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38탄
진보정권 10년 – 2 - 1
서울의 가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2003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 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http://cafe.daum.net/cultureSpice/LnIy/107 IMF 외환위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39 진보정권 10년 1-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40 진보정권 10년 1-2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8 미선. 효순 사건
http://blog.daum.net/allspices/429 노벨상 수상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6 SOFA의 덫, 효순. 미선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7 2002 한일 월드컵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8 제2차 북핵 위기
남북정상회담(2000년)
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
2002년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
2002년 FIFA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량 살상 무기 (북핵문제)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1차 핵실험)
200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2차 핵실험)
6자 회담(六者會談, Six-party Talks)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
출처 : 연합뉴스
제6공화국(1988년 ~ 현재)
대한민국에서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로 1987년 10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한 개정된 민주적인 헌법에 의해 성립되어 현재까지 헌법 개정없이 지속되고 있는 공화국이다.
6월 항쟁 이후 첫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는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어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국제 연합에 남과 북이 함께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고,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이어서 문민정부의 김영삼은 비리 일신 정책과 지방 자치제를 펼쳤으나, 대북관계 냉각과 IMF 사태를 맞게 되었다.
국민의 정부(김대중)는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참여정부(노무현)는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와 경제 발전, 자원외교, 친서민 정책 등을 추구하고 있다.
제6공화국의 세 번째 정부인 김대중 정부의 다른 이름이다. 국민의 정부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단일 후보로 내세운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며, 1998년 2월 25일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 2003년에 임기가 만료되었다. 1997년 새정치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돼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국민의 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IMF 위기의 극복이었다. 국민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과 온 국민의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2001년에 IMF 사태를 조기 극복해 IMF 관리 체제에서 벗어났으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자율적인 구조조정 시스템을 도입, 기업의 체질개선 등을 단행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다. 이를 위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또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본격화하였으며 외환위기를 극복하였다. 또한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이어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국민의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대한민국의 인권 신장에 기여했으며, 특히, 대북관계에 있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했다.
하지만 임기 중 최규선 게이트 사건. 윤태식 게이트 사건. 옷로비 사건 . 새롬기술 사태 , 이용호 게이트 사건 비리 터져 도덕성 치명타 입게되었다. 특히 신용카드 정책, 부동산 정책, 대북 저자세, IT,벤처기업 .의약분업 잘못된 정책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제6공화국의 네 번째 정부인 노무현 정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참여정부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무현의 취임과 함께 2003년 2월 25일에 출범하여 2008년 2월 24일에 종료되었다. 이어서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서 2003년 참여 정부가 출범했다. 2004년에는 대통령 탄핵 소추를 겪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여론의 반발과 헌법재판소의 기각 결정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직에 복귀하게 됐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여당이 탄핵역풍을 맞은 야당을 누르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다. 참여 정부는 돈 안드는 선거 풍토 확립,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과거사 정리, 국민의 정부를 이어 IT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하지만 참여 정부 시절 부동산 폭등, 경제 침체, 종북 정체성 논란, 수도 이전 등의 문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저치의 국정 운영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국정 목표로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참여정부는 권위적 정치문화의 극복과 지역구도 청산, 지방분권, 지역균형 발전적 등의 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남북관계를 더욱 개선시켰다. 참여정부는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한미FTA, 4대 개혁 입법 등의 처리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일부 진보세력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2006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 실험 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음으로서 보수세력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위헌 논란을 겪어가며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결정하였고, 이후 2012년 7월 1일에 정식으로 옛 충청남도 연기군 전역과 공주시, 충청북도 청원군 일부를 구역으로 하는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다.
과거의 패권적 지역주의 구도 탈피
이번 16대 총선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승리로 일단 끝이 났다. 총선 결과를 바라 본 시민들은 지난 총선보다는 긍적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과거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호남차별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저항적인 지역주의를 나타내왔던 호남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인사들이 무려 4명이나 당선이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호남의 저항적인 지역주의로 정의되던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큰 변화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는 충청권에서도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몰고 왔다. 그동안 자민련의 텃밭으로, 충청도 핫바지론 등으로 인해 충청인들의 정치의식수준이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번 선거를 통해 재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충청의 유권자들은 자민련, 민주당, 한나라당의 인사들을 골고루 당선시키면서 자민련 김종필 총재를 무력화시켰다. 충청권에서는 '충청을 대표하는 정치인은 김종필 총재뿐이다' 라는 유권자들의 의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을 치루면서 충청이 낳은 또 다른 정치인 '이인제'씨를 충청의 새로운 대안으로 선택했다.
영남권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지역주의가 더욱 강하게 작용한 총선이 아니었나 보여지지만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번 총선결과 영남에서 한나라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지역주의 정당으로서라기 보다는 김대중정권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한 세력을 결집시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번 16대 총선은 그동안 한국정치의 망령으로 거론되어 온 지역주의를 어느 정도 발전시켜 나가는 한 단계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진보당 사건 이후 한국정치 스펙트럼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진보정당이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진보정당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갖게 하는 결과를 낳은 점에서 다음 총선을 기대해 봄직하다.
4·13 총선을 앞둔 여야의 입장
총선 연대 결성과 낙천·낙선 운동 예고
낙천자 명단 발표와 정치권의 반응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오월동주(吳越同舟)
국민회의 해체, 새천년 민주당 창당
낙천자 명단이 정당 공천에 미친 영향
이회창 체제 구축과 갈등하는 한나라당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의 민국당 창당
기대를 저버린 여야의 선거법 개정
선거 운동과 함께 낙선 운동도 시작
자민련, 낙선 운동에 대한 음모론 제기
지역감정 부추기는 선거 운동
자민련과 민국당의 몰락
낙천·낙선 운동
한국의 유권자는 지역주의에 의해 투표하나 : 제16대 총선의 사례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시민단체가 공직선거에서 부적절한 후보자를 대상으로 공천반대와 낙선운동을 하는 것이다. 낙천운동은 각 정당의 선거 출마자 결정 과정 즉, 후보자간 경선과정이나 당내 공천심사 과정에서 부적격 인사를 선정ㆍ탈락시키고자 하는 운동이고, 낙선운동은 본선과정 즉, 후보등록을 마친 인사 중 부적격 인사를 탈락시키고자 하는 운동이다. 각 정당의 선거 출마자 결정 과정 즉, 후보자간 경선과정이나 당내 공천심사 과정에서 부적격 인사를 선정ㆍ탈락시키고자 하는 운동입니다. 낙선운동은 유권자 혹은 시민사회단체가 공직자 선거 과정에서 특정한 기준(예를 들어 부패경력, 반개혁, 의정활동 등)을 선정하고 그 기준에 미달하는 후보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 이들의 공천탈락과 낙선을 위해 펼치는 운동입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미 지난 2000년 16대 총선 과정에서 전국 1000여개 단체가 연대하여 ‘총선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부패ㆍ무능 정치인 낙선 운동을 펼쳐 86명의 대상자 중 59명을 낙선시킨 바 있습니다.
2000년 1월 전국 412개 단체들로 구성된 '총선시민연대'가 발족하여 16대 4·13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부적절한 후보자에 대한 공천반대,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고 4월 3일 공천 반대자 64명과 반인권 전력 및 납세 비리, 저질 언행 관련자 22명 등 모두 86명의 낙선 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피케팅이나 가두 방송, 현수막 게시 등을 통해 특정후보를 떨어뜨리는 운동을 전개했고 이에 대해정치권에서는 총선시민연대의 낙천ㆍ낙선운동은 불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총선연대는 낙선운동을 강행하면서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결국, 86명의 낙선 대상자 가운데 59명(68.6%)이 떨어졌고, 22명의 집중 낙선 대상자 중의 낙선자는 15명(68.2%)이었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20명의 낙선 대상자 중 19명이 무더기로 떨어져 낙선운동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낙선운동의 지도부는 그 후 선거법 위반으로 30여명이 법정에 서게 되었고 울산과 광주 등 일부지역의 대표자들은 대법원에서 벌금형 확정을 선고받았다. 또 2001년 8월 헌법재판소가 '총선연대의 낙천ㆍ낙선운동을 금지하는 현행 선거법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 제87조는 단체(노동조합 제외)는 그 명의 또는 대표의 명의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반대하거나 지지, 반대하는 것을 권유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해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대한 위법성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이후 시민단체의 선거운동 금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자 선거법 제87조가 '법에서 허용한 단체'에 한하여 선거운동기간 중 선거법의 테두리내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일부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현행법에서 단체의 선거운동 중 신문·방송에 광고하는 행위, 일반선거구민을 대상으로 인쇄물을 배부하거나 서명을 받는 행위, 현수막등 시설물을 설치하는 행위, 집회나 캠페인을 개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 외에 허용되는 행위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시민단체가 낙천,낙선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이에따라 2004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낙천ㆍ낙선운동을 선언했으며, 전국 3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2004 총선시민연대'를 발족해 본격적인 낙선·낙천활동을 벌였다.
정치개혁 틀 마련(유권자와 시민 단체의 힘), 각 유권자에 대한 정보공개-납세, 병역, 전과 기록 등 그러나, 선거법 위반, 낙선 ‘기준’의 문제, 정보공개의 문제성, 후보기록 공개의 역효과, 각 단체들의 선명성 경쟁, 정치세력화의 문제을 야기 시켰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1034000/2000/001034000200002210141021.html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_library&logNo=120055019998
http://www.pac.or.kr/webzine/20_summer/contents/48.htm
http://blog.daum.net/kindlyucc/3355804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12/06/200612060500029/200612060500029_1.html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12/06/200612060500028/200612060500028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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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keconomics&logNo=5695609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3&uid=124362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articleId=4124971&bbsId=D003
2002년 12월 19일 목요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전까지 각축전을 벌인 유력한 후보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 나와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한 제1야당 한나라당의 대표 이회창과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 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 노무현이었다. 한나라당의 후보인 법관출신인 이회창 대표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점쳐져 왔었으나 이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로 대표되는 네티즌의 영향력과 월드컵 기간 동안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 사건으로 불거진 반미감정, 국민들의 감성을 파고드는 민주당 측의 선거전략,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등의 영향으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군소 후보로 지지율은 10% 미만이었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와 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 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
한나라당 경선
한나라당은 2002년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경선을 통해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지방선거와 민주당 후보 재신임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정몽준 출마와 민주당 내분 사태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단일화 방안으로는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
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단일화가 되고 나서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이 이회창 후보를 역전한 직후 이인제가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한 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한다. 게다가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 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은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
10월31일 = 노무현(盧武鉉) 후보, "경선 정식제안땐 검토" 발언
11월 1일 = 정몽준(鄭夢準) 후보, 후보합의에 의한 단일화 제안
11월 3일 = 노 후보, 경선통한 단일화 제의
11월 4일 = 국민통합21, 경선통한 단일화 거부. 민주 단일화 당론 확인
11월 7일 = 양당 후보단일화 협상단 구성
11월 8일 = 단일화 협상 착수
11월11일 = 노 후보 여론조사 통한 단일화 제의
11월12일 = 정 후보 후보회담 제의, 노 후보 수용
11월13일 = 국민통합21, 대의원 참여 여론조사 수정 제안
11월14일 = 후보회담 실무접촉
11월15일 = 후보회담 성사
11월16일 = 국민여론조사 통한 후보단일화 전격 합의 및 구체방안 협상 개시
11월17일 = 후보단일화 세부절차 타결
11월18일 = 민주.통합21, 여론조사 방식 유출 공방
11월19일 = 협상 재개를 위한 1차 사전접촉
11월20일 = 2차 사전접촉에 이은 협상단 재구성 및 협상 재개
11월21일 = 협상단 철야 협상
11월22일 = 후보단일화 방안 수정, 타결
11월24일 = 여론조사 실시
11월25일 = 노 후보 단일후보로 확정
11월29일 = 노.정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추진 합의 및 공동선대위 구성
12월13일 = 민주-통합21 공조합의문 서명
12월13일 = 정 대표, 노 후보 지지유세 시작
12월18일 = 정 대표, 노 후보 지지철회 선언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1/nd2002010010.html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241
http://news.donga.com/3//20020811/7851390/1
http://news.donga.com/3//20021126/7886115/1
http://news.donga.com/3//20021215/7892671/1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111658326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031308032704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9724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2&no=163107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3000000/2002/11/003000000200211121912637.html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2&no=339167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014&aid=0000042287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122117394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22120826051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05042551170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125012010632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031602874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022146865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6664.html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당적 이탈과 열린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번 총선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탈피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이 제도의 큰 혜택을 본 정당은 민주노동당으로, 새천년 민주당(5석)과 자유민주연합(4석)보다 지역구 의석 수는 더 적었지만(2석) 정당 득표율에서 앞서서 새천년민주당(4석)과 자유민주연합(비례대표 없음)보다 훨씬 더 많은(8석) 비례대표 의석을 얻었다.
열린우리당
2004년 초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에 뒤처지던 지지도가 역전되어 2위로 올라섰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한나라당과 경합 내지는 근소한 차이로 1위로 올라서는 선전을 펼쳤다. 이에 일각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과반수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제1당은 차지할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이 나왔는데, 2004년 3월 12일에 터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에 힘입어 당의 지지도가 급상승하였고,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선거운동이 효력을 발휘하고 여기에 정동영 당시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정동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 사퇴 및 비례대표 후보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총선 결과 원내 152석을 확보하면서 민주화 이후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당
수백억원의 기업 비자금을 대선 자금으로 수수한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당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고,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키면서 지지도가 결정적으로 하락하였다. 이후 전당대회에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한 홍사덕 의원을 제치고 총선에서의 승리를 공약한 박근혜 의원이 새로운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근혜 대표는 차떼기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죄와 함께 거여 견제론에 바탕하여 선거운동을 펼쳤고, 영남 지역의 지지에 힘입어 원내 121석을 확보하여 선거운동기간 초기에 예상되었던 참패를 면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사상 최초로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 대표의 지역구를 포함, 두 곳의 지역구에서 승리하였고, 13.0% 정당투표 득표율로 무려 8석의 비례대표 의석을 차지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제치고 원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과 공동으로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에 대한 반발로 지지도가 급락하는 타격을 입었다. 무엇보다도 한나라당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이 있는 호남 지역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졌고, 이어진 당내 내분의 결과 추미애가 새천년민주당의 선대 위원장을 맡았다. 추미애는 광주광역시에서 삼보일배를 하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지지세 회복을 도모했지만 광주광역시와 전라북도에서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전라남도에서 5석, 비례대표 4석을 얻어 원내 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했다.
자유민주연합
노무현 대통령이 충청권에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하고 이를 실현에 옮기려는 상황에서 자민련이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과 공조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데 대해 충청권의 민심은 냉랭했고 그 결과 대전광역시와 충청북도의 모든 의석을 열린우리당에 내주고 충청남도에서 겨우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제17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은 문경·예천의 신국환과 나주·화순의 최인기 뿐이었다. 이후 두 의원 모두 민주당에 입당하였다.국민통합21은 울산 동구의 정몽준이 당선에 성공하여 1석을 얻었지만 정당 등록이 취소되었다.
2004, 4월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직후 '총선연대가 선정한 낙선대상자의 낙선현황'을 분석하여 발표하였습니다. 부정부패, 선거법위반, 민주헌정질서 파괴, 반유권자적 행위자 등으로 분류되는 총선연대의 <낙선명단1> 총106명 중 78명(73.6%), 탄핵소추안 찬성자 <낙선명단2> 총100명 중 51명(51%)가 낙선하여 결과적으로 총선연대가 지난 4월 6일 발표한 낙선대상자 206명 중 총129명(63%)이 낙선되었다고 밝혔습니다.
1) 부패, 비리 행위
2) 선거법위반행위
3) 개혁법안 및 정책에 대한 태도
4) 반인권 전력 및 헌정질서파괴
5) 의정활동의 성실성, 반의회·반유권자적 행위
6) 도덕성 및 자질
17대 총선 7대 관전포인트
참여정부 중간평가
■ 원내 제 1당은?
한나라당의 대선 불법자금과 관련, '차떼기'라는 비난
민주당이 조순형 대표 선출을 계기, '정동영 효과' '친노' VS '반노' 틈새전략
우리당
■ 3김 퇴진
지역주의와 보스 정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 모두 정치권에서 물러난 뒤 치러지는 첫 선거
DJ의 복심
10선을 노리는 자민련 김종필 총재
김혁규 전경남지사의 입당
■ '바꿔'에서 '물갈이'로
<총선연대>를 조직 낙천·낙선 운동을 펼친 시민단체
'총선 물갈이 국민연대'는 '당선 운동'
고이즈미 총리의 연초 신사참배와 독도 발언으로 고조된 반일 감정 분위기
■ '특검 후폭풍'
검찰의 불법대선자금 수수
노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노대통령은 재신임 폭탄 선언
우리당의 '개혁완성'
■ 새얼굴
현역 의원들이 불출마 선언
한나라당내 '물갈이론'과 민주당의 '호남물갈이론'
'노무현 사단’
TK 지역 공략
■ 진보정당과 무소속 돌풍
1인2표제가 도입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민주노동당의 선전
■ 옥중 출마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21417108280659&outlink=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82155255&code=940100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kkdoll&logNo=6001544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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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ithjoonim&logNo=40001778085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inemaorbit&logNo=80003257298
http://info.nec.go.kr/main/showDocument.xhtml?electionId=0000000000&topMenuId=BI&secondMenuId=BIGI
http://www.jbelection.go.kr/index.sko?menuCd=AA0400200105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yunornr&logNo=110078598614
http://blog.naver.com/withjoonim/40001830606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七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7년 12월 19일수요일에 실시되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12시간 동안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3765만 3518명의 유권자 중 2369만 385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번 투표는 잠정 62.9%가 참여해 사상 최저치로 밝혀졌다.[1] 기업인 출신으로서 경제회복 공약을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07121808551666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alee1212&logNo=5015475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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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124083204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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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espoir/8126569?srchid=BR1http://blog.daum.net/espoir/812656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okie9&logNo=2012093029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o1224h&logNo=60045598369
http://blog.daum.net/irepublic/7888199?srchid=BR1http://blog.daum.net/irepublic/788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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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ahn4527&artseqno=2822424
http://blog.daum.net/shc1224/13393867?srchid=BR1http://blog.daum.net/shc1224/13393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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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끝
'길에게 세상구경을 물어본다. > 지식의 피라미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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