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옛 도시 종로의 코스를 걷다.
종로, 동네 골목길 탐방코스 - 1
세종대왕 생가, 생활반경, 한글창제 및 광화문광장 '세종이야기'등을 테마로 관광 코스 걷기
A. 역사 체험 코스
세종벨트 인포센터 → 광화문 광장 '세종이야기'홍보관 → 세종대왕 동상
→ 세종대왕 생가 터 → 맹사성 집터 → 경복궁 → 관상감 관천대
1. 세종벨트 인포센터
세종문화회관, 서울역사박물관, 금호아트홀 등 30여 개 공연장, 박물관, 미술관과 ‘세종벨트’라는 문화협의체, 해치 마당 모습이다. 오른쪽에 세종 벨트 통합티켓팅 & 인포센터가 있다. 광화문 광장 주변의 공연장, 전시장의 티켓을 판매한다. 패키지 상품, 당일 티켓 할인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여는 시간 10:30~20:30. 닫는날 없음
2. 광화문 광장 '세종이야기'홍보관
광화문역 지하 3,200㎡ 공간에 마련된 '세종이야기', “이순신이야기” 세종대왕의 업적 및 일대기를 디지털기술과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구현해 전시하는 ‘세종이야기’가 광화문광장 지하에 들어선다. 서울시는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과 KT 광화문사옥 사이의 지하차도를 리모델링해 3200m²(약 970평) 면적으로 조성, 개관 뒤 매일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10시 반까지 무료로 개방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3. 세종대왕 동상
4. 세종대왕 생가 터
서울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 일대, 세종대왕 생가복원 사업추진 준비중이다.
5. 북촌 맹사성 집터 (현, 북촌 동양문화 박물관)
조선조 청백리로 소를 타고 출근하며 피리를 즐겨 불었다고 전한다. 태조부터 세종시대까지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맹사성은 검소하고 조용하여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대문 밖에 나가 맞이하고 윗자리에 앉히며, 돌아갈 때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6. 경복궁
태조 4년에 창건된 조선 제일의 으뜸 궁궐로서 "하늘이 내린 큰 복" 이라는 뜻을 가진 왕궁
경복궁은 1395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고 처음 지은 궁궐로 330여 동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정도전이 붙인 궁명 ‘경복(景福)’은 <시경>에 ‘임금이여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라는 구절에서 나온 이름으로 ‘덕으로써 영원한 복을 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5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867년 고종대에 중건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전각의 90% 이상이 헐렸으나 1995년부터 꾸준한 복원사업을 벌여 고종 때 중건 모습의 30% 정도를 되찾았다.
“조선 제일의 법궁”
경복궁은 유교적 질서와 풍수적 건축 사상을 융합한 건축물이다. 궁 안의 주요 전각과 문들은 남북 직선 축에 맞추어 배치되었으며 각각의 공간을 행각이 감싸도록 했다. 또한 주요 정전과 침전 등을 남향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했고, ‘전조후침’이라 하여 정사를 보는 조정은 앞에 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은 뒤에 두어 내전, 외전 영역을 나누었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자 궁궐 건축의 모범으로 원칙과 절차를 엄수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740호, 사적 제296호.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현대건설주식회사 사옥(옛 휘문고등학교 자리) 바로 앞에 있다. 조선 초기에 내(內)관상감은 경복궁 안에 있었고 이곳에는 외(外)관상감이 있었다. 이 관천대는 15세기경 이곳에 관상감이 세워진 직후 세워졌다고 생각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휘문고등학교 교정에 옮겨 놓았다가 1984년 원래의 자리에 복원했는데 휘문고등학교 시절의 측량에 의하면 꼭대기에 있는 관측용 대석의 십자선은 남북 방향에서 서쪽으로 7° 기울어져 있다. 이는 자북(磁北)과 거의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관천대 그 자체의 방위는 진북 방향에서 동쪽으로 6°기울어져 있다. 위치는 동경 126°57′2″, 북위 37°35′0″이다.
B. 역사 체험 이야기
조선 세종(世宗, 1397년 4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정(元正)이다.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대왕(莊憲大王)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며,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이다. 조선 태종과 부인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종 8년(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태종 12년(1412년), 형 효령군 이보와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형 이제가 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뒤 1418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섭정을 하며 군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 측근들이 사형당하였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황희,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443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20세기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10월 9일은 한글날로 기념한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김종서∙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1972년 이후 현재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 인물이며, 2012년 7월 1일, 그의 묘호를 딴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다.
1418년부터 145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18년부터 144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출생과 봉작
대군진봉과 형들과의 경쟁
세자 책봉과 즉위
재위 기간 업적
1 유교 정치의 기틀 마련
2 대외 정책
3 국방 정비, 대마도정벌
5 재상 등용과 국정 분담
6 의정부 서사제 실시, 육조직계제
7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 일시 중지
8 과학의 발전
9 문물의 발전
10 법전 정비
생애 후반
가정의 불행
최후, 1450년 음력 2월 17일 (양력 4월 8일) 54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위치
세종의 이름이 붙은 것
인천국제공항은 가칭은 세종공항
세종과학기지
세종대왕상
세종로(世宗路)
21세기 세종계획 (1998년~ 2007년, 국립국어원 중장기 국어 정보화 사업)
세종특별자치시(世宗特別自治市)
세종 솔로이스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대왕기념관
DDG-991 세종대왕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의 1번함
세종과학고등학교
세종고등학교
세종대학교
세종초등학교
세종관은 청와대
7365 세종(세종별) 일본 와타나베 가즈오가 1996년 발견
기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61년 ~ 1963년 사용하던 1000환, 500환 지폐의 도안.
1965년 ~ 1985년 사용하던 대한민국의 1백원권 지폐의 도안
1972년 이후 1만원권 지폐의 도안
기념일 한글날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
세종 사망 직후 정세
문종사망, 단종 폐위
계유정난으로 세조 보위, 1456년 일명 사육신 사건
세종대왕 기념관
세종대왕 탄신 600돌 기념
「세종대왕 - 제1부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1.26. 방영
「세종대왕 - 제2부 소리가 하늘이다.」한국사傳, KBS, 2008.02.02. 방영
조선 세종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서정민. 2008. 《세종, 부패 사건에 휘말리다 (조말생 뇌물 사건의 재구성)》
600년 역사를 지닌 서울의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고,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 조망 공간으로 새롭게 조성하며, 세종로의 옛 모습인 육조(六曹)거리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사업으로 추진되어 2008년 5월 27일 착공되었으며, 2009년 7월 말에 완공되었습니다. 광화문에서 세종로 사거리 및 청계광장에 이르는 세종로의 중앙에 설치된, 폭 34미터, 길이 740미터의 상시광장 및 평상시엔 차도이나 대규모 행사시 광장으로 활용가능한 왕복 10차선의 예비광장으로 이루어진 광장이다. 2009년 8월 1일 12시 일반시민에게 개방했다.
범위는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 및 청계광장에 이르며, 폭 34미터, 길이 740미터의 상시광장과 평상시에는 차도이나 대규모 행사시 광장으로 활용가능한 왕복 10차선 예비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시는 세종로가 과거 조선시대 육조거리로 역사·정치·행정·업무가 결집된 곳이었으나 자동차 통행 위주의 아스팔트 공간으로 건설되어 있어 국가의 상징가로로서 또는 중심광장으로서의 역할에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세종로를 차량중심에서 인간중심의 공간으로, 청계천과 경복궁을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 공간으로, 경복궁, 북악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 조망공간으로, 육조거리의 복원을 통한 역사·문화 체험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한 사업이라고 밝혔다.
서울특별시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와 청계광장으로 이어지는 세종로 중앙에 길이 555m, 너비 34m로 조성되었습니다. 세부 구간은 '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 '한국의 대표 광장', '시민들이 참여하는 도시문화 광장', '도심 속의 광장', '청계천 연결부'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초입 구간인 '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에는 월대(月臺)를 재현하고, 해태상을 복원하였습니다. 세종로공원 주변 구간인 '육조거리의 풍경을 재현하는 광장'에는 과거 한양의 중심거리였던 육조거리의 흔적을 재현하고 이를 형상화한 축소모형도 설치하여 국가를 상징하는 거리의 의미를 부각하고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앞에 자리하는 '한국의 대표광장'에는 창의와 실용의 정신으로 문화강국을 이루자는 뜻으로 높이 6.2m, 폭4.3m에 4.2m의 기단(基壇)위의 무게20톤 규모의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졌고 세종이야기 등 상설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과 이순신장군동상 사이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광장 중앙에는 미술, 조형미술 등 다양한 전시공간으로 이용되고 해치마당에는 이용객을 위한 아리수 샘터, 안내소, 기념품점 등 편의시설과 전시장, 엘리베이터, 만남과 약속의 장소 등 문화갤러리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동상 주변에 조성되는 '도심 속의 광장'에는 세종로의 상징이자 도시경관축의 중
심지로서 상징성을 나타내고 샤프분수(동상좌우), 바닥분수(동상전면), 등 수경시설이 설치되어있습니다. 세종로사거리와 청계광장 사이의 '청계천 연결부'는 청계천과 경복궁을 연결하는 보행 네트워크의 연결 축으로 조성되었습니다.
광화문 분수명칭 논란
광장 사용 논란
맹사성(孟思誠, 1360년 7월 17일 ~ 1438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였다. 황희, 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대의 재상이자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만년에 가서 벼슬을 사양하던 맹사성은 1438년 칩거하고 있던 온양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하였다. 사람 됨됨이가 소탈하고 조용하며 사심이 없고,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나 한미한 살마이 방문해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가서 맞이했으며, 손님에게 반드시 상석을 내 주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 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생애 초반
정치 활동
예악의 정비
여진 정벌
온양 온천
황희, 윤회와의 비교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면적은 432,703㎡이며,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0년 현재 1차 복원사업이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1553년 화재
임진왜란
해방 이후 경복궁 내에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고 서북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였다.[25]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경복궁 복원사업 1차 복원정비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총독부 청사를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쳐 문민정부가 철거하였다.[24] 2010년 현재,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 2010년 9월이후 광화문권역이 완전 개방되며 이후 복원작업은 2차 정비사업과 장기복원으로 나뉘어 2차복원에는 수정전 앞 궐내각사지역이 현재 복원 진행중이며 흥복전권역이 복원예정에 있고 전체적인 궁장과 동서십자각도 복원예정에 있다. 2차 사업까지 완료하면 고종당시의 75%수준으로 복원이 되며 그 이후 장기 복원계획은 국립 고궁박물관과 국립 민속박물관및 관리사무소 주차장등 시설의 이전에맞춰져 진행된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때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0]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1910년에 한일합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23]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흥례문
영제교
신무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천추전
만춘전
강녕전
강녕전의 소침
응지당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교태전
아미산 / 경복궁 아미산 굴뚝
자경전
집경당과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
장안당
추수부용루
관문각
향원정
집옥재
태원전
동궁
자선당
비현각
흥복전
만경전
궐내각사
마랑, 원역처소
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총독부 청사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광화방(廣化坊) 소재 관상감(觀象監)이 있던 자리에 설치된 관천대이다. 즉, 천문현상을 관측하기 위해 관상감에 설치하여 관측기구를 올려놓던 대(臺)이다. 관측기구로서 소간의(小簡儀)를 올려 놓았다고 하여 소간의대(小簡儀臺)라고도 하고, 별을 관측하는 대라는 의미로 첨성대(瞻星臺)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전기, 세종은 천체관측기구인 간의(簡儀), 그것의 축소형인 소간의·규표(圭表)·해시계·물시계 등 천문기기를 개량하고 발명하는 일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경복궁의 서북쪽에 거대한 관천대인 대간의대를 설치하는 한편, 아울러 소규모의 관천대인 소간의대를 광화방 서운관과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설치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경복궁의 대간의대는 창설이후 여러 번 개수되면서 왕립 중앙천문대로서 동양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었고 그것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간의대는 임진왜란 때에 완전히 파괴되었고, 소간의대 역시 현재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관천대로는 관상감관천대가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관천대가 있던 곳은 한성 북부 광화방의 관상감자리로,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전 휘문고등학교 교정이 되었으며, 1980년대부터는 현대건설의 사옥이 들어섰다.
관상감관천대는 제작연대 등에 대한 명문이 없지만, 세종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관천대가 위치한 곳이 창덕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그 옛 이름이 운현이었고, 그 언저리에 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雲峴宮)이 있다. 이렇듯 운현(雲峴)은 서운관(書雲觀)의 명칭에서 연유된 것으로 옛 서운관의 자리가 현재의 위치일 개연성이 있다. 이로부터 관상감관천대는 세종 16년(1434년)에 서운관(관상감)에 설치된 소간의대일 것으로 판단되었다.
관상감관천대는 다듬은 돌로 만들어졌고, 그 위에 직사각형의 돌로 난간을 둘렀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래는 대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다. 관천대는 현대사옥의 건립과 더불어 조사와 정비가 거듭되어 1982년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고, 1984년에는 원위치에서 완전 해체 복원되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의 기록보고에 따르면, 관천대 위 중앙에 십자선이 그어져 있는 관측용 대석의 방위는 353°로서 진북(眞北) 방향에서 7°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자북과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또한 관천대 구조물의 방위는 6°로서 진북 방향에서 6°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따라서 대석의 남북선에서 13°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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