://cafe.naver.com/boaninn/)에서는 매달 참신한 주제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그 옛날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수많은 얘기를 남겼고, 시인 이상은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이라고 표현했던 통의동. 그리고 통의동의 보안여관. 80년간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며 시대의 온갖 풍파 속에서 문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고, 그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삶의 애환과 기쁨, 희망을 품고 이제 새로이 갤러리로 변신했다. 보안여관이 앞으로도 그 자리에 계속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관의 이름에 왜 '보안'이 붙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풍문으로는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보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보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효자로 청와대 방면으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http://blog.daum.net/ddakkiyang/1364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윤동주하숙집터
윤동주(1917~1945)는 일제감정기에 짧게 살다간 청년 시인으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시대적 현실을 투시하고 고민한 시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시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는 21세가 되던 1938년 4월에 연희 전문학교에 재학시 1941년 인왕산 밑 누상동 9번지에서 일생 중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이곳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시인으로서 가장 처절하게 번민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치려는 「십자가」라는 사명시를 쓴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누상동 시절은 한국문인 다수가 두려움에 떨며 변절하고 혹은 침묵하고 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저항정신을 아름다운 서정성과 탁월한 기법으로 써나가며 절정의 명시를 남긴 가장 소중한 창작 시절로 기억되야 할 것이다. 이 때 쓴 작품이「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돌아오는 밤」, 「서시」등이다. 현재 당시 하숙집은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 있다.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운공원에는 윤동주를 기리는 '시인의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시인의 언덕 아래에는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든 '윤동주 문학관'이 지난달 25일 문을 열었다. 윤동주와 청운동의 인연은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교 시절, 그는 학교 후배였던 정병욱과 함께 종로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 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하기 전 집 뒤편의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삼아 오르곤 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쉽게 씨워진 시(詩)'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완성됐다. 입구로 들어서면 정지용 시인이 윤동주의 유고시집 출간을 기념해 쓴 서문을 만날 수 있다. 1948년 31편의 시를 모아 간행된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글이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83110454933114
문학관 뒤편에 위치한 '시인의 언덕'에 올라보자. 산길 굴곡을 타고 조금만 오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다다른다.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면 멀리 북악산을 감상할 수 있고, 곳곳에 '서시', '슬픈 족속(族屬)'등 윤동주의 시를 새긴 시비(詩碑)도 만날 수 있다. '시인의 언덕'은 문학관이 개관하기 이전인 2009년에 조성됐다. 이후 2012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수도가압장을 개조해 '윤동주 문학관'이 탄생한 것이다.
1974년부터 2008년까지 사용하다 용도 폐기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레노베이션한 건물이다. 가압장은 느려지는 물살에 압력을 가해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도와주는 곳. 윤동주의 시가 우리 영혼을 자극해 다시 세차게 흐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적이다. 윤동주문학관을 설계한 건축가 이소진씨는 원래 있던 건물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하얗게 칠한 단정한 건물은 윤동주의 순백 영혼, 윤동주가 〈슬픈 족속〉에서 우리 민족의 색으로 노래한 흰색을 떠올리게 한다.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은 원래 설계에는 없던 공간이다. 공사현장에서 발견한, 언덕 밑에 쌍둥이처럼 나란히 파묻혀 있던 콘크리트 물탱크를 건축가는 놓치지 않았다. 바닥 면적은 55㎡로 좁은데, 높이는 5m에 이르는 물탱크 중 하나는 닫혀 있는 그대로 두고, 한 공간은 지붕을 뜯어냈다. 지붕을 뚫고 바닥에는 풀을 심고 잔돌을 깔아놓은 물탱크는 깊은 우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네모 프레임으로 파아란 하늘과 팥배나무,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이 올려다보이는 우물. 밤이면 달과 별이 프레임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오랜 세월 물을 저장하면서 생긴 자국 역시 우리를 의식 저 아래 깊은 바닥으로 인도하는 듯하다.
‘닫힌 우물’에서는 물탱크로 쓰던 시절 작업자들이 드나들던 입구가 창문으로 바뀌면서 바깥의 빛을 깊숙이 받아들이는 장치가 됐다. 원래 있던 형태 그대로를 윤동주의 시세계를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세월이 더께더께 만들어놓은 흔적은 신축 건물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안긴다.
제1전시실 9개의 전시대에는 시인이 태어나서 사망하기까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사진자료와 친필원고 영인본 등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문학관을 나설 때면 민족의 슬픈 운명 때문에 아파했던, 누구보다 순수하고 섬세했던 식민지 청년의 고뇌가 가슴으로 파고들어 먹먹해진다. 〈자화상〉부터 〈서시〉 〈별 헤는 밤〉 〈참회록〉 〈슬픈 족속〉 〈새로운 길〉 〈쉽게 쓰여진 시〉 〈십자가〉 등 윤동주의 시세계가 압축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제1전시실 중앙에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있던 우물의 나무널판이 놓여 있다. 우물에서 동북쪽 언덕에 있는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한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목사가 명동촌에 세운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는 민족교육과 독립운동가 양성의 온상이었고, 윤동주 역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세례를 받았다
제2전시실은 ‘열린 우물’, 제3전시실은 ‘닫힌 우물’이다. 2전시실의 문을 열고 위를 올려다보자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거기 있었다. 깊디깊은 우물의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 5m에 달하는 수직 벽에는 세월이 퇴적해놓은 흔적이 추상화처럼 남아 있다.
다시 3전시실의 문을 열자 윤동주가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감옥을 연상시키듯, 깜깜한 어둠이다. 문을 닫고 들어서자 윤동주의 생애와 관련된 영상이 정면 벽에 비추어진다. 모자에 생긴 작은 주름조차 참지 못했던 섬세한 청년 윤동주. 영혼의 구김을 견딜 수 없었던 그 청년은 어떻게 야만의 시대를 건넜을까, 가슴이 아프다.
짧은 영상이 끝나면 천장의 작은 틈새로 한줄기 햇빛이 들어오고, 벽에 사다리가 놓였던 흔적이 나타난다. 천상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1전시실에 놓여 있는 친필원고의 섬세하면서 단정한 필체, 그가 즐겨 읽었던 책들과 함께 윤동주란 인간을 입체적으로 경험한 느낌이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문우(文友) 정병욱과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정병욱과 함께 인왕산 자락을 걷곤 했던 윤동주는 그 시절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쓰여진 시〉 등 주옥같은 시들을 썼다. 종로구는 윤동주가 걸었을 인왕산 자락에 2009년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조성하고, 올해 청운공원 입구에 ‘윤동주문학관’ 문을 열었다.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중국의 군인으로도 있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 3·1 만세 운동에 참여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영어 학원의 강사와 아편 장수로도 활동했다.
1940 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로 입각하고, 1945년 2월에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를 조직했다. 1945년 12월 귀국 후 정치공작대를 조직하였으며 독립촉성국민회,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 2대, 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건국 초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여 친이승만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활동했으나, 이승만의 전제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껴 탈당,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다.
1954년 김성수, 조병옥, 윤보선, 장면, 박순천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와 민주당 창당에도 참여하였으며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선거 유세중 열차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교육 계몽에 뜻을 두어 대학 설립운동을 추진했으며,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 학장을 지냈다.
본관은 평산으로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해후(海候).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2] 또는 왕해공(王海公), 왕방우(王邦牛)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국민대학교 창립 야당 대통령 후보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사적 제149호이다.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淑嬪廟)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 승격하여 육상궁으로 고쳤다. 육상궁 건물 등은 종묘(宗廟)와 더불어 조선시대 묘사제도(廟祠制度)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숙빈 최씨는 현종 11년(1670) 11월 6일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출생, 숙종의 후궁이 되어 영조를 출산하였다.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로 별세하자, 무덤을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모시고 묘호(墓號)를 소령원(사적 제358호)이라 하였다.
육상궁을 칠궁(七宮)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육상궁을 비롯한 5채의 사당에 조선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궁으로 육상궁 건물에 숙빈 최씨와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왕인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궁(神宮)이다.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궁이다. 선희궁은 역시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된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신궁이고,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궁이며, 이들 두 신위는 한 건물에 모셔져 있다. 덕안궁은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의 신위를 모신 신궁이다.
육상궁 건물은 고종 19년(1882) 화재가 발생하여 불타버린 것을 그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이며 연호궁의 신위를 같이 모시고 있다. 육상궁 앞에는 동서각(東西閣)과 배각(拜閣)을 두고 나즈막한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왼쪽으로 네 채의 사당이 앞뒤로 각기 독립하여 서로 접하여 서 있다. 이들 건물 앞쪽에 재실(齋室)과 정문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남북축에 맞춘 2채의 재실이 있고, 그 뒤로는 동쪽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연호궁ㆍ육상궁ㆍ덕안궁ㆍ경우궁ㆍ선희궁ㆍ대빈궁ㆍ저경궁이 각각 대략 남쪽을 향하고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 있는 냉천과 냉천정(冷泉亭), 그리고 주변의 뜰은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전통적인 한국정원의 일면을 보여주며 주위 담장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며 경복궁 권역이 축소되어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던 중 1968년 1월의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34년간 일반인의 관람이 금지되어 오다가, 2001년 11월말부터 부분적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대한민국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사적 제149호로 등록되어 있다.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나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영조가 후궁 출신인 모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역대 왕 또는 왕으로 추존되는 분의 생모인 후궁의 묘를 옮겨와 합사하게 된 것으로 원래는 1724년(영조 원년)에 지은 육상궁만 있던 터였으나 1908년(순종 2년)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이 되었다. 칠궁 합사는 봉사된 법모와 아울러 사친, 즉 생모에 대한 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저경궁 (儲慶宮) 대빈궁 (大嬪宮) 육상궁 (毓祥宮) 연호궁 (延祜宮) 선희궁 (宣禧宮) 경우궁 (景祐宮) 덕안궁 (德安宮)
선희궁 터 (宣禧宮 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
사도세자 생모 영빈이씨 祠廟, 선희궁 터는 조선 제21대 영조(1724∼1776 재위)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 李氏, ?∼1764)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사묘(祠廟)인 선희궁(宣禧宮)이 있던 곳이다. 사묘라는 것은 조선시대 정실(正室)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 태어난 임금이 그의 모친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영빈 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영조 6년(1730) 영빈(暎嬪)에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아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영조 11년(1735) 왕자(뒤의 사도세자)를 출산하여 후사(後嗣)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가 폐위 당하고 죽는 와중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영조 40년(1764)에 죽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禮)로 장례하게 하였고, 다음해 7월에 시호(諡號)를 의열(義烈)이라 추존하였다. 아울러 북부 순화방(현재 신교동)에 묘를 세우고 묘호를 의열묘(義烈廟)라 하였으며, 정조 12년(1788)에 선희(宣禧)라 고쳤다. 그 이후 선희궁이란 명칭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묘(廟)를 궁(宮)으로도 승격하여 호칭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선희궁은 계속 존속되다가 고종 7년(1870)에 일시 육상궁(毓祥宮)에 옮겨 모시다가, 건양(建陽) 2년(1897) 육상궁으로부터 다시 옛 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 절차는 궁내부(宮內府)에서 택일 거행케 하였는데, 고종은 선희궁 이건시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 전관검사과장(專管檢査課長) 이인유(李寅裕)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라고 독촉하는 조서를 내렸으며, 동 6월 25일에 환안제(還安祭)는 궁내부 대신을 보내어 거행하게 하였다.
광무 3년(1899)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과 동시에 궁내에 평락정(平樂亭)을 짓고 정조·순조·익조·헌종·철종의 어진(御眞)을 옮겨 모시고, 또 영빈의 시호를 소유(昭裕), 원호(園號)를 수경(綏慶)으로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융희 2년(1908)에는 다시 신위를 육상궁으로 옮기고, 평락정에 봉안하였던 어진은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겨 안치하였다.
선희궁 터는 현재 신교동 맹아학교가 있다. 그리고 영빈 이씨의 원(園 :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의 무덤이나 후궁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자를 낳은 사람의 무덤)은 원래 연세대학교 경내에 있었으나, 1970년 9월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되었고, 옛 수경원터가 있던 연세대학교 자리에는 홍살문과 제각 건물이 남아 있다.
청와대 사랑채의 전신인 ‘효자동 사랑방’은 본래 대통령 비서실장의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 개방과 함께 국민들에게 편의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맞은편 옛 효자동 사랑방을 재단장한 청와대 사랑채는 연면적 4,116.98r㎡ 지상 2층, 지하 1층에 다양한 전시실과 체험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국가홍보관, 하이서울홍보관 등이 자리잡고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관, 국정홍보관, G20휴게관 등이 있다.
‘국가홍보관’은 대한민국 소개를 시작으로 역사와 위인, 문화 유산과 현재 세계 속에서 맹활약하는 국민소개를 비롯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화폐 속 인물 등을 소개해 ‘작지만 강하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품격 나라’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하이서울관’에는 서울의 사적, 랜드마크와 음식, 전통 및 현대문화, 쇼핑 등 다양한 관광적 요소를 통해 ‘아시아 최고의 매력적인 도시’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2층에 위치한 ‘대통령관’에는 건국과 함께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60년 역사와 국빈에게 받는 선물과 방명록 등을 소개해 시민들의 대통령 국정 철학과 현 국정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대통령관에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재현한 곳이 있어 방문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또한 ‘국정홍보관’과 G20정상회의장의 모습을 재현한 ‘G20휴게관’도 둘러 볼만하다.
청와대 사랑채 전시홍보관은 각 전시실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단순 관람이 아니라 체험과 공감이 가능한 장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2층 대통령관 집무실체험 옆에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영상촬영기법인 크로마키(블루스크린)기법을 활용한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마련된 포토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으면 대통령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합성 돼 함께 찍은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 터에 마련된 시민휴식공원이다. 본래 이곳은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었으나 1993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뒤 시민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태극무늬로 무궁화를 심었으며, 중앙에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자 분수대가 놓여 있다. 주변에 자연석으로 성곽을 만들고 240m의 산책로 주위에는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화단에는 전국 각지의 야생화 7,700그루를 심었으며, 무궁화와 소나무·느티나무 등 수목 13종 1,500여 그루를 심어 놓았다. 군데군데 벤치가 있어 인근 주민들의 휴식터로도 이용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 당한 곳.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청와대를 국민과 더불어 함께하는 곳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조성하였다. 청와대 영빈관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옛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부속 건물, 속칭 안가安家를 헐고 조성하여 지역 주민 및 관광객들을 위한 공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옛 안가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1979년 10월 26일)된 장소이기도 하며 역사와 권력의 영욕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창의문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12-1번지(자하문길)에서 부암동 274-1번지(자하문길)에 이르는 길로 길이 1.65㎞, 너비 15∼24m, 왕복 2차선이다. 서울성곽 4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 공고 제673호로 효자동 방면의 도로와 자하문 방면의 도로가 나뉨에 따라 창의문길로 개칭되었다.
1936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따라 조선총독부고시 제722호로 계획가로망을 발표할 때 궁정동~북문(창의문)~부암동까지의 폭 12m, 길이 1,580m를 제정하여 궁정동길, 부암동길로 불려지다가 1966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고시 1093호로 효자로(孝子路)로 이름을 붙였다.
이때는 세종로 1번지(중앙청, 현 경복궁)에서 홍지동 94번지(세검정삼거리)에 이르는 폭 15m, 길이 3,400m였다. 1984년 11월 7일 서울특별시 공고 제673호로 가로의 연계성과 노폭이 다른 점을 감안하여 칠궁(육상궁)을 기준으로 효자동 방면과 자하문 방면을 구분하여 종래의 효자로는 효자로와 자하문길로 나뉘었는데 이때 붙여진 자하문길이 창의문길로 개칭되었다.
현재 자하문길은 적선동 107-1번지(사직로)에서 홍지동 122-2번지(세검정삼거리)에 이르는 길을 지칭한다. 2010년 7월 2일 도로명 주소 사업으로 인해 창의문로로 이름이 붙여졌다.
서울의 4대문 사이에 있는 4개의 소문 중 하나로 그중 서북쪽 문이다. 그 때에는 이 곳이 양주와 북한으로 가는 길과 이어져 있었다. 이 곳은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지어졌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닫혔다. 이곳에는 인조반정때 공신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워지게 된다. 창의문은 4소문 중 가장 원 모습을 잘 유지한 문이다. 인근에 서울성곽과 하림각, 자하문터널이 있다.
개성의 경치 좋다는 곳 자하동을 본따 자하문이라 불렀다는 창의문은 인왕산 자락 청계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문밖에 펼쳐져 세검정과 함께 풍류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1396년(태조 5년) 창건된 소문(小門)으로 평양과 의주, 양주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때문에 1416년(태종 16년) 왕명으로 대문을 걸어 잠궈 봉쇄시키고 일반 행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다. '문을 열어놓으면 왕기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사들의 주장에 따라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후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얘기다. 성문 밖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성문을 넘어 궁궐로 살기를 뿜어내져 이를 막아야 한다는 어이없는 주장 때문이었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해 다시 개방하였다. 자하문 모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사천(沙川)이라 불리던 냇가는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삼각산과 백악산 사이를 흐르는 개울로 장마에 깍여 내려오는 모래가 많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모래내(沙川)라고 불렀다.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인조반정이 있던 광해군 14년(1623)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통해 창덕궁을 장악해 인조정권을 만들어 냈다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홍예를 빠져 나와 문루를 올려다보면 창의문(彰義門)이란 편액이 지금도 선명하다. 도성 8개 문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문이기에 큰 손상 없이 깨끗하기 때문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창의문에 깃든 ‘광해’의 역사
“창의문 바깥 쪽 지형이 지네 형상을 갖고 있어 지금도 그 쪽을 ‘지네골’이라고 부른다”며 “과거에는 지네의 독기(毒氣)가 창의문을 통하는 것이 궁궐과 왕조에 나쁜 기운을 준다고 해서 지네의 천적 격인 닭, 봉황을 그려 넣은 것” 이다. “서인 세력이 광해군의 패륜행위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고, 군을 동원해 바로 이곳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달려갔다고 한다”며 창의문에 얽힌 역사적 사건을 설명했다.
창의문은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는 1·21사태와도 연관이 있다. 파주 파평산을 시작으로 우이령, 북악산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세검정고개까지 접근한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은 바로 ‘창의문’을 통해 청와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경찰 검문 중 총격전을 벌이다 29명은 죽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인 김신조 만이 유일하게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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