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역사탐방 33탄
진보정권 10년 1 - 2
정권교체,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1998년)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288 박정희 사망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9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309 진보당 창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317 전태일 분신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081 12.12사태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3 5.17쿠데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4 전두환 백담사 운둔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52 언론통폐합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19 6.29선언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89 초원복집사건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3 3당 합당
http://cafe.daum.net/cultureSpice/Hvz3/325 문민정부
http://cafe.daum.net/cultureSpice/FarC/60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http://cafe.daum.net/cultureSpice/LnIy/107 IMF 외환위기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1988년)
1998년 11월 한일어업협정이 체결
경제위기 극복
IMF 위기 극복
부동산 투기
IT·벤처기업 육성
신용카드 활성화
국민의 정부의 대북포용정책, ‘햇볕정책’
베이징회담 (1998년)
국회 환란특위 국정조사결과 보고서(1999. 2, 12)
출처 : 연합뉴스
김대중 (金大中, 약칭 DJ, 1924년 ~ 2009년 8월 18일)
김대중(金大中)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하의도에서 태어나 제5대 민의원과 제6·7·8·13·14대 국회의원(5선)을 지냈으며 군사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국내외에서 오랫동안 민주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했다. 김대중은 군사 정권으로부터 납치, 가택연금, 투옥, 망명 등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했다. 대내외적으로는 민주화와 의회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기도 했다. 인권 향상과 남북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5대 대선을 위해 박태준, 김종필 등과 단일화한 것, 13대 대선을 위해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한 것, 15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한 의원들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것 등으로 민주 세력 간의 분당과 갈등, 선거 패배 등을 빚은 것으로 재야 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號)는 후광(後廣)이다. 김대중은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야생화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며 그렇게 불렸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대한민국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증서를 받았다.
출생과 가계
학창 시절
청년사업가 시절
해방과 한국 전쟁 전후
195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과 야당 지도자
국회의원 활동
제 7대 대선 출마
진산파동과 당권장악 실패
1차 미국 망명과 한민통 조직
김대중 납치사건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유신 붕괴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2차 미국 망명
불굴의 대권 도전
대선 불출마 선언과 번복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FDL-AP, 통칭 아태재단)를 설립
연이은 대권 도전 실패와 정계 은퇴
정계 복귀와 네번째 대선 출마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정권교체
김영삼 정부 말년에 IMF 외환위기(1997년)로 인해 사상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국민의 정부는 출범 초기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분야 개혁 단행, 신자유주의 기조의 경제 정책을 세워 경제 재건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 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당선된 직후부터 차기 국민의 정부를 작고 효율적인 정부로 만들어 나갈 것임을 대외에 천명한 바 있었다. 내무부, 공보처 폐지, 안기부, 검찰, 경찰의 기능을 재조정, 통상대표부 설치, 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처를 흡수, 그밖에 여성부 신설,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개명,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 '정보는 국력이다'로 등 대대적인 행정 개혁에 착수했다.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도 정부 출범 직후부터 추진되었다. 1998년 6월 북한과 금강산 관광, 개발 사업에 합의, 단독 사업자로 선정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경유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경제협력에 대해 회의를 벌였다. 11월 첫 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가 출항, 1999년 대북 사업을 위해 현대아산 설립, 평양 체육관 건설하는 등 대북 협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1999년 5월 홍콩의 시사주간 아시아위크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올랐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이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골자의 통일 방향에 합의한 6·15 남북 공동선언 발표, 개성공단 설립에 합의한다. 그리고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의 관계를 진전시키고, 독재 정권 시절 한국의 인권에 헌신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0년 2월 8일 일본 TBS 지쿠시 데쓰야 NEWS23 특별 회견 "김정일 총비서는 지도자로서의 판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라는 발언으로 한나라당에게 색깔론 공세를 받게된다. 여기에 대북 불법 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햇볕정책은 본격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인 2000년 6월 12일 5억 달러를 현대그룹을 통해 북한에 송금한 이 사건은, 2003년 특검으로 현대상선, 현대전자, 현대건설 등이 5억 달러의 비밀 자금을 마련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특검 도중인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자살 파문이 일었다. 여기에 측근인 박지원은 SK등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 및 대북 불법 송금 혐의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으며 특검은 종결되었다. 한편, 퇴임 후 2004년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북한에 1억 달러를 지원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라고 대북 불법 송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등 두차례 도발을 감행했으며 2003년엔 미국과의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시 핵실험을 강행선언으로 제2차 북핵 위기가 왔다.
국정원 불법 도청 파문
국정원은 야권인사 및 반정부인사들을 상대로 휴대전화 상시도청을 했으며, 일부 여권인사도 포함되었다. 2002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국정원 도청문건을 제시하며 문제를 제기하였고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내 검찰 수사결과 2006년 불법 도청을 지시한 당시 국정원장 임동원, 신건 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측근 비리
김대중의 아들인 김홍업은 1998년 한국전력 석탄 납품과 관련해 최재승 의원의 주선 하에 석탄 수입업자 구씨의 청탁 요구를 받고 3억원의 금품을 수수했다 돌려준 혐의로 2004년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3남 김홍걸은 2000년, 최규선과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및 각종 이권에 개입해 금품을 수수한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되 파문이 일었다. 2002년 최규선의 운전기사 폭로로 수사결과 11월 김홍걸은 징역 1년 6월의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고 대국민 사과 성명까지 발표하게 되었다.
2003년 2월 24일, 김대중은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참여 정부 시절
퇴임 직후인 2003년에는 동교동 사저 옆에 김대중 도서관을 개관, 2004년 1월 29일, 재심을 청구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에서 무죄 선고, 3월에는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 당하자 ‘심각한 사태’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위기국면 극복을 위한 노력을 주문하였다. OECD와 노벨 위원회, WHO에서 연설을 했다. 8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에게 박정희 시절의 정치탄압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대해 박 대표의 사과에 “마음 속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정상회의》에 참석해 “북핵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하고 핵문제에 있어서 이중잣대는 안된다는 점 등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모두 반영된 최종 선언문이 채택됐다”
새천년민주당이 2004년을 기점으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하였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에 입당한다. 오히려 그는 열린우리당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인정하였으며 그를 지지하던 많은 세력은 민주당을 떠나 열린우리당으로 둥지를 옮긴다.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뀐 뒤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을 지지하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 10월,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00억 원대 CD를 비자금 의혹제기 이에 대해 “자금 추적 결과 김 전 대통령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2009년 6월,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에 특별강연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독재자’에 비유하며 비판하였다.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을 동시에 비판했다.
2009년 8월, 김대중의 비서관인 최경환은 DJ의 비자금 조성과 재산 해외 도피 의혹을 제기한 중앙일보의 《문창극 칼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예와 인격을 훼손했다”면서 유감을 표명 ‘허위보도 확인 사례’를 조목조목 밝혔다.
2009년 8월 18일,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은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로 얼어붙은 북미관계를 풀기 위해 오바마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 방문을 결심했다” 사후, 여기자 억류사건 으로 방북한, 클린턴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을 평생의 친구로 생각할 것”이다.
2009년 9월 23일, 미국의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2009년 12월 19일, 뉴스위크 ‘올해 세상을 떠났지만 잊혀지지 않을 저명인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포함
'6ㆍ15와 9ㆍ19로 돌아가라'
'민주당과 야당, 시민세력은 단결하고 연합하라'
'이명박 정부는 불행한 길을 걷지 말라'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
한·미·일 지식인 110명의 평화선언
2009년 8월 2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미국·일본의 지식인들이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를 촉구하는 3개국 지식인 110명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제안한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 교수는 “성명서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당시 북한의 로켓 발사와 유엔 제재 등 악순환이 이어지자 3국의 지식인들에게 공동선언을 제안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을 벌인 후 꾸준히 한반도 평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대표적인 지한파다.
2009년 8월 18일 오후 1시 43분 노환으로 86세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국장, 여의도 국회광장,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 6일장으로 결정,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김대중이 지도자로서의 특별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통합의 가치를 중시하고 몸소 실천했다는 점이 있라고 평가했다. 스스로 가장 큰 정치적 피해자요 희생자이면서도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 솔선수범했으며, 반세기 동안 갈등과 대립의 구도를 풀지 못한 남북관계의 물꼬를 틀어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각계의 애도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의 ‘김대중 선배님 전상서’‘김대중 형님께’
2009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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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지도자로서의 자질
노무현은 1994년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 그가 김구와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당초 계획보다 조기에 극복했다는 평가가 있다.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 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 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APEC이나 ASEM처럼 국제회의에서도 그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고,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다
인권신장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증진하였다.
경제위기 극복 등 경제적 업적
역대 정권 중에서 김대중 정권 때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 많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국란이라는 외환위기 직후 취임했지만, 대외 지급능력을 의미하는 외환보유액 확충과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선전했다. 그러나 경제가 파탄 난 외환위기 직후에 출범했기 때문에 경제성장률과 고용 측면에서는 높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성장 기조 탈피 등 미완의 과제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적인 재앙인 외환위기를 극복한 점만으로도 김대중 정권이 경제 측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단연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외환위기를 조기 극복했다는 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정보기술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규모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우리나라는 IMF에서 빌린 차입금 195억 달러를 3년8개월 만에 말끔히 갚을 수 있었다. 매일경제 신문이 2012년 5월, 정부별로 집권기간 중 `경제업적지수` 평균을 분석한 결과 김대중 정부는 82점, 노무현 정부는 68.9, 이명박 정부는 44.1을 기록했다.
세계 4대 외환보유국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전환
‘IMF 모범생’
‘설득의 리더십’
“DJ 정권은 최초의 개혁정권”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을 통해 소외계층, 서민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데 주력했다”
‘경제고비마다 직접 뛴 DJ’
뛰어난 환란극복 리더십
국민과의 대화
코드 상관 없이 구성하여 개혁 추진
문화 발전
서태지의 음악성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수’
당시 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
한류 특히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단행
용서
“물러난 대통령은 모두 부정적인 평가만 받아 왔지만 공적은 평가해야 한다”
지역 화해 의지로 박정희를 끌어안음으로써 영ㆍ호남 화해를 모색
2009년 8월 14일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우리 전직들이 제일 행복했어요. ….”
외국의 긍정적 평가
“DJ는 주변 4강과 모두 친하면서 대북관계를 개선하는, 한국에 꼭 필요하나 실현하긴 힘든 난제를 풀어낸 전무후무한 지도자”
“한국이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위대한 비전, 위대한 상상력”
“김 대통령은 메이크업이 필요 없는 논픽션 드라마의 인생을 살아왔다”
“이름 석자만 갖고도 국제사회에 영향을줄 수 브랜드”
“김 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
“세계에서 단임 5년에 지금처럼 많은 변화를 이뤄낸 대통령은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5년 사이에 한국 경제를 V자 회복 시킨 김 대통령은 희대의 명대통령”
블룸버그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
조지프 바이든 미국 부통령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를 김대중을 꼽았다.
호콘 망누스 노르웨이 황태자는 “김 전 대통령이야말로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그 자체를 살아오신 분”
“그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이며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인물이다”
“친구를 넘어 인류애를 갖춘 인격자”
노벨 평화상 수상은 이에 대한 국제적 인정의 증표
“유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비교될 만한 인물은 하벨과 바웬사 정도일 것”
2009년 9월 미국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
2011년 위키리크스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정치적 인물로, 외교 정책의 모든 측면에서 능숙했다"
부정적 평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 후보 단일화 실패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망쳐 17년만에 처음으로 직선제 개헌이 실시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대북정책과 햇볕정책 대한 비판
햇볕정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또한 북측에 5억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현대의 대북 7대 사업권 구입을 위한 송금액 중 일부가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밝혀져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 6월 29일 발발한 제2연평 해전 시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제2연평해전을 ‘잊혀진 전쟁’으로 부르며 당시 김대중 정권의에 대한 처우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늦장 대응, 국군수도병원에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만 방문, 합동영결식에 정부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선 당시 남북관계의 원만한 유지를 위해서 였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일어업협정에 대한 비판
김영삼 정권이 1995년 11월 장쩌민 중국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으로 일본이 보복으로 일방적으로 파기했다는 것이다. 결국 1997년 김영삼 정부는 동해의 독도를 포함한 수역에 잠정조치수역을 설정하는 안에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1998년 1월 IMF 사태와 정권교체로 인해 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완전히 파기한다. 1998년 1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 직후 일본은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여 김대중정부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김대중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 25일 타결짓게 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인해 발생된 한일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중간수역내에 독도가 포함, 이 협정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논리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하여 일본측 주장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중간수역은 일종의 ‘분쟁수역’이다.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하다”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다”고 답변하였다.
임기 중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비판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의 연정을 통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이은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에 의원 3명(배기선, 송석찬, 송영진)을 입당시켜 끝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른바 ‘의원 꿔주기’를 통해 원내과반수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의회 민주주의의 왜곡”, “정치후퇴” 라는 비판을 받았다. 집권기간 중 차남 김홍업과 3남 김홍걸 ‘최규선 게이트’이 뇌물수수죄로 구속되어 청렴성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비판도 있다.
임기 중 IMF사태 처리과정에 대한 비판
1998년 취임초기 IMF의 명령이라며 구조조정을 벌려 미친듯이 대량해직을 벌린 것에 대한 비판도 크다. 1997년 12월 실업률은 3.1%, 서울지역 노숙자는 5백여명에 불과했으나, 1998년 긴축정책과 대량해직을 벌이자 실업률은 1998년 7%로 폭등, 가정 파탄과 결식아동 전락했다.
1998년 6월 5개 은행 퇴출, 공무원 5만명 감축계획을 발표, 실업률은 99년 10%, IT 코스닥붐으로 5%대 감소하였으나, 실업문제는 김대중 시절 한국경제를 괴롭히던 문제였다. 공적자금이 투입으로 하나은행, 국민은행등 대형 은행이 생존, 나머지는 미국계 금융기관등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이 결과 이들은 고차익을 남기고 다른 외국계 은행에 되팔아 미국자본의 종속화를 심화, 일부 대형은행만 살아남고 지방 중소형 은행들(강원은행 충청은행 경기은행)에는 강제해체 명령을 내려 지방경제를 파탄, 대형은행들만 살리는 과정에서 외국 투기세력들의 배를 불려줘 "은행권 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논란의 정점에는 98년 제일은행의 뉴브리지캐피탈 매각 건, 1999년 뉴브리지캐피탈은 구입하여 이를 2004년에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되팔아 1조 5000억의 차익을 남기게 된다.
국내 경기 증진을 위해 의욕적으로 실시한 정책으로는 코스닥과 벤처산업육성 정책과 신용카드 발급 기준 완화로 대표되는 소비 증진 정책이 있는데, 벤처산업 육성 정책의 경우 신성장동력을 키운다는 명분하에 무차별적인 기업 지원 정책 남발 및 1995년 이래로 확산된 미국의 닷컴 버블과 맞물리며 벤처기업에 과도하게 투자금이 몰려 과열 양상을 띄게 된다. 벤처 기업과 연루된 정경유착 비리도 발생했다. 윤태식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가 대표적인 사건으로 신성장동력을 찾는다는 당초 명분과 크게 동떨어진 양상을 보이던 벤처업계는 결국 2003년 새롬기술 사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일련의 사태들로 인해 IT기업들이 주류를 이뤘던 벤처기업들은 시장의 신뢰를 상실하고 활로가 막혀 결과적으로 국내 IT산업을 파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코스닥의 2000년 하반기 IT붕괴사태가 시작되자 주식시장과 코스닥은 거의 파괴되었고 그 이후에도 코스닥은 2001년에 50포인트선을 밑돌게 된다. 투자자들은 2000년 하반기의 IT붕괴사태와 "진승현 게이트" 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소비 증진 정책의 핵심이 되었던 신용카드 발급기준 완화 정책은 1999년 2월 카드사의 현금대출 비중 50% 제한을 폐지하고 5월엔 신용카드의 현금 서비스 한도인 70만원을 전격적으로 폐지하면서 실시되었다. 2001년엔 카드사의 영업자유권 침해를 들어 길거리 회원모집을 허용하는 등 신용카드 발급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내수 경기 진작을 도모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대거 신용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신용불량자가 속출했고 카드사의 재정상황도 악화, LG카드 부도 위기 등 카드 대란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결국 2003년에 카드사 현금대출 비중을 50%로 제한하는 등의 규제 정책을 실시하여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시민들의 가정들이 파탄난 뒤의 일이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 못한다는 비판과 1999년 12월, 중국 진시황과 오다 노부나가를 "성공한 지도자"라고 칭송해 논란이 일었다.
지역감정 조장 논란
한국의 지역감정은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으나 김대중과 박정희가 전략적으로 사용해왔다는 주장으로 있다. 1969년 신민당과 3선 개헌 반대 범투위 소속으로 유세에 참여한 김대중의 경상도 정권 타도 발언,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를 깨고 통일민주당 탈당, 평화민주당 창당한 것도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이 있다. 반면, 지역감정의 원인은 야당 내 김영삼과 김대중 간의 파벌다툼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국회의 정쟁과 파쟁을 김영삼, 김대중의 대리전 내지는 유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후보의 출신지가 호남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지역 감정을 부추겼다고 한다. 또한, 1992년 대선을 앞둔 12월 11일 부산 초원 복집 사건에서도 이용하였다.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
2005년 4월 19일, SBS의 ‘뉴스추적’은 김대중의 ‘숨겨진 딸’와 2001년 ‘진승현 게이트’ 관련 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자의 아랫도리 부분은 말하지마’했다. 2006년 4월 16일, 김대중의 숨겨진 딸로 알려진 김모씨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김대중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부인했다. 또한, 모녀에 대한 도청은 임 전 원장에게 로 보고했다.
비자금 의혹
1995년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에 대하여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강삼재 등은 ‘20억+알파’를 밝히라고 요구은 부인했다.
성씨에 대한 논란
노벨상 로비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비서였던 최규선이 노벨상 수상을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이 뉴스위크 한국판에 보도되면서 ‘노벨상 로비설’이 제기되었다. 당시 국정원장을 지냈던 이종찬도 노벨상 수상 자체를 도우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의은 김대중 측이 아닌 오히려 김대중의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으며, 반대자들의 편지가 왔다. “노벨상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살 수 없다”고 로비설을 일축했다.
김기삼의 노벨상 로비설 의혹제기
병역 논란
1997년 대선 TV 토론회에서 출연하여,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을 맡아 참전했다고 직접 해명했다.
교통사고 관련 의혹
김대중은 총선 직전인 1971년 5월,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를 위해 서울로 가던 도중 전남 무안군 국도에서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그 후로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당시의 이 교통사고에 대해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담당검사인 허경만은 1999년엔 전남도지사에 취임하였다.
사제폭발물 사건 관련 의혹
1971년 1월 27일 김대중의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폭발물 잔해를 분석한 결과 완구용 딱총 화약을 담배갑 은박지로 싸서 도화선을 연결해 제작한 사제 폭발물로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경찰은 김대중의 조카인 당시 15세의 김홍준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총포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당시 신민당 측은 정일형 선거대책본부장 집 화재사건과 김상현 의원 집에 협박편지 배달된 사건과 더불어 명백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테러로 주장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390709&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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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okps.or.kr/profile_result_ok.asp?num=775
http://15cwd.pa.go.kr/korean/index.php
http://www.kdjcenter.or.kr/kor/
http://cafe.daum.net/indongcho1
김종필 (金鍾泌, 약칭 JP, 1926년 1월 7일 ~ )
박태준(朴泰俊, 1927년 ~ 2011년 12월 13일)
정주영(鄭周永, 1915년 11월 25일~2001년 3월 21일)
노무현(盧武鉉, 1946년 ~ 2009년 5월 23일)
김영삼 (金泳三, 약칭 YS, 1927년 12월 20일 ~ )
2부 끝
1.
김대중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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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대중 생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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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대중 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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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햇볕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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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관련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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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02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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