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36탄
서울의 여름
레드 콤플렉스, 2002 한일월드컵 (2002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 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http://cafe.daum.net/cultureSpice/LnIy/107 IMF 외환위기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39 진보정권 10년 1-1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40 진보정권 10년 1-2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8 미선. 효순 사건
http://blog.daum.net/allspices/429 노벨상 수상
http://cafe.daum.net/cultureSpice/MS7g/46 SOFA의 덫, 효순. 미선사건
남북정상회담(2000년)
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
2002년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건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
출처 : 연합뉴스
2002년 FIFA 월드컵(2002 FIFA World Cup)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이 월드컵의 역사 상 처음으로 공동 개최한 제17회 FIFA 월드컵으로,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 새 만남, 새 출발’을 슬로건으로 하였으며,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각각 10곳, 총 20개의 도시에서 31일 간 64경기를 치렀다. 브라질이 우승하였고, 독일이 준우승하였다. 개최국인 대한민국과 일본은 이 대회에서 각각 4강,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일본,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월드컵 유치 추진
1989년 11월 월드컵 유치 공식발표
1990년 10월 유치위원회 발기인총회
1991년 6월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발족
1993년 1월 월드컵 개최 15개 후보도시 발표
1994년 정몽준, 아시아 쿼터 FIFA 부회장 당선
1994년 11월, 대한민국 2002년 월드컵 유치의사 표명
1996년 6월 1일 FIFA 이사회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 일본 공동개최 결정
당초 관심을 표명한 멕시코는 유치를 포기하였다. 일본은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를 준비하면서 아시아권 최초 개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뒤늦게 유치를 표명하면서 판세가 양자구도로 재편되었다. 1994년 아시아권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정몽준이 승리하면서 판세를 뒤집는 계기가 된다.
일본은 요코하마 스타디움 등 개최지 결정 이전에 경기장 공사를 시작하고, 최첨단 버추얼 스크린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월드컵 유치를 위해 배수진을 친다. 유치전이 과열되면서 일각에서 공동개최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나가누마 겐 당시 일본 축구 협회 회장은 단독 개최 실패시 사임을 밝히는 등 일본의 단독개최 의지는 강했다.
주앙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은 공개적으로 일본 지지를 표명하였는데 아벨란제의 연임을 막기 위해 유럽은 자연스레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판국이 되었다. 양국의 유치전이 과열양상을 띄게되고, 표대결에서 일본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면서 아벨란제 회장은 공동개최를 제안하고, 투표권을 가진 FIFA 이사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2002년 월드컵은 공동개최로 결정되었다.
경제력에서 앞서고 오랜 준비를 해온 일본의 단독 개최가 타당해 보였지만 일본은 월드컵 본선진출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일본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가 결정된 후 199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FIFA 부회장 정몽준을 앞세워 적극적인 로비와 범국가적 유치전에 나서면서 상대적으로 축구계 중심의 일본에 비해 유치전의 무게감에서 앞섰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공동개최는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고 있던 남미와 유럽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부정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월드컵이 폐막한 6월 30일의 다음날, 2002년 7월 1일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4강 진출 기념으로 임시공휴일이 되었다. 16강 토너먼트부터 전후반 90분동안 무승부일시 연장전에서 시행되던 골든골제도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다음 월드컵인 2006년 FIFA 월드컵대회부터는 전후반 90분간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 연장전에 한 팀이 득점을 해도 끝내지 않고 연장 전후반 30분 경기를 모두 치른 뒤 앞선 팀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고 그래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전과 동일하게 승부차기를 진행했다.
개최국 선정
시드배정
조별리그
2002년 6월 2002년 FIFA 월드컵 3,4위전 경기가 실시되는 2002년 6월 29일,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해군이 불법남침을 하여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영하소령(추서계급) 등 6명의 해군장병들이 전사했다. 이 때문에 2002년 FIFA 월드컵 3,4위전 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과 터키 축구 국가대표팀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를 추모하는 묵념으로 경기를 시작했다. 이 와중에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의 발인식에 불참하고 2002년 한일월드컵 결승전인 브라질과 독일의 결승경기를 관전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여 맹비난을 받았다.
황장엽은 “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라고 주장했다.
서울법대 교수 조국은 오연호와 공저한 책 진보집권플랜에서 연평해전과 관련, "서쪽에서는 해전이 벌어지고, 동쪽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국민들이 받아들이게 됐다"고 주장했다.
보상금 논란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0710700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96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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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tv.donga.com/view.php?code=&idxno=201005120032759&category=002002&page=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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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179535
http://media.daum.net/cplist/view.html?cateid=1001&cpid=2&newsid=20100526073108325&p=yonhap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01124180408375&p=kukminilbo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OJT&qid=2eNx3
http://ko.wikipedia.org/wiki/2002%EB%8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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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435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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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211230100147990012062&servicedate=2012112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crs2009&logNo=80170861413
http://cafe.daum.net/hanryulove/EcC9/180062
빨간색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면서 빨간색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리킨다.
역사 속의 레드 콤플렉스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후 반공 교육에서 붉은색을 공산주의의 혁명성을 나타내는 색깔 또는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색으로 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공산주의자를 묘사할 때 ‘빨갱이’라고 비하해서 불렀다. 우리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레드 콤플렉스라고 불리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반공이라는 국시와 국가보안법이라는 강력한 반공법과 더불어, 분단 이후의 대한민국 사회 모든 영역에 침투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대한민국에서 노동 운동이 태동하던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자본가 등 지배 계층은 노동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동일시하였으며, 그로 인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탄압이 횡행하였다. 또한 혁신을 주장하는 진보주의 정당의 활동도 좌파에 대한 사회 전반의 거부감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시민들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으로 대한민국은 1987년 이후 민주화되었고, 김일성 사망과 북조선의 경제의 위기로 레드 콤플렉스는 줄어들기 시작하였지만,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색깔론’ 논쟁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각 당과 후보자들은 자신이 친북 세력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정치 분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빨간색을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FIFA 월드컵 때 축구 응원단 붉은악마의 활약과 붉은악마의 빨간색 티를 응원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이 입고, 거리 응원 등을 함으로써, 레드 콤플렉스가 많이 완화되었다.
사례
1) 경쟁관계에 있지 않은 당사자들끼리 겨루는 경기(특히 운동회)를 할 때 일본에서는 홍백전(紅白戰)이라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청백전(靑白戰)이라고 한다. 한국의 전통에서 홍백이란 말은 있지만 청백으로 나누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았다.
2) 대한민국 축구 서포터 붉은악마가 활약할 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붉은악마를 백의천사로 바꾸자는 제안을 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와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회원들 사이에 친북 논쟁이 있었다. 같은 편끼리 서로를 ‘빨갱이’라 매도한 사건이다. 한국논단의 발행자 이도형은 증권거래소에서 주가가 오르고 내린 것을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구분하는 현상을 개탄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주가가 오른 것을 붉은색으로 표시하면 국민들이 무의식적으로 붉은색을 선호하게 되어 공산주의가 침투할 위험이 높아진다고 하였다.
http://blog.daum.net/jingug/13306731
http://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19689
http://m.bpnews.kr/articleView.html?idxno=19376
http://data.adic.co.kr/lit/fulltext/SK002697/01.html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룩하는 동안 전국을 강타한 붉은 물결이 이른바 '레드신드롬'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분단의 역사를 걸어오며 공포와 금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붉은 색이 젊은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붉은색의 물결은 붉은색을 뜻하는 영어단어 레드를 따서 이른바 레드 신드롬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붉은색의 열풍, 레드신드롬은 붉은 티셔츠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붉은색 가방에 붉은색 신발, 붉은색 수영복까지 요즘 가장 잘 팔리는 붉은색 상품들이 상점마다 진열대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한국민이 이처럼 붉은색에 열광하게 됐다는 사실은 지난 50여년간 계속 된 붉은색에 대한 콤플렉스와 비춰볼 때 새롭고도 급격한 변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때문에 우선 레드신드롬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 지금의 붉은색은 과거의 레드콤플렉스의 붉은색과는 다르다는 점을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최근의 레드 신드롬은 반공과 이념 대립의 상징이었던 레드 콤플렉스를 극복해 낸 후 생겨난 것이 아니라 월드컵 축구를 계기로 우연히 생겨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난, 아니 우린 ‘붉다’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오싹 솟는다. 소위 ‘레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혹, 그런 콤플렉스가 없다면 간첩이나 공산당으로 몰렸었다. ‘붉다’는 것은 곧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색이다. 빨갱이! 얼마나 익숙한 단어인가? 미술 시간에 붉은 색을 맘대로 사용하지 못하던 어린시절의 아픔이 있다.
그때의 버릇인지 전후세대이면서도 아직 난 레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온 나라가 붉은색 천하다. 혹 붉은 티셔츠를 입지 않으면 매국노라도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편하다. 월드컵이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 준 진풍경이다. ‘레드 콤플렉스’가 ‘레드 신드롬’으로 바뀌었다.
‘레드 신드롬’을 보며, 아니 그 한 중간에 살면서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레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게 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니폼이 붉은색이어서 붉은색 옷을 입고 응원하던 응원단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경기장이든 길거리이든 모두 붉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월드컵 첫승과 16강 진출 등등, 한국축구팀의 계속된 선전과 이에 따른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붉은색 응원열기로 전국에 때아닌 단풍철이 도래한 지금, 국민들의 '레드컴플렉스'를 선도했던 한국의 보수언론들이 서둘러 붉은색을 찬양 고무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조종사 파업 때 "앞으로 또 파업을 하게 되더라도 제발 당신들은 붉은 머리띠만은 두르지 않기를 바란다"([동아광장] 정부를 '물'로 보는 사람들, 2001.6.15)고 비아냥거렸던 동아일보는 17일 <붉은색 '이념의 굴레' 벗었다>는 기사에서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가 한국 사회에 잠재된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을 씻어내고 있다"며, "남북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한국 현대사에서 금기시됐던 붉은색이 월드컵 응원 열풍에 힘입어 승리의 염원이 응축된 색깔로 바뀌고 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러면서도 젊은층의 '레드 신드롬'이 걱정된 듯 제3자의 입을 빌어 "레드 콤플렉스의 레드는 특정 이념이 포함된 것이고 '붉은 악마'의 레드는 사심 없는 한국인의 염원을 담은 색이기 때문에 분명히 구별지어야 한다"(대기업 임원인 이모씨), "이것이 또 다른 획일로 번지거나 한국 사회가 가져야 할 이념의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문화평론가 박광택씨)고 경계하는 빛을 보이기도 했다.
평양 통일축전 당시 '만경대 필화사건'을 대대적으로 주도했던 중앙일보 역시 17일자 <'길거리 응원'이 '레드 콤플렉스'를 날렸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월드컵을 통해 나타난 '길거리 응원'이라는 독특한 현상과 16강 진출의 성과가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양식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고 전하고,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권위주의 시대 때 붉은 색이 공산주의를 상징한다고 해서 이의 사용 등을 금기시했던 분위기가 붉은 악마가 주축이 된 길거리 응원을 통해 바뀌게 됐다는 점"이라고 소개했다.
중앙일보는 이어 "붉은 색이 공산주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게 우스운 거 아니에요?"라고 반문하는 20대 여회사원의 말을 인용하면서 "붉은 색은 더 이상 공산주의·피·악의 상징"이 아니라 "대신 국민에게 열정과 단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월드컵이 바꾼 의식구조'의 일단을 소묘했다.
'레드컴플렉스'를 양산하여 이 땅을 사상의 불모지로 만드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조선일보의 변신은 그 가운데서도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큼 단연 돋보였다.
조선일보는 15일자 <붉은색>이란 만물상 칼럼에서 "적색이 공산혁명의 상징색이 되면서 자유진영에는 적색기피증이 생겨났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겪은 한국은 더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존의 레드 컴플렉스의 범람을 변명(?)하면서, 전국에 넘실대는 붉은 셔츠의 물결에 대해 "이제는 우리도 붉은 색을 아름다운 색깔 중의 하나로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 아닐까"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썼다.
조선일보는 나아가 16일자 사설 <꽃처럼 아름다운 선홍빛 물결>이란 글에서 붉은색을 "질서정연한 선홍빛 물결은 꽃처럼 아름다웠다"고 예찬하며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선홍빛 열정과 탁트인 함성 속에 내재한 한국인의 원상(原象)을 바로 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보수언론들의 이러한 현란한 변신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지 의아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붉은 색에 이념적 족쇄를 채워 국민들의 미학적 상상력을 제한하고 사회를 경직되게 만드는 데 기여했던 보수언론들이 본질의 변화없이 이제 와서 느닷없이 "꽃처럼 아름다운 선홍빛 물결" 운운하며 붉은 색을 찬미하는 것은 월드컵 열기에 편승한 '레드 마케팅의 일환' 혹은 '대중영합적인 처세'로 볼 수도 있기 때문.
붉은 색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빨갱이'를 연상하는 극우의 무리들이 보수를 자처하며 이 땅의 메인스트림을 점유하고 있는 터에 상기한 보수언론들의 복화술을 '붉은 색에 대한 진정한 사면·복권'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그 변화는 보수언론의 메마른 심장에서가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탁트인 길거리에서, 강요된 애국이 아니라 자발적인 애국의 함성으로 적조(赤潮)처럼 붉게 번지고 있다.
제도권 교육을 받는 동안에도 어느 누구도 김대중 = 빨갱이의 등식을 깨주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태의 <남부군>,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나서야 빨갱이 = 우리의 적 등식이 사그라 들고 무언가 근본 원인에 천착하기 시작했고 그 보다 한참 뒤 스스로 역사인식의 기준을 정립한 다음에야 비로소 김대중 = 빨갱이 라는 등식을 완전히 머리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었다. 그만큼 레드 콤플렉스를 떨쳐 내고 정상적인 사고의 평형 감각을 갖기 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보내야만 했다.
<레드 콤플렉스>는 우리에게 스며든 부지불식간의 레드 콤플렉스에 대해 여러가지 시각에서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두고 쓴 글이다. 매카시즘과 같은 맥락의 이 개념은 여전히 낙후된 정치권 일부에선 유효한 정치 전략일지는 몰라도 사회적으로 일면 성숙된 지금 시점에선 크게 참신한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책이 출간된 97년도만 해도 실제 생존 인물들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으며 레드 콤플렉스 운운 하는 것 자체가 신선하게 느껴 졌다. 당시 무심코 삼인 출판사에 보낸 엽서가 당첨되어 후에 책 서너권을 무료로 받아 보았던 기억도 난다. <레드 콤플렉스>에선 김대중, 한완상, 윤이상, 조정래, 서준식, 리영희가 레드 콤플렉스의 피해자로 다뤄지며, 당시 서강대 총장을 역임했던 박홍과 김영삼이 레드 콤플렉스 조장자 혹은 수혜자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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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ohmynews.com/litmus/177348
http://www.peoplepower21.org/Research/96939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서포터즈 클럽이다. 1997년 봄 PC 통신의 축구 관련 동호회에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을 조직적으로 응원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가칭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Great Hankuk Supporters Club)을 설립하여 1차 예선전부터 직접 경기장에 참여하면서 조직적으로 응원을 시작하였다. 이후 정식명칭에 대한 공모를 통해서 1997년 8월 ‘붉은악마’를 정식 명칭으로 정했다. 국가대표팀이 붉은 경기복을 입고 뛸 때 외국에서 붉은원령이라는 말을 한 이후에 만들어진 말이다. 2002년 FIFA 월드컵이 개최되었을때 처음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2006년 FIFA 월드컵부터는 활동을 중지하였다.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축구 문화를 계발하고 저변을 확대하며, 건강한 여론을 형성해 한국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는 데 목적이 있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단체로서 영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본과 권력의 간섭을 배제한다. 축구 문화 계발을 위한 연구 및 토론 사업, 건강한 여론 형성과 한국 축구 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 붉은악마의 본질에 반하지 않는 수익 사업 등을 추진한다. 조직은 가맹단체와 자치단체 간의 협의기구이자 최고 의결기구인 운영위원회, 각종 주요 현안과 관련하여 운영되는 일시적인 조직인 특위, 머플러 등 각종 서포팅 물품에 관련된 사항들을 담당하는 물품특위, 행정 및 재정을 담당하는 간사, 가맹단체, 자치단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가맹단체의 대표는 대의원 자격으로 대의원회의 의결권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활동 및 주요 안건은 대의원회의 의결을 통해 결정된다. 운영위원회 의장은 선거를 통해 운영위원 중에서 선출되며 대외적으로 붉은악마를 대표한다.
치우천왕
명칭에 대한 논란
일부에서는 ‘붉은 악마’라는 명칭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붉은 색 유니폼을 입는 팀이 ‘붉은 악마’라는 애칭을 가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 UEFA 유로 1984 준우승과 1986년 FIFA 월드컵 4강에 오른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은 ‘붉은 악마’라고 불렸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붉은 악마(Red Devil)’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 역시 그들의 붉은 유니폼으로 인해 ‘붉은 악마’(los Diablos Rojos)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한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당시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4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고 당시 외국 언론들은 한국 대표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 등으로 호칭하며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붉은악마 신드롬
월드컵 길거리 응원
붉은악마 서을광장 응원
http://lculture.net/forum/issue.php?f=3&idx=12&p=6
http://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1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0&no=318328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bal7&logNo=40051167904‘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ionrise&logNo=15965556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413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20910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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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eddevil.or.kr/home/home.asp
http://weekly.hankooki.com/lpage/column/200507/wk2005072211151837130.htm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68436&categoryId=20000048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noki81&logNo=140159308714
http://blog.daum.net/tanhack/8631260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4626826
http://www.segye.com/Articles/News/Opinion/Article.asp?aid=20121121024534&cid=&OutUrl=daum
http://cafe.daum.net/alhc/ALGC/3540?docid=CxSE|ALGC|3540|20121022143109&q=%BA%D3%C0%BA%BE%C7%B8%B6
http://www.ccd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4418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811_0011356533&cID=10201&pID=10200
대한민국의 민족 해방 계열의 하나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지지하고 그에 따른 정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에 마르크스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념은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김일성에 대한 거부감은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확고하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후 전체주의적 사회통제가 극심해지고, 10·26 사태 이후 12·12 군사 반란으로 등장한 전두환 군부(軍府)가 1980년 소위 '민주화의 봄'이 좌절시키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자유우방 미국'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흔들리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1980년대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정치운동세력이 생겨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체사상도 유입되었다.
1985년에 발표된 김영환의 강철서신은 주체사상이 학생운동세력에 퍼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고, 독재체제를 용인하는 미국에 대한 반미(反美)의식과 한국 특유의 민족주의적 토양을 바탕으로 소위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이념으로 하고 있던 학생운동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적 태도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주체사상파는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실상이 전해지고 1996년에 한총련의 주도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조국통일범민족대회'를 김영삼 정부가 강경하게 진압한 후 한총련에 대한 이적단체 판결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구속·수감됨으로써 급속히 그 세력이 약해졌고, 1997년 말의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학생들의 정치운동 참여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사실상 붕괴되었다.
초기 주사파는 남로당, 해외 유학생 등과는 달리 외부의 영향 없이 자생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에 의해 이북과 직접적인 연계를 갖기도 했다. 이들은 강철서신의 유행으로 1980년대 말까지 수를 불렸지만, 북(北)과의 연계 및 비밀조직 형태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겹치면서 쇠락하였다.
반면, 민족해방계열이 주도하고 있던 한총련은 기본적으로 대중학생조직을 지향하고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1993년 발족 당시부터 학생운동 세력 중 최대규모로 그 영향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민족해방계열의 일부로 한총련에 참여한 주사파는 그 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총련이 1996년 소위 '연세대 사태' 이후 대한민국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규정되고 1997년 말부터 학생운동이 퇴조함으로써 급격히 쇠락하였다.
민주화 운동세력의 일부로도 참여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신한국당(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제도권 정당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때문에 일부 반공주의자들 가운데에는 민주화운동과 주사파, 공산주의자를 동일한 집단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한편, 당시 운동세력중 비전향하던 주사파 일부는 2002년 대선 즈음부터 전향하여 소위 '뉴라이트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을 통해 국회로 진출하였다.
주사파의 상당수는 민중민주계열의 주도로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에 입당함으로써 제도권정당으로 진출하였다. 주사파를 비롯한 민족해방계열은 지구당에 집단입당하는 방식으로 '지구당 위원장'을 자기정파로 선출하고 민노당을 접수하여 민중민주계열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갈등은 결국 2007년 대선 직후 폭발하여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으로 이어졌다. 2012년 총선거 직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탈당파(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유시민의 국민참여당이 통합한 통합진보당은 총선 직후 비례대표 의원 부정경선으로 갈등을 빚었고, 부정경선을 "경기동부연합"이 주도하였음이 폭로되었다. 경기동부연합은 주사파 조직으로 의심받고 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 당시 심상정, 노회찬 등의 인사들은 기존 민주노동당 내 "종북주의"를 비난하며,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하였다.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에서는 주체사상과 무관하더라도 좌파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를 주사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98년에는 최장집 등이 보수 정치권에 의해 주사파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여전히 보수적 정치세력과 언론은 진보정치세력을 "친북 좌파"나 "종북 좌파"라는 비하적 의미의 용어로 부르는 경향이 있으며, 주사파나 주사파 출신자 뿐만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유연한 태도 등을 두고 주사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http://srchdb1.chosun.com/pdf/i_service/read_body.jsp?ID=9407190205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31031.html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11652
http://news.donga.com/3//20030228/7917983/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42077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17977.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45159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10/2010101001276.html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4303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334740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내에서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준말로 국보법(國保法)이라고도 한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2·4파동으로 말미암아 "국헌(國憲)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僭稱)하거나 그것에 부수하여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에 대해서 최고 무기징역의 형벌을 과하는 법률로 제정되었다.
이후 1953년 대한민국 최초의 형법 제정에 참여했던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형법 제정 이후 국회에 나와 "국가보안법 주요 내용 대부분이 새 형법에 담겼으므로 국보법은 폐지해도 된다"며 권고했으나 의원 중 한 사람이 "지금은 전시이니 유명무실한 대로 그냥 두는 것도 무방하지 않으냐"고 말하는 바람에 유지된다. 이후 1963년 6월 10일과 1980년 12월 31일에 개정되었다. 1980년 개정에는 반공법을 국가보안법에 흡수시켰다.
1990년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을 경우에만 축소적용”하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한정합헌 판결을 내렸다. 1991년 5월 31일 제8차 개정에서 1조 2항에「국가보안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성립하고, 금품수수, 잠입탈출, 찬양고무 등의 죄에 있어서는 행위자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행한 경우에만 벌할 수 있도록 하고, 불고지죄의 성립범위를 반국가단체 구성, 목적수행, 자진지원 등의 죄에 한하여 인정하여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특히, 1992년 4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위반 사범에 대한 구속기간 연장이 지나치게 인권을 제약한다고 하여 위헌결정을 하여 동 규정을 무효로 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301614582&code=9003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161002552&code=900312
http://www.ytn.co.kr/_ln/0104_201206032027068011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0946
http://www.kbs.co.kr/1tv/sisa/aboutkorea/vod/1234582_1173.html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9859.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14738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78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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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4/09/005000000200409081739526.htm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1996257
http://www.sultoday.co.kr/detail.php?number=9352&thread=14r01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12/h2010120916085921950.htm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98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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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700&num=70777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243/3//19990817/74626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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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kind=ba07&serial=14125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2/02/22/0601130100AKR20120222004200081.HTML
보주의(進步主義, Progressivism ) 또는 혁신주의(革新主義)는 정치·경제·사회 체제의 개혁을 선호하는 정치 사상이다. 국제 표준적인 의미로서의 '진보주의'는 이념적인 의미에서 현재 사회체제를 개혁 혹은 변혁하는데 중점을 두는지, 두지 않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에서의 '진보'는 사회 개혁과 변혁을 지향하는 세력들인 진보정의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민주통합당 등을 뭉뚱그려 부르는 호칭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외에도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진보와 보수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흔히 종교, 학문, 신학적인 개방성, 사회구원(사회참여), 진보적 정치이념,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진보적 기독교인으로 이해한다. 일부 뉴라이트 등 우파 와 반공주의자들은 진보라는 용어를 '친북적인 공산주의'와 결부시키기도 한다
보편적인 진보주의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85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121514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3761.html
http://www.pol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159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57764.html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정치 이념이다. 대한민국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전 1920년대인 자유시 참변 이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에서 시작되어 해방 직후 만주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종교의 자유 탄압, 1945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의 3.8도선 기점으로 남북한을 분할하는 신탁통치 찬성 등으로 견고하게 형성되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 서면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으며, 반공주의자, 자본가들에 대한 탄백제와 인민재판은 당시 부유층 계열에 속했던 친일파와 가난한 자의 분열을 초래하여 북에 있던 대규모의 친일파 출신들이 남한으로 넘어 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난 지 얼마 후, 공산당이 찬탁입장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것처럼 되자 대부분의 남한 민중들이 공산주의에 등을 돌렸으나 북한의 민중들은 이를 지지했다. 남한에선 독립운동가이자 공산당의 핵심으로 활동했던 조봉암 등이 공산당을 탈퇴하였고, 미 군정이 백색테러단체라 규정한 우익청년단원들의 좌익에 대한 테러행위가 자행되었다. 또한, 1948년에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어 정권의 반공주의를 법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국 전쟁 후에는 남한에서 반공정책이 더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반공은 남한의 통치자들에게 있어서는 권력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반체제세력에게는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통치했을 시절, 공산주의자와 그에 가담한 자들은 국외로 추방되거나 처벌받았다. 하지만, 인혁당 사건 날조 의혹이나 동백림 사건 과장 의혹 등, 독재, 군사정부의 반공주의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우세하였으며, 제주 4·3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 민간인 학살의 원인은 반공주의에 있다는 견해도 있다.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에서 반체제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반공법을 두고 흔히 '막걸리반공법'이라고 불렀다.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206071127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323333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도시 미관을 이유로 붉은색 계통의 옥외간판을 규제하는 것을 말한다. 1999년 말을 시작으로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시행하였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간판의 배경이 적색이나 검정일 때 그 색이 차지하는 넓이가 반을 넘으면 안 된다. SK그룹은 적색이 배경으로 된 주유소 간판의 색 비율을 바꿔 오다가 2005년에 적색 이외에 주황색이 들어가도록 로고를 바꾸었다. 이 밖에도 맥도날드, 피자헛, 코카콜라, KFC, 나이키 등 적색 바탕 간판을 쓰는 다국적 기업도 규제를 받는데, 제프리 존스 주한 미국 상공회의소 회장은 이에 대해 항의하였다. 반면 우체국 간판은 원색 적색이 아니라 해서 규제를 받지 않는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10091820051&code=920401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040/3//20011217/7770076/1
1950~1954년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말한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서는 "1950년 54년 사이에 일어난, 공산주의 혐의자들에 반대하는 떠들석한 반대 캠페인으로, 대부분의 경우 공산주의자와 관련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직업을 잃었다" 고 정의하고 있다.
이 낱말은 특히 미합중국에서 대략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제2차 적색 공포(레드 스케어) 시대'의 정치적 행위에 쓰인다. 이 시기는 소비에트 연방의 간첩과, 미국내 기관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을 크게 두려워하던 시기였다. 원래 매카시즘이라는 말은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미국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으며, 자신은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매카시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측에서는 이를 정적의 성격이나 애국심에 대해 비난을 선동하거나 무분별하고 근거없는 고발을 비판하는 말로 쓰인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40100000002/3/70040100000002/20061031/8367739/1
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110417002617&subctg1=&subctg2=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5926§ion=sc7§ion2=책/문학
미국 역사에서 강한 반공 시기였던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또 1947년부터 195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나타났다. 이는 '진실한 미국인(real American)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급진주의, 노동조합주의, 기타 '비미국적(un-American)사상과 행위에 대한 전(全) 국민적 공포 히스테리 열풍으로 정의할 수 있다. 제1차 적색 공포는 노동혁명과 정치적 급진주의에 관한 것이었으며 제2차 시기에는 국내외 공산당원들의 연방정부침입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제1차 적색 공포(1917-20)
제2차 적색 공포(1947-57)
http://blog.daum.net/lsyool/157863
http://ask.nate.com/qna/view.html?n=6269006
http://leicaclub.net/gallery/showimage.php?catid=member&i=89009&imageuser=1353
http://leicaclub.net/gallery/showimage.php?catid=member&i=89009&imageuser=1353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1509621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9841
http://bybook.co.kr/shop/shopdetail.html?brandcode=020012000026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ubong1291&logNo=40160689618
http://blog.hani.co.kr/b1wa/22357
http://blog.daum.net/gip1104/14515508?srchid=BR1http://blog.daum.net/gip1104/14515508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김정일(金正日, 1941년/1942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 )
1.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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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중 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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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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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02 한일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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