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밥 먹고 도시여행

유배로 떠나는 제주여행

草霧 2012. 12. 6. 13:07

 

 

 제주유배길

 

 

 

 

 

 제주관광공사

 

한숨으로 얼룩진 ‘유배 1번지’

제주는 고래시대 때부터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고려를 복원시킨 원은 삼별초 정벌 직후 제주를 그들의 직할지로 삼아 몇 차례에 걸쳐 도적과 죄인은 물론이고 왕족과 관리 승려까지 유배시켰다. 제주가 본격적인 유배지로 이용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였다.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2백여 명이 유배를 왔는데, 왕족과 외척, 문무양반, 학자 등은 물론 도적과 국경을 넘다 잡힌 범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유배인들이 있었다. 조선조 5백 년을 통해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숱한 인사들이 제주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사 중 하나가 추사 김정희. 그 유명한 세한도와 추사체가 제주 유배생활 중 완성됐다. 대정읍 안성리에 추사적거지가 잘 복원돼 있다.

 

제주유배길

아름다운 풍광과 세계자연유산의 섬으로 유명한 제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추사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 국보 “세한도”가 완성된 곳,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는 송시열의 마지막 유배지, 조선시대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왕인 광해군이 삶을 마감한 곳인 제주에는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호령하던 유배인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다.

제주유배문화를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개발하기 위해 조성되는 제주유배길은 제주의 유배인들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장이다. 유배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기약하는 이 길이야 말로 시대를 뛰어넘으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길이다. 천혜의 관광지인 제주도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한 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절망의 길, 유배. 유배는 죄인을 먼 지역에 깊숙이 가두어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배를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역사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유배를 조금만 달리 들여다보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다산 정약용의 500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과 같은 소중한 저작이 모두 유배 때문에 완성되었다. 이처럼 유배는 처참한 형벌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창조와 완성의 공간이기도 했다.

 

 추사유배길

 

시, 서, 화는 물론, 경학, 금석학, 불교학 등의 대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그는 박제가, 정약용 등의 국내 학자를 비롯하여 옹방강, 완원 등 청나라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19세기 동아시아를 주름잡는 학자이자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에 걸친 유배를 가게 된다. 이 절망의 시기 동안 추사는 세한도와 추사체 등을 완성하는 등 예술적 완성을 이룬다.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제자를 두었던 그는 71세의 나이로 과천에서조용히 삶을 마감한다.

 

 

 

 

 

 

제주성안 유배길

유배인의 도착을 알리다
유배인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바로 제주목 관아 였다. 광해군,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이 곳에 들러 제주목사에게 유배인이 도착했음을 알려야 했다. 얼마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일개 지방 목사에게 자신의 당도를 아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유배인이라고 해서 제주목사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유배인의 신분이지만 언제라도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주목사는 유배인의 생활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며 후일을 도모하곤 했다.


제주의 역사와 함께했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건물이 헐려 관덕정만 남아 있다가 오랜시간 복원작업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입춘이 되면 탐라시대부터 이어지던 문화축제인 탐라국 입춘굿 놀이가 열려 제주시청에서부터 제주목 관아까지 낭쉐(나무로 만든 소)를 몰고 가면서 한 해의 무사안녕을 빌고 있다.

 

제주시내에 고즈넉히 옛자취를 지키고 있는 곳. 바로 제주목 관아지 이다. 제주목 관아 일대는 옛날 탐라국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역할을 해온 유서 깊은 곳이다.

 

 

면암유배길

 

탐라전말 최익현의 제주유배길


최익현의 유배길은 삼남대로라 불리는 길을 따랐다. 그보다 앞서 송시열이, 김정희가 제주로 유배를 가며 걸었던 길이다. 동작진 → 남태령 → 과천 → 수원 → 천안 → 태인 → 정읍 → 장성 → 나주 → 영암 → 강진 → 이진 → 제주도로 이어지는 삼남대로는 거리도 거리 였지만 험한 바다를 건너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최익현은 12월 4일 저녁 무렵 조천포에 도착한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우뚝 솟은 한라산이었다. 앞에는 높은 산이, 뒤에는 아득한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 현실. 그는 마음 둘 곳 없는 제주 에서의 생활이 참으로 막막했을 것이다.

최익현은 제주목 관아 부근에 있었던 아전 윤규환(尹奎煥)의 집으로 유배지를 정하고 본격적인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1873년 11월 13일 매섭게 몰아치는 추위를 뚫고 최익현은 유배길에 오른다. 집안의 지인과 시종 한 명이 뒤따르는 단촐한 규모였다. 가족 과의 이별에 눈물을 애써 참으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식들에게 할아버지를 잘 봉양하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라는 당부의 말 뿐이었다.

가이드북

 

제주 유배길에서 나를 찾다

 

추사에게 길을 묻다

 

 

양진건 교수의 매혹적인 유배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