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옛 도시 종로의 코스를 걷다.
문화양념통
문학 예술인들의 생가와 기념비적인 장소 관광 코스, 일제 강점기 민족의 고통을 문학으로 달래준 윤동주 시인의 뜻을 기리는 길 걷기로 조선시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북촌이 사대부 집권 세력과 부호들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 층이 함께 살아온 곳이다.
문화 체험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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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사 마당 → 한용운 가옥(만해당) → 보안여관(시인마을)
→ 세종대왕 생가 터 → 이상 옛집 터 → 윤동주 하숙집 터
→ 송강 정철 생가 터 → 현진건 생가 터 →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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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인사 마당 (인사동)
인사동의 시발점으로, 각종 공연이 이곳에서 열리고, 봄·가을에는 전통 혼례 행사와 신청을 하시면 직접 혼례 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예요. 계절마다 각종 행사도 열리고 공연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다.
2. 한용운 가옥 (만해당, 현, 한옥체험 게스트 하우스)
현재는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며, 성북동에는 말년까지 지낸 심우장 (尋牛莊)이 있다.
3. 시인마을 보안여관 (갤러리)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들과 함께, ‘시인부락’이라는 한 시의 동인지를 꾸며내게 되었다.” 미당 서정주의 문학인생을 기록한 ‘서정주 문학전집’ 3권 ‘천지유정’의 한 대목이다. 75년 전 문학청년이 ‘기거하던’ 그 여관이 지금의 이곳이다. 1936년 서울 종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시인부락을 만듦, 새로운 문화예술이 투숙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모
4. 세종대왕 생가 터 (세종마을)
서울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 세종대왕 생가복원 사업추진 준비 중, 세종대왕은 태조 6년인 1397년 4월10일(음력) 서울 경복궁 서편의 정안군(태종)의 잠저( 潛邸)였던 준수방(俊秀坊)에서 태어났다. 잠저는 왕세자와 같이 정상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5. 이상 집 터 (현, 이상의 집)
통인동 154-10번지는 이상이 3살 때부터 23살까지 살았던 백부 김연필의 집터 중 일부로 ’이상의 집’이란 이름의 기념관 건립 됨, 재단법인 아름지기 홈페이지와 프로젝트 블로그 ’다방’에서 확인, 통인동 154의10번지, 일제강점기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이 젊은 시절을 보낸 집터, 이상이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현재 이곳에는 70m²의 오래된 한옥(1940년대 건축 추정)이 있다. 2009년 7월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이 건물을 매입해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통인동 154-10번지는 이상이 3살 때부터 23살까지 살았던 백부 김연필의 집터 중 일부로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아름지기'는 이곳에 새로운 형식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방, 작업실, 공연장 등으로 꾸밀 계획이다.
6. 윤동주 하숙집 터 (현, 개인집)
윤동주는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아끼던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하숙했다. 이곳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기도 한데, 윤동주가 기숙사에서 나와 누상동 하숙집으로 옮긴 것은 태평양전쟁 시작 후 다니던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지면서 였다. 1938년 4월에 연희 전문학교에 재학시 1941년 인왕산 밑 누상동 9번지, 이 때 쓴 작품이「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돌아오는 밤」, 「서시」등이다. 현재 당시 하숙집은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 있다.
7. 정철 생가 터 및 시비 (현, 청운초등학교)
서울 장의동(청운동)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정치가인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현재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정철 선생 나신 곳' 표지석이 있고 그의 대표작 사미인곡 성산별곡과 관동별곡 등의 시비가 있다.
8. 현진건 생가 터
이 공터는 『빈처』, 『운수 좋은 날』 등의 작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집터이다. 공터 뒤 언덕의 집 안에 위치하고 있다. 대문을 열고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편에 바위가 있는데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계동(武溪洞)’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가로로 새겨져 있어 이곳이 무계정사가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무계정사터는 사유지로 출입을 하기 위해서는 소유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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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체험 이야기
인왕산서 몽유도원도 속 풍경 발견한 안평대군, 무계정사 지었는데…
경복궁 서쪽 마을을 일컫는 서촌(西村). 고관대작부터 중인, 아전까지 서로 다른 신분층이 모여 살던 인왕산 자락 동네입니다. 사대부 중심의 북촌, 중인 중심의 남촌과는 다른 독특한 생활문화를 형성한 서촌은 조선시대 경치 일번지, 문학 일번지, 그림 일번지였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강홍빈)이 최근 발간한 2010 생활문화자료조사집 『서촌-역사 경관 도시조직의 변화』에서 소개한 서촌의 내력을 간추립니다.
인왕산 왕기설
서촌은 오늘날의 사직동·체부동·필운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효자동·신교동·창성동·통인동·통의동·청운동·부암동 등에 해당한다. 서촌의 역사가 시작된 건 조선의 개국과 함께한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주산은 백악이다. 백악의 우백호인 서쪽 인왕산은 높고 우람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는 논의도 있었다. 차천로(1556~1615)는 『오산설림(五山說林)』에서 “무학이 점을 쳐서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옛날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자 무학이 ‘지금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라고 적었다. 전설처럼 민중 사이에 오래도록 전해온 인왕산 왕기설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퍼졌다. 광해군 대에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과 인경궁을 세운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살았던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가 됐다. 세종이나 영조의 탄생지도 서촌에 있었다. 인왕산은 경치도 좋고 경복궁에서도 가까운 주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명승지임에 비해 이름난 정자는 많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임금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놀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
안견, 몽유도원도, 1477년, 비단에 먹과 채색, 그림(38.7×106.2㎝) 부분, 일본 덴리대 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는 그림 부분과 발문을 포함해 두 개의 두루마리(각 11.2m, 8.57m 길이)로 돼 있다. 안평대군·신숙주·정인지 등 세종시대 22명이 각각 친필로 쓴 글 23편은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정선, 독서여가, 1740년, 비단에 채색, 24×16.8㎝, 간송미술관 소장.
1447년 4월 20일 밤 안평대군(1418~53)이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오는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것이 일본 덴리대 소장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 이듬해 꿈에서 본 무릉도원과 비슷한 풍경을 인왕산 기슭에서 발견해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었다. 안평대군은 무계정사에 당대의 문인 학자들을 초청해 경치를 즐기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며 아뢴 죄목 중 첫 번째가 그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인왕산이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라 왕권 탈취의 의도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외에도 김종서·이개·성삼문·신숙주·정인지·서거정 등 당대 최고 문신 21명이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들의 운명은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다. 성삼문·이개·박팽년 등 사육신은 3년 뒤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 실패해 역적으로 처형당했다. 부암동에는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새겨진 바위가 남아 있어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 터임을 나타내고 있다. 안평대군의 옛 살림집 근처에 있었던 ‘기린교’로 추정되는 돌다리가 지금은 철거된 옥인동 옥인아파트 9동 옆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인왕제색도’vs‘인왕산도’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종이에 수묵, 79.2×138.2㎝, 호암미술관 소장.
문인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18세기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창출한 인물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 중 웃대(서촌)를 그린 그림은 60대 이후 체득한 완숙한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예술성이 뛰어나다. 인왕산 주봉 전체를 화폭에 옮긴 그림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1738~84 이전)의 ‘인왕산도’가 있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인 1751년(영조 27)에 그린 노년기 역작이다. 사실적인 재현에 기초하면서도 내면의 심상을 투영한 그림으로 평가된다. 가령 백옥색을 띤 인왕산 바위는 검은 먹색으로 반전시켜 장중한 무게감을 줬다. 인왕산 기슭에 폭포를 두 군데 그린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인왕산에는 멀리서 보일 정도의 폭포는 없다. 청풍계 계곡과 수성동 쪽으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를 원경인 그림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강희언의 ‘인왕산도’는 객관적인 시각에 충실한 그림이다. 인왕산 골짜기를 자세히 파악해 가옥과 지형의 특징을 표현했고, 도성의 성벽과 능선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희언은 특이하게도 여느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겨두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채색했다. 하늘의 기상을 관측하는 관상감 관원이었던 그는 하늘도 그려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왕 국도팔영
정조(1752~1800)는 서촌 지역에 자주 행차했다. 사당인 육상궁(증조모), 선희궁(할머니), 연우궁(할머니)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참배를 마치면 선희궁 옆에 있던 세심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세심대는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열양세시기』에 “(세심대는) 꽃나무가 많아 봄의 꽃구경이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동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고 적혀 있다. 세심대는 원래 당진현감을 지낸 이정민(1556~1638)의 집터였으나 도성에서 경치 좋기로 유명해 광해군이 세심대를 취하고 대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정민은 이를 피해 홍주 봉서산으로 낙향했다고 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 ‘국도팔영(國都八詠)’을 지었는데, 인왕산에 자주 오르던 때라 주변 명승을 많이 꼽았다. 8곳의 명승 중 필운대·청풍계·반송지·세검정 등 인왕산 자락 서촌의 명승지 네 곳이 포함됐다.
이상(1910~37)의 집
이상은 3세 되던 1912년 형편이 넉넉하던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상은 백부의 집인 통인동 154번지에 23세까지 살았다. 짧았던 생애 대부분을 보낸 곳이지만 통인동이 작품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경성의 모던보이로 유곽이나 카페에 대한 글을 썼던 그에게 전형적인 주택가인 서촌이 작품에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집은 백부가 세상을 떠난 1933년 팔린 뒤 헐려 자취가 없어졌다. 그러나 2007년 문화유산 보전 단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사들여 이상 기념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윤동주(1917~45)의 하숙집
서촌으로 이사온 까닭은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식사가 부실해져서다. 그는 졸업반이던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누상동 하숙집에 살며 ‘십자가’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등 작품을 지었다. 윤동주의 하숙집은 10년 전 헐렸고 그 자리에 3층짜리 다가구주택이 들어섰다.
사적 제149호로 지정된 ‘육상궁과 칠궁’
조선조 500여 년간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 7명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고종 19년(1882) 불타버린 것을 이듬해 복구했다. 순종 1년(1908년) 이후 여러 곳에 분산돼 있던 여러 신위를 옮겨와 결국 칠궁이 됐다. 저경궁(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신궁), 대빈궁(숙종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 신궁), 연호궁(영조 후궁이며 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 신궁), 선희궁(영조 후궁이며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 신궁), 경우궁(정조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신궁), 덕안궁(고종 후궁이며 영친왕 생모인 순헌황귀비 신궁)이 모셔져 있다.
등록문화재 93호인 배화여고 생활관
당초 선교사를 위한 주택으로 지어졌다. 1915년 무렵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맨 아래층이 반지하로 되어 있어 현관으로 들어서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전체적인 외관은 서양식 붉은 벽돌벽과 서양식 기둥을 사용했지만, 한옥의 기와지붕을 올려 서양식과 한국식 건축이 섞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문화재자료 9호로 지정된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집터
‘필운대(弼雲臺)’라는 바위 글씨로 남아 있다. 배화여자 중고교 교사 별관 뒤편 높은 암벽의 왼쪽에 세로로 새겨진 글씨다. 이항복의 글씨라고도 하고, 그 후손인 이유원(1814~88)의 글씨라 전하기도 한다. 필운은 이항복의 호로 서산(西山), 즉 인왕산을 뜻한다.
박노수 가옥(문화재자료 1호)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인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한국 최초의 건축가 박길룡이 1930년대 후반 설계했다. 조선 말기 한옥 양식과 중국식, 서양식 수법이 섞여 있는 절충식 가옥이다.
동양화가 이상범 가옥(등록문화재 171호)
홍종문 가옥(서울시 민속자료 29호)
해공 신익희 가옥(시도기념물 23호)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전통한옥이 밀집되어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 주거지역이다. 그리고 많은 사적들과 문화재, 민속자료가 있어 도심 속의 거리 박물관이라 불리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 '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곳은, 이름도 정겨운 가회동과 송현동, 안국동 그리고 삼청동이 있다. 사간동, 계동과 소격동 그리고 재동에는 역사의 흔적이 동네이름으로 남아 수백년을 지켜온 곳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한옥은 1930년도를 전후하여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한옥형식의 변화는 도심으로 밀려드는 인구들로 인해 고밀도화 되어가는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유적과 문화재들은 이 지역을 찾는 이들에게 이 지역의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북촌지역의 가장 큰 특성은 지형과 물길이라 할 수 있다. 북촌의 지형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 네 곳의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물길은 계곡을 따라 흐르며 길들은 물길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길의 형태는 물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북촌의 주요 남북가로를 이루고 있는 삼청동길, 가회로, 계동길, 원서동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양의 중심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잡고 있고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의 남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북촌은 예로부터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자리매김 해왔다. 1906년 호적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인구 10,241명(1,932호) 중 호주의 신분에 따른 구분에서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고 있어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 양반들의 주택들과 관료들의 집들이 중심을 이루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로서의 북촌의 위상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이어져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들과 민대식(민영휘의 아들) 등 여흥민씨 세력들이 북촌에 많이 거주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혜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http://www.insainfo.or.kr/map.html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6&contents_id=1921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법정동의 하나이다. 주요 거리는 조선시대 형성된 길이 0.7㎞의, 너비 12m의 인사동길이 있으며, 서울의 주요 도심로와 연결돼 있고, 청계천, 경복궁 등 주요 관광명소와도 가깝다. 인사동은 조선왕조(1392-1910) 때부터 근 600년 동안 서울의 심장부에 있다. 이곳은 또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의 아리랑종합지원센터가 건립될 예정이다. 인사동은 인사동네거리를 지나 안국동 로터리로부터 종로2가의 탑골공원까지의 구역을 말한다. 인사동은 외국인에게 인기있는 쇼핑 명소이자 매리의 골목(Mary's Alley)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골동품상점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격은 주로 10,000원부터 수백만 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거의 모든 상점은 오래된 책이나 사진, 서예, 기념품, 사진, 도자기, 목제품, 보석 등을 판매한다. 도자기들은 신라시대 질그릇부터 조선시대 백자까지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인사동 물품들의 90%가 중국산이라는 통계가 있다. 인사동은 일본, 중국, 프랑스, 미국 등 많은 외국에서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특히, 봄과 가을에 인사동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숫자가 절정을 이룬다.
지금의 인사동 거리는 종로 2가에서부터 인사동을 지나 관훈동 북쪽의 안국동 사거리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옛날의 인사동 길은 관훈동까지 올라가지 않고 종로 길에서 인사동 네거리 즉 태화관길과 만나는 곳까지였다. 옛날의 이 거리에는 고미술품과 고서적을 취급하는 상인과 화랑은 없었고 유명한 가구점과 병원 그리고 규모가 큰 전통 한옥이 많았다고 한다. 인사동의 명칭은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 방(坊)이라 함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일컫는 것이다)과 대사동(大寺洞)에서 가운데 글자인 인(仁)과 사(寺)를 따서 부른 것이라 한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冊祿)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풍기문란 등을 단속하던 이문(里門)이란 관청이 있었다. 또한, 인사동지역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시대를 달리해 거주했었다.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율곡, 효종때의 이완장군의 집터가 있으며 중종시절 왕도정치를 주장했던 유학자 조광조의 집이 관훈동에 자리잡고 있었다.
인사동의 가장 기념할 만한 역사적인 사건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항거한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시작지라는 점이다. 근래에 와서는 신구(新舊)작가들의 저마다 독특한 작품들을 언제나 선보이는 화랑들, 한집 건너 마주치게 되는 필방들, 희귀한 고서적들,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옛스럽고 소박한 민속공예품들, 그윽한 다향(茶香)과 가야금의 청아한 선율이 흘러나오는 전통찻집, 구수한 된장국과 농익은 동동주의 주점들로 가득 차 있다.
이완장군 집터 (현, 종로구청)
독립선언 유적지 (현 태화빌딩, 이완용 집터, 구, 태화관 터)
박영효 대감댁의 터(현 경인미술관)
승동교회(삼일운동기념비)
중앙교회
구 조선일보 사옥(현 농협건물)
서울 중심점 표석 인사동 194 (건양원년(1896) )
민씨댁, 1,2.
이율곡선생 집터 관훈동 197
민가다헌
조선 세종(世宗, 1397년 4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조선 태종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형 이제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며,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종대왕 기념관
세종대왕 탄신 600돌 기념
「세종대왕 - 제1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1.26. 방영
「세종대왕 - 제2부 소리가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02.02. 방영
조선 세종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시인 겸 독립 운동가로 일제 때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등이 있다.
만해당은 당시 한용운이 1918년 9월10일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을 발간하고 1919년 3.1일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기 직전인 1918년 4월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살던집이다. 현재는 한옥체험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다.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1204028013
일제감정기인 1936년 서울 종로 통의동 보안여관에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뜻을 같이한 이들의 집필활동이 학자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평가한다. 젊음의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론하던 보안여관은 광복 이후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투숙하는 공간이었다. 현재 80여년동안 투숙객들의 '머뭄'과 '떠남'의 공간이던 <통의동 보안여관>은 이제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우리시대의 담론이 생산되고 새로운 문화예술이 투숙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종로구 통의동에 가면 낡은 여관 하나가 보인다. 보안여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이 여관은 1930년대부터 2006년까지 80년 넘게 숙박시설로 운영된, 현존하는 것으로는 한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관일 것이다. 그러나 보안여관에는 단순한 숙박시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이던 1936년, 시인 서정주는 그의 나이 22살에 경복궁 근처 허름한 여관이던 이곳에 짐을 풀었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같은 시인과 화가 이중섭 등 문학청년들이 모여들면서 이들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생겼다. 서정주는 여기서 만난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서정주의 책 <예술언어>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1936년 가을 함형수와 나는 둘이 같이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데에 기거하면서……(중략) 시인부락이라는 시인 동인지를 꾸며내게 된다." 훗날 학자들이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평가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당대 최고의 문학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젊은이의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 등을 토론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탄생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신문사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작가,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 전에 장기 투숙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던 보안여관은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주고객층의 변화를 목도하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 직원들이 머물거나 경호원 가족의 면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 이 때문에 지금도 보안여관을 ‘청와대 기숙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80년을 버텨오던 여관은 2006년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만다. 그 후 매각되어 건물이 헐릴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여관을 인수한 일맥문화재단이 건물 외벽은 그대로 살리고 내부는 실험적이고 기발한 예술인들의 작품으로 채워나가기로 결정하면서 보안여관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여관방은 갤러리로 변신했고, 1층에는 ‘예술을 파는 구멍가게’라는 문화프로젝트 숍이 들어섰다.
보안여관에 들어가보고 옛 여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놀랐다.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흰색 바탕의 파란 글자를 보고 있으면 이곳만 세월이 멈춘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숙박요금 8천원이란 글씨와 거울에 새겨진 ‘일상의 다섯 가지 고마움’이라는 옛글도 그대로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삐걱거리고 방구석마다 거미줄이 매달려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은 보안여관을 가장 기묘하고 매력적인 21세기적인 전시공간으로 만들면서 그 안에 전시된 작품에 후광이 되어주고 있다. 갤러리(http://cafe.naver.com/boaninn/)에서는 매달 참신한 주제로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그 옛날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수많은 얘기를 남겼고, 시인 이상은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이라고 표현했던 통의동. 그리고 통의동의 보안여관. 80년간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며 시대의 온갖 풍파 속에서 문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고, 그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삶의 애환과 기쁨, 희망을 품고 이제 새로이 갤러리로 변신했다. 보안여관이 앞으로도 그 자리에 계속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관의 이름에 왜 '보안'이 붙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풍문으로는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보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보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 효자로 청와대 방면으로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이상옛집 (李箱, 1910년 8월 20일 ~ 1937년 4월 17일)
이상(1910~1937),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은 서울에서 태어나 본명은 김해경으로 1934년 구인회에 가입하여 문학 활동을 하였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사상불온혐의로 구속 중 건강악화로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사망했다.
거울(1933) 오감도(1934)같은 형이상학적인 시를 통해 한국문학을 격상시켰으며 날개(1936) 종생기(1937) 동해(1937)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본명 김해경. 1910년 서울 출생.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을 쓴 '일세의 귀재(鬼才)'로 불리는 천재 작가.
1931년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으로 등단, '오감도', '날개', '건축무한육면각체' 등 대표작을 남겼다.
1933년 기생 금홍과 '제비다방'을 운영하다 폐병에 걸린다. 1936년 변동림과 결혼해 도쿄로 건너갔다가 폐병이 악화해 2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통인동 154-10번지는 이상이 3살 때부터 23살까지 살았던 백부 김연필의 집터 중 일부로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아름지기'는 이곳에 새로운 형식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방, 작업실, 공연장 등으로 꾸밀 계획이다.
윤동주하숙집터
윤동주(1917~1945)는 일제감정기에 짧게 살다간 청년 시인으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시대적 현실을 투시하고 고민한 시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시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는 21세가 되던 1938년 4월에 연희 전문학교에 재학시 1941년 인왕산 밑 누상동 9번지에서 일생 중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이곳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시인으로서 가장 처절하게 번민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치려는 「십자가」라는 사명시를 쓴 곳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누상동 시절은 한국문인 다수가 두려움에 떨며 변절하고 혹은 침묵하고 있을 때 가해자에 대한 저항정신을 아름다운 서정성과 탁월한 기법으로 써나가며 절정의 명시를 남긴 가장 소중한 창작 시절로 기억되야 할 것이다. 이 때 쓴 작품이「십자가」, 「새벽이 올 때까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돌아오는 밤」, 「서시」등이다. 현재 당시 하숙집은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 있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 ~ 1945년 2월 16일)
http://blog.daum.net/ddakkiyang/1364
한국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아명은 윤해환(尹海煥),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중화민국 지린 성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작을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 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일본 유학 후 도시샤 대학 재학 중,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본식 창씨개명은 히라누마 도오슈(平沼東柱)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처형당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후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송몽규는 고종 사촌이었고, 가수 윤형주는 6촌 재종형제간이기도 하다.
정철생가터
송강 정철(1536~1593)은 서울 장의동(청운동)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인·정치가인 정철은 가사문학의 대가였다. 가사문학은 율문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장르,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여 파직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충청·전라의 3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정철은 정치가로서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붕당 싸움에 말려 반대당의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문학의 대가로 국문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현재 청와대 근처의 청운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변에 '정철 선생 나신 곳' 표지석이 있고 그의 대표작 사미인곡 성산별곡과 관동별곡 등의 시비가 있다.
정철 (鄭澈, 1536년 음력 12월 6일 ~ 1593년 음력 12월 18일)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이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沉)의 아들이며,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인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西人)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기대승(奇大升) ·임석천 ·송순(宋純)·김인후(金隣厚)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소설가 겸 언론인이다. 본관은 연주(延州) 현씨이고 호는 빙허(憑虛)이다.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 20편의 단편소설과 7편의 중·장편소설을 남겼다.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1943년 3월 21일 밤, 지병이었던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제기동의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43세였다.
2005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그가 살았던 인왕산 밑의 부암동 자택은 종로구에서 공용주차장을 짓기 위해 2003년에 헐어버려서 지금은 터와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당시 그 생가의 철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행정당국은 '민간인 소유자와 부지 매입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2012년 10월 4일에 안평대군의 사저와 함께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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