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38탄
진보정권 10년 - 2 - 3
서울의 가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2003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 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http://cafe.daum.net/cultureSpice/LnIy/107 IMF 외환위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39 진보정권 10년 1-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40 진보정권 10년 1-2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8 미선. 효순 사건
http://blog.daum.net/allspices/429 노벨상 수상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6 SOFA의 덫, 효순. 미선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7 2002 한일 월드컵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8 제2차 북핵 위기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9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1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50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2
남북정상회담(2000년)
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
2002년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
2002년 FIFA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 살상 무기 (북핵문제)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1차 핵실험)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차 핵실험)
6자 회담(六者會談, Six-party Talks)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
출처 : 연합뉴스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판사로 1년 정도 재직하다 그만두고 조세 분야의 변호사로 활동 하던 중 ‘인권 변호사’가 되어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해서 활동하다가 김대중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국민의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국민경선제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여당 후보로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듬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그 다음해 새천년민주당 탈당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정계에 몸담는 동안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어 한국의 기존 정치 집단과 충돌하고 언론 권력의 전횡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면서 대통령직 재임중에 언론과의 관계도 순탄치 않아 비주류로서의 파란많은 정치 역정의 길을 걸어야 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인권 신장에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있고, 탈(脫)권위를 실천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대화와 토론’을 강조했는데,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거지요" 라고 말한 '평검사와의 토론'이 유명하다.
2004년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으로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이후 16대 국회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주류 정당들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해먹겠다", "미국 응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검토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 따라 행정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선회하였다. 이 외에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린다.
2006년 말 노무현 정권 지지율은 5.7%로 역대 대통령 중 최저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정권말기에는 지지율 53.7%로 상승했으며, 퇴임 이후에는 임기 중 임대주택에서 살겠다는 약속과 달리 귀향했다. 고향에서 친환경 농업과 농촌 환경 개선 등에 힘썼고, 이후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본산리의 봉하 마을은 관광 명소가 되었다.
2009년 검찰의 박연차 정관계 로비 사건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도 금전을 수수한 건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고 수사를 받게 되었고, 노무현도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5월 23일 자택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서거하였다. 사망 후 일주일간 봉하 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영결식에는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특별시청부터 서울역까지를 메웠다.
유년기 및 청소년기
사법시험 준비기
판사 시절
변호사 시절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 1985년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 노동법률 상담소,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 1987년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
정계 입문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 출마,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당선
노동위원회의 3총사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청문회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 안전 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 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
3당 합당 거부
1990년 3당 합당을 ‘밀실야합’이라고 규정하였다. 이후 통일민주당 잔류 세력 등과 함께 민주당 (1990년)을 창당하였다.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 낙선, 1993년 민주당(1991년) 최연소 최고위원, 1995년에는 민주당 후보로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 낙선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김대중이 1995년에 정계 복귀 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합류거부, 민주당(1991년)은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1995년)를 창당 합류, 1995년 민주당 부산시장 후보로 출마 낙선,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1995년) 후보로 출마 낙선 이후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5대 대선 중 통합민주당(1995년)의 대통령 후보 조순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 이부영·이철 등은 신한국당을 선택과 노무현·김원기·김정길 등은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주장. 결국 1997년 11월 입당하여 김대중 지지, 그리고 그 해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특별시장 경선 출마로 의원직을 자진 사퇴로 7월 21일 재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 복귀
부산 출마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 부산 북·강서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 낙선
노사모 조직 이후 노무현은 ‘바보’라는 별명을 얻었고,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해양수산부 장관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
대통령 후보 경선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 노무현,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로 1위를 차지,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 당시 이인제 대세론과 호남 출신으로 오랫동안 김대중을 보좌해온 한화갑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당시의 분위기는 노무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 거세게 불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무너지면서 광주 경선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의미, 정작 1위를 장담했던 호남 출신인 한화갑 후보는 3위 기록, 영남 출신 후보가 1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광주시민 여러분들의 위대한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 이후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 경선 후,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민주 세력 대통합론과 지지율 하락
‘민주 세력 대통합론’(대통합론) 제안과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의 노무현에게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지방 선거 패배와 후보 재신임
후보 재신임과 중도 개혁 포럼의 사퇴론의 충돌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론, 새천년민주당은 광역 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의 4석만 건지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 의결,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
민주당 내분 사태
‘노무현 흔들기’
친 이인제 성향의 반노, 노무현의 집권 가능성에 회의적이던 비노 의원의 집단적으로 신당 창당, 후보 사퇴 그리고 노무현은 신당 창당과 재경선 수용 입장을 밝혔다. ‘경선 불복 행위’
정몽준 돌풍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후보 단일화론’
‘후보 교체론’
10월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 결성과 후보 단일화 주장
11월 후단협은 정몽준 공개지지
후단협 해체 후 일부 한나라당 입당, 12명은 민주당 복당
정몽준의 국민통합21과 김민석의 탈당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 회복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
민주당 내 반 노무현, 비 노무현 측의 요구
단일화 방안으로는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다.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 제의
단일화 재협상 ‘무효화 조항’ 전격 수용
텔레비전 토론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 승리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 (46.8% 승), 월드 리서치 조사 (38.8% 승)
이인제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과 이회창지지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 파기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 파기
지지 철회 발표문
심야 회동은 결렬
진보 진영 지지
제16대 대통령 당선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
“토론을 국정운영 방법으로 정했으면 한다”
“토론공화국이라 말할 정도로 토론이 일상화되면 좋겠다”
외교안보 분야
정치행정 분야
부패 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 분권과 국가 균형 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 개혁
경제 분야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
사회 문화 여성 분야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 개혁과 지식문화 강국 실현
국민 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 협정
“미국에 할 말은 한다” 독자노선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에 합의
2007년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 사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악화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2005년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에게 공식 항의
2006년 일본의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 제정
아베 정권 출범 이후 외교적 갈등이 시작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 양자 회담에서 동해를 ‘평화의 바다’, ‘우의의 바다’로 제안,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
2007년 10월 '2007 방위백서'의 한글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
2003년 한일 정상회담 후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표현 파문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 ~ 2004년 2월 24일)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 참여정부 출범
2003년 2월 26일,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 통과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새 내각 출범
2003년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과 검사 마찰,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라는 제목의 토론회가 전국에 생중계, “이쯤 되면 막 하자는 거죠”라는 발언, 당시 이 토론회는 권위적이고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닌, 탈권위적인 ‘토론하는 대통령’을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
2003년 3월 24일, 국회의원 특별 교부금 폐지, 보통 교부금에 통합 개선을 명령 그러나 2008년 12월까지 미개선
2003년 4월 18일, 청남대 개방, 충청북도로 이관
2003년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생긴다”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 탈당
2003년 10월, 최도술 SK 비자금 수수 의혹
10월 10일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 부결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선언
2003년 12월 29일 여야 합의로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법)을 통과(찬성167, 반대13, 기권14표)
2004년 1월 16일, 신행정수도법 공포
2003년 2월 25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 방문,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2004년 1월, ‘유모차 해프닝’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 ~ 2005년 2월 24일)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선거중립 의무 위반으로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 민주당은 이 조치를 근거로 탄핵을 발의하겠다며 야3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하기 시작
2004년 3월,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 뇌물 수수와 남상국은 한강 투신, 노건평 유죄,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당사자의 실명을 공개적 거론에 대한 비판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
2004년 3월 12일 ~ 3월 27일 전국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 13일 날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다. 한편, 보수 단체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진행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탄핵 후폭풍으로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
2004년 5월 21일, 노무현은 열린우리당에 “수석 당원”으로 입당
2004년 8월 11일, 신행정수도법에 따라 국회는 신행정수도를 연기군과 공주시의 일부를 신행정수도의 입지로 결정
2004년 8월, 노무현 악성 댓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로 기소 선고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 판결,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 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 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습 헌법’
2004년 12월 16일 FTA 추진 지시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 ~ 2006년 2월 24일)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 특별법이 국회 가결
2005년 2월 14일,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 등 시스템 구축에 특허를 출원해 특허 취득
2005년 7월 행정자치부에 시범 도입
2005년 3월 7일, 동북아 역사재단 설립
2005년 6월 29일,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이 통과로 소수 의견 공개가 의무화
2005년 8월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 서훈 추서 (훈격 논란)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 ~ 2007년 2월 24일)
2006년 3월 23일, 네티즌들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온라인 생중계로 대국민 토론회 진행, 세계 최초로 시도된 인터넷을 통한 전자 민주주의 구현에 초석을 쌓은 ‘사건’
2006년 6월 3일, 딸 노정연이 딸 출산
2006년 11월 30일, “나는 신당을 반대한다. 말이 신당이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당 창당 반대
2006년 12월 6일 5.7%대의 낮은 지지도 기록, 가운데 최저치
2006년 12월, 헤럴드 경제는 ‘최근 국정현안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를 설문 실시로 부정적인 답이 주류, 10월 24일 12.9%, 11월 14일 11.0%로 하락 추세
2006년 12월 8일,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는 없다”
2007년 1월 9일,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 개정 제안
2007년 2월 22일, 열린우리당 탈당 선언, 한명숙 국무총리 당으로 복귀, ‘탈당’ 대신 ‘당적 정리’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 ~ 2008년 2월 24일)
2007년 1월 23일,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
2007년 2월 28일, 열린우리당 탈당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 평가포럼(약칭 참평포럼) 특강에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 주자를 비판
2007년 6월 8일, 참여정부 평가포럼 발언과 한나라당 노무현을 선거법 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 고발과 선거 중립 위반 결정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선적 제도”
200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기념일로 지정한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공식 기념식에서 6월 민주항쟁은 국민의 정의와 민주주의가 승리했다는 점과 군사 독재의 시대를 끊어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1987년 이후 숙제로 남아 있는 지역주의 정치,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2007년 9월 12일, ‘제주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 “균형 발전 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 발전 전략”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 개최, 남북 관계 발전 및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
2007년 11월 8일, 무안공항 개항식 후 호남 발언 논란
대통령직 퇴임 이후
봉하 마을로 귀향
청와대의 컴퓨터 시스템에 보안 장치 작동 해프닝
2007년 12월 20일, 남상국의 유가족이 남상국의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
2008년 2월 25일, 경상남도 김해 봉하 마을로 귀향,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혔으며, 봉하 마을에 대한 관심이 누리꾼들에게 화제, 귀향으로 김해시 봉하 마을 관광지로 급부상
‘노간지’
오리쌀 농법과 화포천 정화, 생태숲 조성 등 친환경·친농촌 생태사업
2008년 4월 20일,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
2008년 7월, 기록물 유출 의혹 사건 발생,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 전국연합에서 대통령 기록물을 봉하 마을로 옮긴 건에 대한 검찰에 불법적인 ‘무단 유출’로 기록물에 관련, 고발 수사 진행와 신·구 정권 간 대립과 갈등 비화 특히, 개인 자금으로 구매한 e-지원 시스템 서버(하드웨어)까지 반환하라고 요구 거부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5항에 가능, 2010년 2월 4일 개정
2008년 9월 18일, ‘민주주의 2.0’ 개설
2008년 10월 17일, 보수주의 비판
2008년 10월 21일, 자유시민연대는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소송 제기
2009년 10월 29일, 노무현의 자살로 검찰 불기소 종결
가족·친인척 비리 검찰 수사
노무현 본인은 부인과 가족이 금품을 수수한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 포괄적 뇌물죄 혐의로 검찰 소환 조사
추후 2009년 12월 18일, 노무현이 박연차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내용이 포함
2008년 12월 4일, 노건평은 세종증권 매각비리 의혹, 농협의 인수 청탁로 구속 수감
2008년 12월 5일, 노건평의 비리 사건에 대해 대국민 사과 거부
2009년 3월 26일, 노무현 게이트와 문화일보는 이호철 및 정윤재로부터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
2009년 4월 7일,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체포와 사과
2009년 4월 10일, ‘포괄적 뇌물 수수죄의 공범’ 혐의
2009년 4월 11일, 연철호 체포
2009년 4월 12일, 노건호와 권양숙이 검찰 소환 조사, 문재인은 변호인
2009년 4월 19일, 권양숙 여사가 빌려 썼다는 3억 원에 대해 ‘검찰이 거짓임을 확인’ 보도
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서면 질의서 7장을 발송
2009년 4월 25일 답변서(진술서) 제출
2009년 4월 30일, ‘포괄적 뇌물 수수죄’ 피의자 혐의로 검찰에 출석, 대질 신문 거부
2009년 5월 13일, 노무현의 회갑 선물로 받은 1억 원짜리 시계 두 개를 논두렁에 버렸다
2009년 5월 1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이 받은 40만 달러를 놓고 검찰과 노무현 측이 진실 공방
2009년 5월 16일, 권양숙 재소환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자살와 검찰 수사 종료
2009년 6월 12일, 검찰은 ‘공소권 없음’ 처분을 하고, 수사 종결
2009년 9월 9일,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무죄 판결
2009년 9월 17일, 박연차가 뇌물공여죄의 혐의로 1심 유죄 판결
2009년 12월 16일, 이호철과 정윤재이 금품 수수 오보의 손해배상 및 정정 보도 판결
2009년 12월 18일,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유죄 판결
2010년 1월 8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관련자들 무죄 판결
2010년 1월 14일, 세종증권 비리와 관련하여 노건평 유죄 판결
검찰 수사에 대한 평가
검찰 책임론이 대두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정치 보복’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2008년 7월 ‘태광실업 특별 세무 조사’에 대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청와대 보고
피의 사실 공표 금지법을 검찰 위반
‘빨대’ 논쟁
포괄적 뇌물죄
‘표적 수사’
‘떡검’
박연차와 권양숙이 관련된 자금에 대해서는 뇌물이 아닌 빌린 돈이라고 정상문 유죄 판결문 적시
“저희 집(권양숙 여사)이 박 회장의 돈을 받아 빚을 갚았다. 퇴임 직후 이 사실을 알았다”
“해명과 방어가 필요하다. 사건의 본질이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강금원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호소합니다. 저희 집 안뜰을 돌려 주세요”
2009년 4월 7일, 개인 홈페이지인 ‘사람사는세상’에 사과문 기재
2009년 4월 22일, ‘사람사는세상’을 폐쇄하고 ‘절필’을 선언, “나를 버려라”고 호소
2009년 5월 23일,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자살 사망
“노무현은 수행 중이던 경호원 이병춘을 인근 정토사로 심부름을 보낸 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투신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노무현 사망 의혹 제기 논란 또한 타살설, 음모론 서거 관련 의혹, CCTV 조작 의혹
오전 8시50분 ‘투신 자살’
양산 부산대 병원(오전 8시10분)으로 호송
문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렸다”
5월 22일 검찰 소환 조사를 응하면서 ‘정치적 자살’을 선택
정치적 자산이자 무기인 ‘도덕성’이 상처,
검찰의 수사 내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면서 인간적인 모욕
자신들의 참모와 가족들까지 고초를 당하고 있는 것이 대해 부담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과 비운의 역사를 끊어내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정권이 바뀌면 전 정권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가 반복되는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평도 있으며, ‘정치적 타살’이라는 비판도 있다.
서울에서는 네티즌과 시민들이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강력하고 활기찬’(strong and vital)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
빈소 및 분향소 설치
대한문 시민 분향소
경찰의 분향소 강제 철거
국민행동본부의 분향소 파괴와 영정 강탈
영결식은 국민장, 전국적으로 500만(봉하 마을 장례 위원회) 시민들이 마련한 분향소에 조문
봉하 마을을 찾은 조문객의 수는 100만으로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 총 301곳
추도배너
방송사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결방
지지 세력들이 이웃처럼 느껴지던 서민 출신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자결에 충격과 슬픔과 정부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따른 분노가 함께 표출되었고, 여론 조사에서도 60%가 넘는 사람들이 이명박과 검찰의 책임이라고 응답하였다. 한편으로는 위법 행위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고 자살을 택한 것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
추모 열기
대한문 시민 분향소
대한문 일대에 경찰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 시위대로 간주 통제
서울 광장과 청계 광장의 민간 분향소 설치를 막으면서 ‘과잉 통제’ 논란
노무현 수사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
과잉 통제 논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정 운영 지지율이 20%대까지 폭락
세계 150여 해외 공관에 설치된 분향소
봉하 마을 -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 – 서울광장 – 서울역
서울광장 국민노제
국무총리 한명숙 추도사
전 대통령 김대중 추도사
경기도 수원 연화장
경남 김해 봉화산의 정토원
고인돌 형태의 묘소에 납골당 안장
사후
《성공과 좌절》, 《운명이다》 베스트셀러, 추모 달력도 매진사례
2010년 5월 23일 노무현 사망 1주기 (광주, 대구, 대전, 창원, 인천, 대전, 충남) 추모행사, 김제동이 사회
봉하마을에 7만명, 서울에 2만 5천명의 추모객
2010년 6월 2일 전국 지방선거에 노무현 추모열기(노풍) 과 ‘천안함 사건 대응문건’
2010년 11월 14일 인분을 투척 사건
2009년 9월 23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약칭 노무현재단) 출범
2009년 9월 24일 노무현의 생가가 복원 공개
2009년 10월 1일 노무현의 회고록인 《성공과 좌절》은 출간, 베스트셀러
“멘토로 삼고 싶은 대통령” 에 대한 설문조사에 41.1%로 노무현이 1위
‘2009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물’에는 12%로 2위를 기록
12월 19일 중국 신문사가 선정한 《2009년 세계 10대 뉴스인물》 중 노무현이 3위에 선정
2010년 1월 1일 - G세대 대상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에서 훌륭한 인물》 조사에서 1위를 기록
언론과 노무현
통합민주당 대변인시절 1991년 10월 조선일보는 주간조선 보도를 통해 이력과 재산 의혹제기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 승소
해양수산부 장관으로서 언론사 세무조사지지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 찬성
‘이인제 대세론’ 에 대한 노풍에 보수 언론의 견제가 본격화
임기시 보수 언론의 공격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협정 추진, 대연정 구상 등으로 진보 언론과 갈등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 기자실 폐쇄로 보수와 진보언론 비판
‘박연차 회장 비리 사건’ 진보 언론 비판
한국 정치사에서 언론과의 관계가 가장 순탄치 않은 정치인으로 평가
언론 책임론 공방
“노 전 대통령의 사망에 언론의 책임이 크다”
“언론이 신속 정확한 보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 정당화
한겨레는 “비판 대신 증오, 죽은 권력 물어뜯기”
한겨레신문에서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여론 조사 “56.3%는 검찰, 49.1%는 언론을 꼽았다”
언론 책임론에 대한 보수·진보 신문은 양쪽으로 헤쳐 모여서 상대편의 책임 공방
종교
1986년, ‘유스토’라는 세례명
프로필의 종교란에 ‘종교가 없다’
프로필 종교란에 ‘무교’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
정토원, 장유암
권양숙은 해인사, 조계종 종정인 법전 스님으로부터 보살계와 ‘대덕화’(大德花)라는 법명
재임 기간 동안 해인사를 무려 세 차례나 방문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다 방문
2009년 5월 24일, 해인사의 승려가 하안거를 깨고 나와 조문
논란과 의혹
신행정 수도이전 공약 논란
2002년 12월 11일 충청권으로의 수도이전 공약
한미 FTA 추진
2006년 1월 18일 한미 FTA 협상 의지를 발표
2월 3일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을 통해 미국 의회에서 협상 출범 선언
6월 5일부터 6월 9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협상 개최
2007년 3월 8일부터 3월 12일 한미 FTA 8차 협상 개최
2007년 4월 1일, 한미 FTA반대운동의 허세욱은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분신 자살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타결
2007년 6월 16일 미국 측에서 노동, 환경 등 7개 분야 수정안 제의
6월 21일부터 6월 22일 FTA 추가협상 1차 협상 개최
6월 29일 추가협상 최종타결
정태인(鄭泰仁)은 민주노동당에 입당과 노무현 정부와 결별, 유시민 결별 선언
남상국 실명 언급 논란
2003년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뇌물 수수와 을 받은 것과 관련, 남상국의 실명을 공개적 비난 발언, 투신자살
사돈 배병렬의 권력형 비리 의혹
2005년, 사돈 배병렬(62) 전 NH-CA자산운용 상임감사의 불법 대출 의혹
김구에 대한 관점 논란
2003년 6월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었으나 정치적으로 성공을 못해 그 뒤 링컨으로 바꿨다"
노무현이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으로 발언
김근태 비판
'정치인 김구선생이 바르게 평가돼야' 정치 지도자로서 김구 선생은 재평가 논란
다케시마 발언 논란
2004년 7월 21일 제주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한일 정상회담 당시 독도를 일본이 자국 영토라며 부르는 호칭인 다케시마라고 발언 논란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지요?' 다케시마(竹島)파문
평가
정치 인생은 원칙을 굽히지 않으면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 정치 타파를 위해 애쓴 노력의 연속
재임 중에는 대연정 제안과 사법 개혁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탈피하려고 애쓴 것으로 평가
지지 정당으로부터도 비판받으면서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서 당정 분리라는 성과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민주적이고 서민적인 대통령이라는 평가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사회주의적이고 반미와 친북적인 설화가 많다는 이유로 비판,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기업의 요구를 많이 반영된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정규직 전환을 가로막고 대량 해고로 이어져 실직자를 양산한 점(이랜드 사태)과 같은 노동 환경의 악화와 한미 FTA의 추진, 이라크 전쟁 파병, 부실한 부동산 개혁 및 친재벌적이라고 비판한다. 보수주의자에 따르면 ‘친북좌파’라는 비판과 진보 진영에서는 ‘친미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이 양립하고 있다.
2010년 9월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뛰어난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정희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전체 지지율은 25.3%로 나타났으며 특히 20~30대 젊은층과, 화이트칼라 직종, 대학재학 이상의 고학력층에서는 박정희를 능가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2011년, 위키리크스는 노무현을 "고졸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국제 무대에서는 신인이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이 확고하다"고 평가했다.
2010년 10월, 전문가 대상으로 조사에서 11.1%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리 시대 영웅’으로 꼽았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또한 정치, 통일, 국제, 외교 분야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2월 4일, 중앙일보 여론조사에서도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 평가가 67.9%에 달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남북 화해 부분에서는 80% 이상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2011년 5월 12일, 민주주의 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경우 다시 뽑겠다는 응답이 47.4%로 나타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또한 전현직 대통령들 중 가장 호감 가는 인물을 묻는 단순 호감도 조사에서도 30.3%로, 31.9%를 기록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전자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노력
인터넷 선거 혁명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고, ‘온라인 국민 참여 포털’ 구축은 그 어떤 과제보다 큰 의미를 가졌다.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없앴고, 사법 고시 23회인 강금실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사법부에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3년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과 서열을 무시한 여성 대법관( 김영란)을 탄생시켰다. 또 사법 개혁 위원회를 통해 법조 일원화, 국민의 사법 참여 등의 사법부 개혁을 위한 밑거름을 쌓았다. 법원들의 재판 사무 감사가 2006년 폐지된 이유가 김영란 대법관이 기수를 파괴하며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언론인 강준식은 "선거공영제를 확대하여 돈이 들지 않는 선거제를 확립, 부작용은 있었지만 시민단체의 활발한 정치참여를 유도, 시장 개입을 없앰으로써 정경유착의 고리를 상당 부분 끊은 것, 인권 신장, 권위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했지만 권위주의를 청산 등은 그의 공이다."
외교적 치적
‘동아시아 세력 균형자론 주창’,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 추진, 2012년 4월 17일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 통제권을 환수. 이로써 자주 국가로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온 것을 시정하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대북 포용 정책의 계승
햇볕 정책에 이은 대북 포용 정책을 계승,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6·15 공동 선언의 계승을 천명, 남북 간의 군사적 적대 관계를 종식, 경제 협력 증대, 문화 예술 교류 증진, 인도주의 협력 사업의 추진 등을 골자로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선언)을 이끌어냈다. 6자 회담에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로 동북아의 화약고 북한 문제를 외교적으로 잘 관리했다.
불법어로 근절
연안 어족자원 복원에 노력, 저인망식 불법어로 근절과 강경책을 사용했으며 연안에 인공 어초를 대량 투입하는 등의 대책을 시행
취약한 정치 기반
지지 정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적 기반의 취약성과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과 같은 기존 정치 세력과의 타협이 부족해 다수당의 횡포로 탄핵 사태에 이르러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국회의원 김경재, 김근태 비난
황우석 사건에서의 도덕적 문제 태도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05년 11월 27일, “PD수첩”비판
2006년 12월 28일, 박기영 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이 정책기획위원으로 재발탁
노동 정책
2007년 12월 노무현 정권에서 구속되거나 희생당한 노동자 수가 김영삼 정권의 두 배라며 비판
구속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 농성 돌입
외교 관련
2003년 6월, "김구는 실패한 정치인" 발언
2004년 7월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라 발언 "굴종 외교" ‘등신외교’
측근 · 친인척 비리
참여정부가 내건 제일의 기치 또한 도덕성을 중시했으나, 노건평, 안희정, 이광재 등의 측근 비리로 구설수을 낳았다. 대선 자금 문제로 안희정, 최도술 등 사법 처리,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정계를 은퇴하겠다는 발언이 논란
2004년 3월 전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 뇌물수수 혐의로 노건평 불구속과 실명공개와 자살
변양균-신정아 의혹으로 “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들이 많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발언, 2007년 11월 “참여정부는 설거지 정부”
2009년 5월, 국회의원 이종걸은 ´청년 노무현´ 비판
대북 · 안보관
NLL발언, 서해북방한계선 NLL 문제에 대해 NLL은 안보상의 실질적 문제가 아닌 정서적인 문제라고 피력해 파문, NLL이 '영토선' 시각에 대해서도 NLL에 대한 새로운 합의 필요성을 역설, 한편 대북 저자세 외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지적이 있었다. 북한이 참여하는 각종 행사 등에서 북한 요구 수용하여 태극기와 애국가를 금지, 태극기 소지자들을 감금 있었다. 이에 붉은악마는 응원을 포기하기도 했다.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있다.
친일행위자 김지태와 인연
노무현은 '그분 덕에 내가 있다'는 말로 김지태와의 각별한 인연을 강조했다. 김지태의 유족들이 제기한 10만평의 땅과 정수장학회문제를 정치적문제, '기부'를 '강탈'로 바꾸어 놓았다.
http://m.frontiertimes.co.kr/news/htmls/2012/10/2012103195382.html
2008년 9월 24일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평화방송의 호남비토 발언
유행어
TV토론 “맞습니다, 맞고요” 발언 ‘맞습니다맞고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발명품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
‘개량 독서대’ 특허
1994년, 정치인 인명록 통합 관리 프로그램인 ‘한라 1.0’을 개발, ‘노하우(KnowHow) 2000’으로 업그레이드
‘옷걸이 의자’도 발명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
사람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은 노무현의 개인 홈페이지이며, 줄여서 ‘사람사는 세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청와대로 연결되는 주소 “맞습니다 맞고요”, “맞습니다”, “맞고요”는 넷피아에 의해 넘어가기도 했었다. 한명숙, 권양숙
저작물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1,2》(노무현 외 49명 공저, 국방일보 역, 중앙M&B, 2003.12.12)
《로마의 논리와 감성(노무현의 논리 마광수의 감성)》(노무현·마광수 외 공저, 우민OK논술교실, 2005.12.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정가와 CEO를 위한 8가지 리더십의 원리)》(행복한책읽기, 2002.10.15)
《노무현 : 상식 혹은 희망》(노무현 등 저, 행복한책읽기, 2002.02.28)
《노무현이 만난 링컨(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정치인)》(학고재, 2001)
《마음 먹었을 때 시작해라(사시·행시·외시 성공 Story)》(노무현, 박찬종 외 공저, 고시계사, 2000.06.01)
《여보, 나 좀 도와줘》(노무현 저, 새터, 1994)
《성공과 좌절》 (노무현 저, 학고재, 2009.09.22)
《진보의 미래》(노무현 저, 동녘, 2009. 11. 27)
《운명이다》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재단, 유시민 엮음. 돌베개. 2010. 4. 26)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
노무현이 걸어온 길 : 가난·역경 딛고 인권 변호사로, 《한겨레》
변호사들이 들려준 ‘변호사 노무현’의 좌충우돌 법정 비화, 《신동아》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1004123358
http://blog.naver.com/dhp1225/12006899601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96596
http://stoo.asiae.co.kr/news/stview.htm?idxno=2009052514164790171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3/h2008030322253584330.htm
http://16cwd.pa.go.kr/cwd/kr/index.php
http://16cwd.pa.go.kr/cwd/kr/president/
http://www.knowhow.or.kr/main/main.php
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1819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3300000/2002/12/003300000200212192259604.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10/13/200610130500027/200610130500027_1.html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71178.html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59&article_id=4442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5093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91501030223039001
http://www.cowal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58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930913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11004123358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57991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591736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266902&category=mbn00006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김정일(金正日, 1941년/1942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조지 W. 부시 (George Walker Bush 1946년 7월 6일 - )
강금원(1952년 11월 10일~2012년 8월 2일)
3부. 끝
1.
김대중 도서관
|
|
|
2.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
|
|
|
3.
봉하마을
|
|
봉화마을탐방-1 봉화마을탐방-2 봉화마을탐방-3 |
4.
누리마루
APEC 하우스 |
|
|
5.
노무현 전
대통령 묘욕
|
|
|
6.
세종특별자치시
|
|
|
7.
인천대교
기념관
|
|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지식의 피라미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현대사 역사탐방 40탄 문화양념통 진보의 충격, 한미 자유 무역 협정 (2007년 ~2011년) (0) | 2012.11.29 |
---|---|
근현대사 역사탐방 39탄, 문화양념통 개혁과 기득권의 충돌 진보의 배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2004년) (0) | 2012.11.28 |
근현대사 역사탐방 38탄, 문화양념통 진보정권 10년 - 2 - 2 서울의 가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2003년) (0) | 2012.11.27 |
근현대사 역사탐방 38탄, 문화양념통 진보정권 10년 – 2 - 1 서울의 가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2003년) (0) | 2012.11.27 |
근현대사 역사탐방 37탄, 문화양념통 햇볕의 위기, 제2차 북핵위기 (2003년) (0) | 2012.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